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2) 초대교회의 배경

제2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갈 4:4)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라는 말로 당시의 역사적 성숙을 표현하고 있다.
초대 교회사가 에버릿 퍼거슨(Everett Ferguson)도 갈라디아서의 ‘때가 차매’(But when the fullness of the time)라는 말을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보았으나 외형적인 환경에서만 그 요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당시의 로마를 통한 정치적인 평화를 말한다.
둘째, 세계적 공용어 헬라어의 언어적인 준비를 지적하고 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지만 언어적으로는 헬라어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다. 헬라어는 의사소통, 사상, 사고방식, 교육수준, 이해 방식의 통일을 촉진시켰으며 또한 헬라 철학, 문학 그리고 종교의 확산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때가 차매’라는 바울의 말은 내적인 시간과 외적인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히스토리에(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 사건과 행위, 외면적 차원과 내면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다. 또 바울이 말하는바 ‘때가 찼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물리적 양적 시간 개념에서 말하는 크로노스(chronos)라는 외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시(定時, the right time)를 의미하는 질적인 시간 카이로스(kairos)라는 내적인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오심은 완벽하게 준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측면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오셨다는 사실이다.
1. 그리스-로마(Greco-Roman) 배경
초대 기독교의 그리스-로마(그레꼬로망, Greco-Roman) 배경에 대한 연구는 주전 330년부터 주후 330년 기간을 대상으로 한다. 이 기간은 헬라시대(the Hellenistic Age)로 이 헬라시대는 다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 알렉산더부터 주전 약 200년까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고 팽창하여 지중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시대이다.
제2기, 주전 200년 후부터는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 그리고 아시아에 토착문화가 발흥하면서 헬라적인 요소들이 움츠려들기 시작하던 시대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63-14AD) 로마 황제부터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 272-337)까지는 로마가 지중해를 완전 지배하면서 영향을 미쳤던 시대로 이 시대를 로마시대(the Roman Age)라고 부른다. 이시기의 제1기는 주후 2세기까지를 말하며 2세기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4세기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를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영향력은 주후 2세기에 최고 정점에 달하다가 2세기 이후 바바리안 족(Barbarians)이 침입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 로마 제국의 배경
로마제국은 긴 역사를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誕生) 때 로마는 이미 약 7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서부 이탈리아 출발한 로마는 읍, 도시 그리고 작은 국가로 점차 성장했다. 주전 256년 로마가 설립 된지 50년 후에 전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후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뻗어나가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실리(Sicily), 코르시카(corsica), 사르디니아(Sardinia), 칼타고(Carthage)와 스페인(Spain)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주전 27년까지 모든 로마 영토는 공화국이라 알려진 통치형태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매우 강력했던 로마 시(市) 의회는 어떤 한 개인이 통치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주전 27년에 즉 약 100년 동안 지속된 비참한 내란(civil war) 후 로마의 전권은 쥴리어스 시이저(Jules César, BC 100-BC44)의 조카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 Augustus, BC63-AD14)의 수중에 들어갔다.
옥타비우스는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Augustus)이며 가장 위대한 아우구스투스 시저(Caesar Augustus)로 알려졌다. 이 아우그스투스 시저가 바로 누가복음 2:1에 기록된 시이저이다. 그와 함께 공화국(共和國, 다수가 국가권력을 분산 다스리는 국가)도 끝이 나고 제국(帝國,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저에 의해 정착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 평화는 모든 방면에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켜 문학, 건축 그리고 조각 등에 위대한 업적을 낳았고 법률연구가 대단히 발달했으며 경제가 번영했다. 모든 곳에서 로마군대는 로마제국의 그리고 법과 평화의 상징이었다. 이것이 초대교회 로마의 배경이었다.
(2) 헬라 철학의 배경
로마제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는 헬라사상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헬레니즘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가 발흥했던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연구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헬라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는 다시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헬라사상의 전기 >
- 탈레스(Thales, 625-547BC)부터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10-450BC) : 관심은 세계의 본질
-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BC) : 관심은 인간
- 플라톤(Plato, 429-347BC)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BC) : 관심은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 관계
< 헬라사상의 후기 >
후기는 스토아주의(Stoics), 에피큐리안주의(Epicurians), 신피타고리안주의(Neo-Pythagoreans), 회의주의(Skeptics) 그리고 중기 플라톤주의(Middle-Platonists)를 포함한다. 초대교회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것은 바로 이 후기이다.
⓵ 초기 헬라철학(Pre-Socratic Philosophy)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까지의 헬라 철학자들은 세계의 본질(本質)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했다.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일련의 고대 헬라철학을 회의주의(Skepticism)와 구별하기도 한다.
탈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에서 발생했다.”고 믿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맨더(Anaximander, 610-546BC)는 “물이 아니라 무한 대기(the boundless atmosphere)가 만물의 근원이다.”라고 가르쳤다. 주전 500년경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살았던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535–475BC)에 의하면 “우주의 근본 요소는 불이며 불에서 만물이 발생했다.”고 했다.
그는 불에서 공기가, 공기에서 물이, 물에서 땅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후 땅은 물로,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래서 끝없는 변화의 회전(the endless cycle of change)이 계속된다고 했다. 이들의 변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결합이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변화를 야기 시킨다. 그러나 이들 중에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헤라클리이투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15-450BC)는 헤라클리투스와는 정 반대로 “이 세상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 한 가지는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이며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하는 모든 변화는 단지 그렇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⓶ 소크라테스
주전 450년 아테네(Athens)에 살았던 소크라테스(Socratic Philosophy, 469-399BC)로 말미암아 헬라 사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주로 자연과 세상의 본질에 관심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에 와서는 세상의 본질보다도 인간의 자질(資質, quality)에 더 많은 과심을 기울였다.
헬라-로마시대 특별히 소크라테스 시대에 와서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은 하나의 종교였다. 오늘날과 같이 이론적 연구나 형이상학적 연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a way of life)으로 그 목적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있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단순한 이론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이며 삶의 방식이었다.
⓷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에 소크라테스 철학 후기(Post -Socratic Philosophy)에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탁월한 두 철학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 429-347BC)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BC)이다. 소크라테스의 인간사고 혁명이 영향력 있는 일련의 다듬어진 철학체계로 열매를 맺은 것은 이들에 와서이다.
이들은 세계를 전체로 이해하려는 이전 철학자들의 관심과 소크라테스의 인간 이해를 하나로 연합시켰다.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the world of the ideas)와 ‘현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데아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본질적인 실제(ousia)로서 사물의 참된 본질이다. 이데아의 개념은 초월적인 개념으로 형이상적적인 의미를 지니며 인간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같은 피라미드(Pyramid)의 정상에는 성경적인 신(神)의 개념과 근접한 선(善)의 이데아(Idea)가 있다.
인간의 이성(理性)에 상당한 의(義)를 부여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의 능력에 의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므로 인간 지고(至高)의 선(善)은 이성적인 삶이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순수이성(純粹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 모두를 지니고 있다. 순수이성은 생각하고 이해하며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이며, 실천이성이란 행동에 적용된 이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이란 지적 미덕과 도덕적 미덕을 포함한다.
이처럼 관념적이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과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플라톤이 모형에서 출발하여 개체(個體)로 진행해 나간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에서 출발하여 보편으로 진행하여 나갔다. 개체와 보편의 불가분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대한 공헌 가군데 하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간 존재를 종합하여 하나로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는데 개체와 보편, 자연과 은총, 이성과 계시의 통합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르면 지식은 감각적 경혐(sense experience)에 의존하지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은 감각에 의해 개체를 이해한다. 지성에 의해 인간은 보편을 배우며 이 지식은 감각을 통해 얻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사고(思考)에 미친 영향은 너무도 컸으며 그 영향은 고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학 학파를 통해 후대에 계승되어 왔으나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철학자들의 관심을 실천적 도덕으로 돌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뒷전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중세에 복고되어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플라톤 사상과 함께 수천 년 동안 기독교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⓸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주전 1세기에 플라톤의 연구가 복고되어 육체(肉體)와 영혼(靈魂)의 구분과 같은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이 다시 등장하면서 교부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은 중세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중기 플라톤 사상가들은 플루다크, 아풀레이우스, 막시무스(Maximus of Tyre) 그리고 알비누스(Albinus)이며, 이 중기 플라톤주의는 기독교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 플라톤주의에로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중기 플라톤주의는 2세기 기독교 변증가들 즉 저스틴(Justin Martyr),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술활동에 지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퍼거슨은 히비스서에서 조차 플라톤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인식론을 정립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첫째,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의 구분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고 세상은 물질적인 영역에 속하며 인간은 양 영역을 연결한다.
둘째, 섭리론으로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셋째, 영혼 불사(不死) 개념으로 기독교와 가르침과 유사하다.
넷째, 신(神)에 대한 개념의 정립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아리스 토텔레스에서 두드러지는데 신(神)은 물질이 없는 하나의 형상으로 그 자체와 완전한 존재이다. 비물질적인 실체(non-material reality)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강조는 성경적 신(神) 개념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플라톤의 영향을 반영하는 후대 일부 기독교 철학자들은 플라톤이 말한바 이데아의 개념과 성경의 로고스 개념을 연결하여 플라톤주의가 제시하는 우주적 종교사상(the idea of a cosmic religion)을 통해 인간의 종교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기독교와 철학과의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비인격적인 존재인 것에 비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라는 점이다. 두 개의 중요한 이단인 영지주의와 아리안주의(Arianism)는 3세기 전후에 복음의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했는데 이 두 개의 이단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따라 인간과 세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3) 스토아주의 배경
스토아철학(Stoicism)은 플라톤주의와 함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에 가장 성행하던 철학체계로 플라톤 사상보다도 기독교에 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사상과 스토아철학의 가르침과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로고스(Logos) 사상이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역사를 연구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토아철학에서 로고스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적 능력(the divine power)을 말한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이 말이 세 가지 면은 내포한다.
첫째, 로고스는 자연법(the law of nature)으로 모든 자연이 운행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신적 존재이며 창조적인 신적 능력이다.
둘째, 로고스는 도덕법(the moral law)을 의미하며 이것은 칸트가 ‘실천이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로고스는 실체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을 말하며 폴 틸리히는 이것을 ‘순수이성’(theoretical reason)이라 불렀다.
⓵ 스토아철학의 역사 개관
스토이즘의 역사는 대체로 초기 스토아(the Early Stoa), 중기 스토아(the Middle Stoa), 후기 스토아(the Later Stoa)등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 초기는 대체로 주전 300-200년까지의 기간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노(Zeno of Citium, 335-263BC), 크린테스, 크리시푸스 등이다.
- 중기는 150BC부터 기독교가 시작되던 시기까지를 말하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파나에티우스(Panaetius of Rhodes, 185-109BC)와 포시도니우스 를 들 수 있다.
- 후기는 잘 알려진 네로 시대에 활동하던 관용론의 저자 루시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AD1-65), 로마의 에펙터투스(Epictetus, AD50-135) 그리고 명상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121-180)를 들 수 있다.
⓶ 스토아 철학의 사상
초기 스토아는 첫째로 유물론(唯物論)이다.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비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과 세계 그리고 심지어 언어도 물질적이다. 둘째로 스토아주의는 범신론(汎神論)이다. 스토아 철학은 만물에서 신적 실체를 발견하는 범신론에 기초한다. 셋째로 그들은 또한 모든 실체가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 형태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일원론(一元論) 자(monist)이다. 일원론적 사고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보았던 헤라클리투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스토아주의는 하나의 종교이며 철학이다. 스토아주의가 특성상 철학이기 때문에 단지 교육받은 지식층에만 수용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토아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우수한 지식층이 주로 스토아 철학을 따랐다.
⓷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
용어상 많은 유사성이 있지만 스토아철학(Stoicism)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스토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관(神觀)이다. 스토아주의는 완전히 인격적인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들이 말하는 신(神)은 단지 내재적인 신(神)일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스토아철학의 범신론이 말하는 신과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의 성육신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그들이 말하는 성육신이란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 로고스의 일부를 가졌다는 개념일 뿐이다.
또한 스토아철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죄의식이나 죄 사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불멸(不滅)의 개념도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신적 부분은 전체로 돌아간다.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이웃을 향한 도덕적 의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희생과 능동적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중’을 도덕적 원천의 본질로 보는데서 출발하기에 스토아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4) 필로(Philo)
디아스포라 유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 25BC-50AD)는 스토아철학과 중기 플라톤주의를 이상적으로 융합시킨 초기 기독교 배경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주전 25년에 태어나 주후 5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언어학적 지식이 풍부하고 사상이 광범위하여 성경에 대해 탁월하고 고결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필로는 거룩한 책들에 대한 주석을 저술했다.
헬라인들이 구약에서 그들의 중심 사상을 얻었다고 확신한 필로는 구약과 헬라철학을 연합된 가르침으로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을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직면한 문제점이 바로 성경의 창조교리와 헬라의 창조관의 부조화(不調和)였다. 헬라철학자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물질과 접할 수 없다고 믿었던 필로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사이에 중재자(mediator)를 생각해 냈다. 이 중재자가 로고스(Logos)였다.요약하면 첫째, 필로는 고대 헬라 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이 동일한 원천(原泉)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 둘을 종합하였다. 둘째, 필로는 헬라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의 연속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상당부분은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 셋째, 필로는 헬라의 신관(神觀) 특별히 플라톤의 선(善)의 이데아(Idea)와 구약의 하나님을 동일선상(同一線上)에서 이해했다. 넷째, 필로의 기독교 이해는 초대교회 사가(史家)들에게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