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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바로 이해하기

성경적 칭의론

칭의 바로 이해하기

. 칭의교리가 왜 중요한가?

‘칭의’(稱義, justification)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해 죄인(罪人)을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을 뜻하는 신학용어이다. 칭의교리에 대한 논쟁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 진행형일 뿐 아니라 다가 올 미래에도 그 논쟁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칭의교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 교리 자체가 가진 신학적 중요성 때문이다. ​칭의의 성격과 방법 그리고 그 원인들에 대한 ‘약간의 다른 관점’이 결국에는 다른 모든 신학 측면에까지 영향을 미쳐 ‘커다란 신학적 차이’로 귀결되는 경향이 짙다는 면에서 여전히 칭의교리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칭의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고찰 할 수 있지만 본고에서는 전통적 신학 논제(論題, loci)의 범주를 따라 논의하겠다. 그 순서는 칭의의 ‘성경신학적 중요성’ –> ‘역사신학적 중요성’ –> ‘조직신학적 중요성’ –> ‘실천신학적 중요성’이 될 것이다.  

1. 칭의의 성경신학적 중요성

교리(敎理, doctrina)란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要約) 정리하여 명제적(命題的) 진술(陳述)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는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발현(發現)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칭의교리’는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칭의의 가르침을 요약 정리하여 명제적 진술을 한 성경적 가르침들의 모음 형태(combined form)를 지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들 수 있다. 같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왜 같은 칭의 주제에 ‘다른 교리적 진술’을 하는가? 즉 같은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왜 서로 다른(때로는 현저히 다른) 칭의 교리를 말하는가?  이 차이(差異)는 여러 이유들로 인해 불거질 수 있지만 성경에 대한 다음과 같은 관점의 차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기본적으로 성경을 어떤 해석학적 틀 안에서 볼 것인가?
  • 혹은 다양한 해석학적 도구 가운데 어떤 도구를 최우선으로 취하여 사용할 것인가?
  • 또는 특정 본문을 특정 시대적 맥락(context) 가운데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아니면 신구약 통일성 관점에서 특정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시대는 어느 특정한 성경해석 방법 하나만 최고(the best)라고 말 할 수 없다. 수 없이 많은 ‘새 관점’들이 물밀 듯 성경해석 학계를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교리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지만 이처럼 다양한 성경해석 방법은 기존(旣存)의 전통적 칭의교리 성격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칭의교리의 뿌리를 뒤흔드는 중대한 도전을 주기도 한다.

현재는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칭의교리 때문에 더욱 성경신학(聖經神學, Biblical theology) 분야와 성경해석학 분야가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그 역(逆)의 상황도 혼재(混在)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동시에 고무적인 일이기까지 하다. ‘성경’과 ‘교리’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 상호적(相互的)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날카롭게 분석 평가할 때 비로소 시너지(synergy, 相乘效果) 효과로 발휘되어 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물꼬를 틀 수 있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2. 칭의의 역사신학적 중요성

역사신학(歷史神學, Historical theology)은 장구(長久)한 교회역사의 흐름 속에 특정한 성경적 가르침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살펴보고 현재의 거울로 삼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칭의교리’는 역사신학적인 면으로도 중요하다. 칭의교리를 중심에 놓고 교회 역사를 찬찬히 살피다보면 그 장구한 흐름 안에 온갖 종류의 교리적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칭의교리’에 대한 자신의 신념 때문에 기쁨으로 춤을 추기도 하고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할 뿐 아니라, 슬픔과 고통과 비애에 잠 못 이루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바치기까지 했던 수없이 많은 교회의 인물들을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은 칭의교리 연구자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특히 칭의교리 발전의 장구한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떤 방향성을 갖고 칭의교리를 대해야 하는지 청사진이 그려진다. 역사(歷史)야말로 현재(現在)의 거울이요 시대(時代)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뒤에 심층적(深層的)으로 살펴보겠지만 교회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불균형적인 칭의론’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귀한 잣대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칭의 교리를 역사신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한다는 말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여 과거의 영광과 슬픔을 피상적으로 경험하는 데 그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거울로 삼아 다시금 건전한 방향성을 가지고 힘껏 도약(跳躍)할 수 있는 운동 능력을 기르는 것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칭의교리는 역사신학을 발전시키며 역사신학은 칭의교리를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상호 발전의 사명이 서로에게 부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칭의의 조직신학적 중요성

조직신학(組織神學-Systematic Theology, 敎義學-Dogmatics)은 기본적으로 특정 신학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하여 주제(主題)별로 교리적인 진술을 하는 학문이다. 조직신학은 모든 교리적 분야 예를 들면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을 포괄적 조망(眺望) 하에 다룬다.    

비록 조직신학은 각론(各論)들로 구성되지만 각 각론들은 언제나 교리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유기적(有機的)으로 존재한다. 이런 조직신학의 통합적 성격을 칭의교리 역시 그대로 닮아 있다. ​칭의교리는 기본적으로는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에 속한 교리지만 단순히 그 영역이 구원론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 칭의의 유효적원인(有效的原因, efficient cause,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한 필수적인 효과적 근원 원인)이 하나님이시라면 이는 넓게는 신론(神論)의 영역이며 좁게는 신론 중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의 영역이다.
  • 칭의의 질료적원인(質料的原因, material cause,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한 재료적 원인)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righteousness)라면 넓게는 기독론(基督論)의 영역이고 좁게는 기독론 중 그리스도의 사역(使役, works) 영역이다.
  • 칭의의 도구적원인(道具的原因, instrumental cause, 어떤 일이 일어날 때 필요한 수단) 이 신자의 믿음(faith)이라면 넓게는 구원론(救援論)의 영역이고 좁게는 구원론 중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 영역이다.

이 같이 동일(同一)한 칭의 사건이 신론, 기독론, 구원론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조직신학의 영역이므로 칭의론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곧 조직신학 각론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로 발전 될 수 있다. 최근에는 칭의 사건을 교회론 혹은 종말론적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짙은데 이 또한 칭의 교리 자체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교리적 확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칭의론은 그 본질상 조직신학의 각론을 개별적(個別的)으로 동시에 포괄적(包括的)으로 내포하고 있는 교리이므로 반드시 조직신학 전체를 투영(投影)하는 거시적(巨視的) 조망과 통합적(統合的) 조망 하에 연구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조직신학 내에서의 각론끼리의 통합적 측면뿐만 아니라 모든 신학적 측면 즉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다음에 살펴볼 실천신학까지를 아우르는 폭넓은 조망 하에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칭의교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 교회 등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로 이어질 수 있는 필연성(必然性)과 당위성(當爲性)을 지닌다.  

4. 칭의의 실천신학적 중요성

실천신학(實踐神學, Practical Theology)은 성경, 교리, 역사 등이 말하고 있는 바를 분석하여 개인, 사회, 교회, 국가의 각 영역들에 적용하는 학문이다. 교리는 ‘삶의 체계’가 되어야 한다. 삶과 동떨어진 교리는 결국 피상적인 외침이요 건조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칭의교리가 신학적, 교리적으로 중요하다면 그 중요성이 한낱 책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신학적 중요성이 개인의 삶과 신앙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칭의교리는 신자의 삶의 토대(土臺)요 근본(根本)이다.

하나님 나라는 의인(義人)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고전 15:50) 하지만 이 세상에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다.(롬 3:10) 그렇다면 어떻게 죄인(罪人)이 의인이 될 수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의 의(義)가 믿음으로 죄인에게 전가(轉嫁, imputation)됨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칭의 사건의 핵심이다.

이러한 칭의 사건은 성도의 삶의 양태(樣態)와 태도를 규정한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므로 죄인은 반드시 죽어 음부(陰府)의 권세 아래 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義)의 공로에 힘입어 값없이 의인으로 칭함을 받아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寶座) 앞에 설 수 있게 된 자가 바로 성도이다.

​이러한 칭의 사건을 실존적으로 깨닫고 경험한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는 ‘감격(感激)’과 ‘감사(感謝)’와 ‘순종(順從)’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감격적인 칭의 사건의 의미가 각 개개인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데 유효적 원인으로 작용해야 한다. 바른 신학과 바른 교리의 소유는 개인의 잔잔하고도 무미건조한 삶의 양태 가운데 엄청난 반향과 충격을 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실천적 축(軸)을 이루는 근본을 바로 칭의교리가 감당할 수 있다.

칭의교리가 이같이 ‘성도 개개인’을 세울 수 있다면 이는 곧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세우는 일과 다름없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말처럼 칭의론이 바로 설 때 교회도 같이 서고, 칭의론이 무너질 때 교회도 같이 무너진다. 이처럼 칭의교리는 실천신학적 토대인 성도개인과 교회를 세워나감에 있어 근본 구조(構造, infrastructure)를 이루는 교리적 기저(基底)요 주춧돌의 역할을 감당한다.

이제까지 칭의교리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기 전 서론적 고찰로서 칭의교리의 중요성을 성경신학적, 역사신학적, 조직신학적,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혹자는 “또 칭의론이야?”하고 미간을 찌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지긋지긋함과 식상함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칭의교리 자체에 대한 반항심까지 잔뜩 서려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칭의교리는 여전히 중요하며 여전히 모든 성도가 살펴볼 가치와 이유가 충분한 교리이다.  

지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 지금 칭의교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며 ‘성경’과 ‘역사’와 ‘신학’이 칭의에 대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해 주의 깊게 경청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 ‘칭의’라는 토대(土臺) 위에 두 발 딛고 서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Ⅱ.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칭의론

신학과 교리의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경험한 오랜 역사이므로 몇 가지 레토릭(rhetoric, 修辭學)으로 단순화하여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표현들로 신학 전체 역사를 대결(對決) 구조(構造) 안에서 구도화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객관’ vs. ‘주관’, ‘초월’ vs. ‘내재’, ‘초자연’ vs. ‘자연’,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역할(책임)’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재치 있는 독자라면 이미 알아챘겠지만 이런 대결 구조는 두 개의 큰 대결의 틀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인데 즉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주요 주체(主體)들 사이의 영역(領域) 다툼이요 주권(主權) 다툼이다.

 이런 양상(樣相)은 칭의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을 칭의 사건의 결정적 주체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인간’을 칭의 사건의 결정적 주체로 볼 것인지 혹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첨예(尖銳)한 의견 대립으로 점철된 싸움의 장소가 바로 칭의론의 전쟁터이다. 워낙에 이 싸움이 치열하다 보니 객관성(客觀性)을 상실한 채 서로 양극단(兩極端)으로 치닫는 경향이 짙어왔다.  

그 결과 다양한 형태의 ‘불균형적(不均衡的) 칭의론’이 양산(量産)되고 말았다. 이런 칭의론의 역사는 가슴 아픈 역사이고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역사이다. 이 같은 첨예한 대결 구조 안에서 신학을 구도화(構圖化) 하여 설명하는 여러 가지 틀 가운데 이 글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강조’ vs. ‘인간의 역할(책임) 강조’라는 틀을 사용하여 오랜 역사의 칭의론의 흐름을 조망(眺望)해 보고자 한다. 이를 결론부터 말하면 칭의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강조’와 ‘인간의 역할(책임)’ 강조 둘 중 어느 것 하나 무시(無視)되거나 평가절하(平價切下) 되지 않도록 둘 다 놓치지 않고 ‘균형 있게’ 조망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역할(책임)’ 이 둘 사이의 균형(均衡)을 잡는 일이 쉽지는 않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주권 만’ 강조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역할(책임)’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강조’하는 경향이 교회사 가운데 왕왕 있어왔기 때문이다. 먼저 칭의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 강조’에만 집중한 칭의론을 살펴보고 이어서 ‘인간의 주권 강조’에 더 집중한 칭의론을 살펴볼 것이다. 이런 가운데 둘 사이의  균형 잡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1. 반(反) 율법주의 칭의론

먼저 용어 정리가 필요하다. ‘반(反) 율법주의’를 영어로는 안티노미아니즘(antinomianism)이라고 하고 한글로는 ‘율법폐기론(律法廢棄論)’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반(反) 율법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평가절하하거나 논외(論外)로 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反) 율법주의’는 17세기 영국에서 크게 유행한 신학사조(神學思潮)인데 그 탄생 배경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반(反)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은총(恩寵)과 인간의 선행(善行) 준비가 합력하여 의(義)롭게 된다.”는 로마 가톨릭신학과 “인간의 믿음이 칭의의 조건(條件)으로 작용한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 신학사상이 유럽 전체를 강타하는 상황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다.

‘반(反) 율법주의’ 자들에게 있어 칭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사역으로만 가능하고 이 속죄 사역은 완전하게 무상(無償, free)의 은혜이므로 인간의 역할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반(反) 율법주의’ 자들은 인간의 ‘믿음 행위’가 칭의 방정식에 잠입(潛入)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그러므로 ‘반(反) 율법주의’ 자들에게는 칭의가 ‘인간의 믿음’ 전에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물론 ‘반(反) 율법주의’ 자들의 최대 논적(論敵)은 아르미니우스주의였으므로 왜 그들이 칭의 사건 가운데 ‘인간의 믿는 행위’를 철저히 제거(除去)하려 했는지 일견 이해는 간다. 인간중심주의 신학이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반대해 어떻게든 칭의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지키려고 노력한 점은 치하(致賀)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극단적(極端的) 태도였다.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지 간에 ‘반(反) 율법주의’가 전개한 칭의론 안에는 ‘인간이 들어설 공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책임(責任)과 역할(役割)이 배제(排除) 된 채 구원론(救援論)이 전개되는 양상으로 귀결되었다. 즉 ‘인간의 믿음’ 이전에 칭의는 이미 무상(無償)으로 완료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의미인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through faith) 원리는 무색하게 되었다.

이미 칭의(稱義) 된 자들의 죄(罪)는 하나님 눈앞에서 완전하게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悔改) 기도할 필요도 성화(聖化)의 삶을 살 필요도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논리가 양산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성화의 가능성과 행함의 필요성이 구조적으로 제한되는 논리를 품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사상을 ‘반(反) 율법주의’ 혹은 ‘율법폐기주의’라고 한다.

‘반(反) 율법주의’ 칭의론은 죄인의 칭의를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모든 것을 다 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없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반(反) 율법주의’ 논리에서는 ‘인간의 책임과 역할’이 자연스럽게 배제(排除)되므로 ‘반(反) 율법주의’ 칭의론은 불균형적(不均衡的) 칭의론의 전형(全形)으로 발전했다. 특히 존 이튼(John Eaton, 1574-1630), 토비아스 크리슾(Tobias Crisp, 1600-1643), 존 설트마쉬(John Saltmarsh, d.1647) 등이 대표적으로 ‘반(反) 율법주의’ 칭의론을 전개한 인물들이다.

2.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 극단적 칼빈주의) 혹은 ‘초(超) 칼빈주의’는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학사상이다. 하이퍼(hyper, 극단적) 혹은 초(超, micro)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하듯이 ‘하이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에서 지나치는 신학사상을 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나치다는 말인가?

만약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칼빈주의를 ‘하나님의 주권 강조 사상’으로 정의(定意) 한다면 ‘하이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지향(指向)하는 ‘하나님의 주권 강조 사상’을 한층 더 뛰어넘어 ‘하나님의 주권’ 외에는 모든 것을 무시(無視)하려는 극단적(極端的)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하이퍼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은 두 가지로 압축(壓縮)된다.

첫째, 복음에로의 부르심(召命, calling)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적용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만 복음의 부르심이 적용된다고 주장 한다.주1)

둘째, 불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 ‘믿음’과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거부 한다. 즉 복음을 수납(受納)할 때 ‘인간의 역할’이 필요 없다고 주장 한다.

결국 ‘하이퍼 칼빈주의’는 구원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의 역할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측면에서 17세기 ‘반(反) 율법주의’의 재판(再版, reprint)의 성격을 갖는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요체(要諦)인 극단적 하나님주권 중심 사상이 칭의론에 적용되면 17세기 ‘반(反) 율법주의’ 칭의론보다 더 극단적인 칭의론으로 치닫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이퍼 칼빈주의’가 말하는 칭의 사건은 하나님의 내재적(內在的) 행위(God’s immanent act) 속에서 완전하게 완료(完了)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를 신적(神的) 작정(divine decree)으로 이해한다면 칭의 사건은 영원 전(前)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가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에서 완료된다는 의미를 자세히 뜯어보면 이는 신학적으로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의 작정과 실행에 대한 전통적 틀인 ‘영원에서의 작정, 그 작정의 시간 속에서의 실행’(decree in eternity & its execution in time)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칭의가 하나님의 영원 전 내재적 행위에서 완료된다면 그 칭의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적 시간 속에서의 실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칭의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이퍼 칼빈주의’가 말하는 칭의 사건은 첫째 인간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현재(現在) 실태(實態), 둘째 인간의 존재 자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재(現在) 시간(時間), 셋째 인간의 현재(現在) 믿음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이 단순히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 속에서 완료되는 뜬 구름과도 같은 신기루에 불과한 사건이 되고 만다.

17세기 반(反) 율법주의자들처럼 18세기 ‘하이퍼 칼빈주의’ 자들의 주 논적(論敵)도 아르미니우스주의였다. 칭의의 영역에서 인간의 역할이 꽤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칭의론의 뿌리를 초장부터 잘라내기 위해 ‘하이퍼 칼빈주의’ 자들은 반(反)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극단적으로 칭의를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 안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은 극단적으로 강조되었지만 ‘인간의 역할과 책임’은 동시에 완전하게 제거(除去)되어버렸다. ‘반(反) 율법주의’ 보다도 더 극단적인 불균형적 칭의론이 탄생한 것이다. 존 스켑(John Skepp, d.1721), 조셉 허시(Joseph Hussey, d.1726), 존 브라인(John Brine, 1703-1765) 등을 대표적 ‘하이퍼 칼빈주의’ 자들로 명명할 수 있다.

3. 영원 칭의론

칭의론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던 또 다른 사상 중 하나가 바로 ‘영원 칭의론’(eternal justification)이다. ‘영원(永遠) 칭의론’은 또 ‘영원으로부터 칭의’(justification from eternity)라고도 한다. ‘영원 칭의론’의 핵심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前) 즉 ‘영원 전’에 이미 칭의가 완료(完了)되었다는 것이다. 일견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과 유사(類似)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에서 칭의가 완료되지만 그 내재적 행위를 반드시 ‘영원’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을 칭의의 완료 점으로 상정하여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 자체에 더 큰 강조점을 둔다.

반면에 ‘영원 칭의론’은 칭의의 완료 점을 하나님의 내재적 생각보다는 ‘영원’ 그 자체에 두어 영원이 내포하는 의미 자체에 더 큰 방점(傍點)을 찍고 있다. 즉 시간(時間) 전(前) 영원에서부터 우리 모두의 칭의는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이 ‘영원 칭의론’의 요체(要諦)이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로서의 ‘영원 칭의론’ 즉 영원에서부터 모든 칭의가 완전히 완료되었다는 극단적 입장을 가진 인물은 교회 역사에서 오롯이 찾아보기 힘들다. 칭의의 시작점과 완료 점을 영원에 두고 칭의론을 전개하는 인물들도 시간 속에서의 믿음의 역할 등에 대해서 여전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 칭의론’은 칭의의 방정식 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신학적 수사(修辭)로 자주 쓰여 왔으며 그 성격상 많은 오해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주지(主旨)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반(反) 율법주의 칭의론’,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 ‘영원 칭의론’ 등은 ‘인간의 역할(책임)’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칭의론들 이었다. 인간 중심적 칭의론 특히 아르미니우스주의 칭의론과 치열한 진리 논쟁 가운데서 탄생한 이런 칭의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도(意圖)의 긍정적인 면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칭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이 무시(無視)되거나 배제(排除)되어서는 안 된다. 반 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영원 칭의론은 바로 이러한 오류(誤謬)를 범했다.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역할’이라는 구도(構圖)의 추(錘)가 지나치게 혹은 완전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불균형적(不均衡的) 칭의론들이 양산되었다.  

​이어서 살펴보겠지만 이런 시소게임(seesaw game)의 추는 그 반작용으로 또다시 다른 쪽 극단으로 치우쳐 기울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중심주의 칭의론’의 탄생 배경이다.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역할’이라는 구도 속에 나타난 치열한 ‘작용’(作用)과 ‘반작용’(反作用)의 다툼을 과연 어떻게 균형 있게 조망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이 바로 본 글의 근본 목적이다.

지나간 교회역사를 통해 다양한 불균형적 칭의론들을 조망하는 근본적 이유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얼마나 적실하며 필요한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 속에 나타났던 불균형적 칭의론들을 조망함을 통해 현재 나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작업의 존재 이유이고 그 이유에는 당위성이 한 가득 서려 있다.

1) 개혁신학 구원론은 부르심을 외적(혹은 일반적) 부르심과 효과적 부르심으로 구분해 이해한다.  외적 부르심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복음의 부르심을 뜻하고,      효과적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 가운데서 전적으로 값없는 은혜로 구원 받을 자들을 위한 효력 있는, 특별한 복음의 부르심을 뜻한다.

Ⅲ.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칭의론

시소게임(seesaw game)은 작용과 반작용의 이야기이다. 한쪽이 내려가면 즉 작용하면 다른 한쪽이 올라가고 올라간 쪽이 다시 내려가면 즉 반작용하면 또 다른 쪽이 다시 올라간다.

우리는 칭의론의 역사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역할)이라는 큰 두 축(軸)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칭의론 가운데서 반 율법주의 칭의론,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 영원 칭의론 등을 살펴보았다. 이런 칭의론들은 ‘하나님의 주권’만을 극대화 한 사상들로서 시소게임에서 볼 때 한 쪽만 지나치게 올라가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또 다른 축인 ‘인간의 역할’ 강조에 집중한 칭의론들이 반대 논리로 고개를 들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역할)이라는 시소게임에서 서로 결정적 주도권(主導權)을 잡으려고 최선을 다하여 경기에 임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칭의론 교리사(敎理史)의 민낯이다. 지금부터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이 꽤 중대한(결정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칭의론들을 살펴볼 것이다.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은 중요하다. 칭의는 ‘인간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갈 2:16) 그러나 만약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서 의롭다 칭함을 받음) 원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강력한 주도권을 칭의의 방정식에 도입 된다면 이는 ‘인간의 믿음을 통해서’가 아닌 ‘인간의 믿음 때문에’ 혹은 ‘인간의 믿는 행위 공로로’ 더 나아가 ‘인간의 순종 행위 때문에’ 칭의가 이루어진다는 교묘한 논리로 흐르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지금부터 살펴볼 아르미니우스주의, 로마 가톨릭,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의 칭의론이 바로 이러한 위험성에 노출되어있다.

1. 아르미니우스주의 칭의론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란 네덜란드 신학자였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59/60-1609)가 설파한 교리를 따르는 일련의 신학사상을 뜻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전통적 칼빈주의 사상에 대항하여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최대한 단순화하여 비교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전통 개혁신학 >

  •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 타락 후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다.
  •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창세전부터 하나님은 어떠한 조건없이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셨다,
  •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오직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신다.  

< 아르미니우스주의 >

  • 부분적 타락(partial depravity) :  타락 후의 인간도 여전히 자연적 능력, 자유선택 의지(意志)가 있다.
  •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 하나님이 인간이 믿을지 혹은 안 믿을 지를 미리 아시고(豫知) 이에 근거해 선택 하신다.  
  • 보편 속죄(universal atonement) :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지만 자신의 자유의지(自由意志)로 그리스도를 믿기로 선택     한 자만 구원 받는다.
  • 가항력적 은혜(resistible grace) : 인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恩惠)를 거부(拒否)할 수 있다.    
  • 구원 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possibility of secession from salvation) : 구원(救援) 받은 자라도 받은 바 그 구원을 상실(喪失)할 수 있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리(論理)대로라면 인간은 타락 후에도 자유선택(自由選擇)의 능력이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選擇)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거부(拒否)할 수도 있는 꽤 능력이 출중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뒷자리를 돌아보고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반(反)하는 행동을 했다면 이미 받은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늘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걷어차지 않고 ‘받아 누리는 선택’을 한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선택’을 한다면, 받은 구원을 상실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믿음의 선택’들을 해 나간다면 드디어 고대하던 구원의 최종 역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구원은 ‘인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구원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이 점이 비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문제였다.

칭의 역시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인간의 믿는 선택’이 꽤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 칭의의 조건(條件)을 ‘인간의 행위’로 전락시켜버린 사상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설파한 인간 중심의 칭의론이었다. 과연 ‘인간의 믿음’은 칭의에서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볼 것이다.

2. 로마 가톨릭 칭의론(의화론)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중세 로마 가톨릭신학에 저항하여 촉발되었다. 로마 가톨릭 칭의론은 의화론(義化論)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종교개혁 신학의 칭의론은 ‘법정적 칭의 개념’을 염두하고 전개한다. 즉 “죄인이 실제로 의로운 자가 된다.”라는 개념보다는 비록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로움(perfect righteousness)의 전가(轉嫁, imputation)를 통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칭하고, 여겨 주고, 일컬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칭의론은 죄인을 의인으로 칭(稱)하는 것을 뛰어넘어 실제적으로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變化)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적 갱신이 되어 성화를 통해 실효적으로 내적 쇄신이 되는 것(義化)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의화론은 ‘칭의개념’과 ‘성화개념’이 교묘히 섞여 있는 관점이다.

로마 가톨릭 의화론을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칭의론으로 분류하여 위치시킨 이유는 바로 로마 가톨릭 신학이 가지고 있는 인간론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개혁신학 전통에서는 타락(墮落) 후 인간을 ‘전적 타락한 인간’으로 본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타락 후 인간을 전적 타락한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부분 박탈’(partially deprived)한 인간 정도로 본다.

그러면 인간이 무엇을 부분적으로 박탈(剝奪) 당한 것일까? 로마 가톨릭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 창조 시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셨는데 첫째 ‘자연적 의’(iustitia naturalis) 둘째 ‘초자연적 선물’(dona supernaturalia)이다. ‘자연적 의(義)’는 인간의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이 핵심적으로 포함된다. 하지만 ‘자연적 의’로는 인간의 저급한 육욕(肉慾, concupiscentia, 욕정, 분노, 탐욕, 정욕 등)을 제어(制御)하기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超自然的) 선물’을 주셔서 이를 제어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자연적 의(義)에 더해서 초자연적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이를 ‘덧붙여진 선물’(donum superadditum)이라고도 불린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타락 후 바로 이 ‘덧붙여진 선물’ 즉 ‘초자연적 선물’만을 박탈당했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비록 ‘덧붙여진 선물’은 타락으로 박탈당했지만 여전히 ‘자연적 의’는 존재 한다는 점이다. 여전히 ‘자연적 의’는 존재하므로 인간은 이 능력을 여지없이 쓸 수 있다. 칭의론의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의화(칭의)를 위해 인간은 자연적 의(義)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의화론에서는 의롭게 되기 위해 인간이 ‘자연적 의’를 사용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선행 준비’(先行準備, prevenient preparation)라고 한다. 선행 준비는 미리 의지(意志, voluntas)를 움직이고 미리 성향(性向, habitus)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미리 의지와 성향을 갖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화 은총이 임하기 때문에 의지와 성향을 미리 갖춘 자들은 의화 됨에 있어 스스로의 공로(功勞)가 생겨난다. 공로주의(功勞主義)가 싹 틀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의화론(義化論)은 하나님의 의화(義化) 은총과 인간의 선행준비(善行準備) 공로(功勞)가 함께 일하는 신인협동(神人協同) 구조이며 기껏해야 부분 박탈당한 타락 후 인간이 자유롭게 의지(意志)와 성향을 가지고 구원을 만들어가는 구조이므로 반(半)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형태를 지닌다. 즉 인간의 역할이 꽤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칭의론의 구조를 로마 가톨릭 의화론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3.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 칭의론

이제 논의의 장을 현대로 돌려보자. 2002년 1월 미국 루이지애나 주 몬로라는 도시의 어번 애비뉴 장로교회(Auburn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 : 개혁주의 언약사상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목회자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 컨퍼런스 제목을 따서 이들의 사상을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 신학’으로 부른다. 혹자는 컨퍼런스가 열렸던 거리 이름을 따서 ‘어번 애비뉴(Auburn Avenue)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페더럴 비전신학’은 짧은 지면 안에 다 담기 어려운 방대한 논의이므로 지금부터는 노만 셰퍼드(Norman Shepherd)의 신학사상(Shepherdism)에만 집중해 논의하도록 하겠다. 셰퍼드는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는데 그가 전개한 칭의론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어 학교로부터 면직(免職) 당한 인물이다. 셰퍼드는 페더럴 비전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에 페더럴 비전신학을 또 다른 용어로 ‘셰퍼디즘’(Shepherdism)으로도 불린다.  

셰퍼드는 2000년에 출간 된 그의 책 ‘은혜의 부르심’(The Call of Grace)에서 ‘믿음’, ‘회개’, ‘순종’, ‘인내’는 새 언약의 복을 향유하기 위해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 한 조건(條件)이라고 주장했다.(Shepherd, The Call of Grace, p. 50) 이 주장이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수없이 많은 논쟁들을 양산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셰퍼드가 이해하는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

셰퍼드의 주장은 칭의를 위한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obedient faith)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순종하는 믿음’이야말로 칭의의 필수조건이라고 설파했다. 이는 결국 ‘칭의’와 ‘선행’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즉 “순종이든, 인내든, 회개든 행위를 해야 칭의 되는 것인가 아니면 칭의 된 사람이라면 행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가?”의 문제다. 셰퍼드는 전자를 받아들였다. 인간의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혹은 ‘순종하는 믿음 때문에’ 죄인이 의롭게 되는 칭의 사건이 비로소 성취된다고 가르쳤다. 곧 인간의 순종하는 행위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필수조건’으로 작용해 인간이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구조를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셰퍼디즘 칭의론의 문제였다.

지금까지 칭의의 영역에서 인간의 역할이 강조된 칭의론들을 아르미니우스주의, 로마 가톨릭, 페더럴 비전(셰퍼디즘) 칭의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런 칭의론들은 앞서 살펴본 반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영원 칭의론과는 완전히 반대의 대척점(對蹠點)에 서서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역할’을 강조했던 칭의론들이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지만 이는 마치 시소게임과 같다. 아르미니우스주의, 로마 가톨릭 칭의론의 반대 논리로 반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 치열한 시소게임은 현대 속에서도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 점을 ‘페더럴비전 칭의론’이 웅변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살펴 본 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역할’(책임) 사이에서의 칭의론의 역사는 불균형의 전쟁터였다. ‘하나님의 주권’만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아니면 ‘인간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더 강조되는 경향성이 짙어왔다. 이제는 균형(均衡)을 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 양자(兩者) 사이의 균형 잡는 작업을 할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생각 해 보고자 한다.  

  • 칭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즉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 칭의의 영역 내에서 인간의 역할을 무엇인가? 즉 인간의 역할
  • 인간은 여전히 죄인인가 의인인가?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모두 사해졌는가?

칭의 사건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 역시 칭의의 영역 내에서 할 역할이 분명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 미묘한 관계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바른 지도(地圖, map)를 가지고 이 험난한 여정을 떠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본고의 존재 이유이다.

Ⅳ. 법적선언으로서의 칭의

칭의교리(稱義敎理)를 다룸에 있어 칭의(稱義, justification)란 단어의 의미 자체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칭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칭의의 구조, 과정, 결과가 판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법적선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칭의를 왜 ‘하나님의 법적선언’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첫째 성경적 이유, 둘째 신학적 이유, 셋째 실천적 이유들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성경적 이유

구약에서는 ‘의롭다’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히브리어 짜다크(צךקה)가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다. 둘 다 ‘법정적(法廷的) 선언’(forensic declaration)의 의미가 내포된 단어이다. 구약에서는 대표적으로 신명기 25:1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재판장은 의인을 ‘의롭다 선언’하고 죄인을 ‘악하다 선언’할 법적인 권리와 권위가 있는 존재이다.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기준은 법적으로 공명정대(公明正大) 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이 공명정대한 기준점을 하나님의 성품(性稟)에 돌리고 있다. 즉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므로 그의 법적 선언은 언제나 옳은 것이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7) 성경에서 ‘법적인 선언’은 곧 심판(審判)을 의미한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왕상 8:32)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구약의 구절들은 ‘의롭다’의 히브리어 동사인 ‘짜다크’를 기본 어근으로 삼아 법적으로 의롭다 선언하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의롭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인 ‘디카이오오’를 사용하여 법적 선언의 의미가 내포된 형태로 칭의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로마서 8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이 구절은 법적 용어로 가득 찬 구절이다.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에 대해 그 누구도 법적으로 고발(혹은 송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4:5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구절에서 ‘의롭다 하시는’(δικαιοῦντα) 이라는 표현은 ‘법적선언’(法的宣言)으로서의 ‘칭의 개념’을 잘 드러내 준다.

즉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이유는 그 죄인이 어떤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 “그러므로 일을 아니할지라도” 혹은 경건했기 때문도 아니라 – “그러므로 경건하지 아니한 자” 오히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간주’(看做, 여겨 주다) 해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개념이 명확히 드러난다.

신구약 성경에서 ‘짜다크’와 ‘디카이오오’의 사용은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 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고 여겨주며 칭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롭다’의 성경적 용례는 본질적인 갱신(更新)이나 의롭게 변화(變化)되어가는 과정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죄인의 신분(身分)이 바뀐 것에 대한 공개적인 ‘법적선언’(法的宣言)에 더 가깝다. 이러한 성경적 용례는 다음부터 살펴볼 신학적 이유와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어 논의의 물꼬를 튼다.

2. 신학적 이유

신구약 성경 속에서 사용된 ‘의롭다’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내적 변화(變化)나 갱신(更新)을 뜻하기보다는 바뀐 신분에 대한 ‘법적선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또한 ‘법적선언’을 하는 주체(主體)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이를 확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를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다.

법적인 선언은 재판장이 가진 고유(固有)의 권한이다. 공의로운 재판장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법을 기준으로 재판한다. 유일무이(唯一無二)하고 영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에 근거해 내리는 법적 선언은 언제나 옳고 언제나 공의(公義)롭다. 하나님의 성품이 가득 깃들어 있는 그의 법은 무궁하며 공명정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하나님의 판단에 토를 달 수 없다.(욥 32:2) 하나님만이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主體)이시다. 이러한 고백은 인간 스스로가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근현대 칭의론의 인간 중심주의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고백이다.

​만약 칭의 선언의 주체를 인간으로 상정(上程)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전적 타락한 인간이 전적 타락한 또 다른 인간을 향해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다. 공의(公義)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셀프 칭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천하지에 가장 공의로운 분만이 죄인을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이다.

(2) 칭의는 신분의 변화지 내적 갱신과 변화를 뜻하지 않는다.

칭의는 죄인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간주(看做)하는 것(여겨주는 것, 칭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죄인의 내적(內的) 질(質, 바탕)이 결정적으로 갱신되고 변화되어 실제적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내적 탈바꿈이 아니다. 이런 내적 탈바꿈은 ‘칭의’(稱義)란 용어보다는 로마 가톨릭식의 ‘의화’(義化)라는 용어가 더 정확하다. 로마 가톨릭과는 다르게 개신교 신학에서는 칭의를 인간의 내적 탈바꿈이 아닌 법적인 ‘신분선언’으로 본다.

이 차이는 ‘전가’(轉嫁, imputation)와 ‘주입’(注入, infusion)이라는 단어로 서로 간에 존재하는 팽팽한 의미 차이를 부각시킬 수 있다. 즉 전가(轉嫁)란 죄인 밖에 존재하는 ‘낯선 의’(iustitia aliena)가 죄인에게 신비적으로 넘어오는 것을 지칭한다.(그러므로 ‘전가’) 이 낯선 의(義)는 우리 안에서는 절대 발견 할 수 없는 의(義)이기 때문에 낯선 의(혹은 외부적 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지칭한다. 이는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설명이기도 하다. ​      

반면 주입(注入)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의(義)가 은총이라는 형태로 죄인에게 직접적으로 주입되는 것을 뜻한다. 주사를 맞듯이 하나님의 의(義)의 은총이 신자에게 주입되기 때문에 신자의 영적인 본질과 도덕적인 본질이 신자의 내부에서 실제적 변화와 갱신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입 개념은 바로 위에서 논의한 칭의 선언의 궁극적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문제를 양산해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의 이 주입교리가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즉 하나님의 의(義)의 은총이 신자에게 주입되기 위해서는 신자가 미리 마음의 성향과 의지의 뜻을 내부적으로 준비해야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행(先行) 준비 없이는 주입도 없다. 결국 칭의 선언의 유일무이한 궁극적 주체가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생겨난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논리는 칭의를 법적 선언으로 이해 한 종교개혁 신학과 극렬하게 논쟁해 온 대척점이었다.

3. 실천적 이유

칭의를 ‘법적선언’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진영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반대 논리를 펴나간다.

  • 만약 칭의가 법적 선언에 불과하다면 그런 칭의는 신자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변적(思辨的, speculative) 탁상공론(卓上空論) 에 불과한 교리가 될 것이다.
  • 만약 칭의가 법적 선언 정도에 그치고 만다면 점점 더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신자의 삶의 태도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법적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얕은 논리이다.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은 절대로 탁상공론의 공허한 교리로 그 생명선이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 행동 지침을 내려주는 매우 실천적 교리이다.

의롭다고 간주(看做) 될 그 어떤 자격도 없는 죄인이(롬 4:5)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면(롬 3:24) 이 사실을 깨달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최선을 다해 주어진 순례자의 길을 의(義)와 진리(眞理)의 거룩함으로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엡 4:24)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일관(一貫)되게 가르치는 바요 또 지속적(持續的)으로 요구하는 바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히 12:4)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사역으로 인해 우리의 죄책(罪責)이 남김없이 해결되었고 이로 인해 더 이상 죄인(罪人)이 아니라 의인(義人)으로 신분(身分)이 바뀐 것에 대한 ‘법적선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성의 유혹에 빠져 살고 있다.(롬 7장)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미 받은 ‘의인이라는 신분’은 죄와 싸워나갈 수 있는 참되고 강력한 원동력을 신자들에게 제공한다. 이는 죄가 더 이상 의인(義人)의 삶에 궁극적인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8:2) 이것이야말로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교리가 한껏 품고 있는 실천성의 정수(正手)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법적선언’으로 죄인의 신분이 아닌 ‘의인의 신분’으로 비로소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되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골 1:22)로 선언(宣言)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선언을 받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즉 법적선언으로서의 칭의는 감격이요 은혜이다. 우리를 본질상 진노(震怒)의 자녀에서 의(義)의 자녀로 신분적(身分的) 입적(入籍, 호적에 올림)을 해주셨다.(엡 2: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의로워진 죄인

의롭고 영원한 재판장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義)의 전가(轉嫁)를 통해 우리의 새로운 법적신분(法的身分)을 만 천하에 선포(宣布)하셨다. 이것이 바로 ‘법적선언’으로서의 칭의 사건의 모체요 핵심이다. 그러므로 ‘법적선언’으로서의 칭의는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하고 감격적인 사건 중의 사건이요 복 중의 복이다.

Ⅴ.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

칭의는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해 죄인들을 의롭다 여겨주시는 사건이므로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救援)의 절대주권(絶對主權)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처럼 칭의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칭의를 받는 당사자(인간)를 로봇처럼 치부(置簿)하여 칭의를 받음에 있어 지극히 ‘수동적’(受動的) 혹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의미’(無意味)한 존재로 인간의 역할 및 책임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제거(除去)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어왔다. 소위 반(反) 율법주의(antinomianism)가 이러한 오류의 선봉장(先鋒將)에 서 있다.

하지만 칭의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역(逆)으로 다시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칭의의 영역에서 인간이 해야 할 역할(役割)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를 소위 칭의의 6중(重) 원인(原因)의 틀 가운데서 고찰하도록 하겠다.

1. 칭의의 6중 원인

원인론(原因論, the philosophy of causation)은 고대철학에서부터 꾸준히 논의되어온 학문체계이다. 모든 가시적(可視的)이거나 비가시적(非可視的) 존재들의 현상(現象)과 양태(樣態)에는 반드시 그러한 존재적 현상과 양태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인(原因)이 있다는 논리이다. 즉 원인 없이는 결과도 없고 결과가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는 밀접하고 필연적 인과관계를 서로에게 부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가 전개한 사중(四重, fourfold) 인과론(因果論, causality, 원인과 결과론)의 공리적(公利的) 측면은 신학을 구성함에 있어 철학적 기저(基底)를 펼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1) ‘사중 인과론’이란 사건(事件)의 원인(原因)을 작용인(作用因, efficient cause), 형상인(形相因, formal cause), 질료인(質料因, material cause),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원인론의 체계(體系)를 말한다.              

신학에서는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을 더해 ‘육중원인’(六重原因)으로 모든 신학적 주제를 설명하곤 했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원인을 사용하지만 대체적으로 ‘육중원인’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사중원인’ (四重原因)외에 추가되는 원인들로는 ‘도구적(道具的) 원인’(instrumental cause)과 ‘공로적(功勞的) 원인’(meritorious cause)을 들 수 있다.

​혹자는 딱딱한 철학체계를 사용하여 거룩한 신학의 주제(主題)를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에 대한 묘한 반감(反感) 및 의아함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통 개혁신학에서는 단 한 번도 철학이 신학을 존재론적으로 추월해 앞지른 적이 없었다. 철학은 늘 신학을 섬기기 위해(to serve) 존재했다. 철학은 늘 성경과 전통이라는 촘촘한 필터링(filtering)을 거쳐 그 건전성(健全性)이 증명될 때 비로소 신학을 잘 섬기기 위한 도구로 절충적으로 사용 되었다는 사실을 염두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육중원인’의 틀 가운데서 칭의를 바라볼 때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육중원인’ 중 인간의 역할 및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방법으로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1) 칭의의 유효적 원인 

유효적(有效的) 원인(혹은 작용인)이란 어떤 특정한 결과를 낳기 위해 가장 필수적(必須的)이고 가장 효과적(效果的)인 필수불가결한 원인(原因)으로서 모든 현상의 궁극적인 ‘일차원인’(첫째 원인)을 뜻한다.

칭의 사건의 법적 판결은 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칭의의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유효적 원인’을 절대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현대의 인간 중심적인 칭의론들은 그것이 펠라기우스주의적이든 세미(半) 펠라기우스주의적이든 상관없이 칭의의 유효적 원인을 왜곡시켜 ‘칭의의 유효적 원인’과 ‘인간의 역할’을 서로 치환(置換)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2) 칭의의 형상적인 원인

형상적(形相的) 원인이란 한 사물이나 실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본질(本質)을 의미한다. 이를 칭의 사건에 적용시켜보면 칭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칭의의 본질(本質)이 필요한데 우리는 이 본질을 복음(福音, Gospel)으로 이해한다. 이는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생각이기도 한데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구원의 형상적 원인은 복음의 선포인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것이다.”2) 이처럼 칭의의 형상적 원인은 복음이기 때문에 ‘칭의의 형상적 원인’ 역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3) 칭의의 질료적 원인

질료적(質料的) 원인이란 목적하는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뜻한다. 이를 칭의 사건에 적용해 보면 칭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칭의의 재료가 필요한데 우리는 이 재료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義)로 본다. 칼빈은 다음과 설명했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함께 칭의의 질료적 원인이다. 그리스도는 순종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의(義)를 획득하셨다.”3) 칭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가 죄인에게 전가(轉嫁)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칭의의 질료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義)뿐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질료적 원인’도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4) 칭의의 공로적 원인

공로적(功勞的) 원인이란 목적하는 형상을 이룬 공로(功勞)가 어디로부터 혹은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파악해 그 대상에게 공로를 돌리는 것을 뜻한다. 칭의의 공로적 원인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당하신 순종(수동적 순종이라고도 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의 공로에 힘입어야만 죄인은 의롭다 칭함을 받기 때문에 칭의의 공로는 오로지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우리 구원의 모든 부분 부분들이 우리 밖에(extra nos) 위치하고 있음을 우리가 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행위들을 신뢰하고 자랑하고 있는가?”4) 

그러므로 ‘칭의의 공로적 원인’을 인간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여타 현대 모든 인간 중심주의적인 칭의론들에게 경종(警鐘)을 울리는 참된 진리이다.                    

(5) 칭의의 목적 원인

목적(目的) 원인이란 사물이나 운동이 일어나는 궁극적인 목적을 뜻한다. 칭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칭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 스스로가 영광을 받으신다. 칼빈은 여러 곳에 걸쳐 칭의의 목적 원인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영광’5)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6) 혹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드러내는 것’7)으로 일관되게 설명했다. ‘칭의의 목적 원인’ 또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6) 칭의의 도구적 원인

도구적(道具的) 원인이란 사물이나 운동이 가진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도구(道具, instrument)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만약 칭의 사건의 유효적 원인이 하나님이고 형상적 원인이 복음이라면 질료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義)이며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고 목적 원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면 사실 칭의 사건에서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칭의 사건의 원인을 분석할 때 이와 더불어 하나 더 중요한 원인을 추가하는데 바로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자들은 예를 들면 반(反) 율법주의나 하이퍼 칼빈주의 등은 칭의의 도구적 원인 자체를 거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의 도구적 원인을 늘 인간(人間)에게 돌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칭의의 도구적 원인은 ‘인간의 믿음’으로 구체적으로 적시되어왔다. 그러므로 칭의의 영역 가운데서 ‘인간의 믿음’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도구적 원인’이라는 틀 가운데서 논의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인간의 믿음’을 칭의의 유효적, 형상적, 질료적, 공로적, 목적 원인으로 돌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칼빈은 ‘믿음’을 단지 의를 받는 ‘수단’(手段)으로 묘사했다.8) 그러므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란 용어 안에 포함되어 있는 ‘믿음으로써’라는 뜻은 ‘인간의 믿음’이 칭의의 유효적, 형상적, 질료적, 공로적, 목적 원인으로 작용(作用)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로지 ‘도구적 원인’으로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까지가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役割)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인간의 ‘믿음’을 ‘그릇’에 비유했던 것이다.9) 칼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안의 그릇을 비우고 입을 벌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받아 누릴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10) ‘도구적 원인’으로서 ‘인간의 믿음’의 역할이 이토록 지대(至大)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될 수 없다. ‘칭의의 공로적 원인’은 이미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로 돌렸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칭의(稱義) 사건에서 인간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혹자는 전통적 개혁신학의 칭의론은 인간의 역할을 심각히 약화시킨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이다.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켰다기보다는 인간의 역할이 칭의의 유효적, 형상적, 질료적, 공로적, 목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부단히 경계했을 뿐이다. 오히려 인간은 믿음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믿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아니라 ‘칭의의 수단적 원인’으로서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으로 칭의 사건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 가운데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런 측면에서 칭의의 영역 내 인간의 역할은 의미(意味)가 있고 가치(價値)가 있다.

1)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16-17세기 스콜라주의, 후기 종교개혁 개혁파 정통주의 철학에 미친 영향에 관한 구체적 논의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박재은,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의 형이상학 이해,” 「교회와 문화」 37 (2016): 135-165; Joseph S. Freedman, “Aristotle and the Content of Philosophy Instruction at Central European Schools and Universities during the Reformation Era (1500-1650),”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37/2 (1993): 213-253;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 1725 (Grand Rapids: Baker, 2003), 1:360-405; idem, “Scholasticism, Reformation, Orthodoxy, and the Persistence of Christian Aristotelianism,” Trinity Journal 19:1 (Spring 1998): 81-96; idem, “Reformation, Orthodoxy, ‘Christian Aristotelianism,’ and the Eclecticism of Early Modern Philosophy,” Nederlands archief voor Kerkgeschiedenis 81.3 (2001): 306-325; Charles H. Lohr, “Metaphysic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Renaissance Philosophy, eds. Charles B. Schmitt and Quentin Skinner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537-638.

2) Calvin, Epist. Pauli ad Ephesios, I.8 (CO, 51:150). 칼빈은 이 본문에서 칭의 사건을 이야기 하기보다는 “구원”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칭의와 구원의 불가분성을 생각한다면 구원의 형상적 원인과 칭의의 형상적 원인을 상호 교차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Calvin, Inst., 3.14.17 (CO, 2:575).

4) Calvin, Inst., 3.14.17 (CO, 2:576).

5) Calvin, Inst., 3.14.21 (CO, 2:578).

6) Calvin, Inst., 3.14.17 (CO, 2:576).

7) Calvin, Inst., 3.14.17 (CO, 2:576).

8) Calvin, Inst., 3.11.7 (CO, 2:538).

9) Calvin, Inst., 3.11.7 (CO, 2:538).

10) Calvin, Inst., 3.11.7 (CO, 2:538).

Ⅵ. 죄인인가 의인인가?

–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모두 사해졌는가? –

모든 신학의 각론들이 그러하듯이 칭의론(稱義論)과 속죄론(贖罪論) 또한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맺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만약 칭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질료적 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義)라면 이 그리스도의 의(義)는 십자가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그 신학적 근거를 굳건히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속죄(贖罪)를 위해 보혈(寶血)을 죄인 대신 아낌없이 쏟으셨고 대속(代贖)의 죽음을 온전히 감당하심으로 죄인들이 응당 받아야 할 죄의 형벌(刑罰)은 탕감(蕩減)되었다.(속죄론)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이 같은 대리적 속죄 사역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義)가 되었고 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義)가 믿음으로 죄인에게 전가(轉嫁) 됨으로써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칭의론) 이런 유기적(有機的)인 신학의 내용은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 가사(歌詞)에도 예외 없이 드러나 있다.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270장 1절)

이 가사(歌詞)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눈보다 더 희게 만들었다면 과연 어느 범위까지의 죄를 깨끗하게 만든 것일까?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은 과거에 지은 죄에만 그 영향력을 미치는가? 아니면 현재 짓고 있는 죄까지도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적셔지는가? 이런 질문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의인(義人)인가? 아니면 지금도 죄를 짓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인(罪人)인가?” 이는 칭의와 죄에 대한 관계성 문제로 칭의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바른 답변을 지금부터 찾아보도록 하자.

1. 의로운 동시에 죄인1)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칭의의 장(場) 한 복판에 서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대단히 역설적(逆說的)인 표현을 사용해 규정(規定)했다. 그것은 ‘의로운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표현이다. 과연 “한 사람이 의로운 동시에 죄인일 수 있을까?” 루터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義)로 덧입혀진 사람은 더 이상 ‘죄인’(罪人)이 아니라 ‘의인’(義人)이라고 확고하게 정체성 규정을 했다. 즉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은 자는 ‘전적으로 의롭다’(totaliter justus)는 것이다. 그러나 죄악 된 인간의 본성적 시각으로 바라볼 때 인간의 근원적 본성은 여전히 후패(朽敗, 썩어 못쓰게 됨)하며 부패(腐敗, 타락함) 한 ‘전적인 죄인’(totaliter peccator)이다.2) 

즉 그리스도의 의(義)가 전가(轉嫁)되어 의인으로 칭함 받은 자는 이미 ‘의인’(義人)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때 여전히 ‘죄인’(罪人)이므로 루터는 이를 역설적으로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라는 표현으로 신자의 정체성을 규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을 통해 과연 어떤 죄가 사해진 것일까? 어떤 죄가 사해졌기에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칭함을 받고 있을까? 반대로 죄의 어떤 부분이 남아있기에 우리는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일까? 이러한 질문을 죄의 두 가지 결과와 연결시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죄의 결과 : 죄책과 부패(혹은 오염)

죄를 지으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죄책’(罪責, guilt)과 ‘부패’(腐敗, corruption)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가 귀금속을 훔치면 법적으로 절도죄에 해당되어 실정법을 어긴 죄인이 된다. 죄인이 된다는 말은 곧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법적 책임(責任, liability)을 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죄책’이 생긴다는 개념이다. 즉 죄인이 절도죄에 상응하는 형량을 언도받으면 그는 형량대로 교도소에서 죄의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한다. 만약 살인죄를 저질렀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무기징역 혹은 사형으로 져야만 한다. 그 어떤 죄인도 마찬가지이다. 저지른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은 그 죄를 저지른 자가 져야만 한다.

죄책(罪責)과 더불어 부패(腐敗, 혹은 오염) 또한 죄인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이다. 성경은 죄의 결과의 한 측면인 부패의 특성에 대해 다각도로 설명하고 있다. ‘총명이 어두워진’, ‘무지한’, ‘마음이 굳어진’ (이상 엡 4:18), ‘더러운 것을 내는’(욥 14:4), ‘거짓 된’(렘 17:9), ‘가시와 엉겅퀴를 맺는’(마 7:16), ‘감각이 없는’, ‘방탕한’,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이상 엡 4:19) 등의 상태이다. 이처럼 죄인은 그 마음이 부패(腐敗)하고 후패(朽敗)하여져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인 부패하고도 오염 된 상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책의 형벌’을 무죄(無罪)한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아 대리적(代理的) 속죄(贖罪)를 이룬 사역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가 져야만 하는 ‘죄책’을 완전하게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죄책을 묻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감당하신 죄책은 단순히 과거의 죄책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지을 죄의 모든 죄책까지를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을 다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내가 믿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의(義)가 내게 전가(轉嫁)됨으로써 나는 법적으로 더 이상 죄인(罪人)이 아니라 의인(義人)으로 신분적(身分的) 칭함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법적인 죄의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에서 살펴본 루터의 논의에 비추어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완전하게 의롭다’고 칭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책(罪責)’을 다 해결해주셨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책임이 없는 자는 법적으로 더 이상 ‘죄인’(罪人)이 아니다. 완전한 ‘의인’(義人)인 것이다.

루터는 이것을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라는 역설적 수사(修辭)를 구사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죄책의 측면’이 아닌 ‘부패의 측면’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염두 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해 우리의 죄책은 남김없이 깨끗하게 탕감(蕩減)되었지만 죄의 또 다른 결과인 죄의 부패(腐敗)와 오염(汚染)은 여전히 아주 지독하게 남아있으므로 우리는 ‘의로운 동시에 여전히 죄인’이다.    

3. 실천적 고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죄책’은 남김없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부패성’과 ‘오염성’이 남아있다는 가르침은 칭의론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있어 매우 소중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르침은 한번 예수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므로 더 이상 회개 기도할 필요도 없고 성화의 삶을 살 필요도 없다는 식의 반(反) 율법주의가 서 있을 공간 자체를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책’은 남김없이 해결되었지만(칭의의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지독한 결과인 ‘부패’는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우리는 이 잔존(殘存)하는 부패를 깨끗케 만들기 위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회개(悔改)와 성화(聖化)의 열매를 부지런히 맺어야 한다.(성화의 영역)

죄의 결과를 죄책과 부패(오염)로 상정(上程)하여 이를 각각 ‘칭의’와 ‘성화’라는 신학적 관점 속에서 이해하는 관점은 칭의가 완료되었기에 성화는 필요 없다는 식 즉 죄책이 없어졌으므로 부패 또한 사라졌다는 식의 불균형적 ‘칭의와 성화’ 이해에 경종(警鐘)을 울릴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칭의와 성화’ 사이의 관계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로 보았다. 즉 칭의가 없으면 성화도 없고 성화가 없으면 칭의 또한 없다. 즉 칼빈은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이중 은혜’(duplex gratia)라고 했다.3)        

칼빈의 이 같은 주장은 옳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죄책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해 단 한순간에 해결이 되었지만(칭의의 단회성), 인간에게는 여전히 부패와 오염은 남아 있으므로 늘 성령 하나님과의 동행 가운데 자기 두루마기를 성실히 빨아야 한다.(계 22:14, 성화의 점진성)

결론적으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책(罪責)이 다 사해진다는 소식이야말로 복된 소식 즉 복음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복된 소식이 다음과 같이 흘러서는 안 된다.              

  • 방종주의’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죄책이 다 사라졌으므로 죄를 막 짓고 살아도 이미 없어진 죄책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논리,
  • 실용주의’ 즉 죽기 전까지 열심히 죄를 짓고 살다가 죽기 직전 예수 한번 믿고 모든 죄책을 사함 받겠다는 논리,
  • 값싼 은혜주의’ 즉 복음의 유익을 받아 누릴 줄만 알고 예수를 믿고 섬김에 있어 어떠한 대가도 치룰 마음이 없는 논리

이런 논리들은 발전되어 ‘다른 복음’(갈 1:9)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죄의 결과는 ‘죄책’과 ‘부패’요 그것이 곧 사망이다.(롬 6:23) 십자가의 은혜로 죄책이 해결되어 영원 사망이 아닌 영생 복락을 얻어 누리는 자라면 늘 자신을 되돌아보고 죄의 부패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히 12:4)

그러므로 칭의의 은혜를 누린 사람이라도 늘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참된 반성과 더불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지속적(持續的)으로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죄책으로서는 ‘의인이라는 땅’을 밟고 서 있지만 부패로서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땅’을 밟고 서 있는 역설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1)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박재은,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 하나님의 주권 대 인간의 역할,  그 사이에서 바라본 성화』(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47-63을 참고하라.

2) Luther, WA, 56:271.

3) Calvin, Institutes, 3.16.1.

Ⅶ. 칭의와 믿음의 관계

하나님의 본질(本質)과 속성(屬性)을 논하는 방법 중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이 있다. 부정(否定)의 방법이란 하나님은 “~이 아니다.”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유한하지 않다.”라는 전제(前提)를 통해 도출(導出)되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한하다.”라는 결론이다. 또한 “하나님은 물질적이지 않다.”라는 전제를 통해 도출되는 결론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다.”이다.

이런 부정의 방법을 활용해 ‘칭의와 믿음’과의 바른 관계를 규정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칭의와 ‘믿음’ 사이의 바르지 못한 관계를 부정함으로써 둘 사이의 바른 관계를 모색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와 믿음’ 사이의 바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 작업은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이 과연 ‘어떤 믿음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부정의 방법을 통해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과 상관없는 믿음들을 제거해 나가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부정 1 :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은 인간 내부의 능력으로부터 발현 된 것이 아니다.

인간 자체가 지닌 능력과 실력으로는 믿음을 획득(獲得)하거나 선취(選取)하거나 고양(高揚)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 자체의 악함과 타락상 그리고 죄로 인한 부패와 오염을 지속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 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예레미야 선지자도 인간의 마음 속 깊숙이 존재하는 부패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 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렘 17:9)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이 같은 타락상을 겸허(謙虛)히 고백한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그렇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경험했던 베드로가 외쳤던 한마디도 바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는 외침이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외치는 것을 인간이 가진 고매(高邁)한 인간성 자체를 말살(抹殺)하는 시도라거나 혹은 인간 존재 자체를 폄하(貶下)하는 시도 혹은 인간의 위치를 지나치게 격하(格下)시키는 시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사실 인간의 전적 타락상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는 인간을 하찮은 미물로 보고 인간의 존재성 자체를 약화시키거나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칭의의 기원(起源)을 타락한 인간 기원이 아닌 ‘신적 기원’에 두고 칭의 전체를 이끌어 가는 궁극적 주체(主體)를 ‘하나님께’ 두기 위함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지만 그 믿음조차도 인간 내부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일갈(一喝)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은 인간 내부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膳物)이다.

‘칭의와 믿음’ 사이의 바른 관계성 설정은 창조주는 누구이며 피조물은 누구인지를 알고 구원자는 누구이며 구원 받는 대상은 누구인지를 알고 의롭다 여기시는 분은 누구이며 의롭다 여김을 당하는 자는 누구인지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정 2 : 칭의를 일으키는 믿음은 인간행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관련되어 논의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는 1)믿음 그 자체 혹은 믿는 행위 그 자체와 2)선행과 관련된 인간의 율법적 행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지만(롬 3:28) 믿음 그 자체가 칭의에 있어 ‘작용 원인’ 혹은 ‘유효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믿음은 도구적(道具的) 혹은 수단적(手段的) 원인으로서 칭의의 영역 내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 그 자체에 신령한 능력을 부여해 칭의를 가능케 만드는 결정적 작용 원인으로 믿음을 드높이는 것도 인간의 믿음 자체를 우상화시키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 자체가 칭의의 작용 원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는 행위 그 자체도 칭의의 결정적인 작용 원인이 될 수 없다. 흔히 믿음을 우리 자신이 능동적(能動的) 주체적(主體的)으로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인격과 즉 ‘그 분이 누구신지’와 그리스도의 사역이 즉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가 수동적(受動的)으로 믿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수동적(受動的)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 즉 이신칭의 원리는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we are justified through faith)를 말하는 것이지 “우리는 믿음을 통해 우리 자신을 칭의 한다.”(we justify ourselves through faith)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구분법이 바로 ‘능동적 칭의’ (active justification)와 ‘수동적 칭의’(passive justification)이다.1) 

‘능동적 칭의’란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칭의의 주체자(主體者)가 되셔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하신 것을 뜻한다. ‘수동적 칭의’란 능동적 칭의를 근거로 인간의 의식(意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판결된 하나님의 능동적인 판결이 믿음을 통해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을 뜻한다.2) 

이 같이 죄인의 실제적 칭의는 수동적 칭의 국면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믿음’ 혹은 ‘인간의 믿는 행위’ 그 자체가 칭의의 능동적 주체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다. ‘인간의 믿음’ 혹은 ‘인간의 믿는 행위’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능동적 칭의 판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 덕분’에 혹은 ‘믿는 행위 때문’에 칭의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히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에 가깝다.

둘째,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은 인간의 율법적 행위로부터 발현(發現)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2:16이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義)가 전가(轉嫁)됨으로써만 가능한데 이러한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빌 3:9)이다. 바울은 이를 사도행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그러므로 ‘순종행위’와 ‘믿음’ 사이의 우선순위(優先順位)를 뒤바꾼 셰퍼디즘(Shepherdism)류와 구약의 토라(תּוֹרָה, 율법)를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르려고 했던 유대주의(Judaism)류와 성령의 동행하심과 더불어 살아온 삶의 궤적에 준하여 미래 칭의를 확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위 유보적(reservable) 칭의론류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또 다른 율법 지킴으로 변질되는 신율법주의(neonomianism)류 등은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을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불균형적(不均衡的) 칭의론들이다.

칭의를 가능케 만드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발현(發現)될 수 없다. 인간의 행위로부터 발현된 믿음은 철저히 인간의 자기 의(義)에 근거한 믿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義)가 설 자리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의(義)에 근거한 믿음으로 칭의의 탑을 쌓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은 칭의는 필망(必亡)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만약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이 ‘인간 내부의 능력’에서부터 발현(發現)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의 행위’(行爲)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칭의를 불러일으키는 믿음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빛 아래서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칭의를 다루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2항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답을 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칭의교리 전체를 아우르는 총정리를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를 부어넣으심으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으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영접하며 의지하는 신앙은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수단이다.(웨신 11:1,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항과 2항 전반부는 칭의와 믿음과의 관계를 ‘선물’(膳物)로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2:8이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선물은 주는 ‘수여자’(授與者)와 받는 ‘수혜자’(受惠者) 사이에서 오고가는 복된 것이다. 선물의 수여(授與)와 수혜(受惠) 관계에서 주체(主體)는 늘 수여자에게 있다.  

믿음이라는 선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롬 4:5) 그러나 이 믿음이라는 선물의 수여자가 누구이며 또 그 선물을 받는 수혜자는 누구인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믿음은 우리 내부로부터 자급자족(自給自足)하여 발생된 자기 재화(財貨)가 아니라 수여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요 감격적인 선물이다. 이것이 바로 ‘칭의와 믿음’ 사이의 올바른 관계 설정이다. 이는 곧 칭의 사건 전체를 아우르는 올바른 관계 설정이기도하다.(*) 글쓴 이 / 박재은 박사(미국 칼빈신학교 조직신학 박사, 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강의, 저서,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부흥과개혁사) 외 다수)

1)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박재은,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 하나님의 주권 대 인간의 역할,     그 사이에서 바라본 칭의』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105-145를 참고하라.

2) 박재은,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 106-111.

칭의, 성화, 영화

1. (稱義, Justification)

율법 안에서나 밖에서나 오직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인(罪人) 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처럼 불의한 인류에게 그의 사랑 때문에 한 ‘의(義)’를 준비하셨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의’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 되고 예언되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롬 3:22)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救贖)의 공로(功勞)에 근거해서 값없이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짐으로 얻어지는 ‘의(義)’이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선물)이다. 이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음으로써 (의의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법정적 선언)을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하나님 앞에 ‘의인(義人)’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2. (聖化, Sanctification)

이렇게 그리스도의 의(義)를 덧입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었다고 해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죄(罪)의 본성(本性)과 부패성(腐敗性)까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로 의롭다함을 입은 ‘의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도로서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41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온전한 자리로 성장해 나아가야 하는 데 이 과정을 성도의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한다. 성도의 성화는 말씀에 따른 성령님의 다스림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이루어 가게 된다. 그리고 온전한 성화를 이루기 위해 성도는 죽는 날까지 성도로서의 거룩한 사람과 본분을 다 해야 한다.

3. (榮華, Glorification) 

성도의 영화(榮華)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7문에 “성도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중에 들어가고 그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부활할 때가지 무덤에서 쉬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영화는 성도의 구속 과정의 완성이다. 영화는 완전한 성화를 위해 나아가던 성도가 이 세상에서 점진적인 성화를 계속하다가 결국 완전 성화에 이르게 되는 데 그것은 살아서 자기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죽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성황의 완성인 동시에 하나님이 성도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견인(堅忍)의 궁극(窮極)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