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9) 국가권력 원천과 목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59) 국가권력 원천과 목적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시니(마 22:2021)
제23장 국가 공직자
제1항 : 국가 권력의 원천과 목적
1항 세상의 지고하신 왕이요, 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위해 자기 아래 국가 공직자들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 분은 이 목적을 위해 그들에게 칼의 권세를 허락하시어 선한 자들은 보호하고 격려하며 악인들은 징벌하게 하셨다.(롬 13:1-4, 벧전 2:13,14)
제2항 : 그리스도인과 공직
2항 기독교인들이 공직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직임을 받아들여 수행하는건 합법적인 일이다.(잠 8:15,16, 롬 13:1,2,4) 그들은 그 직임을 수행할 때 각 나라의 건전한 법에 따라 특별히 경건과 정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시 2:10-12, 딤전 2:2, 시 82:3,4, 삼하 23:3, 벧전 2:13) 신약시대인 지금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 목적을 위해 전쟁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눅 3:14, 롬 13:4, 마 8:9,10, 행 10:1,2, 7:14,16)
해설
성경은 완전한 ‘믿음과 실천의 규칙’이다. 성경은 교회의 지체든 국가의 지체든 통치자든 신민이든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에 관한 의무를 명시한다. 따라서 통치자들의 의무 특히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련된 의무를 명시하지 않은 기독교 교리는 결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주제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이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일목요연(一目瞭然)한 체계는 이 흥미로운 주제에 관한 성경의 교리가 모호하지도 않고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시대에 여러 종파가 생겨나 시민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원리들을 주장하고 특히 국가 공직자들이 신앙의 문제에 개입하는 행위를 적대시했다.
16세기에 모습을 드러낸 독일의 재세례파(Anabaptism)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국가 공직자(公職者)가 전혀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며 공권(公權)을 거부하는 소요를 일으켰다. 멘노(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그들의 원리가 다소 수정된 후도 그들은 국가 공직자들과 교제하지도 않았고 또 자신들 가운데 그 누구도 공직을 수행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또 그들은 무력으로 무력을 퇴치하는 것은 적법하다는 것을 부인했고, 전쟁은 어떤 형태든 반기독교적 불법으로 간주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될 무렵 영국의 일부 개신교 신자들도 그와 비슷한 정서를 내비쳤다. 당시 유해(有害) 한 오류(誤謬) 중 한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이 국가 공직자가 되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 국가 공직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즉시 관리직을 그만두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법과 시민적 자유를 위해 무장하고 싸우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도 퀘이커교도(Quakers)는 전쟁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조항은 이런 견해에 반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공직제도(公職制度)와 시민정부(市民政府)는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다.
- 국가 공직자는 공공의 선(善)을 증진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임명되었다.
- 기독교인이 공직자의 직임을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다.
- 국가 공직자는 정의(正義)와 평화(平和)는 물론 경건(敬虔)을 유지해야 한다.
- 그들은 신약시대인 지금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전쟁(戰爭)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1) 공직제도와 시민정부는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다.
몇몇 훌륭한 학자는 정부제도가 사회 계약에 의해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제도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인 견해다. 정부제도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말은 그것이 복음 사역자의 직임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분명하게 확정된 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단지 정부제도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다는 의미다.
인류의 행복을 증진(增進)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정부는 인류의 행복과 평화와 질서의 보존, 생명과 자유와 재산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 인류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형태를 유지하려면 정부가 필요하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바울 사도는 분명한 말로 그런 이성적인 추론의 정당성을 강하게 확증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처럼 공직제도는 세상의 도덕적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이 제도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비롯하지 않았다. 이런 차이는 정부의 권력과 교회의 권위를 구별하는 중요한 잣대다.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는 이렇게 말했다.
온 나라들의 왕(성부)께서 정부의 권력을 제정하셨고, 성도들의 왕(성자)께서 교회의 권위를 세우셨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주제요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것과 온 인류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세상의 신(神)들로서 자신을 대신해 일할 관리들을 세우셨으며, 교회의 중보자요 왕이신 그리스도 곧 성부가 거룩한 시온 산에 세워(시 2:6)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리게 하시고(눅 1:33), 그 어깨에 다윗의 집의 열쇠를 두신(사 22:22) 그리스도는 자신의 이름으로 보내신 교회의 직분 자들의 손에 교회의 정치체제와 권위를 맡기셨다.
하나님은 정부제도를 세우셨지만 모든 사회에 한 가지 형태의 정부제도를 강요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가 각자 스스로 자기들에 가장 알맞은 형태의 정부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정부를 ‘인간의 모든 제도’(벧전 2:13)라고 일컬었던 이유다.
(2) 국가 공직자는 공공의 선을 증진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임명되었다.
바울은 공직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중략) 선을 베푸는 자’(롬 13:4)라고 했다. 그들에게 권력(權力)과 권위(權威)가 주어진 이유는 그들로 자신의 명예와 유익을 추구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특히 ‘선한 자들은 보호하고 격려하며, 악인들은 징벌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정부 제도의 목적이기 때문에 가장 나쁜 정부라도 어느 정도는 이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통치자들이 독재(獨裁)를 일삼고, 국가의 자유와 특권을 침해하거나 억압할 경우는 이 제도가 전반적으로 심하게 퇴락(頹落)할 수 있다. 그럴 경우는 이 악(惡)을 제거할 권한(權限)이 국민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참된 자유’의 핵심 원리다.
(3) 그리스도인의 공직자 직임 수행은 합법적이다.
구약시대는 다윗, 요시야, 히스기야와 같은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승인 아래 공직을 수행했다.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도 공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걸 암시하는 예언들이 많다.(사 49:23, 시 172:10,11) 그리스도인의 공직 수행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본보기(눅 12:14)와 그분이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가르침(마 20:25,26)을 근거로 내세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일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야심에 찬 세상 청지적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고 그들과 그들 이후의 복음 사역자들이 공직을 수행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직 수행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 공직을 수행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면 기독교 국가에는 공직자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겠고 그런 경우 무정부(無政府) 상태가 되어 와해 되고 말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공직자들이 국가를 다스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터무니없는 비현실적 상황이라는 걸 삼척동자도 다 알 것이다.
(4) 국가 공직자는 정의와 평화는 물론 경건을 유지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라고 당부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직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단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뿐 아니라 모든 경건과 단정함(정직함)을 이루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통치자들은 공직을 수행할 때 경건과 단정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둘을 장려하고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스 6:8-10)
(5) 그리스도인 공직자들은 신약시대인 지금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 전쟁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전쟁(戰爭)은 큰 악(惡)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때로 전쟁이 필요하다. 만일 국가가 전쟁은 무조건 불법이라는 원리를 받아들여 거기에 따라 행동한다면 야욕에 찬 주변 국가들에 의해 곧 점령되고 말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과 승인 아래 전쟁이 종종 수행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한 번도 명령하시거나 승인하신 적이 없었다.
신약시대도 국가 공직자들이 전쟁을 수행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를 드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다양한 상황이 존재한다. 군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대답했을 뿐 군인인 그들의 직업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라는 말로 그들의 일을 계속하라고 암시했다.(요 3:14) 교회에 들어온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는 로마군 백부장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로마 군대의 직책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행 10장)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를 자세히 논의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야욕이나 속된 영광을 구하기 위해 수행하는 침략전쟁(侵略戰爭)은 정당화될 수 없으나 자신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불의한 침략자들에 대한 방어전쟁(防禦戰爭)은 정당하다.(이 경우 처음에는 방어 목적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공격적일 때가 있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에 계속 >
< 청교도들의 정치참여 방법 >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 대륙 개척 때 보였던 방법이다. 즉 신앙과 기독교 가치관 세계관이 뚜하고 철저한 사람들을 사회 각 분야에 진출시켜 기독교 사상을 반영시키고 기독교의 이념을 구현시키도록 한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청교도들은 정치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가장 어려운 사회 문제였던 노예제도 폐지를 위시해 노동법 개선 사회법과 보건법 등을 개정했으며 정치 법안까지 기독교 정신을 담도록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은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이 방법을 한껏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