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지금 당신은 날마다 성경을 읽고 있는가?

The first martyr of the reformation Jan Hus(1369-1415) is burned at the stake, 6th of July 1415.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종교 개혁가들의 대표적인 구호였다. 타락한 중세교회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돌리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중세시대에는 정말로 성경이 뒷전에 밀려나 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중세 교회는 제국정부의 후원 아래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세기 중엽 활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성경은 주로 양피지(羊皮紙, parchment 혹은 vellum)라는 짐승가죽에 필사(筆寫) 되었다. 한 권의 성경을 만들기 위해서 약200-300여 마리 양이나 송아지가 희생되었다. 가죽은 매우 정교한 과정을 거쳐 종이처럼 사용할 수 있는 양피지로 만들어졌다. 주로 수도원의 조용한 장소에서 잘 훈련받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동안 성경을 필사했는데 화재(火災)로 인한 손실이나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매우 엄격한 여러 가지 규칙들을 적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 한 권 값은 얼마나 되었을까? 세월이 흘러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68)의 활판 인쇄술에 의해 매우 값싸게 공급된 독일어 성경의 경우 1520년대에 약 360페니히의 가격으로 거래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노동자의 1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활판 인쇄술과 더불어 최소한 1/20로 폭락한 가격이라고 하니 과거의 양피지에 필사한 성경이 얼마나 값 비싼 책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주후 800년경 알천이라는 궁정학자가 프랑크 왕국의 황제였던 샬르망 대제(Charlemagne Former King of the Franks, 747-814)에게 헌정한 성경의 경우 각 장의 첫 페이지는 다양한 그림으로 채색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 그림 글자들은 모두 금이나 은을 녹인 용액에 색을 입인 후 도금(鍍金)해 만든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도금 성경의 경우 성경의 제작비는 엄청 늘어난다. 성경은 그야말로 ‘보물’(寶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은 말 그대로 너무나 귀해서 사람들이 감히 손때를 묻혀가며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은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모셔놓기만 하고 숭배(崇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또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경은 라틴어(Lingua Latīna)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식자층이 아닌 이상 성경을 스스로 읽고 이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로마 가톨릭교회가 라틴어 성경을 고집한 큰 이유는 그것이 교회의 통일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라틴어는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교회의 보편성과 통일성을 상징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었다. 정작 예배 자의 다수는 라틴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안심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교회와 전통의 성경해석을 그대로 신뢰하고 따르기만 하면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안전했을까?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이 보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경은 원문(原文)을 오역(誤譯)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歪曲)한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은 원문 성경을 자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개혁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라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각 나라의 개혁운동이 성경번역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편 종교개혁자들의 이 같은 자국어 성경 번역에 위협을 느낀 로마 가톨릭교회는 라틴어 성경 이외의 모든 번역본들을 불법(不法)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는 주교나 신부가 아닌 성도들이 성경을 자국어로 읽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경을 아예 금서(禁書) 목록에 포함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 데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오직 불가타 성경’(Vulgate Book by Jerome)의 논리로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선구자들이 부르짖은 ‘오직 성경’의 원리에 맞대응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철저한 희생을 요구했다. 영국이 종교개혁 국가가 되기 전까지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위클리프에 의해 자국어로 번역된 복음서를 배포하며 설교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화형(火刑)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프랑스 리용(Lyon)의 부유한 상인이었다가 성경적 교회개혁자가 되었던 왈도(Peter Waldo, 1140-1218)를 따르는 무리(Waldensians)는 수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에서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왈도와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뒤를 이어 등장한 후스(Jan Hus, 13601415)와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역시 성경말씀에 근거한 교회 개혁을 설교하다가 붙잡혀 화형을 당했다.

이쯤 되면 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그리고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같은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이 보름스(Worms, Germany)에 있는 루터의 동상 앞에 앉아있는 네 명을 자신들의 선배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성경을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읽게 하는 것을 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원리(原理)는 ‘성경 읽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참 신자들의 피 묻은 구호였다. 이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지금 당신은 성경을 매일 읽고 있는가?”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쓴 이 / 안상혁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출처 / 합신은 말한다 vol.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