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

요약 초대교회사(7) 2세기 기독교사상의 정초

요약 초대교회사(7) 2세기 기독교사상의 정초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의 원형(the Textus Receptus)은 주후 750년 프리미니우스(St. Pirminius, 670-753)의 ‘De singulis libris canonicis scarapsus’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이는 로마신조(Old Roman Symbol)의 영향이 컸다. 

제7장 교회의 응전  

“그리스도인이 아닌 저들은 그러므로 성경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 진실로 말시온이여! 무슨 권한으로 너는 나의 나무를 찍는가? 발렌티누스여! 너는 누구의 허락을 받고 나의 시냇물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가? 아렐레스여! 너는 무슨 권세로 나이 경계표를 옮기는가? 이 남은 자들아!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너희 마음대로 갈고 뿌리고 있느냐? 이것은 나의 소유다.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보다 먼저 그것을 소유하였다. 나는 이 재산의 본래의 소유자들로부터 받은바 틀림없는 양도증(讓渡證)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도들의 상속자다.” 터툴리아누스(Florens Tertullianus, 155– 240)

1. 신경(信經)의 발달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인 신경(信經, creed)은 ‘나는 믿습니다.’를 뜻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에서 유래했다. 신경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남겨주었고 이 신앙고백은 하나의 틀을 이루어 형성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 외에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s, 150-215)와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35-108) 같은 속사도(Post-Apostolic Fathers)들의 신앙고백에서 당대의 신앙고백의 일반적인 형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신앙고백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당대의 영향력 있는 가현설(Docetism)을 염두에 둔 듯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역사적 삶이 실제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신앙고백 이후 좀 더 모양을 갖춘 신앙고백이 변증가의 대변자라고 알려진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의 작품에 나타난다. 16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저스틴의 이 신앙고백은 개인적인 형태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우리는 태초부터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며 조물주이신 한분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예언자들에 의해 성육신하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선한 스승이라고 앞서 선포되신 하나님의 종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그러나 저스틴의 신앙고백에는 성령(聖靈)에 대한 고백이 보이지 않는다. 이보다 좀 더 발전된 고백 형태가 서머나의 장로들의 것으로 알려진 신앙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약 200년 혹은 이후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907년에 발견된 발리제트 파피루스(Der Balyzeth Papyrus)라는 한 파피루스에는 매우 흥미 있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하나님을 믿사오며, 그의 아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 육체의 부활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사옵나이다.”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 바울의 신앙고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이 교부들(敎父, Church Fathers) 때 더욱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가지의 단순하고 단편적인 신앙고백과 내용이 같지만 좀 더 체계적이고 해석적인 신앙률(Rules of Faith)이 약 150년부터 200년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신앙률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 교리의 표준(a Standard of Faith)으로 사용되었고,
  • 세례입문 교육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 성경해석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항하여 정통 신앙을 변호하는 신학적 내용을 제공해 주었다.

이 같은 신앙율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인물은 이레니우스(Irenaeus, 140-202)와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이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은 빌립보서 2:5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기독론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고백은 사도신경과 전체적으로 내용, 윤곽, 체계를 같이하고 있는 훌륭한 신앙고백으로 성부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 신앙고백의 내용은 터툴리안이 제시한 신앙률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터툴리안의 신앙율은 이레니우스의 것과 비교할 때 한층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후대에 발전된 사도신경과 흡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이 빌립보서 2장의 내용과 유사한 반면 터툴리안의 신앙율의처음 부분은 요한복음 1장과 유사하다.

초대교회의 가장 집약된 신앙고백은 ‘사도신경’(使徒信經, Apostles’ Creed)이다. 사도신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체계화 되었다. 사도신경의 기원(起源)은 확실하지 않지만 로마신경의 초기형식이 히폴리투스 신경(the Interrogatory Creed of Hippolytus’s Apostololic Tradition. 215),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 ?-374)가 교황 율리우스 1세(Pope Julius I, ?-352)에게 340년 제출한 신조와 그리고 사도신경에 대한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 340-410)의 주석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존되어 있다. 전형적인 ‘로마신경’은 로마교회가 주후 200년경 세례 문답 시 행한 신경이다.

히폴리투스의신경도 성부, 성자, 성령, 공회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 등의 신앙고백을 따라 문답의 틀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도신경의 순서와 상당히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신앙고백의 형태가 3세기 초엽에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과 세례문답으로 널리 통용되다가 4세기 중엽에 문답식의 형식을 떠나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사도신경과 매우 근접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후 340년 마르셀루스(Marcellus)가 교황 율리우스 1세에게 보낸 신경이다. 이 신조가 이전의 신조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마지막에 죄의 용서와 영생이 추가되었고 좀 더 함축적으로 다듬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의 원형(the Textus Receptus)은 주후 710년~ 724년 프리미니우스(St. Pirminius, 670-753)의 저술(著述) ‘De singulis libris canonicis scarapsus’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이 ‘사도신경’은 ‘로마교회 신조’(The Old Roman Symbol or Old Roman Creed, c. 215)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으며 로마교회에 의해 처음 채택되어 서방교회의 신조가 되었다. 당시 이단들의 발흥(發興)에 대한 교회의 응전(應戰)으로 생성(生成)된 이러한 신조(信條)는 이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정착되었다.

2. 정경의 형성

신경(信經) 외에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것이 오늘날과 같은 정경(正經, Biblical canon)의 형성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신약성경 목차는 ‘무라토이안 단편’(the Muratorian fragment)으로 알려진 고대 문헌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주후 200년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의 대부분은 초대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다. 정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준은 각권이 사도들 또는 사도들과 가까운 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는가하는 것이었다.

현재 존재하는 신약대로 완전한 정경이 설정된 것은 주후 367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에 의해서이다. 두 번의 힙포 공의회(Councils of Hippo)가 힙포 레기우스(Hippo regius, 393)에서 그리고 칼타고공의회가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의 지도 아래 북아프리카의 칼타고(Carthage, 397)에서 열려 현재와 같은 정경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그 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그들의 선례를 따라다.

정경이 완성되기까지는 거의 300년이 필요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경의 출현이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나 종교회의(Synods)의 공식적 선언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공식선언은 이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을 단지 확인(確認)했을 뿐이다. 신약성경의 기록과 그것들이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같이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정경의 형성은 이단과 이설을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교회에 제공해준 셈이다.

3. 감독제도의 발달

초대교회는 내외적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또한 그들의 결집된 힘을 통해 이런 외부의 도전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로마의 클레멘트(Pope Clement I, also known as St. Clement of Rome, 35-99)는 주후 96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uteros)를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클레멘트가 감독들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그나티우스에 의하면 감독은 기독교 공동체의 상징인 동시에 사도적인 전통(apostolic tradition)의 전달자였다.          

이레니우스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다. 두 가지 사상 즉 이그나티우스의 단일 감독제와 클레멘트의 사도직의 계승이 70년 후에 이레니우스에 의해 하나로 연합되어 감독의 권위를 한층 체계화 시켰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감독들이 똑 같은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특별히 로마교구의 감독은 우월한 권위를 가지는데 그것은 그 교회가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 설립된 교회이며 그들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기 때문이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로마교회는 사도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며 그 중에도 베드로와 바울의 사도직을 승계한 정통성 있는 교구이기 때문에 로마교회 감독은 다른 교구보다 더 권위를 지닌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여러 감독들 중에서 베드로와 바울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로마이 감독이 첫 번째 서열에 있었다.감독의 권위가 2세기 동안에 대단히 성장했지만 권위에 대한 이해에는 견해차가 있었다. 이레니우스가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인정한 반면 터툴리안은 사도적 권위를 어떠한 교회에서 찾지 않고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 예를 들면 고린도, 빌립보, 에베소, 로마교회에서 찾았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