요약 초대교회사

요약 초대교회사(13) 초대교회 신앙의 인물들

요약 초대교회사(13) 초대교회 신앙의 인물들

   어거스틴의 은총론 vs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Works vs. Grace: Pelagius vs. Augustine), Carle Van Loo (1705-1765) Saint Augustin confond les évêques donatistes à Carthage/ Saint Augustine defeats the Donatist Bishops at Carthage 1753 La Basilique de Notre-Dame des Victoires, Paris

1. 초대교회 신앙의 탁월한 인물들

“거듭 되풀이하거니와 신앙의 일에 있어서 감독들이 기독교 황제들을 판단하는 것이 관례였고 황제들이 감독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 Ambrosius

(Ambrose, 340-397)

(1) 탁월한 행정가 암브로스  

암브로스(Aurelius Ambrosius or Ambrose, 340-397)는 프랑스 고울의 수도 트레베에서 약 340년에 출생했다. 그는 34살의 나이에 감독의 직을 맡아 충실하게 그 직을 감당했다. 그는 일개 감독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개혁을 했다. 그 후 그가 세상을 떠난 397년까지 암브로스는 서구사회에 교권을 강화시켜 놓는데 탁월한 행정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감독직에 오른 후 그가 먼저 한 일은 부유했던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바친 일이다. 탁월한 행정가였던 암브로스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감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성경과 신학연구 그리고 설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금욕적인 삶과 개방된 삶과 사역 그리고 꾸준한 연구는 세속정치에서 차지한 그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다.

전투적 로마 가톨릭교회 입장에 확고히 서 있었던 암브로스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자들에게는 한 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또 암브로스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 위에 국가를 위에 올려놓았다. 즉 평신도인 황제(皇帝)도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감독 아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암브로스 감독과 황제가 직면한 하나의 사건은 데살로니가 학살 사건이었다.

이 일 이후로 암브로스와 황제와의 대결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암브로스는 회개할 것을 촉구했으나 황제는 감독의 회개 요청을 묵살했다. 하지만 암브로스는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오는 황제의 출입을 막고 회개를 촉구했다. 몇 달 동안 황제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결국 공중(公衆)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참회한 후에야 황제는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Saint Jerome, 347-420)

(2) 성경 번역의 선구자 제롬  

제롬(Saint Jerome, 347-420)은 성경 번역과 함께 서방 수도원(修道院) 제도를 도입함으로 서방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롬의 넓은 식견과 빼어난 언어적 은사는 그로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빼어난 성경 번역가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도록 했다.

오리겐(Origen, 184-253)과 제롬과의 관계는 제롬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이다. 오리겐을 상당히 존경했던 제롬은 오리겐이 성경연구 방법을 차용(借用)했다. 특별히 오리겐에 대한 존경이 대단했던 초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제롬은 오리겐의 정통주의적 생애를 언제나 선망하였으나 오리겐의 신학 사변에 대해서는 학자적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오리겐의 주석에 대한 존경은 여전했으나 그의 신학적 사명에 회의를 느낀 제롬은 오리겐에 대한 정죄에 재빨리 가담했다.

제롬의 풍자와 격렬한 논박은 오히려 인격의 약점이었다. 편협한 마음, 불공정, 허영심, 그의 박학다식(博學多識)에 흠을 낸 주의성 등이 그것이다. 제롬의 학적 감식력이 존경받다 보니 그의 통렬했던 개성은 간과되었다. 그러나 상당한 인격적 결함에도 그가 성경 번역, 주석, 기타 학적 저술을 통해 서방 기독교계에 큰 공헌한 것만은 사실이다.

(John Chrysostom, 350-407)

(3) 황금의 입 크리소스톰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설교자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50-407)은 350년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대교회가 낳은 가장 명설교가 이자 성경 강해자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직설적이고 강렬하며 단순한 것이 특징이며 교리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다. 또 진정한 설교자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말과 행동으로 균형 있게 보여주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을 가진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당대의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자신의 곧은 성품과 직설적인 외침 때문에 황실의 미움을 사 오늘날 터키의 북동쪽에서 고독한 유배(流配) 생활하다 외로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메시지는 그의 삶과 함께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될 것이다.

(Augustine of Hippo, 354-430)

2. 어거스틴의 생애

“두 나라(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서로 섞여 있는 동안은 우리는 또한 바벨론(세상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도 봉사해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바벨론에서도 자유와 해방을 이미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잠시 바베론과 함께 순례하여야 한다.” – Augustine

역사, 신학, 철학, 문화 등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거스틴은 ‘고대철학과 기독교 종합’을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1) 어거스틴 성장 배경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354년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방 타가스테에서 아버지 패트릭(Patrick)과 어머니 모니카(Monica)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17살 되던 해에 카르타고(Carthage)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당시의 일반적인 풍조대로 한 여인과 깊은 육체적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때부터 그의 끝 없는 방탕 생활이 시작되었고 얼마 후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의 선물)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방탕한 생활 이면에는 진리에 대한 열망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철학적 사유를 일깨운 것은 버질(Publius Vergilius Maro or Virgil, BC 70-19)과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의 작품이었다.

373년 19살이 되던 해 있었던 이들 작품을 통해 알게 된 진리에 대한 체험은 어거스틴에게 두 번째 도약이었다. “오 진리여, 진리여 그 시간 이후로 내가 얼마나 불타는 마음으로 그대를 사모했던가?”라고 어거스틴 자신이 고백하듯이 부와 명성에 대한 그의 욕구가 이 책으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2) 어거스틴 사상적 배경    

① 마니교

고백록(告白錄)에서 마니교(Manichaeism), 플라톤주의, 기독교 이렇게 세 단계 개인적 확신을 회고했는데 이것들은 그의 성숙한 사고에 두드러진 요소로 부각 되었다. 373년 19세의 어거스틴은 동방에서 기원 된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마니교는 오랫동안 기독교를 압박하던 종교 중의 하나로 당대 진실한 ‘과학적 신학 체계’를 대표했던 이 철학 체계는 특별히 이념적인 면에서 젊은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원인은 ‘악(惡)의 기원(起源)’ 문제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가 악의 기원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았다. “만일 하나님이 선(善)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던 악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니교는 하나님과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악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다. 악(惡)은 하나님과의 병존(竝存)하는 본래(本來)의 원리로서 하나님의 지배를 제한하는 독립적인 권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에 맞서서 싸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신(神)과 악한 신(神)과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 한다.

그들 구원관 역시 영지주의 이원론과 비슷한데 구원이란 인간 안에 있는 빛이라 부르는 영적인 것과 암흑이라 부르는 물질의 두 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分離)시켜 영혼이 순수한 빛 혹은 광명의 영역으로 다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19살부터 29살까지 10년 동안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마니교의 진리 체계가 이론적이고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면서도 실존적이었고, 둘째, 악한 원리에 의하여 사로잡힌 선의 요소들을 악한 원리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마니교의 구원체계가 참된 구속의 진리이며, 셋째, 진리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 속에 존재한다는 마리교의 교리가 가장 설득력 있는 세계관이라고 그가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이렇게 믿었던 마니교를 떠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천문학(天文學)과 플라톤사상(Platonism)이다.

  ② 신플라톤주의(Platonism)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청산한 것은 29살 때다. 마니교를 떠난 후 어거스틴은 아카데미의 회의주의(懷疑主義)에 한동안 매력을 느꼈다. 회의주의에 빠진 어거스틴은 당시 널리 읽히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원조 플로티누스(Plotinus, 203-270)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이원론과 아카데미의 회의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영적 실재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플라톤주의 신관(神觀)은 마니교의 신관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을 절대적이시고 불변의 선(善)으로 모든 변화를 초월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근원으로 인식했다. 또 악(惡)은 결코 독자적인 원리가 아니며 악이 선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단지 궁극적 존재로부터 멀리 벗어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악(惡)은 하나의 부정적인 성질이며 실제(實際)로 존재할 수 없는 선(善)의 결핍(缺乏)을 의미한다. 마침내 이렇게 어거스틴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서이다.

  ③ 어거스틴의 회심(悔心)

그를 기독교로 전향케 한 것은 밀라노(Milan)의 한 정원에서 읽던 로마서 13:13,14 말씀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현대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가 어거스틴의 신학이 ‘계시 신학’이며 그 계시 신학은 기독교 회심을 통해서 발현되었다고 지적하듯이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노리가르(Norregaard)와 홀(Holl)과 같은 전통주의자들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비록 어거스틴의 사상에는 플라톤적 구조가 나타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어거스틴의 회심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 사상, 신앙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이 회심 이전에 신플라톤주의를 일차적 원리로 삼았으나 회심 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일차적 원리로 신플라톤주의를 이차적 원리로 삼았다. 후에 어거스틴은 진정한 진리 탐구와 종교적 삶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앞에 헌신한 후에 생겨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386년 기독교로 다시 귀의(歸依)하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수년 후 어거스틴은 히포(Hippo) 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그 뒤 395년 같은 도시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430년 어거스틴은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임종했다.

3. 어거스틴의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어거스틴의 사상은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bsurdum)고 한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의 견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인간의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인식론, Epistemology, 위 그림 참조) 어거스틴의 노력은 387년 세례 직후 저술한 ‘독백’ (Soliloquia), 394년 ‘참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 395년 6월 완성한 ‘자유의지론’(De Libero Aritrio), 416년 완성한 그의 거작(巨作) ‘삼위일체론’(De Trinttat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성(理性)이 영원한 것 직관(直觀)하는데 필수적일 만큼 중요하나 영원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성보다 탁월하고 영원한 존재가 무엇인가? 그것이 궁극적인 인식 대상인 진리(眞理) 자체이며 그 진리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어거스틴은 이 진리가 바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 곧 자신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인식했다.

신앙(信仰)과 이성(理性)을 조화시키려는 어거스틴의 이러한 노력은 ‘삼위일체론’에서도 나타난다. 즉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며 그 후 그 믿음을 밝히는데 우리의 이성(理性)이 중요한 도구(道具)로 쓰임 받는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영원성(永遠性), 동등성(同等性), 통일성(統一性)을 깨닫기 위해 먼저 믿어야 한다. 진리 탐구(探求)라는 것이 깨달았을 때 계속 탐구할 수 있기에 진리를 이해하게 하는 이성(理性)은 필수이다.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라는 그의 원리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가 ‘삼위일체론’을 끝맺으면서 “나는 내가 믿은 것을 나의 지성으로 보기 위해 많이 희구(希求)해 왔다.”라고 고백한 것도 그의 인식론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看過)해서 안 될 것은 어거스틴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거스틴의 일차적인 관심을 실천적(實踐的)인데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관심은 실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2) 어거스틴의 교회관(敎會觀)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도나티스트(Donatist)와의 논쟁을 통해서 정립되었다. 404년 어거스틴이 주도하여 열린 제9차 칼타고회의(Council fo Carthage)에서는 호노리우스(Honorius, 384-423) 황제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도나투스파의 난폭한 행위에 대해 벌금(罰金)을 부과하는 한편 이들의 교회당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411년 칼타고회의 이후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深化)되어갔다. 진실로 거룩한 자들만이 정당하고 효력 있는 세례(洗禮)를 베풀 수 있으며 그러므로 도나투스파에 의한 세례 이외는 무효하다는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심지어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도 교회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면 베푸는 자의 거룩성에 상관없이 세례를 효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례의 최고 집례 자이며 따라서 만일 합당치 않는 사람이 집례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여전히 참된 성례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나투스파의 재세례(Anabaptism)를 철저히 반박했다. 교회관은 키프리안(Cyprian, 210-258)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례관은 로마의 전통을 따르던 어거스틴은 이 둘의 전통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을 그리고 교회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순수성을 주장했던 키프리안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수용했다. 한편으로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한 키프리안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순수성이 보편적인 교회에만 속했다는 키프리안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거부했다. 어거스틴이 볼 때 교회의 순수성은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노바티안(Novatians)과 어거스틴 당대의 도나투스파에도 있었다.

교회의 하나님도 사랑을 전제로 한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교회 통일성의 기초이며 ‘하나님’과 ‘사랑’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신앙의 일치를 외치면서 사랑이 결여(缺如)됐다면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떠난 것이며 따라서 그런 교회는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3) 어거스틴의 인간 이해

동방(東方)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던 같은 시기에 서방(西方)에서는 ‘인간의 의지(意志)’와 ‘하나님의 은총(恩寵)’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형적인 서방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이다. 어거스틴은 적수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와의 논쟁을 통해 그의 ‘은총론’(恩寵論)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① 펠라기우스의 신학 사상

영국 아일랜드 수도사 출신이었던 펠라기우스는 400년에 로마로 와서 7,8년 머물며 활동했다. 그즈음 펠라기우스는 두 가지 사건을 만난다. 하나는 인간의 책임을 약화(弱化)시키고 하나님의 은총을 역설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충격을 받은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과 입장이 같은 코엘레스티우스(Caelestius)를 만난 것이다. 이때부터 펠라기우스는 공개적으로 어거스틴 사상과 대립이 되는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펠리기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모든 죄를 인간의 본성에 돌리는데 분개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은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조건이다. 그리고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지 않으며 모든 계명(誡命)은 인간이 행할 수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응(報應)하시며 인간의 공로에 따라 심판(審判)하신다.    

계명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은 인간의 의지(意志)로 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 계명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펠라기우스는 이것을 가능성(可能性, posse), 의지(意志, velle), 실천(實踐, esse)이라는 세 가지로 구별하여 순서를 나누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原罪)를 부인하고 선(善)과 악(惡)이 선천적(先天的)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後天的)이라고 보았으며 우리의 행위에 따라 선악(善惡)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국한되며 전 인류에게 전가(轉嫁) 될 수 없다. 적어도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한다. 따라서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협력(協力) 작품이다.

그리고 인간은 완전 성숙 상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악을 행할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유아(乳兒)는 죄 없는 무죄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타락 이전 아담의 상태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원죄가 없고 다만 선행과 악행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이 져야 한다.

410년 고트족에 의하여 로마가 멸망 당한 후에 펠라기우스는 411년 북아프리카 칼타고로 가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그곳에서 어거스틴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다음 해인 412년 칼타고에서 회의가 열려 펠라기우스의 제자 콜엘레스티우스를 정죄했다. 그가 정죄(定罪)당한 이유는 이렇다.    

  •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전 인류에 미치지는 않는다.
  • 복음과 마찬가지로 율법도 인간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도 죄 없는 인간이 있었다.
  • 새로 태어난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에 있다.
  •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이 죽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맘아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도 영생을 소유한다.
  • 세례를 받은 부자라도 자기의 전 재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행에 의해서도 공로를 얻지 못하며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② 어거스틴의 은총론 vs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펠라기우스의 이 같은 선행을 통한 공로 사상은 어거스틴의 믿음을 통한 은총론과 정면 대립(對立) 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펠라기우스 인간론이 자유의지론에서 출발했다면 어거스틴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불가항력적 은총론에서 출발했다. 어거스틴의 자유 이해 역시 그의 은총론에 기초한다. 인간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아담의 원죄를 전가 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완악함으로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제할 때만이 가치 있다. 어거스틴에게 은총 없는 율법은 의미가 없으며 은총 없는 율법은 성취될 수도 없다. 이런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집약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 사랑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해 먼저 믿도록 명령을 받는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듯이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가 거부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불가항력적 은혜다.    

이같이 하나님의 절대주권(絕對主權)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자연히 예정론(豫定論)을 따른다. 어거스틴은 예정(선택) 받은 자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예정 자체가 그 기원(起源)이 신적이라면 그것은 불변적(不變的)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거역(拒逆)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선물이듯이 예정 역시 불가항력적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領域)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중예정(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과 성도의 견인(堅忍)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종교개혁자들 시대에 와서 어거스틴의 이 은총론이 재확인되었다. 또 어거스틴의 역사관 역시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정통적인 기독교 사관으로 정착되었다.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생명을 상실할 때 교회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흩으시고 개혁하셨다. 한편으로 로마의 멸망은 문화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로마 멸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문화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로마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계시면서 또 역사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 편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로마 제국의 주변의 수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도성’(都城)과 ‘인간의 도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결국 어거스틴이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이해는 창조 이후 인간의 역사가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시한 역사이해 즉 목적론적이며 직선적(直線的) 역사관은 당대까지 지배해온 헬라의 순환적(循環的) 역사이해를 넘어 성경적 견해를 따라 역사에는 ‘처음과 절정’이 있으며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 속에서 ‘한 목적’(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역사란 한 편의로 개인의 실존(實存) 속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실존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개인의 실존 속에서 또 그 실존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도 각 개인이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를 형성하여 가는 역사의 주체자들이라는 인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하나님 문화변혁의 동참자인 인간이 문화 명령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적극적인 문화적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攝理)와 ‘인간의 자율성’(自律性)을 동시에 긍정하는 어거스틴의 독특한 역사해석은 마치 이성(理性)과 신앙(信仰)의 조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어울리는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어거스틴이야 말로 최초의 역사철학자 혹은 역사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의 도성이 쇠잔해 간다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독립적인 역사철학의 한계를 설정하여 기독교 역사철학이란 결국 역사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 소아시아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 라틴 신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의 물줄기가 어거스틴에 와서 하나로 종합되어 서양의 중세와 근대의 사상적 맥을 형성했다.

중세 사상과 종교개혁도 어거스틴이 없었다면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존주의, 역사신학, 역사철학, 개인주의, 역사관, 문화관 그리고 그 외 수많은 현대사조도 사상적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결국에는 어거스틴에게 귀착(歸着) 된다.그렇게 그의 사상이 설득력 있고 영향력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전통과 라틴 신학의 전통을 대립적인 구조(構造)로 이해하지 않고 이 둘을 하나로 종합시켜 두 개의 상이(相異)한 전통을 하나의 전통으로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