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프레임(John M. Frame)의 개혁주의 신앙 입문
존 프레임(John M. Frame)의 개혁주의 신앙 입문
개혁주의 신앙 입문1
– Introduction to the Reformed Faith –
시작하는 말

내가 1961년 학생으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학생들은 대체로 개혁주의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 중 많은 수가 칼빈주의2 계통의 학교나 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고 심지어 더 많은 학생이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개혁주의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경우가 거의 드물다. 점점 더 많은 학생이 비(非) 개혁주의 배경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왔고 심지어 최근에서야 회심을 경험하고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도 있다. 또 개혁주의 배경 출신의 학생들도 모두 다 요리문답을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이 처음 학교에 들어왔을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리적 입장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대부분 입학 후에야 비로소 그 학생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성경의 권위’와 ‘성경 무오’(無誤)에 대해 강경(強硬)한 입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가 복음주의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견지(堅持)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써 알게 된다. 또 그들은 우리가 탁월한 학문성을 가지고 이 교리들을 설명하고 변호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분명한 신앙의 역사적 교리적 전통을 고수하는 ‘신앙고백 주의’ 학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학생을 이 신학교에서 만나서 매우 행복하다. 나는 우리의 표준적 신앙고백과 거리가 멀던 학생들도 웨스트민스터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다. 그러나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신학교의 교리적 입장에 관한 상당히 기본적인 수준의 몇 가지 가르침을 분명히 제시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신학교 생활 초창기에 개혁주의 신앙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개혁주의 신앙은 여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의 모든 가르침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주고 지도해 줄 것이다. 학생들은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이 논문을 쓰는 목적도 여기 있다.
개혁주의 신앙 서론을 제공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신학교 수업을 시작하면 학생들은 개혁주의 전통 안에 다양성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극단적 칼빈주의’(hyper Calvinism), ‘신정주의’(theonomy),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 ‘증거주의’(evidentialism), ‘조망주의’(perspectivalism), ‘전통주의’(traditionalism), ‘율법폐기주의’(antinomianism)와 또 우리 자신을 지칭하고 서로를 지칭하는 개혁주의에 대한 여러 명칭을 배울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참으로 개혁주의자인지 누가 중요하지 않고 누가 더 중요한지 그리고 누가 참으로 성경적인지 분별하는 것은 늘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여러분에게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보여주고 이 같은 미로(迷路) 가운데서 여러분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만한 약간의 가이드를 제시하려고 한다. 물론 본 논고는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심도(深度) 있는 분석이기보다는 서론(序論)에 불과하다. 심도 있는 분석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육의 전(全) 교과과정(curriculum)에서라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여기서 개진(開陳)하는 교리적 논점들은 조직신학(組織神學)과 변증학(辨證學) 과목에서 더 많이 논의될 것이다. 하지만 이글이 학생들의 학업에서 신학교 시절 초창기에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槪觀)을 먼저 파악하는 데에는 분명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 논고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또 대륙의 유럽 개혁교회의 세 개의 공동 칼빈주의 신앙고백서(three forms of unity) 곧 ‘벨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도르트신조’(Canons of Dort)를 읽을 것을 권한다.
이들 세 가지 신앙고백은 개혁주의의 교리적 입장을 철저하고 정확하고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훌륭한 개요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위대한 경건 작품 가운데 하나다. 나는 또한 코넬리우스 반틸의 ‘신앙변호’(The Defense of the Faith)3에 있는 ‘개혁주의 신학입문 개요’에서 여러분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실질적인 교리적 문제로 들어가기에 앞서 다음 질문을 던져보겠다.
▸ 왜 우리는 성경 외에 신앙고백을 연구해야 하는가?
이것은 좋은 질문이다. 내 마음 같아서는 신조(信條)들이나 혹은 그런 신조들을 따르는 교파가 필요 없으면 좋겠다. 교파(敎派)는 언제나 어느 정도 죄의 결과이고 분파주의 산물이다.4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내게 어느 교파냐고 물을 때 그냥 ‘그리스도인’이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신앙 입장(my religious beliefs)에 대해 누가 묻는다면 그냥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는 더 이상으로 그런 단순한 대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자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실제로 그리스도의 왕국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도 성경을 믿는 신앙인(Bible-believers)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 같은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문화주의자(文化主義者)들 그리고 뉴에이지(New age) 혼합주의자(混合主義者)들이 너무도 만연해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혹 누구를 교회에 초청하기 위해 만날 때는 그가 무엇을 믿는지 먼저 반드시 물어보고 알 권리가 있다.
만약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더 나아가 그에게 “당신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물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해 어떤 신조(信條)와 신앙고백으로 대답하겠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신조는 성경의 가르침에 관한 개인 또는 교회 신앙의 요약(신조)이다. 그리고 그런 요약이 교인과 질문자의 편의를 위한 기록이라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신앙고백은 성경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은 무오(無誤) 하거나 궁극적인 신앙의 표준(標準)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나는 교회에서 신조를 개정(改訂)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인들(교회 회원)과 직분자가 때로는 신조에 대해 이의(異義)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신조는 실질적으로 성경과 동등(同等)한 권위(權威)를 갖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목회자가 개인의 견해에 따라 때로는 신조의 어느 세부적인 사항에 반대하여 가르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신조 절대복종 주의(主義)는 얼핏 교회의 정통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런 견해는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充足性)을 전복(顚覆)시키는 행위이므로 실질적으로 교회의 정통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이라 생각을 한다. 과거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신조 절대복종 주의 하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를 개혁할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신조들 자체는 교회와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같은 신학교도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왜냐면 신학교 역시 후원자들과 학생들 그리고 입학 희망자들에게 신학교 교과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교리를 가르치는지 밝히 대답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놀라운 발견이다.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자기가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성경의 의미를 진짜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증언(證言)하는 말을 들었다. 다른 신학 형식들에는 수많은 종류의 인위적인 성경주해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타당성 없게 절(節)을 나누는 시도, 난해(難解) 구절을 이성적(理性的)으로 바꾸어 설명하려는 시도, 성경 이외의 틀을 본문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 등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해석자보다도 성경 저자(인간 저자와 신적 저자)의 의도(意圖)에 맞게 성경을 매우 자연스럽게 취한다. 다른 신학 체계와 마찬가지로 개혁주의 신학 체계 안에서도 물론 많은 난제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들이 개혁주의의 가르침 하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할 때 성경을 이해하고 확신하는 데 있어 엄청난 진전(進展)을 경험할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대단한 권능으로 말씀하고 그들에게 거룩함을 향한 위대한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이럼에도 많은 사람이 개혁주의 접근을 반대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학교에 등록할 때나 학교를 졸업할 때 개혁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생은 자신의 지성(知性)을 직접 만들어 가야 한다.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는 처음에 비(非) 개혁주의 전통을 가지고 입학한 학생이 개혁주의에 접근할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의 나의 지난 35년간의 교수 세월 동안 내가 알기로는 끝까지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입장을 견지한 졸업생 수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은 학교가 신학생들에게 개혁주의 교리적 입장을 따르도록 강요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교수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학생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접하고 그것을 비(非) 개혁주의 신학과 비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신학연구의 과정을 모두 마칠 즈음이면 우리가 개혁주의 신앙 안에서 기뻐하는 것과 똑같이 학생들도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나는 본 논고에서 다음의 몇 가지를 순서대로 논증할 것이다.
▸ 개혁주의 신앙은 복음주의다,
▸ 개혁주의 신앙은 예정론이다,
▸ 개혁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포괄적 언약의 주되심을 가르친다.
1. 개혁주의 신앙은 복음주의다.
성경을 믿는 개신교 그리스도인이라도 정확히 자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아는 것은 종종 어려운 문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 자체나 심지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조차도 때로는 너무 모호하고 심지어 오도되기도 한다.(위 논의를 보라)
‘정통주의’(正統主義)는 수염 난 사제(司祭)들을 연상시킨다. ‘보수주의’(保守主義)는 종교적인 확신보다는 정치적인 입장 혹은 괴팍한 고집불통(a temperamental stodginess)처럼 들린다. ‘근본주의’(根本主義)라는 용어는 과거에만 해도 어떤 매우 위대한 기독교 학자들에게 적용되던 것이 오늘날에는 반(反) ‘지성주의’(知性主義)를 연상시키는 비난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믿는 모든 개신교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최상의 용어가 (신복음주의와 구별되는) ‘복음주의’(福音主義)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 말 역시 역사적으로 너무 포괄적이고 다소 모호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용어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 성격을 가리키기 위해 루터주의 종교개혁자들이 먼저 사용했고 따라서 오늘날에도 유럽 대륙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이 다소 ‘루터주의자’와 동의어로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어권 세계에서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두드러지게 사용된 것은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그리고 다른 이들의 설교 아래 일어난 18세기의 ‘복음주의 영적각성’의 부흥운동으로부터 유래했다. 웨슬리의 신학은 알미니안주의였던 반면 휫필드의 신학은 칼빈주의였다. 그래서 복음주의운동 자체는 알미니안주의 요소와 칼빈주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그래서 영어권 세계의 많은 교파가 이 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 일찍이 복음주의운동에 영향을 받았던 많은 교파가 19세기에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가 되었다. 자유주의자 찰스 브리그스(Charles Briggs, 1841-1913) 같은 사람을 ‘복음주의’라고 부르던 것이 흔한 일이었다. ‘자유주의적 복음주의’(liberal evangelical)라는 표현은 그 당시에 모순이 아니었다. 비록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영국 신학계를 가리켜 ‘자유주의적 복음주의’라고 종종 말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체로 이 용어가 신학적으로 보수적 입장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수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근본주의’(根本主義, Christian fundamentalism)가 불명예스러운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8세기 때 사용되었던 ‘복음주의’의 의미를 되살려 자기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용어로 받아들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칼 헨리(Carl Ferdinand Howard Henry, 1913-2003), 해롤드 오켄가(Harold John Ockenga, 1905-1985), 하워드 퓨(John Howard Pew, 1881-1972) 등과 같이 신학적으로 처음에는 칼빈주의자였으나 후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신앙의 근본진리’를 고수하는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과 비(非) 개혁주의 그리스도인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an umbrella-term)가 되었다.
고로 모든 개혁주의자가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개혁주의자들이 ‘부흥주의’(復興主義, revivalism)를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개혁주의자들은 부흥운동 배경에서 유래된 이 이름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또 다른 이유는 많은 개혁주의자가 알미니안신학과 칼빈주의신학 사이의 차이점이 너무 크다고 믿어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복음주의’라는 같은 이름으로 묶이기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5을 비롯한 일부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복음주의’가 비개혁주의 개신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의 멘토 반틸의 선례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음주의’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非) 역사적이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라는 단어는 칼빈주의를 포함해 왔기 때문이다. 더 중요하게는 성경을 믿는 개신교인들을 한 데 묶을 수 있는 어떤 용어가 필요한데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명칭이 내게는 ‘복음주의’가 그래도 가장 적합한 것으로 여긴다.6
나의 관점에서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중요한 교리 중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아마 가장 중요한 교리 문제들에 관해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개혁주의 신앙이면서 복음주의라는 입장을 고수(固守) 한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신학의 주요 신앙들은 무엇인가? 내가 정의(定義)하기는 복음주의자란 ‘역사적 개신교’ 신학을 고백하는 이들이다. 그것은 다음 신앙들을 포함한다.
(1) 역사적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 신복음주의와 구별됨)
① 복음주의 신관 :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참되시고, 능력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무(無)로부터 창조하시어 홀로 신앙적 경배와 무조건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궁극적 실체이시다.
② 복음주의 인간관 :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자의적으로 불복종했으며 그로 인해 마땅히 죽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책(罪責) 을 갖게 되었다.
③ 복음주의 기독관 :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다. 그는 (문자적으로, 실제로)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그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는 예언을 성취하셨다. 그는 우리의 죄책과 형벌(刑罰)을 대신 지시고 우리 죄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살아나셨다. 그는 그에게 속한 백성을 모으고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④ 복음주의 구원관 : 우리 죄로부터의 구원은 우리 선행(善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은혜)을 믿음으로 받을 때 주어진다. 구원 얻는 믿음은 그리스도 희생(犧牲)의 제사를 우리 희생의 제사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우리의 유일한 기초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 얻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순종의 동기를 부여한다.
⑤ 복음주의 성경관 : 성경은 신구약 전체가 온전히 다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한다.
⑥ 복음주의 기도관 : 기도는 단지 명상이나 자기 계발(啓發)이 아니라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속자와의 참된 대화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고, 세상에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간구를 한다.
이 신앙의 진술들은 ‘신앙의 근본 진리들’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성경의 핵심적인 복음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개혁주의자’와 ‘복음주의자’가 일치(一致)한다. 나는 개혁주의자들이 “우리는 알미니안주의와는 전혀 공통되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좀 상한다. 사실 우리는 그들과 많은 공통적 성경의 복음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들 대부분이 진심으로 복음을 믿는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이런 공통적인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면에서는 개혁주의자들은 아르미니언주의자들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신앙의 타락에 맞서는 면에서도 그들과 일치한다.
우리는 또 세속 인본주의, 이단(사교),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 그리고 자유주의신학 전통에 대항하는 일에서도 모든 복음주의자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히 알미니안주의 신학이 상당 부분 복음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 그리고 내가 ‘자유주의’라고 할 때는 앞서 언급한 ‘신앙의 근본 진리들’ 중 어떤 것이라도 부인하는 종류의 신학을 의미한다.
(2)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주의’라는 말에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시대의7 현대주의(現代主義, Modernism)뿐만 아니라, 신(新) 정통주의(正統主義) 전통(반틸에 따르면 ‘신현대주의자들’인 바르트와 브루너)과 자유주의신학(自由主義神學, liberal theology, liberal christianity), 과정신학(過程神學, Process theology)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신학(宗敎多元主義神學, The Theology of Religious Pluralism)과 같은 더 최근의 신앙 운동들을 포함 시킨다.
최근의 신앙 운동들이 종종 ‘자유주의’와 대비(對比)되기도 하지만 나는 성경을 믿는 전체 개신교인들을 묘사하는 한 용어가 필요한 것처럼 신앙의 근본 진리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부인하는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는 용어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가장 적합한 용어는 바로 ‘자유주의’이다.
위에서 말한 ‘복음주의’ ①-⑥의 진술과 대비(對比)되는 범주 안에서 ‘자유주의’의 몇 가지 전형적인 전통적 공식들(formulations)을 요약하겠다.
① 자유주의 신관 : 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시지도 않고 죄를 벌하시지도 않으며 기도에 응답하지도 않는 ‘인격(人格)의 피안(彼岸)’, ‘선악(善惡)의 피안’이시다.
② 자유주의 죄관 : 죄란 인간의 외적인 법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타인들과 그 자신의 참된 인간성으로부터의 소외(疏外, alienation)다.
③ 자유주의 인간관 : 예수는 여러 가지 방식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부합(符合)하는 인간이었다. 문자적 기적과 부활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인간보다 더 높은 어떤 실체의 상징일 뿐이다.
④ 자유주의 구원관 :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희생을 통해서나 혹은 구원의 배타적(排他的) 방식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 아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받든지 또는 ‘구원받은 자들’이란 여러 가지 윤리적 프로그램과 정치적 프로그램을 고수하는 자들을 가리킬 뿐이다.
⑤ 자유주의 성경관 : 성경은 오류(誤謬)가 있고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의 글로서 어느 정도 신적(神的)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⑥ 자유주의 기도관 : 기도는 본질적으로 자기 지시적(指示的)이다.
이처럼 ‘복음주의 복음’이 ‘자유주의자들의 복음 거부’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이 둘 사이에서 우리가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특별히 신학 공부 과정을 시작하는 학생들이 직접 이 문제들을 심사숙고하기를 권한다. 지금이 여러분이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의 관계에 대해 이러한 점들을 분명히 해야 할 때다.
▸ 여러분은 성경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가?
▸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위대한 주(主)시라고 믿는가?
▸ 여러분 자신이 죄책 아래에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는가?
▸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교회 출석, 교회 봉사, 지적 교정을 포함하여) 여러분 자신의 공로(功勞)를 신뢰하는가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만을 신뢰하는가?
여러분이 만약 이런 질문들에 결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답해 본 적도 없다면 부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하건대 이제 거기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학교에 왔다고 해서 모두 이런 의미의 신앙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줄곧 그리스도인과 같은 삶의 행동을 해 오고 있었다면 자신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그러면서 만일 개혁주의 신학교가 아닌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다면 신앙의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개혁주의 신학의 전문가가 된다면 자신의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따라서 여러분에게 어린아이같이 되어 인간의 지혜(知慧)를 온전히 신뢰(信賴)해야 한다고 권하는 사람의 말을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2. 개혁주의 신앙은 예정론이다.
어떤 까닭인지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ism)라는 용어는 초창기에 종교개혁(츠빙글리, 부처, 불링거, 칼빈 등)의 스위스 개혁자들과 연계성을 가졌고 마침내 ‘칼빈주의’(Calvinism)와 동의어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예정교리’(豫定敎理, predestination)였는데 이 교리는 종종 다른 복음주의운동 형태들을 거슬러 가장 뚜렷이 구분되는 개혁주의 가르침으로 비추어진다.
1618-1619년 네덜란드 도르트(Dort)에서 모인 국제개혁주의대회는 제이콥 아르미니우스((acob Arminius, 1560-1609)의 주장을 요약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도르트대회(the Synod of Dordt)는 이 다섯 가지에 반대해서 예정교리를 요약하여 ‘칼빈주의 5대교리’(The Five Points of Calvinism)로 불리는 것을 채택했다. 이 ‘칼빈주의 5대교리’는 각 교리의 첫 글자를 따서 네덜란드 꽃 튤립(TULIP)으로 요약했다.
T – Total Depravity(전적부패)
U –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 – Limited Atonement(제한적 속죄)
I –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P –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
그러나 우리는 ‘칼빈주의 5대교리’를 개혁주의 교리체계의 전체적인 요약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칼빈주의 5대교리’가 도르트에서 채택되기 이전 이 5대 논제들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5대교리’는 칼빈주의 전체요약이기보다는 사실상 “아르미니언주의자들이 칼빈주의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약한 것이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 5대교리’가 칼빈주의 전체를 요약한 것이 아니다. 단지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칼빈이 주장하는 성경의 진리 중에 이의(異議)를 제기한 논란(論難)이 되는 주제들에 대한 답변을 요약하고 있다. 나는 그 대회가 만일 개혁주의 신앙의 실질적인 요약을 요구받았다면 ‘벨직신앙고백’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전혀 다른 신학적인 체계를 세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뜨거운 논란이 되는 논점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독교 교리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경우 교리체계는 ‘칼빈주의 5대교리’를 넘는 훨씬 더 그 이상이다. 즉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에 대한 포괄적(包括的)인 이해이며 따라서 포괄적인 세계관이자 인생관이다.(이런 점에서 필자는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 편집자) 나는 다음 단원에서 그것을 요약하려고 한다.
나는 먼저 ‘칼빈주의 5대교리’를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비록 ‘칼빈주의 5대교리’의 중심점이 과장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교리들은 확실히 중요하다. 그리고 종종 오해되기도 한다. 내가 여기서 ‘칼빈주의 5대교리’를 다루는 그것이 여러분이 훗날 배우게 될 조직신학(組織神學) 과정을 구체적으로 예견(豫見)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논의가 적어도 신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여러분에게 올바른 방향으로 신학을 시작할 수 있게 인도해 주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개략적으로나마 ‘칼빈의 5대교리’를 차례로 살펴보자.
(1) 인간의 전적부패(全的腐敗, Total Depravity)
비록 타락(墮落)한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선한 행위(사회를 위해 유용한 행위)를 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롬 8:8) 하는 것과 같은 정말로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中心)을 보신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은 그의 궁극적인 상태에서 볼 때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선함(goodness)이 없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자기 구원(救援)에 스스로 아무것도 기여(寄與)할 수 없다.
(2)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無條件的 選擇, Unconditional Election)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選擇)하실 때 그들 속에 있는 어떤 선한 것이나 기뻐하실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선함 때문에 혹은 심지어 그들이 장차 믿을 것을 예견(豫見)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공로(功勞)가 없어도 단지 전적인 하나님의 호의(好意)로 즉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하신다.(엡 2:8,9)
(3)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制限的 贖罪, Limited Atonement)
이 주제는 ‘칼빈의 5대교리’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주제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명백하게 가르치는 성경 본문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5:15, 디모데전서 4:10, 요한일서 2:2 등에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말씀들에는 다음과 같이 속죄(贖罪)의 ‘보편적 성격’이 있다.
▸ 속죄는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
▸ 속죄는 전 인류의 새 창조다.(recreation)
▸ 속죄는 보편적으로 주어진다.
▸ 속죄는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므로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구원이다.
▸ 속죄의 가치는 모두 사람을 위해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罪)를 대속(代贖)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救援)을 받을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능히 그럴 만큼 능력 있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죄는 단순히 구원을 가능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속죄가 실제로 사람을 구원한다.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위해 죽으실 때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명백한 보편적 속죄 본문 중 하나인 고린도후서 5:15이 이 점을 아주 분명히 밝힌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그리스도는 실제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여기에서 성경의 관심은 ‘속죄의 제한’보다는 오히려 ‘속죄의 유효성’에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제한 속죄’라고 부르기보다 ‘유효한 속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효성은 제한(制限)을 함축하며 따라서 제한은 이 교리의 중요한 측면이다.
(4)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 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의 은혜(恩惠)는 원치 않을 때 언제든지 돌려보낼 수 있는 캔디(candy) 선물상자가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호의(好意)며 마음의 태도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한 번 선택(작정)하시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또 우리에게 중생, 칭의, 양자, 성화, 영화 등 구원의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은 멈추실 수 없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1:6, 에베소서 1:11 약속의 말씀대로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이러한 목적은 분명히 성취(成就)되고야 만다.
(5) 하나님의 성도 견인(聖徒 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만약 여러분이 성령에 의해 거듭나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권속(眷屬)으로 양자(養子)가 되었다면 결코 여러분의 구원은 절대로 상실(喪失)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0:27-30과 로마서 8:28,29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 견인(堅忍, 끝까지 붙들어 주심)은 여러분이 한번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만 하면 자기가 즐기는 모든 죄를 범하고도 여전히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거듭난 성도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내주(內住)와 인도하심을 부정(否定)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선적으로 고백하고는 나중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부인(否認)했다. 이같이 배도(背道)하는 자들 그리고 처음부터 진심으로 돌이켜 그리스도를 받지 않는 자들은 종국에는 그들이 범한 죄 가운데서 죽게 된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에 영접했다면 하나님께서 확실히 여러분을 끝까지 붙들어 주실 것이다. 왜냐면 로마서 6:14의 말씀대로 성령(聖靈)의 지배를 받는 여러분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개혁신앙은 그리스도를 언약의 주로 가르친다.
이제 개혁주의 교리체계의 더 포괄적인 요약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내가 논의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포괄적인 하나님 언약(言約)의 주되심’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하나님은 ‘언약의 주’이시며 그의 창조(創造)와 구원(救援) 사역은 모두 그의 ‘언약의 주되심’으로부터 나온 사역이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메시지의 요약은 ‘하나님은 언약의 주’시라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또 모든 본질적 요소는 ‘하나님의 언약의 주되심’의 외적 역사(out workings)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언약의 주되심’이 성경의 중심이자 또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의 최선의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중요한 논거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언약’이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조차 여러 신학자에 의해 서로 다르게 정의(定義)되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럼에도 개혁주의 신학의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성경적 언약의 본질적 요소를 담고 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은 주(主) 되신 하나님과 그가 주권적으로 부르신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다.8
이것을 근거로 그의 백성은 주님의 일군들(vassals) 혹은 종들이라 불릴 수 있다. ‘언약’에 의해 주는 그분의 권능과 법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그들에게 특별한 축복(몇몇 사례에서는 특별한 저주)을 베푸신다. 고로 ‘언약’을 더 잘 이해하려면 ‘주님의 주되심’을 더 잘 이해해야만 한다.
(1) 하나님의 주 되심의 의미
‘주(主, Lord)’는 무엇보다 신비스러운 ‘야웨’(יהוה, Yahweh, 일반적으로 야웨라고 발음하며 때로는 ‘여호와’ 혹은 영어번역으로는 ‘주’로 번역)라는 히브리 단어를 대변한다. 야웨는 출애굽기 3:14(15절에 있는 야웨의 임재를 주목하라.)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는 말 안에 들어있는 ‘존재하다’(to be)라는 동사와 상당히 관련 있다. 출애굽기 3:12-15 외에도 성경에는 신비스러운 야웨라는 이름의 의미를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몇 개의 다른 본문들이 있다.(출 6:1-8, 20장, 33장, 34장, 레 18,19장, 신 6:4 이하, 사 41:4, 43:10-13, 44:6, 48:12,13 참조)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헬라어 구약성경(70인 역)이 ‘야웨’를 번역한 헬라어 단어 ‘큐리어스’(Κύριος)라는 단어를 취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이름을 취하심으로 ‘야웨’가 구약에서 ‘주’(Lord) 곧 언약의 머리로서 가지셨던 역할을 취하셨다. 내 생각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성경의 증거들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31-59, 로마서 10:9, 고린도전서 12:3, 빌립보서 2:11과 같은 신약의 본문들은 하나님의 주(主)되심의 성경적 개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나는 신론(神論, the Doctrine of God) 강의에서 이 구절들을 상세하게 고찰하여 그 구절들이 어떻게 종합적으로 신적인 주되심의 분명한 개념을 가르치는지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본 논고에서는 단지 내 연구의 결론만 제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러분은 내 결론이 이 구절들을 고찰하는 데 유익하다는 것과 또한 그 구절들을 통해 다음의 개념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보는 데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결론은 성경의 ‘하나님의 주되심’에 ‘통치’(統治), ‘권위’(權威), ‘임재’(臨在) 세 가지 측면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① 하나님의 통치(統治, government)
주(主) 하나님은 세상을 완전히 다스리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실 때 이스라엘을 강한 팔과 전능하신 손으로 구원하셨다. 주는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전제 군주의 군대를 패퇴(敗退)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자연의 힘을 다스리셨다.(출 3:8,14,20, 20:2, 33:19, 34:6, 사 41:4, 43:10-13, 44:6, 48:12,13 참조)
나는 이 성경적 주제를 예정론(豫定論)과 관련하여 이미 설명했다. 또 구원뿐 아니라 자연과 역사의 전(全) 과정이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1:11과 로마서 11: 36은 이 진리를 구체적으로 진술(陳述)하고 있으며, 성경의 많은 구절이 여러 사건을 하나님의 지휘(指揮) 감독(監督)과 연관시킨다. 거기에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심과 같은 구체적인 사실들이 포함한다.
뿐만이 아니라 죄(罪)와 악(惡)도 하나님 계획(計劃)의 일부이다. 이것은 매우 신비로운 것이므로 조심스럽게 진술해야 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인간의 죄(罪)를 하나님의 의도(意圖)로 돌리지 않는다.(창 45:7, 50:20, 삼하 24:1, 10(cf. 대상 21:1), 왕상 22:19-23, 행 2:23, 4:27,28, 롬 1:24,26,28, 9:11-23 참조) 우리는 어떻게 이 사실들을 하나님의 의(義)와 선하심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저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변증학’(Apologetics to the Glory of God, 149-190)에서 어느 정도 상세하게 이 ‘악의 문제’를 논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에 죄(罪)와 악(惡)도 포함 시키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 곧 역사의 전(全) 상황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선한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신다.(창 50:20)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악의 신비에 직면하여 침묵했던 욥처럼 우리도 침묵하는 것이 최선이다.(욥 40:4,5, 42:1-6) 분명히 우리는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들의 ‘자유의지’(自由意志) 개념 등과 같은 사상들에 호소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타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9
그러나 신적인 다스림을 강조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있어 2차적 원인과 인간의 선택 등등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유한한 기관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의 위대한 목적을 성취하신다. 그래서 기적적인 계시(드러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태복음 28:19 이하의 말씀대로 인간의 전도(傳道)와 가르침에 의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또 요한복음 3:16과 사도행전 2:38에 있는 대로 인간의 신앙과 회개 없이는 (적어도 성인들 가운데)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근거하여 복음 전도자들이 결코 ‘결단’(決斷)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적 균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에 의한 2차적 원인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은 2차적 원인에 권한을 부여(附與)하며 중요성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과 대립(對立)하는 일종의 관념적인 반대자가 아니시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피조물에게 거부당하거나 피조물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게 거부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격체(人格體)시며 또한 그의 계획에 따라 세상을 지으셨다. 그럼에도 신앙적인 예배를 홀로 받으셔야 하는 하나님의 권리와 인간의 삶에 대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권리 등 어떤 종류의 신적 특권들이 불신 피조물들에게 거부당하고 있다.
이같이 세상 대부분 사건은 ‘신적 원인’과 ‘인간적 원인’(피조물적 제2 원인)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신적 원인’이 ‘인간적 원인’을 무효화(無效化)시키지 않는다. 이 점에서 알미니안들과 극단적 칼빈주의자들 (hyper-calvinists) 모두 오류(誤謬)가 있다.
② 하나님의 권위(權威, Authority)
권위(權威)는 피조물로부터 순종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권리(權利)를 의미한다. 주님은 최고의 그러한 권리를 가지셨다. 그가 말씀하시면 그의 말씀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이루어진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교리’(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공부에서 보겠지만 ‘언약’은 말씀(words)을 포함한다. 언약의 주(主)는 그의 거룩한 이름,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과거에 주신 말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요구사항과 그의 약속과 경고 등에 관해서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문서로 기록되었다.(성경) 따라서 기록된 문서의 주의 말씀을 범하는 것은 언약 자체의 약정(約定)을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세에게 찾아오셨을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로에게 권위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말씀에 불순종했다.(출 3:3-18, 20:2 이하, 레 18:2-5,30, 19:37, 신 6:4-9, 눅 6:46 이하 참조) 하나님의 권위는 세 가지 의미로 절대적(絶對的)이다.
▸ 하나님은 결코 의심을 받으실 수 없다.(롬 4:14-20, 히 11: , 욥 40:1f, 롬 9:20)
▸ 하나님 언약은 다른 모든 종류의 충성을 초월한다.(출 20:3, 신 6:4,5, 마 8:19-22, 10:34-38, 빌 3:8)
▸ 하나님 언약의 권위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출~신, 롬14:23, 고전 10:31, 고후 10:5, 골 3:17,23)
③ 하나님의 임재(臨在, presence)
주(主)는 한 백성을 선택(選擇)하셔서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분이다.(민 15:41)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출 3:12)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주의 임재(臨在) 즉 임마누엘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놀라운 주제이다.(창 26:3, 28:15, 31:3, 46:4, 출 3:12, 33:14, 신 31:6,8,23, 삿 6:16, 렘 31:33, 사 7:14, 마 28:20, 요 17:25, 고전 3:16 이하, 계 21:22 참조) 그러므로 ‘야웨’는 어떤 다른 민족의 신(神)들과 달리 항상 그의 백성 가까이에 함께 계신다.(레 10:3, 신 4:7, 30:11-14, 시 148:14, 렘 31:33, 욘 2:7, 롬 10:6-8, 엡 2:17, 골 1:27 참조)
하나님은 장막(帳幕)과 성전(聖殿)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문자적으로 항상 ‘가까이’ 계셨다. 훗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가까이 다가오신다. 또 하나님은 그의 전능(全能)하심과 전지(全知)하심 안에서 결코 아무에게서도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행 17:27,28)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온 피조물이 언약으로 그와 결속(結束)되어 있기 때문이다. 클라인(Kline)의 ‘성령의 형상’(Images of the Spirit)을 보라. 또 이 같은 하나님의 임재는 축복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의 백성이 이 ‘언약’을 파괴(破壞)하였을 때는 저주(咀呪)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출 3:7-14, 6:1-8, 20:5,7,12, 시 135:13,14, 사 26:4-8, 호 12:4-9, 13:4 이하, 말 3:6, 요 8:31-59 참조)
나는 이상의 언급한 세 가지 범주를 하나님의 ‘주되심의 속성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하나님의 ‘통치’와 ‘권위’와 ‘임재’는 분리될 수 없다. 각각의 범주는 다른 두 가지 범주(範疇)를 포함한다. 주의 다스리심은 피조물에 대한 그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수행(遂行) 된다.(창 1장) 그러므로 ‘다스리심’은 ‘권위’를 포함한다. ‘다스리심’은 포괄적이며 따라서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주되심의 속성은 다른 두 속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각각은 하나님의 ‘주되심’의 한 부분(部分)이 아니라 하나의 특별한 전망에서 ‘주되심’의 전체를 대변한다.10
(2) 성경의 하나님의 주(主, אדני, 야웨) 되심의 중심성
‘주’(אדני, 야웨)는 하나님의 기본적 언약 이름이다.(출 3:13-15, 6:1-8, 요 8:58, 롬 14:9) 그 외도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이 있다. ‘주’(אדני, 야웨)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언약의 머리’로서 하나님 자신이 친히 칭하신 이름이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이 이름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신다.(출 3:14)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인 신앙 고백들이 발견된다.(신 6:4 이하, 롬 10:9, 고전 12:3, 빌 2:11 참고) ‘옛 언약’의 기본적인 고백은 “주!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이다. ‘새 언약’의 기본적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이시다.”라는 것이다.11
창조와 역사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는 모두 ‘그들이 내가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행해진 것이다.(출 14:18, 왕상 8:43, 시 9:10 등) 주님은 이사야에서 거듭 반복하여 “나는 주 여호와 나는 그라!”(사 41:4, 43:10-13)고 선언을 하신다. “나는 ~이다!”라는 문장들은 우리로 출애굽기 3:14을 연상(聯想)케 한다.
(3) 개혁주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언약 주되심’의 중심성
개혁주의 신앙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주’(אדני, 야웨) 되심을 강조한다. 언약 개념이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언약의 주되심’ 사상 특히 다스리심, 권위, 임재의 요소는 칼빈의 사상에서 매우 두드러졌다. 따라서 칼빈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언약 사상이 철저하게 발전하고 적용된 것과 그 개념이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① 하나님의 다스리심
명백히 개혁주의 신학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엡 1:11)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강조해 왔다. 우리는 이미 예정론 논의에서 이 강조점을 개진했으며 또 개혁주의 신학은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과 함께 2차적 원인들의 중요성도 견지한다. 그러나 숙명론12에 기울어지는 ‘극단적 칼빈주의’13는 때때로 피조물의 결단과 행동의 중요성을 부인했다. 이것은 결코 주류 개혁주의 전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② 하나님의 권위
개혁주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다른 기독교 분파들보다 항상 더 강조해 왔다. 신앙고백을 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법과 은혜’ 혹은 ‘법과 사랑’이 언제나 대립 되며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법)을 지킬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요 14:15,21, 15:10, 요일 2:3,4, 3:22,23, 5:2,3, 요이 6, 계 12:17, 14:12)
물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구원(救援)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지도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유일한 의(義)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개혁주의는 또 ‘구약 율법’의 지속적(持續的)인 규범성(規範性)을 강조한다. 특히 신약의 성도들에게까지 지속적이다. 개혁주의 진영 안에는 신정주의(神權政治, 神政政治)에 대한 논쟁이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구약의 율법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느냐에 대한 논쟁이다.14 신정주의자들과 신정주의를 따르는 개혁주의 진영들 모두 구약의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하고 교화적(敎化的)이고 다스림의 역할을 가진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또 두 그룹 모두 구약의 어떤 계명들이 더 이상으로 문자적으로 구속력을 지니지 않는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왜냐면 우리는 이제 이 계명들이 주어지던 때와 다른 상황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쟁의 쟁점은 어느 계명들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구약의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는 말씀을 믿는다.
특히 예배에서 개혁주의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충족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루터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이 정죄(定罪)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예배에 허용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개혁주의는 성경이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예배에서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것은 ‘개역주의 예배모범’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원리의 구체적 함의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진영 내에서 어느 정도 논쟁이 있어왔다. 어떤 이들은 ‘예배모범’이 오직 시편만을 예배에서 사용하게 하고 악기 사용과 솔리스트나 찬양대를 금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예배모범’이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서 행해진 예배를 본보기로 하는 예배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 분석은 다르다.15 이 엄격한 결론들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된 해석학이 내게는 충분한 설득력이 없다.
또 종교개혁의 원리라는 맥락에서 볼 때 나는 ‘예배모범’의 규범적인 원리가 본질적으로 우리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구속(拘束) 받게 하고 인간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를 허용하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더욱 일반적인 성격의 중요한 점을 제기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되심’의 신학일 뿐만 아니라 ‘인간 자유의 신학’(a theology of human freedom)이기도 하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은 앞서 논의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알미니안주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피조물의 결단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또 자유의지는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종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인간 독재자들의 구속에서 자유 하게 한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적법한 권위들을 친히 제정하셨고 우리에게 이 권위들을 공경하고 복종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권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을 명할 때 또는 그들이 자기들의 사상을 성경과 동등하게 위치시킬 때는 우리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拒絶)할 수 있고 반드시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보다 우선적(優先的)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 언약의 권위가 결코 여러분에게 부담스러운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숭고한 자유다.
그러므로 비록 어떤 개혁주의자들은 내가 판단하건대 전통에 대해 건강하지 못한 존경심을 갖고 있으나 개혁주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전통주의가 아니다. 개혁주의 슬로건은 ‘셈페르 레포르만다’(semper reformanda) 곧 ‘항상 개혁하는 것’(always reforming)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은 항상 개혁된다.(fides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개혁주의 진영 안에는 ‘개혁이 된’(reformata, Reformed)을 강조하는 이들과 ‘개혁을 하는’(reformanda, reforming)을 강조하는 이들 사이에 다소 의견 차이가 있다.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요약된 그대로 성경의 근본원리에 동의하는 ‘개혁이 된’(Reformed)이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더 성경에 일치하도록 추구하는 ‘개혁을 하는’(reformanda, reforming) 것이어야 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어떤 전통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해도 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두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었다. 성경적 교리를 고수하는 데는 보수적(保守的)이었으나 교회의 전통을 비판하는 데는 급진적(急進的)이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어떤 역사적 전통과 일치하게 예배를 드리거나 생각하거나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조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21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라. 또 사도행전 17:11 말씀처럼 여러분이 들은 것이 실제로 사실인지 알기 위해 매일 성경을 상고하라.
개혁주의 신앙이 그 전성기에 심지어 그 진영 내에서조차 인간 전통에 대해 줄곧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은 효과적인 상황화(狀況化)를 위한 자원들을 지니고 있다. 상황화는 우리와 다른 문화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었을 당시와 다른 문화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경적 진리를 제시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개혁주의 설교는 상황화 사역 속에서 역사상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 같은 칼빈주의는 그것이 시작된 스위스 문화는 물론 매우 다른 문화에도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문화, 독일문화, 영국문화, 헝가리문화 등이다. 또 칼빈주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힘으로 억압받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론’(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에서 말한 것처럼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인간 상황들(human situations)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개혁주의다.
이처럼 신학의 발전은 새로운 환경과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그 상황과 환경에 성경을 끊임없이 적용하는 것이다. 신학은 결코 어떤 ‘전통주의자들’이 가정하는 것처럼 단지 과거 세대에 생산된 교리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 작업은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같이 성경의 빛에 비추어 언제나 개혁을 추구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에 매우 진보적 성질의 신학이었다. 전형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단순히 칼빈과 신앙고백의 진술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과 개혁주의 교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환경과 상황에 적용해 나가는 것이다.
17세기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개혁주의 사상에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18세기에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관적인 차원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59)와 다른 이들에 의해 ‘성경신학’에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 즉 성경을 구속사(救贖史)로 분석하는 것이었다. 20세기에는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변증학’과 메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 1922-2007)의 ‘언약과 성경’(The Structure of Biblical Authority)이 있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개혁하는 사역’은 신학이나 교회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들은 종종 하나님이 인류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신 창세기 1:28-30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반드시 개혁되어야(Reformed)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 철학, 저널리즘, 교육학 그리고 정치학에 막대한 공헌을 한 위대한 네덜란드 천재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신학뿐만 아니라 두드러진 기독교 정치학, 예술, 문학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린다.(고전 10:31, 고후 10:5, 롬 14:23, 골 3:17,23)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은 특징적으로 기독교 학교, 노동운동, 비즈니스, 대학, 철학, 과학, 정치운동, 경제제도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게다가 당연히 개혁주의 신학은 개인 구원과 경건(아래를 보라)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 체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언약’은 결국 단지 개개인보다 하나님과 협력적인 관계와 더 관련이 있다.17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하셨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가계와 가정을 택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전형적으로 유아세례(乳兒洗禮)를 믿는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께서 한 부모를 언약에 따라 그의 소유로 주장하실 때 가족 전체를 그의 소유로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행 11:14, 16:15, 31-34, 18:8, 고전 1:11,16)
이같이 우리가 ‘신적 권위론’(the doctrine of divine authority)을 숙고하는 것은 우리로 다른 방향에서18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사들은 인간의 책임을 마치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마지못해 용인하는 것처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그것을 즐거워한다. 인간의 책임은 칼빈주의 중요한 교리다.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의미 있는 체계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법의 규범적 권위를 전제로 한다.19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때때로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행한다고 믿으면서도 왜 삶에 대해서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지 의아해 했다. 실제로 칼빈주의자들은 자기 자신과 사회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혁시키기를 갈망하는 사역자들이었으며 열정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이 놀라운 에너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실천적인 결과다. 칼빈주의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분을 섬기는 노력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주님을 섬긴다. 결과는 그분의 수중에 있지만 우리는 온 생애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가장 위대한 과업에서 그를 섬기는 특권을 가졌다.
③ 하나님의 임재
전성기의 개혁주의 신학은 매우 경건했으며 삶의 매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심을 인식했다. 물론 어떤 개혁주의 사상가들은 그들이 고백하는 대로 ‘주지주의’(主知主義, 知性主義, intellectualism)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인간의 주관성과 내적 성찰에 대한 모든 종류의 기독교적 관심을 폄하(貶下)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 같은 ‘주지주의’는 가장 뛰어나거나 가장 전형적인 개혁주의 정신을 대변하지 않는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로 그의 ‘기독교강요’를 시작하면서 “나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했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 스스로를 올바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리 말하면 주체인 나(the subjective)를 포함하여 인간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이 발견된다.
칼빈은 또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머리에만 스치는 것’(flitting about in the head)이 아니라 ‘마음에 깊이 새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20 “나의 심장(心臟)을 당신에게 신속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바치나이다.”라는 칼빈의 명문장(名文章)은 한 손 위에 심장을 올려놓고 하나님을 향해 뻗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온 생애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왔다. 이 같은 하나님의 실재(實在)에 대한 개혁주의의 강력한 인식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역동적인 순종뿐만 아니라 풍성한 경건을 북돋아 준다.21
결 론
여러분은 이제까지 개혁주의 신앙이 대단히 풍요롭다는 사실을 보았다! 당연히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고 그중 일부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언급했다. 또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교회들 사이에서 여러 다른 강조점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칼빈주의 5대교리’와 ‘은총론’을 더 강조해 왔다. 이러한 강조는 특별히 개혁주의 침례교도들에게서 두드러졌으나 다른 개혁주의 진영들에서도 발견된다.
또 다른 이들(신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리고 다른 이들(카이퍼주의자들, 도이빌드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회 체제에 적용하는 것을 강조해 왔다. 올터스토르프(Nicholas Wolterstorff, 1932- )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개혁주의 교회들(특히 네덜란드 배경의 교회들) 내의 다양한 신학적 사고방식을 구분하는 방식을 제시해왔다. 그들은 경건주의자들(piets), 카이퍼주의자들(Kuyps) 그리고 교리주의자들(docts)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 관계를 추구한다. 교리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신학적 정통주의를 유지하는데 관심 있다. 카이퍼주의자들은 큰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데 관심 있다.22 내가 볼 때 이처럼 개혁주의운동 안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점들을 강조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우리 중에서 완벽히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의 강조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우리가 우리의 처한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이 적합하도록 우리의 신학을 상황화하는 것처럼 다른 상황들은 우리에게 다른 강조점들을 요구한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은사(恩師)들을 주신다. 모든 사람이 정치적 행동, 혹은 정확한 교리 공식, 혹은 개인 전도의 영역에 은사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상황에 가장 필요하다고 보이는 것을 행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이제까지 내가 개관(槪觀)한 개혁주의 신앙의 범주 내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강조점들에 감사해야 하고 그것들을 비판(批判)해서는 안 된다. 비판 보다는 다른 강조점들은 서로 보완(補完)해주고 이해하려고 할 때 서로를 온전하게 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글쓴 이 / 존 프레임 교수(리폼드신학교 조직신학, 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 1939- )
< 미주 >
1. This is a translation of Dr. John Frame’s article “Introduction to the Reformed Faith.” Translator: Yongkyu Park(박용규)
2. 본고에서 나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를 동의어로 사용할 것이다.
3.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5), abridged edition, 7-22.
4.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분파주의에 대한 비난을 보라. 나는 이 문제를 Evangelical Reunion (Grand Rapids: Baker, 1991)에서 논했다.
5. A Christian Theory of Knowledge (N. P.: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9), 194과 여러 곳.
6. 미국에서조차, 복음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복음주의자라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완전 무오성을 부인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완전히 그 유용성을 다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또 나는 복음주의 외에 내 현재의 목적에 맞는 더 나은 용어를 찾지 못하겠다.
7. 두 사고방식 간의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메이첸의 Christianity and Liberalism을 보라.
8. 세대주의와 달리, 개혁주의 신학은 (내 생각에, 다음의 성경에서) 오직 하나의 하나님 백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 백성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축복을 받으며, 그 축복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된 축복이다.
9. 그러나 완전히 성경적인 또 다른 자유의지 개념들도 있다. Apologetics to the Glory of God를 보라.
10. 그러한 “전망적” 관계들은 성경에서 일반적이다. 따라서 나는 내 수업시간에 다른 많은 예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할 것이다.
11. 그러므로, 성경은 개혁주의 신앙이 가르치는 것처럼, “주권 구원”(Lordship salvation)을 가르치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완성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다.
12. 숙명론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일어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견해다. 성경적 기독교는 숙명론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적 기독교는 첫 번째 원인과 두 번째 원인, 그리고 종국적인 결과들의 순차적 관계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틀림없이 성공적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유한한 수단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성공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선택을 받은 자들이 복음을 듣지 않고 구원을 얻는 일은 있을 수 없다.
13. 극단적 칼빈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종종 나는 극단적 칼빈주의자가 ‘나는 충분히 칼빈주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는 특히 Herman Hoeksema와 장로교 개혁교회의 가르침으로 대변되는 역사적 전통과 관련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14.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심포지움, Theonomy: a Reformed Critique, edited by W. Robert Godfrey and Will Barker을 보라. 특히 그 책에 들어 있는 내 글을 보라.
15. 나의 Worship in Spirit and Truth (Phillipsburg: P&R, 1996)을 보라.
16. 그의 책 Lectures on Calvinism을 보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매우 감동적이고, 도전적이며, 삶을 변화시켜주는 책이다.
17. 물론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당연히 개인적인 측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요구하신다.
18.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 속에서 인간의 결심과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19. 아르미니언주의의 “책임”은 우발적인(uncaused) 사건들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의 능력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우발적인 사건들은 미리 정해진 이성적 체계와 아무 연관성이 없는 우연하고, 기괴한 사건들이다. 순수하게 우발적 사건들인 행동을 하는 데에는 “책임이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성경에서의 책임은 자신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전제로 한다.
20. 그러므로 칼빈은 개혁주의 “지성주의자들”에 의해 종종 경시되는 “머리/마음”을 대조시킨 사람이다. 칼빈은 반-지성주의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나 역시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마음”은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성적인 지식의 종류도 있다. 이 지식은 한 사람의 삶을 실질적으로 다스리지 못한다. 칼빈과 성경이 우리에게 주장하는 지식은 이러한 지식이 아니다.
21. 부흥주의에 대한 개혁주의의 태도는 다소 나뉘어져 있다. A. Hoffecker는 그의 경건과 프린스턴 신학자들(Piety and the Princeton Theologians)에서 옛 프린스턴의 교수들이 부흥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여전히 지성적인 면을 강조함과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깊은 주관적인 관계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을 보라. 어떤 개혁주의 사상가들은, 특히 최근에,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감정”과 “주관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이런 사고방식은 전성기의 개혁주의 신학을 대변하지 않는다.
22. 내가 사용하는 용어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운동은 각각 실존적이고, 규범적이며, 상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