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

요약 초대교회사(3) 초대교회의 배경

The Pax Romana(Latin for “Roman Peace”) was a long period of relative peace and minimal expansion experienced by the Roman Empire between the end of the Final War of the Roman Republic and the beginning of the Crisis of the Third Century, a span of roughly two hundred years.(BC27 to AD180) 

제2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2. 유대주의와 로마제국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크게 두 시대로 나누어 본다면 통일왕국 시대와 분열왕국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통일왕국 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번영기였다. 이 시대는 사울 왕(Saul, King of Israel, BC 1051-BC 1011)과 유명한 다윗 왕(David, King of Israel, BC 1011-BC 971) 그리고 그의 아들 솔로몬 왕(Solomon, King of Israel, BC 971- BC 931)의 통치 기간을 포함한 주전 1051년에서 931년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이 기간의 역사는 사무엘상하 및 열왕기상 1-11장에 기록되어 있고 역대상하에도 일부 언급되어 있다.

다윗 왕은 주전 971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다윗 왕은 그의 재위 기간 중 메시아 희망의 상징이 될 만큼 이스라엘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주전 931년에 죽은 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남 유다 왕국(Kingdom of Judah, BC 931-BC 586)과 북 이스라엘 왕국(Kingdom of Israel, BC 931-BC 722)으로 분열 되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722년 아시리아(Assyrian)에 의해 망한 후 끝내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다윗의 왕가에 충실히 남아있던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 제국(Babylonia, BC 1895-539)의 포로가 되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Persian, BC 550-BC 330)의 왕 고레스(Cyrus)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유대인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주전 586년 첫 귀환 후 또 다른 그룹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왔다.(BC 457) 그들의 지도자 중의 하나가 에스라(Ezra)였다.

주전 334년-323년 마케도니아(Macedonia) 왕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 BC 356-Bc 323)가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동방과 남쪽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부하 장군이 광활한 영토를 분할해 가졌다. 프톨레미(Ptolemy, BC 367-BC 283)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팔레스틴은 주전 198년까지 프톨레미 왕조(BC 305-BC 30)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주전 198년부터 다른 왕가인 셀류시드(Seleucids) 가문이 팔레스틴을 통치했다. 이러한 팔레스틴 통치자의 변화는 유대 백성들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2) 마카비(the Maccabees)

프톨레미 왕들은 유대인들이 자유로이 그들 신(神)을 섬기게 했다. 그러나 새 통치자  셀류시드(Seleucids)는 유대인들에게 그들 종교를 포기하고 헬라방식을 강요했다. 이 정책을 대표한 지도자는 시리아의 셀류시드 왕(the Seleucid King of Syria) 안디옥크 4세였다. 이러한 셀류시드 통치에 반대하는 폭동이 나이 많은 제사장 미타티아스(Mattathias)와 그의 네 아들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이들 중에서 유다(Judas)가 지도자였다. 그들 모두는 마키비 즉 맹렬히 싸운 사람들로 알려졌다.

주전 141년에 유대인들은 셀류시드를 팔레스틴에서 다 몰아내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 주전 586년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지 80년 동안만 그들의 자유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

note : The Maccabees(מכבים were a group of Jewish rebel warriors who took control of Judea, which at the time was part of the Seleucid Empire. They founded the Hasmonean dynasty, which ruled from 167 BCE to 37 BCE, being a fully independent kingdom from about 110 to 63 BCE. They reasserted the Jewish religion, partly by forced conversion, expanded the boundaries of Judea by conquest and reduced the influence of Hellenism and Hellenistic Judaism.

그 후 주전 63년 팔레스틴에 일어난 유대인 내란은 로마 정부가 팔레스틴에 확고한 권력을 장악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했다. 60년 동안 마카비의 이스라엘은 반(半) 독립국가로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졌으며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전 37년 헤롯(Herod the Great, King of Judea, BC 73-BC 4)이 로마 정부에 의해 분봉(分封) 왕이 되었다. 그 후 유대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다스려 졌다.

주후 6년에 아켈라우스(Achelaus,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의 분봉 왕, 마 2:22)가 실수하자 그는 해직되고 추방되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의 영지(領地)가 되었고 로마의 총독이 지배했다.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의 유대인 총독은 나사렛 예수 십자가 처형 사건을 맡았던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AD 38)라 이름 하는 로마인이었다.

(3) 회당과 산헤드린

주전 586년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前) 그들의 예배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러나 포로 후는 회당(會堂, Synagogue)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성전을 빼앗긴 후 기도, 성경낭독, 신앙교육의 목적으로 회당을 강조했다.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는 회당 관할 장으로 회당 통치자라 불렀다. 또 팔레스틴에서 유대인의 통치기구는 산헤드린(Sanhedrin) 공의회였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지도아래 주로 사두개인(Sadducees)과 바리새인 (Pharisees)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로마 통치아래 있었지만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팔레스틴 밖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했다.

(4) 바리새인과 사두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마카비시대(BC134-BC62) 이후부터 유대 지도자가 되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운데서 나왔고 율법사였다. 그들은 구습을 선호했고 변화를 싫어했다. 그럼에도 헬라 사상을 유대 생활에 도입하려고할 때는 지지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이들은 부활, 영생, 천사, 영혼불멸을 부정하고 영혼과 육체는 함께 사멸(死滅)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내세(來世)가 없다. 61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사두개인들과 정반대였다. 부활과 내세의 삶과 상벌 사상도 믿었다. 그들이 집착한 것은 주로 율법의 외적 준수였으며 따라서 율법의 준수 이면의 영적 태도는 둔감했다. 이런 그들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대립되었다.

사두개인은 잘못된 교리를 가졌고 바리새인들은 올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의 가르침과 모순되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몰락 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바리새인들은 다소 오래 존속했지만 그들은 또한 유대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5) 분산된 유대인(the Dispersion)

전쟁포로의 분산 그리고 특별히 상업적으로 유대인은 팔레스틴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산된 유대인과 회당은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 모두는 후에 일어날 기독교 선교사들의 복음전파를 위한 자연적 요새를 팔레스틴 밖에 건설한 셈이다.

분산된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와 이집트(Egypt)였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전 250년에 거기서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헬라어 사용 세계에 구약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70연역(the Septuagint) 성경으로 알려졌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의 최대의 철학자 필로(Philo, BC 25-AD 50)가 배출되었다.

3. 초대교회와 로마제국

(1)  로마 제국의 종교

로마제국의 종교는 크게 자연종고, 신비종교, 국가종교 등 세 종류로 나뉜다. 자연종교는 초자연적 능력을 산, 호수, 강, 나무, 태양, 그리고 달에서 또는 어떤 동물과 사람에게서 찾는다. 신비종교의 가장 큰 매력은 신(神)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신비종교는 기독교가 확산될 때 제국에서 강했던 종교이다. 잠시 동안 밀교(密敎)의 한 형태인 밀의종교(密儀宗敎, Mithraism, mystery religion)가 기독교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밀의종교는 특히 로마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로마 국가종교는 강력한 정치적인 특징을 지녔다. 주된 요소는 황제(皇帝)를 위해 희생 제물(祭物)을 드리는 것이었다. 국가종교는 신(神)과의 교제와 연합 특별히 구원이 없는 종교이다.

(2) 팍스 로마나(라틴어, Pax Romana, 영어, the Roman Peace)      

로마가 공화정치를 종식하고 황제 통치시대의 시작과 함께 로마제국(Roman Empire)이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세기와 2세기(BC 27-AD 211)의 시기를 말한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  first Emperor of the Roman Empire)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라고도 한다. 대체적으로 기원전 27년에서 180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는 고대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태평성대였으나 군사적인 충돌도 있었다. 황제들은 이따금 발생하는 속주의 반란에 대처해야 했으며 국경 지역에서는 소소한 교전이나 대규모 정복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지배 받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로마의 평화유지를 위한 로마의 폭력과 착취로 고통 받는 제국주의 체제였다.

‘팍스 로마나’기간 산업과 상업이 번성(繁盛)했고 도로(徒路)와 항해술(航海術)의 발달로 로마제국 내는 어느 곳이든 안전하게 신속한 여행이 가능했다. 또한 헬라어가 세계 공용어(公用語)였기 때문에 제국 내 어느 곳에서나 의사소통이 자유로웠다. 이처럼 ‘팍스 로마나’ 기간은 메시아의 성육신의 때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역동적으로 세계선교를 할 수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63

이는 결코 역사의 우연(偶然)이 아니라 인류 구속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복음을 땅 끝가지 전파하시기 위한 치밀(緻密)한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요약>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갈라디아서 4:4에 말한바 ‘때가 찼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완벽하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즉 정치, 교통, 언어, 종교, 사회 및 도덕적 요소, 정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기간 동안 평화가 형성되어 새로운 종교가 발흥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