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칼빈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PARTⅡ

들어가는 말

칼빈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에서 선택(選擇) 교리에 대한 성격적 근거를 설명한 후에 에베소서에 대해 언급하고 그 다음 로마서에 대해 언급했다.

위대한 삼위일체 찬가가 나오는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문안 인사와 함께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받은 모든 은혜의 원천으로써 하나님의 ‘뜻’(意志, will)과 ’기뻐하심’을 말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神靈) 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前)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選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豫定)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우리가 이 구절을 따로 떼어놓고 살펴보거나 또는 하나로 묶어 놓고 보아도 우리는 여기서 선택(選擇) 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잘 살펴보면 주권적이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선택 교리의 핵심 골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사도 바울이 에베소 인들을 ‘선택된 자들’로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신자가 된 믿는 자들에게 이 서신을 보낸 것이 틀림없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말하므로(엡 1:4)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 인간의 상태나 지위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세 전’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운명이 왜 이렇게 선택(選擇)과 유기(遺棄, 즉 선택 받지 못함)라는 극과 극의 차이가 나는가? 본문의 의미는 만일 어떤 사람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에베소 인들이 ‘거룩한 자가 되도록’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이 예지(豫知)하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立證) 해 준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모든 선한 행위는 선택의 결과임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선택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예정하셨고 특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의 뜻에 따라’(엡 1:5) 그들을 작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칼빈은 이렇게 본문을 주석함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기 위해 스스로 상상하는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들은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해 하나님이 부여하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연원(淵源, 근원)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그가 그들에게 주고자 하셨던 은해를 그들을 위해 예비하여 놓으셨다는 것이다.1)

칼빈은 에베소서 1장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네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다.2)

  • 동인(動因, efficient cause)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 질료인(質料因, material cause) : 그리스도
  •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 : 그의 은혜에 대한 찬송
  • 형식인(形式因, formal cause) : 복음 선포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322) 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제 이와 같은 구분에 따라 칼빈신학의 다양성을 고려해 보고 하나님의 선택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며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자비로운 선택을 깨달을 때 어떤 기쁨을 주시는지 생각 해 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의 선택의 섭리

본 장에서는 칼빈이 강조한 하나님의 선택(還擇, election)에 대한 섭리(攝理, providence)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 선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 선택은 하나님의 섭리적 성격의 일이다.
  • 선택은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관계되는 일이다.
  • 선택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다.

(1) 선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칼빈에 따르면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고유의 사역인 선택(選擇)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豫定)된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실현될 인간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최종적 목적은 선택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어 그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신 다음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고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선택이 어떤 의미애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의 사역이기는 하나 칼빈은 성부와 성자의 사역을 우선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성부의 영원한 섭리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중략)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39)3) 

칼빈은 또 성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선택을 주도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호 가운데에 두시고 그리스도의 안전한 성(城)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4)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스스로 중보자로 나타내시지만 그도 역시 성부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을 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하셨다.”5)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3:16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뛰어나서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섭리에 의해서 선택받은 사람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선택(選擇) 받은 자들은 유기(遺棄) 된 자들과 구별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스스로 선택의 장본인(張本人)이라고 생각하셨다.6) 그러므로 칼빈이 선택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다고 간주하고 있고 또 그리스도를 선택의 장본인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선택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칼빈이 선택은 성부, 성자, 성령께 속한 사역이라고 하며 아울러 삼위 중 성부와 성자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았다. 칼빈은 선택 결정에 있어 성부와 성자가 하신 역할을 강조한 만큼 성령의 역할은 그렇게 크게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령 역시 선택 교리 논의에 포함되어 있다. 성령은 성경을 영감하신 분으로써 이 교리의 선생이 되신다.8)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령께서 그의 구원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진행하신다는 것이다.9) 

(2) 선택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역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실로 다양하고 무수하나 여기에서 그분의 섭리적인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칼빈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기’와 마찬가지로 ‘선택’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른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God’s eternal providence)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 영원한 섭리에 의해 각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신다.10) “성경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그의 영원한 만고불변의 계획에 의해 창세 전부터 선택 받아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아 유기 될 자를 예정하셨다고 말씀한다.”11)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혹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섭리는 선택의 대상자가 태어나기 전에 선포되었던 것으로 아담의 타락 이전에 이미 선포되었다는 것이며,12) 또한 이것은 창세 전에 선포되었던 것이다.13) 이런 이유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태 가운데서 창조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사람은 버림받기로 예정되었다.”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14) 칼빈은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이론적으로 사색하기를 거부한다.15) 오히려 사색보다는 완벽한 성경적 증거를 제시하면서 역사에 나타난 그분의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언급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섭리에 대해 함께 언급함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그의 신학에서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로 연결시키고 있다. 1539년과 1554년 사이에 출판된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동일한 장에서 ‘예정’과 ‘섭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러다가 1959년에 출판한 ‘기독교강요’ 최종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정’을 제3권에서 따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제의 재배치는 결코 칼빈의 신학 내용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해 논의할 때는 이와 함께 하나님의 예정(豫定)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칼빈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논의할 때 그는 반드시 이와 함께 하나님의 계획(計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현대신학의 흐름을 살펴 볼 때 이점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다. 즉 칼빈이 하나님의 선택을 언급 할 때는 반드시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시켜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신 것을 결정하시고 이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은 온 우주의 지배자요 통치자이시다.”16) 

칼빈은 다음 말을 강조한다. 즉 피조물에게는 어떤 신비한 능력도 찾아 볼 수 없으며 그들에게서 신묘막측(神妙莫測) 한 행위를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만 움직여 나가며 그분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포된 계획에 의존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는 어떤 의미 있는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17) “섭리에 대해 포괄적이고 집약적으로 언급하는 가운데도 킬빈은 ‘선택’과 ‘유기’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일과 계획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인간이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모든 인간은 선택과 유기의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18)

(3) 하나님의 선택은 개별적이다.

선택은 특별한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은 특이하고도 특별한 사건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개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선택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반영하거나 믿는 자는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선택과 유기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로 약속한 개개인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섭리는 선택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제공해 준다.

하지만 칼빈이 주장하는 개인선택이 곧 개인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칼빈은 개인의 선택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열국 중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고 하셨고 또 사도 바울은 주의 사역을 위해 특별히 택함을 받았다고 언급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민족의 선택 및 직분자의 선택을 구원에 이르는 개인의 선택과 구별하셨다. 이 같은 다양한 하나님의 선택의 종류는19) 선택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직분자로서 선택받은 자들이나 선택 받은 민족에 속한 자들은 누구나 다 반드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삭의 아들 에서는 선택 된 민족의 한 일원이었으나 그는 스스로 계약을 파기하였다. 에서의 경우와 같이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나 그것이 곧 구원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유다는 선민(選民)으로 직분을 맡은 자였으나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계속해서 “하나님은 그의 신비스런 계획에 의해 그가 기뻐하시는 자는 선택하시고 또 다른 자는 유기하심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구원에 이르는 개인의 선택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충분히 설명 된 것이 아니다.”20)라고 했다.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 된 개개인만이 그들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접붙임을 받게 되며 그로써 “그들은 결단코 그들이 받은 구원을 상실하지 않게 된다.”21)고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선택된 자들만이 신적(神的) 공동체로 모이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택 자들을 한데 모으시고 그들을 끊을 수 없는 끈으로 그 자신에게 묶어 두신다.”22) 이런 칼빈의 주장은 칼빈의 교회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4) 선택과 유기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선택(particular election)을 아주 명백하게 강조했기 때문에 칼빈의 적대자들은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이냐?”라고 칼빈을 비난하며 반대했다. 그러자 칼빈은 적대자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님이 그가 만드신 것들을 그분 마음대로 하시는 데 무엇이 잘못 되었단 말이냐?” 칼빈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선택됐건 유기됐건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의 이 같은 주권에 대해 하등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선택 된 자들도 유기된 자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죄인들이다. 칼빈은 이 점에 있어서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의 견해와 일치 한다. “하나님께서 범죄 함으로 마땅히 죽을 자들을 정죄하시고 그가 자비를 베풀고자 부르신 선택하신 자들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죄인의 비난의 대상이 되실 수 없다. 채권자가 어떤 채무자에게는 채무를 변개해 주고 또 다른 채무자에게는 빗진 돈을 강제로 징수한다고 하여 누가 그 채권자를 나쁘다고 욕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23) 

칼빈은 이 같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주님은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그가 원하시는 대로 어떤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동시에 그는 공의의 심판자도 되시기 때문에 또 다른 자에게는 엄히 책벌을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범죄 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혜를 내려 주시므로 그는 자신의 한량없으신 은혜를 나타내 보여 주시며 또 다른 범죄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중지하므로 그의 의(義)를 나타내 보이신다.”24)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 의해 선민으로 선택되었을 때 그들이 타민족보다 무엇이 우월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택과 유기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의(自意)에 의해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신다.”25)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선택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하나님을 향해 불평한다면 그들에게 ‘너희가 이 땅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느냐?’고 물어 보아라! 하나님은 그들을 개(犬)로 만들 수도 있었으나 감사하게도 그의 형상을 따라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다.”26)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 칼빈은 바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詰問) 하느뇨? 지음을 받는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 9:20) 이 같은 사실에서 칼빈이 하나님의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규정할 때 이런 정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는 “창세 전에 이미 각 사람의 미래를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의미한다.27)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개개인의 운명은 큰 차이가 난다. “야곱과 에서 두 사람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자를 꼭 같이 보시지 않았다. 아니 비슷하지도 않았다. (중략) 하나님은 또한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씨로 여기시지 않고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씨로 여기셨다.(창 23:12) 하나님은 므낫세를 제쳐 두시고 에브라임을 그보다 앞세우셨다.”28)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창 48:20) 

누구도 자기의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아주 드문 예외가 있다. 즉 야곱과 에서의 경우와 같이 이들의 부모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 자식들의 운명에 대해 리브가는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아들 야급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29) 이런 특별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음을 그 부모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 자체가 아버지 이삭으로  하여금 에서보다 야곱을 더 선호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야곱만 선택되었다고 해서 모든 은혜의 수단들(means of grace)이 에서로부터 철회되고 오직 야곱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다.30) 하나님은 에서에게도 그가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일반은총을 허락하심으로 후에 야곱에 버금가는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Ⅱ.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와 이유

앞서 우리는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반박 할 수 없는 섭리(攝理)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칼빈이 주장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유기하시는가?
  • 하나님은 그들이 선을 행할 것을 예시(豫示, foresee) 혹은 예지(豫知,  foreknow)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는가?

칼빈은 이 질문에 대해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 이성으로는 만족한 대답을 얻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은 이를 수긍하도록 이들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그럼에도 칼빈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최우선적이고 중요한 최고의 이유는 하나님의 ‘자의지’(自意志)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서라고 주장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선택의 근거요 이유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 근거가 아님이 분명한 이상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자비가 우리의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다. 그러므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선택의 근거가 되신다. 이에 대해 칼빈의 입장을 좀 더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은 우리의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다.” 칼빈은 인간의 선한 행위가 선택의 이유가 되지 않음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31)

첫째, 하나님은 창세 전에 선택 결정을 내리셨기 때문에 선택 자들이 무슨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말은 논리적이 아니다.

둘째,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선한 행위를 할 능력이 없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로 선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행위로 보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32) 칼빈은 우리가 선택된 ‘창세 전’이라는 시기는 우리의 선택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것이다. “우리가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데 우리의 지위나 가치의 유무를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준다.”라고 하며 “그렇다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똑같이 아담의 후손이 될 사람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33)라는 질문을 던진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뜻과 은혜에 의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34)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 사실을 더욱 심오하고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35) 칼빈은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야곱과 에세 그리고 믿는 유대인과 믿지 않는 유대인 사이를 뚜렷이 구별시키고 있다.” “만일 그들이 경건한 삶을 통해 구원을 획득하고 불경건한 삶을 살므로 구원을 상실케 된다면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스런 선택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36) 

(1) 하나님은 예지하시고 선택하셨는가?  

하나님은 선을 행할 것을 예지(豫知)하시고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과연 선택 받을 자의 선행을 예지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신 것인가? 이것이 선택의 근거와 이유인가?” 이에 대한 킬빈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어떤 소르본느 대학의 궤변가는 우리가 선악 간에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장차 선이나 악을 행할 행위의 성격을 알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안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상실된 것을 모르고 입을 놀리고 있다.”37) 

“우리는 다 아담 안에 잃어버린바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그분의 선택으로 멸망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외 없이 지옥의 아궁이에서 영원한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38) 또 로마서 9장은 칼빈의 주장을 결정적으로 뒷받침 해 준다. “만일 하나님의 예지(豫知)가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는 데 근거가 된다면 바울은 선택의 시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39) 칼빈은 암부로스(Ambrose, 337-397)의 학설을 두루 섭렵하고 있으나40) 로마서 9장과 비슷한 성격적 근거에 따라 이들의 주장을 모두 거부하고 있다.

만일 인간의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든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차별을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는 적대자들의 주장을 사도 바울은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칼빈은 “만일 바울이 선택에 있어 인간의 행위를 단 한 마디라도 그 근거로 긍정하였다면 이 논란은 쉽게 해결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적대자들의 공격을 자초하였는가? 그 이유는 성령이 그의 입을 통해서 진리만을 전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이 그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칼빈은 직설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자를 선택하시고 또 그에게 호의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그가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41) 그러므로 고대 교회 한 저술가가 서술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은혜로 알고 감사히 받아들인 사람이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는 자들보다 훨씬 현명한 자이다.”42)라는 것이다.

어거스티의 말 역시 진리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를 찾아내시는 것이다.”43)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목적이란 말에 분명히 암시되어 있듯이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44)고 술회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서 찾을 수 있다. 선택의 이유와 근거는 인간의 선한 행위나 하나님의 인간의 행위에 대한 예지(豫知)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무엇인가?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라고 서술한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가 이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였다. 인간적으로는 어느 면에서 보나 양자 사이에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하나님이 야곱은 받아들였으나 에서는 거부하셨다.45)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고 또한 이 세상에서부터 천상(天上)의 삶을 누렸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는 외형상의 인간적인 차이점은 없었으나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유기된 에서와 그의 예정에 의해 선택된 야곱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46)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5,9에서 언급한 ‘그 기쁘신 뜻대로’라는 말의 의미는 그분 외에는 누구도 어느 것도 그분의 선택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은혜를 감사하며 감격하는 마음으로 받을 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선택 시에 인간의 행위를 고려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47) 만일 우리가 야곱과 에서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이유를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외의 다른 대답은 찾을 수 없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하셨으니”48) 

(3)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에베소서 1:5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제쳐두고 선택의 이유를 발견하고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의도(意圖, will) 외에 다른 이유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뜻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유(理由, reason)와 원인(原因, cause)이 되기 때문이다.49)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攝理)와 호의(好意)는 다른 이유가 있어 선포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은 무조건 행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 때는)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려고 하셨는지 묻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바로 지해 있는 행동이다.”50) 

칼빈은 1562년 출판한 그의 저서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에서프랑스 개혁교회의 이름으로 프랑크푸르트(Frankfurt)의 디트(Diet)에게 보낸 편지에 상술한 내용을 약술하고 있다. “우리가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우리를 창세 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기를 기뻐하셔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 외에 다른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를 찾지 말아야 한다.”51) 칼빈이 주장한 ‘주권적 의지’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의 신(神) 개념의 하나님은 ‘절대적 능력’으로 설명한 중세기의 신(神)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52) 칼빈에게 있어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에 의해 수식(修飾) 된다. 그분의 의지는 의롭고(義), 거룩하며(聖), 바른(正)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근거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칼빈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연원(淵源, 사물의 근본, 본원)하나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 혹은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창세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엡 1:4) 칼빈은 인간이 우월해서 주께서 구원해 주신 것은 아니라고 것을 강조했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은 다음의 언급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의 자손 가운데서 그의 자녀가 될 만큼 그의 맘에 드는 자를 한 사람도 발견하시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시고자 구속자 예수를 그들 가운데로 내려 보내셨다.”53)  

칼빈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엡 1:4)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그들에게 상(賞)으로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54)  칼빈에게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섭리의 특성’을 결코 약화시키거나 변경시키지 못한다.    62

그가 에베소서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영원한 ‘신적 섭리’(divine decree)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55)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은총을 만민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 유무나 지위 여하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비에 따라 그분은 자의지(自意志)에 의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5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선택된 것은 우리가 우월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인간이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을 한낱 쓸모없는 폐물(廢物)로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무가치한 존재인 것을 전제(前提)한 것이기 때문이다.57)

칼빈은 피기우스(Albert Pighius, 1490-1542)의 허황된 주장을 반박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 6:37절을 인용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칼빈에 따르면 여기서 세 가지 명백히 요약적으로 제시된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고 한다.    63

첫째, 그리스도에게 오는 모든 자들은 이전에 성부께서 그리스도에게 이미 주신 자들이다.

둘째,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들은 완전히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

셋째,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탁하신 자들을 보호하시어 그 들 중 어느 누구도 멸망하지 않도록 해 주시는 보호자이시다.

그러므로 만일 “신자란 과연 무엇을 믿는 자냐?”라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는 자이다.” 58)

Ⅲ.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과 수단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그분에게 영광(榮光)을 돌리고 성화(聖化) 된 자가 되도록 하려 함이다. 주님은 이렇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선택하셨다.

첫째 칼빈이 ‘최종적인 이유’ 또는 ‘궁극적 선택의 의도’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둘째 칼빈이 ‘선택의 당면 목적’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신자의 성화’이다.

(1)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

칼빈은 에베소서 1:4의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을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의 궁극적 목적만이 아니라 당면 목적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어떤 실체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낯선 생각은 아니다. 건축의 목적은 살 거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면한 목적이다. 그러나 그 건물 속에서 편하게 산다는 것은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론에서 떠났지만 이런 사실을 여기서 곁들여 말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신자의 성화’라는 선택의 목적 이것에 이어 또 다른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를 동시에 언급한다고 해서 모순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선택의 최상의 목적이고 ‘신자의 영화’는 부차적인 목적이다.”59) 

“에베소서 1:6의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런 궁극적 목적은 12절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이 목적을 되풀이하여 서술한다. “우리가 단지 그의 자비를 받는 질그릇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60) 

이 같은 ‘하나님의 영광’은 칼빈의 가르침에 있어서나 그의 개인생활에 있어서 특히 강조점이 되어졌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 그의 잘 알려진 모토(motto)였다. 에베소서 주석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서술하고 있고 ‘기독교강요’의 선택 교리에서는 이애 대해 한층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선택 교리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때 얻게 되는 유익한 열매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 전적인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적 관심사로 삼는 칼빈의 태도는 그의 선택 교리 논의의 근거가 되고 있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선택의 당면 목표인 ‘우리의 성화’와 이 목표와 관련해서 제기되는 질문에 더욱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선택의 당면 목표는 선택 자들의 성화이며 그들을 하나님 보시기애 흠 없고 거룩한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엡 1:4) 성화된 신자들은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선택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의 수단을 제공해 주신다.

(2) 하나님의 선택의 수단들

  • 구원의 단계들(구원의 서정)

로마서 8:29,30은 이런 수단들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召命, calling)이며 ‘칭의’(稱義, Justification)와 ‘영화’(榮華, Glorification)이다. 수단과 목적은 언제나 상호 보완적이다. 우리는 선택 받은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부르심’(召命, calling)은 하나님의 선택의 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들의 그 다음 선택 받은 목적이 실현될 ‘영광’(榮光)에 들어가기까지 ‘칭의’(稱義)를 또 다른 선택의 수단으로 간주한다.61) 이런 사실은 칼빈 신학 전체에서 하나님의 선택 교리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 준다.

하나님의 선택은 창세 전에 있었던 영원한 섭리 즉 예정으로부터 영광 가운데 있을 영원한 섭리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전(全) 과정과 다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신앙,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원, 교회와 성례, 종말 등의 모든 주제와 다 관련이 있다.62) 

칼빈은 마침내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을 논할 올바른 위치를 발견했는데 구원론을 주로 다룬 ‘기독교강요’ 제3권이 그것이다. 칼빈의 구원론은 종말론에서 절정을 이룬다. 왜냐하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그를 경외하는 자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시 103:17) 칼빈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의 말을 인용한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끝을 알 수 없는 축복까지”63) 

  • 말씀 선포(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실 때 사용하시는 또 다른 수단은 말씀 선포 ‘설교’다. 하나님은 예정(豫定)의 실현을 위해 허락하신 수단들을 사용하게 하신다. 그러나 이 수단들은 그분의 명령과 그의 주권(主權) 지배(支配)하에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 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듣는 것은 아니며 듣는 사람 중에서도 그 반응은 제각기 다르다.64) 그 이유는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복음전파가 ‘선택의 샘’에서 흘러나옴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도 복음을 듣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가 선택 받은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65) 

  • 성령의 조명  

“선택의 증거가 되는 ‘부르심’(召命, calling)과 로마서 8:30에 언급된 ‘부르심’은 말씀의 설교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의 귀애 들려지게 된다.”66) 이런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는 한 가지 수단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이미 그의 자녀로써 입적시키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써 선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선택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된다.”67) 

  • 말씀 전파(전도와 선교)

그러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해야 된다는 것이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모순되는 것인가? 칼빈은 하나님의 약속의 보편성(universality)이 하나님의 특별 은혜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담대히 대답했다.68)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듣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69)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셨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신성한 믿음의 띠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여 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듣는다고 누구나 신앙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오직 택하신 자들에게만 하나님은 신앙을 주신다.”70) 

이처럼 ‘보편적인 선택’(general election)을 주장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칼빈의 말이 왜 그런지 설명하기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끝까지 지킬 수 있게 하는 ‘회심의 영’(the Spirit of regeneration)을 내적인 은혜의 역사가 없이 부어주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적인 은혜의 역사가 없는 단지 외적인 태도의 변화는 유기(遺棄)와 선택(選擇)의 ‘중간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71)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왜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이 예수 믿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 멸망이 예정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선택 받을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조장하는 것이며 선택 받지 못할 악한 자에게 핑계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당신은 저주 받은 존재로 이미 운명 지어졌기 때문에 장래에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는 선택 받은 자에게 선한 복음의 진리 대신 저주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누가 선택받도록 예정되었는지 또 누가 유기되도록 예정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기 보다는 진정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기를 바라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도 구원을 받도록 기원해야 한다.”72)

아울러 칼빈은 복음전파 그 자체는 유기 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73)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도 이를 명백히 거절한 자들은 예수 탄생 이전 사람이나 복음을 전혀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다.74) 이처럼 복음전파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선택을 실제화(實際化) 혹은 유효케 해 주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복음전파를 ‘선택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라고 표현했다.75) 

“선택 자들은 육신의 출생 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모여들게 된다. 그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모여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 각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하실 때 각 자는 그리스도의 품안에 안기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한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오기 전에 그들은 누구나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선택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해 영원한 멸망의 낭떠러지로 추락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76) 

“선택 자들의 심령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서 유래한 것이며 ‘성령의 역사’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내적 부르심’(inner call)은 부인할 수 없는 선택의 증거(證據, pledge)이다.”77) 

Ⅳ. 하나님의 선택과 신앙

(1) 하나님의 선택과 신앙  

칼빈은 선택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 할 때 반드시 우리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과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첫째,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간주하여 인간의 동의(同意)에 의해서만 선택이 유효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계획에 앞세우는 격이 된다.”78) “성경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능력마저도 없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한다.”79) 

둘째, 선택이 신앙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신앙을 갖기까지는 선택 받은 사실은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소용없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80) 칼빈은 이애 대해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야 선택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휘하고 복음을 수용함으로 선택이 우리에게 유효하게 된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라고 했다.81) 칼빈은 우리의 믿음이 곧 우리가 선택 받은 증거라고 말한다.82)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택받은 것을 분명하게 해 주지만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이 흘러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인 수로(水路, 믿음)와 물이 발원(發源, 선택)하는 원천인 샘과 흔동해서는 안 된다.”83) 이런 이유 때문에 칼빈은 믿음을 두 번째 위치에 놓는다면 그 믿음은 선택의 교리와 적절이 조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84) 

(2)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하나님의 선택은 신앙의 어머니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선포된 섭리 즉 선택을 실현하시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 ‘칭의’, ‘소명’의 수단을 사용하신다. 주님은 그의 선택 자들을 부르심과 칭의로 인(印)을 치신다. 그러므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선택 자들이 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들이 선택 받은 증거라고 믿는다. 역시 칭의도 그들이 선택 받은 또 다른 증거로 간주한다.”85) 

이 같은 칼빈의 말을 염두에 둘 때 칼빈의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전혀 도외시 하는 사설(邪說)이라고 하는 반대자들의 주장에 대한 그의 논박을 잘 이해할 수 있다.86) 칼빈은 어떤 사람이 예정론을 그러한 불경한 말로 오염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에 대한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87)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 중 하나가 우리로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라면 우리가 주의 은혜에 힘입어 거룩한 자가 되도록 마땅히 노력 해야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88) 

사돌레토(Jacopo Sadoleto, 1477-1547)는 칼빈의 예정론이 인간의 책임과 해야 할 바를 도외시한 사설(邪說)이라고 공격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그의 악담(惡談)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죄의 세력에서 구하여 의(義)의 세계로 옮겨 놓으심으로 의롭다하시고 그가 의롭다 하신 자들을 축복된 삶으로 부르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다. 또한 그의 성령을 통해 주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이 같은 예정론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자기가 해야 할 바를 다하지 못하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게으름뱅이로 만든다는 주장은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잘못 된 주장이다.”

칼빈의 이 같은 반박이 옳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한 말에 비춰보면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살전 4:7)89) 

(3)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의 거울’  

칼빈 역시 우리가 어떻게 선택 받은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90) 이 질문은 구원의 근거인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숙고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씩은 제기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사탄은 이를 이용하여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택함 받은 사실을 의심케 하는 마음을 불어 넣는다. 동시에 사탄은 하나님의 선택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도록 신자들을 유혹한다. 이것은 사탄이 신자들에게 휘두르는 강력한 무기이다.”91)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를 알려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잘못된 점은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사실을 알려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한한 인간이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정해졌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 ‘신비한 하나님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것은 바른 길을 벗어난 일이다.92) 만일 이런 시도를 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삼켜 버릴 끝없는 미지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암흑 가운데 헤매게 될 것이다.93) 우리가 이런 우를 범하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잃게 된다.94)”

  •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선택받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한 칼빈의 주장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의 거울’(mirror of election)이신 여수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95) 하나님이 그의 호적에 입적시킨 자녀들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업 1:4)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선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거울’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를 통해서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의 소유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생명록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그리고 잘 알 수 있다.(계 21:27)96)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받은 사실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한다.

(4) 하나님의 선택의 의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사 그의 아들 양자(養子)로 삼으시고 그의 영원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선택받은 확실한 증거는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을 훔쳐보려는 호기심 어린 시도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선택받은 사실을 확인하는 이것이 인간된 우리가 취할 태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선택받은 사실을 알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98)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유일한 구세주로 세우신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위탁하셨는지 알아보면 된다.99)

이 말은 우리의 선택받은 사실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칼빈이 서술한 바와 같은 의미이다.100) 그러므로 여러분이 선택된 것을 확실히 알고 여기에서 나오는 한없는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를 보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라.101)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붙어 있을 때 우리는 현재 선택받은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게 된다.

(5) 하나님의 선택의 영원성

어떤 사람이 참된 신앙을 가진 것 같고 그리스도에 온전히 붙어있는 것 같지만 얼마못가서 다시 불신자의 생활로 빠져든다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칼빈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정공법(正攻法)으로 대처하였다. 미래에도 역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변함없이 붙들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현재나 장래의 모든 걱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변함없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을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좋지 아니하리라.”(요 6:37)102) 

칼빈은 다른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단번에 그의 소유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토록 안연히 거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메시지를 듣고 있는가?”103)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가 되시며 그분의 ‘불변의 진리’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가 말씀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변함없는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10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는 확실한 것이어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는 사람은 주의 약속을 의심하는 불경죄를 짓는 것이 된다. “오! 주님! 만일 저가 선택되었다면 그 증거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105) 이런 기도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여겨졌던 어떤 사람이 후에는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선택에 대한 확신이 결여된 채 주의 약속을 진실 된 마음으로 믿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다.”106)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귀중한 믿음을 선물로 받고 아버지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자(信者)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목자와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멸망되지 않으리라는 주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조금도 경감시켜서는 안 된다.”(요 3:16, 6:39)107) 

소위 ‘실제적 방법론’(syllogismus practicus)을 칼빈이 독자들에게 소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도 상술한 사실과 같이 중요한 것이다.108) 사실 칼빈이 주장했던 바와 소위 ‘실제적 방법론’사이에는 명확하게 식별하기 어려운 가느다란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따라서 칼빈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신뢰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선한 행위를 들추어내는 오류를 범하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가 참으로 강조하였던 바는 신자들을 위하여 하였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다. 칼빈은 선택받은 사실은 증거들로 부르심, 칭의, 성화 등 을 보아서 알 수 있다고 술회한다.109)   

그러나 여기서 칼빈은 이런 증거들과 인간 자신의 노력을 현격히 구분시키고 있다. 그가 이런 증거들에 대하여 자세히 상술 할 때 그는 결코 신자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런 증거들을 있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에서 파생된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선택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110) “만일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위탁하셨는가를 알아보면 된다.”111) 

장래에도 우리가 구원의 안연(異然)함에 거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은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달린 것이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음성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듣게 된다.”112) 칼빈은 그의 소책자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Concerning the Eternal Predestination)에서 이 점에 대해 ‘기독교강요’에 서술된 내용을 요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원에 대한 신뢰는 그리스도에게 기초하고 있고 약속의 말씀에 의존되어 있다.”113) 

마치는 말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택받은 사실을 확실히 할 수 있다고 말한 칼빈의 주장은 결코 영원한 선택의 섭리적 특성(decretive character)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택받은 사실을 알려 주는 ‘거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칼빈의 연급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헛된 시도에 대해 칼빈이 경고하였을 때 그는 결코 영원한 선택 섭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술한 것은 아니다.114) 

그가 여기서 크게 관심을 가켰던 바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대해 어떻게 알며 그의 선택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직접적으로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즉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확실히 참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선택)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잘 이혜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칼빈은 이를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선택은 신앙에 앞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에 의해서만이 우리가 선택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이 자기 안에서 마음의 안위를 발견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타나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회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졌나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 하나님은 자의(自意)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시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선택된 ‘특별한 백성’으로 인정받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115) 

칼빈은 청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도록 요구했다.116) 그는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부르심’과 ‘신앙’을 통해 그들이 선택받은 사실을 확실히 알도록 권고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전혀 도외시 하지 말 것도 경고하였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알지만 이런 사실이 이 모든 것에 선행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예정(선택)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117)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값없으신 선택을 다시 한 번 요약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자의(自意)에 따라 택할 자를 택하시며 이러한 하나님의 자의적(自意)的) 선택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 비방 받을 것이 전혀 없게 되어 진다. 모든 성경의 중언을 숙고하건데 우리가 선택 받은 사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만일 우리가 선택 교리를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 교리는 우리에게 참된 마음의 평화와 안위를 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언급은 본장의 결론을 적절히 요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정교리 논쟁’을 흔히 ‘파도치는 바다 위의 항해’와 비유되기도 하지만 이 ‘예정교리 논쟁’으로 인해 스스로 위험에 빠지는 행위를 자초하지 않는다면 이 논쟁은 아주 유익하게 진행될 수 있고 또 우리에게 한없는 유익을 준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정교리 논쟁’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비밀을 캐내어 이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획득하려는 사람은 끝없는 무지의 심연으로 자신을 끌어내리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의 아버지의 뜻 즉 하나님의 예정의 의미를 적절히 찾으려는 자는 한없는 위로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118)(*) 글쓴 이 / 윤익세 교수(한국 칼빈대 실천신학, 캘리포니아 베데스다대학교 M. Div, 아주사퍼시픽대학교 M.Div, MAR., 칼빈신학교 M.Th. Cand., 코헨신학교 Th.D., 국제신학교 D.Min.) 편집자 주 / 이 글은 윤익세 교수의 ‘칼빈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로운 선택’(God’s Sovereignty and Merciful Election in Calvin’s Theology) 논문 내용을 요약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 미 주 >

1) Inst., 3.22.2(OS, 4:381F.) 참조 ‘Concerning the External Predestination of God’ pp.68.      126, 128, 134, 140, 145, 158.

2)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Galatians, Philippians, and Colossians(on Eph. 1:58) OC. 51:148. 150(이 주석은 1548년 초판이 나왔다. 위에서 인용된 기독교강요의 이 부분은 1559년 판에 나왔다.) T.F. Torrance는 칼빈이 그리스도를 네 가지 의미에서 선택의     이유가 된다고 보고 있다.(Kingdom and Church pp:73,107) 필자는 그의 견해를 칼빈신학에 대한 Neo-orthodox Interpretation이 라고 생각한다.

3) John 6:37(NIV) in Inst., 3.22.7.

4) Inst., 3.22.7.(OS, 4:387)

5) Ibid.,

6) Ibid., ‘…caeIeste decreto… quando Se Chnstus electionis facit authorem”.’ Cf.     comments on John 13:18 i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and the First EpistIe of John(0C,47:310-311)                                                

7) 참고 : Isnt., 1.13 and 1.16-18 9(OS, 3:108ff., 187ff)

8) 참고 : Ibid. 1.6-9( OS, 3:60ff)

9) The Whole of book 3, ‘De modo percipiendae Christi gratiae’ and 3.1 ‘Quae de Christo  dicta sunt, nobis prodesse, arcara poeratione Spiritus’ OS, 4:1

10) Isnt. 3.21.5(OS, 4:374) see chap I, note 58 above

11) Ibid., 3.21.7(OS, 4:378f) See chap I note 59 above.

12) Eternal Predestination, P.121(OC, 8:313)

13) 에베소서 1:4, OC, 51:147.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아주 복잡한 것이기는 하나 칼빈은 Edward A. Dowey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추상적 의미에서 ‘preced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음을 주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The Knowledge God in Calvin’s Theology, p.l87)

14) Inst., 3.21.5(OS, 4:374) 참고 : chap. I, note above

15) 칼빈이 ‘supralapsarian’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다. 참고 : Otto Weber, Calvin, P.1594;      Dowey, ‘The Knowledge of God’, P.186, Wilhelm – Albert Hauck, ‘Die Erwahlten:      Pradestination und heilsgewissheit nach Calvin’, p.19, ‘De I’electionetemelle de Dieu’:      Actes du congress international de theologie calciniste, Geneve, 15-18 Juin 1936.      While Calvin may be called a supralapsarian in the earIier usage of that term, later both      infralapsarians and supralapsarians agreed that adam’s fall had been decree by God.       supralapsarian in the later sense of the term, 참고 D.R. Polman, de praedestinatintieleer      van Augustinus, thomas van Aquino en Calvin: ‘Een dogmahistorische studie’, pp.348f.,      377; Hein Otten, ‘Calvins theologische anschaung von der Pradestination’, PP.97f.

16) Inst., 1.16.8(OS, 3;198f)

17) Ibid., 1.18.2(0S, 3:223) Cf,3.23.6: “모든 것의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 모든 것이 그분의 결정과 명령하심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은 명확하다.”

18) Ibid., 1.18.2(0S, 3,223). Cf-also 3.24.17, 여기에 나온 언급은 1.18에도 나와 있다. 역시 3.23.3,5,6,8,9,를 주목하라. 여기서 애정과 섭리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이따금씩 양 단어는 서로 맞바꿔서 사용되고 있다, Torrance가 Calvin은 Aquinas와 같이 선택을 ‘Pas providentiae’로 보지 않고 있다고 말한 점에 있어서는 옳지만 칼빈이 이들 교리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Kingdom and Church’ p.4.cf.Hauck, ‘Vorsehung und Freheit nach Calvin’, pp.11ff., 20f; Hauck, ‘Die Erwahlten’, PP.33ff;  and ‘Paul Jacobs, Pradestination und Verantwortlichkeit bei CaIvin’, PP.67f.)

19) Inst., 3.21.6(OS, 4:376,377) 라틴어로는 ‘Secundus gradus’와 ‘duos gradus’라는 말로 표현한다. 참고: 요한복음 13:18(0C 47;31311) Dowy는 이 부분에 있어 칼빈의 의도를 정확히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선택의 종류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은 그의 성경의 무오설에서 유래      된 것이다. 단순히 형식적인 문자주의에 근거하여 칼빈은 에서가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 맨 처음 선택된 자였으나 야곱이 축복을 받았을 때에서는 거부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The Knowledge of God’, p.212) 그러나 에서가 선택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칼빈의 견해를 정확하게 대변하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에서는 유기된 것이다. 참고: Dowey, ‘The Knowledge of God’, p.39 and Jacobs, ‘Pradestination’, pp.57ff.

20) Ibid., 3.21.7(0S, 4:377)

21) Ibid.,

22) Ibid., cf also especially 4.1,12.

23) Ibid., 3.23.11(OS, 4:405)

24) Ibid., 참고: Inst., p.959(note 26)

25) Ibid., 3.22.1(0S, 4;380)

26) Ibid., Cf. 3.24.17. and also comments on Malachi 1:2-6

27) Ibid., 3.21.(OS, 4;374) See chap. 1. note 58 above.

28) Ibid., 3.22.5(0S, 4;385)

29) “그녀의 아들 야곱의 선택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던 리브가는 악한 계책을 사용하여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하였다.”(창 27:9) Ibid., 3.2.31(OS 4;41)

30) 백인들이 선택된 종족이고 선택된 종족은 유기된 종족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칼빈의 서술에서 이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발견할 수 없다.

31) Inst., 3.22.3,4(OS, 4;382ff)

32) Eph. 1:4(NIV), cited in Ibid,. 3.22.2(OS, 4:381)

33) Ibid., 3.22.2(OS, 4:381), See also Ephesians(on 1:4)

34) Ⅱ Tim. 1:9(NIV), cited Inst, 3.2.3.

35) Ibid., 3.22.4.(OS, 4:383)

36) Ibid.,

37) Ephesians(on 1:4) OC, 51:147                                          

38) Ibid.,

39) Inst., 3.22.4(OS, 4:383)

40) Ibid., 3.22.8,9(OS, 4:388R)

41) Ibid., 3.22.8(OS, 4:389)

42) Ibid, 3.22.9(OS 4:390)

43) Ibid., 3.22.8(OS, 4:389)

44) Ibid., 3.22.4(OS, 4:384)

45) Ibid., 3.22.5(OS, 4:384)

46) Ibid., 3.22.6(OS, 4:385)

47) Ibid., 3.22.6(OS, 4:385)

48) Romans 9:15(NIV). OC, 49:181,182 cf. Inst, 3.22.6.

49) Inst., 3.23.2(OS, 4:395)

50) On Ⅱ Tim 1:8,9, Sermons on the Epistles of St. Paul to Timothy and Titus p.703a  (OC, 54:48)

51) Article 9. ‘Tracts and Treatises’, 2:142(OC, 9:756)

52) Cf. Inst., 3.23.2. See chap. 3. note 37 below

53) Ibid., 3.22.1(OS, 4:380f)

54) Ibid., 3.24.5(OS, 4:415) Cf. Calvin in the Articles ‘Concerning Predestination’: “우리가 그리스도 안어서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소유물로 간주하신다는 사실(선택의 사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제가 되게 하시는 것(구원)보다 순서상 앞서있다.” ‘Theological Treaties’ p.179(OC, 9:714)

55) Ephesians(on 1:5, OC, 51:148)

56) 첫 번째 증거는 섭리 선포의 시기 – 창세 전에서 유래한다.

57) Ephesians (on 1:4) OC, 51:148

58) ‘Eternal Predestination’, p.72 (OC. 8:273) Cf. also Calvin on John 6 in Inst., 3.22.7.

59) Ephesians (on 1:4). OC, 51:147

60) Ibid., 1:12 (OC 51:152)

61) Inst., 3.21.7(OS, 4:379)

62) Ibid., 3.21.1. See also Polman, ‘De Praedestintieleer’, pp. 357-377: Torrance, ‘Calvin’s      Doctrine of Man’, pp. 105, 107: and Heinrich Quistorp.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p.24, Qustorp은 선택과 종말론을 쌍둥이 교리로 언급하고 있다.

63) Ibid., 3.22.10(OS, 4:392)

64) Ibid., 3.22.1(OS, 4:368f)

65) Ibid., 3.22.1(OS, 4:410)

66) Ibid., 3.22.2(OS, 4:412)

67) Ibid., 3.24.1(OS, 4:410)

68) Ibid., 3.22.10(OS, 4:390)

69) Ibid, 3.22.10(0S,4:391) This latin is ‘ut efficacier prosit’

70) Ibid., 3.22.1(OS, 4:392)

71) Ibid., 3.21.7(OS, 4:378)

72) Ibid., 3.23.14(OS, 4:409f)

73) Ibid., 3.24.12(OS, 4:396) Cf. Hennan Kuiper, ‘Calvin on Common Grace’

74) Ibid., 3.24.12,13.

75) Ibid., 3.24.1.(OS, 4:410)

76) Ibid., 3.24.10(OS, 4:421) Cf. 3.24.11: 하나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그들이 범하지 않도록 그들을 지켜주신다.

77) Ibid., 3.24.2.(05, 4:412) ‘Interior igitur haec vocatio pignus est salutis quod faller non postest’

78) Ibid., 3.24.3(OS, 4:413)                          

79) Ibid.,

80) Ibid.,

81) Ibid.,                                                            

82) Ibid.,

83) Ibid.,

84) Ibid., 3.22.10(OS, 4:392) 

85) Ibid., 3.21.7(OS, 4:379)

86) Ibid., 3.23.12-14(OS, 4:405ff)

87) Eph. 1:4 in Ibid., 3.22.3(0S, 4:382)

88) Ibid., 3.23.12(OS, 4:406)

89) Reply in Sadoleto, ‘Teacts and Treatises’, 1:43f.(OC, 5:398,399)

90) Inst., 3.23.4(OS, 4:414)

91) Ibid.,

92) Ibid.,

93) Ibid.,

94) Ibid.,

95) 매우 드믄 경우에 이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거울’을 인용하고 있다. of Inst., 3.32.1.(OS. 4:380)

96) Inst., 3.24.5.(OS, 4:415)

97) Ibid., (OS, 4:415)

98) Ibid., (OS, 4:416)

99) Ibid., 3.24.6.(OS, 4:417)

100) Ibid., (OS, 4:416).

101) Ibid., 3.24.4.(OS, 4:415)

102) Ibid., (OS, 4:417) 칼빈은 요한복음 6:37 외에 요한복음 6:39, 10:27,28, 마태복음 15:13  요한일서 2:19, 로마서 8:38, 빌립보서 1:6, 누가복음 22:32을 인용하고 있다.

103) Ibid.,

104) Ibid., 3.24.5.(0S, 4:416)

105) Ibid.,

106) Ibid., 3 24.7.(OS, 4:418)

107) Ibid.,

108) 참고 Karl Barth, ‘Die Kirchlicle Dogmatic’, 2(part 2) : 369, ‘Church Dogmatic’ 2(part 2) : 335f. cf. Wilhelm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p.170ff. 175ff.

109) Ibid., 3.24.4.(OS, 4:414) ‘In iis signis postrioribus’

110) Ibid., 3.24.4.(OS, 4:415)

111) Ibid., 3.24.4.(OS, 4:417)

112) Ibid., 3.24.4.(OS, 4:412)

113) ‘Eternal Predestination’, p.56(OC, 8:260)

114) Cf. also Ibid., pp. 126ff(OC, 8:318ff) Torrance (in ‘Calvin’s Doctrine of Man’) and Dowey (in ‘The knowledge of God’) left the opposite impression.

115)  Eternal Predestination. p.127(OC, 8:318-319)

116) On Ⅱ Tim. 1:9,10 Sermons on Timothy and Titus, p. 708b(OC, 54:54)

117) Ibid., p.710a Cf. also pp.706-708

118) InsL, 3.24.4.(OS, 4:414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