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7)  예배와 안식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7)  예배와 안식일

예수만 섬기는 복된 우리 가정의 온 가족이 함께하는 가정예배시간

   제21장 예배와 안식일(3)    

제6항 : 예배 장소와 태도  

6항 복음 아래서는 기도를 비롯한 예배의 다른 요소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나 예배를 향하는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또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많이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요 4:21) 하나님은 어디에서나(말 1:11, 딤전 2:8)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요 4:23,24) 개인적으로 가정에서(렘 10:25, 신6:6,7, 욥 1:5, 삼하 6:18,20, 벧전 3:7, 행 10:2), 매일(마 6:11), 혼자 은밀하게(마 6:6, 엡 6:18)      예배해야 하고 또 공적으로 모여 엄숙하게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이나 섭리를 통해 예배를 요구하실 때는 그것을 경솔하게나 의도적으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사 56:6,7, 히 10:25, 잠 1:20,21,  24, 8:34, 행 13:42, 눅 4:16, 행 2:42) 

해설        

복음 아래서는 예배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모두 폐지되었다. 복음은 장소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요 4:21), “각처에서 (중략)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 조항은 예배당을 봉헌해 그곳을 거룩하게 여기는 관습을 비롯해 특정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더 많이 인정하시고 또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미신을 논박한다.  

1. 가정에서 매일 예배해야 한다.

이것은 자연의 빛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무이다. 기독교인을 자처하면서도 가정 예배를 등한시하는 가정은 장차 심판의 날에 이방인들의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이방인들은 도시와 국가를 보호한다고 믿는 수호신들을 공적으로 극진히 섬겼을 뿐 아니라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셔 놓고 각 집에서 예배드렸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의무를 더욱 분명하게 요구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 위인들의 삶은 가정 예배의 중요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들은 본보기로 가정 예배의 의무를 분명하게 가르친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정 예배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셨다.(창 18:19) 여호수아(수 24:15), 욥(욥 1:5), 다윗(삼하 6:20)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사례들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본보기다. 주님은 스스로는 가정을 이루지 않으셨으나 가족 같은 자신의 제자들이라는 가족을 거느리셨다.(마 10:25) 주님은 언제나 자기를 따르던 무리를 피해 한적한 곳에서 그들과 함께 따로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눅 9:18) 

가정 예배를 드리면 가족이 형통(亨通)의 복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형통하게 한다. 가족들이 매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복을 구하는 것보다 그런 복을 얻을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또 있겠는?(잠 3:33) 아울러 가정 예배는 가족들에게 영적 축복과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믿음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의무를 소홀히 하면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잠언 3:33은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라고 말한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렘 10:25)라는 말씀은 참으로 두렵기 그지없다. 따라서 각 집의 가장(家長)들은 여호수아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라고 결심해야 한다.    

2. 혼자 은밀하게도 예배해야 한다. 

주님은 모든 제자에게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요구하시고 그 의무를 올바로 실천 방법도 가르치셨다.(마 6:6) 주님은 은밀한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은밀한 기도를 드리라고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 직접 본을 보여 주심으로 이 의무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다.(마 14:23, 막1:35)

그러므로 모든 시대의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의무를 실천해 왔다. 야곱(창32:24), 다니엘(단 6:10), 다윗(시 55:3, 5:17), 히스기야(사 38:2) 등은 몇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신자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하고 분명한 지표(指標) 가운데 하나다. 다소의 사울은 회심하는 순간 곧바로 기도하기 시작했다.(행 9:11) 

개인 기도는 참된 경건을 발전시키는 가장 뛰어난 수단이다. 이 의무를 성심껏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신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혼자 은밀히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자주 경건하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부르짖어야 한다. 성경에는 그런 기도를 보여 주는 사례가 많다.(출 14:15, 삼상 1:13, 느 2:4, 대상 5:20)

3. 신자는 정해진 때와 장소에 함께 모여 예배해야 한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남자는 모두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여야 했다.(출 23:17) 그러나 그들이 드리는 공적 예배는 성전이나 특별한 절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도처(到處)에 회당을 세웠고 안식일에 그곳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했다.(행 15:21)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큰 절기가 있을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고 안식일에는 회당예배에 참석하셨다.(눅 4:16) 주님의 이런 행동은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신자는 규칙적으로 모여 성심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할 의무가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가정에서나 또는 혼자 은밀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다 함께 모여 공적으로 그분을 예배했다.(행 2:4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공적으로 모여 드리는 예배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신다.  

또 그분은 공적인 예배를 은혜의 수단으로 삼아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신다. 공적 예배를 통해 죄인이 각성해 회개하고 성도들이 축복과 위로를 받는 역사가 가장 흔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신자는 공적 예배를 존중히 여겨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히 10:25)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열심히 함께 모여 예배해야 한다.

7항 : 주의 날은 예배하는 날

7항 적당한 시간을 따로 구별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듯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안에서 엄숙하고 도덕적이고 영속적인 계명을 통해 칠일 가운데 하루를 안식일로 특별히 지정하시어 자기를 위해 거룩하게 지키게 하셨다.(출 20:8,10,11, 사 56:2,4,6,7) 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까지는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 안식일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부터는 일주일의 첫째 날로 바꿔었다.(창 2:2,3, 전 16:1,2, 행 20:7) 성경이 주일이라고 일컫는 이 날은(계 1:10) 세상 마지막 때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계속 지켜져야 한다.(출 20:8-10, 마 5:17,18)

해설

이 항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특별히 지정된 날을 다룬다. 적당한 시간을 따로 구별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자연법의 명령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적당한지 또 일주일 가운데 어떤 날을 그런 목적을 위해 특별히 구별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로 일주일 가운데 일곱째 날을 예배의 날로 정하셨다.

1. 안식일의 기원

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까지는 일주일 가운데 일곱째 날이 예배하는 날로 정해져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것을 기념했다. 그러나 그 특별한 날은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와 그 기쁘신 뜻에 따라 다른 날로 바뀌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동시에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 가운데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일요일)로 안식일이 바뀌었다. 이날은 기독교의 안식일로서 세상 마지막 때까지 계속된다.  

이런 진술은 안식일이 도덕적이고 확정적 제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적당한 시간을 따로 구별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라는 요구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 요구는 도덕적인 성격을 지닌다. 아울러 일주일 가운데 일곱째 날을 특별히 구별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결정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확정적인 제도라는 성격을 지닌다.

더욱이 확정적인 제도는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항구적(恒久的)인 의무임과 동시에 도덕적인 의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안식일의 도덕성을 논하고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 가운데서 도덕적으로 자연스러운 것과 도덕적으로 확정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일이다.

우리 시간 중 일부를 정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에 해당하고 다른 날이 아니라 일곱째 날을 그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확정적인 것에 해당한다. 우리가 안식일을 확정적인 제도라고 일컫는 이유는 일곱 날 가운데 하루를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고 또 안식일을 도덕적으로 확정적인 것으로 일컫는 이유는 하나님의 결정이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의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해당이 되던 의식적(儀式的) 제도와 분명하게 구별된다. 의식적 제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두 폐지되었다. 안식일의 도덕성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지닌다.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안식일로 정한 것이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의무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다음의 증거들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다.

(1) 창세기 2:1-3의 증언대로 안식일은 태초에 정해졌다. 

당시는 인류의 첫 조상 외에는 그 어떤 인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안식일은 그들을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에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들의 모든 후손이 대대로 지켜야 할 의무가 되어야 마땅하다.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아담의 모든 후손이 그가 무죄한 상태에서 에덴동산에 거하며 행했던 대로 하루를 안식의 날로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필요성과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따라서 안식일은 의식적(儀式的)인 제도가 아니다. 왜냐면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순결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의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추론을 부인하려면 안식일이 태초에 정해지지 않았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음 요구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입증해야만 한다. 많은 학자가 그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썼으나 그 누구도 설득력 있는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모세가 안식일의 제정을 미리 예견하고 창세기에 기록했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창세기를 기록한 방식을 살펴보면 그가 창조 사역이 막 끝난 뒤에 일어난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전까지 약 2,500년 동안 안식일 지켰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안식일이 태초에 제정되지 않았다거나 대홍수 이전의 족장 시대에는 실제로 지켜진 적이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왜냐면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역사 특히 사무엘과 사울 왕의 시대를 아우르는 약 500년 동안에도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부터 세례 요한이 등장하기까지 할례를 행했다는 기록이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과도 비슷하다. 더욱이 출애굽기 16:23은 안식일을 앞으로 제정할 제도가 아니라 이미 존속해 온 제도로 언급하고 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 반포될 무렵에도 안식일은 그들이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소홀했거나 잊어버린 제도로 언급되었다. 아마도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단된 때문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라는 명령이 주어진 이유다. 안식일의 제정이 사전에 이루어졌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일주일을 칠일 단위로 한 관행이 족장 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도 만족스럽게 설명하기 어렵다.  

(2) 안식일이 구속력 있는 의무인 사실은 십계명에 네 번째 계명이 차지하는 위치로부터 자연스레 설명될 수 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이 항구적인 규칙으로 인류에게 명령하신 도덕적 계명들의 한가운데 놓여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음성으로 명령하셨고, 또 두 번이나 친히 손가락으로 기록하시어 언약궤 안에 간직하게 하신 계명들 가운데 하나다. 이 모든 사실은 안식일이 의식적(儀式的)인 제도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3) 시내 산에서 반포된 안식일 계명에 부가적으로 딸린 명령은 하나같이 도덕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런 명령들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이방인들은 의식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었으나 안식일 명령은 유대인은 물론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에게까지 똑같이 주어진 의무였다.(출 20:10-11)

(4)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의 안식일이 폐지된 이후도 계속되었다.

이 사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함축되어 있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 그리스도의 말씀은 유대인의 안식일이 아니라 기독교의 안식일에 관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도망하는 일‘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의 안식일이 폐지되고 나서도 40년이 더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 비록 안식일이 일주일의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바뀌었으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안식일이 여전히 계속 지켜질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5) 안식일의 영속성은 이사야 56:6-8에도 언급된다. 

그 본문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사야 선지자가 신약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복음 시대에도 안식일은 여전히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로서 계속되었고 그것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의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한 치의 오류도 없으신 예언의 영의 선언 대로 축복으로 이어졌다.

2. 안식일 요일 변경 이유

안식일의 도덕성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날짜 변경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안식일 제도의 핵심은 우리의 시간 가운데 1/7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는 것에 있다. 그날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일곱째 날을 기억하라.”가 아니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본래는 일주일 가운데 일곱째 날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적절했으나 그날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에 의해 변경될 수 있었다. 물론 안식일을 변경할 수 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바뀌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는 적지 않다.

(1) 일주의 첫날이 기독교 안식일이라는 사실이 구약성경 예언에 있다.

“이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시 118:24)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날을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날도 아울러 창조하셨으나 자신을 위해서 하루를 거룩한 날로 지정(指定)하셨다. 여기에서 언급된 날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로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날을 가리킨다. 아울러 에스겔 43:27은 ‘제 팔 일’을 하나님께 영적 제사 드리는 날로 언급한다. 그래서 기독교 안식일은 여덟째 날이라고 한다. 왜냐면 일주일의 첫째 날이 창조의 시점에서 보면 여덟째 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부활 후 일주의 첫날 제자들과 만나셨다.(요 20:19,26)

물론 주님이 다른 날에도 몇몇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셨으나 그들 모두가 함께 모인 자리에 모습을 보이신 때는 바로 ‘안식 후 첫날’ 이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제자들이 이미 일주일의 첫째 날 모임을 시작했고 예수님이 그들의 관습을 인정하셨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까지 일주일의 첫째 날에 제자들과 만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행 1:3)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3)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날 모여 거룩한 의식을 행했다.

사도행전 20:7은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중략)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말한다. 그날에 그들이 한곳에 모인 일은 특별하거나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이루어진 관행이었다.  

고린도전서 16:1,2에도 초대교회 신자들이 일주일의 첫날에 모여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헌금(獻金)했고 그 일이 사도들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은 본래 유대인의 회당에서 안식일(토요일)에 이루어졌다. 그런 관습이 사도들의 권위에 의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일주일의 첫째 날(일요일)로 변경이 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4) 기독교의 안식일은 초기에는 ‘주의 날’(계 1:10)이라는 특별한 명칭으로 불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을 자신의 날이라 주장하시고 자신을 기리는 날로 삼게 하셨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5) 일주의 첫날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삼은 관습이 사도 시대부터오늘날까지 계속 유지 돼오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안식일을 지킬 때 귀한 복을 베푸심으로써 그날을 영화롭게 하셨다. 안식일이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변경된 이유는 분명하다. 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까지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킨 이유는 창조 사역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일주일의 첫째 날에 부활하신 이후로는 그날을 거룩히 지켜 구원이라는 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역을 기념해야 마땅하다.  

그 이유는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죽음과 고난과 부활의 사역보다 더 월등하거나 그것과 동등한 사역이 새롭게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날이 세상 마지막 때까지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계속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제8항 : 주의 날을 거룩히 지키는 방법

8항 안식일은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사람들은 마음을 올바로 준비하고  일상적인 일들을 미리 잘 처리하고 나서 세상의 직업과 오락에 관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일체 중단하고 온종일 거룩한 안식을 취해야 할 뿐 아니라(출 20:8, 16:23,25,26,29,30, 31:15-17, 사 58:13, 느 13:15-19,21,22)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예배하고 부득이한 의무를 처리하며 긍휼을 베푸는 일에 온전히 시간을 바쳐야 한다.(사 58:13, 마 12:1-13)

해설

이 조항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데 필요한 일들을 진술한다. 안식일은 모든 것을 미리 잘 처리하고 나서 세상의 직업과 오락을 일체 중단하고 거룩한 일과 필요한 의무와 긍휼을 베푸는 일에 온전히 시간을 바침으로써 다음과 같이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1) 일상적인 일들을 미리 잘 처리하고 세상의 일과 염려로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도록 노력하고 주일에 알맞은 일을 할 수 있게끔 마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2) 안식일은 거룩한 안식의 날이기 때문에 온종일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세상의 직업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런 일과 관련된 불필요한 말과 생각을 삼가야 한다. 다른 날에는 해도 괜찮은 무해 한 오락 행위도 일체 중단 해야 한다. 왜냐면 다른 목적을 위해 거룩하게 사용해야 할 시간이 헛되이 소모되고 또 안식일에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려는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일에 죄가 되는 오락이나 즐거움을 찾는다면 그것은 더욱 엄중한 죄책이 뒤따르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3) 안식일에 깨어 있는 동안에는 모든 시간을 거룩한 활동들 즉 기도, 묵상, 성경이나 신앙 서적 읽기, 가족들을 가르치는 일, 가족들과의 경건한 대화, 예배와 공적 의식에 참여하는 일들을 할애해야 한다. 안식일에 몇 시간만 신앙적인 활동에 바치고 나머지 시간은 속되게 흘려보내는 일은 큰 잘못이다. 안식일도 일주일의 나머지 엿새와 시간의 길이가 똑같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다른 날에 우리 자신 일에 할애하는 시간과 똑같은 양의 시간을 하나님을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예배하는 일에 할애해야 마땅하다.

(4) 그러나 부득이한 사회적 의무나 긍휼을 베푸는 일은 안식일에도 허용된다. 전자는 전날에 미처 끝마치지 못한 일 가운데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까지 미뤄서는 안 될 일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고 후자는 동료 인간들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경우 몇 가지를 예로 들면 하나님의 성전에 갔다가 오는 일, 적들이 침입한 도시나 마을을 수호하는 일, 바다에서 배를 운항하는 일, 화재를 진압하는 일, 화재나 홍수로 인해 소실될 위기에 처한 물건들을 옮기는 일, 가축을 먹이고 위험에서 보호하는 일, 병자를 방문해 위로와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일,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 등이다.

간단히 말해 그런 일은 때로 안식일의 의무 이행을 크게 방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그런 일들을 금지하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시기’(호 6:6) 때문이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고, 제자들은 배가 고플 때 밀이삭을 잘라먹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책망했으나 주님은 그들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막 2:27) 안식일은 독단적으로 정해진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유익을 위해 계획된 관대한 제도다. 하루 동안 노동을 중단하는 것만 보더라도 안식일은 참으로 관대하고 자비로운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안식일은 노동자들에게 힘든 노동을 멈추고 휴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건강과 체력을 유지하려면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하나님이 그 선하심과 권위로 제정하신 안식의 날을 온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안식일을 단지 육체의 피로와 세상일에 대한 염려로부터 안식을 취하는 시간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안식일은 일상적인 일을 멈추고 신앙과 관련된 활동에 더 많은 열심을 기울여야 하는 시간이다. 사실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의 영혼을 돌보고 영원한 내세를 위한 준비 갖추기에 일주일에 하루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나라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개탄스럽게도 그런 평판이 무색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안식일을 더럽히는 일들이 무서운 속도로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수많은 악이 싹트는 계기가 되고 있다. 안식일을 올바로 준수하는 것은 개인과 국가의 일시적인 행복을 증대하고, 대중의 도덕성을 고양하며, 신앙의 관심사를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이끄는 탁월한 수단이다.

안식일을 더럽히면(실제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됨) 인간의 유익을 저해하고 사회를 부도덕하게 만들며 신앙을 피폐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임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악이 기승을 부리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겠다.”라고 굳게 결심해야 한다. 안식일은 ‘여호와의 성일(聖日)’이다. 따라서 안식일을 성심성의껏 지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약속에 따라 그분의 놀라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나의 성일(聖日)에 오락을 행하지 않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않으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않으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으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8:13,14).(*)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