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48) 성도의 선행(善行) (2)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제16 성도의 선(2)   

제4항 : 성도의 선행과 공로

4항 이 세상에서 복종이 가장 뛰어난 신자들일지라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거나 더 큰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한없이 부족하기만 하다.(눅 17:10, 느 13:22, 욥 9:2,3, 갈 5:17)

해설      

이 조항은 공덕(功德)을 쌓는 행위(行爲)에 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모두를 구속하는 계명이나 불순종하면 죄가 되는 계명들 외에도 ‘완전함을 위한 권고들’이 신약성경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런 권고들은 사람이 원하면 얼마든지 지키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그것에 복종하면 스스로가 해야 할 의무보다 더 많은 의무를 행해 공덕(功德)을 쌓을 수 있고, 남은 공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轉嫁)시켜 그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더욱이 그들은 ‘완전함을 위한권고들’에 순응한 자들이 선을 행함으로써 쌓은 여분의 공덕을 교황이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연약한 자들이나 죄를 지은 자들에게 필요한 대로 임의로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황에게 그런 재량권을 부여해 면죄부(免罪符) 판매와 같은 크게 남용한 것이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개신교는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완전함을 위한 권고들’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근거가 전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신성(神聖) 모독적인 교리를 논박했다. 이 교리의 오류(誤謬)는 모든 인간에게 부과된 계명들의 본질만 살펴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경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 10:27)고 명령한다. 이 두 계명에 함축된 것 외에 다른 무엇을 더 생각할 수 있겠는가?

공덕을 쌓는다는 것은 자기 의(義)를 내세우는 무지한 사람들이 상상해 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훌륭한 신자라도 주어진 의무 이상을 더 행할 수는 없다. 그들도 자신의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한없이 부족할 뿐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 f3:2)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요일 1:8)  주님은 매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주님의 가르침에는 우리가 매일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제5항 : 성도의 선행과 구원

5항 우리의 아무리 훌륭한 행위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죄 사함이나 영생을 받는 공로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선한 행위와 장래의 영광은 서로 큰 격차가 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간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행으로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도 없고 과거에진 죄의 빚을 갚을 수도 없다.(롬 3:20, 4:2,4,6, 엡 2:8,9, 딛 3:5-7, 롬 8:18, 시 116:2, 욥 22:2,3, 35:7,8)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다 행하고 난 뒤에도 우리는 단지 주어진 의무를 이행한 무익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눅 17:10) 왜냐하면 선한 행위가 선한 이유는 그것이 그분의 성령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갈 5:22,23) 우리의 힘으로 선을 행한다면 많은 약점과 불완전함으로 인해 오염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사 64:6, 갈 5:17, 롬 7:15,18, 시 143:2, 130:3)

해설    

이 조항은 성도의 선한 행위는 영생을 얻는 공로가 된다고 가르치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정면으로 논박한다. 우리의 아무리 훌륭한 행위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죄(罪) 사함이나 영생(永生)을 받는 공로(功勞)가 될 수 없다.’는 명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 예수님은 우리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뒤에도 단지 해야 할 일을 한 무익한 종일뿐이라고 가르치셨다.(눅 17:10)
  •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위도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선행도 공로(功勞)가 될 수 없다.(시 16:2)
  • 선한 행위가 선한 이유는 은혜의 성령이 베푸신 전능하신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빌 2:13) 이 같이 선행은 우리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상을 받는 공로가 될 수 없다.
  • 우리가 행한 가장 훌륭한 행위도 죄(罪)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되기는커녕 그분의 엄중한 심판을 견딜 수 없다.(시 143:2)
  •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위도 영생의 무한한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후 4:17) 영생(永生)의 상급은 보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고 명령한다.

제6항 : 성도의 선행에 대한

6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의 인격을 받아 주셨듯이 그들의 선한 행위를 그분 안에서 받아 주신다.(엡 1:6, 벧전 2:5, 출 28:38, 창 4:4, 히 11:4) 그 이유는 그들의 선한 행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고 책망할 것 없이 온전하기 때문이 아니다.(욥 9:20, 시 143:2) 많은 약점과 불완전함을 수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  안에서 그것을 보시고 진실한 행위로 받아들여 보상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히 13:20-21, 고후 8:12, 히 6:10, 마 25:21,23)

해설

이 조항은 신자의 선한 행위가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고 진술한다. 이 점을 입증하는 데는 두 가지면 족하다. 첫째, 하나님이 복종의 행위를 받으시기 이전에 우리의 인격을 먼저 받아 주셨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4)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면서 그의 인격을 받아 주셨다. 즉 하나님은 아벨을 의롭게 여기셨다.(히 11:4) 둘째,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위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가 인정받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사역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우리의 인격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쁘게 받으신다.(딤전 2:5)

제7항 : 중생하지 못한 자들의 선행

7항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행하는 행위는 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행한 것이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일지라도(왕하 10:30,31, 왕상 21:27,29, 빌 1:15,16,18) 믿음으로 깨끗해진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고(창 4:5, 히 11:4,6), 말씀에 따라 올바로 행한 것도 아니며(고전 13:3, 사 1:12), 올바른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마 6:2,5,16) 죄에 해당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그분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없다.(학 2:14, 딛 1:15, 암 5:21,22 호 1:4, 롬 9:16, 딛 3:5) 그렇다고 해서 선한 행위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더 큰 죄가 되고 그분을 더욱 불쾌하시게 만든다.(시 14:4, 36:3, 욥 21:14,15, 마 25:41-43,45, 23:23)

해설

이 조항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논박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술가들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행위도 모든 죄에서 자유로운 순결함을 유지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공로를 ‘덕 행의 공로’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 대로 선행은 형식상의 선행과 실질상의 선행으로 구별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선행은 실질상의 선행일 뿐 형식상의 선행과는 무관하다. 기도, 말씀을 읽거나 듣는 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선한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받아 주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즉 올바른 목적을 지향하지도 않고 올바른 방법으로 행한 행위도 아니라면 형식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선한 일을 많이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딤전 2:3) 행위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고 말했다. 육신에 있다는 말은 자연인의 상태 곧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오염된 근원지에서는 맑은 시내가 흐를 수 없고 썩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나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육신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하게 여겨 받으실 만한 행위를 행할 수 없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스스로를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도리어 죄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불러들인다.

성경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죄인이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간주한다.(시 53:4) 그들의 행위는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아무리 유익하게 하더라도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갓 죄에 지나지 않는다.(잠 21:4) 그런 행위들 가운데는 실질상으로는 선한 행위가 많을 수 있지만 형식상으로는 모두 악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럽다.(잠 15:8)

물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의무를 무시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이 기도를 드린다고 해도 그들의 해결되지 못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귀 기울이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지만(사 59:2), 그렇다고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더 큰 죄가 되고 그분을 더욱 불쾌하시게 만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행위를 큰 죄악으로 규정한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하며”(시 10:4)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렘 10:25)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복음이 ‘경건함에 속한 진리’(딛 1:1)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1,12) 복음과 윤리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나 은혜의 교리가 방종을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진리를 거스르거나 개탄스런 무지(無知)는 없다. 복음의 원리에 윤리(倫理)가 뒷받침 되어야만 가장 굳건한 토대 위에 설 수 있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破棄)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위가 구원을 얻는 공로(功勞)가 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여러 가지 귀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필수불가결한 의무(義務)인 것은 분명하다.(마 5:16)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딤후2:19),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골 1:10) 신자는 진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고,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을 권유할 수 있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수 있고(마 5:16), 스스로도 많은 위로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