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인물로 본 청교도 역사

PART Ⅰ

인물로 본 청교도 역사

청교도 운동의 주역들

시작하는 말

매년 11월이 되면 교회는 한 해의 추수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의 달로 지킨다. 오늘날 11월을 이같이 교회가 감사절로 지키는 전통이 성경 기록에는 없으나 17세기 잉글랜드 국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한 퓨리탄(puritan, 청교도)의 초기 역사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청교도들이 북미로 이주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와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 때 이어진 신앙의 박해 때문이었다. 그래서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s Fathers)이라 불리는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1600년대 초기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도 102명의 청교도가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역사가 오늘날의 감사절에 대한 직접적인 유래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초기 미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순수한 신앙과 감사의 정신은 다 사라지고 세속화되고 상업화된 감사절을 볼 때 교회가 추수감사절 절기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마저 들게 된다. 그래서 청교도 신앙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청교도 신앙의 전통을 이어온 인물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교회가 지키는 감사절 신앙의 뿌리를 찾고 왜 우리가 이 신앙을 이어가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1장 청교도 신앙의 시발

1. 존 낙스

– John Knox, 1514-1572, 청교도의 시조 –

(1) 16세기 잉글랜드 정치적 상황

15세기 잉글랜드는 북쪽에 인접한 스코틀랜드와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항상 긴장 관계에 있었다. 이런 관계로 인해 둘 사이에는 수시로 대결과 충돌이 일어났다.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국위를 선양하려 했고 스코틀랜드는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자국을 보호하려 했다. 그래서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스코틀랜드는 당시 로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동맹은 맺어 잉글랜드의 침략을 차단했다.

이런 가운데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는 국경 문제로 긴장 상태에 있는 스코틀랜드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에게 출가시켰다. 이로 인해 잠시는 양국 간에 평화가 깃들었으나 헨리 7세가 죽고 그의 아들 헨리 8세가 잉글랜드 왕이 되어 교황이 주도하는 신성동맹(神聖同盟)에 가담함으로써 당시 개신교 국가였던 스코틀랜드와 또다시 대적이 되었다.

이 신성동맹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것인데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우방이었기에 처남인 잉글랜드 헨리 8세가 매형인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와 적대 입장이 된 것이다. 제임스 4세는 이에 격분하여 잉글랜드군과 싸우다가 플로든의 전투(the battle of Flodden, 1513)에서 전사했다. 임종 시 제임스 4세는 아내인 마가렛을 섭정으로 지명했으나 의회는 마가렛이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누이라는 이유로 이 지명을 거부했다. 대신 알바니 공작(Duke of Albany)이 프랑스에서 불려와 섭정이 되고 왕위는 생후 17개월밖에 안 되는 제임스 5세에게 돌아갔다.

이후 스코틀랜드 왕가는 계속 프랑스와 깊은 결속을 맺는데 스코틀랜드 제임스 5세가 프랑스 왕의 딸 마들린(Madeline)을 왕비로 취하고 그녀의 사후 프랑스의 실력자 로렌 공작의 동생인 기즈의 메리(Mary of Guise)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함으로써 이 결속을 더욱 분명히 했다.

한편 야망에 찬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장악하기 위해 4만의 군대로 전쟁을 일으키나 스코틀랜드의 견고한 방어망을 뚫지 못했다. 일단 방어에 성공하자 의기양양해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는 잉글랜드군을 기습했으나 솔웨이 모스 전투(the battle of Solway Moss)에서 패한 후 불과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러자 왕위는 태어난 지 7일밖에 안 된 메리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아들인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 여왕이 된 갓난이 메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를 정략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의 영토를 장악하려 했다. 개신교를 옹호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 결혼을 환영했다. 1543년 7월 1일 양국 간에 결혼 조약이 맺어졌다. 그러자 가톨릭 진영의 성직자들이 맹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들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통치를 두려워했다.

헨리 8세 역시 스코틀랜드에 무리한 요구를 강행했다. 그는 즉각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간의 동맹을 파기하고 어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영국에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헨리 8세의 무리한 요구는 스코틀랜드인의 저항과 반감만 부채질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이후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에 보내져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받았고 1558년 4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황태자 프란시스와 결혼했다. 프란시스는 아버지의 보위를 이어 겨우 17개월 동안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가 1560년 12월에 죽었다. 이로 인해 메리 스튜어트는 1561년 8월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왕가가 친 로마 가톨릭이나 친 프랑스 정책을 취할 때 잉글랜드는 그와는 반대의 반(反) 로마 가톨릭 입장에 섰다. 당시 대륙은 반(反) 로마 가톨릭 종교개혁이 한창이었고 잉글랜드도 이 힘에 편승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반(反) 로마 가톨릭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헨리 8세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했다. 교황청은 이런 헨리 8세를 ‘믿음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首長令, Act of Supremacy)을 공포하여 유럽 세계를 놀라게 했다.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은 로마 교황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이다. 헨리 8세의 이 같은 돌연한 변화는 그의 이혼 소송에 교황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헨리 8세는 왕정의 굳건한 토대를 세우려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믿어 온 전제 군주였다. 자신의 아내인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은 아들을 낳지 못해 이런 헨리 8세를 계속 실망케 했다. 캐서린으로부터 3명의 딸이 연이어 출생했으나 둘은 죽고 메리 튜더(Mary Tudor, 후에 메리 1세 여왕)만 생존해 있었다. 그래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후계자 문제로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핸리 8세는 일찍 죽은 형의 아내 캐서린을 아내로 취했는데(원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인 아서와 결혼했으나 아서가 결혼 6개월 만에 죽자 다시 헨리 8세와 결혼했다) 캐서린 역시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마침 궁녀인 앤 볼린(Anne Boleyn, 1507-1536)이 마음에 들어 캐서린과 이혼을 결심하고 교황청에 이혼 승인을 청원했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이 이혼을 허락하고 싶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영문명 찰스 5세)의 고모인 캐서린을 이혼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혼을 허락하면 당장 교황청은 황제의 군대에 유린당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을 못 받자 대단히 노하여 ‘수장령’을 발표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시켰다. 이 사건으로 900년 이상 잉글랜드에 발휘해 오던 로마 교황청의 영향은 끝나고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헨리 8세가 죽고 개신교 옹호자인 아들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1553, 재위 1547-1553) 때 개신교가 잉글랜드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에드워드 6세 때 ‘공동 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 1549), ‘42개 조항’(1553년)이 반포되었다. 이 ‘기도문’과 ‘42개 조항’의 많은 부분 칼빈의 개혁파 사상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에드워드 6세가 16세의 어린 나이에 일찍 죽자 뒤이어 로마 가톨릭의 옹호자인 메리 튜더(Mary I of England, 1516-1558, 재위 1556-1558)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 캐서린이 아버지 헨리 8세에게 이혼당한 일에 한을 품고 있었다. 아울러 이혼을 허락한 영국 개신교 지도자들 특히 켄터베리 주교와 토머스 크랜머를 미워하였다. 이러한 메리 튜더의 왕위 등극은 피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로마 가톨릭을 다시 잉글랜드의 국교로 삼고 로마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다시 긴밀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스페인과 결속을 위해 메리 1세는 스페인 왕 필립 2세(스페인 명, 펠리페 2세)와 결혼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 왕 필립 2세는 정치적인 목적 외에는 메리와의 결혼에 별 관심이 없었다. 메리 1세는 개신교를 핍박하고 3년의 짧은 통치 기간에 300여 명의 개신교 지도자와 교인들을 화형(火刑) 시켰다. 그래서 그녀를 살육자라는 의미의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렀다.

1558년 피의 여왕 메리 튜터가 자녀 없이 죽자 왕위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 재위 1559-1603)에게 돌아갔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잉글랜드를 다시 개신교 국가로 바꾸어놓았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메리 1세 사망 후 왕위 계승권은 엘리자베스 외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에게도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가렛이 낳은 딸로 손녀였다. 그런데 이 메리 스튜어트가 로마 가톨릭 교인이었으므로 잉글랜드 의회는 이 같은 스코틀랜드 왕정과 반대로 개신교 교인인 엘리자베스를 택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헨리 8세도 그의 통치 말기에는 개신교였고 동생 에드워드 6세 역시 개신교였으며 그녀의 어머니 앤 볼린 역시 개신교였기에 엘리자베스가 개신교 편에 선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는 자국 잉글랜드 내의 종교 전쟁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 모두에게 반감을 사지 않게 처신하는 방법 곧 헨리 8세가 취했던 ‘교회 형식은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를 따랐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히려 개신교 청교도들과 로마 가톨릭교도들 양편 모두에게 지지받지 못했다.        

(2)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적 상황

스코틀랜드 교회는 아일랜드의 켈트 선교(Celtic Missions)에 힘입어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7세기에는 수도원이 스코틀랜드의 영적 지적 중심의 역할을 했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스코틀랜드의 로마 가톨릭 교구가 잉글랜드 요크(York)로부터 1176년 독립되었고, 15세기에는 세인트앤드루스(St. Andrews) 교구가 1472년 메트로폴리탄 교구로 인정받았다.

이로 인해 수도사와 수녀들이 기거하는 건물이 스코틀랜드 전역에 산재했고 선교 초기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켈트 수도원들은 대륙의 양식에 의해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스코틀랜드 교회는 소수의 인물을 빼고는 영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당시의 종교 상황을 리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 주교와 수도원장은 국왕이나 귀족들의 자식들이었거나 혹은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임명된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성직자의 높은 도덕적 생활과 영적 성결을 유지할 수 없었던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 같은 성직자들의 최고위층에서도 고상한 미덕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복잡한 여자관계로) 비튼(James Beaton, 1473-1539) 추기경에게는 수도원장 시절에 이미 1남 2녀가 있었으며 추기경에 임명되기 이전에 아들 셋을 더 낳았고 임명된 후에 네 아들을 더 낳았다. 다른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도 이에 못지않은 왕성한 남녀관계를 즐기고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 12명의 스코틀랜드 주교가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들이 낳은 사생아 출신의 여러 수도원장 역시 그들의 사생아가 많았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 해 볼 때 하위 성직자들이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반 교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성직자들의 이런 세속성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민중들 특히 교육받은 이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활기에 찬 시민 계급들이나 뭔가 불안을 느끼고 있던 지주 계급에 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제대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대부분이 무식(無識)했고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개탄스러울 정도로 세속화되어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스코틀랜드에도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개혁 사상에 동감을 표시한 잉글랜드 사제 레스비(James Resby)는 성경적 신앙을 주장하다가 1407년 스코틀랜드 퍼스(Perth)에서 화형당했다. 선교사로 파송된 후스파 크라바르(Paul Crawar)는 1433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핍박당했다.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재판을 열었고 상당수 롤라드파 사람(Lollard)들이 이 무서운 종교재판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1525년에는 루터파 교리를 전파하는 것을 법률로 금했다.

이런 박해에도 개혁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1520년 스코틀랜드 롤라드 파인 니스벳(Murdock Nisbet)은 위클리프 신약성경을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고쳐 썼고(이 성경은 1901년에 가서야 출판되었다), 틴데일(Tyndale, 1494-1536) 영어 신약성경이 1526년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다. 이후부터는 스코틀랜드에 개신교가 하나의 운동으로 부각이 되었다.

이 운동에 좀 더 분명한 금을 그어준 사람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계명성이라 불리는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1529)이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요 상위 귀족의 아들인 해밀턴은 프랑스의 파리와 루뱅에 유학하여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접한 후 귀국하여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밀턴은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 1473-1539)으로부터 이단 혐의로 출두 명령을 받았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을 예측한 그는 마르부르크(Marburg)로 탈주하여 프랑수아 랑베르(Francois Lambert) 등과 교제하면서 루터파 신앙에 몰입했다. 그는 ‘루터파의 신앙에 관한 짤막한 논문’(Loci Communes)도 썼는데 이것은 후일 틴데일의 친구인 존 프리스(John Frith, 1503-1533)에 의해 ‘패트릭의 처소들’(Patrick’s Places)로 번역되었다. 그는 루터를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그 후 패트릭 해밀턴은 종교개혁의 열정에 불타 순교를 각오하고 스코틀랜드로 다시 귀국하여 설교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킨카벨(Kincavel)에서 세인트앤드루스로 오라는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에 가자마자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 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해밀턴의 순교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가톨릭을 더욱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지식층은 물론이고 상인들과 광부들까지도 종교 개혁자들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로마 가톨릭의 지도층은 계속 개신교를 탄압하고 더욱 박해했다.

1539년 제임스 비튼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자는 그의 조카인 데이비드 비튼(David Beaton, 1494-1546)이었다. 그는 이태리의 로마 교황청과 당시 로마 가톨릭 구가였던 프랑스와 더욱 깊이 결속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사악한 행적은 ‘선하고 경건한 민요들’(Good and Godly Ballads) 속에서도 풍자적으로 나타난다.

추기경이 되자 데이비드 비튼은 한층 더 이단 박멸에 열을 내었다. 1540년 데이비드 비튼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을 제어할 법률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사적 종교 비밀 집회(개신교 집회)를 금지했다. 그러자 비밀 집회를 가진 개신교 모임(소위 사적 교회, Privy Kirks)은 지하 운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러한 차에 데이비드 비튼의 표적이 된 자는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 아카데미(the Academy of Montrose)에서 헬라어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위샤트는 1532년 루벵(Louvain)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으며 잉글랜드와 스위스에 가서 대륙의 종교개혁 흐름을 맛보았다. 그가 스위스에 있을 때 스위스 최초의 신앙고백을 영어로 번역한 일도 있었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츠빙글리파에 속했다. 그가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는 코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강의할 때 그의 학생 중 하나가 그에 대해 “위샤트는 키가 크고 검은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금욕적이고 독실하며 박식하고 자애로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샤트는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몬트로즈, 던디, 아이셔 지역에서 병자 간호 및 설교 사역을 하면서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외치고 있었다. 그가 하딩턴 지역에 가까운 이스트 로티안(East Lothian)을 지날 때 그곳의 지배자 보스웰(Bothwell) 백작은 위샤트를 체포해 데이비드 비튼 추기경에게 넘겼다. 1546년 3월 1일 위샤트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해밀턴의 길을 따랐다. 그도 역시 순교자들의 길을 뒤따랐다.

위샤트가 체포당하기 직전 양날이 선 검을 들고 위샤트를 호위하던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가 이 글의 주인공인 존 낙스(John Knox, 1514-1572)였다. 위샤트는 “종교개혁의 일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다른 날을 기다리라. 희생은 나 하나로 족하다.”라며 낙스를 피신케 했다.

위샤트가 순교하자 시민들 가운데서 추기경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특히 귀족 중 상당수가 개신교에 동정적이었다.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 국왕과 결탁 귀족들의 국정 참여 권한을 축소 시키고 재산(토지 등)을 몰수하려 한다는 계획을 알았을 때 분노는 극에 달했다.

1546년 5월 29일 무장한 귀족 몇 명이 잠들어 있는 추기경을 깨워 칼을 들이댔다. 그중 개신교도로 알려진 한 사람이 추기경에게 위샤트 살해를 추궁하면서 “우리는 당신에게 위샤트의 죽음에 복수하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추기경을 두 번 찔렀다. 다음날 그들은 추기경의 시체를 창문 밖에 걸었다.        

이 사건은 사실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공포, 분노, 증오가 뒤섞인 복합적 이해관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곧 귀족들과 시민들은 수비대를 만들어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함락시키고 로마 가톨릭과 왕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존 낙스는 이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수비대의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3) 존 낙스의 등장과 활동

존 낙스는 1513년경 스코틀랜드 에딘버러(Edinburgh)와 가까운 하딩톤(Haddington)에서 태어나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교육받고 이어 신부로 서품되었다. 30세쯤에 그는 개신교에 설복당했고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위샤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였고 1546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화형당한 순교자였다.  

함께 하던 위샤트의 순교 후 낙스는 13년 동안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패로 끝나 버린 ‘앤드류성 반란’(Andrew Castle Rebellion)에 참여했다가 성앤드류 반란을 진압시키기 위해 파병된 프랑스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노예가 된 그는 프랑스의 군선(軍船)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19개월 동안 고초를 맛보았다. 그는 에드워드(Edward) 6세 치하 말기에 잉글랜드로 돌아오게 되었고 크랜머의 1552년 판 ‘공중기도서’(Book of Commom prayer)를 준비하는 최종 단계에 참여해 일익을 담당했다.

1553년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 그는 독일로 피신했다. 한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있는 잉글랜드 망명자 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논쟁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낙스와 여타의 사람이 보다 더욱 철저한 개혁파 예배의식을 주장하면서 ‘공중기도서’로부터 이탈했다. 그러자 유럽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망명 온 보다 보수적인 자들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고 리차드 콕스(Richard Cox)와 그 외 사람들이 낙스를 몰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낙스에게 항의하며 “당신들은 영국 교회의 모습을 유지해야 할 것이오!”라고 했다. 그러자 낙스는 “주님은 주님의 교회 모습을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충돌은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치세 시 영국 교회의  ‘공중기도서’를 견지하려는 자들과 대륙 개혁파 교회의 보다 더욱 철저한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자들 사이에 일어난 청교도(淸敎徒, Puritan) 논쟁의 시작이었다. 리차드 콕스는 사람들에게 낙스의 급진적인 교회 정치관을 환기시키며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낙스를 추방하려고 사람들을 선동하자 낙스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

낙스는 곧 제네바의 칼빈을 열렬히 추종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그의 유명한 ‘괴물 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1차 나팔소리’(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를 저술했다. 이러한 여성 통치자에 대한 비난은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튜더(Mary Tudor, Mary I of England, 1516-1558)를 지칭한 것이었다. 1558년 엘리자베스(Elizabeth I of England, 1533-1603)가 즉위했고 그녀는 낙스의 그런 저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 가운데 1559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왔고 교회 개혁을 도왔다.

(4) 낙스와 ‘스코틀랜신앙고백서’

새로운 스코틀랜드 왕의로 추대된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 스코틀랜드 여왕)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국사는 잠시 12명으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이루어지다가 1560년 8월 3일 의회가 소집됨으로 정치 주도권은 의회로 넘어갔다.      

낙스는 즉시 의회에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의회는 낙스와 그의 동료 목사들에게 ‘신앙 고백서’ 작성을 요청했다. 낙스는 4일 만에 5명의 동료(John Spottiswood, John Row, John Douglas, John Winram, John Willock)와 함께 ‘신앙 고백서’를 작성해 의회에 제출했다. 상임위원회는 이 고백서를 인준하여 본회의에 상정하고 본회의는 동년 8월 17일에 이를 승인했다. 이것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이다.

25개 조항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s Confession of 1560, Scottish Confession 1560)는 개혁주의자들의 교리 즉 칼빈의 ‘요리문답’과 155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 폴란드인으로서 칼빈주의자인 존 라스코(John Lasco, 1499-1560)와 스위스 종교 개혁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의 글들을 참조한 게 역력했다. 이 신앙 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가 고백해 오면서 수치와 위협을 받던 교리의 모든 것들을 만천하에 공포하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는 끝날까지 이 신앙 고백에 머물러 있기를 단호하게 천명합니다.”

그러나 교회사학자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고백서는 진리에 대한 진술들이 무오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 안에서 수정과 개선이 가능하다고 했다. 제20항은 교회 회의들의 무오성에 반대하면서 “어떤 회의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했으며 그것도 매우 중대한 내용의 과오였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교회 전통과 교황청의 무오를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 편집자)

낙스는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 1546)가 택한 로마 가톨릭교회 구원관을 강력히 거부했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聖禮典)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협동함으로 구원을 이뤄야 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 미사 참석은 구원에서는 필수적이었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 미사는 ‘구원 신비의 중심이며’,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며’, ‘아울러 사실적이고 현재의 희생’이었다.

그러나 낙스는 성경대로 인간의 방법이 배제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었기에 이 같은 로마 가톨릭 미사의 폐지를 주장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8항은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선언한다. “동일한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은총으로 이 세계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형제요, 목자요, 우리 영혼의 위대한 감독으로 지명하셨다.”            

교회관에 대해서는 제18장에서 교회의 3대 요소 곧 ‘말씀의 참된 선포’, ‘올바른 성례전의 집행’, ‘정당한 교회 권징’을 언급했다.

요약하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정직하고 곧으며 남자다운 문체로 기록되었으되 불평이나 아첨이 없고, 논리적 정확성과 학문적 수준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온종일 진리를 전파한 후 피곤에 지친 사람이 밤에 조용히 앉아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생각해 보며 마음에서 새 힘을 되찾는 것과 같다.”

(5) 낙스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낙스가 주축이 되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칼빈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으나 교회 정치에 있어서 장로교회로 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낙스의 생존 시 감독(監督, Superintendent)이라는 직책이 교회에 엄연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낙스는 영국 성공회(聖公會)와 같은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를 스코틀랜드에 세우기 원했는가 하는 것이 규명되어야 한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던 도널드슨(G. Donaldson, 1913-1993)은 낙스가 개혁한 스코틀랜드 교회는 처음부터 감독제였으나 낙스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제네바에서 돌아와 제2의 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장로회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슨이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 낙스는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영국의 궁정 목사로 시무할 때 이미 감독교회 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개혁파 교회보다는 루터파 교회의 영향 하에 있었다.
  • 1560년 낙스가 작성한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에 의하면 목사의 임명이 회중에 의한 선거와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해 시행된 시험과 공적 임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이란 상당한 권한이 부여된 감독을 의미했다.
  • 감독은 1년 2회 이상 담당 관할 구역을 시찰하고 목사의 불경건한 삶이 발견될 경우 대회를 소집하여 해당 목사를 해임할 뿐 아니라,  감독 구에 있는 주요 도시에 감독 재판소를 설치하여 감독의 임명 또는 교인들의 이혼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관 기능을 했다.
  • 연금 수령에 있어 감독은 500내지 700파운드를 받았으나 일반 목사들은 100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차등은 감독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널드슨의 학설은 내픈과 리드에 의해 반박되었다. 특히 리드는 낙스의 저술을 세세히 분석하여 낙스가 성직자의 주 임무를 말씀의 선포로 보았던 점 그리고 성직자는 성공회와 같이 교회 기구나 세속 권력의 관여가 아닌 오직 회중의 동의로 임명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1치리서 제5항 제1조에서 제3조에 기록된 ‘감독’이라는 용어는 낙스의 진의가 아니었다. 낙스가 처음 작성한 원본에는 ‘감독’이란 용어가 빠졌으나 후에 그의 동료 윌록과 스포티스우드가 수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감독이라는 말을 삽입했다.

이 ‘감독’이라는 명칭은 개혁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마련 된 행정 조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면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영구직이 아닌 한정 직이었고(처음에는 3년, 1570년도부터는 1년으로 단축되었음), 자기 관할   구역으로부터 비판과 치리를 받으며 무   엇보다도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가 인정   하지 않았으나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교회 ‘장로제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도널드슨이 생각한 것처럼 교회 치리자가 아니라 지 교회를 돌보는 자 또는 순회 전도자 정도로 해석돼야 한다.

1566년 스코틀랜드 총회는 ‘제2헬베틱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을 채택하여 교회에서 목사 직위상의 우월성(優越性)을 부정했다. 여기에서 낙스는 잉글랜드 망명 생활에서 로체스터 감독직을 제안받았으나 감독 정치는 성경적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정중히 사양한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따라서 낙스는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장로교회의 씨앗만 뿌린 것이다.

1560년 당시 비록 개신교 세력이 우위(優位)였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의 직분 자들(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이 계속 교회에 출석했고 그들은 직분에 따른 재산도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마 가톨릭 성직자와 그들의 재산 관리 때문에 상당 기간 그들을 이같이 과도기적으로 묵인해야 했다.    

1572년 추밀원과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합동하여 ‘리스협약’(Concordat of Leith)을 작성했다. 이 협약에서 로마 가톨릭 측 인사들도 개혁교회에서 임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이 개혁교회의 일원이 되면 개혁교회의 총회에 복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낙스가 이렇게 스코틀랜드에 뿌린 ‘장로교’의 씨앗은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 시대에 와서 비로써 꽃을 피웠다.

‘괴물 같은 여인들’(개신교를 박해 한 여왕을 지칭)의 통치에 대한 낙스의 제2차 항거는 1568년 메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 or Mary I of Scotland, 1542-1587, 재위 1542-1567,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가 잉글랜드로 쫓겨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끝까지 관철했다. 그의 주저(主著)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Religion within the Realm of Scotland)로서 1644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낙스는 1572년 세상을 떠났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최초의 청교도’ 죤 낙스(John Knox)는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갖는 영적 권세에 대한 생생한 일화들을 남겼다. 당시 낙스와 같은 사람들이 설교한 내용은 대부분의 헌신적인 필사자들에 의하여 기록되고 잘 보존되었는데 그러함에도 낙스는 망명과 추격 속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에 그의 설교도 단 두 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설교할 때의 일이었다. 종교개혁에 대해 정치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개혁신앙 사이를 오고 가던 기회주의적인 태도의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 1542- 1587) 앞에서 그는 설교했다. 여왕은 자주 얼굴이 하얗게 될 정도로 깊은 두려움에 질려 부축을 받으며 예배가 끝난 교회당을 걸어 나오곤 했다고 한다. 여왕은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라는 명령을 하기도 했으나 막상 그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자신도 사자처럼 외치는 설교자 존 낙스에게 얼마나 잘 보이고 싶어 했는지를 하소연하기도 했다.

1571년 그러니까 죤 낙스가 죽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이미 중풍에 걸려 있었다. 세인트 안드류(St. Andrew) 지방에 있는 낙스의 한 생도로 그의 설교를 빼놓지 않고 들었던 제임즈 멜빌(James Melville, 1556-1614)은 후일 자신의 일기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을 술회했다. 바로 그해에 존 낙스가 다니엘서를 강해 설교할 때 일이었다.

멜빌은 그의 설교를 받아 적기 위하여 펜과 노트를 준비했다. 그는 반 시간가량 온화하게 성경 본문을 해설해 나갔다. 그러나 성경 해설이 끝나고 그 내용을 적용하는 부분에 들어가면서 설교는 거룩한 열정에 불탔고 설교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멜빌은 더이상 그 설교를 받아 적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설교를 들으며 필사자의 온몸이 두려움과 신적인 능력의 영향으로 그를 받아 적을 수 없으리만치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6) 낙스 이후의 스코틀랜드교회

존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소천했다. 낙스가 죽자 잉글랜드의 어린 왕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튼(Morton) 백작은 스코틀랜드 교회에 잉글랜드 교회의 성공회식 감독제를 도입하려 했다. 모튼은 존 더글러스를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로 임명하면 대주교로부터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국가가 강력히 통제하는 성공회식 주교들이 스코틀랜드에 임직 되기 시작했다.

이들 고위 성직자들은 ‘툴칸(tulchan)의 감독들’로 불렸는데 ‘툴칸’이란 게일어(Gaelic)로 암소가 우유를 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을 채운 ‘송아지 가죽’(a stuffed calfskin)을 의미한다. 이런 배도(背道)의 시기에 칼빈의 제자이며 낙스의 후계자로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스코틀랜드에 등장한다.              

멜빌은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제네바에서 칼빈의 도움을 받아 제네바 아카데미의 헬라어 강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시민법을 가르쳤다. 그는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 총장에 부임했고 1580년에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 총장에 부임했다.

그는 칼빈의 제네바식 교육 행정, 교과 과정, 교수법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여 대학 교육 제도를 크게 개선했을 뿐 아니라 낙스의 ‘제1치리서’를 1578년 개정하여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만들었다. ‘제2치리서’는 교회의 ‘감독 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여 칼빈처럼 교회 직분을 ‘장로’와 ‘집사’로만 나누었다. 이러한 ‘제2치리서’는 157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장로교의 교육을 받은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하자마자 잉글랜드의의 청교도는 물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도 그의 어머니가 지지해 온 ‘왕권 신수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대의(代議) 정치는 ‘왕권 신수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히 마찰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James VI and I (James Charles Stuart; 19 June 1566 – 27 March 1625) was King of Scotland as James VI from 24 July 1567 and King of England and Ireland as James I from the union of the Scottish and English crowns on 24 March 1603 until his death in 1625.

멜빌은 제임스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전에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지금도 말씀드립니다. 스코틀랜드에는 두 개의 왕국이 있고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머리인 제임스 왕과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임스 왕은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고 하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우리는 폐하를 왕으로 섬기며 폐하에게 합당한 예의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는 분명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그러자 분노한 제임스 왕은 멜빌을 런던탑에 4년 동안 가두었다가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잉글랜드에서 추방했다. 멜빌은 프랑스 세단(Sedan)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622년 타국에서 사망했다.

1625년 제임스 왕의 사망 후 즉위한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 재위 1625-1649)가 통치하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오히려 더 힘든 수난을 맞는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성공회 감독제도를 강요하고 1637년 7월 23일 장로교회를 아예 폐지해버렸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에 저항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정치를 사수(死守)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과 사무엘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 1600-1661)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지도자로 부상했다. 두 사람은 1643년 잉글랜드 런던에서 모인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감독관으로 참석하여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신학교 교수인 러더퍼드는 낙스의 계약 사상을 갖고 있었다. 즉 그는 “통치자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이중 계약 아래 있다. 백성이 계약을 깰 때 법에 따른 제재를 받는 것 같이 통치자도 백성과의 계약을 깰 때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한다.”라고 했다. 결국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설 자리를 잃었고 1649년 1월 잉글랜드 의회 군대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 혁명을 일으키고 주도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무단 정치가 끝나자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는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 재위 1660-1685)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잉글랜드 장로교도들도 찰스 2세가 장로교 교인을 선대 할 것으로 믿고 잉글랜드 왕으로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이러한 기대를 모두 배반하고 즉위하자 장로교회의 신앙을 고백하는 수많은 청교도와 계약파 성도들을 무참히 고문하고 살해했다.

찰스 2세의 사후에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James Ⅱ, 1633-1701, 재위 1685-1688)가 왕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모두 다 로마 가톨릭 화하려 했다. 그의 정책에 따라 나타난 저항은 신속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가 남편 윌리엄(William of Orange or William III of England, 1650-1702)과 같이 잉글랜드에 입성했다. 네덜란드인 윌리엄은 이미 개혁주의자였다. 메리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했다. 따라서 169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감독제도를 폐지하고 장로 정치를 유일한 그리스도 교회의 정치 형태로 승인했다.

제2장 초기 청교도 인물들

2. 에드워드 데링

– Edward Dering, 1540-1576, 청교도의 원형 –

에드워드 데링은 켄트(Kent)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2년에 앤 로크(Anne Locke)와 결혼했다. 신부는 존 녹스(John Knox)의 설교를 흠모하였고 제네바에서 살기도 했던 부유한 과부였다. 청교도 학자인 패트릭 콜린슨(Patrick Collinson, 1929-2011)은 데링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청교도의 원형이다. 그의 생애와 사역은 그의 뒤를 따를 17세기 후배들에게 삶의 모델이 된다. 그는 청교도 정신의 긍정적인 자질들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훌륭하게 예시한다.”    

데링은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대학(Christ’s College)에서 공부했다. 이때는 메리 여왕의 통치 초반기였는데 케임브리지가 청교도의 모판이었다. 데링이 동역자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는 복음주의 신앙에 불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즉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신앙을 통해서 대 심판 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데링은 당시의 가장 우수한 헬라어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1564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방문했을 때 헬라어 연설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대주교와 친분이 있어 중요한 행사에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570년은 그의 경력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사역 수준이 너무도 저질인 것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데링은 이러한 감정을 그의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1570년 2월 25일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채플에서 설교했는데 여왕을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그는 여왕이 무가치한 교회 사역자들을 제거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한다고 꾸짖었다. 그는 그런 자들을 ‘놀고먹는 자, 사기꾼, 기회주의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목사들은 ‘눈먼 길잡이며 짖지 않는 개들’이라고 혹평했다. 데링의 질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여왕에게 책임을 추궁하기까지 했다. “이런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방관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휫기프트(Whitgift, 나중에 대주교로 승격됨)라는 사람은 여왕 앞에서 설교할 때가 되면 이를 여왕에게 잘 보일 기회로 이용했다. 그러나 데링은 휫기프트와는 달리 여왕의 큰 권력에는 그에 비례하는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길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지적으로 받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마 그는 자신이 결핵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심이나 자신의 유익을 따르는 유혹에서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사실상 그는 결핵으로 일찍 죽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설교치고 데링이 여왕의 책임에 대해서 견책한 담대한 설교보다 더 많이 인쇄된 메시지가 없다.

목회자들의 한심한 영적 상태를 노출 시킨 이러한 용기 있는 설교는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파커(Parker)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신이었던 세실(Cecil)로 하여금 당황하게 했다. 그래서 데링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데링은 런던의 감독인 샌디즈(Sandys)의 신임을 받아 런던의 세인트 폴(St. Paul) 대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이곳에서 데링은 심도 깊은 감동적인 히브리서 강해 시리즈로 당대의 최대 설교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570년-1572년 동안 카트라이트, 필드, 윌콕스 등의 글로 인해 야기된 교회 정치에 관한 논쟁이 극심했다. 데링도 소환되어 이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았다. 데링은 퍼킨스와는 달리 조직적인 신학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투명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그의 대적자들은 데링이 누리는 특권과 직분을 박탈하려고 항상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데링의 대적자들은 그가 고관들과 친분이 두텁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제거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입을 막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데링을 침묵시킬 뿐만 아니라 강의도 못 하게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했다. 여왕의 대리자들 사이에서 데링을 고발할 죄목을 작성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의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링의 사역 가운데 구원의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편지 쓰기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높은 신분과 영향력이 큰 귀부인들의 영적 상담을 위한 편지들도 썼다. 청교도 사역을 가장 열심히 지원한 사람들은 흔히 여성들이었는데 이것은 청교도 운동의 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종교개혁에 깊이 헌신 된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남편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데링의 서신 수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허니우드(Honywood)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구원의 확신 문제로 몹시 시달렸다. 그녀는 한때 존 폭스에게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유리잔처럼 확실히 정죄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잔을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그 유리잔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튕겼다고 한다.

데링은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 동료 사역자들이 둘러서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데링의 마지막 말들을 기록하였다. 그는 청교도 운동에 귀중한 공헌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3. 존 도드

– John Dod, 1550-1645, 양무리의 위로자 –

존 도드는 체샤이어(Cheshi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지저스 대학(Jesus College)에서 공부했다. 도드는 본성에 따른 죄의 상태에 빠져 살던 어느 날 대학 관리인에게 줄 돈을 주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다가 고열로 인해 쓰러졌다. 이때 그가 범한 죄의 기억들이 무장 군인처럼 그에게 덥쳐오면서 그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의 회심은 참된 것이었으며 중생에 다른 새 생명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대학 관리인은 존 도드에게서 돈을 받았음을 기억했다고 한다.        

도드는 인기 있는 설교가였기 때문에 초청하는 곳이 많았다. 그는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20년 동안 목회했다. 그의 설교는 수백 명의 영혼을 회심케 하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 그는 4명의 다른 설교자들과 함께 밴 버리(Banbury)에서 공개 강해를 통해 여러 사람을 가르쳤다. 그는 힐더샘처럼 1604년부터 계속 심한 박해를 받았다.

윌리엄 할러(William Haller, 1885-1974)는 그의 ‘청교도의 상승’(The Rise of Puritanism)이라는 저서에서 도드를 영적 동지애의 대표적인 경건한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잉글랜드인의 유머를 가졌고 재치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사가 있었다.” 카트라이트(Cartwright)는 도드에 대해서 ‘목회적 기능 면에서 그는 어떤 사람의 수준에서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했다.

다음은 그의 한 제자의 말이다. “그의 말은 모두 하나의 설교였다. 그의 말은 마치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같았다. 그는 재치와 흥미로 내용 있는 메시지를 골고루 섞어 전했다. 만약 그의 말들을 모두 수집했다면 헬라어로 된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혹은 라틴어로 된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더 독자가 많았을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오면 대화의 주제가 항상 도드의 메시지가 되었다. 도드는 일반 서민들이 복음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어휘와 언어 스타일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큰 효과가 있었다.” 도드의 말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나는 준비하지 않은 새 설교를 하기보다는 준비된 옛 설교를 열 번이라도 반복하겠다.”

존 도드는 주일에는 두 번 그리고 주중에는 한 번 설교했다. 설교가 끝날 때마다 그의 아내는 목사관의 문을 열고 사람들을 환영했다. 사모는 여러 사람을 식사에 초대했다. 그중에는 집사처럼 사모를 도운 6명의 과부도 있었다. 사모가 음식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면 도드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좋은 벗들이 없는 것보다 고기가 없는 것이 더 낫소! 이 집은 추워도 무엇인가 줄 것이 있소!” 도드 자신은 조금 먹거나 먹지 않고 손님들에게 권했다. 그리고 계속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그가 피곤해지면 맥주를 섞은 작은 포도주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밤이 늦도록 말씀을 나눠주었다.

많은 사람이 조언을 받으려고 도드를 찾았다. 잘 알려진 청교도였던 좁 스록모톤(Job Throckmorton)과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은 자신들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도드 집 근처로 이사했다. 가까이에서 도드의 영적 권면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좁 스록모톤은 청교도 목사로서 의외로 자신의 구원 확신에 관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도드에게 물었다.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아무런 위로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도드는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말이 스록모톤 목사의 시달린 영혼에 위로를 주었다. 그는 곧 죽었으나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도드는 95세까지 장수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그가 목회 사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를 떠나 새 생활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거쳐 온 긴 인생살이의 여러 경험과 성경 말씀을 토대로 지혜로운 상담을 해 줄 수 있었다.

4. 윌리엄 퍼킨스

– William Perkins, 1558-1602, 청교도의 상징적 인물 –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커다란 공헌을 한 청교도 원조(元祖)의 인물이었다. 그는 왓톤(Warton)에서 태어났으며 케임브리지 그리스도 대학(Christ’s College)에서 공부했다. 그는 어렸을 때 학자적인 기질이 엿보였으나 그의 성격은 거칠고 험했다. 그러나 그가 개종한 후에는 전형적인 칼빈주의자가 되었으며 영적 생활의 욕구가 강했다.          

퍼킨스는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첫 목회는 케임브리지 감옥의 죄수들에게 설교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 대해서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죄수와 만나게 되었다.

퍼킨스는 주저 없이 그 청년 곁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형제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싶소.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당신도 죄를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십시오!”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호소했다. 이 청년 죄수는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그의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렸다. 그 청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임하기 바랬다.

퍼킨스는 학창시절에 예정론에 대해 냉담하고 그것은 인정이 없는 신학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 전도를 통해 예정론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모든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접할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다.

퍼킨스의 예정과 파멸을 다룬 ‘구원의 황금 사슬’(Golden Chain) 메시지는 청교도 신학과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였고 그것이 오늘의 개혁주의 교리로 나타났다. 퍼킨스의 종말론에 대한 분석과 조직은 놀랄만하며 특별히 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관계를 명백하게 했다. 그는 믿음이란 죄인들의 자유의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의 결과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성화(聖化)의 결과이며 완전한 순종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쳤다.

퍼킨스의 ‘구원의 황금 사슬’(Golden Chain) 메시지의 흥미 있는 관점은 종교적 열광자들의 참회는 일시적이며 영원성이 없다고 했다. 퍼킨스는 구원은 세례나 신앙고백 교회의식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교했다. 그리고 성도들의 진정한 인내와 순종과 선행은 구원의 결과라고 했다. 퍼킨스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사람들에게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했다.

퍼킨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행한 구원론에 대한 설교는 청교도 운동이 17세기에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신학자로서 퍼킨스는 케임브리지의 그리스도 대학의 연구원이자 성 앤드류 대학의 교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설교는 명확하고 실제적이며 강한 영적 힘이 있었다.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포함된 설교였지만 그의 설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가 불안한 인간의 양심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사자성(獅子聲) 같은 웅변을 토하였던 퍼킨스는 잉글랜드에서도 특이한 청교도주의자였다.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같은 청교도 저술가는 불안한 인간 영혼에 대한 의구심과 공포를 다루는데 뛰어났던 후대 청교도 저술가였다. 그는 처음에 그러한 주제에 대한 퍼킨스의 설교를 듣고서 목사직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받았다. 이들은 퍼킨스의 설명적인 설교와 경건한 삶을 영위했던 철저하고도 전형적인 청교도 기준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런 영향에 의해 청교도의 젊은 세대는 기적같이 쓰임 받은 퍼킨스에 의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

퍼킨스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논문을 주로 썼고 그의 갈라디아서, 마태복음, 히브리서 강해 설교도 부분적으로 출판되었다. ‘양심의 사례’(Cases of Conscience)는 그중 그의 대표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서들은 라틴어, 불어, 화란어, 스페인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퍼킨스의 사역이라는 3권의 책에 그의 논문들이 모두 담겨 있다.

윌리엄 퍼킨스는 케임브리지에서 사역했는데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 그는 청교도 동역자들의 특징인 영적 자질과 행정적 재질이 겸비된 사람이었다. 그는 강단에서도 특출하였고 펜으로도 많은 글을 써서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를 바쁘게 하였다. 그는 자기 시대의 다른 어떤 청교도 목회자들보다 더 많은 저술을 했는데 오늘날 후속 세대의 책꽂이에도 그의 책들이 꽂혀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퍼킨스는 최초로 설교를 주제로 ‘예언의 기법’(The Art of prophesying)이라는 설교학 책을 저술 한 사람이기도 하다. 퍼킨스의 설교는 적용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것은 또 청교도들의 특징이었다. 그는 설교를 준비할 때 청중의 필요를 세세히 고려했다. 그의 글들은 질과 양에 있어 당시의 다른 모든 청교도 저술가들을 능가했다.          

그러나 윌리엄 퍼킨스는 상아탑 속의 학자가 아니었다. 예로써 그는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돕기 위해 옥중 사역 허가를 받고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물론 그는 세인트 앤드루스(St. Andrew’s)와 같은 곳에서도 그의 설교를 들으러 온 대규모의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모두 율법이고 동시에 모두 복음이라고 평했다. 말하자면 그의 설교가 죄의 수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모두 율법이었고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전적인 용서가 거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모두 복음이었다. 그의 사역은 죄인들로 영벌(永罰)의 실체를 보게 해서 영혼이 깨어나게 하는 각성 사역이었다. 퍼킨스는 대화에 남다른 은사가 있어 단지 ‘저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죄인들이 떨었다고 한다.

퍼킨스는 노동을 강조하면서도 휴식과 오락(娛樂, recreation)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사상은 노동 중심적이어서 건전한 오락은 소명을 위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곧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오락과 할 수 없는 오락을 이렇게 구분했다.

첫째는 합법적인 모든 휴식(오락)은 일상적인 것을 사용하지만 어떤 면에서 제한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했다.

  • 거룩한 일들 곧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 또는 다른 신앙의 행위 등이 오락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 인간의 죄나 허물을 구성하는 것이 오락의 되어서는 안 되며,
  • 하나님의 심판이나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을 그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오락과 관련된 경기에는 재치나 힘을 겨루는 것과 모험적인 것 그리고 이 양자가 혼합된 것이 있다. 재치나 힘을 겨루는 경기에는 활쏘기, 사격, 달리기, 레슬링, 펜싱, 음악 그리고 체스와 장기 등이 있는데 이런 게임들은 심신의 단련이 주요 목적이며 권장할 만하고 흥미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험적인 경기는 오직 모험만이 지배하는 것으로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모험을 위한 게임은 단순히 우연에 의지하며 이렇게 우연에 의지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주사위같이 결정권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 이런 경기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고 공포나 슬픔과 같은 역겨운 감정을 유발하는 경기들이기 때문이다.
  • 탐욕이 경기의 원인이어서 보통 돈을 걸고 경기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경기는 부분적으로 모험이 부분적으로 재치가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모험으로 시작해서 재치로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이다. 이 경기는 모험에 의존함으로써 보완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기는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권장되지 않지만 크게 규제되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 경기를 할 때는 아주 절제하면서 즐겨야 한다고 했다.

이것들을 다시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퍼킨스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오락 기준은 다음과 같다.

  •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건전하다는 평판과 함께 사기성(詐欺性)이 없는 것이어야 하고,
  •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야 하고,
  • 그 목적은 단지 우리의 심신을 건전하게 하는 데 있어야 하며,
  •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까지도 적당히 하고 절제해야 한다.

이같이 퍼킨스는 그리스도인의 오락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優先的)으로 가정을 세우고 그곳에서 올바로 훈련된 성도들이 사회에 나아가 자신의 소명을 따라 이웃과 하나님을 섬김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5. 존 로저스

– John Rogers, 1566-1636, 영혼을 떨게 한 설교자 –

에섹스 데드햄(Dedham, Essex)의 존 로저스(John Rogers, 1566-1636)는 청교도인 에섹스 웨더스필드의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 1551-1618)와 가까운 인척이었다. 리처드는 존 로저스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때 후원을 해 주었다. 그는 존 로저스가 세속적인 쾌락을 위해서 자기 책들을 팔아도 참아 주었다. 그런데 결국 존은 리처드 로저스를 너무도 실망시켜 나중에는 리처드가 그를 포기하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리처드의 아내가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사정했는데 이것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포도원 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하였다 하시니라.”(눅13:7-9) 

리처드 로저스의 아내 말대로 존 로저스에 대해 인내한 것은 보상이 있는 일이었다. 끝내는 이 존 로저스가 회심했고 나중에 청교도 설교자 중 가장 능력 있는 설교자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존 로저스에게 내린 설교의 은사는 너무도 커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떨지 않고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많은 영혼이 그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를 믿었다. 그는 자기 시대에서 영혼을 일깨워주는 가장 훌륭한 설교자의 한 사람이었다. 브라운리그(Ralph Brownrig, 1592–1659) 감독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존 로저스는 몇 자 적지 않은 급히 쓴 노트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 감독들이 잘 준비된 음악 순서의 지원을 받으면서 할 수 있는 설교보다 훨씬 감동을 주는 말씀을 전할 수 있다!”

사람들이 아주 멀리서도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런데 교회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지 못해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잘 알려진 청교도 목사인 길스 피르민(Giles Firmin, 1614–1697)은 자신이 존 로저스의 설교 첫 마디를 듣고 회심케 되었다고 술회했다.

어느 날 젊은이들이 존 로저스의 설교를 들으려고 막 문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로저스가 그들을 보고 말했다. “여기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들어왔소.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당신들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길스 피르민은 로저스의 첫 말에 마음이 붙잡혀 즉석에서 회심했다.

존 로저스의 탁월한 설교 능력은 저 유명한 청교도인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의 체험에서 잘 예시되어 있다. 토마스 굿윈은 당시에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존 로저스의 설교를 듣고 끝없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6. 리차드 십스

– Richard Sibbes, 1577-1635, 심령을 치유하는 의사 –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는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존스 대학(St. John’s College)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에서 강의를 맡았는데 그의 설교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이 중에는 나중에 미국 뉴잉글랜드(New England)로 건너가서 유명한 지도자가 된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도 있었다.          

설교자와 교수로서 십스의 좋은 평판이 자자해서 런던의 그레이즈 인(Gray’s Inn)에 정규적인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당시의 그레이즈 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법률 공부와 법무에 관해서 법조계의 중심부였다. 벤자민 브룩(Benjamin Brook, 1776-1848)은 이렇게 말했다.

“해박한 법률가들 외에도 많은 귀족과 상류층이 일반 시민과 함께 십스의 설교를 들으려고 떼로 몰려들었다. 십스의 사역에서 받는 영적 유익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스는 항상 회중의 머리와 가슴에 단단한 신앙의 기초를 놓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사생활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아낌없이 베풀었고 목회자로서는 영력 있는 매우 훌륭한 목회를 했다.

1626년에 십스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캐서린대학(St. Catherine’s College)의 학장이 되었다. 그의 런던교회 사역 조건에 의하면 다른 성직을 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레이즈 인 교회의 부목이었고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중에 대학이 있는 케임브리지로 여행하는 일이 무리가 되지 않았다.

십스가 학장이 되기 전 캐서린 대학은 장기간의 침체를 겪고 있었다. 재정은 거의 바닥이었고 학생들도 다 흩어지고 단지 몇 명밖에 없었다. 십스는 이러한 상태를 완전히 바꾸어 캐서린대학 역사에 가장 빛나는 시기로 일신시켰다. 이처럼 케임브리지에서 십스가 목회자를 훈련 시킨 일의 영향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ins)를 제외하고는 따를 자가 없었다. 십스는 퍼킨스가 사역했던 세인트 메리교회에서도 설교를 했는데 그 영향은 런던의 그레이즈 인 교회에서의 사역 효과와 같은 것이었다.

리처드 십스는 심령을 치유하는 의사였다. 그는 영혼의 갈등을 말씀으로 풀어 주면서 심령을 치유하는데 1세기 이후에 ‘신앙 정서’(The Religious Affections)라는 가장 유명한 저술을 한 조나단 에드워즈(Johathan Edwards, 1703-1758)의 사역을 가리키는 안내 표지판이 되었다.

십스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The Bruised Reed and The Smoking Flax), ‘돌아오는 탕자’(The Returning Backslider), ‘영혼의 갈등’(The Soul’s Conflict)과 같은 대표작들을 남겼다. 이같이 십스는 가장 유명한 청교도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은 청교도 운동 구석구석에 퍼졌다.

제3장 절정기 청교도 인물들

7. 존 밀턴

– John Milton, 1608-1674, 합리적 청교도 –

존 밀턴은 1608년 12월 9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공증인과 사채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영국 국교도였고 상당한 수준의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에 재질이 있었다. 밀턴은 ‘세인트 폴 학교’(St Paul’s School, 1509)에서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했고 근대어 같은 부분은 가정 교사로부터 보충 수업을 받았다.          

그는 학문에 심취했고 12세부터는 밤이 깊은 자정까지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밀턴의 이 같은 과도한 독서는 후일 실명(失明)의 원인이 되었다. 1626년 담임 교수와 충돌하여 1년 정학을 받은 일 외에는 그는 큰 탈 없이 학문에 매진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스 칼리지 문학사(1629년), 문학 석사(1632년) 학위를 취득했다.

밀턴은 학창 생활 7년 동안(1625-1632) 라틴어로 운문을 쓰는 법과, 작품 속에서 자아를 표출하는 기술을 배웠다. 그의 첫 영시 ‘어떤 아기의 죽음에 대해’(On the Death of a fair Infant)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풍으로 1628년 쓰여졌다.  

그가 21세의 생일 직후 1629년에 쓴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는 혈기 왕성한 젊은 밀턴을 가둬 두고 신앙적 시(時)를 통해 영성의 승화를 시도한 것같이 보인다. 이 작품과 1628년에 쓴 ‘방학에’(At a Vacation Exercise)에서 그가 고전 문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기독교 사상에 두루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밀턴은 부모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택할까 생각해 보았으나 1630년경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제도에 들어가는 것을 노예 생활로 생각했으며 한편으로는 아마도 시(詩)에 대한 미련과 헌신 때문에 성직을 포기한 것 같다.

밀턴은 1632년부터 1638년까지 6년 동안 호튼(Horton)에서 철학, 고전 문학, 역사, 수학 및 음악 등 폭넓은 교양 과목을 공부했다. 여기서 자유 사상을 통해 예술 세계를 접하려는 젊은 밀턴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이 기간 1632년경 밀턴은 궁정 취향 가면극 ‘아케이드’(Arcades)와 1634년 또 다른 가면극 ‘코머스’(Comus)를 썼다. 코머스는 밀턴의 선악(善惡) 사상을 최초로 극화시킨 작품이다.

1637년 모친 사망 후 밀턴은 1638년 2년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지식층 인사들로부터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 나폴리에서 밀턴을 환영한 후작 만소(Giambattista Manso, Marquis of Villa)와 천문학자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와의 교분은 밀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밀턴이 이렇게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잉글랜드 정세는 불안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는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재위 1625-1649)가 국왕이었는데 그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 이론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반(反) 칼빈주의 자로 열열한 국교도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임명하여 비(非) 국교도들을 사정없이 탄압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의회는 비(非) 국교도인 청교도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과 의회는 자주 충돌했고 왕은 청교도들의 간섭을 싫어하여 무려 11년(1629-1640) 동안이나 고의적으로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국교회 의식을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존 낙스 이래 장로교회 정치가 뿌리내려진 스코틀랜드인들은 찰스 1세의 강제 명령에 대항하여 도리어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그러자 국왕은 군비 조달을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했고 이 의회는 1640년에 시작하여 1660년에 막을 내렸다. 이렇게 질질 끈 영국 의회를 ‘장기의회’라 부른다. ‘장기의회’ 기간 청교도들은 눈의 가시같은 국교회 대감독 로드의 목을 요구했고(1645년 1월 참수됨), 나중에는 왕정에 대항하여 ‘청교도혁명’(English Civil War, 1642-1651)을 일으켰다. 1649년 1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찰스 1세를 참수했다.

밀턴은 국교회의 사치스러운 의식, 대감독 로드의 전횡(專橫) 그리고 국교회와 영국 왕실과의 정치적 결탁이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제 청교도 세력의 사회 참여로 그의 불만을 해소할 기회가 왔다. 1639년 7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 밀턴은 뜨거운 정열을 쏟으며 정치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641년에 쓴 소논문 ‘잉글랜드의 개혁’(Of Reformation in England)에서 교회의 감독제도와 주교들을 공격했고, 1642년에 쓴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The Reason of Church Government Urged against Prelaty)에서는 이상적 교회 정치는 감독제도가 아니라 사도 시대같이 민주적 단순성과 순수성을 가진 ‘장로제도’라고 논증했다.

1643년 5월 밀턴은 연하인 메리 포웰(Mary Powell)과 결혼했다. 그녀는 왕당파 지주(地主)의 딸이었으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일자무식의 무사태평한 여자라고 밀턴은 후에 토로했다. 33세의 대학자와 이 같은 무학(無學)의 여인과의 결혼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결혼 직후 밀턴과 다툰 그녀는 친정집으로 돌아가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밀턴은 그 기간 3년(1643-1645)에 걸쳐 ‘이혼론’(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을 발표했다. 부부간에 애정이 없는 경우에는 이혼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결혼은 애정과 우정으로 맺어진 능동적 관계이기 때문에 당시 유일한 이혼 사유인 간통(姦通)보다도 부부간에 애정 없는 것이 더 큰 이혼 사유라고 정의했다.

불행한 결혼은 1652년 아내 포웰이 죽음으로 끝났다. 밀턴은 1656년에 캐더린 우드코크와 두 번째로 결혼했으나 그녀도 1658년 출산 직후 사망했다. 1663년 밀턴은 젊고 상냥한 민셜(Elizabeth Minshull)과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밀턴은 크롬웰의 공화정에 참여하여 정부 활동에 개입했으나 1660년 또다시 왕정이 복고(復古) 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 사상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대 작품들인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은 모두 정치적 메시지로 가득 찬 것이었다.

이후 밀턴은 1652년 완전히 실명하여 이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받았고 왕정복고 후에는 정신적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환난과 역경은 역설적으로 그를 대서사(大敍事) 시인으로 만들었다.

8. 리처드 백스터

– Richard Baxter, 1615~1691, 청교도의 대명사 –

목회자라면 누구나 리차드 백스터의 ‘참된 목사’(The Reformed Pastor)를 한 번쯤 읽어 보았을 정도로 그의 책 내용은 탁월하다. 이 책을 두고 몇몇 목회자들은 1년에 한 번씩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백스터는 1615년 잉글랜드 슈롭셔(Shropshire)의 로우톤(Row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도박습관과 물려받은 빚과 어머니의 병 때문에 생의 처음 10년을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젊어서부터 독서와 연구에 매진했던 그는 오랜 병고의 기간과 다양한 책들 특히 윌리엄 퍼킨스의 전집과 리처드 십스의 ‘꺼져 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의 회복’, 에제키엘 컬버웰의 ‘신앙론’ 등의 작품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633년 백스터는 잉글랜드 찰스 1세의 왕실의 연회장이었던 헨리 허버트 경으로부터 성직 수임을 받아 런던으로 향했다. 그리고 1641년 백스터는 키더민스터의 목사가 되었다.

키더민스터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백스터의 강력한 설교와 주의 만찬에 대한 엄한 통제와 교회 치리 등에 반발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백스터의 17년의 사역은 상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나는 사람에게 하듯’ 설교했으며 이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에 힘입어 수많은 회심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1647년 질병 가운데서도 그는 ‘성도의 영원한 안식’을 집필했다. 그는 매주 이틀씩 교인들에게 교리문답 교육을 했고 각 가정을 방문하여 가정마다 한 시간 정도 교육을 하곤 했다. 가정을 방문하여 교리를 가르친 이런 일들로 인해서 많은 회심이 일어났고 회중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서 백스터의 사역 말기에는 거의 모든 성도가 가정 예배를 드리게 되어 거리를 지나가면 수백 가정이 시편 찬송을 부르며 백스터 목사의 설교 내용으로 깊은 말씀의 은혜 나눔을 갖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662년 백스터는 ‘통일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 영국 국교회에서 쫓겨났다. 그 후 50세가 가까이 되었을 때 그는 성도 중 한 사람이었던 20대 초반의 마거릿 찰튼이라는 처녀와 결혼을 했다. 백스터는 런던에 정착했는데 고위 성직자들과 관료들은 백스터의 사역 속에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설교 때문에 그는 세 차례나 투옥이 되었고 그의 저서들이 압수당했다.

백스터는 결국 윌리엄과 메리가 비국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1689년의 ‘관용령’의 수혜를 입게 되었고 그의 말년은 차터하우스 광장의 안락한 환경에서 보내며 설교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가 1691년 12월 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그는 150편의 논문을 썼고 미발표된 몇백 편의 서신과 글을 남겼다.

백스터의 작품들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특이한 혼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작정, 속죄, 칭의의 교리에 있어서 결코 개혁주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는 몇몇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대체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개혁주의 라인을 따라 형성하기는 했으나 매우 자주 아르미니우스적 사고에 기울어지기도 했다.

그는 알미니안의 영향을 깊이 받아 가정적(假定的) 일반 속죄론을 포함하는 그들의 사상에 자신 생각을 조합시켰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가정적(假定的)으로 돌아가셨으나 그의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실제적 유익을 준다는 가르침이었다.            

칭의의 교리에 대한 백스터의 접근법은 신율법주의라고 불린다. 그는 하나님이 옛 율법을 깨뜨린 것을 회개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제공하면서 새로운 법을 주신다고 말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이 새로운 율법은 믿음과 회개인데 이는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에 의해 유지되어 신자 자신의 개인적이고 구원을 얻는 의로움이 된다.

따라서 백스터의 구원론은 알미니안적인 새로운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더한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이 잘못된 교리들은 그가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기보다 성화를 촉구하기 위해 주로 작성한 것으로 경건 문헌들에는 표면적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리처드 백스터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회심’, ‘천국 준비를 했는가?’  ‘참 목자’, ‘성도의 영원한 안식’과 리터드 백스터의 실천적 작품들이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힌다.

9. 존 번연

– John Bunyan, 1628-1688, 청교도 순례자 –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혔다는 책 중의 하나가 존 번연의 ‘천로 역정’(天路歷程, Pilgrim Progress)이다. 번연은 이 책에서 가장 평범하고 소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성도의 영성 체험을 제시한다. 그가 사용한 언어는 엄청난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 용어가 아니다. 번연은 주위에서 흔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일상생활 언어를 꾸밈없이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언어 속에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역동적 힘이 있다. 참된 신자의 영혼 속에 부각(浮刻)되는 상승된 영적 희열이 있고, 왜곡된 믿음을 가진 위선자들에 대한 풍자적 책망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해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가 있다.

영국의 청교도 작가이자 설교자였던 존 번연은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 된 기독교인의 일생을 그린 우화집으로 세계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 ‘천로역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이 강조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와 성경은 만인 의 것임을 설명한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한 우화집이었다.

번연은 1628년 잉글랜드의 벧포드(Bedford) 벽촌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았다. 겨우 읽기와 쓰기만을 배운 그는 16세 때 크롬웰의 의회군(議會軍) 수비대에 자원입대했다. 1647년 의회군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새롭게 하고 나쁜 습관을 버렸으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는 마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내용을 읽고서 회심했다. 그리고 벧포드(Bedford)에서 평신도 설교자로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낮에는 냄비와 팬을 수선하고 밤과 주말에는 말씀을 전하여 영혼을 구령했다. 그런 가운데 그의 능력 있는 설교로 인해 수많은 회심자가 생겼고 또 반대로 그의 강한 대적자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에 찰스 2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복위(復位)하여 청교도 지도자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처형 되고 개신교에 대한 핍박이 일어났다.

1660년 존 번연은 허가(license) 없이 사람들에게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다시는 설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풀려날 수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1672년까지 12년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가 투옥되었던 기간에는 그의 아내가 만든 구두끈을 팔아 번 돈과 그의 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만 가족이 생활해야 했다.

그는 1665년 잠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다시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존 번연은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688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대중을 향한 그의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번연이 평생 지은 60여 권의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인데 감옥에 면회 오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으로 크리스천 소설 중 가장 유명하고 또 오랫동안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아 왔다. 번연이 옥중 고난은 아마도 ‘천로역정’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떠나는 한 순례자의 여로를 장엄한 서사시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 ‘천로역정’은 고뇌와 회심, 전도와 박해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로 이어지는 번연 자신의 고달픈 생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678년 출판된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어권의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신앙 서적이 되었다. 천로역정은 1678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출판 첫해에 10만 부 이상이 팔렸다. ‘천로역정’이라는 책의 한글 제목은 한국의 1895년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천로역정’이라고 이름하여 이후 모든 번역본이 이 제목을 취해왔다.      

10. 존 오웬

– John Owen, 1616-1683, 청교도의 왕자 –

죤 오웬은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린다. 맞는 말이다. 그의 전집(全集, Works)은 건전한 성경적 가르침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제일 먼저 택해야 할 책들이다. 현재 그의 글들은 25권으로 나와 있다. 그의 전집은 영어로 된 신학서의 최대 보고이다.

또 오웬은 ‘청교도들의 다윗 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글에는 힘과 일관된 사상이 있고 항상 성경의 권위에 충실하다. 오웬의 가르침의 균형과 예리한 통찰에 있어 맞설 자가 없다는 것은 여러 실례로 증명될 수 있다.

예로써 ‘성령의 인격과 사역’(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Works, vol. 3),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 ‘죄의 억제’(The Mortification of sin, vol.6) 등이다. 그의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 vol. 13)는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적절성이 있는 저서이다.

오웬은 잉글랜드 웨일즈(Wales)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머리가 좋아 12세에 옥스퍼드의 대학에 입학 10년간 공부했다. 그는 투창 경기를 즐겼으며 롱 점프 선수였다. 또 플루트도 불었다. 그는 학자의 기질이 있어 밤에 4시간의 수면만 취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일과로는 올림픽 챔피언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웬은 친구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유명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1600-1666)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런데 캘러미 목사가 오지 않고 한 시골 목사가 대신하여 실망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방문 목사를 사용하여 오웬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셨다.

오웬의 첫 목회지는 에섹스(Essex) 주의 포드햄(Fordham)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때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가정생활의 슬픔은 현대 의학의 혜택을 입고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들은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그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깨어져서 친정에 돌아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46년 주일에 출석 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다.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은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다. 그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와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설교자로서 오웬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軍宗)으로도 임명되었다.

1652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이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다.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토론 때 한 학생이 상스런 말을 했다. 그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오웬 자신이 그 학생을 힘으로 강의실에서 밖으로 내쫓았다.

1658년 오웬은 회중교회(會衆敎會, Congregational Church) 목회자 모임에 나갔다. 이 모임은 런던의 사보이 팰리스(Savoy Palace)에서 열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 윌리엄 그린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잘 알려진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이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를 잃었다. 18개월 뒤에 그는 부유한 여자와 재혼했다. 그런데 이때쯤 해서 그의 건강이 악화되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그는 좋은 마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편의를 돈 많은 아내 덕분에 누렸다.    

오웬의 글은 그가 분석적이고 조형적이며 통이 큰 두뇌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심오하게 이해한 은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웬의 문장 스타일은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로(R.K.K. Law)의 수고 덕에 오웬의 대표작들에 속하는 ‘성령론’(The Holy Spirit), ‘하나님과의 교제’(Commuinon with God), ‘복음으로부터의 배도와 그리스도의 영광’(Apostasy from the Gospel and the Glory of Christ)이 요약되거나 현대어로 고쳐져서 출판되었다.

4 후기 청교도 인물들

11. 요한 웨슬리

– John Wesley, 1703-1791, 감리교의 아버지 –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6월 17일 사무엘 웨슬리 목사 부부의 열다섯째 자녀로 태어났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수잔나에게 어릴 때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735년 10월 14일 요한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와 당시 잉글랜드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2년 동안 조지아에서 사역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738년 2월 1일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Moravian)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라비안교도 친구인 피터 뵐러(Peter Bohler, 1712-1775)의 간증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는 또 “구원은 즉각적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완전히 믿게 된다. 그 후 그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1739년-1791년 있었던 ‘대 각성 부흥 운동’은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놀랍게도 자기가 설교할 때면 성령께서 강력히 역사하시어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그는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라고 외치며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했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 남아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땅끝까지 달려갈 것이다!”라며 1753년 직접 발 벗고 세계선교에 뛰어들었다. 그는 몸이 왜소했으나 그처럼 작은 몸에서 세계를 흔드는 힘이 터져 나왔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해 50년 동안 말을 타고 지구 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리고도 틈틈이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냈으며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60년 동안 한 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했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 중에 1778년에는 은혜로운 것만 뽑아 525곡의 찬송가집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 때 두 개의 숟가락과 차를 끓이는 주전자 하나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남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장례식이 있기 전날 그의 시신은 시티로드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왔고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위대한 빛은 (하나님의 보기 드문 섭리로 말미암아) 이 나라들을 비추기 위해 떠올랐다. 이 묘비를 읽는 이들이여! 하나님의 도구인 웨슬리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라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12. 조지 휘트필드

– George Whitefield, 1714-1770, 복음주의적 연합운동 –

조지 휫필드는 1714년 잉글랜드 남서부 도시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여관집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청소년 시절은 결코 신앙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1733년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칼리지(Pembroke College)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삶은 급변하고 있었다.

1735년 회심한 그는 홀리 클럽(Holy Club) 회원이 되었고 후일 함께 복음적인 신앙 운동을 전개했던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 그리고 ‘데론과 아스파시오’ (Theron and Aspasio)를 쓴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1714-1758), 윌리엄 모건(William Morgan, 1774-1826)등을 포함한 친구들과 교제했는데 이들은 다 1729년 봄에 시작한 홀리 클럽(Holy Club) 회원들이었다.

이 모임은 후일 영국과 미국의 부흥 운동과 영적 각성 운동을 이끌어간 동력원(Power station)이 되었다. 엄격하고 철저한 이들의 시간 관리와 규모 있는 생활방식(method) 때문에 메소디스트(Methodists, 절도 있는, 균형잡힌)라고 불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휫필드에게 큰 변화를 준 책 중의 하나는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 1650-1678)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중생(重生)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복음적 견해를 확립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6년 6월 20일 성직(副祭) 임명을 받아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된 그는 자기의 고향인 글로스터의 ‘세인트 메리 드 크립트교회’(St. Mary de Crypt Church)에서 첫 설교를 했는데 이것은 설교자로서 그의 삶을 이끌어간 중요한 힘이 되었다. 왜냐면 이때의 설교에 대한 그 자신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그는 이 첫 설교에서 외적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목마른 영혼들에 끊임없는 영적 해갈을 주었고 이 땅에서의 지친 삶에 새로운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특별한 일은 그가 1739년부터 이전에는 없었던 옥외(屋外) 설교와 야외(野外) 설교를 시작한 일이었다. 곧 그해 2월 그는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Kingswood) 지방 광부(鑛夫)들에게 광산에서 첫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약 2만 명이 운집할 정도로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이곳은 광산 도시로서 산업혁명 초기 당시 이들은 영국 국교회 관심 밖의 지역이었다. 휫필드는 영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 전도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두 달 뒤 4월에는 런던에서도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공터나 들판에서 설교하였는데 때로는 수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1739년 4월 29일 일기에는 약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 이 같은 옥외서 행한 설교는 당시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으나 청교도인 휫필드로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영국 국교회의 벽을 넘는 방안이기도 했다.            

길과 들과 물가로 나가 전도하며 옥외에서 설교하셨던 예수님의 설교는 그의 모범이었다. 휫필드의 옥외집회와 야외설교 그리고 극장 전도, 가정 선교, 도시 선교 등은 당시 교회로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 했던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1780-1847)는 휫필드의 전도 방법을 ‘공격적 방법’(aggressive system)이라고 불렀다.

휫필드는 1736년 6월 26일 주일 그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후부터 1770년 9월 29일 미국 뉴베리 포트(Newbury Port)에서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그는 오직 한 가지 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몰두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에 복음 전도자로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가 인도했던 공중집회는 1만 8천 회에 달했고 스코틀랜드를 14회나 방문했다.

지금부터 270여 년 전의 그 당시 도로, 교통, 통신 시설을 우리가 고려해 볼 때 그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당시로는 3-4개월 걸리는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을 무려 7번이나 방문한 일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그처럼 많은 대중에게 그만큼 많은 설교를 한 일이 없었다.

저명한 전기 작가 루크 타이어만(Luke Tyerman, 1819/1820-1889)은 휫필드의 마지막 설교는 익세티 마을에서 죽기 불과 수 시간 전에 행한 고린도전서 13:5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평가는 거짓됨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었다. 영국이나 미국 내에서의 그의 헤라클레스적 엄청난 노고는 성령의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13. 찰스 스펄전

– 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 마지막 청교도 –

스펄전은 영국 에섹스 켈비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온하고 독실한 목회자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스펄전은 사춘기를 구원을 향한 회의(懷疑)의 시기로 보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온 일상이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작은 시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 설교하려던 목사님이 눈보라 때문에 오지 못해 회중 가운데 한 성도가 설교하게 되었다. 그 성도의 설교는 간단했다.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죄의식으로 지치고 낙담한 스펄전을 가리키며 “당신은 단지 주만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그 순간 스펄전은 감전된 듯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됐다. 구원이 오로지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은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스펄전의 삶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의 삶이었다. 1851년 그는 17세의 나이로 정식 목사 직분을 받았다. 그 후 일생을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어느 때든지 수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의 힘찬 신학적이고 감미로운 설교는 그를 ‘설교의 황제’라고 불리게 했다.

1861년 3월 31일 스펄전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에서 최초의 주일 예배가 드려졌다. 스펄전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이 교회 건물은 6천석 이었지만 몰려오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의 설교는 매번 서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까지 1만 명이 넘었다. 그러고도 수백 명 사람이 항상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매번 설교를 위해 수 시간을 기도했다. 그는 결코 제목 설교를 한 적이 없었으며 항상 성경 본문으로 강해 설교했다. 그런데도 다른 설교 3,500여 편의 내용을 중복해서 설교한 적이 없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은 그가 그토록 많은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개인 전도하는데 보낸 것을 보고 알 수가 있다. 그는 바쁜 일정 중에도 매주 화요일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개별적인 면담을 위해, 토요일은 복음을 위한 개별 방문을 정기적으로 행하기 위해 남겨 두었다. 그는 “내가 소유한 것 중 받지 않은 건 하나도 없다.”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이런 겸손은 처음에는 비우호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명성에도 자만하지 않고 그가 우리 눈을 깜짝 놀라게 했던 처음보다도 오히려 더욱 겸손하고 더욱 자기를 부정하게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1891년 1월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는 불타는 진실성과 굽힐 줄을 모르는 신학적 신념과 열정을 가진 ‘복음의 전파자’였다.  

그의 신학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였다. 계시 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은 지식과 지혜는 존중했으나 성경 고등비평이나 진화론에 기초한 자유주의 사상이 복음을 타락시킬 때 그는 참을 수 없이 분노했다. 또 비록 복음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복음과 자유주의를 동시에 수용하려는 당시 교계와 타협을 거부했다.

복음에 여러 가지 견해, 추리, 상상, 환상을 섞는다면 복음의 변질이 필연적인데 스펄전은 자신이 속한 침례교단이 진정 고수할 근본 진리와 정반대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1887년 10월 그의 나이 53세에 교단을 과감하게 탈퇴했다. 그의 설교 원리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외치는 설교는 말씀 선포가 아니다.
  •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자나 깨나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 설교는 가르치는 내용이 있어야 하며 그 내용은 건전하고 기독교의 본질이어야 할 뿐 아니라 풍성한 교리가 있어야 한다.
  • 설교자는 설교 본문 선택에 항상 신중하여야 한다.
  • 설교자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 설교자는 자신의 음성을 잘 관리해야 한다.
  • 설교자는 설교 전달 자세, 태도, 몸짓에 신경을 써야 한다.
  • 설교자는 설교에 예화를 사용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 설교는 절대로 그날 설교의 성경 본문을 떠나서는 안 된다.

 제5장 미국의 청교도 인물들

14. 토마스 쉐퍼드

– Thomas Shepard, 1605-1649, 역경을 극복한 청교도 –

토마스 쉐퍼드는 존 코튼(John Cotton),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리처드 매더(Richard Mather) 등과 함께 뉴잉글랜드 청교도 1세대 지도적 목사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초창기에 설립된 교회인 케임브리지 제일교회와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의 설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반(反) 율법주의적 성향을 노출한 허친슨 부인으로 인한 위기 이후 그의 신학은 당시 뉴잉글랜드의 주류 정통으로 간주 되었고 그 후 여러 세대 동안 뉴잉글랜드 신앙과 신학의 초석으로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쉐퍼드는 1605년 영국 노샘프턴 근처의 토우스터(Towcester)에서 3남 6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부친은 식료품상을 해서 꽤 돈을 번 사람으로 상당히 경건하고 열심 있는 신앙인이었다. 어머니도 경건하고 애정 어린 분이었으나 토마스가 네 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사랑 없는 계모 밑에서 자라야 했다. 동네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그는 조부모 댁, 삼촌 댁 등등으로 옮겨 다니며 자라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얼마 후 부친마저 죽은 후에는 큰형의 양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 형은 쉐퍼드에게 부모와 같았다. 훗날 그는 형이 자기에게 애정을 많이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어느 교장 덕분에 그는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학자가 될 자질을 보였다. 그리하여 세퍼드는 열다섯 살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임마누엘 칼리지에 입학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세퍼드는 학생들과 함께 술자리에서 만취의 경험을 하게 되는 데 이 일 직후 그는 취중에 자신이 보였던 금수 같은 행동을 기억하고 혼란과 수치심에 가득 차게 된다. 그는 들판으로 달려가 주일날 종일토록 거기서 숨어 범죄자처럼 떨며 지냈다. 그 죄의 경험은 그에게 그 행위에 대한 통렬한 슬픔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의 극심한 죄성과 그의 모든 죄에 대한 회개의 필요성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그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날이었다. 그날 그는 죄와 자신의 길들의 사악함을 매일 묵상하기로 결심했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당대의 가장 유능한 청교도 신학자요 설교자인 존 프레스톤을 만나게 된다. 그는 1622년에 임마누엘 칼리지의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프레스톤의 설교에 의해 쉐퍼드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더 깊고 뚜렷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참지식을 얻고 자기 마음의 감춰진 악들과 은밀한 죄들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전격적 회심과 갱신을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한다.          

어느 주일 저녁 영원한 유기(遺棄)와 고통에 대한 생각으로 너무 괴로워진 쉐퍼드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다처럼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예상하고 자살해 버림으로써 자기가 가야 할 지옥으로 서둘러 가 버리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끼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 주님이 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영혼의 고뇌에서 벗어나 빛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 그때 그는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사랑을 드러내셨으며 그 모든 광란하는 생각들을 잠잠하게 해 주셨다.

이제 그는 주님의 영광, 위엄, 신비를 보았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의 눈을 여시고 비참에서 그를 건지셨다. 한때 그의 영혼을 거의 파괴하고 절망으로 몰아간 그러한 무서운 경험으로 인해 그는 후일 영적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 대한 남다른 동정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체험 후 안정을 얻은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케임브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1627년, M.A.) 졸업 후 영국교회(성공회)에서 부제 직(deacon)을 얻은 쉐퍼드는 얼스 콜론(Earles-Colne)등 여러 마을에서 많은 영혼을 회심시키는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다가 1630년에 주교(主敎) 라우드(Laud)의 소환을 받는다. 거기서 영국 교회의 의식에 완전한 순응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목회 사역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후 그는 신대륙으로 이주를 결심한다. 추적자들을 따돌리면서 배를 타려 했으나 여러 번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출항에 성공한다. 가족들과 함께 항해 중 여러 번 죽을 고비들을 넘기고 쉐퍼드는 1635년 10월 초 신대륙 보스턴에 도착했다.

1636년 2월 쉐퍼드는 후에 케임브리지라고 불리게 된 뉴타운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사역을 시작한다. 1636년에 발생하여 그해 말과 이듬해 초에 절정에 달한 소위 ‘허친슨 논쟁’ (Hutchinson Controversy)에서 허친슨 일당의 오류를 규명하고 그들을 추방하는데 중심 역할을 함으로써 뉴잉글랜드 청교도 주류 정통의 확립 자가 된다.

1636년 쉐퍼드는 미국 하버드대학 설립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버드대학이 뉴타운에 설립된 이유는 이 지역은 쉐퍼드의 정통적이고 성공적인 목회 영향으로 인해 당시 보스턴교회 전체를 위협하고 있던 반 율법주의의 위협에서 잘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48년 케임브리지에서 대회가 모여 뉴잉글랜듸 회중교회주의를 명문화한 ‘케임브리지 강령’(Cambridge Platform)이 기초 되었을 때 쉐퍼드는 그 작성에 주역을 담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존 코튼, 토마스 후크와 함께 회중교회 제도를 옹호하고 반석 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가정적으로 불행했다. 1632년 결혼한 첫 아내가 보스톤에 도착 직후인 1636년에 사망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도 죽는다. 재혼한 아내는 토마스 후크의 딸이었는데 그녀도 9년 뒤에 죽었다. 둘째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세 아들 중 첫째 아들은 출산 중 사망했고 셋째 아들도 생후 4개월 만에 죽는다. 1647년에 세 번째 아내와 결혼하고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항상 몸이 약했고 창백한 안색의 소유자였던 그는 1649년 9월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 증거자 사명을 받은 쉐퍼드는 평생 흔들림이 없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교자였다. 인생의 가장 쓴맛을 맛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위기에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한 그의 설교는 언제나 영혼에 감동을 주는 힘이 있었다.

15. 조나단 에드워즈

– Jonathan Edwards, 1703-1758, 미국 원주민 전도자 –

  •  어린 시절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의 이스트 윈저에서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 목사와 어머니 에스더의 11자녀 중 다섯째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건한 청교도적인 목사였고 어머니는 노스햄프턴 회중교회 목사인 솔로몬 스토타드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양육 받았다.

  •  대학 시절과 회심

11세 때 자연계와 곤충을 관찰하고 소논문을 쓰기도 했고, 12세에는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조숙한 천재였다. 1716년 13세가 되자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 대학에 입학하여 1720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2년 더 그곳에 머물며 신학을 공부했고 바로 그 2년은 에드워즈가 자신의 회심을 체험하였던 시기로 추정된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특별히 나의 대학 생활 2년 동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나를 늑막염으로 붙잡으셨다. (중략)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이 말씀을 읽을 때 나는 마치 내 영혼 속으로 들어와 녹아서 퍼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더욱 거룩해지기를 뜨겁게 갈망했다. 그리하여 심령이 가득 차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어디에 있든지 거의 계속적으로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나는 매사에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닮기를 원하는 불타는 열망을 가졌다.” 

에드워즈는 1722년 뉴욕에 있는 조그마한 장로교회에서 목회 현장을 실습한 후 1723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722-1723년 겨울에 자기의 마음과 생활의 ‘절제 지침서’가 될 일련의 결심을 결의문 형식으로 썼다.(조나단 에드워즈의 70개의 ‘나의 결심’ 참조) 그의 이 결심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에 대한 최고의 요약집으로 지금까지 사람이 만들 수 있었던 것 중 복음적 선행 실천에 대한 최고의 지침서로 평가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영적인 것에나 육적인 것에나 크고 작은 일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가능한 한 묵인하지도 아니하며 어떤 것도 행치 아니한다. 살아 숨 쉬는 동안 전심전력하여 산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어떤 점에서 태만하였는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리고 자신의 어떤 점을 부인하였는가를 생각하며 살핀다. 나는 자주 노인들에게 가서 다시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묻는다.”

에드워즈는 1724년에 예일 대학 강사를 하며 학생들의 생애에 아주 좋은 감화를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722년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일기는 그의 ‘70가지 결심’과 함께 에드워즈의 인격과 신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중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오늘 아침에는 다른 날보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했다. 먹고, 마시며, 잠자는 것에 대해 금욕함으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욱 기운차고 건강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의 위대한 업적으로 말미암아 내가 자신을 감화시키고 애쓰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겠다. ‘이 일은 죽음의 자리에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라. 쓸데없는 망상에 자로 잡힐 때는 연구에 전념함으로써 견디고, 망상들을 떨쳐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에드워즈의 전기 작가인 이언 머레이는 이 글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도 에드워즈와 꼭 같은 발자취를 따릅시다. 그리하면 분명히 꼭 같은 결과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노스햄프턴 회중교회 목회와 일상 가정생활

1726년 13세 때 그의 외할아버지가 섬기고 있던 노스햄프턴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이때쯤 뉴잉글랜드의 신앙은 청교도 이주자들의 첫세대를 지도하였던 영적 거성들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물질적 번영이 도덕성과 경건성을 혼미하게 하였으며 저들의 영적 관심을 점차 빼앗아가 버렸다. 그래서 1720년에 인크리스 메더 박사는 ‘뉴잉글랜드로부터 떠나가는 영광’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8세기 초반 수년이 지났을 때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1731년 7월에 노스햄프턴의 에드워즈 목사가 보스톤의 대중집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한 것이 계기가 되어 널리 알려지며 에드워즈의 생애에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특히 에드워즈의 알미니안 주의를 반박한 설교가 부흥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즈가 노스햄프턴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컸다. 불과 반년 만에 300명 이상의 남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또 200가구로 구성된 노스햄프턴의 전체 주민이 각성하게 되었는데 이 역사는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 불길이 뉴햄프셔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퍼져 갔으며 또한 커넥티컷주의 많은 지역으로 타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1735년에 노스햄프턴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책자가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영적 대각성 보고서가 런던과 보스톤에서 발행되었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의 전기 작가 드와이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총체적인 회개를 일으켰으며 복음 전파가 대단히 효과 있게 수행되었는데 그것은 사도 시대에 일어났던 것 이상으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뉴헤이븐에 살고 있던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하여 30여년 간의 무난한 가정생활을 유지했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한 번씩 아내와 합심하여 기도했다. 에드워즈와 사라 사이에 11명의 자녀가 탄생했으며 자녀들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도록 철저히 훈련받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과 약 1시간에 걸친 대화의 시간을 가졌던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을 자녀들에게 자상히 가르쳤다.

1749년 7월에 15세의 딸 마리아에게 쓴 편지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바라건대 너는 모든 시험을 물리쳐 자신을 엄격하고 단정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지 않도록 특별히 은밀한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또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 생명이 있고 세심한 사랑은 생명보다 더 귀하다. 네가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에드워즈는 휘필드처럼 새벽 4시에는 기상했으며 평균 13시간 정도를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 시간에 가족들이나 그의 교회 성도들을 자유롭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에드워즈는 종종 금식하면서 영성 개발과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했다.

  •  영적 대각성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다. 먼저는 1734-1735년 노스햄프턴에 일어난 역사였고, 두 번째는 1740-1741년인데 이때는 뉴잉글랜드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다. 두 번째 대각성의 특징은 조지 휫필드와 함께 사역했다는 점이다. 1740년에 보스톤의 여러 목사가 휫필드를 뉴잉글랜드로 초청했는데 그렇게 방문한 것이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 같은 것이 되었다.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우정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페리 밀러는 뉴잉글랜드에 대해 말하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휫필드는 폭발시켰다.”라고 했다. 그 결과는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교인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1741년 헷포어드에서 27명이, 노오스 스토닝톤에서 104명이, 보스톤의 올드사우스교회에서는 6개월 만에 60명이, 같은 도시의 뉴오드교회에서 12개월 만에 102명이 늘었다. 1741-1742년에 힝헴에서 45명이, 플리머쓰에서 84명이, 미들보로우에서는 174명이 늘어났다.

에드워즈는 설교를 계속 강행하여 몸이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땅도 지옥도 그 어떤 것도 그 주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이 지역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커다란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친 부흥의 영향력은 어떤 현대 비평가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나단 피어슨은 1741년에 말하기를 수많은 영혼이 진노 가운데서 떨고 있을 때를 우리의 오순절이라고 했다. 이때 에드워즈가 부흥을 주도한 세 권의 책이 있는데 ‘성령 사역의 표적들을 분별함’, ‘1740년 뉴잉글랜드의 신앙부흥에 대한 소고’, ‘신앙의 열정’이란 책을 남기게 했다.

  •  노스햄프턴의 분쟁과 사직

1750년 6월 23일 에드워즈는 그가 24년간 사역해 온 자신의 교회로부터 축출당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은 에드워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재력가의 아이들이 외설적인 책을 읽었는데 그가 이것을 꾸중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에드워즈와 교회 평신도 지도자 간의 갈등은 신학적으로 확대되어 결국 교회 정회원 230명이 에드워즈의 사임을 찬성하고 반대자는 오직 23명뿐이었다.

이후 에드워즈는 메사추세스 변경 지역인 스탁브리지 교회의 초청을 받고 이에 응한다. 말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한편 한적한 환경 속에서 그의 사상을 정리하여 그동안 밀쳐 두었던 대작들을 이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의 유명한 ‘의지의 자유도’ 이 시기에 저술했다. 이것은 결국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  프린스톤신학교 학장 취임과 죽음

1757년 9월에 에드워즈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부여되었다.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정 재능과 학식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천연두로 인해 1758년 3월 22일 취임 6개월 만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들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는 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오랫동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신비한 연합은 내가 믿은 대로 영적인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오.”

물론 질병이 그의 사인(死因)이었으나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고독한 목회가 노스햄스턴 교회로부터 입은 큰 상실감과 스탁브리지에서 했던 수고로 말미암아 지쳐 있던 에드워즈를 영원한 안식처로 초대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칼빈주의자로서 에드워즈는 죽음까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기에 평온한 임종을 맞이했다. 그의 아내도 6개월 후에 에드워즈의 뒤를 따랐다.

  •  에드워즈의 중요 작품과 신학 사상

에드워즈의 스탁브리지에서 6년은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기였다. 1754년에 자유의지의 주요한 개념들에 대한 조심스럽고 면밀한 연구 그리고 1758년에는 ‘원죄 교리’가 출판되었다. 첫 번째 책에서는 인간의 책임에 대한 성경적 교리가 확실하며,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의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적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논증하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원죄 교리’는 “모든 인간이 본성 가운데 죄를 지을 수 있다. 이 성향은 아담의 죄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전 인류가 가담자로 여겨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는 1734-1745년 겨울에 일어났던 잊을 수 없는 여러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다. ‘신앙의 열정’이란 책에서 에드워즈는 말한다. “만약 우리가 신앙에 열심히 없고 우리의 의지와 기질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신앙의 열정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신앙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  에드워즈에 대한 종합 평가

첫째, 에드워즈의 공헌 : 그의 설교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열매들은 뉴잉글랜드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였다. 그중 한 사람은 ‘심판 날’에 대한 설교를 듣고 이렇게 표현했다. “에드워즈의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화력은 살아 움직이는 완벽한 것이었다. 에드워즈가 설교를 끝마치자마자 심판자가 내려오시고 최후 심판이 집행되는 것 같았다.”        

둘째, 설교의 특징 : 그는 강단에서 제스처, 스타일, 웅변은 거의 없었다. 키는 약 180cm 정도의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 시종 거의 부동자세로 설교했다. 적어도 생애 말기까지 자기 설교의 대부분을 써서 읽은 편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설교 능력은 대단했다. 스탁브리지에서 에드워즈가 사역할 당시 어린아이였던 한 사람이 자라서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회중은 2시간 이상 걸리는 설교 시간에도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앉은 채 경청했다. 진리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중력으로 회중들의 마음을 압도하고 있었다. 거의 설교를 마칠 즈음에는 그렇게 빨리 끝마치는가 하여 다소 실망하는 듯하였다. 특히 에드워즈의 설교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그들이 받을 형벌에 있어서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하고 가혹하여 회심치 못한 사람들을 회심시키기에 적절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가 벤크로프트는 에드워즈가 자기의 시대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하여 말했다. “누구든지 17세기 중반에 뉴잉글랜드들의 마음에 일어난 일들을 알고자 하며 또 그 마음에 일어났던 진동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데 밤낮을 가려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 그의 저서가 남긴 영향력 : 그의 작품들과 설교 원고는 에드워즈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무수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부흥에 관한 그의 책들은 표준 교과서들이 되었다. 거기에는 사역자들과 성도들 모두에게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유사한 정도로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으며 현재도 정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찰머즈 박사는 에드워즈에 대해 “나는 오래전부터 그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전례가 없을 정도의 심오한 지식과 경건을 잘 조화시킨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넷째, 영력의 근원 :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엄숙한 임재(臨在) 의식 가운데 살았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동기가 되어 자기 훈련과 일찍 일어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은밀한 기도와 하나님 말씀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깊은 지식은 깊은 말씀 묵상과 연구에 의한 그의 경건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영원한 진리들로 말미암아 심오한 감동 받은 것이다.

다섯째, 신학적 경향 : 청교도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뉴톤과 존 로크와 같은 영국 철학과 과학자들의 논리와 접근법을 연구하고 응용하였다. 당대의 철학자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내용으로 칼빈주의를 실질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미국에서 최초로 했던 신학자였다. 방법에 있어서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해내었다는 점이다. 에드워즈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의 갱신이요, 회복이다. 부흥된 칼빈주의 신학이요 살아 있는 교리신학이다.

여섯째, 시대와의 연관성 및 교훈 : 그러면 그의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축복, 깊은 연구와 능력 있는 설교, 교리와 실제의 연결은 오늘날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 조상들의 순수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요청은 에드워즈의 작품들이 우리 영혼에 남긴 최고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공은 진리와 기도에 대한 성공이지 숫자나 재능이나 활동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깨달아지면 현재와 미래에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글쓴이 / 김영익 교수(총신, 역사신학) 출처, 김영익 저, 청교도사 제7장 청교도 인물사,  ㈜ 본 기사는 본지의 편집에 맞도록 재편집된 것으로 원문과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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