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은 누구인가?
청교도에 대하여

1.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한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영국교회와 영국 사회에서 보다 경건하고 철저한 개혁을 위하여 일어난 한 운동으로 이것은 기본적으로 1560년에 시작했으며 짧은 시기 즉 1640년대와 1650년대에 성공적이었다.”
청교도(淸敎徒, Puritans)란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한 부류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적인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 즉 성공회(聖公會, Anglicanism, Episcopal Church)에 반항하여 칼빈주의를 모범으로 하여 태동 된 하나의 신앙운동의 부류이다. 이들은 모든 오락(娛樂)을 죄악시하였으며 화장(化粧)과 호사(豪奢)를 거부하고 권위적 성직자를 배격하며 사제와 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청정(淸淨, purism)한 생활을 강령으로 하고 있다.
청교도(Puritan)라는 별명은 1564년경에 붙여진 명칭으로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559년)에 규정된 것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의 예배와 질서를 개혁하기를 원했던 ‘영국 국교회’의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 청교도들은 미신적인 의식들과 천주교의 관구 조직을 타파하고 성직자들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편협적인 징계에 대항하며 보다 더 나은 설교와 목회를 위해 능력을 받는 것을 위해 진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or The Virgin Queen, 1533-1603) 시대의 청교도들은 분리주의자(分離主義者)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분리주의자들은 청교도로 불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청교도란 이름은 포괄적으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는데 칼빈주의 신조(信條)를 고수하고 진지한 경건생활을 실천하는 감독교회 교인, 장로교회 교인, 독립교회 교인들 모두에 대해 사용되었다. 보다 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청교도주의는 검소하면서도 부유한 문화와 고상한 전통적 도덕과 목회 신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에서와 뉴잉글랜드에서 18세기의 복음주의를 고취시켰다.
청교도신학은 개혁주의신학을 특색으로 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을 증거 하고 있다.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징은 ‘성령의 사역을 세밀하게 취급하였다’는 것과 일요일에 대한 개념을 ‘그리스도의 안식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2. 퓨리타니즘 신앙의 배경
(1) 종교개혁
청교도주의(Puritanism) 실마리가 된 것은 종교개혁과 일련의 사건들로 시작된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오랜 기간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악습들 특히 날로 증대해 가는 교회 세입을 위한 온갖 십일조, 공과금, 벌금 등의 부과는 그것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농노제도가 아직도 존재하였으며 완전하게 지방분권화 된 정부는 널리 퍼진 농민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르네상스(Renaissance, 文藝復興) 시대의 교황(敎皇)들은 아낌없는 예술의 후원자들로 후원금을 대주기 위해 계속해서 추가 세입을 거둬들였고 특히 교회 당국의 노골적인 면죄부(免罪符) 판매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로 하여금 저항의 의지를 일으키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의 태도는 이러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온다고 확신하고 모든 선행(善行) 중 가장 숭고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하였으며 더 나아가 일상생활의 평범한 직업과 본질적인 선함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선행을 자선금 기부나 단식이나 기도 또는 부자연스러운 금욕생활을 통해 추구하려는 점을 거부한 것은 루터 사상의 대단함과 독창성을 더욱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스위스에서 활동한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뒤를 이은 칼빈(Jean Calvin, 1509–1564)은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종교에 대한 접근방법은 인문주의답게 신비적이거나 경건하기보다는 지성적(知性的)이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때부터 루터와 칼빈 이 두 사람의 강력한 추진력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개신교는 칼빈주의(Cavinism) 그리고 후에는 영국 청교도들의 퓨리타니즘(Puritanism)을 구분해 주는 표시가 된 신학과 내적 조직의 특색을 띄게 되었다.
(2) 칼빈주의(Calvinism)
캘빈의 신학체계는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와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을 인간은 결국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아는 지식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의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과 자연만물(自然萬物)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도 개인의 삶 속에 적용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제나 신부를 통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간구할 것을 강조했다.
캘빈은 성경의 예정설(豫定說)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예정설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인류 개개인에게 일어날 일을 결정짓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 유사한 운명을 가지고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리 정해져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미리 정해져 있다.”고 했다.
칼빈주의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중재자로 자처하는 것을 거부하며 비교적 단순하고 비(非) 의례적인 예배의식으로 돌아가고 또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의 지도에 교회 신도들의 동의를 요하는 원칙을 내세운 점에서 칼빈주의는 결코 이교도에게 관대하거나 민주적이라고는 부를 수 없지만 철저하게 신교적이었다. 비록 칼빈주의 이러한 최초의 교리들이 영국 해협을 건너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고 또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가면서 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칼빈주의의 기원과 일반적 특성들은 청교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3. 퓨리타니즘 역사적 배경
– 청교도운동 기간의 영국 국왕 계보와 개요 –
▸ 핸리 8세(HENRY VIII, 헨리 7세의 차남, 1509-1547) 구교와 신교의 중도적 입장,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 시작, 1534년 의회에서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 통과, 1536년에 영국교회의 첫 번째 교리 ‘Ten Articles’ 발표, 1539년 ‘Six Articles’로 개정
▸ 에드워드 6세(EDWARD VI, 헨리 8세와 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낳은 아들, 1547-1553) 강력한 개신교(protestant) 옹호자, 1549년에 영국교회의 첫 기도서 ‘The First Prayer Book’ 발간, 1552년 ‘Forty-Two Articles’ 포고
▸ 피의 매리(Blood MARY, 1553-1558, 헨리 8세와 케더린 사이에서 낳은 딸) 강력한 로마 가톨릭교회 옹호자, 짧은 재위 기간 중 수 많은 개신교인들을 체포하여 죽이고 구금
▸ 에리자베스 1세(ELIZABETH Ⅰ, 헨리 8세와 앤의 사이에서 낳은 딸, 1558-1603) 구교와 신교의 중도적 입장, 영국의 중흥기를 이룸, 재위 중 청교도운동이 일어남, 그녀가 죽음으로서 Tudor 왕조가 끝남
▸ 제임스 1세(JAMES Ⅰ,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의 아들로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VI세로 즉위했었음, 1603-1625)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 확립,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로 왕권을 강화함, 성경을 영어로 완역하여 ‘Version of King James’라는 이름으로 출판, 이 시기 영국과 화란의 100여명 청교도들이 ‘May Flower’ 배를 타고 잉글랜드 Plymouth를 떠나 신대륙 동부에 도착
▸ 챨스 1세(CHARLES I, 제임스 1세의 아들, 1625-1649) 국교회(Anglican Church) 강화하고 개신교 박해, 1629년 왕이 의회 해산, 그러나 1640년 의회는 단독으로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소집하여 왕에게 대항, 1642년 시민전쟁 일어남, 장기의회는 1643년 7월 ‘Westminster Assembly’를 소집, 이 회의는 1643-1647에 걸쳐 120명의 정회원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을 작성함
일반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과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 ‘수장령’(首長令, 교황 통치 거부)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그 후 아들을 얻지 못하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녀 메리가 직위 한 후 신교도들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정권을 잡은 후 그녀는 정치적 입장에서 양파에 대해서 타협적 입장을 취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에 의해 생겨난 성공회의 최고 수장 직을 계속 이어가면서 구교와 신교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으려 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 측과 개혁파 측은 여전히 그들만의 교리와 교회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때 로마 가톨릭교회에 강력히 반대하여 생겨난 것이 청교도운동이다. 프랑스의 개혁파를 위그노(Huguenot)라 불린 것과 같이 영국의 개혁파의 주류는 청교도(Puritan)이었다. 청교도들은 더욱 급진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개혁하기 바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배격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앙노선을 불신했고 로마 가톨릭의 교황 Pius 5세도 여왕을 1570년 파문시켰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의 반(反) 로마 가톨릭 정신 즉 대륙의 저항 신앙(Protestantism)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개혁자들이 바로 청교도들(Puritans)이었고 그 운동이 청교도 운동이었다. “영국 국교회에 남아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냄새 즉 성경에 없는 의례(儀禮)를 일소하라. 그렇지 않으면 개신교의 진리는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의 표현처럼 “먼저 의식들과 예복들에서 시작이 되어서 끝내는 영국 국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고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했다.”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대에는 청교도운동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를 벗어났다고 하는 영국 국교회는 국왕이나 여왕을 교회의 수장(首長, Super Head)으로 받들었으며 일반회원으로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귀족과 그 가신들이 존경을 받았다. 그런 까닭으로 영국 국교회는 전제군주정치와 원칙이 동일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가 중시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청교도들도 결국은 영국 국교회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였고 그 후 그들도 세속에 찌들고 영국 국교회와 잦은 교류를 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 국교회뿐만이 아니라 영국 국교회와 신앙의 타협을 하는 자들을 반대하는 단체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교주의에 기초를 둔 것으로 비국교도(非國敎徒, Dissenters)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중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장로교회(Probyterian)이다. 하지만 장로(長老)에 의해 운영되는 장로교도 아직 일반회원(소위 오늘날 말하는 평신도)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교회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빈곤하며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평등의 권리를 인정하는 조합교회(組合敎會, 會衆敎會, Congregational Church)였다. 이 파는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운동은 1662년 대추방령으로 종식되었다가 1688년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졌고 국교회 밖에서 계속되게 되었다.
이렇듯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개혁운동이다. 청교도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교도(淸敎徒, puritan)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런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 국교도에 반대하는 악명 높은 청교도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표현이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에 대적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경멸(輕蔑)하는 조의 이름이었지만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라는 경멸의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이다.(*) 출처 / 김영익 교수의 ‘청교도사’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