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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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의 종교개혁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생애
-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가난한 광부 아들로 출생,
-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505년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 견습 수도사 기간을 거친 후, 1507년 신부가 되었다.
- 1512년 신학박사, 비텐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고, 1525년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 1546년 2월 사망했다.
(2) 루터의 종교개혁 동기
- 교회의 부패(성직매매, 음란, 지방교회의 착취로 농민들 경제 불안)
- 교황의 세속화(교황의 권위 상실, 주교의 부도덕한 생활)
- 위클리프, 훗스의 종교개혁론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응
-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로 인한 루터의 격분
(3) 루터의 종교개혁의 결과
- 율법적 종교에서 복음적 종교로 전환
- 의식적인 신앙에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전환
- 교권주의에서 자유주의로 개혁
(4) 루터의 종교개혁 과정
교황 레오 10세(Pope Leo X, 1475-1521)는 베드로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알브레히트에게 위임했다. 알브레히트는 다시 도미니크 수도사인 텟젤에게 면죄부 판매를 위임했다. 텟젤은 루터가 살고 있던 삭소니(Saxony)에 들어가 면죄부를 팔고자 했으나 삭소니의 프레데릭 선제후(選帝侯)는 텟젤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텟젤은 삭소니와 이웃 주의 경계선에 와서 면죄부를 판매했고 많은 삭소니 사람들은 면죄부를 사고자 모였다.
이에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대학 교수였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의 된 토의주제를 비텐베르그교회 정문에 게시했다. 왜냐하면 다음 날 11월 1일이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로서 비텐베르그 예배당 창립기념일에 많은 사람이 오기 때문에 그 기회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터가 계시한 95개 조항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면죄부는 하나님의 징벌을 해결할 수 없다.
- 면죄부는 인간의 죄를 사하지 못한다.
-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면죄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
-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신다.
- 95개 조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신득의(以信得義)이다.
이 95개 조항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생각하고 붙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면죄부에 대해 토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인쇄되어 전 유럽에 삽시간에 퍼졌고 로마 교황에게까지 소식이 들어가게 되었다.
1518년 2월 도미니칸파가 루터를 교황청에 고발했다. 그해 7월 루터에게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소환장이 전달됐다. 그리고 8월에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 체포령을 내렸다. 루터는 삭소니공화국 선제후 프레더릭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했고 프레더릭은 루터의 신변을 보호했다. 이런 와중에 1520년 루터는 다음과 같은 3대 개혁논문을 발표했다.
-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고함(To the German Christian nobility)
- 교회의 바빌론 포로(Babylonion Captivity of the church)
-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On the Liberty of the christian)

이 논문의 내용은 교황 레오 10세 개인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부패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을 시정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의 논문에서 41개의 이단 사상이 있다고 하여 60일 이내에 모두 다 불사르라고 명령을 했다. 그러나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이에 대항하여 비텐베르그에서 로마 가톨릭교회 법규집, 도덕 철학서, 교황의 대교서 등을 불태웠다. 그러자 교황은 1521년 1월 3일 루터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문(破門)하고 이단자(異端者)로 낙인을 찍은 다음 독일 황제 찰스 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 1500-1558)에게 즉시 루터를 체포해 처형하라고 했다.
1521년 4월 16,17일 루터는 신변 보호의 약속을 받은 다음 웜즈(Worms) 회의에 출두하여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다.(Here I stand God help me.) 이때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주장에 감명을 받았다. 그 후 루터는 1522년 2월 최초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했고 1534년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완역했다. 루터의 3대 종교개혁 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Sola Scriptula!(오직 성경)
- Sola fide!(오직 믿음)
- Sola Gracia!(오직 은혜)
이 세 가지를 뒷밭침한 원리는 만인(萬人) 제사장설이다. 루터는 또 로마 가톨릭의 7성례 중에서 세례와 성찬 외에 모두 폐지했다.
(5) 루터의 신학 사상
- 성찬의 화체설을 배격하고 성체 공재설(共在說, 성찬 때에 그리스도의 몸이 임한다는 설)
-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기독교 신앙
- 믿음으로 의롭게 됨(以信得義)
- 신자는 모두 제사장(萬人祭司長)
- 성경의 권위가 교황이며 교회와 교회 전통보다 우월하다.
- 하나님은 성령으로써 실제로 또한 완전히 임재하심을 확언하신다.
2.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1)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생애

스위스의 빌트하우스에서 출생하여 15 세 때 인문주의 학자인 뵐플린에게 공부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무스, 루터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바젤에서 뷔텐바흐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사죄적인 죽으심, 로마 가톨릭 속죄표(贖罪票)의 무가치 등을 배웠다. 1506년 글라우스 교구에서 목사 생활을 했으며, 1519년 쮸리히 목사가 되었고 성경강해를 시작했다. 1531년 로마 가톨릭의 연합군에 의해 자행 된 두 번째 전쟁인 카펠전투에서 두 아들을 잃고 자신도 전사(戰死)했다. 로마 가톨릭은 쯔빙글리의 사체(死體)를 여러 토막으로 잘라서 화형에 처한 후 그 재를 뿌렸다.
(2) 츠빙글리의 사역 및 사상
1523년 공개 대토론에서 ‘67개 조항’(67 Articles)라는 개신교 신학의 요약을 발표함으로써 복음주의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67개 조항’의 내용은 복음의 권위는 교회에 있지 않고 성경에 있다는 것이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면죄부는 아무런 효력도 없다. 성경을 한 법전으로 여겨서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지 않은 것은 모두 반대하였다. 로마 가톨릭 미사(Mass)의 희생적 의미를 부인하며 연옥의 존재, 성도의 중보기도(죽은 자에 대한) 등을 부인했다. 성찬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배격하고 기념설(記念說, Memorialism)을 주장했으며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임을 강조했다.
또한 신부의 독신(獨身)을 반대하고 교직자의 결혼을 옹호하였다.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구제에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의 죽음 후 후계자인 블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의 인도로 츠빙글리 파는 칼빈파와 합류하였다.
(3) 성찬에 대한 츠빙글리의 입장
- 성찬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와 영적인 교제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빵만 주고 잔을 주지 않는 것(로마 가톨릭)은 잘못 된 것이다.
- 성체(聖體, 로마 가톨릭에서 일컫는 성찬의 떡과 잔 )를 숭상(崇尙)함은 물질을 우상화 하는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 미사(Mass)에 희생(犠牲)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 한 번으로 유효하고 단회적(單回的)이기 때문이다.
- 성도의 참여가 없는 미사(Mass)는 무효이다.
1525년 츠빙글리는 성찬에서 주님과 성도의 영교(靈交)로 빵과 포도주 모두를 사용한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성찬의 의미를 기념(記念, memory, symbol)으로 여겼다.
(4) 츠빙글리의 신학
-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의해서만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수 있다.
- 신학의 기본은 기독론 중심이다. 그리스도 중심주의란 실재보다 규범적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인간이 영적 투쟁으로 자신을 깨달음이 아니라 이지적인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결과이다.
- 어거스틴처럼 예정론은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을 주장했다.
< 참고, 개혁자들의 성찬에 대한 이해 >
- R. Catholic :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
- M. Luther :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
- U. Zwingli : 기념설(記念說, memory symbolism)
- J. Calvin : 영적 임재설(靈的 臨在說, Spiritually Presence)
3. 칼빈의 종교개혁
(1)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생애
-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 동북부 노용(Noyon)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 부친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다가 부친의 사후 1523년 8월 14세로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 1536년 27세 때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 윌리암 파렐의 권고로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540년 네덜란드에서 피난 온 한 과부와 결혼했다.
(2) 칼빈의 사역과 활동

- 1537년 제네바 시민들의 도덕적인 타락을 막기 위해 ‘교회 치리에 관한 조문’이라는 책을 만들어 성찬, 아동교육, 결혼에 관한 철저한 교육을 실시했다.
- 1538년 너무 엄격한 개혁운동으로 제네바 시민들의 반대를 받아 제네바 시에서 추방당했다.
- 독일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망명 중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회자로 3년간 사역하였고, 이곳에서 ‘기독교강요’ 증보판과 ‘로마서 강해서’와 ‘사롤레토 반박문’ 등을 출판했다.
- 1541년 제네바 시민의 요청으로 3년 만에 제네바 시로 돌아왔다.
- 제네바 시를 교회 국가로 조직하기 위해 칼빈은 여러 가지 일에 착수했다. 교회의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 교사로 나눴고, 목사 5인, 장로 12인으로 제네바 시 평의회를 조직했다.
- 1559년 유명한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여기서 제네바 시 개혁은 절정에 이르렀다.
- 제네바 시에의 모범적 교회 정치체제, 제네바대학, 칼빈의 성경해석 등은 전 유럽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칼빈의 신학과 사상
- 율법 : 인간의 가슴 속에 공포를 심어주지만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주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 인간이 영적인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 신앙 :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영적인 교만 없이 통회, 감사 기도로 하나님께 나오는 선택받은 신자들의 가슴에 성령께서 믿음을 심어 주시 는 것이 신앙이다.
- 성찬 : 성찬과 세례만이 성례로서 주님이 세워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영적 임재설을 주장했다.
- 교회 직분 : 로마 가톨릭의 교직제도는 비성경적이다. 감독, 장로로 불리는 신약 교회의 설교자, 지도자들은 기독교 회중의 동의 아래 성직을 담당해야 한다.(교회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 교사로 주장)
- 하나님의 섭리 : 하나님은 모든 실제(reality)를 공용하시고, 사소한 일의 발생도 아시고, 자연계와 영계의 모든 것을 감독 하신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무력한 존재이고 피조물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을 측량하지 못한다.
- 예정 : 하나님의 주권신학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로 예정하셨다.(이중예정, Double Predestiantion) 이는 숫자가 많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주관적 선택이다.(신 7:7,8)
- 교회 : 단순한 기관이나 개개 신자의 사회적 집단이 아니다. 역사의 전 과정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들을 위해서 나타나고(이들은 언약된 성약의 백성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주님의 성례가 집행 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4) 칼빈주의 5대 강령
-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 인간의 전체 성질은 아담의 타락의 영향을 받는다.
- 조건 없는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택함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최고 의지와 그의 주권에 의해서이다.
- 제한된 구속(Limited Redemption or Atonement) : 그리스도는 택함을 받은 자를 위해서만 돌아가셨다.
-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regenerating grace) : 택함 받은 사람은 모두 구원 받는다.
- 택함 받은 자의 궁극적 구제(Perseverance of the Elect or regenerate) :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 받는다.
4. 종교개혁이 교회와 국가에 끼친 영향
-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시킴 : 국가는 교회로부터 간섭 받지 않고 세속 국가로서 독립을 얻게 되었다. 교회는 국가로부터 간섭 받지 않고 독립 존재로 있게 되었다.
-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고 영국,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국가와 왕실이 연합되어 있는 감독주의 개신교(Epscopal protestant church)를 받아들였다.
- 개신교는 교황 중심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 중심으로 변했다. 따라서 기독교인 한 사람의 한 사람의 인격과 자율성이 인정 되었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지체이다.
-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되었다.
- 성직자는 지배 계급이 아니라 성도와 동일한 위치에서 직분만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 회중들이 교직자 선택의 권리를 갖게 되었다.
- 기독교의 직업의식이 바뀌었다.(profession –> vocation, 부름 받았다.)
- 인간의 평등사상과 만인 제사장설이 인정되었다.
5.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 비교
신학중심 | 신학의 출발 | 성찬 | 국가와 교회 | |
루터 | 그리스도 | 이신득의 | 성체 공재설 | 교회는 국가에 복종 |
츠빙글리 | 하나님의지 | 이신득의 | 기념설 | 주장 없음 |
칼빈 | 하나님 | 하나님 절대주권 | 영적 임재설 | 교회와 국가 분리 |
(*) 정리 요약 / 정은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