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6) 예배와 안식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6) 예배와 안식일

청교도들의 경건한 주일예배 모습
제21장 예배와 안식일(2)
제3항 : 예배 시 올바른 기도법 83
3항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배의 특별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빌 4:6) 감사의 기도를 요구하신다.(시 65:2) 기도가 받아들여지려면 성자의 이름과(요 14:13,14, 벧전 2:5)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해(롬 8:26) 그분의 뜻에 따라(요일 5:14) 이해와 공경심과 겸손과 열정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로(시 47:7, 전 5:1,2, 히 12:28, 창 18:27, 약 5:16, 1:6,7, 막 11:24, 마 6:12,14,15, 골 4:2, 엡 6:18) 기도드려야 한다. 소리 내어 기도할 때는 모두가 알고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전 14:14)
제4항 : 예배 시 합당한 기도 내용
4항 기도는 합법적인 것들(요일 5:14)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생명을 얻게 될 사람들을 위해(딤전 2:1,2, 요 17:20, 삼하 7:29, 룻 4:12)드려야 한다. 죽은 자들이나(삼하 12:21-23, 눅 16:25,26, 계 14:13)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를 드려서는 안 된다.(요일 5:16)
해설
이 장의 1항과 2항은 예배를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관해 말했다. 이제 3항과 4항은 예배의 여러 요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 이 조항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의 특별한 요소인 기도를 다룬다.
기도는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屬性)과 그 속성들을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역을 경건한 태도로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을 비롯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감사하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혜를 구하는 행위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간구의 기도만이 기도에 해당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조항들이 가르치는 교훈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도는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우리는 의존자(依存者)인 피조물(被造物)이기 때문에 기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네려오나니”(약 1:17)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고 날마다 우리의 필요한 것을 그분께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시고 또 무한(無限)히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기꺼이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기도의 필요성(必要性)과 효용성(效用性)을 부인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물론 기도는 하나님이 모르시는 정보를 그분께 알려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분의 마음을 움직여 호의(好意)를 얻어 내는 수단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면 기도를 드려야 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많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의 부족함을 더욱 깊이 의식하게 만들어 우리가 구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부추긴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축복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수단(手段)이다. 이 수단을 하나님이 친히 정해 주셨다. 그분은 구하라고 명령하셨고 구하면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마 7:7)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많이 허락하셨다. 그분은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라고 말씀하셨다.
악인들과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이따금 제기되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될 무렵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이런 그릇된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런 주장이 우리 시대에 또다시 제기되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불신자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물론 믿음의 기도만이 응답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견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기도는 자연의 빛이 요구하는 의무다. 따라서 이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賦課) 된다.(욘 1:5,6,14)
(2) 성경도 기도가 아무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부과되는 의무라고 가르친다.(시 65:2, 빌 4:6, 살전 5:17)
(3) 불신자들과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경우 기도해서는 안 된다면 그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기도하지 않는 행위를 항상 큰 죄로 간주한다.(시 10:4, 렘 10:25)
(4) 베드로 사도는 마술사 시몬이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라고 말하면서도 그에게 그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요구했다.(행 8:22,23)
(5) 하나님은 기도를 모든 사람이 의지해야 할 은혜의 수단으로 정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가 하나님이 확립하신 질서에 따른 수단이기 때문이다.(마 7:7)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바라는 사람은 누구나 기도로 그것을 구해야 한다.
(6) 악인이 밭을 갈거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올바른 방식으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 해당하지만 그래도 기도행위 자체는 선하고 합법적이다. 기도하는 일을 등한시하는 그것이 더 큰 죄에 해당한다.(잠 15:8, 21:4) 우리는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기도를 요구하신다.”는 조항에 십분 동의한다.
2.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합법적인 것들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의 계시 된 뜻(성경)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기도의 규칙이다. 그러나 이런 규칙은 우리의 기도를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 안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심하고 하나님께 일시적인 축복을 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게 있어야 할 줄을’(마 6:32)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축복을 더 많이 구해야 한다. 왜냐면 주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도를 드리면 그분의 뜻과 우리의 소원이 일치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라는 아름답고도 관대한 약속을 통해 큰 용기를 얻을 수 있다.(요일 5:14)
3.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야 한다.
주님은 종종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라고 하셨고 자신의 이름으로 드리는 정당한 요청과 소원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요 14:13,14, 16:23,24)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단순히 기도에 덧붙이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로 기도를 끝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함으로 기도할 용기를 얻는 것 곧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功勞)와 중보(仲保)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고 은혜로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그분 능력에 의지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4. 기도할 때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한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의 조건으로 종종 언급한다.(엡 6:18, 유 1:20)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기도하면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때문에 잘못 기도할 위험이 크고 어떻게 드리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지도 알기도 어렵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밝혀 필요한 것을 깨우쳐 주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약속한다. 성령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담대하게 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드리는 데 필요한 은혜로운 심령 상태를 갖출 수 있게 도와주신다.(롬 8:26,29)
5. 하나님은 올바른 태도의 기도를 받으신다.
기도의 올바른 태도에는 다양한 요소가 포함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태도로 기도해야 한다.
(1) 이해가 필요하다.(시 47:7) 구체적으로 말해 기도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 우리의 필요, 응답받는 기도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기도를 독려하는 약속 등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2)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엄과 온전히 거룩하심을 깊이 의식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공경심이 필요하다.(히 12:28)
(3) 우리의 부패함과 부족함을 깊이 의식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창 18:27)
(4) 우리의 필요를 온전히 의식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축복의 귀한 본질을 이해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열정이 필요하다.(약 5:16)
(5)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구하는 것은 반드시 받게 된다는 확신에서 우러나는 믿음이 필요하다.(약 1:6)
(6)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고, 우리가 기도해야 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이 필요하다.(딤전 2:8)
(7) 은혜로운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거듭 간구를 반복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마 15:22-28, 엡 6:18)
(8)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과 기도 응답을 바라는 소망이 필요하다.(시 5:3, 미 7:7)
6. 공개적인 기도는 모두 아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 명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언어로 공적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거의 1,000년 동안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논박한다. 이 관습은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에 굳이 긴 논증으로 이 조항을 옹호할 필요는 없다. 단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공적 기도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드리는 것이 온당하다고 말했던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다섯 마디 말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더 낫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서 하라.”(고전 14:26)라는 일반원칙을 제시했다.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예배를 드린다면 어떻게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겠는가?
7.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안 된다.
이 조항은 “기도는 (중략)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생명을 얻게 될 사람을 위하여 드려야 한다. 죽은 자들이나 죽음에 이르는 죄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진술한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위정자들과 사역자들과 형제들은 심지어는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자기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듯이(요 17:20) 우리도 그분이 재림하시기까지 그분의 나라가 세상에서 더욱 널리 확장되도록 기도해야 한다.(시 102:18)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명제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와 미사(Mass)를 드리면 그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논박한다. 성경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나 하나님이 그들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약속은 물론이고 그런 기도를 드렸던 사례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위해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딤후 1:18)라고 기도했지만 당시에 그가 죽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다윗은 자기 아들이 죽자 즉시 그를 위한 기도를 중단했다.(삼하 12:22,23) 죽은 자의 상태는 바뀔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로 그들을 유익하게 할 수 없다.(눅 16:22-26)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려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요한 사도의 말에 근거한다. 그는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기도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사망에 이르는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오직 그것뿐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를 드려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죄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속성 때문이다.
제5항 : 예배의 올바른 요소들
5항 경건한 두려움으로 성경을 읽는 것(행 15:21, 계 1:3), 건전한 설교를 전하는 것(딤후 4:2), 양심적으로 말씀을 듣는 것, 이해와 믿음과 공경심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약 1:22, 행 10:33, 마 13:19, 히 4:2, 사 66:2), 마음속에 거하는 은혜로 시편을 노래하는 것(골 3:16, 엡 5:19, 약 5:13),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고 합당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요소에 해당한다.(마 28:19, 고전 11:23-29, 행 2:42) 이 밖에도 맹세와(신 6:13, 느 10:29) 서원(사 19:21, 전 5:4,5), 엄숙한 금식(욜 2:12, 에 4:16, 마 9:15, 고전 7:5) 특별한 때 드리는 감사도(시 107편, 에 9:22) 여러 때와 절기에 따라 경건하고 거룩한 태도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한다.(히 12:28)
해설
앞에서는 기도의 의무를 다루었으나 이 조항은 예배의 다른 요소들을 언급한다. 이 가운데는 거의 항상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요소들과 이따금 이루어지는 특별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1. 성경 읽기
공중 앞에서(느 8:8, 눅 4:16) 가족들 사이에서(신 6:6-9, 시 78:5) 개인적으로(요 5:39) 성경 읽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극진한 공경심이 필요하다. 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직 성령님만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다는 굳센 확신과 말씀 안에 계시 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고 복종하려는 마음과 그 내용과 의도를 부지런히 파악하려는 열정을 비롯해 묵상과 적용과 자기 부인의 태도와 기도가 아울러 필요하다.
2. 말씀 선포와 말씀 듣기
설교는 하나님이 정하신 의식이자 세상의 마지막 때까지 교회 안에서 계속 이루어져야 할 사역이다.(고전 1:21, 마 28:20) 설교 사역의 직임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교회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다음의 증거들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다.
(1) 성경은 복음 사역자들을 이렇게 부른다. ‘목사, 교사,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 양 떼의 감독, 교회의 사자’ 등이다.
(2) 그들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훈계하며(딤후 4:2, 2:25), 성례를 집행하고(마 28:19, 고전 11:23),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양 떼를 위해 기도하고(히 13:17), 양 떼를 감독하며, 읽고 권고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중략)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딤전 4:15) 해야 한다.
(3) 복음 사역자들에 대해 일반 신자들도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신들을 위해 수고하고 또 다스리는 그들을 인정하며(살 전5:12), 그들이 감당하는 사역의 수고를 생각해 그들을 귀히 여기고(살전 5:13), 자신들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며(히 13:17),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갈 6:6),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살후 3:1) 이런 증거들은 설교 사역이 교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경 읽기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지만 설교 사역은 은사가 있고 그 직임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충분하게 입증 된 사람만이 감당해야 한다. 신자들은 각자의 은사와 기회를 살려 서로 권고하며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그리스도로부터 설교자로 부르심 받지 않았다면 설교 사역을 감당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그 거룩한 직임을 다른 교사들에게 부탁했고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충실한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기라고 당부했다.
교회에서 이미 설교자의 직임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권위로 설교자로 임명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설교 사역을 감당할 권한을 가질 수 없다. 초대교회 경우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장로회에서 이루어진 안수를 통해 엄히 구별했다.(딤전 4:14) 사람들에게 복음을 규칙적으로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설교사역의 성패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축복에 달려 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 축복을 기대할 수 없다.(렘 23:32) 설교자의 소명은 사역자 자신의 위로와 용기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왜냐면 설교사역에는 특별한 어려움과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니면 비록 설교사역을 해도 그분의 도우심과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롬 10:14,15, 행 26:16,17)
3. 시편 찬송
구약시대는 시편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일부였다. 이 예배 요소는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예배와 구별되며(시 69:30,31), 신약시대도 시편 찬송은 폐지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엡 5:19, 골 3:16) 그리스도와 사도들도 시편을 노래했다.(마 26:30, 행 16:25) 하나님은 특히 다윗의 시편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시고 공적인 찬양을 드릴 때 사용하게 하셨다. 시편 찬송은 신약교회에서도 변함없이 지속이 된다. 사도들은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예배는 폐지되었다고 강조했지만 다윗의 시편이 복음적인 예배에 적합하지 않다고 암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만일 시편 찬송이 신약시대에 적합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대신해 다른 찬송가가 주어졌을 것이다. 시편에는 성령이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해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듯한 구절들이 많다. 다윗은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라고 노래했다. 탁월한 헨리가 언급한 대로 이 말씀은 다윗이 지은 시편들이 세상의 마지막 때까지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 영(靈)으로는 물론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뿐 아니라 아름답게 찬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시 33:3) 예배드리면서 온 회중이 한목소리로 시편을 찬양할 때는 모두 거룩한 음악에 맞춰 아름답게 부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해력을 가지고 가사의 뜻을 새기며 마음을 담아 부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시 47:7, 108:1, 고전 16:15)
4. 성경대로 하는 성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고 합당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례는 뒤에서 충분하게 다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겠다.
5. 맹세와 서원
이것도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겠다.
6. 엄숙한 금식과 감사
흔히 휴일로 불리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같은 정기적인 절기는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가 요구할 경우는 적법한 권위에 의해 날을 정해 금식(禁食) 기도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심판의 경고가 있거나 심판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또는 특별한 축복을 구하거나 받았을 때는 금식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의 큰 긍휼이나 구원을 받았을 때는 특별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작성자들이 이런 의식들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는 ‘예배지침서’(The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