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 위기의 본질: 목사의 찬송지도 직무유기

장로교회 교인들에 대한 찬송지도는 목사의 세 번째 중요한 직무이다. 심지어 교회 공예배의 주관은 당회가 하지만 찬송의 선택, 횟수, 시간은 목사의 재량에 속한다. 이 점에 있어서 목사는 당회와 상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목사는 찬송에 대해 상당한 권한이 있다. 교회가 교인들에 대한 찬송지도를 목사에게 맡긴 것은 찬송이 말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성경적 원리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배의 찬송은 곧 목사의 말씀 선포에 버금가는 비중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에서 찬송 사역자와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는 그 비중이 동일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이와 같은 성경적 원리가 무시되거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필자가 젊었을 때만 해도 교회에서 찬송을 가장 잘 알거나 잘 부르는 사람은 당연히 목사였다. 요즘 6~70대 목사들은 2~300곡 정도는 외워서 부를 수 있는 목사도 있다. 그 누구보다도 목사가 찬송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 찬송지도가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날 상당 수 교회는 목사가 찬송을 지도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가장 큰 이유는 목사가 요즘 새롭게 도입되는 찬송을 잘 모른다. 안다고 해도 가정 예배와 같이 생활 속에서 부르지 않는다. 목사가 찬송을 안다는 말은 단지 곡조를 안다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찬송을 잘 모르니까 찬송을 지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주일하교 중, 고, 대, 청년들이나 영어권 예배 시에 그들이 성경 신학적으로 무슨 찬송을 부르는지 조차 담임 목사가 전혀 모르거나 무관심 한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날 선포 되는 말씀과 예배 시 부르는 찬송의 분리는 이처럼 의외로 심각하다. 요즘 오후 시간에 강의나 설교 초청을 받으면 소위 준비찬송이라고 불리는 초반찬송 시간에는 목사는 참여하지도 않는다. 당회실 같은 곳에서 대화를 나누다 초반찬송이 마무리 될 무렵쯤에 예배당으로 입장하는 경우가 많다. 초반찬송에 좀 일찍 들어가 있어도 목사가 찬송을 따라 부르는 경우가 예전 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때로는 목사가 모르는 찬송을 회중들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이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의 타락의 이유 중의 하나는 직분자의 직무 유기이다. 오늘날 목사들은 이 점에서 심각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가 모르거나 할 수 없거나 상관없이 만약 드럼이나 기타 악기가 들어온다고 한다면 목사는 그 악기를 연주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악기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예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세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배를 주관하는 당회 원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목사가 악기는 연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도는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이후에 도입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도입하지 않는 것이 장로교회 원리에 맞는다.
이것은 시편찬송 도입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시편찬송이 옳다고 하더라도 목사가 먼저 시편을 공부하고 회중들에게 설교를 하여 은혜를 끼치고 시편찬송 자체를 배우고 소화하고 익힌 다음에 헌법이 가르치듯이 회중들로 하여금 ‘충분히 연습을 하여’ 즐기게 한 다음 도입하여야 한다. 시편찬송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바로 지금부터 시행하자는 식의 결정은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필자의 경우 3년 걸림)
목사의 찬송지도에 대한 이 직무유기에 있어 신학교도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 개신교 신학교에서 찬송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은 거의 없다. 찬송의 역사나 신학에 대해서는 가르치고 있는 곳이 있을지 모르지만 찬송을 가르치는 곳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신학생들은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해도 찬송을 전혀 배우지 못한 상태로 졸업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참고 : 천주교의 경우 신학생들이 매주 1시간씩 개인 실습을 받고 있음)
내가 조금 있으면 연구를 위해 장로교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를 가게 된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들은 찬송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 볼 계획이다. 내년에 우리학교 학생들은 수강신청 할 때 ‘찬송의 신학과 실제’라는 과목명을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 이 / 이성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