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성경해석론청교도

청교도 성경해석 원리

신학과 신앙을 바로 세우는  청교도 성경해석 원리

시작하는 말

잉글랜드의 개혁파 청교도 신학자들은 다양한 신학적 이단(異端)과 오류(誤謬)들에 경고를 보내야만 했다. 그 근본적(根本的) 문제는 성경을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결과였다.

청교도(淸敎徒, puritan)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한 성경해석은 올바른 성경해석 도구 사용 문제일 뿐 아니라 조명(照明)을 위해 기도하며 성령을 의지하는 올바른 영적 도구를 사용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또 청교도의 지성(知性)에는 적용(適用) 없는 성경해석이란 완전히 생소한 관념이었다.

모든 요소가 중요하나 이글에서는 주로 올바른 성경해석 도구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최근 청교도 성경해석학에 대한 이차 문헌 가운데 탁월한 작품이 더러 등장했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의 성경주석 방법론에 대한 인상적인 한 연구서에서 헨리 내프는 “17세기는 성경연구와 성경해석학에 있어 퇴보한 시대였다.”는 의견을 반박했다.

누구든 탁월한 청교도 저술가들의 작품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청교도가 성경해석에 매우 정교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청교도는 절대로 무분별한 증거로 본문에 의존하지 않았고 해석학 도구를 사용해서 종교개혁시대 이후로 주석에 있어서 큰 진보를 이루었다. 영국의 신학자들은 선배들의 이런 이점을 바탕으로 다수의 성경책들에 대해 인상적인 주석을 저술했다. 우리는 이런 작품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폴 베인스(Paul Baynes, 1573-1617)의 ‘에베소서주석’ ‘골로새서주석’, 존 오웬의 ‘히브리서주석’,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79)의 ‘에베소서주석’ 등이다. 하지만 혹자는 굿윈의 ‘요한계시록주석’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조셉 카릴(Joseph Caryl, 1602-1673)의 방대한 ‘욥기주석’ 은 과도하게 성경을 풍유화(諷諭化)에 빠져들었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이 그렇게 성경을 주석한 것은 주로 목회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필자가 이글에서는 다양한 청교도 신학자들의 핵심적인 성경해석학 전제(前提)와 그 전제들이 다양한 성경본문을 해석할 때 사용한 주석(註釋)의 기본원칙들을 살펴볼 것이다

1. 두 언약(言約)

– 청교도 성경해석과 주석의 첫 번째 원리 –

언약교리(言約敎理)는 청교도신학의 핵심이었다. 성경해석학 분야에 있어 청교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두 역사적 언약 곧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믿었다. 물론 성경에는 다른 언약들도 있으나 이 두 언약이 하나님이 인간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데 근본 구조를 제공했는데 ‘행위언약’은 원래 무죄(無罪) 상태의 인간과 관련이 있고 ‘은혜언약’은 죄인(罪人)으로 유죄(有罪) 상태의 인간과 관련이 있다.

마치 공통 요소(要素)가 전혀 없는 것처럼 이 두 언약이 완전히 대립적(對立的)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두 언약은 중대한 차이(差異) 도 있다. 이 두 언약이 어떻게 청교도 사상에서 해석학적 범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몇 가지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하겠다.

언약교리에 대해 광범위한 작품을 쓴 청교도 신학자 가운데 하나가 패트릭 길레스피(Patrick Gillespie, 1617-1675)였다. ‘열린 언약궤’(The Ark of the Testament Opened, 1681)에서 길레스피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강조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길레스피는 차이점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두 언약 간의 유사점(類似點)을 말했다.  

(1) 두 언약의 유사점(類似點)

두 언약 모두 하나님이 언약의 창시자(創始者)로 하나님이 유효 원인이시다. 두 언약의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은혜다. 일부 청교도(예, Francis Robert 1609-1675)는 ‘행위’와 ‘은혜’라는 말로 이 두 언약을 가리키는 핵심 지칭으로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이 두 언약에 모두 ‘은혜’(恩惠)와 ‘호의’(好意)가 충분히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길레스피는 당시의 모든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처럼 ‘행위언약’의 조건은 순종이었고 순종 행위의 결과가 상(賞, 영생)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행위언약’도 사실은 ‘은혜언약’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 동기가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인간에게 은혜의 모든 것을 온전히 부여하셨다. 나아가 약속된 상(賞, 영생) 역시 아담의 순종이 하나님께 어떤 공로가 될 수 없었기에 은혜였다.

두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말하자면 청교도신학은 항상 개혁파 전통에 일치되게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최고 목적으로 간주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행위언약’에서 빛났다면 ‘은혜언약’에서는 하나님 아들의 인격 속에서 훨씬 빛났고 이것이 너무 두드러지기 때문에 ‘은혜언약’이라는 호칭을 갖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또 두 언약 모두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에 들어가신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각 언약에서 ‘공적(公的) 인간’과의 언약  속에 들어가신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2) 

‘행위언약’에서는 언약의 머리로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은혜 언약’에서는 ‘은혜언약’에 포함된 자들의 언약의 머리로서 그리스도와 맺으셨다. 아담은 그의 자연적 후손의 머리고 그리스도는 그의 영적 후손의 머리이시다. 그래서 여기서 ‘연방주의’(federalism)라는 말이 나온다.

두 언약 모두 하나님은 언약의 조건을 성취하도록 자신과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힘이나 능력을 공급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아담에게 자연적인 능력이나 힘을 부여하셨다. 아담의 육체적 정신적 힘은 자연적(自然的)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적 후손에게 주어진 힘은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이다. 즉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다.  

청교도들 간에 타락 전(前)이나 타락 후(後)의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에 대해 완전한 일치는 없었지만 모든 죄인은 ‘은혜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초자연적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청교도가 일치했다. 두 언약은 또한 하나님이 이 언약들을 제정하신 목적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행위언약’은 타락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데 그것은 죄인들이 아담에게 주어진 규정에 따라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에게 주어진 규정(規程)이 죄인들을 저주하고 정죄하는 길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에 없는 유효성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해 자신을 ‘행위언약’(또는 ‘구속언약’) 아래 두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은혜언약’의 약속들은 그리스도의 후손에게만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함께 ‘은혜언약’의 복들을 좌우하는 부동(不動)의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또한 똑같은 사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審判臺) 앞에서 견딜 수 있게 하는 완전한 의(義)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아담의 경우 ‘행위언약’에서 그의 의(義)는 확실히 그 자신의 의(義)이지만 ‘은혜언약’에서 그의 의(義)는 단지 그리스도로부터 전가(轉嫁)를 통해 그의 것이 된 전가 된 의(義)였다.

두 언약의 조건(條件)은 인간이 세우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셨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두 언약 모두 ‘믿음’과 ‘행위’가 요구된다. 행위는 ‘행위언약’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토머스 굿윈이 주장한 것처럼 비록 그것이 자연적 믿음이기는 했어도 아담에게도 믿음이 있었다. ‘은혜언약’에서는 칭의(稱義)를 위해 중보자(仲保者)에 대한 믿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혜언약’의 조건에서 행위가 배제(排除)되는 것은 아니다.

‘행위언약’에서는 행위(行爲)가 사전(事前)에 상(賞)으로 작용한다. 반면에 ‘은혜언약’에서는 행위가 상(칭의)의 결과(結果)로 나타난다. 또 두 언약 모두 표징(標徵)과 보증으로 성례(聖禮)를 갖고있다.

끝으로 길레스피는 두 언약에서 “언약 당사자들은 언약의 조건을 성취하고 생명의 언약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습관적인 은혜 이상의 것을 필요로 했다.”고 지적한다. 에덴동산에서 견인(堅忍, 굳게 참고 견딤)하기 위해(청교도는 얼마나 오래 견인하고, 어떤 상(賞)이 주어질 지에 대해 서로 논쟁을 벌였다.) 아담은 습관적 은혜 이상의 것을 필요로 했다. 아담은 자신의 견인을 확증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그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에서 견인하는 것은 아담에게 초자연적 은혜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은혜언약’에서도 신자들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초자연적 은혜가 필요하다.

(2) 두 언약의 차이점(差異點)

두 언약 간의 유사점을 설명한 다음 길레스피는 두 언약 간의 차이점으로 관심을 돌리는데 그 차이점은 매우 다양하고 대폭적이다.

두 언약은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 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목적은 서로 다르다. ‘행위언약’은 아담이 무죄(無罪) 상태에 있을 때 체결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은 순종을 통해 에덴동산에서 견인해야 했다. 그러나 ‘은혜언약’은 행복을 회복(回復)시키기 위해 죄인(罪人)과 체결되었다. 아담이 가졌던 원래의 행복은 ‘은혜언약’ 아래 성도들이 누릴 행복에 비하면 훨씬 저급(低級)하다.

그러므로 청교도는 통상적으로 아담이 에덴에서 누렸던 것보다 ‘은혜언약’ 아래 있는 성도들이 더 큰 특권을 누린다고 역설했다. 길레스피만이 아니라 토머스 굿윈도 ‘행위언약’을 진술할 때 자연언약 아래 있는 아담의 자연적 의무와는 반대로 초자연적 은혜를 누리는 ‘은혜언약’ 아래 있는 신자들이 더 우월(優越)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했다. 길레스피의 견해에 따르면 ‘은혜언약’ 아래 있는 자들은 아담이 갖지 못했던 확실한 견인을 갖고있다.    

이 같은 길레스피의 견해를 결정적으로 지지하는 근거는 신비적이고 영적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은혜언약’ 아래 있는 자들은 그분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얻은 복을 약속받고 확실히 얻게 되는데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과 가졌던 단순한 도덕적 연합(즉 감정적 연합)보다 훨씬 우월하다. 게다가 신자는 하나님과 택함을 받은 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는데(요 14:20, 갈 2:20) 이것은 아담이 갖지 못했던 신자의 특권이다.

‘행위언약’의 목적은 창조주(創造主)이신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은혜언약’의 목적은 구속주(救贖主)이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들은 ‘행위언약’에서보다 ‘은혜언약’ 아래에서 더 잘 드러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은혜언약’하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에서 더 밝게 빛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屬性)이  ‘새롭고 영광스러운 광채로 더 충만하고’ 그것들은 ‘행위언약’ 아래에서 가졌고 또 가질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영광스럽다.(요 12:28, 17:4)

‘견인의 힘’의 문제로 되돌아가 길레스피는 ‘행위언약’은 아담과 그의 자연적 힘에 크게 의존했지만 ‘은혜언약’ 아래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훨씬 크게 의존한다고 지적한다. ‘행위언약’의 계명들은 행위 외에는 요구할 것이 없고 심지어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갖고 있던 믿음도 행위로 간주(看做)되었다.

그러나 ‘은혜언약’에서의 믿음은 복음적인 은혜다. 즉 영혼의 은혜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 도구로 간주 된 믿음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신의 율법폐기주의적인 신학을 깊이 의식하고 길레스피는 (목적은 다르지만) ‘행위언약’이 명하는 모든 것을 ‘은혜 언약’도 명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은혜언약’은 ‘행위언약’보다 더 많은 것을 명한다. 회심, 회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자기 부인, 죄 죽이기, 그리스도의 십자가 짊어지기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언약’은 완전하고 부단한 순종을 요청하지만 ‘은혜언약’은 신실한 순종을 강조한다.

이런 이유로 각 언약의 조건에 대해 말할 때 길레스피는 두 언약은 모종의 조건을 요구하지만 그 조건은 정반대라고 언급한다. 특히 칭의(稱義)에 있어 ‘행위언약’은 조건으로 ‘행위’를 요구하지만 ‘은혜언약’은 조건으로 ‘믿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행위언약’에서 믿음이 그런 것처럼 ‘은혜언약’에서 행위는 의(義)의 한 부분이 아니고 또 ‘행위언약’에서 행위가 그런 것처럼 ‘은혜언약’에서 믿음은 우리의 의(義)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義)를 받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회 현관문으로 들어온 율법폐기주의와 단호히 맞서 싸우는 동안 교회 뒷문을 교회에 기어들어 온 신율법주의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청교도들에게는 이처럼 조심스러운 언어 표현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결론에 따라 길레스피는 ‘행위언약’의 조건은 한 번의 순종 행위가 아니라 다수의 순종 행위(즉 완전하고 영속적인)였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은혜언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최초의 ‘산 믿음’ 행위 한 번으로 언약의 조건을 성취한다. 물론 신자들은 자기들의 ‘산 믿음’을 계속 행사하겠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들은 거룩한 삶의 지위(地位)가 주어지고 이것이 아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행위언약’의 조건을 성취하는 능력이 아담에게 내재해 있었다. 그러나 ‘은혜언약’에서는 신자들이 성취한 조건이 결단코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엡 2:8, 요 15:5) 이런 식으로 주장할 때 길레스피는 ‘행위언약’의 조건을 부정하는 율법폐기주의자의 오류를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믿음을 행위로 만든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의 오류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9

길레스피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제시할 때 청교도 신학자들이 성경 역사의 발전을 이해하는 법에 대해 기본적인 준거(準據, 표준을 삼아 따름)의 틀을 제공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받아 주심을 찾는 길은 성경에 따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행위는 ‘행위언약’에서는 가능한 방법이었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죄인들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와 자기 자신을 ‘행위언약’ 아래 두신 분에게 자기들의 믿음을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위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정죄를 받아야 한다.

이처럼 길레스피의 글은 청교도가 성경의 이분법적(二分法的) 이해를 어떻게 설명했는지에 대해 예리하게 제시한다. 길레스피는 청교도의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이 두 언약에 있어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정반대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한편 두 언약 간의 유사점도 충분히 인정했다.    

2. 그리스도

– 청교도 성경해석과 주석의 두 번째 원리 –

청교도가 사용한 핵심적인 성경해석 원리는 성경에 굳게 뿌리를 둔 관념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의 주장처럼 성경을 읽는 자는 이 근본 원리를 항상 유념해야 한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그리스도의 직무(職務)에 대한 계시(啓示)와 교리(敎理)는 교회의 교화(敎化, 가르치고 이끌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를 위한 선지자와 사도들의 다른 모든 가르침보다 항상 상위(上位)에 있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基礎)이다. (중략)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믿음과 묵상을 실천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영광에 대한 이 계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속에 명기(明記)되어 있으나 현세(現世)에서는 충분히 발견되거나 이해되지 못한다.”(John Owen, The Glory of Christ)

오웬은 그리스도가 단순히 어쩌다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신자들은 성경 속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모든 것을 땅에서 사는 동안 한평생 알아가더라도 충분히 알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래도 신자들은 그것을 아는 일에 항상 온 힘을 다해야 한다.

토머스 아담스(Thomas Adams, 1583-1652)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모든 장(章)과 모든 절(節)에서 발견되는 예언되고, 모형이 되고, 예시되고, 표시되고, 예증(例證) 되는 성경 전체의 총화(總和)이고 (중략) 그리스도는 성경의 이 모든 줄에서 언급되는 요점(要點)이자 중심(中心)이다.”(Thomas Adams, Meditations upon Some Part of the Creed)

마찬가지로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도 그리스도가 어떻게 성경의 목적 인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성경에 있어서 반지의 진주처럼 핵심(核心)이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모든 줄이 끝나는 목적이자 중심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제거해 보라.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참 신자라면 성경 전체에서 언제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익(無益)하다.”(Richard Sibbes, God Manifested in the Flesh)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 1604-1664)는 성육신(成肉身)하시기 이전(以前)의 그리스도는 성경의 모든 ‘의식’, ‘의례’, ‘비유’, ‘모형’, ‘약속’, ‘언약’ 속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 한다.(Isaac Ambrose, Looking unto Jesus) 대다수의 청교도 선배 및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암브로스도 이같이 구원의 역사를 언약에 입각해서 그리고 기독론의 관점에 따라 이해한다.

암브로스에 따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계시는 각 세대 별로 다양한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명확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점차 증가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청교도들이 왜 그토록 고집스럽게 구약의 아가서를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와 나누는 교제를 강조하는 알레고리(allegory)로 이해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는 죄인(罪人)인 유한한 피조물에게 계시를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에 성경의 기초와 중심이 되신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성경의 근본원리(根本原理, fundamentum Scripturae)가 되신다. 그러나 개혁파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경의 중심(scopos Scripturae)으로서 가능하신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견해가 일치된 것은 아니다. 예로서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시편 8편 주석과 요하네스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 1603-1669)의 시편 8편의 주석을 면밀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비교해 보면 청교도들은 17세기 당시 칼빈의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칼빈보다 코케이우스의 주석 방법에 더 치우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청교도의 언약신학은 모형론(模型論) 아니 심지어는 풍유법(諷諭法)을 통해서라도 구약성경 본문을 더 명백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을 하도록 요구했다. 리차드 뮬러(Richard A. Muller, 1948- )가 이렇게 말했다. “코네이우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가르친 것처럼 언약신학(연방신학)은 다른 어떤 개혁파 사상보다 풍유적이고 모형적인 주석에 훨씬 큰 문을 열어 놓았고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대해 기독론적인 해석에 훨씬 의존하기 쉬웠다.” 이것은 영국의 청교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언약신학의 일반적 해석원리와 성경의 근본원리(根本原理, fundamentum Scripturae)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찰은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 성경해석을 위해 청교도들이 성경을 주석(註釋)할 때 사용한 성경해석 도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3. 문자적 의미

– 청교도 성경해석과 주석의 세 번째 원리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해석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1장 9항에 나타나 있다. “성경해석의 확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 본문의 참되고 충분한 의미-그것은 여럿이 아니고 하나다-에 대해 의문이 생길 때 그 의미는 더 분명히 말하는 다른 본문들을 통해 파악하고 알아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이 표현 이면에는 쿼드리가(quadriga, 사중적) 곧 ‘사중의 의미’로 알려진 중세시대의 성경주석 방법을 개신교는 거부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에드워드 리(Edward Lee, 1603-1671)는 이 견해에 따르면 문자적 의미는 ‘말씀에서 직접 수집되고’ 따라서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풍유적, 도덕적, 유비적 의미로 세분화 되는 ‘영적의미’와 대비 된다고 지적했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도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쿼드리가(quadriga, 사중적 성경해석법)를 사용한 것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논박의 화살을 쏜다.

퍼킨스는 이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이 어떻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준 것(창 14:18)을 해석하는지를 주목한다. 이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살렘 왕이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제공해서 여정에 지친 아브라함의 군사들을 기운이 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풍유적 해석’은 사제가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제공한다는 것이고, ‘도덕적 해석’은 그러므로 무언가를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비적 해석’은 마찬가지로 하늘의 존재이신 그리스도 역시 신실한 자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제공된다는 것이다.

퍼킨스는 이런 성경해석 방법은 “본문은 오직 한 가지 의미를 갖고  있고 또 그것은 문자적 의미이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 같은 성경해석은 타파되거나 거부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물론 본문이 문자적으로 알레고리이기 때문에 ‘풍유적해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전제로서 로마 가톨릭처럼 ‘사중 해석법’(quadriga)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 성경 자체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지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에드워드 리도 성경에서 알레고리, 유비, 교훈들이 발견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성경의 여러 의미가 아니고 한 의미에서 나오는 다양한 요소들의 묶음이다.” 따라서 리는 성경은 종종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신학자들은 그중 하나는 문자적, 문법적 또는 역사적 의미로 부르고 또 다른 하나는 신비적 또는 영적 의미로 부른다.”고 주장한다.

문자적 의미를 인정하는 토머스 굿윈은 마태복음 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것은 신비적 의미로도 해석된다. 하지만 왜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취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없다.” 다시 말해 비록 본문의 문자적 의미에서 포괄적인 적용 범주가 수집되거나 추론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단일한 의미는 항상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청교도가 구약 아가서에 대해 풍유적 해석을 한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대체로 청교도는 그들 가운데 이따금 지나치게 풍유적 해석에 빠져든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풍유적 해석은 거부했다. 예를 들어 시편 49편과 149편을 천년왕국시대에 대한 증거로 설명할 때 굿윈은 이렇게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풍유적 의미를 입게 되면 성경을 벗어던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자적 의미를 취한다면 왜 그렇게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물기는 하지만 본문이나 책이 독자에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야할 것을 요구하는 곳에서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자신의 ‘아가서 주석’에서 제임스 더럼(James Durham, 1622-1658)은 문자적 의미를 인정하지만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역사서에서처럼 또는 비유적인 책이 아닌 다른 책에서처럼 문자적 의미가 직접적이거나 일차적인 고찰 사실이 아니라 영적이고 특히 풍유적이고 비유적인 말들을 통해 제시되는 것이 이 아가서의 문자적 의미다. 따라서 아가서의 문자적 의미는 매개적(媒介的)이고 따라서 의미를 말씀에서 직접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적으로 목적 즉 성령의 의도에 따라 제시하는데 이것은 아가서에서 이용되고 있는 비유와 풍유 아래 표현된다.    

왜냐하면 문자적 의미는 (중략) 본래대로 사용되거나 비유적으로 사용되거나 간에 말씀 속에서 성령에 의해 의도된 성경 지점에서 흘러나오고 비유, 알레고리, 비유적인 성경본문을 강해할 때 분명히 나타나는 것처럼 전체의 복합적인 표현에 따라 함께 수집되고 거기에 따라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문자적으로 취해져야 하는 간명한 성경 본문에 대해 비유적 장해를 고정시키는 것이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것처럼 이런 본문들에 대해 비유적 의미(문자적이지만)를 부정하는 것도 부적절하고 불합리하다.”(James Durham, An Exposition of the Song of Solomon)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9)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같이 더럼은 아가서의 문자적 의미를 인정하는 것은 아가서를 알레고리- 물론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친교에 대한 그림으로 보는 알레고리 -로 인정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의미한다고 분명히 주장한다.

4. 모형

– 청교도 성경해석과 주석의 네 번째 원리 –

특히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이 두 언약에 대한 성경해석의 중요성에 따라 그리고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책으로 이해하려는 욕구에 따라 청교도의 신학에서는 모형론(模型論, typology, 또는 유형론, 예표론 – 구약성경의 역사는 진리가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라 보는 해석)이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다. 헨리 내프(Henry Knapp)는 모형론을 ‘구약성경의 사건, 인물, 제도 등을 장차 임할 메시아와 그의 언약 백성들의 인격과 사역을 예시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해석방법’으로 정의한다.

청교도의 지성(知性) 속에서 모형론을 취하는 것은 문자적 해석법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형적인 의미는 자주 문자적 본문을 이해하는 필수 요소였고 따라서 이런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것을 모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또한 모형론을 알레고리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제임스 더럼(James Durham)은 이 두 성경해석법 간의 다수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모형은 역사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나를 실례로 들면(마 12:40) 요나는 실제로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모형과 달리 확실한 역사적 기초가 필요하지 않다.

둘째, 모형은 사실들의 비교를 다룬다.(예, 요나와 그리스도) 그러나 알레고리는 신앙과 관습에 대한 단어, 문장, 교리들 속에서 취한다. 이 점에 대해 말하면 모형은 구약성경의 인물 및 사실들과 신약성경의 인물 및 사실들을 비교한다. 알레고리는 이런 제한이 없다.

셋째, 모형은 인물 및 사건들과 같이 어떤 사실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예, 그리스도와 복음전파) 그러나 알레고리는 교리나 믿음의 교훈 또는 삶을 규제하는 관습에 속해 있는 온갖 사실들에 적용된다.

이런 이유들로 볼 때 알레고리는 모형론보다 의미와 범주가 더 포괄적이다. 토머스 굿윈은 자신의 신학에서 모형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굿윈은 다음과 같은 일반원칙에 따라 신학 작업을 한다.

“모형에 귀속되는 것 곧 그리스도의 그림자는 더 신성하고 두드러진 방법으로 실체인 그리스도에게 근거 되어야 한다. 최고의 능력을 구비한 매우 탁월한 사람들이 단지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 곧 그토록 신령한 그분 안에 있는 탁월함은 과연 어느 정도이겠는가? 그러므로 사도들의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은 구약성경에서 유명한 그들의 어떤 선조들 속에서 또는 의식법 안에서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한 능력이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그것들의 완전함과 중심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시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에는 다윗, 솔로몬, 요셉, 노아, 삼손, 멜기세덱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가장 두드러진 모형인’ 아담이 포함된다. 아담에 대해 말할 때 굿윈은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다른 특정 인물들도 모형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의 타락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다. 거기서 사탄은 아담을 만나 아담을 정복하고 아담을 이끌어 모든 인간을 죄와 사망의 포로로 만들었다. 지금 하나님은 세상의 위대한 구속자 곧 두 번째 아담이 처음으로 자기 아버지의 진노에 직면할 장소를 정해 동산에 두시고 거기서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붙잡아 포로로 데리고 가신다. (중략) 사람은 귀에 들려주는 시험에 넘어갔기 때문에 정죄를 당했고 그러기에 사람들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은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의 한 부분이었고 그리스도는 이것 때문에 땀을 핏방울 같이 흘리셨으며 이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담에게 주어진 저주의 힘 때문이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말씀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했다. 그리스도는 동산에서 능동적, 수동적 순종으로 많은 일을 겪으셨고 결국은 처음에 동산에서 낮아지기 시작하신 것처럼 최후에 마지막 발걸음도 그랬다. 그분은 이 동산이 아니라 다른 동산에 장사되었다. 이렇게 모형과 모형이 지시(指示)한 실체가 서로 일치된다.”(Goodwin, Christ Set Forth, in Works)

이같이 굿윈의 지성(地性)에는 구약의 인물들만이 아니라 상황들도 아담과 그리스도 간의 모형 관계를 확증하는 데 작용한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나 있는 두 아담 간의 명백한 평행관계는 다른 평행관계에 문을 열어 놓는다. 따라서 청교도는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모형은 청교도의 성경해석에 있어서 사소한 요소가 아니라 구약성경의 기독론적인 해석의 배후에 놓여 있는 핵심 원리였으며 이 원리의 가장 적절한 실례(實例)는 토머스 굿윈이다.

5. 신앙의 유비

– 청교도 성경해석과 주석의 다섯 번째 원리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해석원리가 1장 9항에 제시된다. 그것은 곧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고 따라서 “어떤 성경본문의 참되고 충분한 의미에 (중략) 대해 의문이 생길 때 그 의미는 더 명확히 말하는 다른 본문들을 통해 파악하고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유비’(類比, 맞대어 비교함, analogia fidei)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내재적인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성경 자체는 모순이 없다는 데서 나온다. 이런 이유로 ‘신앙의 유비’는 청교도의 성경해석 방법과 성경주석 방법의 중대한 요소였다.  

성경의 통일성 개념과 관련해서 내프(Henry Knapp)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앙의 유비’는 어떤 특정 본문의 해석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유비’의 기능은 성경 주석자가 본문에 대해 적절한 설명으로 간주하는 선택들을 한정시킨 것이다.”

또 존 오웬(John Owen)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리를 탐구할 때 마음속에 ‘신앙의 유비’를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전체 신앙의 체계(體系)나 믿어야 할 것 속에 조화(調和), 상응(相應), 균형(均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정 본문들이라고 하여 이 질서를 깨뜨리거나 어지럽혀서는 안 되고 서로 간의 적절한 관계에 따라 파악되어야 한다.”(John Owen, An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또한 성경 주석자에게 유효한 선택들을 제한하는 일 외에 ‘신앙의 유비’는 모순 없는 성경의 내적 일관성(一貫性)을 유지시킨다.

‘신앙의 유비’는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e)와는 다르다. 그것은 ‘신앙의 유비’는 신학자가 분명하고 애매하지 않은 로키(loci, passage, 본문)에 따라 구성한 성경의 의도에 대한 일반 의미를 불분명하거나 애매한 본문들을 해석하는 기초로 사용하는 원리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성경의 유비’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제의 난해한 본문과 관련되어 있는 더 분명한 본문들을 비교함으로써 불분명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신앙의 유비’와 ‘성경의 유비’의 기본적인 진리성을 인정하면서 존 플라벨(John Flavel, 1627-1691)은 “그리스도인은 성경본문을 ‘신앙의 균형’에 부합(符合)되지 않는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성경 해석자는 한 성경본문을 해석할 때 그 본문이 속해 있는 진리들과 제멋대로 분리시켜 그 본문에 특정 해석을 집어넣을 수가 없고 만약 그렇게 하면 다른 성경본문과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이유로 야고보서 2:24과 요한복음 14:28 같은 본문들은 교황주의(papism) 및 소키누스주의(Socinianism) 이단을 피하기 위해 다른 성경본문들과 비교해 보고 해석해야 한다.  

굿윈의 ‘에베소서주석’ 서언에서 생크풀 오웬(Thankful Owen, 1620-1681)과 제임스 바론(James Baron, 1649-1683)은 “만일 (성경 해석자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면 그는 언제든지 그것을 ‘신앙의 유비’ 및 ‘개혁파의 정당한 경배’와 적절하게 관련시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굿윈은 에베소서 1:5의 말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강해에서 택함 받은 자를 성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 성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지를 질문한다.

굿윈은 자신이 처음에는 하나님이 택함 받은 자를 예정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영광의 한 부분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굿윈은 생각을 바꾸어 ‘신앙의 유비’를 고수하면서도 ‘복합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성경본문을 정확한 해석할 수 있는 성경해석 방법을 보여 준다. 헬라어 ‘에이스 아우톤’(εἰς αὐτόν, 한글 성경 ‘자기’)의 해석에 대해 굿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 헬라어 단어는 대기음의 변화로 독자적으로 ‘자기에게’(to himself)로 해석되므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킬 수 있다. 내가 최근에 선택교리(롬 2:4-6)를 다루면서 확인한 것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을 자기에게 그리고 자신을 위해 선택하신 것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므로 그 표현 속에 더 많고 더 큰 의미가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 번 강조했던 것처럼 나는 성경의 어구(語句)와 단어(單語)들을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 따라 그 해석을 취하였고 이것이 성경을 해석할 때 내가 항상 취한 법칙이 되고 있다. 사실 두 가지나 그 이상의 의미로도 그것은 문맥 및 ‘신앙의 유비’와 일치할 것이다.”(Goodwin, Exposition of Ephesians in Works)

굿윈은 비록 택함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 예정된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리킨다고 할지라도 그 본문의 가장 충실한 의미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경우에 굿윈이 ‘하나의 의미’ 원리를 버린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이 에베소서 1:5의 문맥에서는 ‘신앙의 유비’에 따라 ‘하나의 의미’는 ‘자기에게’가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함께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성경해석 방법이 보여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해석의 다양한 요소들이 굿윈이 사용하는 정교한 해석학적 및 주석적 방법의 한 부분으로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6. 건전하고 필연적인 결과

– 청교도 성경해석과 주석의 여섯 번째 원리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6항에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 인간의 구원, 믿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경륜이 성경에 명확히 제시되어 있거나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따라 성경에서 추론될 수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성경해석의 주제를 계속 제시 한다.

여기서 마지막 부분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은 종교개혁시대 이후로 개혁파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해석학적 도구였다. 그러나 ‘런던 침례교회 신앙고백’(1677,1689년)은 “성경에 (중략) 또는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따라 성경에서 추론될 수 있다.”는 말을 빼고 대신 “또는 필연적으로 성경 속에 포함되어 있다.”로 바꿨는데 이는 그들의 유아세례 거부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총회 신학자들을 포함하여 개혁파 신학자들에게 타락 이전 ‘행위언약’에 대한 교리는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따른 추론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성경에 ‘행위언약’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된 본문은 하나도 없다.  대신에 성경 전체의 증거에 기초하여 청교도 신학자들은 ‘행위언약’과 이와 같은 다른 어구들(예 자연언약)이 창세기 2장의 아담과 관련된 문맥에 정확히 표시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는 앞서 언급한 성경해석 원리를 오용(誤用)하거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교황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아리우스주의, 소키누스주의와 같은 다양한 신학 전통들을 논박함으로써 이 성경해석 원리에 대해 더 엄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길레스피에 따르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추론할 수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논박당하지 않고 또 논박당할 수 없을 만큼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단순 명료한 본문들 또는 그런 귀결들 외에는 성경에서 나온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교황주의자들이 범하는 다양한 신학적 오류를 논박하기 위해 고도의 신학지식이 요구되고 따라서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대한 아르미니안의 관점은 오류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명확한 본문’이 아니라 ‘필연적인 귀결’이 여자들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과 유아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유아세례 관습에 대해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들의 다른 해석학 및 주석 방법들에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 성경해석 원리를 사용했다. 두 언약 구조(構造, 굿윈 및 오웬과 같은 ‘삼중구조 지지자’도 받아들인 구조) 관점이 분명히 하는 것처럼 구약과 신약 간에는 통일성이 있고 대부분의 청교도신학자들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되어 최후 심판에서 끝나는 하나님의 웅대한 구속계획을 가리키는 의미로 ‘은혜언약’이라는 신학 용어를 사용했다.

성경해석학적으로 유아세례 관습을 옹호한 이 신학자들은 아브라함과 맺어지고 새 언약 시대에 지속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던 언약에 큰 비중을 두었다. 필립 케리(Philip Kerry, ?-1710)와 같은 유아세례 반대주의자와 논쟁을 벌인 일로 유명한 플라벨은 두 언약은 서로에게 빛을 던져 준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 본문을 신약성경의 신앙관이나 의무를 명확히 하고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고 평가절하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전체 율법(즉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특정 율법들(예, 유아세례 관습)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7. 성령과 이성(理性)

– 청교도 성경해석과 주석의 일곱 번째 원리 –

존 오웬은 성경해석의 또 다른 근본 국면에 대해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교만한 태도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에 대해 크게 화를 내고 싶다. 나는 자신의 능력을 크게 넘어서서 교만하고 무지하게 연구하는 자에게서 진리를 발견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하겠다.”(Owen, Causes, Ways and Means in the Works)  오웬은 이같이 “성령은 자신이 모든 영적 조명(照明)의 직접적인 저자이시기 때문에 택함 받은 자의 지성(知性)에 역사해서 그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영적 특권이 당연한 것처럼 자동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이성의 한계로 말미암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내프(Kanpp)의 주장처럼 인간의 이성(理性)은 표준으로서의 지위를 일관되게 거부당했고 오히려 ‘신학의 인식 원리’(Pnncipium cognoscendi theologiae)인 성경에 예속되어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을 보면 신학에서 인간 이성(理性)의 역할이 개혁파 신학자와 소키누스주의(Socinianism) 신학자 간의 논쟁의 핵심 요점이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소키누스주의 신학자들이 이성(理性)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이유로 청교도는 거의 모든 소키누스주의자들의 교리를 거부했다. 또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도 인간의 이성을 신앙의 법칙으로 삼아 이성에 높은 지위를 부여했고 이것은 왜 그들의 신학이 오류가 많은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루터교인과 교황주의자도 개혁파 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성찬(聖餐)을 이해할 때 이성(理性)에 문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교도에게 인간의 이성(理性)은 유용하지만 한계를 갖고 있다. 복음의 비밀은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수많은 진리를 드러내지만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하심으로써 그들이 이성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신학적 오류에 빠지는 길로 들어서지 않고 이 진리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신다. 굿윈은 복음 속에 포함된 다수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하나님은 자신만큼 오래되고 (중략) 자신과 등등한 (중략) 아들을 두고 계셨다.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에 계셨을 때 하늘에도 계셨다. (중략)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이 율법에 복종하셨다. (중략) 오직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 몸의 피를 흘리셨다. (중략) 또한 영원토록 영광을 받을 하나님이신 그분이 저주를 받으셨다. (중략)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하셨을 때보다 그 아들에게 진노를 나타내신 때는 없으셨다.”(Goodwin, A Discourse of the Glory of the Gospel)

따라서 굿윈은 모든 신학적 오류의 원인은 ‘이것들을 하나로 조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굿윈은 분명히 인간의 이성(理性)을 하나님의 계시(啓示) 보다 더 높이는 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이것은 방금 제시한 것과 같은 수많은 은혜로운 진리들이 이성으로 말미암아 부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서굿윈은 외관상 모순이 복음의 비밀에 의해 해결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다수의 개혁파 정통주의의 반대자들을 다음과 같이 거론한다.    

“아리우스주의자는 신성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 이 두 본성을 조화시킬 수 없었다. (중략)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배제(排除) 한다. (중략) 

소키누스주의(Socinianism) 자들에 대해 말하면 그들은 인간의 죄에 대한 배상(賠償)은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만약 하나님이 값없이 용서하신다면 어떻게 배상을 위해 용서하실 수 있겠는가?’ (중략)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율법폐기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들에 따르면 복음의 모든 은혜로운 진리는 사람은 영원 전에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사람은 믿기 전에는 의롭다 함을 받지 않고 그래서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믿을 때까지는 진노의 아들이다. (중략) 그런데 율법폐기주의자는 한 진리를 취하기 위해 다른 진리를 제외시킨다. 하지만 사실은 둘 다 취해야 한다. (중략) 

이번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들의 오류의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외관상으로 모순되어 보이는 복음 속의 진리를 단순히 조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작정’을 조화시키는 법을 모르고 있다.”(Goodwin, Glory of Gospel)

인간의 이성(理性)만으로는 복음의 이런 비밀들을 풀어낼 수 없다. 아담은 자연적 양심(良心)과 이성(理性)을 소유했지만 초자연적 믿음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내재했던 이 두 원리를 넘어선다. 만일 신앙이 아니라 인간 이성이 성경해석의 제일 원리가 된다면 구원의 비밀을 전혀 또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플라벨도 “인간의 이성이 신앙과 계시에 속해 있는 문제들을 주제넘게 중재하려고 할 때 단지 찬탈자(簒奪者)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대신 인간의 이성은 신앙의 발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비(非)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많은 역사가 이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성이 자체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경의 진리들을 믿게 하려고 성도에게 성령을 주신다.

프랜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은 “비록 모든 진리가 이성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진리의 경계가 이성의 경계보다 훨씬 더 넓게 확대됨으로) 진리에 대한 거짓말이 참된 이성의 보호 아래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진리가 다른 진리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로써 17세기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입장을 적절히 요약했다.(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또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도록 택함 받은 자를 이끄시는 행위자이시다. 인간의 이성(理性)만으로는 복음의 비밀의 고지(高地)까지 올라갈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超自然的) 믿음이 요구된다.

마치는 말

청교도의 성경해석 방법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더 많이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존 오웬, 토머스 굿윈, 존 하우(John Howe, 1630-1705),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ck, 1628–1680)과 같은 청교도 저술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의 박식한 성경 지식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원어로 거침없이 읽었고 그들의 작품은 그들이 아람어(그들은 탈굼을 자주 인용했다)와 콥트어와 같은 다른 언어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웬은 원어로 특히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것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또한 정통과 이단을 막론하고 유럽대륙의 신학자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교회사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그들의 다양한 성경주석은 이교도와 기독교인 저술가들의 작품에서 인용한 글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청교도는 언약적인 성경 이해를 통해 역사를 두 기본 언약(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누었고 이것은 그들이 성경을 의식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렌즈를 끼고 읽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들이 모형론과 때때로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들은 성경 한 본문에서 ‘다수 의미’(소위 로마 가톨릭 쿼드리가의 4중의 의미)를 거부했지만 그들의 작품은 그들이 종종 복합적(複合的)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문자적 의미의 합법적 적용인 어떤 본문들의 ‘더 충분한 의미’를 찾아내는 데 예민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청교도들은 성경은 내적으로 일치된다는 것과 대다수 신학적 진리는 성경의 한 곳 이상의 본문들에서 수집된 것이라는 관점에 따라 ‘신앙의 유비’와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기본원리를 그들의 성경해석의 필수 도구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성경해석 원리가 중요하지만 만일 인간의 이성(理性)만으로 복음의 비밀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오류와 이단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주어진 초자연적 믿음만이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이 자신만큼 오래되신 아들을 두셨다고 믿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리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성경해석의 도구들이 요구되었다.(*) 글쓴 이 / Joel R. Beeke & Mark Jones,  ‘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 한글 번역본 /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삶을 위한 교리’ 김귀탁 옮김, 부흥과개혁사, 서울, 2015년, pp 42-57. (주) 본 기사는 위 한글 번역본에서 발췌했으며 본지 편집 편의상 관주를 생략했고 내용을 요약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