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1) 은혜와 구원의 확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1)  

은혜와 구원의 확신

   18 은혜와 구원의 확신   

제1항 : 구원에 대한 거짓 확신과 참 된 확신

1항 위선자들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릇된 소망과 육적인 생각에 치우쳐 스스로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상태에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욥 8:13,14, 미 3:11, 신 29:19, 요 8:41) 그런 그들의 소망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마 7:22,23) 그러나 주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고,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분 앞에서 선한 양심에 따라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현세에서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요일 2:3, 3:14,18,19,21,24, 5:13)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기뻐할 수 있다. 그들의 소망은  그들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롬 7:2,5)

제2항 : 구원의 참 된 확신의 근거  

2항 이런 확실성은 그릇된 소망(히 6:11,19)에 근거한 억측이나 있음직한 신념이 아니라 구원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 (히 6:17,18), 약속된 은혜들을 드러내는 내적 증거(벧후 1:4-5,10,11, 요일 2:3, 3:14, 고후 1:12),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시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의 증언에서 비롯한다.(롬 8:15,16) 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다.(엡 1:13,14, 4:30, 고후 1:21,22)

설            

이장의 주제인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은혜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고 있다는 신자의 개인적인 확신(確信)을 다룬다. 이 주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논박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특별한 계시가 따로 주어지지 않는 한 자신이  구원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나 신념을 뛰어넘는 확신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의심과 불확실성을 부추김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는다. 즉 그들은 교회의 기도와 성인(聖人)과 순교자들의 공로와 사제(司祭)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사면을 통해 어느 정도 의심과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다면서 신자들을 현혹시킨다.

한편 신자의 궁극적인 견인(堅忍)을 일관되게 부인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자신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구원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 외에 더 큰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 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고 반드시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 다운 생각이다.  

1. 구원의 확신에 찬 성경의 인물들

이 조항은 특별하거나 직접적인 계시가 없더라도 성도가 일반적인 수단을 옳게 사용하기만 하면 억측이나 있음직한 신념을 뛰어넘어 궁극적인 구원과 은혜의 상태를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논증들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1) 성경은 성도들에게 스스로를 성찰(省察) 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권고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 줄 알지 못하는 것은 책망 받을 일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고 권고하면서 아울러 그 방법을 제시했다. 즉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고 했다.

성도는 이런 방식으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신할 수 있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베드로 사도의 이 같은 권고는 바울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한 권고와도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히 6:11) 이런 권고의 말들은 성도가 특별한 계시가 따로 없어도 얼마든지 현재의 경건과 장래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2) 성경은 구원 받은 참 성도의 표징과 속성을 보여 준다.

성도는 구원 받은 참 성도의 표징(標徵)과 속성(屬性)을 통해 영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중략)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3,5)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중략)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4,19)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통해 성도의 확실한 특징들을 보여 주며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고 말했다.

(3)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의 신앙 위인들은 구원의 확신을 분명하게 고백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 하리이다.”(시 17:15)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4) 욥도 극심한 고초를 겪는 중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 자가 살아 계시니”(욥 19:25)라고 확신했다.            

신약성경의 신앙 위인들의 경험은 그보다 훨씬 더 분명하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도를 대신하여 승리에 찬 강한 구원의 확신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고후 5:1 참고 ) 

사도 바울은 또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내세의 지복(至福)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을 드러냈다. 그는 디모데에게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고 했다. 바울의 확신은 ‘몸을 떠나면’ 즉시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분명했다.(고후 5:8) 그는 이런 구원의 확신을 가졌기에 차라리 죽어 육체를 떠나 곧바로 주와 함께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딤후 4:6-8) 성경의 이런 사례들만으로도 성도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2. 구원의 확신의 근거

구원의 확신은 ‘구원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진리(성경)에 근거한 틀림이 없는 믿음의 확신’, ‘약속된 은혜들을 드러내는 내적 증거’,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라고 말씀하시는 양자(養子)의 영이신 성령의 증언’에서 비롯한다. 구원의 확신은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근거하지 않고 그 모두에 근거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약속은 참 성도의 독특한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속성을 지닌 성도들은 모두 구원 받는다는 틀림없는 확신을 심어 주고, 은혜의 내적 증거는 우리가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준다. 우리는 그것을 근거로 우리가 지금 은혜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장차 영원히 구원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때로는 영혼의 눈이 감길 때도 있다.(눅 24:16) 그런 경우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조차도 실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기 마련이다.(사 50:10) 겉으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과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룩한 확신에 도달하려면 그런 행위들이 거짓이나 위선이 아닌지 그 본질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 확신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신자에게 믿음과 회개를 허락하신 성령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신다.(전 2:12) 태양이 스스로의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우리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Bell’s notes to Witsius, Irenical Animadversions, pp. 305-306.)

혹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즉시 자신의 믿음을 의식(意識)할 수 있으며 그런 의식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첫 번째 증거라고 가르친다.(구원파, 편집자 주) 신학자들은 이런 의식을 ‘믿음의 반사 행위’라고 말한다. 이는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에 대한 의식이나 스스로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사적으로 깨닫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조항은 그런 증거를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조항은 그런 의식이 참 신앙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이 조항은 ‘은혜와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어도 자신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한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도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가졌는지 즉각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믿음의 정도는 다양하고 그 증거는 믿음의 강도에 비례한다.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면 믿음도 더불어 강해지고 그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도 확실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브라함, 백부장, 가나안 여인과 같이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만큼 확실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자신이 거짓 없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 의식할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성령의 증언하신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 사도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성령이 증언하시는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내적 계시나 직접적인 암시를 통해 신자의 양자됨을 증언하신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친히 물과 피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방법으로 곧 마음속에 영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부어 주심으로서 우리의 양자됨을 증언하신다.”고 말한다. 이처럼 ‘성령의 증거’는 신자들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입증된다.

그러나 성령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으키시는 효과나 사역을 통해 우리의 양자됨을 증언하신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목회자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그들은 즉각적인 증언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성령의 증언을 통해 신자는 자신의 양자됨과 거기에서 비롯하는 안전감을 확신하기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성령이 즉각적인 계시나 암시를 통해 증언하신다는 견해를 강하게 논박했다. 그는 그런 그릇되고 기만적인 개념으로부터 많은 해악이 초래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증언이라는 표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성령의 영향력에 관한 그들의 개념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미혹되고 있다. 그들은 성령의 증언을 성령이 마음에 영향을 미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입증해 줄 증거를 보여 주시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내면의 즉각적인 암시로 이해해 하나님이 은밀한 음성이나 인상을 통해 마음속에서 ‘너는 내 자녀다.’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증언이나 증거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    

최근 학자들도 이 주제에 동일한 견해다. 신학자들 간에 그런 의견일치기 이루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만족스러운 일이다. 딕 박사는 “성령은 신자들의 양자됨을 증언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영혼에 역사하시어 그들의 양자됨의 증거를 보여 주시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만큼이나 분명하게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확실하게 일깨워 주신다.”고 말했다.(Dick, Theological Lectures, vol. 3, p. 415.)  또한 찰머스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방법은 매우 분명하다. 많은 사람의 해석에 따르면 성령은 우리의 영을 향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언하시고 또한 증명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은혜의 사역을 행하시고 그 사역이 우리의 양심에 분명하게 느껴지게 만드신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인격이 변화된 특징을 감지할 수 있고 그런 변화를 우리 자신의 영에 의한 활동으로 간주해 우리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특징이나 속성에 익숙해지게 된다.”(Chalmers, Lectures on the Romans, vol. 3. pp.64-66,68.) 

제3항 : 구원의 확신을 갖는 방법과 유익

3항 이 틀림없는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참 신자는 오랫동안 기다리며 많은 어려움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요일 5:13, 사 50:10, 막 9:24, 시 188편, 77:1-12) 특별한 계시가 없어도 일반적인 수단을 올바로 사용하면 성령이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것들을 알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에 능히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전 2:12, 요일 4:13, 히 6:11,12 엡 3:17-19) 따라서 더욱 힘써 자신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의무이다.(벧후 1:10) 그렇게 하면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화와 기쁨,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 복종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즐거움이 더욱 커지고(롬 5:1,2,5, 14:17, 15:13, 엡 1:3,4, 시 1:6,7, 119:32) 확신의 열매를 맺게 되어 방탕함에 치우치지 않게 된다.(요일 2:1,2, 롬 6:1,2, 딛 2:11,12,14, 고후 7:1, 롬 8:1,12, 요일 3:2,3 시:130:4 요일 1:6,7)

제4항 : 구원의 확신 상실과 회복    

4항 참 신자라도 구월의 확신이 다양한 방식으로 흔들리거나 감소하거나 중단 될 수 있다. 그런 결과는 확신을 유지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특별한 죄를 저질러 양심에 해를 입혀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거나, 갑작스럽고 격렬한 유혹에 직면하거나, 하나님이 그 얼굴빛을 거두시어 자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조차 빛이 없는 상태에서 어둠 속을 거닐게 하시는 경우에 발생한다.(아 5:2,3,6, 시 51:8,12,14, 엡 4:30,31, 시 77:1-10, 마  26:69-72, 시 51:22, 88편, 사 50:10) 그러나 하나님의 씨앗과 믿음의 생명, 그리스도와 형제에 대한 사랑과 마음의 진실함과 의무를 행하려는 양심은 결코 온전히 사라지지 안 는다.(요일 3:9, 눅 22:32, 욥 13:15, 시 73:15, 51:8,12, 사 50:10) 적당한 때가 되면 성령의 역사로 인해 확신이 되살아나고 그렇게 되기까지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않도록 보호 받는다.(미 7:7-9, 렘 32:40, 사 54:7-10, 시 22:1, 88편)

해설    

은혜(恩惠)의 상태에 있다는 확신이 믿음의 본질(本質)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확신은 믿음의 열매와 증거를 의식하는 데서 비롯한다. 믿음은 그런 열매와 증거를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믿음은 증언에 근거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누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증언이 없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이런 확신은 주로 반성이나 이성적 추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장에서 말하는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확신도 없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구원 신앙’ 장에서 그런 확신을 언급한 바 있다.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은 구원 신앙의 핵심적인 활동에 해당한다.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려면 그분을 통해 구원 받는다는 것을 믿거나 확신하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처럼 누군가를 의지해 무엇을 얻으려면 그가 자신에게 구하는 것을 내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나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나 영적인 차원에서나 확신이 없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어떤 보고서를 믿으려면 먼저 그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필요하고, 어떤 약속을 믿으려면 약속을 한 사람이 그 약속을 실천할 것이라는 확신이나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구원 받을 것이라는 신념과 확신이 필요하다.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확신은 일반적으로 ‘믿음의 확신’이라 불리고,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감각의 확신’이라고 불린다. 전자는 객관적인 확신이고 후자는 주관적인 확신에 해당한다. 이 둘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된다. 전자의 대상은 복음의 증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고, 후자의 대상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역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된 진리에만 근거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사역 둘 다에 근거한다. 전자는 복음의 값없는 제공과 약속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내주셨다는 확신을 말하고, 후자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다는 확신을 말한다. 전자의 확신은 복음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지만 후자의 확신은 참 믿음의 행위와 분리될 수 있고, 또 실제로 종종 분리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들을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믿음의 확신감각의 확신
객관적인 확신주관적인 확신
복음의 증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역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된 진리에만 근거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사역 둘 다에 근거
값없는 복음과 약속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내주셨다는 확신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다는 확신
복음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참 믿음의 행위와 분리될 수 있고 종종 분리되어 나타남

이 주제와 관련해 우리가 피해야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 하나는 확신이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와는 무관하고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증거와 표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구원의 확신은 구원신앙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사람은 참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표징과 증거를 통해 얻어지는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지만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 곧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된 확신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신자는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확신을 가졌더라도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 신앙을 가졌더라도 여전히 많은 불신앙과 부패의 요소가 남아 있어 신자를 자주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 조항에 포함된 다른 진리들은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도 충분할 듯하다.

  • 신자는 일반적인 수단을 올바로 사용하면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신자는 확신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성실한 노력을 기울여야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신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다. 안전을 보장 받지는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위로를 얻으려면 그와 같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 모든 신자가 이런 확신을 얻는 것은 아니다. 확신 있게 살아오다가도 어느 순간 확신이 약해질 수 있고 심지어는 한동안 확신을 잃을  수도 있다. 이 확신은 육체의 질병, 나태한 태도, 유혹, 때때로 저지르는 죄, 하나님의 징계(성경은 이런 경우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얼굴을 가리웠다고  표현)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    
  • 신자는 확신을 잃을 수는 있지만 은혜로운 습관이나 성향을 온전히 상실하거나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는 않는다. 신자의 확신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적절한 때에 다시 회복된다.
  • 이런 확신은 신자로 하여금 죄를 마음에 저지르도록 부추기지 않고 오히려 열심히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확신을 가졌다고 자랑을 하면서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은 거짓 신자밖에 없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 안에서 흠 없이 행하지 않으면 참된 확신을  갖거나 유지할 수 없다. 사도들은 이구동성으로 구원의 확신의 참된 특성이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롬 13:11-14, 고전 15:58, 요일 3:2,3)(*)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