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47) 성도의 선행(善行)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제16 성도의 선(1)   

제1항 : 성도의 선행과 하나님의 말씀

1항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일 뿐(미 6:8, 롬12:2, 히 13:21) 성경의 근거 없이 인간이 맹목적인 열정이나 선한 의도를 가장해 임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 15:9, 사 29:13, 벧전 1:18, 롬 10:2, 요 16:2, 삼상 15:21-23) 

해설    

이 조항은 무엇을 근거로 어떤 행위를 선한 행위로 규정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복종의 유일한 규칙이다. 겉으론 볼 때 아무리 훌륭하게 보이더라도 지고(至高)하신 재판관이 요구하시는 행위가 아니라면 선한 행위로 일컬어질 수 없다.

인간의 명령은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 명령에 부합하지 않으면 선한 행위를 이끌어 낼 수 없다. 또한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이 맹목적인 열정으로 제멋대로 규정한 행위들은 선한 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근거로 바리새인들의 선행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사 1:12)는 말씀대로 그들의 행위는 장로들의 전통(傳統)이나 스스로가 정한 규칙을 권위로 삼았을 뿐 하나님의 명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미신(迷信) 행위와 자의적(恣意的) 숭배(崇拜)도 인간의 계명을 바탕으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서는 그런 행위에 대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마 15:9)라고 말씀하셨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행위는 행위자의 의도(意圖)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선행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다.(삼상 13:13, 15:17-23) 또한 가장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하나님을 옳게 섬기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요 16:2 행 26:9)

하나님이 명령하신 행위는 그 자체로 선하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를 통해 그 명령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형식상으로도 선하고 내용상으로도 선해야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행위를 형식상으로 선하게 만드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는 이 장의 뒷부분에서 다루겠지만 여기에서 어떤 것이 성도의 선인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듯하다.

  •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 새롭게 된 사람이 행하는 행위라야 한다.
  • 올바른 원리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행하는 행위라야 한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행한다는 신념이나 확신이 있어야 하며, 그분의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롬 14:23) 오직    예수님을 묵상함으로써만 용납의 믿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요일 5:3)
  •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는 행위라야 한다. 약속된 은혜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온갖 축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자신은 한없이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행해야 한다.
  • 올바른 목적을 지향하는 행위라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 행하지 않는 행위는 선행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전 10:31)

제2항 : 성도의 선행과 믿음

2항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행은 살아 있는 참 신앙의 열매요 증거다.(약 2:18,22) 신자는 선행으로 감사를 나타내고(시116:12,13, 벧전 2:9), 확신을 공고하게 하며(요일 2:3,5, 벧후  1:5-10), 형제들의 덕을 세우고(고후 9:2, 마 5:16), 복음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빛내며(딛 2:5,912, 딤전 6:1), 대적들의 입을 막고(벧전 2:15),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벧전 2:12 빌 1:11, 요 15:8) 신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 마지막에 영생을 얻기 위해(롬 6:22)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엡 2:10)

해설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시고 스스로 온전히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본질적 영광이나 복되심을 더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욥 22:2, 35:7) 

또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롬 3:20) 또 인간의 선행은 천국에 갈 자격을 얻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선물)이기 때문이다.(롬 6:23)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신자에게 선행을 실천하라고 진지하게 권고하고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 선행은 여러 가지 귀한 목적을 이룬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엄숙히 명령했고 그런 그의 명령은 복음 사역자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성도의 선한 행위의 중요한 용도를 몇 가지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 선한 행위는 살아 있는 참 신앙의 열매요 증거다. 야고보는 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무익한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다.(약 2:2,6)  살아 있는 산 믿음은 자연스레 선한 행위를 열매로 맺는다. 그것은 그 믿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고 말했다.
  •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그 무엇으로도 다 보답할 수 없지만, 성도는 그분의 계명에 즐거이 복종함     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선한 행위는 온갖 축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다.
  • 선한 행위는 확신을 공고하게 한다. 선한 행위는 믿음의 확신을 굳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위대하신 구원을 이해하는 지식을 증대시킨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     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라고 말했다.
  • 선한 행위는 형제들의 덕을 세운다. 신중하게 선을 행하는 신자들은 다른 성도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거룩한 경쟁심을 유발시킨다.  이런 이유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던 그들의 열정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후 9:2)고 말했다.
  • 선한 행위는 복음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빛낸다. 실천적인 경건은 기독교 신앙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각자가 처한 위치와 관계 속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다함으로써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딛 2:10)하라고 명령한다.
  • 선한 행위는 대적들의 입을 막는다.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딤후 3:17)을 갖추고, ‘복음에 합당한 말’을하면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의 진실성을 드러내고, 진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비방하며 방탕을 일삼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고 말했다.  
  • 선한 행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신실한 성도들이 선을 많이 행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영광을 얻으신다. 예수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선한 행위로 하나님을 직접 영화롭게 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분을 영화롭게 하도록 독려한다.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며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셨다.
  • 선한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선한 행위는 영생을 얻는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생명의 은혜를 상속하게 될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요건이다. 바울은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고 말했다.

제3항 : 성도의 선행과 성령

3항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신자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비롯한다.(요 15:4,6, 겔 36:26,27) 또한 그들이 그런 능력을 갖추려면 이미 받은 은혜 외에 동일하신 성령에 의해 그들 안에서 실질적인 역사가 일어나 그 선하신 뜻을 바라고 행하려는 마음이 생겨나야 한 다.(빌 2:13, 4:13, 고후 3:5) 그러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무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태만해져 서는 안 된다. 부지런히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빌 2:12, 히 6:11,12, 벧후 1:3,5,10,11, 사64:7, 딤후 1:6, 행 26:6,7, 유 1:20,21)      

설    

이 조항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성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말로 펠라기우스주의, 교황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논박한다. 거듭나는 순간에 성도의 영혼 안에 은혜의 초자연적인 원리(또는 성향)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거룩한 복종의 행위를 실천하려는 마음과 능력이 생겨난다.(겔 36:26,27)

그러나 성도가 은혜를 통해 부여 받은 이 능력에도 불구하고 은혜롭고 거룩한 행위를 실천하려고 할 때마다 또다시 성령의 실질적인 역사가필요하다. 다시 말해 그가 처음에 무슨 은혜를 받았더라도 은혜로운 복종의 행위를 실천하려고 할 때마다 그들 안에서 새롭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은혜의 원리를 부여 받은 성도들이 새로운 은혜의 공급 없이 그들 스스로의 힘이나 이미 받은 은혜만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 사도 바울은 성도의 입장에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고 인정했다.
  • 성도들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새로운 은혜를 공급해 달라고 기도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 성도들을 대신해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히13:20,21)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거룩한 복종의 행위를 실천할 때마다 실질적인 은혜의 영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언급한 성경 구절은 없다. 그러나 이 조항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 의무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태만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히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은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서 의무를 행하도록 독려하시지 않으면 어떤 신앙의 의무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광신주의자들을 논박한다. 이 신앙고백 작성자들은 성경 구절을 충분히 인용해 이 명제를 뒷받침했다. 따라서 여기서 굳이 더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