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49) 성도의 견인(堅忍)

제17장 성도의 궁극적 구원(1)
제1항 : 성도의 견인의 일반적 서술
1항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받아들여 성령으로 유효하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온전하게나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끝까지 확실하게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 받는다.(빌 1:6, 벧후 1:10, 요 10:28,29, 요일 3:9, 벧전 1:5,9)
제2항 : 성도의 견인의 근거
2항 성도의 견인(堅忍)은 신자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선택의 작정에 근거하고, 성부 하나님의 값없는 영원한 사랑에서 비롯하며(딤후 2:18,19, 렘 31:3),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기도의 효험(히 10:10,14, 13:20,21, 9:12-15, 롬 8:33-39, 요 17:11,24, 눅 22:32, 히 7:25),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들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씨앗(요 14:16,17, 요-일 2:27, 3:9), 은혜 언약의 본질에 의존 한다.(렘 32:40, 히 8:10-12)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절대적인 확실성이 생겨난다.(요 10:28, 살후 3:3, 요일 2:19)
제3항 : 성도의 일시적인 범죄들
3항 그러나 신자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위력과 견인의 수단들을 소홀히 여기는 태도에 의해 심각한 죄를 저지를 수 있고(마 26:70,72,74), 한동안 그런 상태에 머물 수 있다.(시 51:14)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사 64:5,7,9, 삼하 11:27),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며(엡 4:30),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와 위로를 잃고(시 51:10,12 계 2:4, 아 5:2-4,6),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며(사 63:17, 막 6:52), 사람들에게 비방할 거리를 주고(삼하 12:14), 양심에 상처를 입히며(시 32:3,4, 51:8), 일시적인 심판을 자초한다.(시 89:31,32, 고전 11:32)
해설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칼빈(Jean Calvin, 1509-1564)지지(支持) 자와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의 지지자를 구분하는 신조(信條) 중 하나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참 신자도 죄(罪)를 지어 은혜의 상태에서 벗어나 일생 동안 배교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는 멸망을 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도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동일한 이 같은 교리를 지지한다.
그러나 도르트회의(Synod of Dort, 1618-1619)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은혜를 잃어버리고 죄를 짓는 사람은 진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선언했다.1) 즉 이 말은 “참 신자는 은혜의 상태에서 온전하게나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끝까지 확실하게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명제는 언뜻 보면 약간의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온전히 타락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용어를 사용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이 용어들은 “성도는 은혜에서 온전히 타락하더라도 회개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확실하고 또 항상 일어나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큰 죄 가운데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가르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교리를 논박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라 구원의 속성 자체를 고려하면 신자의 전적배교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일단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받은 사람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2)
이 장의 명제들이 진술하고 있는 성도의 견인교리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 내용을 숙지하면 견인 교리에 대한 반론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궁극적인 견인의 특권은 오직 참 신자에게만 주어진다.
이 조항은 견인의 특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받아들여 성령으로 유효하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에게 국한시킨다. 보이는 교회 내에는 이름뿐인 신자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되었지만 은혜의 영과 살아 있는 믿음을 통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과 연합되지 못한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그 능력은 없다. 그들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죽어 있는 상태다. 그런 형식적인 신자들은 결국에는 믿음을 저버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시련이 닥치면 공공연히 믿음을 부인함으로써 스스로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들도 겉으로는 믿음이 굉장한 것처럼 보이고 뛰어난 은사를 소유할 수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그들 안에는 신앙의 ‘뿌리’가 없다. 온전히 궁극적으로 타락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굳건한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요한 사도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 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우리는 이를 근거로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 교리를 훼손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성경에 언급된 여러 가지 배교의 사례를 잘 설명할 수 있다. 돌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 곧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나중에 타락하는 사람은 그 안에 뿌리가 없기 때문에 잠시 동안만 자라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마 13:21)
히브리서 6:4-6은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다가올 세상의 능력에 참여한바 되었지만 타락해 다시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증언한다. 그들은 그토록 놀라운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히 6:9)을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 사도도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가운데 얽매이는 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의 더러운 본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변화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말한 사례들이나 후메내오와 빌레도(딤후 2:17,18) 같은 사람들의 타락은 성도의 궁극적인 교리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의 견인의 특권은 참 신자들에게만 국한되기 때문에 참 신자 개개인 모두가 끝까지 보존된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잃는다면 참 신자 전체를 위한 위로의 토대(土臺)가 무너진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의 조건도 그만큼 불확실해지기 때문이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비록 겨자씨만큼 작더라도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즉 강하게 번성하는 은혜의 소유자들만이 아니라 꺼져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같이 연약한 은혜의 소유자들도 끝까지 지탱하며 더욱 강하게 성장할 것이 틀림없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벧후 1:1)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끝까지 보존된다. 견인의 특권이 참 신자 개개인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신자의 특권 가운데 이 특권을 완전히 삭제하는 편이 났다.
(2) 성도의 견인은 그들이 지닌 고유한 능력이나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
신자들 스스로는 연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막강한 세력을 지닌 원수들(사탄과 세상과 그들 자신의 부패한 마음)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오는 것을 견뎌 낼 재간이 없다. 그들의 견인이 그들 자신의 결심에 달려 있다면 그들의 믿음은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이 진리는 베드로의 경우(境遇)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중략)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3,35)라고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했다. 그러나 그 용기는 곧 꺾였다. 그의 결심은 무너졌고 그는 시험에 굴복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의지했고 결국에는 스스로의 연약함을 실감해야 했다.
시련이 닥치자 그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어린 하녀의 말에 두려워 떨면서 맹세와 저주(咀呪)까지 덧붙여 가며 주님을 부인했다. 주님이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시시고 그의 믿음을 지탱해 주지 않으셨다면 그도 가룟 유다처럼 불충한 배교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가장 훌륭한 신자라도 베드로처럼 스스로를 의지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 조항이 신자의 견인이 ‘신자 자신의 자유의지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진술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강력한 원수들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올 때 그것에 맞서거나 그것을 물리칠 능력이 없다. 오히려 스스로의 연약함을 깊이 의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의지해야만 안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연약할 때가 곧 강할 때이기 때문이다.
(3) 성도의 견인은 일시적인 타락이 아니라 온전하고 궁극적인 배교로부터 신자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이 조항은 “신자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위력과 견인의 수단들을 소홀(疏忽)이 여기는 태도에 의해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고 한동안 그런 상태에 머물 수 있다.”고 진술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는 성경의 경고와 “우리를 은밀한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고, 주제넘은 지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라는 성도의 기도는 참 신자 가운데 은혜의 상태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참 신자라도 얼마든지 중대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경에 보면 가장 뛰어난 신자들이 일시적으로 타락한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욥은 인내심이 강했는데도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고,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였다는 칭찬을 들었던 모세도 경솔한 말을 발설했다.(민 12:3)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던 다윗도 살인과 간음을 저질렀고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솔로몬도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같이 따르지 않았다.(왕상 11:6)
베드로는 누구보다 경쟁심이 강했고 용감했지만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주님을 부인했다. 이처럼 참 신자도 스스로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정도로 깊은 침체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을 온전히 상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이 여전히 그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붇드심이로다.”(시 37:24)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 24:16)
다윗은 매우 큰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나단의 책망 전까지 자신의 끔찍한 죄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온전히 잃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했고 또 성령이 자기를 온전히 떠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솔로몬의 경우도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같이 따르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것은 그가 이전에 지녔던 신앙 열정이 줄어들었다는 의미일 뿐 그가 온전히 궁극적으로 믿음을 저버렸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 다윗을 대하실 때처럼 그를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셨을 뿐 은총을 그에게서 온전히 거두지는 않으셨다.(삼하 7:14,15)
베드로도 비참한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중략)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눅 22:61,62) 주님이 나중에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을 때 그는 주님은 나의 마음을 살피시는 능력이 있으시니 자신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고 그는 신실한 태도로 열심히 주님을 섬겼다.
이처럼 참 신자는 심각한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끝까지 보존된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겠다.”(호 14:4) 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에도 신자는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지만 결코 온전히 궁극적으로 타락하지는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4) 참 신자의 마음에 있는 은혜의 원리는 잠시 동안 크게 위축될 수는 있지만 끝까지 안전하게 보존된다.
신자가 은혜의 원리를 활용하거나 행사할 때 때로는 매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는 결코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는 혹독한 한파(寒波)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거의 죽게 된 나무처럼 열매도 푸름도 생기도 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다 시들어 죽어 가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씨가 그의 안에 거한다.(요일 3:9)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잠 12:3)라는 약속이 무색해질 것이다.
베드로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의 실패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는 믿음의 원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리스도의 기도가 아무런 효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 주님의 기도는 항상 응답된다.
겨울철이 되면 가지들이 모두 시들어 죽은 것처럼 보여도 그 뿌리에는 여전히 생명이 보존되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자는 가장 비참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처했더라도 여전히 그의 안에 생명을 주는 은혜의 원리가 남아 있다. 봄이 돌아오면 나무가 다시 활력을 얻어 잎을 피우듯이 ‘의의 태양’이신 주님이 새로운 힘을 허락하시면 신자의 은혜도 다시 새롭게 활력을 되찾는다.
이 같이 은혜의 능력을 발휘하는 일은 잠시 중단될 수 있지만 한번 심긴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신자는 무기력한 상태로 전락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상태에서 절대 벗어나지는 않는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한 영광으로 이어질 때까지 안전하게 보존(保存) 된다. 지금까지 이 조항들이 진술하는 견인의 교리를 설명했다. 이번에는 견인 교리를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논증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논증들은 2항에서 주로 발견된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