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전킨 선교사 부부 이야기

조선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한 전킨 선교사 부부 이야기

– 오늘의 한국교회 부흥은 우연이 아니다! –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1865-1908, 전위렴, 全緯廉) 선교사 가족

1. 조선을 가슴에 품기로 서원하다.

“조선의 충청도와 호남지역에는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습니다. 그 지방 조선인들은 지금 복음을 듣지 못해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1891년 첫 안식년을 고향 미국에서 보내고 있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이 외침에 미지의 조선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하나님 앞에 서원한 7명의 젊은 부부와 청년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7인의 선구자들’(Seven Frontiers)이라고 부른다. 그들 가운데 전라북도 서북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린 젊은 부부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 1865-1908) 선교사 부부였다.

1865년 미국 남부의 중산층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였던 할아버지와 판사였던 아버지의 신앙 속에 성장했다. 그는 1887년 대학생 때 해외 선교사로 헌신하여 브라질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외 선교를 위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조선에 더 급히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외침을 듣고 조선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조선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전킨 선교사 부부는 1892년 9월 7일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급성 후두염에 걸려 결국은 그 배를 탈 수 없었다. 이같이 전킨 선교사의 평생 선교사역에 큰 장애가 된 건 그의 건강이었다. 그는 이국땅에서 선교사로 살아가기에는 몸이 너무 약했다.  

2. 드디어 조선 땅에 발을 딛다.

1892년 11월 3일 드디어 조선에 도착한 전킨 선교사 부부는 조선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힌 후 1983년부터 전주와 군산에서 순회 전도사역을 시작했다. 1896년 4월부터는 군산에서 조선인 같이 생활을 했다.  

그런 가운데 군산에 교회를 개척하여 점차 교회가 성장하고 있었지만 전킨 선교사 가족은 열약(劣弱)한 환경으로 인한 풍토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1896년 여름 장남 조지(George)가 풍토병으로 죽었다. 1899년 겨울에는 둘째 아들 시드니(Sydney)마저 조선 땅에 묻어야 했다. 전킨 선교사 부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녀를 잃은 슬픔이 전킨 선교사 부부의 선교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1900년 군산교회는 성도가 110여 명으로 늘었고 또 다른 네 곳에 새로이 교회를 개척하여 순회하며 돌보았다. 그런 가운데 첫 번째 안식년을 맞아 군상 항을 떠날 때 성도들은 부디 몸이 약한 던킨 선교사가 건강한 몸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찬송가 22장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렀다.

1901년 11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두 아들을 묻은 조선 땅으로 다시 돌아온 던킨 선교사 부부의 군산 사랑은 더욱 뜨거웠다. 이때 군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를 세웠다. 이렇게 자신의 건강보다는 조선인 선교에 온 힘을 다 쏟는 던킨 선교사 부부를 지켜보던 선교본부는 그의 건강을 위해 의료시설이 갖추어진 전주로 사역지를 옮기게 했다. 그리고 전주 시내에서 반경 6마일(10km) 이내에서만 활동하도록 사역 범위를 제한(制限)했다.

3.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그런 가운데 1904년 4월 또다시 던킨 선교사 부부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세 아들 중 하나 남은 막내 프란시스(Francis)마저 병으로 죽었다. 세 아들을 조선 땅에 묻고 던킨 선교사 부부는 너무 큰 슬픔에 다시 일어설 힘이 없었다. 그래도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품은 그 열정이 전킨 선교사 부부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워 1907년 한반도에 몰아치던 대부흥운동을 전주에도 불게 했다. 전주 서문교회 담임 목사였던 그의 뜨거운 설교를 통해 전주에도 회개의 바람이 불게 된 것이다.

1908년 1월 2일 전킨 선교사는 상가(喪家)에 갔다 장티프스에 걸려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조선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그가 세운 전주여학교는 ‘기념하자! 전킨 선교사!’라는 말을 줄여 학교 이름을 ‘기전’(記全) 여학교로 개명(改名)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全州紀全女子高等學校)이다.(사진, 현 전주여자고등학교 교사) 전킨 선교사는 지금 세 명의 아들과 함께 전주에 고이 잠들어 있다. 그러나 세 아들을 잃은 슬픔보다 예수를 모르고 죽어가는 조선 사람들에 대한 애통을 더 견딜 수 없어 했던 그의 삶은 예수의 사랑의 메시지가 되어 오늘도 우리 가슴을 세차게 때리고 있다.(*) 출처 : 서울 선교한국(MISSION KOREA) 홈 페이지, http://www.missionkorea.org/?p=16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