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칼빈의 성경의 권위 이해와 적용
종교개혁자 칼빈의 성경의 권위 이해와 적용

시작하는 말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교회 개혁에 관여하면서부터 교회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요소를 중심으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율법에 규정된 대로 ‘적법한 예배’로 우리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존중한 그 동일한 태도로 21세기의 다양한 문제 앞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며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오늘 개혁신학도의 사명인 것이다.
성경의 권위(權威)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너무나도 분명하여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칼빈에게는 하나님 외에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가 없다. 성경은 칼빈에게 문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었다. 따라서 칼빈이 아주 구체적인 문제들까지도 성경이 최고의 권위라는 것을 어떻게 적용(適用)하고 실행(實行)했는지 그것을 살펴보고 우리도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필자는 이 글에서 칼빈이 ‘교리’와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성경을 존중하며 신뢰했는지를 드러내도록 하겠다.
1. 교리에 대한 성경의 권위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성경에 위반(違反) 되는 요소만 교회의 전통에서 배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좀 더 철저하게 전개해서 신약성경 유형(類型)의 원시(元始) 기독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루터보다 훨씬 더 성경의 권위를 보다 더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생각하였으며 그 가르침에 종속(從屬)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바로 이런 입장에서 먼저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말하는 성경적 직분(職分)들을 교회에 회복시키려고 했다. 이 때 직분 자들의 평등성에 대한 강조는 성경의 원리를 중시하는 칼빈의 큰 강조점이었다. 디도서 1:5을 주석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때에는 사역자들 안에 그 누구도 다른 이들에 대해 권위를 가지지 않고 더 높지 않은 평등성이 있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칼빈은 이런 교회 직분의 회복도 성경대로 충실하려고 했다.
그리고 칼빈이 교회의 치리(治理)를 강조하는 것도 성경의 권위를 따른 것이었다. 그는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몸과 주의 만찬이 황폐되는 것을 방지하고 교회 안의 다른 사람마저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며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서 교회의 치리가 중요하다고 했다.(Inst. 4.12.5)
그러나 이런 교회의 치리를 강조할 때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습을 반대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사제적(司祭的) 치리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또 한편으로는 재세례파 사람들의 여러 가지 훈련도 반대했다. 이는 그들이 성경적으로 바르지 않은 것들을 바르지 않은 태도로 시행하려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례전(聖禮典)에 대해서도 칼빈은 신약성경에 세례와 성찬 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여러 의식(儀式)을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셨다는 암시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칼빈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칠 성례 가운데서 세례와 성찬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배제(排除)한 이유는 신약성경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칼빈은 교부들의 견해를 언급하기도 했다. 초대교회 옛 교부들도 세레와 성찬 외에는 다른 의식을 성례라고 부른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교부들의 여러 주장들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만 의미 있고 존중할 것으로 언급했다. 이 같이 그는 교부들의 해석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는 하는 것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언급했는데 이는 칼빈이 성찬 문제뿐만이 아니라 교부들의 다른 견해를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교부들의 주장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은 언급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세례 양식(樣式)도 칼빈의 기본적 견해는 신약성경의 단순한 관습만 그대로 유지하고 수세기 동안 이 관습에 덧붙여진 장식적 요소들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린도전서 11:23-26의 성찬 제정의 말씀과 이에 더하여 나오는 27-29절을 강조하면서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고 성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이들에게는 경고함으로 회중들은 사도들이 명한 바와 같이 스스로를 살피라는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성도들로 하여금 천상(天上)의 영광중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마음을 둘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이 같이 칼빈은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만 근거하여 다스려져야 한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성경의 가르침 특히 신약성경의 가르침이 신약교회의 모든 것에 대한 지침으로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 아주 실제적으로 우리들에 대한 지침이 되어야만 실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보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2. 예배에 대한 성경의 권위
칼빈에 의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祭祀)에 근거한 자신의 삶과 예배를 통해 자신의 존재 전체와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드림이 된다.(Inst, 4.18.13) 예배를 이렇게 이해한 칼빈은 교회 개혁에 관여하면서부터 교회의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요소를 중심으로 정비해 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칼빈에 의하면 참된 경건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규정된 대로의 적법한 예배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Inst. 1.2.2)
그 중 하나가 예배에 회중찬송을 도입한 것이다. 이를 위해 칼빈은 자신이 시편을 운율에 맞게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했고 당대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던 마로(Clément Marot, 1496–1544)의 운율적 번역을 사용해 찬송하기도 했다. 칼빈은 이미 제네바의 ‘1537년 규례’(the Article of 1537)에서 “시편은 우리 심령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찬양으로 그의 이름의 영광을 부르며 높이며 열심 있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Klaas Runia, “The Reformed Liturgy in the Dutch Tradition,”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100)
1539년 칼빈은 프랑스어 ‘시편찬송’ 초판을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18편의 시편(이전에 사용된 시편 46, 25, 36, 91, 138편과 마로에 의해 운율적으로 재번역 된 시편 1,2,3,15,19,32,51,103,114,130,137,143)과 3편의 영창(canticles)이 실렸고 이 중 7편은 칼빈이 친히 번역했다고 한다. 이 시편 찬송들이 후에 ‘제네바 시편찬송’(the great Genevan Psalter, 1562)의 모태가 되었다.
1543년판에는 49편의 찬송이 실렸는데 여기에는 이전에 사용되던 그러나 개정되고 보강된 30편의 시편과 시므온의 노래, 십계명 찬송, 사도신경 찬송, 주기도문 찬송, 천사들의 찬송 그리고 성찬 전후(前後)에 부를 찬송 등이 실렸다. 그리하여 시편찬송은 그 당시 핍박받던 위그노(Huguenot)들의 특성이 되었다.
물론 개신교회는 예배 시에 시편만을 찬송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후대의 규정적 원리는 시편만 고집하고 나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지나치게 나간 것은 문제이지만 “시편의 하나님 중심적 경건의 풍성함이 개신교적 헌신을 특징 짖도록 했다.”는 말은 참된 것이다.(Clowney, Presbyterian Worship, 118)
1538년 제네바에서 축출된 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프랑스 피난민 교회를 목회 하면서 1538년 11월에 처음으로 그 피난민 교회의 성례에 수종(隨從)들고 그 뒤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을 시행했다. 그리고 1541년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을 때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Martin Bucer, 1491-1551)에 의해 작성(作成) 되고 사용된 예배 식순(式順)을 채용하여 제네바교회의 예배 식순을 제안하고 실천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 형식을 취하여 그 상당한 부분을 빌어서 썼다.”(John M. Barkley, The Worship of the Reformed Church [London: Lutterworth, 1966], 17) 이는 그가 1542년에 출판한 ‘초대 교회의 관례에 따른 기도 형태와 성례 집례 방식’에 나타나 있는 순서의 제안에 잘 나타나고 있다.(W. D. Maxwell, The Liturgical Portions of the Genevan Service Book [New York: Oliver and Boyd, 1931], 114-15)
그러므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를 따르면서 중세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존재하게 된 요소들과 의식(儀式)들은 거의 모두 다 버렸지만 “예배 의식의 전통적 형태를 조심스럽게 유지했다.”는 하게만의 말에 우리는 상당히 동의할 수 있다.(Hageman, Pulpit and Table, 16) 그 때 기준이 된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예배 원리였다. 이처럼 칼빈은 성경에 나타난 요소만을 취하여 ‘예배 순서’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 같이 예배 전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예배 중 선포되는 설교에 대해서도 칼빈은 매우 성경에 근거한 입장을 표명한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목사의 설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만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돕기 위해 성경 해석자들과 성경 교사들을 우리들에게 더해 주셨다. 바로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천사가 아니라 빌립을 선택해 보내신 것이다.”(Comm. Acts 8:31)
이같이 교회에 보내진 성경 해석자와 성경교사가 목사이다. 칼빈은 목사의 직무가 근본적으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임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목사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천상적 교리’를 선포할 때 그는 바로 ‘하나님의 입’이라고 언급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목소리가 울리 퍼지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입과 혀로 자신의 말씀을 낮추신 것은 하나님의 은사요 (동시에 설교자의) 특권이다.”(Inst. 4.1.5) 칼빈이 이 같이 성경해석과 말씀 선포를 높여 말한 것도 결국 성경의 권위가 칼빈의 생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 준다.
3.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경의 권위
사실 칼빈의 궁극적 관심 중의 하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 살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그의 ‘기독교강요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그 양을 확대하여 간 것도 “기독교 교리의 끊임없는 조직화가 되기보다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기독교인으로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안내서가 되기를 바랐다.”는 곤잘레스의 관찰은(Gonzalez, 235) 정확한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고 그것을 세우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아주 잘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은 로마 가톨릭 추기경 사돌레트(Sadolet, 1477-1547)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 사상을 자기 자신에게 국한 시켜서 자기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세우는 것이라는 일차적인 동기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건전한 신학이 못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자기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거나 거기서 안주하는 것 이상으로 올라가는 데 있습니다.”(Calvin, Reply to Sadolet (LCC, 22: 228), cited in Gonzales, 236, n. 173)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방식을 오직 성경에서 정확하고 바르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율법의 제3의 용법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율법의 교훈적 또는 신학적 용도를 율법의 ‘정당하고 가장 중요한 용도’로 여긴 루터나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에 비해 칼빈은 율법의 이 제3의 용도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용도로 언급하고 있다.(Inst. 2.7.12)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을 비롯해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교훈적인 뜻은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삶의 규범(rule of life)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칼빈은 분명히 한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가변적(可變的)인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가르침 받고 있는 것이다.”(Inst. 3.8.4) 그런데 “율법의 규례들은 (중략) 하나님의 뜻을 다 포함하고 있고”(Inst. 1.17.2), “하나님께서는 율법 가운데서 당신님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다.”(Inst. 2.8.59)
따라서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에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있으며(Comm. Jer. 9:15),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당신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제시하셨고 요약하자면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을 제시하신 것이다.”(Comm. Isaiah 8:20)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그 정신에 따라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며 그런 바른 해석 작업의 좋은 토대를 제공하고 그런 해석의 예와 그에 근거한 삶의 규범을 잘 제시하는 작업을 해주었다.
이런 해석에 의해서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칙이 그저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님이 잘 드러난다. 칼빈은 율법을 잘 해석하여 그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살 것을 보여 주고 그것을 신약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그에 대한 ‘제일 좋은 해석자인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Inst. 2.8.7)
칼빈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정신 자체’요(Comm. Acts. 7:30) 그 생명이니(Comm, 2 Cor. 3:16) 성경이 말하듯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목표, 마침)이기 때문이다.(Inst. 2.7.2; Calvin, Comm. Rom. 10:4) 그리하여 칼빈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기괴한 규범을 도출(導出)시키지 않고 부정적으로 표현된 것으로부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함의까지를 이끌어 내어 제시한다.(Inst. 2.8.8)
마치는 말
이상의 논의는 칼빈에게 있어 매우 자명한 것을 드러낸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 성경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실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칼빈의 이런 성경에 대한 존중을 실제로 부인하기는 매우 어려우므로 칼빈이 그 당시에 이런 존중을 성경에 나타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칼빈의 이러한 전통은 개혁파 신앙고백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1559년 ‘프랑스 신앙고백서’에서는 성경을 ‘우리 신앙의 분명한 규범’(sure rule of our faith)이라고 하였고, 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는 ‘이 무오한 규칙’(this infallible rule)이라고 했고, 1566년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에서는 ‘신앙과 사랑의 규칙’(the rule of faith and love)이라고 하고, 1647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에서는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칙’(the only rule of faith and obedience)이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는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온전한 권위를 잘 드러낸 전통인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기독교회에서 조차도 즉 실천적 교계와 신학계에서서 조차도 성경에 대해서 칼빈과 같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견지(堅持)되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데에 있다.
성경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유행처럼 일어나 칼빈과 같은 성경에 대한 소위 ‘비판 이전적’(以前的, pre-critical) 접근(接近, approach)를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여기서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칼빈을 그저 교회사 주제로만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시대에도 살아 있는 교회 목소리로 여기는 것인지 나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관심으로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였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잘 드러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1960년대 이후 나타난 바르트주의(Barthesian) 적인 칼빈 해석에 반하여 칼빈의 성경을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잘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작업이 여기에서 멈춘다면 객관적으로 칼빈의 성경관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잘 드러내 놓고도 그것은 16세기적 태도로만 치부해 버릴 위험성이 없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16세기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면서 기독교 전반에 잘 드러낸 칼빈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도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칼빈을 16세기에 속한 인물로만 머물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시기의 칼빈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을 존중한 그 동일한 태도를 가지고 21세기의 다양한 문제 제기 앞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며 그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개혁신학도들의 사명이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오늘날에도 인정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칼빈을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작업이 매우 드문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오늘날 급증하고 있는 형식적으로는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격을 인정하되 기능적으로 그것을 부인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배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 바르트주의적인 성경비평을 용인하면서 성경의 하나님 말씀됨을 주장하는 것이다.
- 성경 비판적 태도를 용인하면서 정경으로서의 최종 본문인 성경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요구하는 정경적인 접근이다.
- 성경의 하나님의 객관적 말씀됨을 주장하면서 해석학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며 실질적으로는 해석학적인 상대주의를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의 성경해석은 모두 다 제한된 해석이므로 궁극적으로 바른 성경해석에 대한 궁극적인 말을 할 수 없다는 성경해석학적 궁극적 의미 유명론의 주장 등이 시사하는 실질적 성경 무시의 태도를 배제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는 바이다.(*) 글쓴 이 / 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출처 / 2009년 9월 23일자 기독교개혁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