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의 역사적 이해

본래 종교개혁이 있기 이전에는 교회가 칭의(稱義, Justification)와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 말은 칭의와 성화가 본래 하나의 국면을 가진 하나의 개념이었다는 의미다. 사실 칭의와 성화의 개념은 로마 가톨릭에서 흔히 쓰는 ‘의화’(義化,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 내면의 변화를 통해 죄인이 의롭게 됨)라는 용어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이 ‘의화’를 ‘칭의’와 ‘성화’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나눠서 설명했다. 그 배경에는 어거스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거스틴의 후기 논쟁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 펠라기우스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원죄교리를 부정하고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였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원죄교리와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확증했고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 이후로 공교회는 한 번도 원죄교리를 의심치 않았고 행위구원론은 이단사설에 불과했다. 그런데 중세에 들어오면서 우리가 은혜로 부름을 입지만 그 부르심과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시 행위가 필요하다는 교의(敎義)가 부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이다.
이 ‘반(半) 펠라기우스주의’는 원죄교리를 인정하고 스스로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한다.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이 시작될 수 있다고도 말 한다. 그러나 구원이 그렇게 시작했다면 우리에게 행위가 요구되고 요구될 뿐 아니라 그 행위에 의해서 구원과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결국 어거스틴 시대에 이미 결론이 난 은혜의 교리를 뚫고 트로이 목마처럼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저주를 받는 이단 교설인 ‘반(半) 펠라기우스주의’가 교회 안에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 생각해볼 것이 있다. 곧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의 발호가 종교개혁자들이 칭의와 성화를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은혜 교리를 뚫고 들어온 행위 구원론에 대응해서 사도들이 전한 원천적 교리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나누었다. 이 이유를 모르면 사실 칭의와 성화의 교리를 오해하기 쉽다. 칭의와 성화가 구분되는 시점이 이 지점이기 때문이다.
흔히 칭의가 법정적이라는 말은 우리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뜻이자 죄책이 제거되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책은 어거스틴이 말한 아담의 첫 범죄로 우리가 아담의 언약 안에서 물려받게 된 죄책과 그 결과로 얻게 된 사망을 일컫는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서 5장에서 잘 성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죄책을 기반 해서 우리에게 조상 특히 부모로부터 유전하는 부패와 오염을 제거하는 것으로 성화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실제적인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 개념으로 성화를 설명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구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은혜의 교리의 확증에도 불구하고 ‘반(半) 펠라기우스주의’가 다시 트로이 목마처럼 교회 안으로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이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의 시작은 은혜다. 그러나 그 구원이 완성되려면 다시 행위구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겉모양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닮았지만 그 내용은 어거스틴의 논적이었던 펠라기우스를 닮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교리적 변종에 맞설 생태학적 백신이 필요했다.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의 위장은 매우 매혹적이며 사람의 감성에 맞아 사람들이 분별을 하지 못하고 결국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 행위구원론의 변종 복음에 감염된 것과 같은 경로를 가졌다. 그래서 원천적으로 행위 구원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실체를 두고 ‘의화’ 개념을 ‘칭의’와 ‘성화’의 개념으로 구별해 설명해야 했다. 그것이 종교개혁 칭의론의 출발점이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 500년의 신학적 유산으로 칭의 교리는 변종 행위 구원론에 맞서는 교리다. 인간의 행위가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칭의에는 ‘법정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 법정성을 얻는 유일한 근거 역시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 외에는 없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행위가 바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가 의를 얻는 유일한 근거이고 원천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유효하게 적용되는 방편이 바로 믿음이다.
더불어 ‘전가’(轉嫁,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교리도 이런 방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성화는 칭의와 항상 같이 설명되었고 칭의를 근간으로 해서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성화 역시 정당화 되었다. 마치 아담의 첫 범죄로 모든 인류에게 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 정당화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른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한 사람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근거가 되어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최종 법정에서 의롭다는 판정이 정당화된 것이다. 곧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 없다’(not guilty)라고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선고에 근거해서 우리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실제적 자유가 이뤄지도록 ‘성령’이 선물로 약속되었다. 이것은 바울의 신학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는 이런 신학적 구조를 상당히 약화시키도록 아니 아예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우도록 교회와 신학계를 압박하고 있다. 과연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성경 해석이 정당한가? 1세기 유대교의 연구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최종적으로 다루어야 할 텍스트는 여전히 성경이고 이 성경이 과연 1세기 유대교의 색안경으로 해석되는 것이 정당성이 있느냐를 평가해 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새 관점’의 신학이 다시 교회 안에 공로주의를 들여 놓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즉 ‘새 관점’은 전반적으로 원죄교리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데 우리는 이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이 ‘새 관점’ 학파들은 지난 500년의 신학을 허무는 방향으로만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 이후 지난 1500년 이상의 신학적 체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새 관점’ 학파와 같은 유의 행위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판단은 그들이 원죄의 교리를 다루는 방식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글쓴 이 / 노승수 목사(새물결플러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