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

요약 초대교회사(9) 3세기 기독교사상 확립

요약 초대교회사(9) 3세기 기독교사상 확립

Tertullian(155–240)

제9라틴신학

“아테네(Athens)와 예루살렘(Jerusalem)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 아카데미(Plato Academy)와 교회(Church)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단과 기독교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토아적 기독교(Stoic Christianity) 플라톤주의적 혹은 변증론적 기독교에 대한 모든 계획들을 버려라.”(Tertullian)

라틴신학(Early Latin Theology)은 로마에서 보다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태동(胎動)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에 언제 어떻게 교회가 생겨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후 180년 그곳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교회는 주로 로마인들이나 그들과 상업 거래를 했던 퓨닉계인들 가운데 존재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두드러지게 도회적이고 도덕적이고 라틴적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북아프리카는 터툴리안(Tertullian, 155–240), 키프리안(Cyprian, 200–258) 그리고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등 3명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를 배출했다.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현대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터툴리안을 ‘서방신학의 대변자’ 혹은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그가 서방신학에 미친 영향은 한마디로 지대(至大)하다. 그의 작품은 교회생활뿐만 아니라 교리 및 신학논쟁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비록 그가 분리하여 공교회에서 이탈하기는 했지만 그의 저술들은 위대한 서방교부들에 의해 전수되고 연구되었으며 라틴교회에서 무게 있게 취급되어왔다.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주후 200년경 칼타고교회의 장로로 안수 받은 터툴리안은 점차 몬타니즘(Montanism, 오늘날 신사도운동과 유사한 초대교회 이단)으로 기울다가 207년경에는 몬타니즘에 합류했고 얼마 후에는 아예 공교회에서 완전히 분리해 나갔다. 그가 몬타니즘에 합류하게 된 일반적인 견해 :

첫째, 제랄드 브레이(Gerald L. Bray)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합류한 것은 이 집단이 터툴리안 자신의 가르 침을 옹호하는 집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몬타니즘의 금욕주의적인 신앙이 터툴리안의 생활태도와 일치 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교회가 회개의 문제와 관련하여 느슨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 데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다.

(2) 터툴리안의 작품

첫 번째 중요한 작품의 범주는 변증론(辨證論, Apology)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자신의 신앙을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툴리안은 신앙을 변호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일련의 변증서를 저술한 터툴리안은 변증적인 차원을 넘어 이설(異說)과 이단(異端)들을 반박하는 작품들을 쓰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이 직접 이단들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그들을 반박하는 것에 비해 터툴리안은 법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현재 교회가 갖고 있는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영지주의를 비판하였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만이 전통을 소유할 권한이 있으며 그런 면에서 이단들은 취득시효를 상실했으며 전통적 교회가 그 권한을 가진다.

변증서나 반박 외에 터툴리안의 작품 가운데 또 하나의 작품 부류는 도덕(道德), 예전(禮典), 권징(勸懲)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품의 성격상 목회적 작품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작품들, 그리고 이교철학을 논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3) 터툴리안의 이성, 신앙, 철학            

터툴리안이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이런 철학(哲學)에 대한 거부의 태도는 신앙(信仰)과 이성(理性)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인간이 믿는 것을 그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우리의 믿음에 과한 지식은 인간 이성에 관한 지식과는 다르다. 믿음에 과한 지식은 그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성적 증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당대의 철학이 이단들과 연계성(連繫性)이 있음을 발견한 터툴리안은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고 그 때문에 터툴리안은 그리스어(Greek)를 사용하는 세계에 살던 당대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신학을 표현하는데 특별히 철학적 용어에 빠져들지 않았다.

(4) 터툴리안의 세계관

철학에 대한 터툴리안의 부정적인 태도와 그의 종말론적이고 금욕주의적인 태도는 그의 세계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사회가 기뻐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며, 이방인이 행복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고, 저들이 슬퍼하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이 기뻐하는 역설이 가능하다. 세상의 쾌락을 멸시하며 세상의 활동을 비웃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없는 쾌락이라는 논리다.

이 같은 터툴리안의 부정적인 세계관(World View)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어느 정도는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가담한 이후 몬타니즘의 부정적이며 종말론적아고 금욕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터툴리안과 성경이해

터툴리안은 고등 성경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두 권을 제외한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며 신약성경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두고 있다. 그는 또한 ‘신앙규범’(regula fidei) 또는 ‘신앙율’이라 부르는 것을 많이 언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Cyprian(200–258)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교회

키프리안(Caecilius Cyprian, 210-258)은 주후 248년에서 258년까지 카르타고(Carthago)의 감독으로 사역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처음에 감독직 수락을 주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단 선출된 후에는 직무에 열성적으로 헌신하여 오래동의 평화로 다소 침체의 기미를 보였던 북아프리카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1) 키프리안과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키프리안은 3차 박해로 알려진 데키우스 황제(Trajan Decius, 201-251)의 전국적인 박해기간에 8년 동안 카르타고 감독을 지냈다. 그가 감독이 된지 불과 2년 만에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해 전 제국에 진행된 최초의 박해였다. 로마 제국 내에 모든 국민들은 로마의 신(神)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환난 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데키우스 황제가 251년 고트족(Goth) 전투에서 살해(殺害)되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종결되자 박해 기간에 숨어 있던 키프리안이 카르타고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는데 박해기간 중에 그리스도를 부인(否認)했던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교회에 다시 입교(入敎) 시켜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키프리안은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키프리안은 순교자들과 핍박 중에도 절개를 지킨 고백주의자들을 크게 존경했다. 그러면서도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統一性)을 영적(靈的)이고 내적(內的)인 통일성에서만 찾지 않고 오히려 가견적 교회(可見的 敎會)의 일치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가견적인 단일체로서의 교회 밖에는 영적 생명이나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키프리안의 변함없는 확신은 감독직의 통일성 이론을 확대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감독의 일치와 직결시키고 교회가 하나이듯이 감독직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하나 됨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 됨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것은 곧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반(反) 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3) 키프리안 대(對) 노바투스            

교회 일치(一致)를 강조하며 분열을 막으려는 키프리안의 정책이 북아프리카 감독들과 로마 감독의 지지를 받았다. 노바투스(Novatus, ?-151)가 허황된 사상에 빠져 스스로를 카타리파(Cathars or Albigensians, 이원론적 순결파)라고 부르는 특이한 이단자들의 지도자가 되자 이 문제로 대단히 큰 규모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종교회의에서는 키프리안의 입장을 따라 이방신들에게 실제로 제사를 지낸 자들은 죽을 때에 공교회에 재 입교 시킨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는 노바투스와 노바투스와 연합한 오만한 자들 그리고 그의 무자비하고 지극히 비인간적인 견해를 채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로 간주한다. 우리는 과거 재난을 초래했던 회개라는 치료책으로 그들을 치유해 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교회와 정치적 일치를 추구했던 콘스탄틴(Constantinus, 272-337)이 로마 황제로 즉위하여 326년에 칙령이 발표되면서 노바티안들에게도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산권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는 노바티안의 감독 아케시우스(Acesius)가 참석했다.

Augustine(354–430)

(4) 북아프리카교회와 로마교회의 대립

노바티안 교회에서 세례 받은 많은 사람들이 공교회에 들어오기 원했는데 로마교회 감독은 안수하는 절차를 밟은 후 그들을 교회로 입교시켰다. 반면 북아프리카의 많은 교회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안과 로마의 감독 스데반의 주장은 서로 달랐다.

키프리안은 칼타고교회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여 그런 자는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했지만 로마 감독 스데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데반은 교회 밖에서 일지라도 물로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했다면 유효한 세례로 인정하고 세례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고 다만 안수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단자들의 세례문제를 두고 아프리카교회와 로마교회 사이에만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범 교회적 논쟁점으로 일찍이 몬타누스주의자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의 세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각 지역마다 의견이 대립되었다. 로마나 팔레스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 유효성을 인정한 것에 반해 라틴 아프리카, 안디옥, 갑바도기아, 길리기아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세례를 주어 왔다.            

다시 요약하면 키프리안이 교회의 영적 측면의 일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도적인 교회 속에서 교회의 일치와 통일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집약한다면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 조직체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야 하며, 이 가견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에 통일성이 존재하며 이 통일성은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보존되며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키프리안은 순교로 일생을 마감했다. 또 다시 발레리우스 황제(Valerius, 278?-312)의 박해가 발생했을 때 이번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지 않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 집에 감금되었다가 얼마 후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자의 대열에 올랐다. 키프리안의 세대들은 순교자 감독으로서의 그의 위광에 힘입어 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과 그의 도나투스파(Donatist) 대적들이 서로 키프리안을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로 간주했을 정도이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