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토 L. 곤잘레스의 기독교 종교개혁사 (요약)

PART Ⅲ
시작하는 말
역사는 반복된다. 그 이유는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바퀴가 굴러가기 때문이다. 과거의 실패한 역사적 사건의 원리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동일하게 과거에 흥왕(興旺)한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에도 꼭 같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관찰하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기독교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고 교회 역사가(歷史家)들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역설적으로 기독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다양하게 총체적으로 부패하고 썩어 그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혹자는 16세기 종교개혁 전야(前夜) 로마 가톨릭교회가 부패했던 것 이상으로 한국교회는 부패했고 타락해 가고 있다고 탄식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같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심각한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 다시금 부흥과 성장이라는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인가? 정답은 언제나 성경에 있다.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실제적인 예가 바로 16세기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개신교 종교개혁의 역사이다. 과거의 역사이지만 우리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살펴봐야 할 필요성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는 10월 30일 주일은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1517년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499주년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 종교개혁사(宗敎改革史)를 심도 있게 다루는 게 바람직하겠으나 지면이 제한되어 있기에 단지 독자들에게 종교개혁에 관심을 집중시키며 계속 개인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된다면 이에 만족하고자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유스토 L. 곤잘레스,(Justo L. González, 1937- )의 종교개혁사(宗敎改革史, The Story of Christianity, 서영일 옮김, 은성, 1995)를 요약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기 원한 독자들에게는 루이스 W. 스피츠(Lewis William Spitz, 1922-1999)의 종교개혁사(宗敎改革史, The Reformation, 서영일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을 추천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제1장 개혁의 부름
교회의 타락은 극도에 달하여 성직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에 오히려 해독을 끼치고 있다. 성직자들 대부분이 공공연하게 첩(妾)을 두고 있으며 그래서 교회가 이를 처벌하고자 하면 그들은 오히려 이에 반항하여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들은 심지어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교회 정의의 수행을 막고 있다. < 이사벨라 1500년 11월 20일 >
15세기가 끝날 무렵 교회가 무언가 근본적 개혁이 필요로 하고 있음이 명백해졌으며 많은 이들이 이를 갈망하였다. 교황청의 몰락과 부정부패는 주지의 사실이었다.(11쪽) 교회의 개혁이 필요했던 것은 단지 도덕적 윤리적 부분만은 아니었다. 보다 심각하게 교회의 장래를 걱정했던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또 새로운 철학적 사조가 소개되기 시작했다.(13쪽)
바로 이런 상황에 대중들의 불만이 가세되었다. 일반 대중들의 경제적 상황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개선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어 있었다. 특히 농노(農奴)들에 대한 지주들의 착취는 더욱더 심해지기만 하였다. 한편 전통적 봉건제도는 그 종말을 맞고 있었다. 처음 프랑스 그리고 영국과 스페인에서 강력한 군주들이 출현하여 귀족들로 하여금 전체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국가들의 군주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봉건 영주이기도 하였던 수많은 고위 성직자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억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15쪽)
또 다른 역사적 사건들 역시 서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수평선을 넘어 새로운 세계들이 발견되고 있었다. 옛 세계는 사라지고 있었으며 그 자리에 새로운 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16쪽)
이러한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통해 경건한 기독교 신자들은 심각하게 자기의 신앙과 신학을 재검토하게 되었으며 결국 자기 자신들도 예견하지 못했던 입장과 결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멀리 성경에서 떠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로 인해 야기된 의견 충돌과 투쟁이 현재 우리가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 부르는 사건을 이루었다.(17쪽)
제2장 마틴 루터 : 개혁에의 길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너무도 단순하고 용이하게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를 겨우 인간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열거하고 있다. 이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들이 진실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며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큰지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말틴 루터 >
루터의 생애와 사역을 연구해 보면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즉 그토록 필요했던 종교개혁은 루터 개인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찼으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25쪽)
구원받기 위해서는 각자의 죄를 고백해야만 한다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그가 기울인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죄는 그가 고백할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넘어간 것을 발견했다. 또 만약 신비주의자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해도 이 역시 그에게는 그것이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29쪽) 루터는 ‘하나님의 공의’가 그가 이때까지 오해해 왔던 것처럼 신자들에 대한 처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오히려 의인들의 공의 혹은 의(義)가 인간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나님의 의(義)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칭의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의미이다.(33쪽)
주요 사건들 : 스콜라 신학 논박,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1517), 아우구스부르크 의회(1518), 라이프치히 논쟁(1520),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 신자가 모든 교황이나 종교회의들 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고 고백, 보름스 의회(1521)
제3장 루터의 신학
십자가의 동지들은 십자가야 말로 선하고 위대하며 인간들의 행위는 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선행을 통한 공로는 부정되며 행위를 통해 힘을 얻고자 하는 옛 아담은 못 박혔기 때문이다. < 말틴 루터 >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최종적 권위로 정립시켰다.(50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 즉 성육(成肉) 하신 말씀이 우리들에게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 교회, 교황 그리고 전통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다.(51쪽)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만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이성 혹은 양심이라는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이미 깨달았다고 생각하였던 모든 관념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54쪽)

칭의(稱義)란 죄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宣言)하심으로 이후부터 하나님 앞에서 죄 없는 자로 여겨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복음과 율법 사이의 단절할 수 없는 연계(連繫)는 죄인인 동시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聖徒)로서 우리가 지니는 기독교인의 생활로 반영된다.(56쪽)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가 발생하는 유기적 실재가 존재하는데 이 존재야말로 교회이다.(57쪽) 이러한 교회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성례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는 곧 세례와 성찬이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신자들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상징 이상의 것이다. 루터는 성찬을 단순한 상징 혹은 영적 실재의 표식으로만 여기는 데 반대하였다. 따라서 루터는 성찬을 통해 신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58,59쪽) 결국 성찬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임재(臨在)하시는가 하는 문제가 그 후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 논쟁의 초점으로 등장하였다.(61쪽)
제4장 불확실의 시대
루터는 이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단으로 간주 된다. 그는 4월 15일부터 시작하여 21일간의 유예 기간을 부여받았다. 그 후에는 아무도 그에게 머물 처소를 제공할 수 없다. 그의 추종자들 역시 정죄 받았으며 그가 저술한 책들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야 한다. < 보름스 칙령 >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 1521.3.) 이후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도움으로 루터는 발트루르크에 숨어 지내면서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성경 번역하는 일을 했다. 루터는 주위의 정치적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당시 정치적 상황들이 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므로 프리드리히는 그를 발트부르크에 숨겨둘 수 있었고 후에는 체포나 처형의 위험 없이 비텐베르크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65쪽)
주요 사건들 : 농민반란(1524), 스파이어 의회(1526), 보름스 칙령 철회, 독일의 공국들이 각각 자기들이 선택하는 종교를 공인할 수 있도록 허락, 스파이어 2차 의회(1529), 보름스 칙령 재승인, 아우구스브르크 신앙고백(1530), 누렘베르크 화의(1532), 신앙의 유지 인정 그러나 전파는 금지
제5장 쯔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
만일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기 위해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의 내부에 자리 잡은 진정한 심정이 하나님의 율법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인간의 내면적 존재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법이나 말이 없을 것이다. < 율리히 쯔빙글리 >
쯔빙글리가 1519년 취리히의 신부(神父)가 되었을 때는 이미 루터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이는 인문주의자들의 방법론에 의한 부지런한 성경연구 그리고 당시는 마치 기독교인양 성행하던 미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교회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 및 용병제도에 대한 비판 정신의 결과였다.(79쪽) 당시 존재했던 스위스 연맹은 현재적 개념의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라 독자적인 법률과 정부를 가지고 있던 여러 자치국들의 모자이크와 같은 연합이었다.
이들은 몇 가지 공동목표 특히 독일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연합했다. 이러한 모자이크 같은 연합 아래 일부 자치 주(州)들은 개신교가 되었고 나머지는 주(州)들은 계속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에게 복종했다. 그래서 이미 존재하던 각종 갈등의 요소들뿐 아니라 이 같은 종교적 차이로 인해 내란이 불가피하게 보였다.(83쪽)
1531년 카펠 회의가 조인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신교도들은 당시 전쟁에 소요 된 경비를 보상해 주기로 하고 그 대신 각 자치 주(州)들은 독자적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프로테스탄트주의는 몇몇 스위스 자치 주(州)들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84쪽) 종교개혁에 있어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이성(理性)의 힘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제6장 재세례파 운동
이제 사람들은 누구나 신앙의 열매가 없는 표면적 믿음만을 가지고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다. 이들은 신앙 때문에 시련과 고난을 격지도 않았으며 사랑이나 소망도 없고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 콘라드 그레벨 >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쯔빙글리 두 사람은 모두 고대와 중세 교회의 모든 역사를 통해 신약에 나타난 기독교가 변질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루터는 성경에 모순되는 모든 요소로부터 이를 정화시키고자 하였다. 쯔빙글리는 오히려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인 성경적 근거가 있는 신앙과 관습들만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쯔빙글리 자신이 이러한 주장을 논리적인 결론에까지 충분하게 이끌어 가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비판했다. “콘스탄틴의 대제의 회심의 결과로 발생한 교회와 국가 사이의 협력 관계야말로 초대교회 기독교에 대한 배반이었다. 따라서 진정 성경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개혁자 자신이 허용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전되어야 한다. 교회는 나머지 사회와 혼란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와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것이다. 즉 인간은 단지 어떠한 지역사회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자기 자신을 의식적인 결단 없이 사회 속에 속하지만 반면에 교회는 의지의 결단 없이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아세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있는 개인적 결단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유아세례는 부정했다.(89,90쪽)
이 같은 재세례파(Anabaptist) 운동은 개신교뿐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에게도 반대를 받게 되었다. 비록 이러한 반대는 신학적 이유로 설명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실제로는 이들에게 반역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또 이들은 교회와 세속사회가 서로 대치 상태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의 권력 구조가 교회 속으로 이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재세례파들은 교회를 세속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발적 공동체로 정의함으로써 이러한 전통과 관습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재세례파들은 극단적 평등주의자들이었다.(92쪽) 후기 재세례파는 감리교와 연결 된다.

제7장 칼빈의 종교개혁
우리들의 생각과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보장하는 경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자. – 하나님 자체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이다. – 그리고 우리들은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신 내용을 통하여 그를 생각하고
앙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하나님의 본성을 알려고 시도하지 말자. < 요한 칼빈 >
(1) 칼빈의 초기 생애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노용(Noyon)에서 태어났다. 이때 루터는 이미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첫 번째 강의를 끝마친 후였다. 이같이 칼빈은 루터보다 한 세대 후 인물이었다.
칼빈 아버지는 당시 출현하기 시작한 중산층이었고 주교의 비서에다 성당 참사회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칼빈의 학비 조달을 위해 주교 비서직 외에 두개의 교회 직분을 더 맡았다. 칼빈은 이 같은 아버지 덕에 파리로 가서 공부할 수 있었는데 이 기간에 당시 일기 시작한 인문주의와 신학적 논쟁을 통해 위클리프, 후스, 루터 등의 신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그의 말대로 “나는 그때까지도 교황청의 미신에 완고하게 매달려 있었다.”고 했다.(Preface to the Commentary on the Psalms, Opera 31:22)
1528년 칼빈은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이때 직장을 잃게 된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신학을 포기하고 법률계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칼빈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오를레앙(Orleans)과 부르게(Bourges)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당시 유명한 법률학자 레스톨(Pierre de’lEstoile)과 알치아티(Andrea Alciati) 등이 그의 스승이었는데 레스톨은 전통적 연구 방법과 법률 해석을 주장한 데 반해 알치아티는 인문주의자로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학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양자 사이에 논쟁이 있어나면 칼빈은 주로 레스톨 편을 들었다. 이는 인문주의 정신에 깊이 젖어 있을 그 당시에도 유명했던 몇몇 인문주의자들의 특징인 내용 없는 우아함에 칼빈은 별로 관심이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 기독교강요(基督敎網要)
칼빈이 언제 어떻게 왜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루터와 달리 칼빈은 자신의 영적 갈등에 관해 거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당시 상황으로 판단해 볼 때 그의 주위에 있는 일부 인문주의자들의 영향과 아울러 깊은 성경연구 그리고 초기 기독교 역사 탐구를 통해 스스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나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기로 결심한 듯하다.
1534년 칼빈은 고향 노용에 가서 아버지가 그를 위해 주선해주었던 성직록(聖職祿)을 포기했다. 당시의 칼빈으로서는 성록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음에도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 칼빈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확실하게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사실은 그때까지만 해도 신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가 그해 10월부터 돌변하여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칼빈은 1535년 1월 박해를 피해 신교도들의 도시 스위스 바젤로 피신한 것이다.
칼빈 자신은 자기가 하나님께 학문과 저술의 소명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잘 알려진 종교개혁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조용히 성경연구와 저술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칼빈은 바젤에 도착하기 직전 ‘죽은 자들 영혼의 부활 이전의 상태’에 관한 소논문을 썼다. 그리고 영적 혼란의 시대에 교회의 신앙을 명백하게 제시하는 또 다른 논문을 저술할 수 있기를 그는 원했다. 즉 그의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개신교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 전체에 관한 교리를 요약 저술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개혁자들 저술은 당시 시급했던 교리 논쟁의 문제들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삼위일체, 성육신, 교회 등 다른 기독교의 기초교리는 거의 취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칼빈은 이 같은 점을 간파하고 교인들을 교육하기 위한 잘 요약된 성경의 기독교 교리를 저술한 후 그 책 이름을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고 붙였다. 그리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은 1536년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모두 516페이지였다.
초판은 당시 모든 사람이 흔히 입는 옷의 주머니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였다. 그래서 쉽게 프랑스 내에 비밀리에 널리 유포될 수 있었다. 초판의 내용은 6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처음 4장은 율법,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 등을 다루었고 마지막 2장은 보다 논쟁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례가 성경적으로 잘못된 점과 기독교인의 자유 문제에 관한 개신교의 입장을 요약한 것이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출판되자 전 유럽에 커다란 반향(反響)을 불러 일으켰다. 라틴어로 썼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읽힐 수 있었던 초판은 9개월 만에 매진되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더욱 보완하고 보충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 내용도 점차 방대해져 갔다. 당시 발생했던 논쟁들 그리고 칼빈이 오류라고 믿었던 여러 집단의 이론들 그리고 당시 교회가 처해 있던 여러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정의의 필요성 등으로 말미암아 그 내용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칼빈의 신학적 입장의 발전과 그가 관여되었던 각종 논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독교강요’의 여러 판을 비교해 보면 된다.

1539년 역시 라틴어로 저술한 ‘기독교강요’ 제2판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출판되었다. 이어 칼빈은 1541년 제네바에서 ‘기독교강요’ 프랑스어 초판을 출판했는데 후에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프랑스 문학의 고전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1543년과 1545년, 1550년과 1551년, 1559년과 1560년에 각각 개정된 라틴어판이 출판됨과 동시에 항상 프랑스어 개정판도 출판되었다.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은 1559년과 1560년에 출판된 것으로 이 최종판이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이다.
소책자에 불과했던 1536년 초판과 1560년 최종판은 엄청나게 달랐다. 단권에 6장의 내용이었던 초판이 4권 80장으로 발전된 방대한 저술이었다. 최종판의 제1권은 창조와 인간론 그리고 하나님과 계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2권은 구속 주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이 구속 사역이 처음에는 구약을 통하여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우리들에게 알려졌는가를 다룬다. 제3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성령의 열매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제4권은 이러한 참여를 위한 외형적 방법들을 취급하는데 이것이 곧 교회와 성례이다.
이러한 ‘기독교강요’ 내용 전체를 통해 칼빈은 성경뿐 아니라 고대로부터 특히 어거스틴의 저술들로부터 16세기 모든 신학 논쟁에 이르기까지 심오한 지식의 인물이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칼빈의 ‘기독교강요’야 말로 종교개혁의 시대에 있어서 개신교 조직신학의 최고봉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 칼빈에 의한 첫 번째 제네바시 종교개혁
칼빈은 처음부터 당시 유럽에 잘 알려진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되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는 모든 개혁자를 존경했으나 자신이 받은 은사는 목회자나 개혁자가 아니라 학자요 저술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조용히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는 개신교뿐 아니라 신학과 문학의 활동이 활발하여 그가 원하는 사역을 위한 학문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는 길이 전쟁으로 인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제네바를 거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제네바시(市)의 상황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에서 막 벗어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의 도시였던 베른시(市)는 이러한 상황에 있는 제네바시(市)의 개혁을 돕기 위해 개혁자들을 파송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제네바시(市)의 유력한 세력이었던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받았다.
제네바시(市) 의회는 개혁의 조치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제네바시는 이제부터 프로테스탄트라고 선언을 했다. 제네바 시 의회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시민들은 별 이의 없이 순종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다 칼빈이 제네바시에 도착하기 불과 몇 달 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런데 제네바시의 종교개혁을 책임 맡았던 베른시가 파송한 개혁자들의 지도자는 파렐(William Farel, 1489-1565)로서 그는 제네바시 개혁을 위한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제네바시 개혁을 위한 유능한 인재였다.
바로 이런 때에 1536년 칼빈이 제네바시에 도착했고 그는 하루만 머물고 계속 스트라스부르크로 향해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파렐에게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저자 칼빈이 제네바시에 왔다고 알려 주었다. 복음전파의 불타는 열정으로 충만해 있던 파렐은 당장에 칼빈을 찾아가 제네바시 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간청했다.
칼빈은 자기보다 15세나 위인 파렐의 말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경청했다.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 학자로 교회를 섬기기 원하기 때문에 파렐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파랠은 자기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아무리 칼빈을 설득하려 해도 되지 않자 화를 내며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이토록 절실하게 필요한 제네바 시의 위급한 상황을 못 본 척하고 단지 자신의 안위만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평화를 저주하시기 원하노라!”
칼빈은 후에 이때 자신의 당황스럽고 놀란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파렐의 말은 천둥소리처럼 내 가슴을 흔들었고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에 그는 나를 굴복시켰고 나는 거기서 여행을 멈추었다.” 이렇게 제네바시 개혁자로서의 칼빈의 생애는 시작되었다. 칼빈이 처음에는 개혁자들 특히 파렐의 보좌 역할만 하고자 했으나 곧 그의 뛰어난 신학적 통찰력과 법률가로서의 훈련 그리고 개혁에 대한 불타는 열정으로 제네바시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제네바시 개혁자들의 리더였던 파렐은 기꺼이 스스로 칼빈의 조력자가 되었다.
그러함에도 파렐과 칼빈이 의도했던 대로 제네바시의 개혁이 순조롭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이 본격적인 교회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로마 가톨릭과 결별을 반겼던 제네바시의 부르주아들은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 다른 개신교 도시들에 두 사람에 대한 중상모략을 퍼뜨리기까지 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였기 때문이었다. 결국에 이들은 성찬을 거부한 시민의 파문 문제를 놓고 칼빈과 정면충돌을 했다.
칼빈은 만약 시민의 신앙생활을 종교개혁의 원칙과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교회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파문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러자 당시 부르주아들이 장악하고 있던 제네바시 의회는 이는 율법주의라고 칼빈의 주장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칼빈을 제네바시에서 추방했다. 파렐은 계속 남아 있어 달라는시 의회의 부탁을 받았으나 “내가 단지 자유만 누리고 이에 따른 책임을 무시하는 종교를 원하는 부르주아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차라리 친구와 함께 하겠다.”며 파렐 역시 추방을 당한 칼빈과 함께 제네바시를 떠났다.
(4) 칼빈의 스트라스부르크 목회
그러나 칼빈은 제네바시 의회의 추방을 자기가 원래 원했던 학자와 저술가로서의 생애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칼빈은 원래 계획대로 스트라스부르크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칼빈은 조용히 보낼 수가 없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에는 신앙을 지키려고 프랑스를 떠나야만 했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크의 지도자였던 마틴 부처(Martin Bucer)는 두 손 들어 칼빈을 반기면서 칼빈이 이들의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칼빈의 스트라스부르크 목회가 시작되었다.
칼빈은 이때 최초로 프랑스인 신교도 회중들을 위해 일부 시편과 찬송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프랑스어로 된 예배의식을 작성했다. 그는 또한 ‘기독교강요’ 제2판의 저술에 착수했고 이델렛(Idelette de Bure)이라는 과부와 결혼도 했다. 칼빈의 결혼생활은 1549년 이델렛이 죽기까지 행복했다. 그리고 그 기간은 그가 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물렀던 1538년부터 1541년까지는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5) 칼빈에 의한 두 번째 제네바시 종교개혁
칼빈은 1541년 다시 돌아와 달라는 제네바시 의회의 간곡한 요청으로 제네바시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와 칼빈이 시작한 첫 작업은 일련의 ‘교회 규칙’(Ecclesiastical Ordinances)을 작성한 일이다. 제네바시 의회는 이를 약간 수정하여 채택했다. 이 교회 규칙을 통해 제네바 교회는 교황이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달리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堂會)가 지도하고 감독하게 되었다. 당회는 목사 5명과 12명의 장로로 구성했다. 목사에 비해 장로가 당회의 다수였으나 그러함에도 제네바 교회의 당회는 모든 일에 거의 칼빈의 의견을 따랐다.
그러나 그 후 12년 동안 제네바 교회의 당회와 제네바시 의회는 갈등과 대결을 거듭했다. 왜냐면 칼빈의 지도를 받는 당회가 교회 구성원이기도 한 제네바 시민들의 생활 전반을 지도하려고 하자 시의회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1553년 칼빈 반대파가 다시 득세하게 되면서 칼빈의 입지도 위태로워졌다. 바로 이때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사건이 발생했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출신의 내과 의사로 그의 병리학 연구는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신학에도 관심이 많아 몇 권의 신학논문을 쓴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콘스탄틴 로마 황제의 회심으로 발생한 교회와 국가의 유착은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이요 배교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한 니케아 종교회의 또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 자체를 부인했다.
그러자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체포했고 프랑스의 종교법원이 그를 재판하기 위해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그는 감옥에서 탈옥해 도망쳤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도망친 그에게 화형을 판결하고 누구든지 그를 체포하여 처형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베투스는 신교도들의 도시인 제네바시에 은밀히 잠입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아는 한 군인에 의해 그의 신분이 밝혀지면서 제네바시 역시 그를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이단으로 체포했다.
제네바시는 재판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기 위해 칼빈에게 그의 논문에 나타난 이단성을 조사하여 자료로 제출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칼빈은 시가 요청한 자료를 제출하면서 그의 사상이 이단인 것은 분명하며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화형보다는 참수형이 좋겠다는 칼빈 자신의 소견도 첨부했다. 그러자 칼빈을 반대하는 일부 제네바 시민들은 세르베투스가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이라는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제네바시의 개신교도들에게는 동맹자라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전개하면서 그의 재판 자체를 반대했다.
제네바시 의회는 스위스 내의 여러 자치주의 자문을 구했다. 스위스 내의 여러 자치주 역시 모두가 세르베투스는 로마 가톨릭의 기준에서 볼 때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의 기준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명백한 이단이기 때문에 그를 이단으로 처벌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그러자 세르베투스 재판을 반대하던 자들이 잠잠해졌고 제네바시는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 후 이 같은 세르베투스의 처형을 놓고 엉뚱하게도 마치 칼빈이 그의 처형을 주장하여 그를 죽인 것처럼 비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구약성경의 아가서를 남녀 간의 탐욕적인 사랑이라고 해석하여 제네바시에서 추방 된 카스텔로(Sebastian Castello)라는 사람은 칼빈을 가리켜 그는 무자비한 살인자라고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칼빈을 비난했다. 유명한 의사였던 세르베투스의 이 같은 화형 사건은 그 후 칼빈의 제네바시의 엄격한 교리 우선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재판 과정 특히 칼빈의 역할에 대해 비난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러나 당시 제네바시에서 칼빈의 신분은 온전한 시민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단 판결에 영향은 줄 수는 있었으나 화형을 판결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또 당시 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이단에게는 이와 유사한 처벌을 했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세르베투스가 탈옥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프랑스의 종교재판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까지 일부 사람들이 칼빈을 마치 무자비한 살인자로 오도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이며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559년 칼빈은 그의 소원이었던 제네바 아카데미(Genevan Academy)를 설립했다. 초대 교장이었던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는 칼빈 사후 칼빈을 잇는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이 학교에 제네바 청년들뿐 아니라 유럽 각지로부터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며 칼빈의 신학 사상에 의한 교육을 받았다. 또 이들은 졸업 후 자기 나라에 돌아가 칼빈의 신학 사상을 전파했다. 이것이 오늘날 칼빈주의의 시작이었다.
죽음이 임박하자 칼빈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그를 찾아온 개혁의 동지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근처 누샤텔(Neuchatel)에 있던 파렐도 급히 달려와 칼빈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생을 마감했다.
(6) 칼빈과 칼빈주의
칼빈의 생전에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를 제외하고 개신교를 분열시켰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르부르크 회의(Marburg, 1529.10.1.-4)에서 루터(共在說, Consubstantiation)와 쯔빙글리(記念說, memory symbolism)를 대결케 한 성찬에 대한 해석 문제로 “그리스도께서 어떤 형태로 성찬에 임재 하시는가?”하는 문제였다.
칼빈은 이 문제에 있어 마틴 부처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했다.(靈的 臨在說, Spiritually Presence) 이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단지 상징적인 것이거나 성찬이 경건을 위한 훈련에 불과한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성례에 참여하는 교회를 위해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운데 임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물리적으로 천국에서부터 하강하시거나 혹은 루터의 주장처럼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찬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장차 천국으로 옮겨질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천국 잔치의 예고적 즐거움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1526년 부처와 루터 또 다른 이들이 ‘비텐베르크 고백’(Wittenberg Concord, 1536.5.29)에 합의했는데 그 내용은 루터와 부처의 장점들을 모두 수용한 것이었다. 1549년 부처와 칼빈 그리고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들과 남부 독일 출신 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비슷한 문서인 ‘취리히 합의서’(Consensus of Zurich or The Consensus Tigurinus)에 서명했다. 또 루터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출판을 기뻐했다. 따라서 성찬에 있어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칼빈과 루터의 차이점은 개신교의 통일을 위한 넘을 수 없는 불가능한 장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위대한 스승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스승보다 관용심이 부족했는지 1525년 루터파인 웨스트팔(Joachim Westphal, 1510-1574)은 칼빈에 대항하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칼빈주의가 눈에 보이지 않게 루터파의 전통적 입장 속으로 침투에 들어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자기야말로 성찬에 관한 루터의 원래 입장의 진정한 수호자라고 했다. 루터는 이미 죽은 후였는데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은 칼빈을 비판하라는 베스트팔의 요청을 거절했다. 어쨌든 그 결과 루터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취리히 합의서를 받아들인 칼빈을 따르는 무리들 사이에는 점차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취리히 합의서’(Consensus of Zurich)를 거부하는 루터파 사람들은 ‘취리히 합의서’를 따르는 이들과 자신들과의 신앙 노선을 구별 짓기 위해 그들을 ‘개혁파’(Reformed)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칼빈주의자(개혁파)’의 특징이 예정교리가 아니었다. 왜냐면 루터파도 원래 이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파’와 ‘루터파’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성찬에 관한 이해였다. 그러나 교회사의 진전에 따라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음 세기에 들어서야 예정론이 칼빈주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사의 두 거장인 칼빈과 루터는 양자 모두 예정교리에 대한 뜨거운 확신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Genevan Academy)와 ‘기독교 강요’의 영향으로 칼빈의 신학적 입장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파급되어 갔다. 그 결과 얼마 안 되어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헝가리, 프랑스 등 유럽 각국에 이 위대한 제네바 개혁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많은 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들이 오늘날의 개혁파 혹은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교회들이다.(101-114쪽)
제8장 영국 종교개혁
일찍이 사도 바울이 예언했던 인간들의 대대적인 배교 행위가 과연 어느 지역에서 어떤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는 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성도들의 생활은 부패하였으며 종교적 진리는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관습 계약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 존 녹스 >
영국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최종적 결렬은 1534년에 발생했다. 의회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로마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가던 각종 헌금을 봉쇄시켰으며 헨리와 캐더린의 결혼은 무효라고 판결하였다. 이에 따라 메리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서의 위치를 박탈당했으며 의회는 또한 국왕을 ‘영국교회의 수장’으로 지명하였다. 이 마지막 결정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의회는 또한 누구든 국왕을 가리켜 분파주의자 혹은 이단이라 하는 자는 반역에 해당한다고 못 박았다.(119,120쪽)
잉글랜드 내에는 보다더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인사들이 많이 있었으며 이들은 당시 상황의 전개야말로 이를 이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를 보여주었던 전형적인 인물은 바로 이러한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희망했기 때문에 왕의 정책을 지원하였던 토마스 크렌머였다.(121쪽)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후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더린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평생을 통해 충실한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다. 그리고 개신교를 지독하게 핍박했다. 왜냐면 종교개혁의 시작은 그녀가 어렸을 적에 그녀의 왕위 계승자의 지위 박탈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126쪽)
메리는 1558년 말에 사망하였으며 헨리 8세와 앤 볼린 사이에 태어난 이복동생 엘리자베스가 그 뒤를 이었다. 메리가 자기 자신의 신념과 아울러 정치적 필요성에 의한 로마 가톨릭 신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는 비슷한 이유로서 프로테스탄트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영국교회 수장이 국왕이 아닌 교황이라면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더린 사이의 결혼이 유효한 것이 되고 따라서 캐더린이 아직 살아있을 때 앤 볼린에게서 출생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열성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아니었다.(128,129쪽)
영국의 메리 튜더가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이 잉글랜드의 여왕이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그녀는 사촌 엘리자베스와 원수지간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계속 태후인 기즈의 메리가 섭정으로 통치하였다. 그녀는 친 로마 가톨릭교회 정책을 폈다.(135쪽)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자기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목을 졸랐다. 그녀는 항상 마음속에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였는데, 이 때문에 결국은 스코틀랜드의 왕위조차 잃고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137쪽) 스코틀랜드는 개혁주의 신앙 전통에 서게 된다.
제9장 루터란 내의 움직임
기독교 통치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게 하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세력이 있다거나 혹시 이 세력이 보다 높은 위치와 권력이 있다 할지라도 통치자는 이로부터 자기 시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 마그데부르크 신앙고백(1550년) >
1532년 조인된 ‘뉴렘베르크합의’(The Pesce of Nuremberg)에 따라 개신교 신도들은 자기 영역 내에서는 자유스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자기 영역 밖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당시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극히 복잡하고 유동적이었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찰스가 황제였으나 국내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들이 그의 독단적 통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종교적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많은 귀족은 찰스가 수장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 영주들 가운데 일부도 찰스가 루터란에 대항하여 자기 세력을 굳힘으로써 결국은 자기 집안의 세력 강화를 꾀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찰스가 조직하고자 했던 반 프로테스탄트 전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였던 가장 강력한 영주 가운데 하나는 헤세의 필립이었는데 그는 또한 슈말칼트 동맹 지도자였다.(142쪽)
그러나 개신교에 큰 피해를 준 몇 가지 사건이 발하였다. 이들 가운데 첫 번째는 필립의 중혼 사건이었다.(145쪽) 두 번째 사건은 삭소니 공작 모리스가 동맹 가입을 거부한 것이었다. 세 번째 사건은 1546년에 있었던 루터의 사망이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사건은 이제 황제가 독일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146쪽) 그러나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자기의 의지를 종교적 분야에 관철시키기에는 때가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합동으로 작성한 ‘아우구스부르크 잠정 협정’(1555년)을 시행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는 점차 독일 문제를 그의 동생 페르디난드에게 위임했다. 그는 파소 확약을 통해 영주들과 평화를 조인했다. 그 결과 헤세의 필립과 프리드리히가 석방되었고 제국 전체에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는 몇 가지 제한 조건이 있었다. 주민들은 개인적으로 자기들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종교를 결정하는 것이며 황제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주들을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도록 강요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조약에 의해 보장된 자유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교회 혹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등을 준수하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147-149쪽)
인근 스칸디나비아에서도 루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독일의 경우 종교개혁과 그 후의 각종 투쟁이 국가를 분열시키고 왕실에 대항한 귀족들의 세력을 강화시킨데 반해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곳에서는 왕실이 종교개혁을 선도하였기 때문에 승리 역시 이들의 것이었다.(150쪽)
제10장 저지대 제국들의 종교개혁
우리는 모두 양팔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하자. 굶주림 때문에 필요하다면 한 팔을 잘라먹고 나머지 한 팔로 신앙의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 라이덴 포위시 한 개신교 수비대원 >
각 지역은 예부터 전래 된 특권과 특정 정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화적 통일성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왜냐면 남부에서는 프랑스어 북부에서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였으며 중간 지역에서는 플랜더스어가 공용되었다. 종교적 상황은 이보다 더 복잡했다. 왜냐면 여러 주교의 관할 지역은 정치적 경계선과 일치하지 않았으며 주교구의 일부지역들은 이들 17개 지방의 영역 밖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찰스 5세가 1555년 부루셀에서 17개 지방을 그의 아들 필립 2세에게 넘겨주었을 때 그는 필립이 그의 형식을 계속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또한 필립 역시 이를 시도하였다.(156쪽) 프로테스탄트 설교가 이전부터 저지대 일대에는 상당히 강한 개혁운동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공동생활의 형제단 뿐만 아니라 가장 뛰어난 인문주의 개혁가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루터란 설교자들이 이 지역에 침투해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 후 재세례파들도 대대적으로 유입되었다. 마지막으로 제네바, 프랑스 그리고 남부 독일로부터 수많은 칼빈주의 설교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결국 이들 칼빈주의 설교자들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열매를 거두었으며 이에 따라 이 지역의 프로테스탄트의 주류는 칼빈주의가 이루게 된다.(157쪽)
1607년 필립 2세가 죽은 지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스페인은 이곳의 전쟁에 지불 한 노력과 출혈이 너무 심하다고 깨닫고 휴전에 서명했다. 그때는 이미 북쪽 지방의 주민 절대다수가 칼빈주의자들이었고 자기들의 칼빈주의 신앙을 국가에 대한 충성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쪽 지방들은 계속 로마 가톨릭으로 잔존했다. 결국에 종교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이곳에서는 세 개의 국가가 성립하게 되었으니 곧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와 가톨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이다.(166쪽)
제11장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주의
오 주님! 주님께 간구합니다. 주님의 영예가 이토록 짓밟히는 데도 어떻게 이런 범죄가 자행되는 것을 허락하시나이까! < 에띠엔 디 메종플루 >
종교개혁 초기 프랑스를 통치했던 인물은 발로아가(家)의 마지막 위대한 인물인 프란시스 1세(Francis I of France, 1494-1547)였다. 그의 종교정책은 항상 애매모호한 것이 특징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1547년에 사망했다.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헨리 2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였으나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항한 그의 반대는 보다 지속적이고 잔인한 것이었다. 그는 네 명의 아들을 남겼는데 이들 가운데 셋이 연이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곧 프란시스 2세, 찰스 9세 그리고 헨리 3세이다. 또한 세 명의 딸 가운데는 오빠가 죽은 후 프랑스의 여왕 자리를 차지하였던 바로아의 마가렛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모친 캐더린 드 메디치는 자녀들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려는 권력의 야심에 가득 찬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캐더린의 야망은 기즈가(家)의 지도자들에 의해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168,169쪽)
바로 이때 왕을 기즈 가문의 수중으로부터 납치하고자 했던 음모가 발각되었다. 비록 이 계획은 그 동기에 있어서 종교적이지 않았으나 이 음모에 가담했던 대부분 인사는 위그노들이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칼빈주의자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던 이름이었다. 캐더린은 프란시스 2세의 급서 이후 왕위를 계승한 찰스 9세를 위해 섭정을 차지했고 정치적인 책략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했다. 기즈가(家)의 세력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171쪽)
1562년 섭정 캐더린 드 메디치는 ‘성 저맨 칙령’을 반포했다. 이에 의하면 위그노들은 예배 장소를 소유하거나 허가를 받지 않고 총회를 소집하거나 자금을 모집하거나 군대를 모집하는 등의 사항은 금지되었으나 자기들의 마음대로 예배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즈가(家)는 캐더린의 권위에 대항하여 이 칙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바시의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로마 가톨릭은 기즈공 아래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는 가스파르 콜리니 제독의 지도 아래 모여들었다.(172쪽)
새로운 기즈의 공작 헨리는 자기 아버지가 콜리니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확신하였으므로 복수를 꿈꾸고 있었고 캐더린 역시 국왕의 신임과 존경을 얻은 프로테스탄트 제독의 날로 커지는 영향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어지러운 세파 속에서도 보기 드물게 고상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던 콜리니 제독을 제거할 음모가 진행되었다. 캐더린은 찰스 9세에게 그의 왕위를 박탈하고자 하는 거대한 위그노들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주모자는 콜리니라고 모함했다. 국왕은 이 말을 믿었고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대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 축제일이었다.(174쪽)
이처럼 수많은 살상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주의 자체가 소멸된 게 아니었다. 이들은 학살의 결과 유능한 군사 지도자들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라 로셀과 몬트아우반으로 집결했다. 이 도시들은 이전의 평화조약에 의해 위그노들에게 주어진 곳이었다. 이들은 기즈가(家)뿐만 아니라 이제 국왕 자신을 살인자요 반역자로 규정하고 정면 대결을 선언하였다.
또 다른 복수극과 살상만을 불러일으키는 전쟁과 유혈극에 지친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도 이제 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최선이라 확신하고 이들을 지원했다.(176쪽) 찰스 9세에 이허 헨리 3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내분은 멈추지 않았다. 헨리 3세의 사망도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합법적 왕위 계승자가 분명했던 헨리 부르봉은 헨리 4세의 칭호를 택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프로테스탄트 국왕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침내 자기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왕위를 계속 차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헨리는 다시 종교를 로마 가톨릭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마침내 1598년 4월 13일 그는 ‘낭트 칙령’을 발하여 위그노들에게 파리만을 제외하고 그들이 이전에 교회당을 소유하였던 모든 장소에서 자유스럽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종교 자유를 허락했다.(178,179쪽)
제12장 로마 가톨릭의 자체 개혁
종교개혁 교회는 항상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cum Verbo) 다스리신다고 믿고 고백하는 반면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 거하신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성경을 무시하는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 요한 칼빈 >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회에 항의하기 이전에도 이미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도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특히 루터가 아직도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운동을 수행하고 있었던 이사벨라 여왕과 시스네로스(Francisco Jiménez de Cisneros, 1436-1517) 추기경을 배출한 스페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181쪽)
로마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수도회들 가운데 일부는 고대로부터 전해진 전통적 수도원 규칙을 보다 엄격하게 지키고자 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16세기의 새로운 시대적인 상황에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전자의 전형적 형태는 성녀 테레사에 의해 성립된 맨발의 갈멜 수도회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지도아래 있었던 예수회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고자 하였던 수도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189쪽)
종교개혁 초기의 교황들은 보편 공의회의 소집을 반대했다. 왜냐면 일찍이 교황보다 종교회의가 우위임을 주장한 공의회 수위 운동의 부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분열이 항구화된 교황 바울 3세의 재위 기간에야 비로소 교황청에서는 보편 공의회의 소집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각종 복잡하고 난해한 협상 끝에 공의회가 1545년 12월 트렌트에 소집될 것이 결정되었다.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1545-1563)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계속된 것이었으나 그 기간의 대부분은 휴회 상태에 있었다. 트렌트 공의회 이전에는 대부분 이단으로 고려된 교리 문제만 다루었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 당시에는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제시한 문제들이 광범위하였으며 교회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므로 ‘트렌트공의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정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의문을 제기한 신학의 문제들을 취급해야 했다. 이러한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를 장려하여 그의 신학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류로 삼았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라틴어판 성경인 벌게이트가 도그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닌다는 것,
- 전통이 성경에 상응하는 권위를 지닌다는 것,
- 성례는 일곱 가지라는 것,
- 2종 성찬 즉 평신도들이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
- 칭의는 은혜와 신자 사이의 협력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선행에 기초한다는 것 등등을 선포하였다.
이 트렌트 공의회는 현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생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 현대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가 저항하였던 중세교회와는 다르다. 왜냐면 이것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한 반작용의 흔적을 지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후 4세기 동안 이러한 반동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트렌트공의회’가 부인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많은 요소가 기독교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20세기에야 비로소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벗어난 별개의 개혁 방안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205-209쪽)
제13장 격동의 시대
이처럼 절대 절명의 시기에 발행 된 이 성경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의 신성한 원천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성경으로부터 보다 순수한 신학이 흘러나올 것이다. < 지메네즈 >
16세기야말로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큰 격동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불과 수십 년 동안에 일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거대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조가 허물어졌고 그 가운데서 찾아낼 수 있었던 유물들을 사용하여 ‘트렌트종교회의’는 현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기초를 닦았다. 이와 같은 시기에 폐허로부터 여러 개의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이 출현했다. 그 결과로 서방 기독교는 문화적, 신학적 차이점들을 반영하는 여러 가지 흐름으로 나뉘게 된다.(201쪽)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수없이 발생했던 종교전쟁의 근저에는 국가적 통일은 종교적 합일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유럽 각처에서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종교적 통일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혹시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이를 위해 지나치게 비싼 대가를 지불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점은 특히 프랑스의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598.4.13.)에서 볼 수 있다. 낭트 칙령은 앙리 4세 국왕의 모든 백성은 하나의 종교로 통일시키려는 정책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202쪽) 네덜란드 일대의 저지대에서는 그와는 또 다른 정치적 이유로 오렌지공 같은 지도자들 역시 로마 가톨릭과의 종교적 합일의 필요성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형언할 수 없이 중요한 결과를 낳게 한 긴 과정이 시작되었다. 왜냐면 여러 유럽 국가들은 차례로 종교자유의 정책을 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세속국가라는 보다 현대적 관념이 성립되게 된다.
16세기는 또한 한 개의 제국아래 성립된 정치적 통일성이라는 꿈이 파괴된 시대이기도 했다. 또 종교개혁을 향한 종교 회의주의자들의 소망 역시 흔들리게 되었다. 교황청은 종교회의의 도움 없이도 교회 개혁을 어느 정도 이루는 데 성공했으며 정작 소집된 ‘트렌트종교회의’는 진정한 국제적인 세계회의의 장소가 아니라 결국 교황의 권력 강화의 수단에 불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203쪽)
그 결과는 중세의 제도와 전통들이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갈릴레오가 주장했듯이 지구 자체도 우주의 중심은 아니었다. 이렇게 이제까지의 구(舊)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형태의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혼란은 거듭되었다. 그런 가운데 점차 전통적 봉건주의 대신 새로운 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있었다.(204쪽)(*) 출처 / 유스토 L. 곤잘레스,(Justo L. González, 1937- )의 종교개혁사(宗敎改革史, The Story of Christianity, 서영일 옮김, 은성,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