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역사적 배경과 작성 목적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1643-164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아십니까? 학생시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고 고백했거나 들어보신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한 번이라도 다 읽어는 보셨는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이 우리의 신조임을 누구보다 많이 외쳐왔던 김중락 박사와 함께 그 ‘역사적 배경과 작성 목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김 박사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대구서교회 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 편집자 >

I. 역사적 배경 이해의 필요성

1643년부터 1649년까지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개최된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가 작성한 4개의 표준문서 즉 1)신앙고백, 2)대소요리문답, 3)예배모범, 4)장로회정치는 교회사 전반을 통해 교회가 작성한 가장 뛰어난 ‘신앙의 표준문서’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앞의 두 문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논란의 여지없이 가장 완벽한 신조와 교리 교육서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이 이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일부 수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The Westminster Standards,  1643-1649)가 완벽하다거나 더 나은 신앙의 ‘표준문서’들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이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배경 속에서 영감 되었듯이 이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도 역사적 즉 시공간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웨스트민스터총회 개최과정에 대한 역사적 배경의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한다.

장로교회의 교인들은 교회를 처음 다니면서부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대해 자주 듣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장로회는 이들에 대한 교육과 이해가 부족하며, 이 표준을 만든 웨스트민스터 총회나 이 표준들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이해는 전무해 보인다. 따라서 이 글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어떠한 상황에서 소집되었고, 표준서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통해 표준문서의 의미와 한계를 고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공식적인 이름은 ‘Assembly of Divines(성직자 총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총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II.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리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초 당시 각각 독립적인 왕국이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교회와 왕실 통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잉글랜드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는 1534년 부인 캐서린과의 이혼을 원했던 헨리 8세가 교황으로부터 이혼을 허락받지 못하면서 시작된다.

교황으로부터 형수와의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그는 로마 가톨릭과 단절을 선언하고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교회는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예배와 성례는 로마 가톨릭 성격이 포함된 ‘공동기도서’에 정해진 규정대로 이루어졌으며, 교회조직도 로마 가톨릭 주교제도(감독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단지 교리에서만 어느 정도 개혁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다. 한마디로

잉글랜드 교회는 눈감으면 신교였지만 귀를 막으면 로마 가톨릭이었다.

이 같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모습에 불만을 가지고 국교회를 더 완벽하게 개혁하고자 한 사람들이 청교도(淸敎徒, Puritan)들이었다. 청교도는 범위가 매우 넓은 개념이지만 주로 잉글랜드에 ‘장로교 조직’과 ‘칼빈주의 교리’를 도입하려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북쪽 스코틀랜드 국교회(the Church of Scotland)는 1560년 제네바 망명 중에 칼뱅으로부터 지도를 받은 존 녹스(John Knox,1513-1573)가 귀국하면서 성립되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녹스와 신교 귀족들의 주도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스코틀랜드 국교회를 탄생시켰다. 스코틀랜드 국교회는 장로교의 상징인 ‘회의체에 의한 교회조직’(government by assemblies)인 총회, 노회, 당회를 만들고 장로들(목사를 포함한 개념임) 간의 차등이 없는 평등을 달성하였다.

또 스코틀랜드 국교회는 1578년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발간하여 교회와 국가의 분리 즉 영역주권(領域主權, Sphere Sovereignty)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두 왕국 이론’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로교 정치이론은 교회와 정부가 서로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간여할 수 없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다만 교회는 정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하지 않는 경우 비판이나 경고를 할 수 있었다.

이로써 북쪽 하잇랜드(Highlands)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국민은 장로교를 수용하였고 자신들의 교회가 ‘가장 잘 개혁된 교회’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남쪽의 잉글랜드 교회를 불완전한 교회,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 한발을 딛고 있는 개혁이 필요한 교회라고 여겼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한 섬 위의 두 국가에 이질적인 교회 조직과 예배의식 그리고 규율을 정착시켰다.

III. 왕실통합(the Regal Union)과 개신교의 위기

James VI of Scotland & I of England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잉글랜드의 왕관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James Ⅵ)에게 물려주었다. 이를 ‘왕실통합’이라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미혼이었다. 그녀에게 후사가 없었으므로 결국 잉글랜드 왕실의 핏줄인 스코틀랜드 왕실에서 왕위의 계승자를 찾게 된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는 동시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었다. 명실상부한 두 왕국의 왕이 된다.    왕의 거주지를 에든버러에서 런던으로 옮겼으며 이제 강력한 왕권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치세 때에 성경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흠정역(欽定譯, the Authorized Version)이라 부르는 바로 그 성경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킹 제임스의 역(the King James Version)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는 교회에 대한 국왕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매우 혐오했다. 그는 “장로회 제도와 군주제는 하나님과 악마만큼이나 잘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주교가 없으면 국왕도 없다.”라고 하며 국왕의 통치를 강요했다. 그리하여 제임스 6세 치세에 교회는 핍박을 받았고 일부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미국)으로 건너갔다. (주) 흠정(欽定)은 황제가 손수 제도나 법률 따위를 제정하던 일 또는 그런 제정을 말한다.

제임스 6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Ⅰ)는 완전히 로마 가톨릭교회 예배에 빠진 인물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와 유사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찰스의 핵심적 교회 정책은 교회당에 제단을 설치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찬식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찰스는 성찬식에서 성찬 인도자가 빵과 포도주잔을 높이 들고 기도하게 함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化體設)을 수용했다. 그리고 모든 수찬(受餐) 자는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빵과 포도주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에도 주교제도가 완전히 재도입 되었다.

찰스의 이러한 교회 정책은 스코틀랜드 장로교도와 잉글랜드 청교도들 뿐 아니라 잉글랜드 국교회에 만족하고 있던 대다수 국민들로부터도 분노를 샀다. 그러나 반대하는 이들을 왕은 가차 없이 처벌했다.

1638년 스코틀랜드 혁명과 1642년 잉글랜드 혁명은 이 때문에 일어났다. 1638년 스코틀랜드 전 국민은 국민언약(the National Covenant)를 맺고 그들 장로교를 지키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두 번에 걸쳐 국왕의 군대를 물리친 스코틀랜드인들은 1640년 완전한 종교자유를 얻었고, 순수 장로교를 복원하기 위해 교회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국왕에게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잉글랜드 의회도 그들과 같은 개혁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1640년 말에 소집된 잉글랜드 의회는 청교도가 많았다. 의회는 스코틀랜드처럼 교회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잉글랜드에서는 전통적인 잉글랜드 국교회의 모습을 지키려는 왕당파와 잉글랜드 국교회를 완전하게 개혁하려는 의회파 간에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 초기 전세가 의회파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1643년 잉글랜드의 청교도 지도자들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지도자들은 ‘엄숙동맹과 언약’을 맺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 군이 의회파를 지원하기 위해 참여하게 되었다. ‘엄숙동맹과 언약’의 내용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총회를 소집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소집된 총회가 바로 1643년 소집 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이다.  

IV.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성격과 의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법률적으로 잉글랜드 의회에 종속된 회의였다. 그것은 총회의 소집과 해산뿐 아니라 총회의 구성과 회의 진행 등 모든 면에서 의회에 의존적이었다. 더구나 총회의 결정은 그 자체로서 궁극적인 권위를 가지지를 못했다. 단지 의회에 건의하는 안에 불과하였고 이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의회였다. 이는 당시의 잉글랜드 교회가 국가에 종속된 국교회였고 왕과 의회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총회는 단지 의회에 조언을 해주는 기구에 불과하였다.

1643년 7월 1일 소집된 총회의 총대는 총 151명으로 목사가 121명, 상원의원이 10명, 하원의원이 20명으로 구성되었다. 노회에서 파견되는 총대로 구성되는 오늘날의 장로회 총회와는 달리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잉글랜드 의회에 의해 소집된 종교회의였다. 스코틀랜드 총회에 특사 파견 요청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아니라 잉글랜드 의회가 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때 3국의 교파

그러나 스코틀랜드 총회는 이를 양국의 공동총회로 여겼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교회를 대표하여 총 8명의 특사로  5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를 파견하였는데 그 중 5명의 목사는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로버트 더글라스(Robert     Douglas)이었다. 이들은 하나같    이 장로교의 이론으로 철저히 무장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총회는 그들에게 전권을 위임하였다. 총회의 진행과정에서 스코틀랜드 특사들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목할 일은 4개의 표준문서들이 만들어 질 때 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총회를 열고 이를 자신들의 표준문서로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들이 형식과는 관계없이 총회를 언약에 따라 소집된 양국의 공동총회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1645년 ‘교회정치’가 작성되었을 때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 교회의 언약의 한 부분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특사의 도움으로 합의된 장로회 정치’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영국(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친 개념) 총회로 수용했다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예배모범, 장로회 정치(government)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이 문서들을 만든 것 역시 스코틀랜드 교회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640년 말 부터 스코틀랜드 총회는 잉글랜드 의회에 잉글랜드 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가 같은 신앙고백서(one confession of faith)와 같은 교리문답서(one form of catechism), 같은 예배 지침서(one directory) 그리고 같은 형태의 교회조직(one form of church government)을 갖기를 원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작성한 4개의 표준문서들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장로교 지도자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작성한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셈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작성한 4개의 문서는 스코틀랜드 교회 지도자들의 요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V.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교회조직 문제

4개의 표준 문서 가운데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서는 두말할 필요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그러나 총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논쟁을 거쳤고, 의견 일치를 보기 힘들기로는 ‘장로회 정치’였다. 소수의 잉글랜드 목사들이 개별교회에 대한 노회와 총회의 권한이 너무 커서 양심의 자유를 억압할 수 도 있다고 저항했고 의회 내 강력한 인물들이 교회는 의회의 통제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독립파이고 후자는 에라스투스주의자(Erastian) 들이었다.

총회는 독립파 문제는 해결했지만 결국 최종적인 ‘장로회 정치’ 문서는 총회가 의회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의회는 “만일 누구든지 교회가 내린 수찬정지의 처벌을 받고 장로들의 처리에 불만이 있다면 그는 노회(Classical Assembly)에 그 위로 광역노회(Provincial Assembly)에 그 위로 전국 총회(National Assembly)에 그리고 그 위로 의회(Parliament)에 호소할 자유를 가진다.”라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즉 총회위에 의회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 부분에 대해 스코틀랜드 교회가 수용할 수 없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 특사인 베일리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마도 교회의 머리가 되려는 어떤 교황과 왕의 싸움도 이 잉글랜드 의회의 욕심보다 더 크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교회 통제에 대한 잉글랜드 의회의 욕심을 비난하였다.

결국 스코틀랜드 총회가 수용한 문서는 잉글랜드 의회가 수정하기 이전 즉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초안이다. 우리는 이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장로회 정치’(government)와 비교하면 예배 부분과 신조 문제에 대한 논의는 거의 대립이 없었다. ‘예배모범’은 성경낭독, 기도, 설교로 구성되는 공(公) 예배를 강조하였고 세례식, 성찬식, 결혼, 장례, 금식일, 감사일 등을 포함하고 있다. 많은 청교도 목회자들과 스코틀랜드 특사들의 활약으로 신앙고백서도 별 무리 없이 작성되었다.

요리문답서는 두 권 즉 성인을 위한 ‘대요리문답’과 어린이를 위한 ‘소요리문답’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소요리문답’은 ‘대요리문답’과는 달리 신앙고백서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특사들이 귀국 준비로 ‘소요리문답’의 초안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음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VI.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유산

5년 반 이상의 기간 동안 총 1163회의 회의를 가진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9년 2월 22일의 회의를 끝으로 폐회하였다. 오늘날 거의 모든 장로교회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만들어 낸 결과들을 헌법으로 채택하고 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존의 모든 신앙고백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교 신앙의 표준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총회의 유산은 무엇보다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장로회 표준들이 하나씩 만들어 질 때마다 스코틀랜드 총회는 잉글랜드와의 언약에 따라 이들을 스코틀랜드 교회의 표준으로 수용하였다. 잉글랜드 교회를 위해 잉글랜드 땅에서 잉글랜드 목사들의 결정으로 작성된 문서들을 잉글랜드 교회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교회가 수용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 신비였다.

그 후 1660년 잉글랜드 교회는 왕정복고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들을 수용하였고 이는 복음과 함께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일부가 된 것은 큰 복이다.(*) 글쓴 이  / 김중락 박사(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국사, 대구서교회 장로) 출처 / http://ctmnews.kr/news/view.php?no=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