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5) 예배와 안식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5)  예배와 안식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신 5:7)

   제21장 예배와 안식일(1)    

제1항 : 예배의 올바른 방법

1항 자연의 빛은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요 주님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만물에게 선을 행하시기 때문에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경외하고, 사랑하고, 찬양하고, 사모하고, 신뢰하고, 섬겨야 한다.(롬 1:20, 행 17:24, 시 119:68, 렘 10:7, 시 31:23, 18:3, 롬 10:12, 시 62:8, 수 24:14, 막 12:33) 그러나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분의 계시된 뜻에 의해 제한된다. 따라서 인간의 상상과 의향이나 사탄의 암시에 따라 보이는 형태로나 성경이 규정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신 12:32, 마 15:9, 행 17:25, 마 4:9,10, 신 15:20, 출 20:4-6, 골 2:23)

해설      

예배란 무한히 완전하신 하나님을 공경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우리의 으뜸 되는 선이요, 유일한 행복으로 알아 믿고 복종한다. 예배는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지닌다. 전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내적 공경심(恭敬心)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랑과 믿음과 경외심과 신뢰를 비롯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한편 후자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령을 준수함으로써 그 공경심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조항은 하나님을 외적으로 예배하는 것과 관련해 그분이 친히 정하신 합당한 방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시기 때문에 그 방법을 규정하는 것은 그분만의 특권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예배의 유일한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 인간의 상상(想像)으로 유익하고 보기 좋은 것을 만들어 냈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규칙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인간이 제멋대로 수정하거나 더 늘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고 말씀하셨다.

예배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또 예배 자들의 헌신을 더욱 부추길 수 있다는 구실로 의미 있어 보이는 의식을 예배에 첨가하는 행위는 미신과 자의적 숭배를 일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울러 이 조항은 ‘보이는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를 단죄한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는 행위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장 부패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불가해한 영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물리적인 형상이나 형태로 나타낼 수 없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사 40:25)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중략)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신 4:15,16)고 말씀했다. 또한 그는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신 4:23)고 명령했다.    

성경은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어 예배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어떤 것을 하나님과 유사하게 만들려는 의도 없이 단지 상징적인 표현에만 그치는 행위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떠오르게 하고 우리의 헌신을 부추기기 위한 목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종교적 직임을 수행하는 일은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죄에 해당한다.(출 20:4)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계명이 자신들의 교리와 관습을 단죄한다는 것을 의식해 그것을 첫 번째 계명에 부가적(附加的)으로 딸린 내용으로 간주하고 교리문답과 예전에서 배제했다.

마지막으로 이 조항은 형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성경이 규정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행위를 아울러 단죄한다. 사소한 의식들로 예배를 오염시키는 행위는 비단 로마 가톨릭교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부 개신교 교회도 가톨릭교회의 의식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성직자의 특별한 예복, 수많은 절기를 지키는 관습, 교회에 제단을 세우는 행위, 세례를 베풀 때 십자가의 상징을 사용하는 행위, 예수님의 이름 앞에 절하고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행위 따위를 요구한다.

이런 관습은 모두 미신(迷信)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근거가 없는 인간의 고안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습을 요구하고 지키는 사람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마 15:9)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제2항 : 예배의 대상과 중보자

2항 예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만 드려야 한다.(마 4:10, 요 5:23, 고후 13:13) 천사나 성인(聖人)이나 다른 피조물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골 2:18, 계 19:10, 롬 1:25) 타락한 이후에는 중보자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없고 다른 이의 중보(中保)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만이 허용된다.(요 14:6, 딤전 2:5, 엡 2:18, 골 3:17)

해설        

이 조항은 예배의 대상(對象)을 명시한다.

(1) 이 조항은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고 진술한다.

첫 번째 계명은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할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탄이 그리스도께 자기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분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고 하셨다. 요한 사도가 천사를 예배하려고 했을 때도(아마도 놀라 당황했거나 천사를 예수님으로 착각했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천사는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22:9)고 말했다. 천사는 오직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고 암시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신성(神性) 안에는 삼위(三位)가 계신다. 삼위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리신다. 성삼위 하나님을 모두 예배해야한다. 신자들은 대개 성령의 도우심과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 성부께 기도를 드리지만 그것은 성삼위 하나님 모두에게 드리는 예배에 해당한다. 성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 언급되는 순간 다른 두 분도 동시에 포함 된다. 성삼위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이유는 그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선한 천사들과 세상을 떠난 성인들도(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된 자들) 예배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항은 분명하게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천사나 성인(聖人)이나 다른 피조물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바울 사도는 천사를 예배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다. 그는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골 2:18)고 말했다. 요한 사도가 천사를 예배하려고 하자 천사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라고 말했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중략) 나는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19:10)

교황주의 자들은 죽은 성인(聖人)들 특히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성인(聖人)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그들에게 제단과 성전을 봉헌하고 향을 태우는 등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그들에게 바친다. 그들은 성인들에게 바치는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정도나 질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척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성경은 성인들을 숭배하는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신자들은 자신들을 인도했던 자들을 기억해야 한다.(히 13:7) 그러나 그들을 숭배하라는 암시는 전혀 없다.

사도들과 초기 신자들 가운데 몇 사람 특히 큰 야고보와 스데반은 서신서들이 기록되기 전에 순교했다. 그러나 서신서에는 그들에게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이 단 한 구절도 나타나지 않는다.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도처에 편재(遍在) 한다거나 그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편재(遍在)와 전지(全知)하심은 피조물에게 전가(轉嫁)되지 않는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屬性)이다. 이 조항은 천사와 성인 숭배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을 숭배하는 행위를 단죄한다.

교황주의 자들은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 외에도 다른 많은 것을 숭배한다. 그들은 세상을 떠난 성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유골(遺骨)을 숭배한다. 로마 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는 유골숭배를 정당화했다. 그런 관습은 지금까지도 교황주의 자들 사이에서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유골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미신 행위가 발생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게 하셨다.(신 34:6) 

따라서 성인들의 시신(屍身)을 잘 매장해 예우를 다하는 것으로 족할 뿐 그 이상의 숭배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스데반의 시신을 예를 갖춰 장사하는 것으로 만족했다.(행 8:2) 그러므로 성인의 유골을 숭배하는 행위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관습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런 행위는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또한 트렌트공의회는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 성인들의 형상을 예를 갖춰 경배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교황주의 자들은 그런 규정에 따라 형상들 앞에 절하고 입 맞추고 향을 태우고 기도를 드린다. 그들은 형상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주장한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도 그와 똑같은 주장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상숭배의 죄책을 면제 받지 못했다.

이스라엘민족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면서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말했다.(출 32:5)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인정하시지 않고 크게 진노하셨다.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그것들을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했다.(왕상 12:26) 성경은 이 같이 형상 자체를 숭배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경배함으로써 참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주장하는 행위까지도 모두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 조항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려면 중보자(中保者)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는 언제라도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고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교황주의 자들은 천사들과 성인들과 동정녀 마리아가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仲裁)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조항은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진술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중략)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고 말했다. 그럼에도 교황주의 자들은 ‘구원의 중보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지만 증보기도의 중보자는 그리스도와 천사들과 성인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중보기도가 그분의 말할 수 없이 귀한 속죄(贖罪)의 공로(功勞)에 근거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代言者)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셨다.(요일 2:1,2) 그리스도께서 중보 기도의 증보자가 되시는 이유는 그분만이 우리를 위한 대속(代贖) 사역을 이루신 구원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중보기도만이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영화롭게 된 성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은 값없는 은혜 덕분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줄 공로(功勞)가 아무것도 없다. 교황주의 자들은 그럼에도 그들이 우리의 기도를 들을 수 있고 우리의 형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사변(思辨)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를 드리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예를 욕되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의 직임을 등한시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을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으시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린다는 생각이 그분들의 영광을 욕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바울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라고 증언했던 그리스도보다 성인들이 동정심이 더 많다고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예를 깎아내리고 반대로 성인들에게는 신성의 영광과 속성을 부여하는 결과가 된다. 그들은 성인들이 도처에 편재하며 전지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동정녀 마리아가 수많은 개인이 각처에서 동시에 드리는 기도를 다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개신교 신자들은 천사와 인간이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오직 영광스러운 중보자 곧 성부가 항상 응답해 주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만을 전적으로 의지한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