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0) 성도의 견인(堅忍)

   제17 성도의 궁극(2)   

제1항 : 성도의 견인의 일반적 서술

1항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받아들여 성령으로 유효하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온전하게나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끝까지 확실하게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 받는다.(빌 1:6, 벧후 1:10, 요 10:28,29, 요일 3:9, 벧전 1:5,9)

제2항 : 성도의 견인의 근거  

2항 성도의 견인(堅忍)은 신자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선택의 작정에 근거하고, 성부 하나님의 값없는 영원한 사랑에서 비롯하며(딤후 2:18,19, 렘 31:3),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기도의 효험(히 10:10,14, 13:20,21, 9:12-15, 롬 8:33-39, 요 17:11,24, 눅 22:32, 히 7:25),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들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씨앗(요 14:16,17, 요-일 2:27, 3:9), 은혜 언약의 본질에 의존한다.(렘 32:40, 히 8:10-12)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절대적인 확실성이 생겨난다.(요 10:28, 살후 3:3, 요일 2:19)

제3항 : 성도의 일시적인 범죄들

3항 그러나 신자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위력과 견인의 수단들을 소홀히 여기는 태도에 의해 심각한 죄를 저지를 수 있고(마 26:70,72,74), 한동안 그런 상태에 머물 수 있다.(시  51:14)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사 64:5,7,9, 삼하 11:27),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며(엡 4:30),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와 위로를 잃고(시 51:10,12 계 2:4, 아 5:2-4,6),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며(사 63:17, 막 6:52), 사람들에게 비방할 거리를 주고(삼하 12:14), 양심에 상처를 입히며(시 32:3,4, 51:8), 일시적인 심판을  자초한다.(시 89:31,32, 고전 11:32)

(5) 성도의 견인은 ‘변하지 않는 선택의 작정’을 통해 보장된다.

인류 가운데 한정된 숫자의 사람들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해 창세 전에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증언하는 진리다.(엡 1:4, 살후 2:13, 행 13:48)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축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하시고 온갖 유혹의 덫에서 그들을 보존해 구원을 온전히 이루게 하시기로 결심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선택하신 사람이 궁극적으로 멸망한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목적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홀로 떨어져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본성처럼 절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 하나니”(말 3:6),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10)고 선언하셨다.

주님 자신도 신자들의 선택을 염두에 두시고 그들이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선택 받은 자들이 진리를 아는 지식을 소유한 뒤에는 온전하고 궁극적인 멸망으로 이끄는 유혹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할 수만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신자들이 그런 식의 유혹을 당할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6) 성도의 견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功勞)에 의해 보장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셨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죄를 모두 담당(擔當)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보증인(保證人)으로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그분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저주를 온전히 담당하셨다. 보증인은 자신이 보증하는 사람을 대신한다. 후자는 보증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혜택을 누린다.    

보증인이 빚을 대신 갚아 주었다면 채권자는 더 이상 그에게 채무 변제를 요구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이 주제에 적용해 보자.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곧 그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 그들 전부를 위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온전히 만족시키셨다면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공의(公義)의 원칙에 위배될 것이 분명하다. 성도가 은혜의 상태에서 벗어나 죄 가운데서 멸망한다면 이는 보증인과 채무자에게 배상을 두 차례 요구하는 것이나 같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죄를 속량하셨거나 하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속량하지 않으셨다면 그들 스스로 정의를 만족시켜야 하고, 그분이 그들을 대신해 정의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면 그들이 어떤 원인이나 이유로 정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에 역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새 언약은 신자들에게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온전한 용서를 약속한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그러므로 만일 참 신자의 타락을 가르치는 교리가 사실이라면 이 약속은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다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교리가 사실이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되고 신자가 은혜의 상태에서 벗어난다면 그분의 보혈이 한 사람의 죄인도 구원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3)

(7) 성도의 견인은 그리스도의 지속적이고 효과 있는 중보 기도를 통해 보장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자기 백성을 값 주고 사셨다. 또한 그분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5)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그분이 베드로를 위해 하셨던 것처럼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분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중략)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1,15)라고 기도하셨다.          

이런 기도는 주님의 제자들이나 당시에 그분을 믿었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라고 덧붙이셨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가 효험이 있다면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온전히 타락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 틀림없다. 주님은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만족시키셨고 또 그것으로 의의 공로를 세우셨다. 따라서 그분이 자기 백성을 위해 드리시는 중보 기도는 모두 실질적인 효력을 지닌다. 성부 하나님은 항상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요 11:42)

(8) 성도의 견인은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보장된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 성령의 약속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성령의 선물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참 신자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복된 특권이다. 이 사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라는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성령은 잠시 왔다 가는 손님처럼 신자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말했다. 성도의 견인은 신자 안에 계속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안전하게 보장된다.      

성령이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에 합당한 자로 만드시고 그들을 일평생 보호하시어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구원의 날까지 인(印) 치심을 받았다. 그분은 그들이 장차 받게 될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후 1:22, 엡 1:13,14) 보증은 미래에 전부를 소유하는 것을 보장하는 효력을 지닌다. 성령이 우리가 받게 될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는 것은 그들이 장래에 하늘의 지복(至福)을 확실하게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는데도 은혜의 상태로부터 온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벗어나 하늘의 기업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이 불확실하고 신뢰할 수 없는 보증이 되신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9) 성도의 견인은 은혜 언약의 변하지 않는 속성에 의해 보장된다.

은혜 언약은 우리의 복종(服從)이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기 때문에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삼하 23:5) 할 수밖에 없다. 이 언약의 취지는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라는 말씀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경외심을 심어 주어 자기를 떠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그분은 그들에게 계속 은혜를 베푸실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에 경외심을 심어주어 항상 은혜를 받게 하심으로써 타락하지 않도록 끝까지 보전하실 것이다. 성도의 견인교리의 확실성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다. 성도의 견인교리를 입증하는 증거는 이 조항들이 밝히고 있는 논증들 외에도 많다.

  • 성경은 곳곳에서 성도의 견인을 약속한다.(사 54:10, 요 10:27-30 히 13:5)
  •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들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뒷받침한다.
  • 신자의 유효소명과 영화의 교리가 또 하나의 증거다.(롬 8:30)
  •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완전하신 속성을 지닌다.(빌 1:6)
  •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서로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요 15:5, 고전 12:12, 요 14:19,20)

성도의 견인교리는 때로 성화(聖化)를 방해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오해가 가능한지 우리는 얼른 납득하기 어렵다. 참 신자는 끝까지 확실하게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 받지만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경우에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와 위로를 잃고,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며, 사람들에게 비방할 거리를 주고, 양심에 상처를 입히며, 일시적인 심판을 자초한다.4)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덕을 세우는 일과 스스로의 평안에 관심이 있다면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주의모들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눅 1:6) 행하려고 노력하고 싶은 열정을 지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말하는 성도의 견인은 끝까지 거룩하게 보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교리가 경솔하게 죄를 짓게 만드는 동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신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더욱 열심을 낼 것이 틀림없다.(고후 5:14,15) 

성도의 견인교리는 하나님이 성도를 보존하시기 위해 제정하신 수단들을 소홀히 하려는 생각을 부추기지 않는다.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고 말씀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고 했고 요한 사도는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요이 1:8)라고 당부했다. 성경에는 이런 권고와 당부의 말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근거로 내세워 성도들이 은혜의 상태에서 온전히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성적(理性的)인 피조물로 대하신다. 그런 권고와 당부의 말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그분은 그런 말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신자의 배교(背敎)를 막아 끝까지 보존될 수 있게 이끄신다. 하나님은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시어 기꺼운 마음으로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 같이 자신이 행할 일을 행하시면서 동시에 신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요구하신다. 바울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고 말했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 >  

   < 미주 >

1) Decret of Justifications, canon 23

2) Dick, Lectures on Theology, vol. 3, P. 516.

3) Dick, Lectures on Theology, vol. 3, P. 521.

4) 논리적인 저술가들이 모두 이 주계를 다루었다. 이 주제는 다음의 자료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Lime Street, lectures, Ser. 9. Berry Street, Sermons, Ser. 24. Elisha Coles, God’s           Sovereignty. Sam Wilson, Sermons, Ser. 11-15. President Edwards, Remarks on  important Theological Controversies, chap. 5.

히브리서 6:4-6의 해석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복음에 대한 모든 기쁜 반응이 구원적인 반응은 아니라고 경고하셨다. 돌짝밭 마음을 가진 청중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난이 오면 곧 시들고 만다.  

또 성경은 사울과 아히도벨과 가룟 유다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처럼 한때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실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본래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요일 2:19)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대한 다양한 확신이나 감동이 있었는지 모르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결핍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들이 아니었다. 이것이 히브리서 6:4-6에 대한 전통적이며 일반적인 해석이다.

오웬(John Owen, 1616–1683)은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구원에 있어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둘째, 그런데 어떤 자들은 중도에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난다. 셋째, 만일 그가 죽을 때까지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