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4) 2세기 기독교사상의 정초

제3장 초대교회 기독교 박해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 할 수 있겠는가?”(폴리갑)
고대 아태나고라스(Athenagora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은 1)무신론, 2)식인풍습, 3)근친상간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공인된 종교 외에는 종교로 인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을 멀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숭배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주후 64년 네로(Nero, 37-68AD) 황제부터 시작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Constantine the Great, 272-337AD)과 리키니우스(Gaius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263325AD)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公認)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 박해기간(64-96AD),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 98-249AD) 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250-313AD)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제1차 기독교 박해(64-96AD)
(1) 네로 황제 이전
네로 황제 이전에는 기독교에 대한 조직적인 큰 박해는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BC)과 마찬가지고 역사의 전환점을 기록한 아우구스투스(Augustus, 63BC-14AD) 황제 이후 박해에 대한 진행은 간헐적이고 부분적이었다. 빌라도(Pontius Pilate, ?-38AD, 유대지역의 로마 5대 총독, 26-36AD)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심지어 4,000명의 유대 청년들이 도적과 싸우기 위해 사르디아(Sardia, Capital of Lydia, in Asia Minor)로 보내졌다.
(2)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글라우리오 황제가의 문란한 결혼생활로 인한 정치적 암투의 결과로 아그리파나의 아들 네로가 황제가 되었다. 네로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위 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네로가 62년 자신의 고문 부루스를 65년에 세네카를 각각 권좌에서 제거하면서 국가는 쇠퇴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특별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접점 악화되어가기 시작했다. 유세비우스는 ‘극단적인 광기’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네로 황제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 7월 18일 발생한 ‘로마시 대화재 사건’(Great Fire of Rome)은 기독교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네로는 로마 시 화재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후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공식적인 대(大) 박해였으며 역사에 1차 박해의 시작으로 알려졌다.

고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는 주후 64년7월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 황제는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는 소문을 무마시키기 위해 기독교인들에 화재의 원인을 돌려버렸다.”고 말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117AD)는 네로 황제 하에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이 기독교인들이 로마 대화재의 장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로 황제의 개인적인 횡포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임을 말해준다. 타키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 혹은 ‘사악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로마시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네로 시대에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하나님은 네로의 이 같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그냥 방관만 하시지 않으셨고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했던 박해자들이 거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되는 네로 황제의 폭정으로 로마 서부의 군단들과 로마의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에서 도주하던 네로는 명을 다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말았다. 결국 그의 죽음으로 줄리어스 시저에게서 시작된 줄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68년에 막을 내리고 1년 동안 과도기의 내란이 제국을 휩쓸었다.
(3)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
초대교회 기록에 의하면 도미티안(Domitian, 51-96AD) 황제에 의한 대 박해가 그의 통치 15년에 있었다. 도미티안은 네로의 전철을 밟았다.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AD)은 도미티안이 네로와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고 이렇게 말한다. “도미티안은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취급했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 또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많은 귀족들의 제산을 압수하고 그들을 추방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 베스파시안(Vespasian, 9-79AD)은 전혀 기독교인들에게 불리한 시도를 하지 않았으나 도미티안은 박해를 시도한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전승(傳乘)에 의하면 도미티안 박해 때에 사도 요한이 말씀을 증거 하였다는 이유로 밧모섬(Patmos)에 유배되었다. 도미티안이 사망하자 사도 요한은 유배지에서 귀환한 뒤 아시아의 교회들을 돌보았다. 도미티안 황제 역시 15년 동안 잔악하게 통치한 뒤 네로 황제처럼 비참하게 살해 되었다. 적어도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황제 임의에 의한 박해가 진행된 뒤 250년 데키우스(Decius, 201-251AD) 황제가 칙령을 발표할 때까지는 전국에 그 같은 박해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이기간 동안 박해는 지엽적 국부적으로 진행되었다.
2. 제2차 기독교 박해(98-249AD)1)
(1) 트라얀 황제의 기독교 박해
트라얀(Trajan, 98-117AD) 황제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138-161AD) 황제 통치 말엽까지 기독교는 위협 아래 있었지만 폴리니 2세(Pliny the Younger, 61-113AD)와 트라얀 황제 사이에 오간 서신에 나타나듯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도적 색출은 금지되었다. 소위 2차 박해기간이라 알려진 이 기간 동안은 박해가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졌다. 플리니 2세는 기독교인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여 처벌의 기준을 정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고 그 고백을 계속하는 자들,
둘째, 그리스도인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
셋째,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으나 지금은 배교했다고 주장하는 자들
트라얀 황제는 플리니 2세에게 보낸 회답에서 적어도 분명한 세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
둘째,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
셋째,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
이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 되었다.
(2) 하드리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
하드리안(Publius Aelius Hadrian, 76-138AD) 황제 통치하에서는 임의적으로 박해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박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속사도 중의 한 사람인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35—108AD)가 트라얀 황제 치하에 순교했다. 국경과 본토의 안정을 추구했던 하드리안 황제는 그리스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남다른 관심과 정열을 기울였다. 그는 125년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Caius Minnucius Fundanus)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도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0-180AD) 황제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으나 점차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고 아첨 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후 그들은 바다 조개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고문을 한 뒤에 짐승의 밥으로 던져 졌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황제 치하에 폴리갑(Polycarpus, 80-165AD)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폴리갑은 죽기 전 이렇게 마지막 기도를 했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함당하다고 여기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 멘”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AD)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은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 지방에서 일어났으며 이후 주후 250년 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특히 202년과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AD) 황제 아래 심한 박해가 주로 이집트와 카르타고(Carthago)에서 발생했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했을 때 도처에 잇는 모든 교회 내에서 믿음의 용장들이 자신의 신앙을 끝가지 지켰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나타났다.
세베루스 이후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황제는 알렉산더 황제를 승계한 막시미누스(Maximinus Thrax, 173-238) 황제이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로 이 시기에 오리겐(Origen, 184-253)은 순교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멜브로즈와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 프로톡테투스(Protoctetus)에게 헌정했다. 다행이도 막시미누스의 통치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 이후의 평화는 복음전파의 호기가 되었다. 3세기 첫 50년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박해가 진행되는 기간은 신앙의 순수성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박해가 중단된 그 기간들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기회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다. 또한 1차 박해와 달리 2차 박해는 고발되는 경우에만 행해졌으며 지엽적이고 간헐적이며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항상 박해를 받은 것은 아니다.
3. 제3차 기독교 박해(249-313AD)
(1) 데키우스 황제의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주후 250년에 데키우스(Decius, 201-251) 황제가 “제국의 모든 거주민들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하면서 박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위 3차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칙령에 근거하여 황제를 숭배해야 했고 숭배한 사람들에게는 증명서가 주어졌다. 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주요한 원인 5가지는 다음과 같다.
-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 로마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 교회는 국가 내에 국가(a state within the state)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인 존재라는 로마 지도자들의 견해
- 로마제국의 쇠퇴가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신이 내린 벌이라는 견해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키우스(Decius) 황제 아래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데키우스 황제의 명령 앞에 교인들은 복종,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어떤 이들은 탐관오리들에게 돈을 주고 증명서를 사기도 했다. 다행히 조직적이고 극심했던 데키우스의 박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데키우스는 제국을 통치한지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Trebonianus Gallus, 206-253) 황제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었다. 박해자들의 최후가 그렇듯이 갈루스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그 후 발레리안(Publius Licinius Valerian, 200-260)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안 황제가 태도를 바꾸어 그의 통치 말엽인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시작하였다.
발레리안의 박해 때에 필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 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발레리우스 황제 통치 때 키프리안(Cyprian)도 칼타고에서 순교했다. 발레리안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사로잡혀 노예가 되면서 그렇게 극심했던 박해는 일단 중단되고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이 베풀어 졌다. 그 후 갈리에누스(Gallienus, 218-268)가 황위를 계승하였고 그가 내린 칙령에 의하여 43년간 합법적인 종교(a religio licita)로 인정받았다.
(2)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
주후 303년 디오클리테안(Diocletian, 244-311)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우호적이어서 기독교가 매우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가 황제를 선동하여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시벨레(Cyele)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 303년 2월 23일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디어클리티안의 수도 니코메디아(Nicomedia)에 들어가 성경을 불태워버리고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디오클리티안의 박해는 제3차 박해 기간 동안 가장 길고 무시무시한 박해였다. 303년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면서 디오클레티안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까지도 기독교인들이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살해하고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더 강화시켰다. 디오클레티안이 305년 황제직을 사임한 후 박해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곧 재개되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인 313년 까지 계속되었다.
(3) 갈레리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Galerius Maximianus, 250-311)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였다. 박해를 시작한지 8년이 되던 해부터 박해를 완화해 10년 되는 해에는 완전히 박해를 종식했다. 이유는 그의 중병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그는 박해를 중지하라는 칙령을 발효했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칙령을 발표하고 5일 후 고통에서 해방되어 일생을 마쳤다.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Constantine the Great, 272-337)은 막센티우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 278?-312)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약관 24세에 로마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정치적 변화는 서방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의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포했다. 이 ‘밀란의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의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물론 ‘관용의 칙령’으로 특정되는 밀란의 칙령이 종교의 자유를 기독교에만 국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합법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식 선언이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공인에서 그치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 자유를 보장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경비까지 도와주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재정을 넘어 교리적 문제까지도 확대되었다. 313년 ‘밀란의 칙령’ 이후 한 차례의 고비를 만나기는 했지만 기독교에 대한 국가적인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식된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틴은 점점 더 뚜렷하게 기독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일련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기독교인 이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는 로마에서 가장 우대를 받으며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다.
< 요약 >
터툴리안이 말한 것처럼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되어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했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 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그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로 바뀌었고, 그 결과 외형적으로 상당히 확산되었다. 자연이 정치와 종교(기독교)의 밀착이 이루어졌고 교회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면서 교회는 세속화 현상이 일어났고 예배는 형식 위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의 등장은 교회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만큼 교회의 역사에 긍정적이면서도 또한 부정적인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의 등장으로 일련의 교회의 회의 특별히 니케아회의(Concilium Nicaenum Primum, 325.6.19.)를 통해 정통신학이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종교회의가 동서방교회의 분리를 촉진시킨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교회의 통일을 원하였던 콘스탄틴 황제가 오히려 수도를 이전함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동서방교회의 분리는 촉진시켰다는 것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