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62) 교회 머리 되신 그리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62) 교회 머리 되신 그리스도

제25장 하나님의 교회(1)
제1항 : 무형교회(無形敎會)
1항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무형 교회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또 앞으로 계속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가 될 모든 선택 받은 자들의 집합체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신부요, 몸이요, 충만이다.(엡 1:10,22,23, 5:23,27,32, 골 1:18)
제2항 : 유형교회(有形敎會)
2항 유형교회도 복음 아래서는(과거와 달리 율법 아래서 한 민족에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 교회는 참믿음을 고백하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고전 1:2, 12:12,13, 시 12:8, 계 7:9, 롬 15:9-12)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고전 7:14, 행 2:39, 겔 16:20,21, 롬 11:16, 창 3:15, 17:7),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요(마 13:47, 사 9:7), 하나님의 가족이다.(엡 2:19, 3:15) 교회를 떠나서는 일상적으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행 2:47)
제3항 : 교회사역의 목적과 주제
3항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성도들을 불러 모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보이는 보편 교회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규례와 사역을 허락하셨고, 그 약속에 따라 자신의 임재와 성령을 통해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신다.(고전 12:28, 엡 4:11-13, 마 28:19,20, 사 59:21)
해설
흔히 교회로 번역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불러내다’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부르심을 듣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소집된 모임을 가리킨다. 민주국가에서는 공적인 고지자(告知者)의 통고를 받고 특정한 장소에 모인 백성의 모임을 그렇게 일컬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를 상술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불필요하다. 단지 이 용어가 복음을 통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불려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게 된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말씀을 통한 외적 소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통한 내적 소명이다. 후자는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해당이 된다. 따라서 교회도 이중적인 형태(形態)를 지닌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외적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형태다.
이 조항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또 앞으로 계속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가 될 모든 선택 받은 자들의 집합체’라고 정의한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5:25-27에서 이 교회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교회에 속한 지체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삶을 마치고 완전한 상태로 천국에 살고 있고 나머지는 여전히 세상에 살면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 ‘승리한 교회’와 ‘싸우는 교회’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선택받은 자들의 집합체로 간주 되는 ‘무형교회’는 하나님이 “그들을 (중략) 특별한 소유로 삼을”(말 3:17) 날이 이를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고, 특정한 시대에 세상에 존재하는 ‘유형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믿고 진리로 거룩하게 된 자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하나의 교회를 구성한다. 왜냐면 장소가 아무리 멀고 각각의 상황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 있고, 같은 몸의 지체로서 성령과 믿음의 끈으로 결합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이 교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 즉 무형교회라 일컫는 이유는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교회는 장소의 관점이 아니라 상태의 관점에서 세상과 구별되며 보이는 교회 안에 놓여 있다. 또 보이지 않는 교회를 보이는 교회로부터 확실하게 구별할 수는 없다. 이 교회에 속한 지체들의 자격 조건은 내적 성격을 띤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감각으로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동료 인간들에 대해 있을 법한 이유를 근거로 관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판단은 얼마든지 그릇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성도를 위선자로 위선자를 성도로 오판할 수 있다. 이 교회는 오직 ‘심장을 살피며 페부를 시험하시는’(렘 17:10) 하나님의 눈 외에는 그 어떤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아신다.(Dick, Lectures on theology, vol 1. 4, pp. 309-310.)
이 조항은 또 보이는 교회가 ‘참믿음을 고백하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된다.’라고 진술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28에서 이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이 교회를 보이는 교회로 일컫는 이유는 그 구성원들이 천사나 영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 아니라 감각으로 식별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구성원들이 누구인지 알수 있고 그 모임이 공적으로 이뤄진다. 사람들은 그 안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고 예배의 여러 요소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이 교회는 다른 공동체들과 마찬가지로 식별이 가능하다. “저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저기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존재를 확인하는 데 감각 이외에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보면 이 교회가 지니는 독특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신조와 의식이 그런 특성과 일치하는 공동체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이것이 교회 또는 교회의 일부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Dick, Lectures on theology, vol 1. 4, pp. 308-309.)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를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두 개의 교회가 존재한다거나 교회의 일부는 보이고 다른 일부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유형교회’는 ‘무형교회’를 포함하나 그 둘이 서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무형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또한 ‘유형교회’에 속하지만 ‘유형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는 ‘무형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사역과 규례를 ‘유형교회’에 허락하신 목적은 죄인들을 ‘무형교회’로 불러 모으시어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주님은 성령의 사역과 더불어 그런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신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에베소서 4:11-13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것이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복음사역의 직분이 정해진 목적이다. 이 일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오고 그들이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는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는 이토록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이 약속은 복음의 성공을 보장한다.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께 나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행 2:47) 하시는 역사는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리스도계서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고 말씀하셨다.
‘무형교회’에 적용된 ‘보편’이라는 용어는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항상 똑같은 의미는 아닐지라도 일찍부터 사용되어 왔다. 이 조항에서는 ‘우주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만하게도 스스로 ‘보편교회’(우주적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들이나 교황의 지상권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단으로 단죄한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주제넘기까지 하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주적인 보편성을 실제로 구현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참 교회는 어떤 나라나 종파에 국한되지 않고 ‘참믿음’을 고백하고 복음의 규례를 지키는 모든 사람을 아우른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의 여러 곳에 설립되었던 교회들은 모두 보편 교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 ‘보편교회’의 의미
모든 신자 곧 세상에서 불려 나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선택 받은 자 모두를 아우르는 보이지 않는 ‘보편교회’가 존재한다.
교황주의 자들은 이 사실을 부인한다. 그들은 ‘보편교회’는 이 세상의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보이는 형태를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효소명을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불신자와 죄인들을 비롯해 로마 교황에게 복종을 서약하는 모든 사람이 보편 교회에 속한다고 말한다.(즉 유형교회와 무형교회의 구분이 없다. 편집자)
그러나 우리는 ‘보편교회’가 참 신자들만으로 구성된다고 믿는다. 누가 참 신자인지 알 수가 없기에 그들로 구성된 교회도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신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감각의 대상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이 참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감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참 신자들이 ‘유형교회’ 안에서 거짓 신자들과 섞여 있기에 그들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구별하기란 불가능하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그 교회는 영적 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분의 신비로운 몸이다.(엡 1:23) 이에 속한 개인들은 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룬다.(고전 12:13) 그러나 이런 사실은 감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참 신자들로 구성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무형교회가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2) ‘보편적 유형교회’의 구성원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로 구성된 ‘보편적인 유형교회’는 온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다. 독립교회 파는 이 점을 부인한다. 그들은 유형 교회의 개념을 예배드리기 위해 한 장소에 모인 한 무리의 회중으로 국한 시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유형교회’를 가리키는 ‘교회’라는 용어를 특정한 회중에 국한 시키지 않는다.
‘사울이 교회를 진멸할새’(행 8:3)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갈 1:13)라는 말씀에 언급된 교회는 한 무리의 회중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곳곳에 있는 교회들이 모두 그의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바울이 회심한 후에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행 9:31)
이 말은 그들이 전에 바울의 맹목적인 열정으로 인해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교회들 모두가 그에게 박해를 받았던 하나의 교회로 취급되고 있다.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은 그런 식으로 연합해 하나의 교회를 형성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유형교회’에 주어진 다양한 명칭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교회는 ‘몸’ 곧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하나를 이루는 인간의 육체에 비유된다.
또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 불린다. 나라는 다양한 영역과 통치 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하나의 왕국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집’도 교회를 일컫는 또 하나의 용어다. 이 용어는 교회가 많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의 영적 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신자가 한 장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목적을 이루려면 특정한 지역 교회가 필요하다. 이 특정한 지역 교회들은 모두 ‘보편적 유형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보이는 교회에는 유효소명을 받아 거듭난 신자들만이 아니라 위선자들과 형식적인 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알곡과 쭉정이가 공존하는 타작마당(마 3:12), 좋은 씨앗과 가라지가 함께 뿌려진 밭(마 13:24,25),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섞여 있는 ‘물’(마 13:47), 귀하게 쓰이는 그릇과 천하게 쓰이는 그릇이 함께 있는 ‘큰 집’(딤후 2:20) 등에 비유된다. 이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이 세상 ‘유형교회’의 상태다.
따라서 사람들의 외관만 보고 그들이 거듭났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인하거나(중생은 그리스도와 교제에 필수 요건이다.), 그들이 말하는 영적 체험만을 듣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직분 자들에게 참 신자와 거짓 신자들을 온전히 구분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마 13:30)
그들은 그런 일을 해낼 능력이 없다. 일꾼들이 한동안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낼 수 없듯 그리스도의 종들도 참 신자와 위선자들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없다. 그들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지닌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형교회’ 안에 들어와 그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근거는 성경적 신앙고백이다. 교회의 직분 자들은 오직 성경적 신앙고백만을 근거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고 판단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3) ‘보편적 유형교회’와 신자의 자녀들
신자의 자녀들도 ‘유형교회’의 구성원들이다.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를 부인한다. 독립교회 파 사람들은 유아 세례는 인정하면서도 그 가치 판단은 주저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유아 세례가 신자의 자녀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인지 아니면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데 필요한 준비 갖출 때까지 교회의 보호 아래 두는 효과만을 발취하는 것인지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
신자의 자녀들의 영적 상태를 둘러싸고 상당한 억측이 난무한다. 시민 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은 부모들과 동일한 특권을 누린다. 이 세상의 나라들은 성인과 유아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아들을 그러스도의 나라에서 배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영국민들의 자녀들은 아직 이해력도 부족하고 사회적 특권을 온전히 향유 하고 있지 못해도 부모들과 똑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도 유아들의 특권에 대해 우호적 태도 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 문제는 단순한 추측이나 유추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유아들의 특권은 성경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증된다.
하나님이 교회와 맺으신 언약이 부모는 물론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확대된다. 유아들은 구약 시대에도 교회의 구성원들이었다. 신약성경에서도 그들을 배제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교회의 구성원이 누리는 특권이 유아에게까지 적용된다고 가르친다.(Whytock, Essayson the Church, essay 9.)
주님도 이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셨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남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만일 ‘하나님의 나라’ 가 여기에서 영광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어린아이들이 영광의 상속자로서 ‘무형교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는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있는 교회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심으로써 그들이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용납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셨다.
(4) ‘유형교회’와 구원 문제
“유형교회를 떠나서는 일상적으로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 이 명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크게 대조된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유일한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나라의 남쪽 지방에서 교회의 감독제를 주장하는 이들도 오만하고 편협한 태도로 종종 그런 입장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일한 교회’로 내세우며 감독들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분열주의자로 단죄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과는 무관한 사람들로 간주해 그들이 구원받을 희망을 모두 차단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가능성을 어느 특정한 교회 안에 국한 시키는 주제넘은 태도 취할 생각이 없다. 또 우리는 보편적인 유형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생각도 없다. 이 조항은 “유형교회를 떠나서는 일상적으로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라고 신중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유형 교회 밖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어떤 경로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되었지만 아직 교회와 연합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특별한 경우에 한한다. 하나님은 대개 일반적인 수단을 통해 사역하신다. ‘유형교회’를 떠나서는 일상적으로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이유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구원의 일상적인 수단을 적용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버트 쇼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 201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