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

요약 초대교회사(5) 2세기 기독교사상의 정초

제4장 속사도

“나는 순교가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알고 있노라. 이제야 나는 제자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얻을 수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나의 야망을 자극하지 못한다.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나 또는 내 뼈를 부러뜨리며 사지를 찢고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매를 맞는 등 그 어떤 마귀의 괴롭힘도 참고 견디겠노라.” –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35-108)

속사도(續使徒, Post-Apostolic)들은 주님의 열두 제자 이후 초기 기독교 제자들로서 속(續) 사도시대(Post-Apostolic Age, 사도이후시대)라고 불리는 1세기 말부터 2세기까지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약성경과 2세기 후반 저작활동을 했던 변증가들 사이에 교량역할을 함으로 사도들의 사상을 후대에 계승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 로마의 클레멘트

클레멘트(Pope Clement I, also known as Saint Clement of Rome, 35-?)가 고린도 교회에 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The Letter of the Church of Rome to the Church of Corinth)은 제1세기 말엽 로마의 3대 감독이었던 클레멘트가 기록한 것이다. 클레멘트의 서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장로와 감독을 구별하지 않고 상호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헬라적인 요소와 스토아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클레멘트를 무분별하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융합시키려 한 인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클레멘트의 사상에 헬라주의적인 요소가 나타나지만 그의 신관은 삼위일체적인 것이었다. 현대 복음주의신학자들은 클레멘트가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고등 성경관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셋째, 클레멘트에 있어서 칭의론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이다. 32장 4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클레멘트에게 믿음은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때때로 순종을 믿음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넷째, 클레멘트는 교회를 유기체적인 관계로 이해했다. 강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해야할 사랑의 윤리적 차원이 있다.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와 동시대인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35-108)는 시리아 안디옥의 제3대 감독이라고 전해진다. 안디옥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여러 성도들이 이 곳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곳이다. 우리가 잘 아는데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 안디옥에서였다. 또 ‘기독교’(Christianity,  Χριστιανισμός)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 역시 이그나티우스였다.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얀 황제(Trajan Roman emperor, 53-117)의 재위 기간 (98-117AD)에 체포당했다. 이 때는 기독교가 모든 사회 계급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는 로마로 호송되었고 이송되어 가는 도중 일곱 개의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맹수의 이빨에 ‘밀’처럼 갈려지기 원했던 이그나티우스의 열렬한 소원은 마침내 로마에서 실현되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신약성경과 부흥도상에 있던 ‘보편교회’(Catholic Church)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그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 주장자들의 그리스도관에 맞서 싸웠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데 있어 감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그 하나 됨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감독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순교에 대한 예찬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이르기를 열렬히 갈망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제창한 교회 감독의 중추적 역할은 베드로를 잇는다는 ‘사도적인 계승’의 토대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생각하는 신비적 신학에 입각한 이론이었다. 그는 교회가 하늘나라의 지상 모형이라는 사실에서 교회직분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였다.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만찬 해석에도 나탄다. 이그나티우스는 교회의 하나 됨이 진실 된 성만찬에 있다고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의 작품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관심은 분열을 약시키는 이단적인 운동을 폭로하는데 있다. 그는 이단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아그나티우스는 이단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선생에 대해 심지어 야수(野獸, wild beasts) 또는 미친개(狂犬, mad dog) 혹은 양의 탈을 쓴 이리들(Gray wolfs)이라고 혹평했다.

이그나티우스가 볼 때 이들의 이단적인 요소는 첫째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었다. 그가 이 두 이단을 강하게 반대한 것은 이들이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을 비롯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무(無)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3) 폴리갑

폴리갑(Polycarp Martyr, 69-155)은 청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직설적이고 정열적인 사람이며 서머나 감독(bishop of Smyrna)으로 아우렐리우스(Aurelius Marcus Antoninus, 121-180) 황제 때 순교했다. 폴리갑은 주후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할 때까지 86년 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온 인물이다. 그는 사도들과 속(續) 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였다.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을 뿐  아니라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모아 보존했다.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는 폴리갑에게 상당한 도전과 용기를 주었다. 폴리갑은 165년경 아시아에 큰 박해가 발생했을 때 순교했다. 폴리갑은 교회사적으로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폴리갑은 로마에서 말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인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을 정통주의로 회심시키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둘째, 클레멘트나 이그나티우스 보다 폴리갑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잘 알고 있었다.

셋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성경적인 칭의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무엇보다도 폴리갑이 실천적 신앙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앞서 언급한 속사도 외에 무게 있는 문헌들로는 ‘바나바 서신’(Epistle of Barnabas)과 ‘디다케’(Διδαχή, Doctrina)를 들 수 있다. ‘바나바 서신’은 교리적 부분(1-17장)과 실천적인 부분(18-21장)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교리적 부분은 우화적 해석이 특징이고 실천적인 부분은 두 문서의 핵심부분이다.

속사도 문헌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헌은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이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죄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과 10개의 비유를 수집했다. 1873년 필로데오스 바이레니오스(Philotheos Byrennios)가 발견한 ‘디다케’(The Didache)는 3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룬다.

첫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의 차이이다.

둘째, 세례 예식에 과한 당대의 동향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 신앙훈련지침이다.          

< 요약과 결론 >

속(屬) 사도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意義)가 있다. 그것은 소아시아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 폴리갑, 요한, 이그나티우스, 파피아스 등이 소아시아 출신이라는 것이다. 속사도 작품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는 인물과 기록 장소와 문장스타일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순교(殉敎)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다.

둘째, 신앙의 표준으로 성경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정통의 형성이다. 속 사도에 오면서 정통주의는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통성의 표준은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성경이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속 사도들의 작품들은 비평은 요한다. 아무래도 가장 두드러진 비판은 속 사도들의 작품 속에 성경에서 떠난 전통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비판적 요소는 세례 후에 짓는 죄 용서 문제이다.

제5기독교 변증가

“로고스를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저들이 하나님 없는 자들이라 불렸을 지라도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다. 헬라인들 중에 소크라테스와 헤라클리투스 등이 그러하였고 야만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이나 아나니아, 아지리아, 미사엘, 엘리야 및 이제 그 이름을 다 열거할 자리가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

2세기 들어서 당대의 이단들과 정부 지도자들 및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이며 어떤 철학 체계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진정할 철학임을 변호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려는 저술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가리켜 기독교 변증가(辨證家, Christian apologists)들이라고 한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주후 130년경부터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속사도들과 당대의 정통주의 조류(潮流)를 대표하는 이들로서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신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동시에 공격했다. 변증가들이 유대인을 공격한 이유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교도들을 공격한 것은 이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변질(變質) 시켰기 때문이다. 변증가들이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은 소위 ‘공개적인 편지’들을 통해서였다.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아테네의 콰투라투스(Quadratus of Athens, ?-129)는 기독교 변증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최초의 변증가로서 주후 125년경 로마 황제 하드리안(Publius Aelius Hadrianus, 76-138)에게 공개적인 변증서(辨證書)를 썼던 인물이다. 그는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기독교를 힘 있게 변증했다.

(2) 아리스티데스

기독교 변증가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로마 황제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에게 변증서를 썼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유세비우스 증언에 의하면 “신앙에 신실하게 헌신한 아리스티데스는 하드리안 황제에게도 신앙의 변론을 써서 후손에게 남겼다.”고 했다. 변증서에서 그는 참된 신(神)의 속성을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신화(神話)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자의 성품을 들어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다. 아리스테스가 결론적으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우월성과 건선성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윤리적 삶 그리고 신행의 일치에 의하여 입증된다는 사실이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0-165)는 2,3세기의 기독교 대변자들로서 변증서를 내어 놓은 변증가들 가운데 최초의 한 사람으로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저스틴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심지어 황제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사용한 학식 있는 최초의 이방인이었다. 무수한 저스틴의 저술 가운데 현존하는 저술로는 ‘제일 변증서’(The first Apology),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등이 있다.

장문의 ‘제1변증서’에서 저스틴은 기독교인 최초로 이교도들의 기독교에 대한 여러 가지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했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가 어떤 새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들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가는 구약성경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주장했다. 160년경에 기록된 ‘트리포와의 대화’는 바르쿠스 폼페이우스라는 어떤 인물에게 헌사 된 책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글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줄 목적으로 유대교에 동정적인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스틴은 자신의 변증을 순교로 확증했다.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저스티의 순교를 언급하고 있다. “이 무렵 저스틴은 앞서 언급된 통치자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두 번째로 변론한 뒤 견유학파(犬儒學派, Cynici) 철학자인 크레센스의 교활한 선동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저스틴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변증가였다. 그러나 저스틴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가 항상 같지는 않다. 저스틴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가 있다.        

프렌드는 부정적으로 보는데 저스틴은 연속성이 없는 인물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리스도의 양성과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로고스 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저스틴이 어떤 신약의 저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바나드에 따르면 저스틴은 “기독교 안의 보편주의적인 요소를 파악하고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의 최초의 사상가였다.”고 평가했다. 성경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어느 변증가보다 우수하다.

저스틴은 기독교가 무식한 종교라는 당대의 기독교 비판에 맞서 기독교야 말로 진정으로 지성적 종교라고 변호하고 있다. 저스틴의 헬라사상과 기독교 사상과의 연속성 추구는 영지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헬라화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저스틴이 영지주의를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4) 타티안

저스틴의 제자 타티안(Tatian, 120-180)은 앗시리아 출신(Assyrian)으로 저스틴이 순교한 후 165년경에 로마에 자신의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타티안의 ‘헬라인들에게 고함’(Discourse to the Greeks)은 그의 사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냉소적인 타티안은 희랍인들의 종교적인 자긍(自矜)에 일침을 가하면서 희랍인들의 종교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결국 야만족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희랍의 종교가 야만인들의 종교보다 우월할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티안이 저스틴의 뒤를 이어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구나 초대교회 교부들의 눈에 비친 타티안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특히 로마를 떠나 이단(異端) ‘엔크라티테스’(The Encratites, self-controlled)를 세움으로서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5) 기타 헬라의 기독교 변증가들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of Athens, 133-190)는 삼위(三位)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변호한 변증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태초에 하나님 마음 안에 ‘로고스’(λόγος, logos)가 존재했으며 이 로고스가 하나님께서 나와 그들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했다. 이 로고스는 성부와 일체인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테나고라스의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이해는 속사도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체계화 되고 발전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성령을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나고라스는 삼위일체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아테나고라스 보다도 더 구체저인 삼위일체 개념을 제시한 변증가는 안디옥 감독 데오필루스(Theophilus of Antioch, 120-190)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 아우툴리쿠스에게 헌정한 3권의 책에서 삼위일체(페리코레시스, περιχώρησιϛ)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상당히 발전된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

변증가들의 작품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The Epistle to Diognetus)은 저자와 연대로 미상이다. 문장의 스타일이 다른 변증가들과 맥을 같이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변증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유대적 예언과 헬라 철학을 모두 경시하는 점이다. 이 서신의 대부분은 사회 내의 기독교인이 감당한 특이한 역할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변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디오그네투스에 나타난 사상은 신적인 출발이 역사에 결정적이라는 ‘역사신학’(歷史神學, Historical theology)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디오그네투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이나 희랍인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며 구분되는 분명한 증거는 그들의 삶이라고 단정한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의 저자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본질적인 다른 미신숭배자들이라고 보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반면 사르디스(Sardis)의 멜리토(Melitus)는 유대주의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대단히 강조하며 이 둘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연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상당히 많은 사건들은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사건들로 본다.    

< 요약과 결론 >

속(續) 사도(Post-Apostolic)들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학의 통일성이 헬라 변증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변증가들의 신학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헬라사상과 기독교사상 사이에는 모종의 연속성이 있다고 본 저스틴적 사고가 대부분의 변증가들의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이런 헬라사상과 기독교의 연계성은 로고스를 통하여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로고스 이론은 플라톤의 창조사상과 맥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냐 하는 문제는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의 논제가 되었다. 그러나 변증가들은 성육신과 부활신앙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조직적으로 제시하여 이를 후대 교부들이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체계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기독교 조직신학자로 평가 받는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