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공동학술대회 루터와 칼빈의 성경해석

The complete Bible of Martin Luther was first printed at Wittenberg by Hans Lufft in 1534. Martin Luther translated it from Latin–the language of scholars and clergy–into the German vernacular.

PART 1

2017,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공동학술대회

루터와 칼빈의 성경해석

– 시편 해석을 중심으로 –

시작하는 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15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맞아 종교개혁의 유산을 재발견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가 중세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유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성경번역(Bible translations)과 성경해석(Biblical hermeneutics)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성경번역과 성경해석은 종교개혁의 원천(源泉)이자 동력(動力)이 되었다.

그들의 성경번역과 성경해석을 통해 발전시킨 종교개혁 신학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잘 들어난다. “교회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할 지를 결정한다.”1)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와 단절하고 새로운 교회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입장은 루터와 칼빈 모두에게서 발견 된다.2)

본 논문에서는 종교개혁의 원천이자 동력이 된 루터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성경해석의 특징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자는 먼저 종교개혁 이전의 성경해석을 고찰한 후 중세교회의 성경해석과 다른 루터와 칼빈의 성경해석의 특징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또한 성경해석의 그런 특징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시편 51편에 대한 주석(註釋)의 예를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끝으로 이상의 고찰을 통해 발견된 추리와 칼빈의 성경해석의 특징들을 오늘 한국교회에 어떤 시사점(示唆占)을 제공하는 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1. 종교개혁 이전의 성경해석

성경해석(聖經解釋, interpretation of the Bible)은 본문의 의미를 ‘현재화’(現在化)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고대교회가 보여주는 성경해석의 두 가지는 ‘알레고리적 성경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과 ‘유형론적 성경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이다.

먼저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은 헬레니즘에서 발견된 문학적 해석 방법에서 가져온 것이다. 호머(Horner) 작품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문학적 해석의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어떤 구절에서 단어들이 말하는 바에 대한 확정 즉 ‘문자적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고,

둘째, 낱말들 자체는 단지 기호로서 작용하면서 그 낱말들이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묻는 ‘영적인 의미’ 즉 알레고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었다.3)

이 두 가지 성경해석의 목적이 지향하는 바는 본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현재화 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으나 현실화의 강도는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알레고리적 해석에서는 성경본문과 해석자 간에 존재하는 역사의 간격(間隔)이 제거 되고 그 간격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용해된다.  

이러한 상이(相異) 한 목적을 위한 두 가지 해석방법이 실제에서는 상이한 방향으로 그 과제를 수행한다. “문자적 의미의 의도는 문자의 의미를 보존하는 것인데 반해 알레고리적 해석의 의도는 본문에서 하나의 새로운 의미 즉 법적인 의미를 찾는다.”4) 이 두 가지 성경해석방법은 “이 의미가 본문으로부터 도출되었는가 아니면 그 본문에 덧붙여졌는가?”라는 질문에 의해 구분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유형론(類型論) 성경해석은 유형(Typos)과 대립유형(Anti-typo) 간 역사의 간격을 잘 인지(認知)하는 해석인데 유형의 의미가 대립유형 안에서 자신의 성취를 발견한다는 것이다.5) 다시 말해 대립유형 안에서 유형에서 겨냥된 의미가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형론 성경해석은 구약에서도 발견된다. 호세아 2장에 새로운 구원이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 설명되거나 이사야서에 새로운 탈출이 출애굽의 모티브(motive)를 가지고 선포된다.(사 43:14-21, 51:9-11, 52:12 등)6) 

특별히 유형론 성경해석은 구약성경의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 해석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구약의 인물 요셉이나 여호수아를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는 유형(類型)으로 해석한다던지 성막구조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적용하는 것에서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고대교회에서는 성경해석에 관해 안디옥학파(School of Antioch)와 알렉산드리아학파(School of Alexandria) 사이에 격렬하고 긴 논쟁이 있었다.7)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표적인 오리겐(Origenes, 185-253)은 삼중(三重)의 문자적 의미를 주장했다. 사람이 몸(肉), 정신(情神), 영(靈) 이렇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듯이(오리겐은 삼분설을 주장) 문자도 ‘몸과 같은 의미’(역사적-문자적 의미), ‘정신적인 의미’(도덕적-윤리적 의미), ‘영적인 의미’(알레고리적-신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Augustin. 354-430)은 이런 해석을 이어받아 알레고리해석을 긍정하는 기독교의 삼중 덕목 즉 믿음, 사랑, 소망에 기초한 삼중의 문자적 의미를 주장했다. 문자적 의미는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을 가르치고, 도덕적 의미는 우리가 사랑하고 마땅히 해야 할 내용을 가르치며, 알레고리적 의미는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디옥학파를 대표하는 루시안(Lucian of Antioch, 240-312)이나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407)은 역사적-문자적 성경해석을 장려했다. 그들은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본문에다가 본질에서 벗어난 의미를 추가(追加)하는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이런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경해석의 논쟁 속에서 중세교회는 오리겐과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성경의 다중적인 의미 이론을 수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삼중(三重) 문자 의미론은 사중(四重) 문자 의미론으로 확대된다. 사중(四重) 문자 의미론은 다음과 같은 시적 표현을 통해 잘 나타난다. “1)문자적인 의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가르치고, 2)알레고리 의미는 네가 믿어야 할 것이 무언인가를 가르치고, 3)도덕적 의미는 네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4)상징적 의미는 네가 힘쓰고 소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친다.”8)

성경해석에서 중세교회가 강조한 또 다른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성경해석이 신앙의 전승(傳承)과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세시대 성직자들 다수기 성경을 거의 모르던 상황에서 교부(敎父)들의 가르침을 재현하고 성경에서 교회의 가르침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졌다.9) 다음과 같은 성(聖) 빅토르(Hugh of Saint Victor, 1096-1141)의 말은 중세교회의 성경해식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먼저 네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 지를 배우고  그 후에 성경으로 가서 네가 배운 그것을 성경에서 찾아내라.”10)

2. 루터의 성경해석

루터의 성경해석은 그의 신학의 근간(根幹)을 이룬다. 그는 그 누구보다 말씀에 기초한 신학을 전개했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가 가능하다. “그의 신학은 성경을 해석하는 하나의 시도에 불과하다. 그것의 형태는 근본적으로 주석이다.”11) 더 나아가 그는 성경이 신학과 삶의 전(全)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성경의 상실은 곧 교육의 상실이요, 언어의 상실이며, 삶의 상실을 의미한다.”고까지 말했다.12)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성경을 그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아보자.

(1)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

그는 결국 중세의 성경본문에 대한 사중(四重)의 문자적 의미와 결별한다. 그렇다고 루터의 입장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처음에는 중세의 전통 안에 있었다. 시편을 해석할 때 그는 특별히 어거스틴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어거스틴 시편주석을 자주 인용했다. 또 니콜라스(Nicholas of Lyra, 1270-1349) 설교집도 그의 중요한 참고문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루터는 성경해석에서 사중(四重) 문자 의미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첫 번째 시편강의는 아직 종교개혁 신학이 무르익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13)

그의 제1차 시편강의는 1513년-1515년에 150편 전체를 강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시편강의를 위해 1513년 여름 시편 인쇄본(Textausgabe)을 출판했다. 이것은 그의 시편강의 때 교수와 학생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불가타 성경(Vulgate Bible) 본문에 루터가 히브리어 원문을 개인적으로 덧붙인 것이다. 강의 때는 시편 본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면 이때 학생들은 설명을 받아 적었다. 단어 설명은 본문의 행간에 기록하고 상세한 것은 본문의 양 여백에 기록했다. 이것을 루터의 ‘Dictata super Psalterium’라고 불렸다.14)

제1차 시편강의에서 중세의 성경해석 방법들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1519-1521년 제2차 시편강의 때는 달라진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Diet of Worms)에 소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1편부터22편까지 강의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지만 그때부터 루터는 히브리어 성경 본문을 보고 해석했다. 그가 사용한 히브리어성경 본문은 프랑스 인문주의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obus Faber Stapulensis, 1455–1536)이 편집한 ‘5개역 대조 시편’(Le Quincuplex psalterium)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중세의 성경해석 전통과 거리를 두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했다. 그가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성경 원어에 대한 지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 그는 1540년 ‘식탁발언’(Tischreden, Table Talk)에서 문자적 의미가 생명. 위로, 힘, 교훈, 예술이라고 평가하며 다른 것은 기만이라고 했다.16) 그리고 루터에게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는 성경이 그 단순한 문자적 의미에 따라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포함하는 것이었다.17) 이런 문자적 의미 어의(語義)의 강조와 성경이 성경 자체를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중세교회의 성경해석 전통과 결별하고 성경해석의 새로운 장을 연 성경해석의 혁명으로 평가된다.18)

(2)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해석

루터가 이해한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다음 명제로 잘 설명된다. “신약은 구약의 해석이다. 구악은 본문이고 신약은 그 해석이다.”19) 여기서 루터가 말한 신약성경 속의 구약성경은 각 본문의 개별적인 구절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문에서 구약성경과 전체 해석으로서 신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그는 구약과 신약의 특징에 대해서도 말한다.20) 그는 구약성경은 하나의 법전으로서 “사람이 무엇을 행해야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말한다. 이 외에도 구약성경에는 사례(事例)들이나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법들이 어떻게 준수되고 또한 위반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선약성경은 복음 또는 은혜의 책이라고 루터는 말했다. 하지만 루터는 선약성경에도 은해에 대한 교훈 외에 지상의 삶을 제어하는 계명들이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도 율법 외에 약속과 은혜에 대한 전술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루터의 성경관을 종합하면 구악성경과 신약성경에는 모두 율법과 복음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에게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루터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첫째, 율법으로서 구약은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약속과 표상으로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는 것이었다.21)

루터는 구약의 역사와 제도로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많은 표상들을 보았다. 그는 이런 구약성경 해석을 ‘영적해석’이라고 지칭했다.22) 루터의 ‘영적해석’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안에 있는 예언의 의미를 말한다. 이는 본문에 의해 묘사된 역사적 상황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알레고리 해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구약의 역사와 제도가 그 자체를 넘어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게 하는 깃은 바로 이 예언의 능력인 것이다.23)

루터는 그리스도를 향한 영적해석을 시도하면서도 낱말의 문자적 의미를 결코 소흘 하지 많았다. 왜냐하면 그 낱말들이 기술한 역사가 또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구약성경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24)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약속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것들을 이미 성취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실존적-실천적 성경해석  

루터의 주석과 강의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학문과 경건의 조화(調和)에 있다. 루터는 가장 최근의 학문적 통찰을 사용하여 성경본문을 신중하계 설명하고자 했고 그리고 나서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신앙의 삶에 적용시켰다.25) 그가 이런 실존적-실천적 성경해석을 지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수도사(修道士) 신학의 성경해석의 전통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루터는 성경 이해를 지식의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 양식에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그런 면에서 그의 성경해석에서 ‘윤리적 해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26)

루터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의 삶’(coram deo)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식과 의향(意向)적 차원에서 이해한 것이다.27)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의 사실을 인지(認知)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28) 이런 점에서 루터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성경적 이해가 다름을 분명히 했다. 철학적 인간 이해는 인간 존재를 정태적(停態的)으로 이해하고 추상적으로 질문하는 반면 성경적 인간 이해는 개인적 연관성이 중요하다.

루터에 의하면 “새 노래로 노래하라.”고 할 때 ‘새 노래’는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시 33:3) 루터는 “새로운 사람이란 은혜를 통해 얻어진 사랑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이며 내적인 인간을 의미한다.”29)고 했다. 루터가 이런 인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성경해석은 실존적-실천적이었다. 루터는 성경 안에서 인간의 모든 현실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그는 성경 안에 은혜를 받는 것과 버림받는 것, 잘못과 용서, 불안과 해방, 환란과 즐거운 찬송, 고통과 슬픔, 의심과 희망, 죽음과 삶,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등의 인간의 다양한 현실이 뒤얽혀져 있음을 본 것이다.30) 

이런 인간의 원초적 경험과 감정들은 수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다양한 현실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요, 그것을 통해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 새로운 힘과 통찰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루터의 성경해석은 언제나 상황적(狀況的)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 즉 강해설교, 강연, 명상들과 갈은 일들이 언제나 자신이 처한 시대적 물음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성경해석에는 실존적인 위로와 시련 사이의 치유적인 갈등이 놓여있다. 이런 성경해석을 토대로 루터는 자신이 ‘다윗의 법칙’이라고 칭한 기도, 명상, 시험의 세 가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31)

그의 실존적-실천적 성경해석의 한 가지 예를 ‘의’(義)에 대한 그의 이해와 적용에서 설명할 수 있다.32) 루터는 시편 여러 곳에서 심판(審判)과 의(義)가 평행법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세 가지 차원으로 의(義)의 의미를 설명한다. 의(義)가 1)알레고리로는 교회요, 2)종말론적으로는 (완성 된) 승리하는 교회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지만 3)이것이 윤리적인 의미의 차원도 있음을 말한다. 루터에게 윤리적인 차원의 의(義)의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는 “하나님, 나를 심판하소서!”(시 43:1, 82:8, 95:13, 98:9)라는 외침을 “하나님 내가 당신을 통해 영(靈) 안에서 구원을 얻을 있도록 나에게 진정한 겸손과 육체의 죽음을 주소서!”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3. 루터의 시편 주해(註解)

(1) 루터의 시편 이해  

루터의 시편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작은 성경’이라는 그의 말에서 요약된다. 그는 시편이 성경의 다양한 주제들을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루터는 시편을 ‘지상의 성도들의 모범이 되는 책’으로 생각했다. “시편은 그리스도를 위한 책이기도 하면서 그리스도의 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33) 시편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예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책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많이 인용하시고 사용하신 많은 기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책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시편은 루터가 성경 중에 가장 사랑하는 책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시편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았다.

(2) 루터의 시편 51편 해석

시편 51편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1)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2)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 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 죄인으로서의 인간  

루터에게 칭의론(稱議論)은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조항’으로 여겼다.34) 루터의 칭의(稱議, Justification, Rechtfertigung) 개념은 그의 시편연구에서 출발한다. 특별히 시편 51펀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루터는 시편 51편을 세 번에 걸쳐 다룬다. 1차 시편강의(1513년-1515년)에서 그리고 7개의 참회 시(1517년) 그리고 3차 시편강의(1532년 6월 10일-8월 6일)에서이다.

특별히 시편 51편이 주목받는 이유는 여기에서 루터의 인간론(人間論, anthropology)과 칭의론(稱議論, justification by faith)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루터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의 삶’으로 이해했다. 그는 시편 51편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그는 시편 51편을 통해서 단순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의의를 두지 않고 “믿는 자 개인이 고백해야 할 바가 무엇이냐?”를 보여주는 데 강조점을 두었다. “당신께 오직 당신께 내가 죄를 지었으며 당신의 눈에 이 악을 행하였습니다.”(시 51:4)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가 외적인 선행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루터가 여기서 말하는 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죄가 아닐 수도 있는 외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루터는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죄인 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없음이 암시되고 있다.

루터는 다음 구절도 주목한다. “보소서, 내가 죄악 중에서 태어났고 죄 중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배었나이다.”(시 51:5) 루터는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이 ‘내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5절은 “내가, 내가, 내가 – 죄 중에 잉태되었나이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가 이런 진술을 통해 의도하는 바는 죄인에 대한 어떤 이성적인 논증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기 고백이다.35) 

죄인으로서 이러한 자기 고백의 의미는 17절에서도 확인된다. “하나님의 희생 제물은 상한 영입니다. 하나님, 상하고 부서진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멸시치 않으실 것입니다.” 이 구질에 대해 루터는 “겸손하고 상한 심령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경멸하신다. 왜냐하면 이런 마음은 바로 존귀는 하나님께 돌리고 죄는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36)  

시편 51편에 나타난 죄인으로서 인간의 모습은 그의 표제어 관찰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7개의 참회(懺悔)의 시(詩)를 다루면서 참회의 시의 의미가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상황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따라서 시편 51편의 진술들도 단지 다윗 한 사람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했다.37) 그는 또 이것이 어느 특정한 범죄 사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인 죄 즉 인간의 본성적 타락에 관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처럼 그의 시편 이해에는 특별히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이 죄인으로 서 있는 인간의 실존이 중심 주제로 자리하고 있다.38)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죄인인 인간에 대비되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구절은 4절 후반 절이다.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이 의로우시고, 당신께서 판단하실 때에 당신이 깨끗하실 것입니다.”39) 이것은 “오직 당신께 내가 죄를 지었으며 당신의 눈에 이 악을 행하였나이다.”라는 시인의 고백과 대조 된다.

루터는 이 구절이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상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판단되거나 정당화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40) 그분은 영원하고 지속적이며 진실하고 결코 변치 않는 의로움 자체이시며 모든 것에 대한 최고의 심판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의로우시다.”는 진술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 안에서 정당하고 진실하신 분으로 인정되고 그러한 분으로 알려졌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루터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와 관련시켜 설명한다. “모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약속된 은혜와 죄 사함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예수께서 직접 증언하신 것과 같다.”(눅 24:46,47)41)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루터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을 허용하지도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자기를 참되다고 하는 사람이다. 제3차 시편강의의 이 구절에 대한 설명에서 루터는 인간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42) 하나는 다윗과 함께 하나님 한 분만이 정의롭고 참되고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은 맹인이 아니며 자신들 안에 빛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루터는 후자의 사람들을 스콜라주의(Scholasticis) 자들과 동일시한다.

7절에 대한 해석에서도 그리스도의 희생과 믿음에 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그러면 내가 정결하게 될 것입니다.” 루터는 모세와 율법의 규정에 따른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비유일 뿐 하나님이 의도하신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직 진정한 염소의 피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뿌려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43) 

“나를 씻기소서. 그러면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이 진술에 대한 설명에서도 율법에 의해 손과 발을 외적으로 씻는 것은 사람을 희게 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이것이 내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무엇이 참된 지혜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외양적 모습을 통해 잘못 인도한다고 말한다. 루터의 이런 진술은 단지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로 내적으로 뿌리시며, 씻기시며. 활동하시고, 말씀하시며, 돌보신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 이외에 아무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44)

이 같은 시편 51편 해석은 그의 시편강의 서문에 이미 잘 나타나 있다. 그는 ‘Scholion’(from Ancient Greek, σχόλιον, comment, interpretation)에 대한 시편강의 서문에서 표제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서언’이라고 잡았다. 그리고 요한복음 10:9의 ‘나-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는 유대교의 역사적 해석과 그것을 따랐던 몇몇 주석가들과 결별하고 그런 입장을 ‘육체적인 이해’라고 평가했다. 그는 ‘역사적 의미’와 ‘예언적 의미’를 구별했는데 이때 ‘예언적 의미’는 항상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모든 예언과 예언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다른 것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곳을 제외하고”라고 그의 강의 서문에서 밝힌다.(WA 3, 13, 6f; 55 I, 6, 25/8, D.) 45)

‘루터의 탑 체험’(Martin Luther’s Tower Experience)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것은 수도원 탑에 있는 한 방에서 로마서 1:16 읽기를 통해 이신칭의(以信稱義, Sola fide) 교리를 발견했다는 사건을 말한다. 루터는 이 체험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얻게 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義)’를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시편강의 이전인가 아니면 이후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46), 적어도 1517년 7개의 참회의 시(詩)에 대한 해석에서는 이러한 그의 신학이 뚜렷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 의인으로서의 삶

루터는 시편 51편에 대한 해석에서 죄 고백과 죄 용서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죄는 유전(遺傳) 된 것으로서 그것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47) 그리고 하나님의 영(靈)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창조되고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터의 해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편 51편이 말하는 새로운 삶에 대해서도 말한다. 루터는 “내가 악행 자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칠 것이며, 죄인들이 당신께로 돌아올 것입니다.”라는 13절의 진술을 다음과 같은 다짐으로 설명한다. “나는 결코 다시는 사람들에게 교만한 자들이 행하듯이 인간의 의(義)와 인간의 도(道)를 가르치지 않겠고 하나님의 은총의 도(道)와 하나님의 의(義)만을 가르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죄인들이 당신께로 돌아오며 진실로 회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48)

14-15절은 시인이 보여준 선포와 찬양에 대해서 말한다. 루터는 14절의 “내 혀가 당신의 의로움을 노래할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다시는 인간의 의(義)를 선포하거나 인간의 행적을 찬양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설명한다. 15절의 “주여, 당신께서 내 입술을 열어주시고 내 입은 당신의 찬양을 선포할 것입니다.”라는 고백도 하나님이 힘과 용기를 주셔서 자신의 입을 열어 주시면 사람에게는 지혜와 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시편 51편 마지막 19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의 희생제물 곧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이 진술이 “단순히 염소와 양과 소와 같은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의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49) 

이어서 루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드리는 제사가 단지 외적인 행동에 그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제물을 드리기에 앞서 먼저 마음이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면의 제사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될 때 비로소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이 의(義)의 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당신의 제단에 수송아지들을 번제로 드릴 것입니다.”는 마지막 진술도 수소로 드리는 제사는 상징일 뿐이고 진정한 수소의 희생 제사는 십자가에 외적인 인간 아담을 바쳐 그것을 없애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수소들의 제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시편 51편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靈)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될 때 변화된 삶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날 때 비로소 올바로 가르치고 찬양하며 감사하고 선포하며 또한 고통당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올바른 제사이며 올바른 예배라고 말한다.50)

루터는 세 번에 걸친 시편 51편에 대한 해설에서 그의 신학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51) 어조가 더 단호하고 격정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가 강조한 신학적 주제는 동일하다. 그의 모든 진술은 하나님과 인간 즉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루터에게는 시편 51편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다윗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4. 칼빈의 성경해석

칼빈의 일반적인 성경해석 원리로서 문법적-역사적 방법, 적응, 믿음의 유추, 성경의 유추, 성령의 조명 등이 거론된다.52) 하지만 필자는 그것들 가운데 아래 세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칼빈의 성경해석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경 원문을 매우 중요시함

칼빈에게 성경해석의 분명한 토대는 성경의 역사적인 어의(語意)였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가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강하게 반대했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53) 그는 성경본문이 갔고 있는 자명(自明)한 ‘문자적 의미’를 찾는 것을 성경 해석자의 우선적인 과제로 여긴 것이다.54) 그는 “성경해석에 있어 단어들의 자연스러운 처리를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55) 

이와 관련된 그의 성경해석 방법은 ‘간결함’과 ‘명백함’이다. 그것은 단순성을 가지고 본문의 의도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56) 그는 모세가 많은 비유적인 표현과 유형으로 이해해야만 되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나 이것은 하나의 진정한 어의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한다.57) 그러므로 그의 성경해석의 출발점은 역사적인 어의(語意)였다. 이것은 칼빈이 성경해석에 필요한 경우 원문을 얻으려고 애쓴 사실과 관련된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해석 할 때 히브리어 표현의 의미를 숙고(熟考)할 수 있었다.58) 

예컨대 그는 창세기 22:2의 ‘모리아 산’의 이름에 대한 설명에서 그 어원(語原)에 대한 추측이 다양하게 있음을 소개하고 – ‘보다’라는 뜻을 가진 ‘라아’ 동사나 ‘가르치다’라는 뜻을 가진 ‘야라’ 동사에서 나왔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 그 가운데 ‘경외하라’는 의미를 가진 ‘야레’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명을 칼빈은 지지한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은 ‘야훼 경외의 장소’로 해석된다.  

또한 창세기 1:6의 ‘궁창’(穹蒼)에 대한 설명에서도 히브리어 단어 ‘라키아’를 거론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공중의 전 영역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 위에 펼쳐져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두드려 넓게 펴진 금속판을 가리키는 허브리어 단어의 의미를 살린 설명이다.

또한 칼빈은 신약성경의 구약성경 인용(引用)이 문자 그대로의 인용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마태복음 2:6에서 미가서 5:1을 인용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칼빈에게는 성경해석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용 이면(裏面)에 있는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를 알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관심사는 분명한 성경본문을 얻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한 노력의 하나로 성경원문 연구에 힘을 쏟은 것이다.

칼빈의 성경해석이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 자들과 다른 점은 구약 성경에 대한 관심에서 드러난다.59)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등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이 거의 절대적으로 단지 신약성경에만 관심을 기우렸던 반면 칼빈은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는 1540년 ‘로마서’로 성경 주석을 시작했고 9년 후에야 ‘이사야서 주석’과 함께 구약주석 출판을 개시했으나 그의 성경 문체(文體)에 대한 민감성은 히브리 성경과의 만남을 통해 얻어진 결과였다.60)

그는 성경의 언어(言語)가 히브리어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고 단어 배열 순서에서부터 그 특성이 나타남을 인지(認知) 했다. 그뿐 아니라 칼빈은 성경본문에 나타난 부사법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성경본문이 강조하는 바를 주시했다. 그는 성경의 발언이 강조하고 있는 바를 강조했고 성경이 격렬히 말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시 8:2, 마 23:37 등) 그는 과장법도 주목하였고 그는 그것을 청중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수사법의 일종이라고 평가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의인화(擬人化)와 같은 비유적인 표현법에도 주의를 기울였다.(마 2:18, 렘 31:15 등)61)

(2)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

개혁자들은 인문주의자들처럼 본문의 미학적 측면과 수사학적 기술에 동일한 관심을 가졌지만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니는 신학적 측면이었다. 그들은 문헌학적 수사학적 분석이 직접적으로 신학적 의도에 복무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이 교회적인 성경주석이 되기를 원했다.62)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은 칼빈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학적 성경해석의 대표적인 내용은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칼빈의 성경 이해는 루터와 유사하기도 하며 대비되기도 한다. 칼빈은 루터에 비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칼빈은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믿음의 조상들과 맺은 구약의 언약은 본질과 사건 자체 면에서 신약의 우리의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그것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다만 다르게 제시될 뿐이다.”63) 

이 같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의 핵심에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옛 언약이 지상의 것에 국한되지 않고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64) 구약성경에서 증언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신 신약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런 칼빈의 하나님의 구속(救贖)에 대한 역사관은 하나님을 모든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주권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위치를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교회의 연속체’ 안에서 보는 것이었다.65)

이와 동시에 칼빈은 또한 루터처럼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그리스도 중심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성경의 내용은 창조주(創造主)이지만 동시에 항상 구원자(救援者)이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실 뿐만이 아니라 중보자의 인격 안에서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Insti. 1.6.1) 이런 방식으로 칼빈은 성경의 기독론 측면을 처음부터 창조와 함께 강조했다.66)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이런 통일성의 근거로서 율법을 말했다.  

그가 이해한 율법은 십계명만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전승되게 하신 것과 동일한 형태의 하나님 성김에 대한 전체적인 규정을 의미한다. 칼빈은 이런 율법이 옛 하나님의 백성에게 표징과 약속을 통해 오실 구속자를 가리키는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예언자들은 율법의 해석자이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를 가르쳐 주고자 했던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67) 또한 그는 로마서 10:4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중심됨을 설명한다.68)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해석에서 칼빈은 그리스도를 성경의 진리를 밝혀주는 최고의 표준으로나 해석학적인 예비지식의 내용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69) 구약성경 본문들은 성육신(成肉身) 사건에서 모든 것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성취된 것을 역사적으로 내다보고 질문하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구약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사건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3) 목회를 위한 실천적 성경해석  

칼빈은 “모든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순종으로부터 생겨난다.”(Insti. I,6,2)고 했다. 왜냐하면 성경이 순종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회의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규칙들의 원천이다.70) 그는 신자들의 생활에 적용가능한 성경의 실제적 의미를 강조했다.

칼빈은 율법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율법을 두 가지로 나눴다.71) 하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의식적(儀式的)이며 법적인 측면이다. 의식적이며 법적인 측면은 시대에 한계를 가지고 있고 새로운 시대에 극복되어야 할 것이나, 도적적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여전히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율법의 기능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했다.72) 

첫째, 율법은 우리의 죄를 입증한다. 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율법은 징벌에 대한 위협을 통해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저지하고  이로써 공동체의 외적인 평화를 세운다.

셋째, 칼빈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의 기능은 신자들을 위한 기능으로 율법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교훈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존재가 된 신자들이지만 여전히 육체의 태만함에 굴복당해 게으르고 더딘 나귀를 일하도록 독려하는 채찍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모든 율법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는 율법 폐기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이다.(갈 3:10) 우리가 율법을 범할 때 죽음으로 위협하는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은 사실이나 동일한 순종으로서 승인되어야 하는 율법의 권위는 그 어떤 것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율법은 신자들을 위해 외적인 정직뿐만 아니라 내적인 영적 정의를 이루는 교육의 과제를 수행한다.

칼빈의 이런 율법 해석은 칼빈이 성경 진술들의 기본적인 성격을 ‘행동의 언어’로 파악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당시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의 진술들이 보여주는 독창성은 전문가들의 문헌학적 연구의 분석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언어’로서 설득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했다.73) 따라서 칼빈에게 성경본문들은 단지 이미 알려진 과거를 드러내고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과거를 통해 당시의 일반청중들에게 현재의 실천을 촉구함으로써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도록 고무하는 기능을 한다.

칼빈의 성경해석은 은둔생활적인 성경연구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요 학문을 자랑하는 성경연구도 아니었다. 그는 성경해석이 어디에서든 신자가 직접적으로 교회생활과 수난에 참여하는 것과 위로와 권고의 진지성과 긴급성 또 틀린 것을 바로 잡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74) 이런 인식 속에 그의 성경해석은 시종 실천을 지향했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주석에서 줄곧 그를 움직인 것은 무엇보다 목회적인 관심사였다.75) 지금도 그의 성경주석서에 대한 않은 독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5. 칼빈의 시편 주해(註解)

(1) 칼빈의 시편 이해

칼빈의 시편에 대한 평가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영혼의 정서들 가운데 시편에서 거울에 비추듯 묘사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76) 그러면서 그는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삶이 자신의 본보기가 된다고 말한다. 때로는 다윗의 믿음과 인내와 열정과 열심과 그의 온전함이 자신에게 절망감을 줄 때도 있지만 그의 삶이 거울이 되어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고 칼빈은 고백한다.77) 또 칼빈에게 시편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해부도(解剖圖)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모범이기도 했다.

(2) 칼빈의 시편 51편 해석

  • 성경 원문(原文)에 철저함

칼빈은 자신의 성경주석에서 무엇보다 성경원문의 표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해석했다. 그는 표제어에서 ‘오다’라는 동사가 반복 사용되지만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78) 다윗이 밧세바에게 ‘들어간 후’ 나단이 다윗에게 ‘왔을 때’라는 언급에서 ‘들어감’과 ‘온다’는 히브리어 표현에서는 모두 동일한 동사 ‘보’로 표현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동일한 동사의 반복으로 대조적인 의미가 더욱 분명하계 드러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편 51:4에 대한 해설에서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음을 언급한 후 이 구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79) 그는 첫 부분을 “당신께 오직 당신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원문의 순서까지도 고려한 사려 깊은 번역이다. 그리고 이 진술의 의미를 설명한다. 칼빈은 이 진술이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윗이 이 진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 자신의 눈과 온 영혼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대화자(對話者)인 다윗은 사람들이 자신에 관해서 무엇이라 생각하든 말든 괘념(掛念)치 않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이 의로우시고, 당신께서 판단하실 때에 당신이 깨끗하실 것입니다.”라는 후반절의 내용도 전반절과 함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는 이 부분을 바울이 로마서 3:4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말하며 바울이 히브리어 원문과는 다른 70인경을 인용하고 있음도 지적한다.80) 

하지만 이렇게 정확한 문자적 인용이 아니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구약성경 인용이 정확한 문자적 인용에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의 인용의 자유를 인정했다. 칼빈은 이런 인용을 통해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그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하나님의 성실성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에는 바울이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81)

또 하나의 예로는 “죄 중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배었나이다.”라는

진술에 대한 설명이다.82) ‘배었다’고 번역한 히브어 동사 ‘야함’ 또는 ‘하맘’의 기본 의미는 ‘뜨거워지다’ 혹은 ‘따뜻하게 하다’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를’이라는 목적어와 함께 ‘아이를 배다’의 의미로 해석되었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우리가 어머니 태(胎) 중에 있을 첫 번째 순간부터 죄(罪) 중에 간직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칼빈은 저자 다윗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성경원문에 근거하여 문법이나 일련의 사고(思考) 과정과 사회적 환경들을 고려하여 성경을 주석한다. 그는 시편 51편을 죄로 물든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칼빈은 다윗의 상황을 뛰어 넘는 기독론으로 시편 51편을 해석하기를 거부했다.83)

  •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성경해석  

칼빈은 시편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삶의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밝혔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갈등의 경험이 시편을 적용하거나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84) 이는 시편 51편의 해석에서도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실존적 경험이 시편 해석을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진술은 삶의 근본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 예컨대 칼빈은 시편 51:1의 간구가 한 마디 애원으로 끝나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당신의 인애를 따라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긍휼의 풍성함을 따라 내 죄과들을 도말(塗抹)하소서!”라고 반복해서 호소하는 것은 그가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진술을 연이어 말하는 단순한 평행법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인지한 다윗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긍휼만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편 51:2의 진술에서도 ‘하르베’를 설명하면서 동일한 시제의 두 개의 동사가 연결될 때에는 첫 번째 동사는 부사적으로 이해한다는 원칙을 따라 해석한다고 하면서 죄의 심각성이 크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85)

또 시편 51:6에 대한 해설에서 칼빈은 내면의 변화를 강조한다.86) 

“보소서 당신께서는 마음속에서의 진실을 기뻐하십니다.”라는 언급은 표면적 인식으로는 변화의 모습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신자의 내적 변화를 촉구하며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칼빈은 제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는 표시라고 말한다. 사람은 감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이 같은 의식활동(儀式活動)을 통해 완전한 설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87)

그러므로 우슬초(Origanum syriacum)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儀式)은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의 본래 목적인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지향한다는 것이다.(7절) 즉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는 것은 내면 깊숙한 곳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시편 51:10-12의 진술이 ‘새 피조물’에 대한 간구라고 평가한다. 이전의 진술들이 용서하심에 대한 간구였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성령의 은혜가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때 ‘창조하소서!’라는 간구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이 자신의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같은 완전한 회복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88)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한다.(17절)

  • 교회를 위한 성경해석

칼빈은 주석 서론에서 시편 51편이 하나님께 범죄 한 사람들이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한 예시임을 밝혔다. 그는 ‘의인법’(擬人法, prosopopoeia)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받아들이고 다윗을 ‘표본’으로 이해했다.89)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신자들이 하늘의 종국적인 처벌에 의해 놀라게 될 때까지 죄 아래 머물러 있지 말고 회개의 요청에 겸손히 따를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90) 시편이 신자들의 현재의 삶을 위해 실제적인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시편 서문에서 시편의 의의(意義)에 대해 말했던 바와 맥이 통한다.  

그는 다윗의 삶을 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았고 그리하여 칼빈은 다윗의 고통을 자신이 교회 안에서 겪고 있는 고통과 동일시했다. “나는 시편의 저자들 가운데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다윗이 교회 회원으로 자처하는 자들을 통해 교회가 견뎌야 했던 내적 고통들을 토로하는 불평의 말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도 다윗과 비슷한 고통을 교회 내의 대적들에게서 겪었기 때문이었다.”91)

그의 주석에는 시편 51편의 저자를 ‘시인’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으며(7절) ‘우리’라는 주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다윗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독자들을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시편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 의미를 분명히 드러냈다. 특별히 시편 51:18 이하에 나타난 시인의 간구가 집단적 의미의 교회에 대한 간구로 해석된다.92) 칼빈은 시인의 눈이 영적인 성전에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며 시인의 간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간구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7절의 ‘우슬초’에 관한 해석에서도 그의 교회적 관심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우슬초’를 뿌리는 행위를 추기경 사돌레토(Jacopo Sadoleto, 1477-1547)처럼 의도적으로 성례전과 연결시키지도 않았고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처럼 그리스도의 선포와 연결시키지도 않았다.93) 그는 ‘우슬초’에 관한 언급을 당시의 외적 표지가 실제로 지시하는 목적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했다.

칼빈은 다윗이 범한 윤리적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관계 회복은 어떤 객관적인 성례가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찢겨진 심장’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94) 그리고 그런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 회복은 교회의 회복을 위한 간구의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단지 시편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당시 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교회를 위한 해석을 시도했다.

6. 루터와 칼빈의 성경해석이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

위에서 우리는 루터와 칼빈의 성경해석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루터와 칼빈의 성경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가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교회가 초래하고 직면해야 했던 위기 상황과 유사하다는 평가 속에서 루터와 칼빈의 성경해석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更新)을 위한 원천과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95)

첫째, 성경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  

– 문자적, 역사적 성경해석 –

루터의 성경해석 원칙은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의 성경해석의 근본원리인 ‘성경의 명료성’을 수용하여 ‘단순성’과 ‘명료성’에 있다.96) 이 같은 성경해석 원리는 칼빈에게도 꼭 같이 적용된다. 루터와 칼빈 모두 역사적 어의(語義)를 성경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문자적 의미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필자는 이것을 성경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이며 본문의 ‘일차적 의미’라고 부른다. 먼저 성경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what it meant)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본문이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what it means)가 드러날 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는 성경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율법적이거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그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데에 바쁘다는 데 있다. 본문을 정당하게 대하지 않고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그러나 성경본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는 결코 그 다음 단계의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본문의 어의에 충실한 이해와 해석으로 그릇된 교회의 모습을 개혁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성경 원전을 살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블가타 라틴어 성경 이면(裏面)에 있는 원전의 의미를 밝혀내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실행할 수 있었다. 성경원전의 의미를 밝히고 본문이 말하는 바에 충실하게 귀를 기울임으로 그동안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교회의 전통으로 가려져 있던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바르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원전을 잘 설명한 좋은 주석을 참고하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는 학자들이 집필한 학문적인 주석을 통해 본문 이해의 능력을 높일 수 있다.97)

둘째,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  

–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 –

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첫 번째 성경해석 원리는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라는 원리였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는 안목을 가지라는 요청으로 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어느 한편에 편중되거나 편파적 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해석에 대한 중세교회의 잘못은 오늘 우리에게 교회의 전통이나 특정 교파의 입장이 성경의 의미를 제한(制限)하거나 왜곡(歪曲)하거나 과장(誇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칠 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  해야 한다. 이는 성경본문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이해되지 않고 다른 성경본문에 의해 해석(解釋)되고 통제(統制)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성경해석 원리를 지키기 위해 루터와 칼빈에게는 성경해석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조명(照明)’하에 성경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이 두 가지 성경해석 원칙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기는 했지만 루터와 칼빈 두 사람 모두 이 두 가지 성경해석 원칙을 매우 중요시 했다.

이런 성경해석 원리는 성경을 통일성을 가진 책으로 보게 했으며,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하면서도 해석자들을 겸손하게 하는 해석학적 제어장치(制御裝置) 기능을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해석은 성경의 중심을 잃지 하게 하는 변증(辨證)의 기능을 했다. 또한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성경해석자를 광적인 신앙으로 나가지 않게 했으며, 하나님 안에 계신 분으로서 지혜의 전달자 이신 성령은 성경해석의 주체이자 참된 해석자라는 인식을 통해 해석자는 성경해석을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었다.  

이런 성경해석의 원리들은 성경해석자가 성경본문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성경해석자는 성경본문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성경본문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청종(聽從) 자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성경해석이 되게 하라!

– 실존적, 실천적 성경해석 –

루터와 칼빈 모두 실천적인 성경해석을 지향했다. 그들은 성경이 교리적 지식을 가르치는 텍스트(text)이거나 예전(禮典)의 지침을 보여주는 안내서로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고 우리 삶의 변화(變化)와 성숙(成熟)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시도록 했다. 두 사람이 모두 실천적 성경해석을 지향했으나 루터는 좀 더 실존적 이었고 칼빈은 좀 더 목회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루터의 성경해석은 학문과 경건의 조화에 그 의미가 있다. 루터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그 삶에 대한 지침을 얻고자 했다. 루터는 성경 안에 인간의 원초적 경험과 감정들이 다양한 상항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응답을 얻고자 했다. 이러한 문제해결은 루터 자신이 성경을 통해 직접 체험한 내용이자 과정이었다. 이런 면에서 루터의 성경해석은 상황적이었고 삶의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그 결과가 나타났다.

이에 비해 칼빈은 성경이 교회의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규칙들을 담고 있고 성경의 언어를 기본적으로 ‘행동의 언어’로 보았다. 그래서 칼빈은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했다. 칼빈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칼빈이 실천적 성경해석의 모습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율법이 의식적, 법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윤리적, 도덕적 기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율법은 내적인 정직뿐 아니라 외적인 영적 정의를 이루는 교육의 과제를 수행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의 결과는 반드시 신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루터와 칼빈이 보여주었듯이 성경해석은 삶의 변화를 위한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한다. 이때 삶의 변화는 내면의 삶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삶의 모습을 포괄한다.

넷째, 세상과 소통하라!  

–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초월한 신앙 –

루터는 ‘성(聖)과 속(俗)’ 두 영역을 구분하는 중세교회의 이분법(二分法)을 거부했다.98) 루터가 강조한 ‘전(全) 신자 제사장주의’는 영적질서와 세속 질서 사이에 어떤 지위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 예로서 ‘소명(召命)’에 대한 이해를 말할 수 있다. 중세에는 ‘부름’ 또는 ‘소명’이라는 라틴어 ‘보카티오’(vocatio)를 세상과는 아예 등지고 수도사(修道士)의 삶을 살라는 부르심을 뜻하는 말로 이해했다. 그러나 루터가 영적 영역과 세속의 영역의 구분을 없애면서 소명의 개념도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소명에 대한 개념을 인정은 했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라는 부르심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소명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부르심이었다.

칼빈에게는 이런 사상이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일상 세계에 참여하여 이 세계 안에 신앙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칼빈신학의 노동은 하나님의 피조세계 안에서 그분의 피조물을 통해 그분을 찬미하고 시인하는 영예롭고 영광스러운 수단이요 피조세계에 풍요로움을 더해주는 수단으로 보도록 바꿔놓았다. 이런 칼빈신학의 영향은 개신교를 선택한 유럽에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처럼 신학은 우리의 삶과 가치관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신앙을 거부하고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가르쳐 주었다. 오늘 우리의 성경해석과 신학도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그 가치를 전하고 세우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마치는 말  

열왕기하 22:8에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토라’(תּוֹרָה,, torah, 율법)를 발견함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성전 한 구석에 파묻혀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성경의 재발견’을 통해 성경이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루터와 칼빈의 성경해석은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성경이 역사하여야 함을 가르쳐준다. 성경이 올바로 해석되고 실제적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구석구석 흘어 들어가 죽은 바다를 소성(蘇醒)케 했던 물과 같이 변화와 회복을 일으키는 개혁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글쓴 이 / 하경택(河景澤) 교수(장로회신학대학 구약학,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Th.M., 독일 Ruhr-Universität Bochum, Dr.theol.)  * 이 글은 지난 2017년 10월 20,21일 한국에서 ‘종교개혁과 오늘의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열렸던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 된 하경태 교수의 세션 I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과 한국교회의 과제’라는 제목의 강의안 내용 중 용어의 일부를 변경하여 정리한 것이다.(편집자)  

   < 미주 >

1) L. Berkhof, ‘성경해석학’, 박문재 옮김(서울: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8), 26.

2) 루터는 교회의 결정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월한 권위일 수 없고 말씀 아래 있을 뿐이라고 말하며 성경에 권위를 부여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성경에 교회에게 타당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했다. “복음은 교회가 확증했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WA 30 II,687-688. P. Althaus, ‘루터의 신학’, 이형기 역(서울: 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96), 94에서 재인용. 칼뱅도 성경의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하였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논리는 사악한 거짓이라고 비판했다.(특히 Institutio II. 7 = J. Calvin, ‘기독교 강요’(상), 원광연 옮김(서울: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7), 85-93.

3) P. Szondi, ‘Einfuhrung in die Uterarische Hermeneutik’,(Frankfurt a. M.: Suhrkamp, 1975), 14쪽 이하.

4) M. Dreytza 외 공저, ‘구약성서연구방법론’, 하경택 옮김(서울: 비블리카 아카데미아, 2005),    32, 알레고리적 해석의 예는 우선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을  말하는 본문들(레 11장, 신 14장)에 대한 해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정결한 짐승의 갈라진 굽은 사람들이 늘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로 해석되었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가 정결하다는 사실은 물살에 휩쓸리게 두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라는 경고로 해석되었다. 알레고리적 해석의 예는 신약성경 안에서도 고찰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두 언약에 대한 암시로 해석하거나(갈 4:24-26, 광야에서 마신 물이 나온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했다.(고전 10:4) S. Kreuzer/D. Vieweger, ‘구약성경 주석 방법론’, 김정훈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1), 39-40.    

5) M. Dreytza 외 공저, ‘구약성서연구방법론’, 32.

6) S. Kreuzer/D. Vieweger, ‘구약성경 주석 방법론’, 39. 앤더슨은 구약성경에서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전체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구원의 원형’이며 하나님의 행동 방식을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뿌리 체험’(root experience)라고 명명한 B. W. Anderson, ‘구약성서 탐구’, 김성천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7), 41-47.

7) 이 논쟁에 관해 다음을 보라. M. Dreytza 외 공저, ‘구약성서연구방법론’, 33.

8) H. Karpp, ‘Bible lV’, ‘The 6’(Berlin/New York: W. de Gruyter, 1980), 61.

9) L. Berkhof, ‘성경해석학’, 23.

10) 롤로프(J. Roloff)는 고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성경 이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통합으로 설명한다. 성경의 두 부분이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알레고리의 동일한 방식을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통합’이라고 일컬을 수  있고,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진리는 교회 안에 역사적으로 계지된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성경과 교회의 통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J. Roloff, ‘위르켄 롤로프(Uurgen Roloff)의 신약해석학’, 장흥길 편, ‘교회를 위한 성경 해석’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208-209.

11) P. Althaus, ‘루터의 신학’, 이형기 역(서울: 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96), 19.

12) G. Ebeling, ‘루터의 성서의 재발견’, ‘신학사상’ 43(1983), 753.

13)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Ⅲ RenaissanceReformation, Humanismus(Munchen: Verlag C.H. Beck. 1997), 72.

14)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taustegung. Band 71-72. 이와는 달리 개별 시편에 대한 개괄적 설명을 Scholien이라고 불렸다.  

15) 루터의 성경해석, 특별히 시편해석의 변화과정에 대하여 다음을 참조하라. 정병식, ‘시편 4편 주해에 나타난 초기 루터신학의 변화와 발전’, 역사신학논총, 2(2000), 121-126.

16) WA.TR 5, 45, 10-17: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89에서 재인용.

17) P. Althaus, ‘루터의 신학’, 95.

18) M. Oeming, ‘Biblische Hermeneutik. Eine Emfuhrung’(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 -ellschaft, 2007), 13.

19) G. Ebeling, Lutherstudien, Bd 1(Tubingen: J. C. B. Mohr. 1971) 43.

20) M. Luther, Weimarer Ausgabe, Deutsche Bibel 8, 12, 9-22.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ugung’, Band Ⅲ 89-90에서 재인용.

21) P. Althaus, ‘루터의 신학’, 109.

22) WA, DB 8, 28.

23) P. Althaus, ‘루터의 신학’, 112.

24) P. Althaus, ‘루터의 신학’, 110.

25) V. Leppin, ‘Martin Luther’(Darmstadt. 2010). 71; H. I. Selderhuis. ‘루터, 루터를 말하다’, 신호섭 옮김(서울: 세웅북스, 2016), 120쪽에서 재인용.

26)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ugung’, Band Ⅲ, 73-74.  

27)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ugung’, Band Ⅲ, 75.  

28) WA 3. 479, 9-10.

29) WA 3. 239, 20-21.

30) G. Ebeling, ‘루터의 성서의 재발견’ 755.

31) E. W. Gritsh, ‘루터 성서해석의 문화적 배경’, ‘기독교사상’, 27(1983, 11), 100.

32)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ugung’, Band Ⅲ, 77-79.

33) P. Althaus, ‘루터의 신학’, 116.

34) H.-M. Barth, ‘마르틴 루터의 신학, 비평적 평가’, 정병식 홍지훈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349.

35) H.-M. Barth, ‘마르틴 루터의 신학, 비평적 평가’, 362.            

36) Erwin Mulhaupt(Hsg.), ‘Dr. Martin Luther‘s Psalmen = Auslegung. 2. Band Psalmen      26-90’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2), 202. 3차 시편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구절에 대한 설명에서 변화된 ‘제사장직’에 대해서도 말한다. ‘제사는 제사장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율법에 의한 제사가 폐기되고 새로운 제물과 함께 새로운 제사장 직이 설립된다고 말한다. Erwin Mulhaupt(Hsg.), ‘Dr. Martin Luther‘s Psalmen = Auslegung. 2. Band Psalmen 26-90’, 224.

37) G. Ebeling. ‘Lutherstudien. Bd 1’. (Tubingen: J. C. B. Mohr, 1971), 256.

38) 루터는 주장하기를 신학은 추상적인 원리나 신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떠난 논의는 ‘오류’이고 ‘독약’이며 ‘이성의 신학’이자 ‘거짓신학’ 즉 ‘불완전한 신학’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시편 51편 주해에서 ‘신학’ 혹은 ‘신학자’라는 용어를 40회나 사용하였다는 것은 시편 51편이 루터의 신학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증거이다. WA 40 II: 317 이하: 김현수,   ‘시인과 신학자: 루터의 시편 51편과 110편 강해를 중심으로’, 유해무 외 공저, ‘오직 믿음으로: 루터의 믿음과 신학’,(서울: 성약, 2011) 22에서 재인용.

39) “당신이 말씀하실 때 당신은 의롭게 돠고 당신이 판단 받으실 때 당신은 이기실 것입니다.”

40) Erwin Mulhaupt(Hsg.),‘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 197. 

41) Erwin Mulhaupt(Hsg.),‘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197.

42) Erwin Mulhaupt(Hsg.),‘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  212.

43) Erwin Mulhaupt(Hsg.),‘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198.

44) Erwin Mulhaupt(Hsg.),‘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 198-199.

45)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Ⅲ’, 73-74.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중세의 사중적인 문자 의미 이론에 대한 중요한 개정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6)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Iauslegung. Band Ill’, 72.

47) ‘시편에 대한 요약과 통역의 이유들’ 중에서, Erwin Mulhaupt(Hsg.), ‘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 193.

48) Erwin Mulhaupt(Hsg.), ‘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  200.

49) Erwin Mulhaupt(Hsg.), ‘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  202.

50) ‘시편에 대한 요약과 통역의 이유들’ 중에서, Erwin Mulhaupt(Hsg.), ‘D. Martin Luthers Psatmen = Auslegung. 2. Band PsaImen 26-90’, 193.

51) 김현수, ‘시인과 신학자: 루터의 시편 51편과 110편 강해를 중심으로’, 24.

52) 한성진, ‘칼빈 주석의 현대적 방법론과 고대적 기원’, 요판 칼빈 500주년 기념 사업회, ‘칼빈의 성경해석과 신학’ (서울: SFC, 2011), 52. 칼빈의 8가지 성경해석 원칙에 대해 다음을 참조하라. 한스 요하킴 크라우스, ‘칼빈의 성서해석 원칙’, ‘한국교회 구약성서 해석사’, 1900-1977.(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8), 114-136.

53)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34.

54) 칼빈은 이 문자적 의미를 ‘순수한 의미’, ‘단순한 의미’, ‘문법적 의미’ 등 다양하게 표현했다.(CR 59, 80 59,177: Institutio IV, 17, 22). 한스 요하킴 크라우스, ‘칼빈의 성서해석 원칙’, ‘한국교회 구약성서 해석사’, 1900-1977.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8), 128.

55) 한성진, ‘칼빈 주석의 현대적 방법론과 고대적 기원’, 63. 칼빈은 어거스틴의 성경해석 방법론을 거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어거스틴이 장황하게 설명한다는 점, 둘째,  어거스틴이 저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혀주지 못한 점과 아울러 문법적 방법을 명확하게 사용하지 못함 점, 셋째, 지나친 교리적 해석이 해석자로 하여금 본문 그 자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 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인지한 자신의 해석학적 과제를 엿볼 수 있다.                            

56) 정기철, ‘칼빈 해석학의 현대적 의미’, 요한 갈빈 500주년 기념 사업회, ‘칼빈의 설경해석과 신학’, (서울: SFC,2011), 79. 칼빈이 성경해석에서 ‘말의 단순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크리소스톰의 공로가 크라. 그의 성경해석의 목표는 성경의 참된 의미를 찾는 것이었고, 그는 본문의 참된 의미를 왜곡하는 일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한성진, ‘칼빈 주석의 현대적 방법론과 고대적 기원’, 57.

57)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34.

58)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34-135.

59) 칼빈과 인문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용인: 카보드, 2013), 145-197.

60) 한성진, ‘칼빈 주석의 현대적 방법론과 고대적 기원’, 52.

61)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31.

62) 한성진, ‘칼빈 주석의 현대적 방법론과 고대적 기원’, 53.

63) John Calvin, Institutio II, 10,2.

64)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27. 하지만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점도 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것들을 예로 든다.(Institutio II. 11) (1) 구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가나안땅과 같은 보이는 것들을 통해 모형으로 묘사되고 약속 되나 신약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이다. (2) 구약은 단지 간접적인 그림만 있다. 그러나 신약은  현재적인 진리와 견고한 몸 자신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비밀의 분명한 계시이다. (3)  신구약 두 성경은 문자와 영(율법과 복음)으로 구별 된다. (4) 구약에서는 경외의 종 됨이 지배적이나 신약에서는 자유의 종 됨이 지배적이다. (5) 구약에서는 단지 하나의 유일한 백성만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신약은 이방인들도 부르셨음을 말한다. 이렇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점들을 말하면서도 그는 이 모든 차이점들이 하나님 그 자신에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경륜에 속하는 것이고 평가한다.

65) B. K. Waltke, ‘The Psalms as Christian Worship. A Historical Commentary’,(Grand Rapids. MI/Cambridge, U.K: W.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493. 칼빈의 이런 역사인식은 성경해석을 위한 알레고리와 유형론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 “유형(type)이 약속과  성취를 위한 유일한 장르(specie)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유형’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인데 그것은 언약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도의 연속성에 기초한다.  칼빈은 종말론적 유형론을 수용하는데 그것의 근거는 성경의 저자의 유일성과 성경의 통일성에 근거한다. 그는 출애굽 사건들과 예수의 십자가, 부활, 승천을 인간역사에 대한 모든 해석을 결정하는 하나의 연속체로서 이해한다.

66)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23.

67)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25. 칼빈의 구약에 대한 이해에 관해 다음을 참조하라. 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89-144. 저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통일성의 근거로 작용하는 율법이 보여주는 이중적 기능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율법과 복음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이스라엘 민족과 율법과 복음의 대립 구도에서 제기되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 칼빈이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68)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37.

69) 한스 요하킴 크라우스, ‘갈빈의 성서해석 원칙’, 134.

70)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24.

71)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25.

72) Institutio II.7.6-12.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25-126.

73) 한성진, ‘칼빈 주석의 현대적 방법론과 고대적 기원’, 53.

74) 한스 요하킴 크라우스, ‘갈빈의 성서해석 원칙’, 122-123.

75) H. Graf Reventlow, ‘Epochen der Bibelauslegung. Band Ill’, 140. 칼빈의 이런 괸심은  동시대의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칼빈은 멜랑히톤의 성경해석을 너무 교리적이라고 평가했고 그가 성경의 어떤 부분을 편애한다고 비판했다. 부처에 대해서는 시편 주석 서문과 공관복음 서문에서 그의 주석을 크게 칭찬했지만 로마서 주석에서는 부처의 해석이 너무 장황하고 애매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성진, ‘칼빈 주석의 현대적 방법론과 고대 적 기원’, 54-56.  

76)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in: ‘The Psalms of David and others’, H. Beveridge (trans.) (GrandRapids: Baker Book House, 1979), 37.

77)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39-40.

78)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trans. by James Anderso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9), 282.          

79)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286.

80) J. Cat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287. 70인경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당신은 의롭게 될 것이며 당신이 판단 받으실 때 당신은 이기실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이 ‘깨끗하실 것이다.’에시 ‘이기실 것이다.’의 적극적인 의미로 번역되었다.

81) 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58.

82)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290.

83) P. Opitz, ‘Calvin’s theoIogische Hermeneutlk’, (Neukirchen-Vluyn: Neukirchen Verlag, 1994). 29-32. 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57쪽에서 재인용.

84)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39-40.

85)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283.

86)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292-293.

87)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294-295.

88)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306.

89) B. K. Waltke. The Psalms as Christian 騎’orshh, 493-496.

90)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282.

91)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39-40.

92)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307.

93) 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60.

94) 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61.

95) 2016년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거학술대회 ‘종교개혁과 후마니타스(Humanitas): 기독교는 ’헬조선 시대’에 희망을 줄 후 있는가?’의 주제발표를 참조하리. 배덕만, ‘헬조선과 개독교  시대에 한국교회와 인문주의’,”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발표논문집 제1권, 2016), 69-113.

96) 정기철, ‘칼빈 해석학의 현대적 의미’, 73. 또 다음을 참고하라. J. Bouwsma, ‘칼빈’ (도서출판 나단: 서울, 1993) 263.

97) 쉽게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주석 시리즈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제성서주석, WBC 주석,  현대성서주석(Interpretatio), 대한기독교서회창립 100주년기념주석, 한국장로교총회창립 100 주년기념표준주석,The New Interpreter’s Bible(NIB), Smyth & Helwys Word Biblical Commentary(WBC), Hermeneia Old Testament Literary(OTL), Anchor Yale Bible Commentary (AncB), Biblischer Kommentar(BK), Das Alte Testament Deutsch(ATD), Zuricher Bibelkommentar(ZBK), Herders Theologischer Kommentarzum Alten Testament (HThKAT) 등

98) A. McGrath, ‘기독교의 역사’, 박규태 옮김(서울: 포이에마, 2016) 344-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