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박윤선(正岩 朴允善)의 생애와 신학
한국 개혁신학의 선구자

I. 개혁주의 신학자 박윤선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신학적 조류가 있어 왔다. 연세대학교의 유동식(柳東植, 1922- ) 교수는 그의 ‘한국신학의 광맥’에서 한국 개신교 신학의 흐름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는데 ‘보수 근본주의신학’, ‘진보 사회참여신학’, ‘종교 자유주의신학’으로 대별(大別)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 근본주의신학’에 초석을 놓은 이로는 길선주(吉善宙, 1869-1935)와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을, ‘진보 사회참여 신학’의 초석을 놓은 이로 윤치호(尹致昊, 1865-1945)와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을, ‘종교 자유주의 신학’의 초석을 놓은 이로 최병헌(崔炳憲, 1858-1927)과 정경옥(鄭景玉, 1903-1945)을 들었다.
위의 3가지 신학 조류(潮流)는 한국교회 신학의 태동기(胎動期)를 중심으로 구분한 것으로 그 이후의 한국교회 신학적 조류를 정교하게 구분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유동식의 분류들 따른다면 길선주와 박형룡으로 대표되는 ‘보수 근본주의신학’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었고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통이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려는 ‘개혁주의 신학’(改革主義 神學, Reformation Theology)을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혁주의신학’은 ‘보수 근본주의신학’과는 다르다. ‘보수 근본주의 신학’은 1920년대 미국교회 신학 논쟁에서 분명하게 석명(釋明, 사실을 설명하여 밝힘) 된 신학으로서 ‘보수 근본주의신학’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분리주의적인 성격이 있고 문화에 대한 책임을 경시(輕視)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신학은 하나님의 주권(主權)과 선택(選擇)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성도의 삶의 목표로 하기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은 삶의 전(全)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화적 사명을 중시하는 신학이다. 이 신학이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사상에서 연원(連原)하지만 이 신학을 보다 분명히 해설하고 한국교회 현실에서 체계화한 이는 박윤선(朴允善, 正岩, 1905-1988) 박사였다. 박윤선은 40여 년 간의 교육활동과 저술, 성경주석의 집필, 목회활동을 통해 한국에 ‘개혁주의신학’을 소개하고, 해명, 석명하였을 뿐 아니라 개혁주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에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
2. 박윤선의 신학여정
1905년 평북 철산군에서 출생한 박윤선은 선천(宣川)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거쳐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31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했다. 1934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두 차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했다.(1934-1936, 1938-1939) 특히 이 기간 동안 메이첸(J. Gresham Machen, 1881-1937)의 문하에서 헬라어와 신학연구에 주력했다.
박윤선의 2차 미국 유학 시에는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문하에서 변증학(辨證學)을 배웠는데 반틸의 영향으로 신학이란 어떤 자연론적인 유추(類推, Analogy)나 철학적 사변(思辨)에서 출발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前提) 한 성경계시에서 출발하는 전제주의(前提主義, presuppo- sitionlism)에 기초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또 반틸의 신학이 근거하고 있는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교의학(敎義學)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이 박윤선으로 하여금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변증법적 신학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첫 신학 논문인 ‘발트의 성경관에 대한 비평’과 그의 두 번째 신학 논문인 ‘발트의 계시관 비평’은 이런 훈련의 결과였다. 박윤선의 철저한 계시의존(啓示依存) 사색(思索)도 이런 교육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는 1936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평양신학교에서 원어학(原語學)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신학교육의 시작이었다. 그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두 번째 유학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 잠시 일본에 체류하다가 만주 봉천으로 갔는데, 1940년 3월 이곳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또 봉천 소재 한인교회 교역자 양성기관인 만주신학원에서 박윤선은 박형룡(朴亨龍, 1897-1978)과 함께 신학교 교수로 봉사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박윤선은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 현 고신대학교) 교수 흑은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가 고려신학교 교수로 봉직하던 1953년 10월 화란자유대학(The university in Amsterdam, Netherlands, 1880)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러나 아내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급거 귀국함으로 화란 체류 기간은 불과 6개월 정도였지만 화란의 개혁신학을 직접 접하게 되고 화란의 개혁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박윤선은 그 이전에 이미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을 섭렵하고 한국교회에 소개한 최초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화란 학자들의 글을 접한 것은 화란 유학시절이 아니라 1935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유학시절이었다. 그는 이때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에 심취하여 독학으로 화란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은사인 반틸을 통해서 바빙크의 ‘교회 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을 접했는데 그는 이 책을 가장 애독했다고 한다.
박윤선이 보수주의 신학자 박형룡 박사와 다른 한 가지는 박형룡은 미국의 구(舊) 프린스론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을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전통으로 확립하고 이를 보수(保守)하려는 입장이었으나, 박윤선은 화란에서 발전된 개혁주의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즉 박윤선은 구(舊) 프린스들 신학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이어지는 미국장로교 전통의 개혁주의신학과 특히 19세기 화란에서 발전된 개혁주의신학 이 두 흐름을 적절히 종합했고 이를 한국교회 현장에 이식하고 개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래서 박형룡은 ‘정통주의’, ‘보수주의’,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이를 혼용했으나 박윤선은 ‘개혁주의’, ‘개혁파’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빈번히 사용했다.
박윤선은 1954년 9월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韓尙東, 1901-1976) 목사와 함께 미국 패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쳤던 박윤선은 1960년 고려신학교를 사임하고 1960년부터 1963년까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동산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은 하나님 말씀이 건조한 이론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기회였다고 술회했다.
1963년 다시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교수로 청빙을 받은 그는 이때부터 1980년까지 총신 교수로 재직했다. 1979년에는 설립 50주년을 맞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그간의 그의 신학연구와 교육에 대한 인증(認證)이었다. 그 후 1980년 10월 말 총신대학 대학원장직을 사임하고 신복윤, 김명혁, 윤명탁 등과 합동신학교(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 원장과 교수로 봉직하였고 명예원장으로 계시다가 1988년 6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3. 박윤선 신학의 특징과 업적
박윤선은 일생 개혁주의신학 확립을 위해 일관된 생애를 살았는데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중요한 봉사는 성경주석 집필이었다. 그의 주석 집필은 1938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로부터 40년간의 노고 끝에 1979년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완간했다. 그의 첫 주석은 1949년 3월에 출판된 신약 ‘요한계시록’ 주석이었고, 마지막 주석은 1979년에 출판된 구약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주석’이었다. 그의 주석은 분량으로 보면 구약은 총 7,347쪽, 신약은 총 4,255쪽에 달해 신구약 주석은 총 11,602쪽에 달하며 매년 약 240쪽의 주석을 집필한 셈이다.
그는 주석 외에도 ‘영생의 원천’(1970), ‘응답되는 기도’(1974), ‘주님을 따르자’(1975) 등의 설교집과 ‘성경신학’(1971), ‘헌법주석’(1983), 유고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989) 등을 남겼다. 단행본 외에도 고신대학이 발간했던 ‘파숫군’에 218편, 총신대학 ‘신학지남’에 40편, 합동신학교의 ‘신학정론’에 1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14년인데 218편의 글을 발표했으므로 연 16편의 논문을 발표한 셈이다. 외람된 이야기일 수 있으나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고신신학교의 전성기(全盛期)였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열정적인 ‘학구의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닌 학자이자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지닌 학자였다.
박윤선은 조직신학자는 아니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에도 박식하였고 그의 성경주석에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 신학자와 하지(Ch. Hodge), 워필드(B.B. Warfield), 메이첸(J. Gresham Machen) 등 미국 신학자들과 잔 메이어(Jahn Meter), 델리취(Delitzsch) 등 독일 신학자들과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바빙크(Herman Bavinck), 보스(G. Vos), 리델보스(H. Ridderbos), 스킬더(K. Schilder) 등 화란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동시에 소개했다.
그는 개혁주의신학을 석명(釋明)하고 이를 구체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신학 위에서 신(新) 정통주의나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 진정한 개혁신학자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을 비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천착(穿鑿)하려고 힘썼다.
박윤선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신학 교육기관이었던 옛 평양신학교의 벽을 넘어선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하비 콘(Harvie Conn)은 박윤선은 단순한 근본주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고 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자였음을 지적했다. 그는 말하기를 “박 박사는 옛 평양신학교가 너무나 제한된 분야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반은총의 여러 분야들을 인식하지 못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는 단순한 근본주의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 즉 한국교회가 칼빈주의라는 보다 원시적(遠視的) 안목(眼目, the larger perspectives of Calvin)에서 바라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개혁신앙의 동료였던 박형룡과는 달리 박윤선은 조직신학 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신약연구들 통해서도 이런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라고 했다.
하비 콘이 말한 칼빈주의에 대한 ‘원시적(遠視的) 관점’이란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 세계관을 의미했다.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그는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으로 체달(體達)했던 신학자였다. 그는 ‘경신애학’(敬神愛學)의 삶을 살았으며 겸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박윤선과 함께 교수로 섬겼던 김명혁은 이렇게 회상했다.
“한국교회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 개혁주의라기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님은 한국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 주신 분이었다. 칼빈주의 신학을 하나의 신학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뜨거운 신앙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 주셨고, 소극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보여 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反) 문화주의가 아니라 사회문제와 구제사역 등에 적극적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가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1956년에 교단 명칭을 고신측이 아니라 ‘개혁파’로 변경하고자 했던 점은 그의 개혁주의 신학은 구(舊) 프린스턴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학으로 이어지는 미국적 전통만이 아니라 화란 중심의 유럽 개혁파의 전통을 수렴(收斂)하고 이들 한국교회 현실에 석명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박윤선이 한국에 남긴 신학적 유산
박윤선은 고신대학교(1946-1960), 총신대학교(1963-1980),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1980-1988)에서 학장으로 혹은 교수로 활동함으로써 그의 영향 하에 개혁주의 신학과 그 학맥(學脈)은 위의 세 신학교를 통해 체계적으로 계승되었고 한국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비록 그가 직접적으로 가르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신학과 삶은 그의 저서를 통해 한국교회 전반에 수용되었다.
박윤선은 한국의 대표적인 주경 신학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조직신학자인 박형룡보다 앞선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박형룡의 교의신학(敎義神學)은 사변적 난해성 때문에 대중적 수용도가 낮았다. 그러나 주경 신학자였던 박윤선의 저작들 특히 그의 신구약 성경주석은 일반 목회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사실 그의 성경주석은 학문적인동기에서 시도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강단이 메마르지 않도록’ 설교자들을 돕기 위한 ‘실천적인’ 동기에서 시도되었기에 그의 성경주석에는 41편의 소(小) 논문이 특주 혹은 참고 자료로 포함되어 있고 1,053편의 설교와 다양한 예화 등 ‘설교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주석은 시골 목회자로부터 도회지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독자층을 얻고 있다. 한국 목회자들의 서재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박윤선의 주석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방대한 저술과 30여 년간의 신학교육과 목회활동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공표하고 가르치고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선언적 의미가 컸지만 박윤선의 개혁주의 성경주석은 목회 터전에 쉽게 용해되고 착근(着根)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을 능가하며 한국교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저술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 전 영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삶과 고매한 인격을 통해 개혁주의 삶을 모범으로 보여 준 한국교회의 사표(師表)였다.(*) 원제 : ‘개혁주의 신학자 박윤선’ 글쓴 이 / 이상규 교수(신약학, 고신 명예교수), 고신대학교 신학부 신학과 신학사(B.Th.)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M.Div.), 고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신학석사(Th.M.), 호주빅토리아 장로교 신학대학 대학원 호주신학대학(ACT) 신학박사(T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