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2)/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36)
2. 대륙의 종교개혁
16세기 종교개혁은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대륙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시작되었다. 이들의 개혁은 주로 교회의 개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세기 1,000년간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성경과는 다른 잘못된 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1) 루터의 고민과 갈등
16세기 종교개혁의 시작은 독일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독일 종교개혁의 불을 붙인 사람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루터는 독일의 삭소니 지방 아이스레벤 마을에서 광부였던 부친 한스 루터라는 사람과 그레타라는 신앙심 깊은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성 마틴의 축제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성 마틴의 이름을 따서 마틴 루터라고 이름을 지었다. 태어난 지 반년 만에 그의 가족은 루터가 태어난 동네에서 10킬로 정도 떨어진 만스필트라는곳으로 이사를 했다.
루터는 어린 시절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18세 때 에르푸르트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귀한 성경을 갖게 되었는데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경이었다. 루터는 성경을 직접읽고 큰 감동 받게 되었다. 루터는 대학의 과정을 마친 후 어거스틴파의 수도원에 가입했다. 그가 수도사(修道士)가 된 동기는 자신의 서원 때문이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가다가 무서운 벼락을 만났는데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땅에 엎드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서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부친은 아들과 달리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여 법조계에서 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루터의 이러한 결정은 부자간의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신 뜻대로 수도사가 된 루터는 세상 명예나 욕망을 떠나 하나님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수도원의 규칙을 철저히 지켰고 노동과 봉사에 충실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가 가르친 대로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 문자 그대로 자신의 육체까지도 피가 나도록 학대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루터가 그토록 갈망하는 영적 평안과 안식은 오지 않았다. 그는 갈등의 날들을 보내다가 결심하고 하루에 3명씩 일주일간 21명의 성인에게 매달려 평안을 달라고 기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보름 동안 자지도 않고 금식하며 기도했으나 역시 그가 구하는 평안을 얻지 못했다. 이러한 시련의 날들을 보내는 동안 루터에게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 어거스틴파의 수도원의 수장이었던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ca. 1460-1524)였다.
그는 종종 루터가 있는 수도원을 방문하여 젊은 수도사인 루터와 대화를 나누었다. 스타우피츠가 루터에게 준 영향은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견해였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심판의 주로서 죄를 심판하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지워지지 않는 죄의식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스타우피츠는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위로하시고 용서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2) 루터의 회심
런 말들은 루터에게 점점 새로운 신앙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결국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을 루터는 믿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로마서 말씀이 루터에게 새로운 광명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스타우피츠는 이런 루터를 비텐베르그 대학에 소개하여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게 했다. 거기서 루터는 비로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기쁨을 누렸다.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죄인의 구원은 고해성사나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성경이 바로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말씀임을 믿게 되었다. 루터는 이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온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 그는 대학교수였지만 여전히 수도원에 살고 있었다.
1510년 루터는 수도사로서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일로 로마에 가게 되었다. 로마는 루터에게 선망의 도시였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세상 모든 교회를 다스리는 교황이 있는 영원한 도성 로마는 루터에게 오래전부터 지고의 거룩한 도성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로마에서 발견한 것은 교황의 비행과 고위 성직자들의 타락 그리고 도시 전역에 만연된 죄악이었다. 게다가 수도원의 사제들은 미신적인 신앙에 빠져 무식하기 짝이 없었고 아무도 성직자들을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의 심정을 루터는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로마에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모든 교회와 모임과 그리고 모든 유명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나는 그 모든 장소에 얽혀져 있다는 그 협잡꾼들이 지어낸 모든 거룩한 이야기들을 사실로 믿었다. 나는 미사를 열 번도 더 드렸으며 아니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직 죽지 않은 사실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왜냐면 내가 미사를 드리고 다른 많은 선행을 행하여 그들의 영혼을 연옥에게서 건져낼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이처럼 어리석은 일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거짓말들을 조장하는 것이 교황의 관심사였다.”
로마 방문은 루터의 최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로마에는 소위 빌라도의 계단이 있었다. 예수님이 심문받을 때 빌라도가 서 있던 계단이라고 전해졌다.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맨 무릎으로 그 계단을 올라가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루터는 이를 체험하기 위해 피가 나도록 맨 무릎으로 그 계단을 올라갔으나 그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도리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만 자꾸 머리에 떠 올랐다. 루터는 로마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지옥이 있다면 바로 로마가 바로 그 위에 세워져 있다.”고 했다.
(3) 루터의 거룩한 분노
루터는 비텐베르그로 다시 돌아왔고 그 후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1515년부터 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루터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성 베드로의 성당을 증축하기 위해 유럽의 로마가톨릭 국가들에게 기부금을 헌납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면죄부를 판매하여 성당 건축비를 충당하려고 했다. 라이프찌히에서 온 한 수도사 테젤은 면죄부를 팔기위해 비텐베르그에 와서는 온갖 간교한 계략으로 사람들의 신앙심을 유발시켜 면죄부를 팔아먹었다. 그는 면죄부를 산 사람들의 돈이 헌금함에 땡그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영혼이 벗어나게 된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 면죄부 판매는 종교와 정치가 결탁이 되어 있었다. 당시 제후였던 알베르트는 대주교직과 주교직을 임명받으면서 성직을 받는 대가로 교황에게 막대한 금액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는 그 돈을 푸가가 라는 사람에게 빌렸던 것이다. 푸가가는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알베르트 대주교가 그에게 돈을 갚을 수 있도록 테젤로 하여금 면죄부를 팔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면죄부 판매는 종교와 정치가 결탁이 되어 있었다. 당시 제후였던 알베르트는 대주교직과 주교직을 임명받으면서 성직을 받는 대가로 교황에게 막대한 금액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는 그 돈을 푸가가라는 사람에게 빌렸던 것이다. 푸가가는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알베르트 대주교가 그에게 돈을 갚을 수 있도록 테젤로 하여금 면죄부를 팔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면죄부 판매의 흑막을 알게 된 루터는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그는 드디어 면죄부 판매의 죄악성을 적은 95개조의 항의문을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바로 그다음 날은 만성절(Al Saint‘s Day)이어서 도시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루터의 항의문을 읽고 크게 공감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복사하여 온 독일에 퍼뜨렸고 곧 전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에 분노하고 당황한 교황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마귀 같은 루터를 독일 선제후 프레드릭으로 하여금 교황의 법정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그러나 선제후 프레드릭은 자신이 직접 데리고 가는 것보다 먼저 교황청의 사절을 보내 루터가 자신 입장을 변호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 했다. 교황은 이에 응하여 추기경 카제탄을 독일로 급파하였다. 추기경은 루터를 만나 정중하게 그의 주장을 철회하고 잘못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루터는 자신이 실수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말씀의 승리며 진리의 승리라고 대답했다. 루터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한 추기경은 교황의 은밀한 명령을 받고 루터를 체포하여 로마로 데려가려는 계략을 꾸몄다. 그러나 이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루터는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 뒤로도 교황은 여러 차례 사절을 보내 루터를 굴복시키려했으나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결국에 교황은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루터를 파문시켰다. 1520년 루터는 파문되었고 그의 저서를 불태우라는 교황의 교서가 전달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반대로 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의 교서를 불에 태우면서 “당신이 여호와의 거룩한 자를 괴롭힌 것처럼 영원한 불이 당신을 괴롭힐것이다.”라고 오히려 교황을 비웃고 조롱했다.
루터의 개혁이 심화 되면서 교황의 박해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의 시대에 루터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그를 도울 동역자로 멜랑(PhilipMelanchthon,1497-1560)이 나타났다. 멜랑톤은 루터처럼 과격하지는 않았으나 깊은 학식을 갖춘 사람으로 루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멜랑톤은 루터의 조력자였으나 사실은 그는 독일 종교개혁의 제2인자 역할을 감당했다.(
(4) 개혁의 횃불을 치켜든 루터.
이러한 두 사람의 투쟁 앞에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카알 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 1500-1558)는 로마가톨릭의 충직한 아들이었고 루터의 사건을 보름스(Worms) 시(市) 회의에서 다루자는 교황의 요청을 허락했다. 그는 루터에게 출두명령을 내렸다. 루터의 동료들은 바로 한 세기 이전 존 후스가 당한 예를 기억하고 루터에게 절대
가지 말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루터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귀가 보름스에 있는 집들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많다 할지라도 나는 가겠노라.”하며 분연히 나섰다. 그가 보름스를 향해 떠나면서 부른 찬송이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이었다.
1521년 4월 16일 루터는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름스 시가(市街)를 행진했다. 국가와 교회 권력에 진리로 맞선 한 사람의 용기를 사람들은 보고 있었다. 루터가 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모습은 장관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는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의 형제들과 그 옆에는 제국의 여섯 선제후와 24명의 공작 그리고 8명의 후작이 앉아 있었다. 이 모든 사람은 세상 권력의 대표자들이었고 모두 로마가톨릭 교회와 동맹세력들이었다. 거기에 교회의 세력들도 합세했다. 30명의 대주교와 수도원장과 7명의 대사 그리고 교황 대사들과 자유시의 대표들 등 모두 206명의 유명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사회를 맡은 존 에크(Johann Eck, 1486-1643)는 루터 앞에 책을 쌓아 놓고 그것들이 루터의 저작들인지를 먼저 물었다. 루터는 책을 다 살펴본후 자기의 저작이 맞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에크는 이 책 속에 담겨진 로마가톨릭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교리들을 취소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루터는 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이에 회의는 다음 날로 연기가 되었다. 루터의 마지막 대답이 다음 날로 연기된 것이다. 루터는 이 대답의 여부에 따라 생사가 갈라지게 될 것이다.
다음 날 루터가 황제 앞에 나와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틴어와 독일어로 지구촌을 흔들 만한 연설을 하였다.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하여 조정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 양심을 거슬리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나는 여기에서 있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루터의 비타협적인 이 같은 발언과 태도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황제는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떠났다. 황제는 다음날 신하들에게 “어떻게 일개 수도사가 옳고 천년 간 내려온 로마가톨릭의 증거가 잘못되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약속대로 루터의 신변을 보호해 주었으므로 회의장에서 자기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4월 25일 루터는 보름스를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비텐베르그로 돌아갔다. 그러나 루터는 곧 제국의 파문령을 받았다. 그는 범법자로 선고되어 누구든 그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사람은 황제를 반역하는 죄를 범하게 되며 이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그로 가는 도중 한 골짜기를 지날 때 갑자기 숲속에서 무장한 기병들이 나타나더니 루터를 사로잡아 바르트부르그 성으로 데리고 갔다. 이 일은 루터의 친구들과 선제후 프레드릭이 루터를 피신시키기 위해 꾸민 사건이었다.
루터는 기사(騎士)의 복장을 하고서 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루터가성에 머무는 동안 이루어낸 업적은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원어로 편집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이었다. 루터는 멜랑톤의 도움을 받아 교정을 끝내고 독일어 성경을 최초로 출판했다. 그리고 1522년경부터는 독일서점에서 민중들이 누구나 쉽게 이 성경을 구입해 볼 수 있 게 되었다. 그 후 루터는 1534년에 구약성경 번역도 마쳤다.
바르트부르그에서 바쁜 10개월을 보낸 후 그는 비텐베르그에서 학생들의 소요가 있었다는 급보를 듣고 프레드릭의 허락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친구들은 그를 반겼다. 그런데 이번의 사건은 제후들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반란이었다.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들의 혁명에 연민의 심정으로 그들에게 호의적이었으나 피를 흘리는 잔인한 전쟁으로 돌변한 현장을 보면서 평소의 태도처럼 제후의 지지자가 되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봉기로 인해서 개혁도 많은 방해를 받게 되었다.
루터는 25년간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가장 잘 알려지고 교리개혁의 지침서가 되었던 저작은 루터의 ‘대소요리문답서’이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진리를 정리한 교리서였다. 루터의 ‘대요리문답’ 은 목사와 교사들을 위한 지침서였고, ‘소요리문답’은 주일학교나 가정에서의 학습자들을 위한 교리서였다.
그의 신학적인 대표작은 ‘의지의 속박’(De Servo Arbitrio, 1525)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는 에라스무스의 인간의 의지가 구원에 어느 정도 공헌할수 있다는 입장을 반박한 글이었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주로 어거스틴의 견해에 서 있었다. 루터의 수많은 성경주석 가운데서 명작으로 알려진 주석은 ‘갈라디아서’이다. 여기서 루터는 자신의 은혜의 교리를 누구나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갈라디아서의 복음을 주해하였다. 루터는 1546년 자신의 고향인 아이슬레벤에서 운명했다. 그는 운명시에 이렇게 세 번이나 기도했다. “아버지여! 주님의 손에 나의 영혼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고 설교했던 그리고 개혁의 진원지였던 비텐베르그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4) 루터가 남기 개혁의 유산
이제 루터의 개혁 파장으로 동요된 독일교회와 사회의 전체적인 개혁의 흐름을 살펴보자. 이것은 루터가 제국의 파문령에 의해 외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외치게 되었던 사건들이었다.
1521년 보름스 회의 이후 루터는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황제 칼 5세는 교황의 편에 서서 개혁을 반대했다. 그런데 당시 정황은 칼 5세가 독일에서 일고 있었던 종교개혁에만 관심을 쏟을수 없었다. 제국은 광대하고 여러 가지의 다양한 문제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는 통치 기간 터키인들과 프랑스와의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그의 관심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황 가운데서 1529년 황제는 독일의 스파이어(Speyer) 회의를 개최하여 개혁자들의 복음적인 운동에 대해 일시적인 호의를 취하였다. 그러나 3년 후에 스파이어에서 또 다른 종교회의가 열렸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황제는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고 교황에게 무조건 복종할것을 제후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제후 중 6명과 도시들이 이에 반대 하여 신앙양심선언을 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이라 의미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Protestatio)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530년 아우그스부르그에서 소집되었던 국제회의에서 황제는 서로 상이한 점들을 토론하여 제후들과의 화목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때 멜랑톤이 대표로 참석하여 루터의 도움을 받아 개신교의 입장을 정리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이를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Augsburg Confession, 1530)라 부른다. 이때 처음으로 라틴어가 아
닌 독일어로 신앙고백서가 낭독되었고 참석자들은 이 말을 알아듣고 ‘이신칭의’의 진리와 성경의 위대한 교리들을 듣고 감동하였다.
이 회의는 연장되었는데 황제로부터 1531년 4월까지 개신교도들의 입장을 재고하도록 종용받았다. 그러나 황제의 압력은 먹혀들지 않았다. 제후들은 도리어 황제의 결정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다지면서 슈말칼트(League of Schmalkald, 1531) 동맹을 결성했다. 이는 최초의 개신교 동맹이었다. 이렇게 개신교가 도리어 동맹을 결성하자 이를 이용하여 칼 5세는 “자신은 터어키와 프랑스와의 전쟁 중이었기에 제후들과의 전쟁을 원치 않음으로 로마가톨릭도 동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로마가톨릭도 개신교 동맹에 대항하여 독일 내의 로마 가톨릭 동맹을 결성했다. 양 동맹은 얼마간 냉전 상태에서 불안한 평화를 1546년 루터의 죽음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당시 개신교의 유능한 군인 이었던 모리스가 황제에 맞서 전쟁을 하였고 황제가 거의 사로잡힐 정도로 위경에 처하기까지 했다. 그때 개신교의 세력은 제국의 황제를 위경에 몰아넣을 정도로 증폭된 힘을 이용하여 1555년 유명한 아우크스 부르크 강화조약(宗敎和議, The Peace of Augsburg, 1555)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 중에 제후들이 자기 백성들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다고 선 언함으로 개신교 제후 하 백성들은 개신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개신교의 형태는 다른 개신교가 아닌 독일 루터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문이 나중에 30년 전쟁(三十年戰 爭, Thirty years’ War, 1618-1648)의 도화선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 결과로 독일은 로마가톨릭의 교황청으로부터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또 이후 계속될 유럽의 종교개혁 교두보가 확보된 것이었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 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