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3)의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결과

PART Ⅱ
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3)의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결과
시작하는 말
신약성경은 대략 주후 50년-130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들이다. 이 가운데 주후 66년-74년에 있었던 유대 전쟁 시기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문서가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던 시점인 주후 7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으로 마가복음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다수 주석가들은 특히 마가복음 13장을 유대 전쟁과 관련하여 당시 암울하고 종말론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 본문이 마가복음의 생성 시기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직 논란 중인 것은 마가복음 13장이 유대 전쟁이 끝났음을 돌아보고 있는지, 고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회고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본문은 단지 유대 전쟁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둘러싸고 오랜 동안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일군의 학자들은 마가복음 13: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하시니라.”와 13:14“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때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의 진술을 ‘사건 후 예언’(vaticinium ex eventu)으로 간주하면서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루살렘이 이미 멸망된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는 입장이다.
반면 다른 무리의 학자들은 마가복음 13장에 예루살렘의 멸망 시점이 아직 미래에 놓여 있다고 보면서 마가복음의 생성 시점을 유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서 찾고자 한다.
마가복음이 유대 전쟁 시기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른바 속사도 시대에 기록된 신약성서의 여러 문서는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멸망의 여파로 말미암은 새로운 시대 상황을 반영하며 그에 대한 도전에서 나온 결과물로 볼 수 있다.
또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제각기 독자적인 종교체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유대-로마 전쟁의 경과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첫 번째 ‘유대 독립전쟁’(AD 66-74)에 관한 중요한 자료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AD 37/38-100)가 쓴 저술들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력한 제사장 가문 출신이며 하스몬 왕가와도 친척 관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Titus Flavius Vespasianus, AD 9-79)의 의뢰에 따라 ‘유대 전쟁기’(Bellum Judaicum)를 저술했다. 물론 이 작품이 로마인의 시각을 좇는 일종의 선전문학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나 요세푸스는 전쟁 초기에 갈릴리 지방의 유대 군대 지휘자로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보도는 신빙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은 당시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 ruled AD 64-66)가 주후 66년 4,5월에 예루살렘 성전 금고를 약탈함으로써 시작되었고(Bell 2,14,6), 이내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대대적인 해방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무렵 반(反) 로마 저항운동의 선봉에 섰던 ‘갈릴리 사람 유다’(Judas der Galiläer)의 아들 메나헴(Menahem ben Judah)을 따르는 젤롯당(Zealot, 熱心黨) 당원들이 군사 요충지 마사다를 점령한다.
또 대제사장 아나니아스(Ananias)의 아들 엘레아살(Eleasar)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해 드리던 제사를 중지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은 예루살렘 제의(祭儀) 공동체가 로마 통치자와 공적으로 결별을 선언한 중대 사건이고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결정적인 봉기의 순간을 뜻한다.
먼저 예루살렘의 유대인 내부에 권력투쟁이 발생한다. 이른바 평화주의자들인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및 헤롯 당원들이 하나가 되어 열심당 젤롯 당원들과 각축전을 벌이나 결국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로마군에 공격을 가한다.
반란군들은 여러 성곽뿐만 아니라 시(市) ‘문서 보관실’에 침입 빚 문서들을 불사른다. 이로써 수많은 빚진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부자들에게 항거하도록 부추겼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Bell 2,17,6). 여기에서 유대 전쟁에 담겨 있는 사회적 동인도 엿볼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전 수비를 위해 로마군이 지키던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와 헤롯 왕궁이 젤롯 당원들 수중에 넘어간다. 또 메나헴이 젤롯 당원들에게 가세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더욱 고무된다. 요세푸스는 메나헴이 ‘마치 왕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 말한다.(Bell 2,17,8) 메나헴과 관련된 메시아 기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메나헴은 헤롯 왕궁의 통치권을 넘겨받는다. 아그립바 왕의 수비대는 항복하고 로마 군대는 주변 성곽으로 후퇴한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스는 살해되고 살려 주겠다는 조건에 항복한 로마 군대도 무참히 살해된다. 그런데 아나니아스의 살해로 인해 젤롯 당원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서 대제사장의 아들 엘레아살은 메나헴과 갈라선다. 어느 날 메나헴이 보석으로 치장된 왕의 옷차림을 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들어서자 엘레아살의 한 추종자가 그를 살해했다.(Bell 2,17,9) 그러자 메나헴의 추종자들은 마사다(Masada)로 퇴각한다.
그동안 로마는 시리아의 행정장관 갈루스(Gaius Cestius Gallus, Ad ?-67)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12 군단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으나 벳 호론(Bet Horon) 근처에서 유대인들의 매복 공격에 말려들어 철저히 괴멸된 상태에서 시리아로 퇴각한다.(66년 10월/11월, Bell 2,19,2) 이 승리로 인해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유대인들도 전쟁에 급속히 빨려들었고 반란군은 로마에 대한 승리에 들뜨게 된다. 이 무렵 봉기를 기념하는 주화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대제사장과 바리새파가 주동이 되어 곧 밀려올 로마군의 대반격에 대비하여 반란군을 조직적으로 규합한다. 그리하여 각 지방으로 지휘관들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유대 역사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를 갈릴리 지방의 지휘관으로 파병한다.
네로(Nero Claudius, AD 37-68) 황제는 용장 베스파시안(Vespasianus, AD 9-79)을 파병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자 한다. 베스파시안은 아들 티투스(Titus, AD 39-81)와 함께 67년 초에 대략 6만 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세 군단(제5, 제10, 제15군단)을 이끌고 시리아에서 갈릴리로 진격한다.(Bell 3,4,2) 47일간 갈릴리를 고수하던 요세푸스는 결국 로마군의 기세에 눌려 67년 6/7월에 항복한다. 이때 요세푸스와 함께 갈릴리를 지키던 젤롯당의 지도자 기샬라의 요한(Johannes von Gischala)은 예루살렘으로 탈출하고, 요세푸스는 로마군으로 전향하여 살아남는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이 살아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베스파시안이 로마 황제가 되리라는 자기의 예언이 적중한 것으로 돌린다.(Bell 3,8,7-9)
주후 67년 말 갈릴리 지방 전체가 로마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로마군은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인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에 처해 있었다. 갈릴리에서 탈출한 기샬라의 요한을 중심으로 젤롯당의 극단주의파가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친 로마적이며 중도적 입장의 예루살렘 지배층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제사장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대제사장을 세웠다.
그 사이에 베스파시안은 베레아와 인근 유대 지방의 중심 지역을 점령한다. 그 무렵 네로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68년 6월 9일), 로마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일단 전쟁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한다. 유대 반란군은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지 못하고 새로운 내전에 휩싸인다.
기샬라의 요한이 성전 지역을 장악했으나 또 다른 과격한 젤롯당 지도자인 시몬 바르 기요라(Simon bar Giora)가 예루살렘의 나머지 지역과 이두메(에돔) 지역을 지배했다. 과격한 두 유대 지도자들이 서로 싸우며 격렬한 내전을 벌이는 동안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루살렘을 떠나 동부 요르단 지방에 있는 펠라(Pella)로 피신한다.
주후 69년 7월 1일에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고 있던 베스파시안이 이집트 주둔 군단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고 로마제국 동부 지역도 그를 황제로 인정한다. 이렇게 제국의 판도를 쥔 베스파시안 황제는 주후 70년에 아들 티투스 장군을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보낸다. 티투스는 로마군 4개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서로 다투던 세력들은 내전을 멈추고 로마군의 공격에 함께 격렬히 대항한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거주민들을 아예 아사(餓死)시킬 목적으로 도시 주변에 돌벽을 쌓아 외부로부터의 식량 유입을 철저히 봉쇄한다. 당시 절박한 상황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표준새번역 개정판, 눅 19:43-44)
안토니아 요새가 70년 7월 말에 점령되고 성전에서 날마다 드리던 제사가 8월 6일로 중단되며 마침내 8월 말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점령되어 불에 탄다. 9월 초에 예루살렘 전역이 로마군에 장악되면서 수많은 거주민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도시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로써 제2 예루살렘 성전시대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헤로데이온, 마케루스, 마사다 세 개 요새에 모여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투스는 이곳의 점령을 당시 유대 지방 총독 루킬리우스 바수스(Lucilius Bassus, ruled AD 71, 73년 마사다에서 전사)에게 맡기고 로마로 돌아가 아버지 베스파시안과 승리의 축제를 연다. 헤로데이온과 마케루스는 곧장 항복하였으나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인 마사다는 젤롯당 지휘자인 엘레아살 벤 야이르(Elazar B. Jair)를 주축으로 하여 격렬히 저항한다.
주후 74년 4월에 새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가 마사다 서편에 토성을 쌓고 공성 망치로 공략하자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알고 유대 반란군 모두가 자결함으로써 마침내 점령되고 만다.(Bell 7,9,1)
2. 유대-로마 전쟁의 결과
로마에 항거한 전쟁에 패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은 상당 부분 황폐화되었으며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와 함께 전쟁은 정치적, 경제적 또한 종교적 영역에도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 정치적 결과
전쟁이 일어나기 전 팔레스타인은 제3 등급에 속한 로마 영토로서 기사 계급 행정관(procurator)의 지휘와 시리아 거주 총독의 감독을 받기는 하였으나 유대 분봉 왕의 지배 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전쟁 후 팔레스타인은 독립된 로마 지방이 되면서 제2 등급의 로마 영토로 격하된다. 즉 ‘유대아’(Judaea)라는 라틴어 공식 이름 아래에 로마 집정관(consul) 혹은 법무관(praetor) 계급의 총독이 직접 다스리는 로마 영토로 바뀐다.
다시 말해 속국의 형태 가운데 부분적이나마 허용되었던 자율권이 완전히 소멸이 되고 이제는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는 땅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한마디로 지도상에서 유대 국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2) 경제적 결과
유대-로마 전쟁은 팔레스타인 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물과 수공업 원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상업과 교통도 불리한 산악 도시인 예루살렘은 전쟁과 같은 위기상황을 겪을 때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마련이다.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대 전역이 황폐화 되고 수많은 유대인이 살해된다. 혹자는 팔레스타인 유대 거주민 가운데 1/3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 같은 엄청난 손실과 더불어 유대 땅이 로마 황제의 개인 소유로 바뀌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 백성의 다수는 자신들 경작지를 잃고 노예와 다름없는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로써 유대 백성의 경제적 삶은 피폐해진다.
(3) 종교적 결과
전쟁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대인의 종교적 삶에도 엄청난 파국을 초래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함으로써 이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의 종교적 삶이 그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붕괴된다. 동시에 성전 제의(祭儀)의 구심점을 이루던 대제사장 직분이 완전히 소멸된다. 이제 유대인들은 성전세금 대신에 로마에 소재한 쥬피터 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 신전에 바치는 ‘피스쿠스 유다이쿠스’(fiscus Judaicus, 로마인들이 개명한 예루살렘의 새 이름)라는 형태의 세금을 굴욕적으로 드려야만 한다.(Bell 7,6,6) 이로써 성전제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과 성전 외에도 유대교의 중심 자치 조직인‘산헤드린’(Sanhedrin, 헬라어로 sunevdrion)이 소멸되었다. 산헤드린은 72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예루살렘에 소재한 유대 최고 재판소이며 행정 기관이다. 최고 책임자인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사두개파 귀족들이 과반수 이상 차지하고 바리새파 서기관뿐만 아니라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장로들로 구성된다.
산헤드린의 중요 역할은 토라(Torah)에 관한 민법적이며 제의법적인 해석과 적용, 재판권,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일, 성전 감시, 명절과 축제일과 관련된 종교적 실천 사항을 규정하는 일 등을 다루는 데 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재판도 산헤드린의 권한에 속한다. 산헤드린의 소멸은 유대인의 자치 정치 조직의 붕괴를 뜻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핵심 구성원인 사두개파의 소멸을 뜻한다.
(4) 예루살렘 교회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인 중에 개인적으로 전쟁에 동참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나 예루살렘 교회(=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과격한 젤롯 당원을 이끄는 메나헴과 같은 인물에 거는 정치적 메시아 대망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을 가졌기에 전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군의 임박한 공격에 처해 있으면서도 내전으로 얼룩진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동편에 있는 펠라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von Caesarea, AD 263-339)는 자신의 ‘교회사’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그리스도인들의 피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계시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 도시를 떠나 펠라로 불리는 베레아의 한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고 또한 동시에 그 거룩한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수도와 온 유대 땅을 완전히 비웠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 범한 수많은 악행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이 불법 자들을 인간사에서 완전히 멸절시켰다.”(제3권, 5,3)
여기에서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 멸망과 유대인들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어지는 진술 가운데 이 심판에 대해 더욱 분명히 말한다. “유대인들이 만민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수난을 가한 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셔서 멸망이 그들을 덮쳐 마치 감옥에 갇힌 듯이 그곳에 갇힌 건 참으로 공정한 일이었다.”
(5)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에 대한 반성
이 같은 유세비우스의 진술은 반(反) 유대적 시각에서 내린 신학적(神學的) 평가다. 이와 달리 유대인 자신들이 예루살렘 멸망에 대해 진술하는 두 권의 책이 전해 내려온다. ‘제4 에스라서’와 ‘제2 바룩서’ 이 두 권의 책은 주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과 성전파괴라는 대재앙에 대한 유대인 자신의 응답으로 기록된 것이다. 두 책은 성서 인물을 가공의 저자로 삼고 예루살렘과 성전 멸망의 결과에 대해 돌아보면서 그 멸망의 이유와 향후 전개될 사건을 묵시록의 형태로 제시한다.
① 제4 에스라서
‘제4 에스라서’(4Esr)라 부르는 이유는 라틴어 성서 불가타(Vulgata)에 나오는 에스라서의 순서와 관련되어 있다. 불가타의 ‘Esdras I’은 구약성서의 에스라서를 가리키고, ‘Esdras II’는 느헤미아서와 동일하며, ‘Esdras III’은 위경 에스라서에 해당이 되는 명칭이다. 이와 구분하여 우리의 묵시록을 ‘제4 에스라서’라 부르게 된 것이다.
4Esr 3:1을 따르면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30년째 되던 해에 에스라가 환상을 보았다고 나온다. 이는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르시아 시대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 에스라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당시에 살았을 리가 없으므로 이 책의 생성 연대는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부터 30년 뒤인 주후 100년경으로 잡을 수 있다.
본래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지지 않고 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체험한 일곱 번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정론(神政論) 문제로부터 시작해 구원에 대한 소망을 다룬다.
- 제1 환상(4Esr 3:1-5:19)
에스라는 시온(예루살렘)이 어찌하여 황폐해지고 말았는지를 묻고 있다. 이에 대하여 천사 ‘우리엘’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뒤 머지않아 다가올 새 시대가 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 제2 환상(4Esr 5:20-6:34)
비슷한 질문이 계속된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유일하며 직접 선택하신 유일한 자신의 백성을 이방 민족에게 넘겨주셨는가를 묻고 있다. 역시 이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나올 뿐이다.
- 제3 환상(4Esr 6:35-9:25):
계속해서 에스라는 이스라엘이 어찌하여 이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말았는가를 묻는다.
- 제4 환상(4Esr 9:26-10:59)
에스라는 슬픔에 가득 찬 여인의 모습의 시온을 바라본다. 그때 그 자리에 한 거대한 도시가 단숨에 들어서게 되는 것을 목도한다. 이 거대한 도시는 비록 지금은 박대를 받고 있으나 찬란한 미래를 약속받은 백성에 대한 상징이다.
- 제5 환상(4Esr 10:60-12:49)
에스라는 바다로부터 솟아오르는 한 독수리를 보게 된다. 12 날개와 3개의 머리(=베스파시안, 티투스, 도미티안)를 가진 이 독수리는 숲속에서 튀어나오는 사자(=다윗 가문 출신의 메시아)에게 잡혀먹힌다. 여기서 독수리는 메시아가 나타나기에 앞서 소멸이 될 네 번째 세상 왕국을 상징한다.
- 제6 환상(4Esr 12:50-13:56)
에스라는 바다에서 솟아 나오는 한 인간을 보게 된다. 자기를 몰아붙이는 무리를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불기운으로 진멸하 다른 평화로운 무리를 자신에게 불러 모은다. 이 인간은 세상의 구원자인 메시아를 상징하며 그가 하나로 통일된 이방 세력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열 지파를 보호한다.
- 제7 환상(4Esr 13:57-14:48)
마지막 환상에서 에스라는 자신이 곧 천상으로 올라갈 것을 예고한다. 이어서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더불어 소멸이 된 성경을 다시 회복시키게 된다. 이 일을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기록자 다섯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모두 94권의 책으로 완성한다. 그중에 24권은 정경에 속하여 공개되나 나머지 70권은 묵시록으로서 비밀이고 오직 현자(賢者)에게만 알려지게 된다. 끝으로 에스라는 천상으로 올라간다.(4Esr 14:49-50)
② 제2 바룩서
제2 바룩서는 시리아어로 기록되었기에 시리아어 바룩서(syrBar)라고 부르며 바룩 묵시록(ApcBar)이라고도 부른다. 칠십인 경(LXX)에 나오는 바룩서(=제1 바룩서)와 구분하기 위해 제2 바룩서라 부른다. 제4 에스라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대략 주후 100-130년 사이에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예레미야 43:6에 나오는 바룩의 이름을 빌어서 익명의 저자가 기록한 것이다. 이 저자는 주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멸망을 반추하면서 이 참담한 사건을 주전 587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 시기에 투영시켜 기록하였다.
한 치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절망의 시기에 유대 백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책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부분 사이에 바룩이 금식하기 위해 물러서는 보도가 나온다.
- syrBar 1:1-8:5
천사들이 성전에서 성구(聖具)들을 제거하고 성벽을 부순 뒤 예루살렘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머지않아 점령될 것을 예고한다. 이는 적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다.(9:1-2: 바룩의 칠 일간 금식)
- syrBar 10:1-12:4
바룩의 탄식의 노래이다.(12:5: 바룩의 칠 일간 금식)
- syrBar 13:1-20:5
바른 일을 행함과 장수함이 이로운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나온다. 또 지나가 버릴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21:1: 바룩의 칠 일간 금식)
- syrBar 21:2-24:1
미래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 것을 완성하시리라는 대답이 나온다. 이어서 12번의 질고의 시간이 예고되며 메시아의 도래와 부활 그리고 종말과 심판이 언급된다. 바룩이 백성을 향하여 말한다.(35:1: 지성소에 있는 바룩)
- syrBar 35:2-46:7
숲 환상과 산에 에워싸인 평야 환상이 나온다. 숲이 삼나무로 바뀐다. 포도나무와 샘에 대한 환상이 계속되고 이 환상들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체험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나온다. 바룩이 백성을 향하여 말한다.(47:1, 2: 바룩의 칠 일간 금식)
- syrBar 48:1-77:26
바룩의 기도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규정하셨음을 이해하게 된다. 바른 일을 행하는 자의 모습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구름 환상과 이에 대한 해석 그리고 감사의 기도와 바룩이 백성을 향해 말한다.(syrBar 78:1-87, 1:9와 반 지파에 보내는 편지)
(6) 유대교 회복 운동과 랍비 유대교의 출현
유대-로마 전쟁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대참사를 초래하였으며 그로 인해 유대교의 대변혁을 이끌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당시 팔레스타인에 존재했던 중요 종파인 사두개파(Sadducees)와 에세네파(Essenes) 및 젤롯당(Zealot黨)에 속한 사람들이 전멸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이들 종파는 커다란 피해를 보고 사실상 소멸이 되고 만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아 황폐화가 된 유대교 전통을 다시 추스를 수 있는 유일한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온건한 노선을 따르던 바리새파(Pharisees)였다. 이들은 유대교 분파 중 가장 많은 수였으며 헤롯 대왕 시대 이후 정치권과는 거리를 둔 민간 경건운동을 주도했던 분파였기에 전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입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훗날 이들은 ‘랍비’(Rabbi = 나의 선생님)로 불리게 되고 나라와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유대교 회복을 위해 전면에 나선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유대교 회복운동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요하난 벤 차카이’(Yohanan ben Zakkai)이다. 랍비 요하난 벤 차카이를 주축으로 얍네/얌니아(Yavneh/Yamnia)에서 일어난 유대교 회복 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 출현을 알린다.
그것은 더 이상 성전과 희생제의에 의존하지 않고 이른바 ‘예쉬바’ (Jeshibah= 토라 연구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출현이다. 랍비 유대교 전통은 중세기를 거치는 가운데 ‘정통 유대교’를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유대-로마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멸망은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향후 초기 교회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다.
(6) 유대-로마 전쟁과 초대교회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시기(대략 주전 60-64년 사이)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빼어난 세 지도자인 바울과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가 모두 순교한다. 소아시아와 로마 사이를 왕래하며 열정적으로 선교했던 바울은 60년대 어간에 순교로 자신의 사역을 마감하고, 48년경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사도 회의’에서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대표자로 활동했던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의 영향력도 끝난다.
이같이 처음 세대 그리스도교 운동을 이끌었던 대표 주자들이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자 당시 그리스도교 운동을 하나로 이어 주던 유기적인 토대도 사라지고 만다. 전쟁과 더불어 이 같은 유기적 토대의 붕괴는 가속화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에 다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전체 교회를 위한 중요성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이제는 각 지역 인물들이 그리스도교를 선도하면서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개별적인 선교 사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바울이 활동할 당시 존재했던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그리스도교와 헬라 그리스도교라는 그리스도교의 양극 체제도 무너진다.
유대-로마 전쟁은 동시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유대 그리스도인)의 희미한 경계를 보다 확실하게 구분 짓는 계기가 된다. 유대인들은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더 이상 유대교에 속하는 무리로 간주하지 않았고 보다 확실한 이단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는 주후 80년대에 이르러 ‘쉬모네 에스레’(Shmoneh Esreh)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의 일상 기도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내용이 첨가된 사실에서 드러난다.(*) 글쓴 이 / 김창선 박사(연세대학교 B.A., 독일 괴팅엔대학교, 독일 튀빙엔대학교 Mag. theol., Dr. theol., 루터대학교 신약학 교수
이스라엘 역사 연대표
기원전(BC, Before Christ)
- 17세기-6세기 성경 시대
- 17세기 족장 시대(아브라함, 이삭, 야곱)
- 13세기 출애굽
- 13-12세기 히브리 민족의 가나안 정착
- 1020년 군주제 성립(초대 왕 사울)
- 1000년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함
- 1060년 솔로몬 왕의 예루살렘에 성전 건축
- 930년 왕국 분열(남 유다, 북 이스라엘)
- 722-720년 앗시리아에 북 이스라엘 왕국 멸망
- 586년 바벨론의 남 유다 왕국 점령. 예루살렘과 성전이 첫 번째 파괴됨.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감
- 536-142년 페르시아와 그리스 지배시대
- 538-515년 바빌론에서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
- 332년 알렉산더 대왕 세계 정복으로 그리스 지배
- 167-164년 마카베우스 반란 성공
- 164-63년 하스모니안 왕조(독립 국가 시대)
- 63년 로마제국 예루살렘 점령(로마 폼페이 장군)
- BC 63년-AD 315년 로마제국 지배
- BC 63년-4년 로마의 임명을 받은 헤롯왕 통치
- BC 4년-AD 100년 로마의 임명을 받은 헤롯 왕가 통치
기원후(AD, anno Domini)
- BC 4-AD 30 나사렛 예수의 사역
- 66-73년 제1차 유대와 로마 전쟁 패배
-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두 번째 성전파괴
- 73년 맛사다 최후 항전 패배
- 132년-135년 제2차 유대와 로마 전쟁(바르 코크바) 패배
- 210년 미쉬나(구전법 모음집) 완성
- 313년-636년 비잔틴 제국 지배
- 390년 예루살렘 탈무드(미쉬나 주해서) 완성
- 614년 신 페르시아 제국 침입
- 636년-1516년 중세시대
- 636년-1099년 아랍의 팔레스타인 지배
- 691년 예루살렘 성전 터에 이슬람 바위사원 건축
- 1099년-1291년 십자군 팔레스타인 통치(라틴계 예루살렘 왕국)
- 1291년-1516년 이슬람 맘루크 팔레스타인 지배
- 1517년-1917년 이슬람 오스만 제국 팔레스타인 지배
- 1564년 유대법전 ‘슐한 아룩흐’ 편찬
- 1860년 예루살렘 교외에 최초 유대인 거주지 미슈 케노트 샤나님 건설
- 1882년-1903년 제1차 대규모 이민(러시아에서)
- 1897년 테오도르 헤르츨,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자 회의 개최하여 시온주의협회의 초석이 됨
- 1904년-1914년 제2차 대규모 이민(러시아와 폴란드에서)
- 1909년 최초의 키부츠인 드가니아와 최초의 근대적 도시 텔아비브 건설
- 1917년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종식시키고 ‘벨푸어선언’을 통해 ‘팔레스타 인에 유대인 민족 조국 건설 보장
- 1918년-1948년 대영제국 팔레스타인 통치
- 1919년-1923년 제3차 대규모 이민(주로 러시아에서)
- 1920년 히스타드루트(유태인공동체기관), 하가나(자위대) 창설, 국가 평의회 구성
- 1921년 모샤브 나할랄 창설
- 1922년 대영제국이 국제연맹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 타인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부여받고 유태 인 이민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촉진하는 임 무를 맡게 됨. 히스타드루트이 유대인 이민 문제를 실질적으로 관리함
- 1924 이스라엘 공업협회 창설
- 1924년-1932년 제4차 대규모 이민(주로 폴란드에서)
- 1925년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스코푸스산에 설립
- 1929년 헤브론 유대인들 아랍군들에 의해 피살
- 1931년 유대인 지하기구인 에첼 창설
- 1933년-1939년 제5차 대규모 이민(주로 독일에서)
- 1936년-1939년 아랍군의 반유대 폭동
- 1939년 영국 백서, 유대인 이민 제한
- 1939년-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유대인 대학살
- 1941년 레히 지하운동 조직, 에첼에서 분리
- 1944년 영국군 소속하에 유대인 여단 창설
- 1947년 국제연합이 팔레스타인에 아랍과 유대인의 개별 국가를 건설토록 결정(아랍 측 반대)
- 1948년-1967년 이스라엘 건국, 독립전쟁, 시나이전쟁
-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포(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5월 14일) 아랍 5개국 이스라엘 침공(5월 15일) 독립전쟁(1948년 5월-1949년 7월) 이스라엘 방위군 조직
< 공휴일과 명절 >
- 매주 안식일(Shabat, 금요일 일몰에서 토요일 일몰까지)에는 대부분의 유대인 상점 및 공공기관이 문을 닫으며 대중 교통수단도 운행 정지
- 주요 공휴일은 아래와 같다.(유대력에 따라 매년 날짜 변동)
유월절(Passover, 4월), 독립기념일(4월 또는 5월), 오순절(Shavuot, 5월 또는 6월), 유대신년 설(Rosh Hashana, 9월 또는 10월), 속죄일(Yom Kippur, 9월 또는 10월), 초막절(Succot, 9월 또는 10월), 하누카(Hanukkah, 12월)(*) 작성자 : 주이스라엘대사관, 작성일 : 2015년 8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