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칼빈의 생애를 통해 본 칼빈의 가정과 가정교육

I.

지금까지 복음주의 경향의 한국교회가 실행해온 기독교교육은 한마디로 전도지향 교육이었다. 미션스쿨의 기독교교육이 불신 학생에게 전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교회 주일학교도 어린이교육을 통한 전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청소년교육 및 수련회의 목표도 전도와 결단에 맞추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미션스쿨의 경우 개종한 학생 수가 얼마나 되느냐 또 교회학교의 경우 출석학생 수가 얼마나 되느냐가 성공의 기준이 되어왔다.  

그러나 개신교가 한국 땅에 들어온 지 100여 년이 지난 20세기 말부터 한국교회의 전도지향 교육효과는 크게 약화되고 있고 기독교 공동체의 성장은 정체상태에 접어들었다. 불신자의 전도 유입이 급감하고 교회생활에 실망하거나 혹은 교회의 세속화 결과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기독교가정의 저출산(低出産) 및 신앙의 세대 계승 실패 등으로 한국교회가 노령화되고 새로운 세대가 크게 위축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내적으로 신앙의 세대 계승이라는 긴급한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위기상황은 기존의 교회교육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많으며 해결책으로 기독교가정 교육과 기독교학교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교회교육과 기독교학교 교육에 대한 연구에 비할 때 기독교가정 교육에 대한 연구는 아주 미미했고 실제로 기독교가정 교육을 위한 교육 자료나 프로그램도 부족한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20여 년간 가정사역의 일환으로 가족관계 증진을 위한 기독교 상담학적 연구가 제법 시도되기는 했으나 기독교가정 교육을 위한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기초연구가 대단히 부족하여 기독교가정 교육의 바른 방향과 심화된 발견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기독교가정 교육애 대한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기초연구의 일환으로 칼빈을 주목하려 한다. 우선 칼빈의 신학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초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칼빈의 가정교육에 대한 통찰은 한국 장로교 신앙공동체에 있어 기독교가정 교육의 신학적 기초 확립에 자연스럽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칼빈이 자신의 신학사상을 성경적 통찰의 한계 안에 두려했고 주로 주경학적 작업과 병행한 것들이어서 칼빈의 통찰은 가정의 성경적, 신학적 기초 탐구에 적합할 것이며, 장로교회의 복음주의 한국 기독교회에 또 공유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동시에 칼빈의 가정교육에 대한 연구는 칼빈에 대한 연구의 확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동안 칼빈에 대한 연구의 대부분은 칼빈을 단지 신학자로 간주하여 성경의 교리 및 신학적 주제들 그리고 사회개혁자로 간주하여 교회와 사회 관련 주제들에 집중되었다. 동일한 관점에서 기독교교육 학자들도 비록 그 수가 많지 않지만 칼빈의 교회교육과 교리교육에 관심을 집중 해 왔다.

20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역사신학자들이 칼빈의 개인적 성격과 생애의 배경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시대적인 배경과 칼빈과 인간적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들 그리고 칼빈의 서신들을 분석하며 연구함으로서 칼빈 전기들을 출간했다. 이러한 칼빈의 전기들은 역사적 인구여서 칼빈의 가정 및 교육 배경에 관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교육학적 관점에서 기대하는바 칼빈의 가정에 대한 이해 및 가정교육에 대한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기독교가정 교육은 위해서라면 그러한 연구들 외에도 칼빈의 저서에서 분석되는 칼빈의 가정 및 가정교육에 대한 통찰을 체계적으로 구조화 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물론 칼빈의 생애와 그의 사역에 있어 가정교육은 일차적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고 칼빈을 연구한 신학자들의 관심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에 따른 개혁교회 신앙공동체가 16세기 이래로 19세기 이전까지 가정을 기독교 신앙교육의 일차 기관으로 간주해 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학교가 제도화되었던 19세기 이후에도 가정이 학교와 나란히 강조되어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개혁교회 신앙공동체가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기독교가정 교육의 필요성과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에서 비록 칼빈의 가정 및 가정교육에 대한 자료와 연구들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의 저서 및 관련문헌의 부분적인 언급들을 통해 추출될 수 있다고 본다.

II. 칼빈이 경험한 가정 및 가정교육

(1) 칼빈 성장 과정의 가정

칼빈의 고백과 그에 대한 전기들을 통해 칼빈이 출생하여 성장한 가정과 이후 성인으로서 그가 형성했던 그의 가정을 기술함으로써 먼저 그의 생애에 있어 칼빈에게 가정이 어떻게 경험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에게 경험된 가정은 이후 그가 생각한 가정 및 가정교육의 배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제자이며 최초의 칼빈 전기 작가였던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그의 책 첫 부분에서 간명하게 정리한 것처럼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르디(Picardy)의 작지만 유면한 마을 누용(Noyon)에서 제라르 코뱅(Gerard Cauvin)과 잔느 르프랑(Jeanne Lefranc)의 아들로 태어났다. 칼빈의 가족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칼빈은 평소 글이나 말로 자신의 가족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Godfrey, 2009, 37)  이는 칼빈의 가문이 귀족 명문가가 아니기도 했고 칼빈의 성장 배경에서 가정이 차지하는 위치가 긍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칼빈 자신도 내성적이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자신과 가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자신의 성격에 대해 “나는 남 앞에 드러나기보다는 그림자 뒤에 남는 것이 더 편하다.”라고 했다.(1979, preface, ⅺ-ⅻ)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는 퐁레베크에서 어촌 선창의 일과 나무통 제조업을 하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교육을 받은 후 자수성가하여 당시 교회가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주교의 마을 누아용에서 변호사로 성공하여 교회 법정의 서기 및 주교의 재정 공증인의 위치에 올라 지방 유지가 되었으며 중산충의 경제생활을 누렸다. 제라르는 성공한 후 40세에 여인숙 주인이며 부유했던 지방 유지의 딸 잔느 르프랑과 결혼했다.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 부부는 결혼생활에서 5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두 아들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남은 세 아들 중 칼빈은 둘째였다. 그러나 칼빈의 어머니 잔느는 칼빈이 6살 되던 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는 잔느의 사망 후 곧 재혼했다. 어머니를 잃은 어린 칼빈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버지의 위탁으로 귀족 몽모르 가문의 집에 보내져 그 곳에서 고아로 소년기를 보냈다.

제라르는 후처에게서 2명의 딸을 더 낳았다. 제라르는 칼빈의 교육을 계속 지원했고 청소년기의 진로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라르는 재정관리 문제로 1528년 교회로부터 출교 당했다. 칼빈이 21살이었던 1531년 아버지 제라르는 임종했다. 그러나 장남 샤를의 노력으로 출교 조치에서 사면되어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칼빈은 생애 초기 6살이 될 때까지만 부모에게 양육을 받았다. 어머니의 임종 이후 몽모르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초기교육을 받았고 14세 때에 파리로 가서 대학에서 공부했다. 비록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과 진로 지도가 청소년기에 계속되었지만 칼빈의 성장 경험에서 가정은 기능에 있어 단편적이고 짧았으며 가정 경험은 범위에 있어 혈연가족의 한계를 넘어 포괄적이었다. 칼빈은 제대로 된 가정을 오랫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고아였다.  

그래서 벨더르하우스는 칼빈의 출생 이후 24세까지 전기 내용을 기술하면서 그 성장의 특성을 고려하여 ‘고아’(孤兒)라는 제목을 붙였다.(Selderhuis, 2009.18.) 칼빈의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는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자수성가한 사람이어서 아들들의 성공을 위해서도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아들들의 교육 여건을 배려하는 일에 있어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 제라르는 당시대에서 아들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최상의 선택으로 보았기 때문에 세 아들을 모두 사제(司祭)가 되길 원했다. 교회 지도자는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출세를 모두 누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들의 교육비를 충당하려고 주교에게서 성직록(聖職祿)의 하사금을 얻어냈다. 그 성직록은 세 아들에게로 이어져서 칼빈도 12세부터 수혜자가 되었다.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는 칼빈의 어머니 잔느의 사망 후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칼빈을 귀족 몽모르 가문에서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교육을 받도록 위탁했고 개인교사를 통한 교육비를 지원했다. 그는 칼빈이 사제(司祭)로 성공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도록 진로를 지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도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제라르는 의도적으로 처음에 칼빈을 학문적 경향이 자유로운 마르쉐 대학에 보냈다.(Selderhuis, 2009, 24.) 그리고 칼빈이 몽때규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교양교육을 거의 이수했던 16-17세경에 신학을 단념하고  법학을 공부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극적인 진로변경 지도에는 교회와의 갈등으로 인한 그의 실망감도 있었지만 칼빈의 자기고백에 따르면 아버지가 현실적으로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더 안정된 수익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Bouwsma, 1988, 10.) 이 단서를 근거로 베자와 파커는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를 현실적인 사람으로서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안정을 열망한 사람으로 묘사하였다.(Beza, 1996,16, Parker, 2009, 26, 30, 49.)    

아버지의 양육과 지도에 대해 칼빈은 언제나 순종적이었다. 갓프리(Godfrey, 2009, 35)는 칼빈의 소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묘사하면서 아버지에 대해 ‘순종적인 아들’이라는 제목을 부쳤다. 그는 평생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아들이었다. 칼빈은 이렇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내가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정해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법률을 공부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경우가 많음을 아버지가 알게 된 뒤로는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내 진로의 방향도 그쪽으로 바꾸어버렸다. (중략)  나는 성실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랐고 열심히 공부했다.”라고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순종의 태도를 고백했다.(Calvin, 1979, Preface, ⅺ)  

아버지에 대한 그의 절대적 순종은 아버지가 임종한 이후에야 벗어날 수 있는 의무였다. 그는 “아버지는 나에게 법학공부를 시키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다.”고 편지에서 말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다른 길로 들어서게 하셨다.”고 말했다.(Selderhuis, 2009, 26, 30)

칼빈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가졌으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친밀성은 거의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아버지에 대한 따듯한 감정을 결코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 대신 아버지의 임박한 임종을 친구에게 알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 대신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상태를 친구들과의 일에 아버지의 일이 반갑지 않은 방해가 되고 갈고리에 걸린 상태로 그래서 지체하게 만드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 일이 끝나자마자 곧 친구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하는 편지로 그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Bouwsim, 1988, 11-12)

어머니 잔느에 대해 비록 짧은 어린 시절을 양육 받았을 뿐이며 단편적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칼빈은 자신을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이끌어 준 헌신적인 경건한 어머니로 기억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면서 누아용에서 가까운 울스캠프에서 성 안나(Saint Anne)의 유골에 입을 맞춘 기억을 회고하였다. 유골에 입 맞춘다는 것은 죽은 성자를 향해 서원하는 행위였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경건하고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가 재혼했고 그는 집을 떠나 몽모르 가문에 위탁되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 어머니는 없었다.  

칼빈의 형제자매들 간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단지 그의 동생 앙투안은 나중에 약 28년 간 제네바애서 칼빈과 함께 살았다. 앙투안의 아내 앤은 칼빈의 일을 도와 학생들을 돌보았으나 앤의 거친 성격과 도덕적 문제로 칼빈은 상당한 고통을 겪었고 결국 앤의도덕적 문제로 동생부부는 이혼하였으며 앤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칼빈의 배다른 여동생 중 마리도 나중에 제네바에서 함께 생활했다. 칼빈은 마지막 남은 작은 돈을 자신의 의붓아들과 함께 앙투안과 마리의 자녀들 곧 조카들을 위해 유산으로 분배하였다.(Parker, 2009. 335.)

2. 칼빈의 결혼과 가정

칼빈은 오랜 동안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교회사역에 몰두하였고 사역에서 여성 동료와의 관계도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부써와 멜랑히톤의 결혼생활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기독교 가정과 좋은 아내를 결혼에 대한 긍정적 이해를 갖게 되었고 부써의 충고에 따라 자신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아내의 필요에 공감한 후 신부 감을 추천받아 찾으려고 물색했다.

그러다 결국 칼빈은 1540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의 성도였다가 과부가 된 이델레뜨 드 부레(Idelette de Bure, 1509-1549)와 결혼했다. 칼빈이 결혼하기 전 칼빈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였던 이델레뜨 스토르더 부부가 개종하여 네덜란드에서 스트라스부르그로 오는 일에 칼빈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갑자기 역병으로 죽자 칼빈은 목회자로서 그의 남은 가족들을 돌보고 위로하였다. 과부가 된 이델레뜨는 12세와 6세의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칼빈은 이델레뜨에게서 병든 자기 남편을 위한 참 사랑의 돌봄의 전형 보았고 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아이들에 대한 헌신의 진형을 보았다.(Sanseh, 1996,130) 그러던 차에 누군가 칼빈에게 미망인이 된 이델레뜨와의 결혼을 권했고 칼번은 이를 받아들여 그녀와 결혼했다. 칼빈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회와 건강을 위해 이델레뜨와 같은 헌신적인 여인과의 결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칼빈과 이델레뜨의 결혼생활은 9년간 지속되었다. 이델레뜨의 두 자녀 외에 이델레뜨는 칼빈과의 결혼에서 세 자녀를 임신했었지만 첫째는 사산(死産)하였고 둘째인 딸은 출산과정에 죽었다. 셋째 아들은 출산 후 22일 만에 죽었다. 특히 영아기에 죽은 아들은 칼빈에게 깊은 슬픔을 남겼다. 그는 이후 자신의 혈육의 자녀를 다시는 갖지 못했다. 이델레뜨는 칼빈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칼빈과 마찬가지로 건강하지 못했다. 결혼 9년째인 1549년 결국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칼빈의 고백처럼 이델레뜨는 생애에 최상의 동반자였다. 칼빈은 이델레뜨가 확실한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과 지성과 가정적인 도움의 특성을 가진 아내였다고 말했다. 사역에 신실한 돕는 자였고 조금도 방해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Sanseri, 1996. 130) 짧은 결혼생활 과 그것도 사역 때문에 종종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혼생활은 킬빈에게 결혼과 가정의 의미를 체득하게 하였다.

칼빈은 이델레뜨의 임종 시 이델레뜨가 전남편에게서 얻은 두 자녀를 염려할 것을 예감하고 두 자녀를 마치 자신의 혈육의 자녀처럼 잘 돌보아 자녀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소홀하지 앉겠다고 약속했다.(Bouwsma, 1988, 23)

이델레뜨가 세상을 떠난 후 칼빈은 깊은 슬플 중에 지냈다. 그는 아내를 사별(死別)한 다른 동료를 위로하는 편지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굉장히 큰 상처이며 고통이다. 나도 아내를 잃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아내를 잃은 지 7년이 지났지만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여전히 힘들다.”고 말했다.(Selderhuis, 2009, 241) 칼빈은 생애의 마지막까지 곧 아내를 사별한 후 15년 동안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칼빈은 이델레뜨가 두고 떠난 두 자녀를 돌보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부(義父) 자녀들의 칼빈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은 부정적이디. 칼빈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아들에게 제네바로 오라고 했지만 아들은 칼빈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붓딸은 칼빈의 생애 막바지에 가족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도 했다. 칼빈은 그 일로 받은 큰 충격으로 여러 날을 혼자 있었다고 한다. 칼빈은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붓 자녀들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Selderhuis, 2009. 242) 

Ⅲ. 가정에 대한 칼빈의 이해

칼빈이 경험했던 가정의 현실은 사랑과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고 자녀들의 세대를 거쳐 번성하는 소위 축복된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다. 그는 생애의 초기 6넌 동안 그리고 결혼 후 9년 동안만 온전한 가족을 경험했을 뿐이다. 곧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재혼으로 고아처럼 집을 떠났고 또 결혼 이후에도 자녀들의 죽음으로 혈육을 갖지 못했고 의붓 자녀들 교육에도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칼빈의 대적자(對敵者)들에게도 비난거리였다.(Godfrey, 2009. 68)

그러나 이런 현실은 질병에 시달리던 당시대의 척박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초래된 현상이었고 그 척박한 현실과 칼빈의 신체와 사역의 조건이 칼빈의 가정에 우호적인 환경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열악한 조건은 칼빈에게 역설적으로 더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에 관심을 갖게 했고 또 칼빈은 그런 조건에서 보완적인 혹은 대안적인 가족개념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가정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정리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칼빈은 결혼과 가족에 대한 당대의 일반적 이해를 변혁했다. 그는 교회법, 결혼법령, 결혼예배 등의 규정을 정하여 제네바에서의 결혼과 가정생활을 개혁하려 했다. 그는 자유의 적합성과 능력을 가진 성인들 사이의 결혼을 격려하였고, 연애와 약혼과 순결의 지침을 정했고, 결혼에 있어 부모의 동의와 친구들의 증인 역할과 교회의 봉헌과 국가의 기록을 강조했다. 그리고 결혼식을 거행하면서 성경의 교훈과 성도들의 참여를 동반하는 교회의 결혼예식을 확립했다.(Witte, 2009 455)

칼빈에게 있어서 결혼과 가정생활의 개혁은 언약교리에 근거해서 발전된 것이었다. 그는 구약성경의 언약(言約)이라는 표현이 결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관계에 유비(類比)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배신을 결혼관계에 비유하여 질책하는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해석하면서 결혼에 대한 교훈을 끌어오기도 했다.

특히 잠언 2:17과 밀라기 2:14-16은 결혼을 언약 자체로 간주한다고 보고 언약의 교리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묘사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언약관계 안으로 이끄시는 것처럼 남편과 아내도 서로를 언약관계로 끌어들인다고 보았고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그 관계 안에서 신뢰와 실행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남편과 아내에게도 그 언약관계 안에서 혼인(婚姻)의 신실성과 희생적 행동을 기대하신다고 했다.(Witte, 2009, 455)   

칼빈은 에베소서를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결혼을 주재하시면서 상호 서약을 요구하시는데 그 서약은 인간의 계약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이 결혼계약에서 권위로 그 서약을 승인하시므로 결혼은 인간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결혼의 기초자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행된다. 따라서 결혼은 거룩한 언약이며 신적인 것으로 칭해진다고 했다.(Witte, 2009. 457)

결혼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의 상정인 언약이므로 결혼관계는 도덕적으로 순결해야 하며 영혼과 정신과 몸이 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일부일처의 관계여아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언약관계의 유대를 망쳐버리는 간음은 배우자와 하나님과 공동체의 언약유대도 망쳐버린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칼빈이 결혼은 남편과 아내의 사랑과 지원, 자년의 생산과 양육, 죄의 유혹으로부터의 보호에 기여한다고 했다.(Witte, 2009. 460-461)

그러므로 언약관계인 결혼에서 얻는 자녀는 하나님의 언약의 선물이다. 아들을 역병으로 잃은 가까운 친구를 위로하는 편지에서 표현한 것처럼 자녀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짐시 동안 맡겨주신 존재’이고 그러므로 사별(死別)로 자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도 ‘아들이 이미 간 그곳에’ 가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동일한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가진 존재였다.(Sanseh, 1996, 132-133)  비록 칼빈은 자신의 혈육의 자녀를 모두 잃었으므로 직접 양육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녀는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어린 아이들을 매우 좋아했다.

칼빈은 언약관계인 결혼 안에서 얻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도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다고 전제했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사망하는 아이에게 긴급하게 세례를 주어야 구원과 천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세례가 원죄를 씻어주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셀더르하우스(2009. 324)의 표현처럼 칼빈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아이는 구원받는 것이다. 언약에 기초하기 때문에 언약의 자녀는 어린 나이에 죽어도 영생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세례는 구원과 성화(聖化)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약속이며  위로이고 증거이며 보증이므로 믿음으로 받을 때에 복이 된다고 했다. 그는 유아세례에 마땅히 따라야할 실제 효과는 주님이 유아들과 맺은 언약을 승인하고 확인한 뒤에 나타난다고 말했고 유아세례는 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하나님 언약백성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의식이라고 보았다.(Godfrey, 2009. 144) 이처럼 자녀는 언약 안에 있으므로 유아세례는 정당화된다.

그래서 그는 부써와 함께 재세례파의 유아세례 거부가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했고 세례 형식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유아들이 믿음이 없다고 확신할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유아에게 신앙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유아들 중 몇몇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도 그 축복을 누리는 존재들이므로  성인들과 동일한 신앙의 맥락에 있고 세례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Parker, 2009. 115) 그는 유아세례는 공중예배 시간에 여러 증인들 앞에서 행해져야 하고 부모는 그들의 부모 곧 유아의 조부모와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Sdderhuis, 2009. 132)

이처럼 자녀는 언약의 가정이라는 유대 안에 세대를 거쳐 함께 참여해 있는 존재였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 사랑과 은혜 안에 살고 있으므로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을 권리가 있고 또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칼빈으로 하여금 이들을 위한 교리문답서를 작성하게 만든 이유였다.(Selderhu고,2009. 257)

아버지는 가정의 중심이었다. 셀더르하우스(2009, 254)의 평가처럼 아버지의 역할이 어머니의 역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칼빈의 독특한 관점중 하나이다. 칼빈의 전기 작가들 중 많은 사람들은 칼빈의 생애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아버지’라고 본다. 셀더르하우스(2009. 18, 23, 77, 124)는 칼빈의 전기를 ‘아버지’라는 제목으로부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의 진로를 신학으로 또 법학으로 결정한 존재였다. 아버지 제라르 외에도 마르쉐 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친 코르디에는 칼빈에게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를 제네바에 주저앉게 한 파렐은 또 다른 ‘아버지’였다. 늘 가까이에서 도움을 주었던 부써는 ‘새 아버지’였다. 칼빈은 루터를 ‘내가 극히 존경하는 아버, 항상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라고 칭하기도 했다.(Parker, 2009, 303)  칼빈은 그 확장된 아버지 개념에서 “당신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맡아서 돌보며 말씀을 전하는 직분 자들을 아버지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Sdderhuis, 2009, 159) 

이처럼 칼빈은 혈육의 아버지의 한계를 대안적인 아버지 혹은 확장된 아버지들을 통해 충족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내면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신학에 있어서 진짜 아버지 그리고 그의 이상적인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뜻과 달리 복음 전파자가 된 것을 ‘하나님 아버지’가 육신의 아버지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했고 하나님이 그를 다른 길로 들어서게 하셨다고 했다.(Selderhuis, 2009, 30)

칼빈은 또 어린 아들을 잃은 동료를 위로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신의 자녀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알고 계십니다.”라고 했다.(Selderhuis, 2009, 350) 또 칼빈은 비록 그 자신이 혈육의 자녀를 양육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그리고 그것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스스로 자신은 교회를 통해 수많은 자녀들을 가진 아버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린 아들을 주셨다가 데려가셨으나 나는 전체 기독교 세계에서 수많은 자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했다.(Sanseri, 1996, 134)

정말 그는 판델 발트(Vander Walt, 1984, 169-171)의 표현처럼 교회의 동료들에게 교인들에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짜 아버지와 같았다. 판델 발트는 그의 논문에서 칼빈이 아버지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물질적 그리고 건강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청년들의 행동에 따뜻한 충고를 했고,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을 돌보았고, 그의 동료들의 자녀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했던 증거들을 많이 나열했다.

칼빈은 아버지처럼 깊은 동정심과 공감을 가지고 훈계하는 편지를 썼고, 아버지처럼 빈궁한 사람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아버지처럼 틀어진 관계를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그는 그 자신에게 대안적이고 확장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었던 사람들처럼 후배들에게도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Vander Walt, 1984) 칼빈이 죽은 후 열린 첫 번째 목사회의 모임은 ‘칼빈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밝혔다.(Selderhuis, 2009, 359)

이런 의미에서 칼빈의 아버지 개념은 권위적이고 현세적인 성공지향의 육신의 아버지와 달랐다. 그래서 존경하지만 심리적 거리가 먼 존재가 아니라 마치 하나님 아버지처럼 때로는 엄격하시지만 동시에 따뜻하게 공감하고 동정심을 가지고 가까이에서 지도하고 돌보시는 아버지였다. 칼빈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하여 먼 개념이었다. 초기의 몇 년 간만 경험했던 단편적 기억의 헌신적이고 경건했던 어머니 외에 그의 생애에 있어 좋은 어머니란 존재는 없었다. 그러나 이델레뜨가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아내로서의 조건에 적합하다고 여겨 두 자녀를 가진 미망인인 과부와 결혼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던 것을 보면 칼빈은 그녀에게서 좋은 어머니상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산세리(1996. 131)는 이델레뜨가 잠언 31장애 나오는 현숙한 여인의 전형적인 특성들을 가졌다고 비교하면서 이델레뜨가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돌보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칼빈은 이델레뜨가 임종 시에 평소 자기 자신보다 자녀들을 더 염려하던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편안한 임종이 되도록 먼지 자신이 그녀의 자녀들을 잘 돌볼 것을 약속한 것은 이델레뜨의 어머니 됨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반영한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칼빈에게 이델레뜨는 “나는 이미 그들을 주님께 맡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이델레뜨가 친구에게 자녀문제를 말하면서 “중요한 것은 그들(자녀들)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이 경건하다면 나는 그(칼빈)가 기꺼이 그들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만일 그리하지 않다면 그들은 내가 그들 대신에 어떤 것을 부탁해야만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Sanseri, 1996, 134) 이델례뜨는 놀랍게도 칼빈의 기대를 넘는 신앙적 어머니였던 여인이었다.

칼빈은 아버지 개념을 하나님께 연결시킨 것처럼 어머니 개념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로 고백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할 수 없다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선언을 확신하고 언제나 교회를 어머니로 불렀다. 교회는 기독교강요 교회론의 첫 제목처럼 ‘모든 경건한 자들의 어머니’, ‘거룩한 보편교회 우리의 어머니’였다.(Calvin, 1960, 1011)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처럼 그리스도인을 거듭 출생하도록 낳는 곳이고 그리스도인을 성장하도록 양육하고 교육하는 곳으로 간주하였다.(Se1derhuis, 2009, 21, 129,164) 이에 비추어 볼 때 칼빈의 어미니 개념은 자녀의 출산, 자녀에 대한 헌신적 사랑, 사랑의 양육과 신앙교육에 있다.  

칼빈에 따르면 자녀는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부모를 존경하며 순종해야한다. 칼빈 자신이 아버지를 경외하면서 순종하는 이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법학공부를 요구했을 때 그 요구가 자신에게 맞지 않았고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며(Selderhuis, 2009. 34), 또 신앙적 동기에 따른 것이 아니었지만 순종의 의무를 즉각적으로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칼빈은 혈육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주관하도록 지명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순종하려 했다. 그는 라틴어를 가르쳐준 코르디에 교수를 깊이 존경했다. 자신의 희망과 다른 길 곧 억지로 제네바에 머물도록 위협하였던 파렐의 말에도 순종했다. 그는 부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랐으며 그에게 지도 받는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 셀더르하우스(2009. 30, 63, 79, 145)는 칼빈의 전기 에서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그가 늘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것은 칼빈의 인생 습관대로다.”라고 표현했고 칼빈은 윗사람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처럼 여겼다고 해설했다.

칼빈의 주님을 경외하는 삶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과 비슷하다고 했고, 젊은이들에게 겸손하고 절제된 삶을 살고 부모를 공경하고 돌봐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가르침도 넓게 적용해서 모든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Selderhuis. 2009. 33, 176, 243)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 자녀란 가정에서 부모를 존경하면서 부모의 지도를 기꺼이 수용하여 순종해야할 존재이며, 부모를 공경하고 돌보아야할 의무를 가진 자들이었다.    

전체적으로 칼빈에게 있어 가정은 작은 교회였다. 비록 가정이 종종 온전하지 못하지만 가정은 더 온전한 기능을 수행하는 교회를 통해 그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지도와 교회인 어머니의 양육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그라스도인의 삶이라면 교회는 가정의 온전한 모습이고 가정은 그것을 반영하는 작은 교회였다.

IV. 가정교육에 대한 칼빈의 이해

(1) 칼빈의 가정교육 목적

칼빈에 따르면 가정교육의 이유는 부모와 자녀의 언약관계에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부모들처럼 약속된 생명의 상속자(相續者)들임에 의심할여지가 없다고 단정했다. 그 근거에서 자녀들은 신앙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부모와 교회는 신앙교육을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자녀가 아직 어머니 태에 있을 때 숨을 쉬기 전 이미 영원한 생명의 언약에 포함되었다고 했고, 자녀들이 이미 부모들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그들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영원한 언약에 참여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신지들의 자녀들 즉 첫 후손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수천 세대까지 확장되며 그 조건은 단지 부모들의 상태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의존해 있다고 했다.

유아세례와 신앙교육은 칼빈의 표현처럼 ‘언약 개념에 따라서’, ‘상속된 권리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당위성을 갖는다.(황성철, 2002, 93-94)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의 이런 지위가 인정된다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 또 그 배경인 언약에 대해 하나님 섬김의 종교에 대해 직접 가르쳐 그 의미를 밝혀 주어야 하고 또 교회와 학교를 통한 심화된 배움의 기회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한편 칼빈에 의하면 “언약 배경에서 이루어져야할 자녀들에 대한 가정교육은 하나님의 공공연한 기대였다. 유월절 절기 중 어린양 도살규정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집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 아래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유일한 축복이 각 가정에서 빛나야 한다는 것을 알기 쉬운 방법으로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 원하셨다.”고 해설하면서 칼빈은 언약 안에 있는 가정의 특별한 의의를 드러내었다.(Calvin, 1982. 453)

그리고 칼빈은 신명기서 주석에서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그가 열조들에게 가르치도록 명한 바로 그 신앙이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해질 수 일도록 해야 한다.”고 해설하였고(Calvin, 1982, 351), 칼빈은 또 출애굽기 본문을 주석하면서 “즉 자녀에게 가르쳐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할 수 있게 하라는 부모들에게 내려진 권고를 반복하고 있다. (중략) 왜냐하면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자진하여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Calvin, 1982,463)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칼빈이 가정교육에서 생각했던 교육의 목적은 전적으로 신앙에 초점이 수렴(收斂)된다. 그는 자녀들을 언약 백성의 정체성에 해당되는 경건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교육목적으로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Calvin, 1960, 1359) 

칼빈은 가정교육의 신앙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시에 부모가 가지는 다른 관심 때문에 신앙교육에 대한 관심이 약화될까 우려하여 당시 부모들의 교육에 반영된 세속적 가치를 의도적으로 지적하여 비판했다. 그는 부모가 자녀의 세속적 성공만 강조하는 것은 성공이 가져다주는 사치와 부에서 이득을 얻는 데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며 이런 현상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비록 칼빈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일반교육에 대한 투지를 격려하였고 그 배경에는 자신이 받았던 부모의 지원과 교육의 기회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자녀들의 라틴어 실력 향상을 자랑하면서도 주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교육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정말 비난을 받을 일로 보았다.(Selderhuis, 2009, 256; 정준모,  2003, 187-188)

(2) 칼빈의 가정교육 내용  

칼빈의 교육관에서 볼 때 특별히 가정에서 부모가 시행해야할 자녀교육의 당위성에 비해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가르쳐야할 내용은 교회와 학교가 가르치는 내용들에 비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특성은 가정이 자녀의 입장에서 볼 때 최초의 생활 집단이며 부모가 첫 번째 교사라는 사실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가정교육의 내용은 대체로 교회교육과 학교교육 내용의 기초이며 준비이고 교회와 학교 교육에 연속적일 수밖에 없었다.

칼빈이 기대했던 가정교육의 명시된 내용은 그가 작성한 세례식에 나타난 부모의 서약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모든 교리와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삼가 가르칠 것을 약속합니다. 이처럼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가지로 요약 되는 하님의 율법을 따라 살아갈 것을 자녀에게 훈계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훈계를 따라 살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교화시키는 일에 자기 자신을 헌신하며 감화하도록 하겠습니다.”(Calvin, 1984. 117)

부모가 자녀의 교육과 관련하여 서약했던 위의 내용에 반영된 것은 성경교육, 교리교육, 경건한 성품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칼빈은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교리교육을 위해 여러 종류의 교리교육서를 만들었다. 교리교육서는 교회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교육 내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모의 자녀교육을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부모에게 교리교육을 서약하게 했고 또 제네바교회의 교리문답서 서문에서 “교회는 언제나 어린아이들을 기독교신앙의 교리 안에서 양육하라는 특별한 권면을 받아왔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옛적에 학교들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성도 개개인에게 각자의 가족을 잘 가르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Calvin, 1995, 100)

한인수는 그 배경을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을 추종하는 부모들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몹시 태만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이 칼빈으로 하여금 간략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기독교신앙 내용을 표현해 놓은 교리 교육서의 저술로 이끌어 주었다.”고 표현했다.(Calvin, 1995. 서문12) 칼빈이 기초적인 내용과 쉬운 형식으로 여러 가지 교리문답서를 작성한 것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이해를 배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전문적이지 않다고 해도 부모들이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했다.    

반델 발트(Vander Walt, 1984, 315)는 부모의 자녀교육이 소홀해서 교회가 교리문답서를 편찬해야 했고, 교회는 부모가 이 자료를 가지고 자녀를 가르치도록 독려하였으며 또한 부모의 교육적 나태함을 보상하기 위해 비상조처로 교회가 교회학교를 세웠다고 말했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은 교리문답 교육이 가정에서 부모가 일차적으로 자녀에게 실행해야할 교육내용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성경내용은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할 주요 교육 내용이었다. 성경 안에 포함된 모든 것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훈계들이 그 내용이다. 칼빈이 부모의 자녀교육에서 성경을 가르칠 것을 요구하였으나 성경 내용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부모들이 가정에서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것과 그리고 부모들이 교회에서 들은 설교 내용을 자녀들에게 전달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식이 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칼빈은 자녀와 성인들을 위한 교육 내용에서 내용자체의 구별보다 내용의 단순함과 심화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

셋째,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의 경견하고 도덕적인 성품형성을 인한 교육해야 한다. 칼빈은 또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기초로 자녀교육을 논하면서 자녀의 부모에 대한 존경과 순종의 성품을 강조했다. 칼빈은 자녀들도 성인들처럼 그들의 자연적 본성이 부패하여 하나님과 권위에 대하여 반역적 기질을 가지고 있고 또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복종을 거부하는 경향을 기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모의 응석은 종종 자녀들의 성품을 망쳐버리는 경우가 많고 제한과 분별이 없다면 자녀들이 자기 통제와 공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Calvin, 1998, 618-619)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버리고 세속의 유혹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부모와 윗사람들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며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여 성화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은 부모의 주요한 교육 내용이었다. 그래서 부모는 부지런한 도덕적 훈계의 교육을 통해 자녀가 신앙의 경건한 성품과 권위에 대한 겸손한 성품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Calvin, 1998, 620-621)

(3) 칼빈의 가정교육 방법  

칼빈은 부모의 교육방법을 논하면서 효과적인 교육은 우선 부모의 권위(權威)에 대한 수용의 기초 위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에베소서 6:1-4을 주석하고 또 설교하면서 구체적인 교육 방법보다 부모의 권위의 정당성에 대해 더 많이 설명했다. 칼빈에 따르면 부모에 대한 존경과 순종은 이방인의 경우에도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자연법이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요구이기도 하므로 자녀에게 거의 절대적인 요구이다.(Calvin, 1998, 620, 1974, 212) 

칼빈은 하나님이 부모에게 권위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서 부모에게 자녀교육의 명백한 권한이 주어져 있음을 강조했다. 또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하나님이 부모에게 ‘하나님의 권위의 참여자’가 되게 하신다고 했다.(Calvln, 1998, 624) 가르치는 자의 권위가 수용(受容)되는 조건하에서 교육의 효과는 커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칼빈이 자녀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하고 엄격한 교육 방법만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사도 바울의 권면을 해설하면서 일향 그런 교육방법은 자녀에게 미움을 갖게 하고 멍에를 벗어버리도록 만든다고 했다. 엄하고 차가운 교육방법은 고집을 만들고 의무를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 대신 자녀들에 대한 친절하고 관대한 대우는 부모에 대한 존경심과 자발적인 순종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래서 온윤함과 다정다감함을 권했다.    

동시에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던 칼빈은 부모들이 자녀에 대해 시종 그런 교육 방법만을 적용한다면 자녀들을 방종에 빠지게 할 수도 있으므로 때로는 고삐를 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언제나 좋기만 하고 벌을 줄줄 모르는 교육 방법은 자녀를 망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훈계하고 적극적으로 때로는 강제적으로 교정하는 교육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Calvin, 1974, 213)

셀더르하우스(2009, 256)가 칼빈이 주장한 교육방법에 대해 “처벌과 훈계 없이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면 부모는 주저하지 말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효과가 없어도 자녀를 포기해서는 안 되고 인내심을 갖고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칼빈은 부모들에게 너무 엄하지도 않고 너무 방임(放任)하지도 않는 중도의 길을 모색하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 및 주석을 염두에 둔다면 셀티르하우스의 표현처럼 ‘엄격함과 방임의 중도’라기 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친절과 온유와 그리고 훈계와 교정(矯正)이 모두 필수적이고 동시적이어야 한다고 정의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부모는 하나님 아버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선함과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시고 비록 훈계하시고 교정하시지만 자녀들을 짐승처럼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간수하시는 분이라고 보았다.(Calvin, 1998, 625)

칼빈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했다. 칼빈은 자녀를 갖게 된 드 팔레 가족에게 편지하면서 그들과 잠시 동안 머물며 그 어린아이가 웃음을 배울 수 있도록 함께 웃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웃음은 삶이 시작되면서 만들어 내는 최초의 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Se1derhuis, 2009, 296) 이렇게 볼 때 칼빈이 제안한 교육방법을 엄격한 방법 혹은 엄격과 방임의 ‘중도’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칼빈이 강조한 가정교육의 구체적 방법은 반복과 점검을 통한 성품 혹은 경향성 형성 방법이다. 칼빈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성품의 형성 방법으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면의 사악함과 싸워가는 과정에서 마땅히 실행해야할 것들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의(義)를 깨닫고 자신을 점검하고 뒤로 후퇴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Calvin, 1998, 619)  교육은 이해 단계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점검하고 훈련하여 적극적인 경향성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물론 이 목적을 위해 부모의 모범도 주요한 교육적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정준모, 2003, 202) 

비슷한 맥락에서 킬빈은 자녀들이 배운 것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고 잘 잊어버리며 죄가 인간을 항상 옳은 길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또 자녀들은 본성적으로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자녀에게 반복하여 가르치는 것을 최상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반복하지만 신선한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Selderhuis, 2009. 164) 이것이 바로 반복적인 교리교육의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가정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와 학교 와 같은 맥락의 과제를 수행하고 또 가정의 한계를 보완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교육에 있어 전략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상적인 아버지이시며 교회가 어머니라고 주장했던 칼빈에게서 이미 교회가 가정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는 기관임을 보였다. 그래서 칼빈은 자녀들을 위해 교회의 교리문답서를 만들었다.

자녀들이 자라서 분별의 연령 곧 지적 학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교회는 자녀들의 믿음을 점검하고 교리 교육으로 신앙의 내용을 잘 알고 고백할 수 있게 가르치도록 제도화했다. 또 심방을 통해 가정을 방문하여 생활을 점검하고 부모의 자녀교육 및 교육적 여건을 충고하며 지도하도록 했다. 칼빈은 가정교육을 소홀하게 하는 부모는 공중의 비난을 받아야 하고 치리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했다.(정준모. 2003, 188) 

칼빈은 공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부모들이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후대의 개혁자들로 하여금 공교육의 학교교육을 발전시키도록 자극했다.(Ehrenpras, 2009, 428) 학교에서도 성경과 교리문답 교육이 진행되었고 특히 교리문답서는 기본적인 언어학습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칼빈은 교회, 학교, 가정 세 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교육을 통해 비록 인간은 완전히 부패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변화될 수 있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축복과 갱신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했고 이런 교육을 통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Selderhuis, 2009, 294) 그리고 19세기 개혁교회의 칼빈주의 자들도 가정, 교회, 학교의 일관성 있는 교육을 강조했고 교육운동을 통해 사회개혁을 이루려고 했다.

결론

칼빈은 신학자이면서 또한 교회 목회자였다. 성장 배경에서 일찍부터 고아와 같은 삶을 살았고 늦게 결혼했지만 9년간의 결혼생활 중 자녀들의 죽음과 아내의 죽음으로 혈연(血緣) 가정 및 가정교육의 긍정적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칼빈의 가정과 가정교육에 대한 이해에는 한계도 있고 또 이 주제는 칼빈연구에 있어 다른 주제들에 비할 때 숨겨진 분야였다.    

칼빈은 교회의 경우와 비교할 때 가정과 가정교육이라는 주제의 범주에 들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상세하게 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가정과 가정교육의 기초를 밝히 드러냈고 그것은 개혁교회 신앙공동체 가정교육의 전통이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가정은 교회와 연속선상에 있었다. 가정과 교회는 언약(言約)과 믿음이라는 공통적 기초 위에 있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보완될 수 있었고 특히 하나님이 이상적인 아버지로 간주되었다. 교회는 또 그리스도인을 출산(出産)하여 양육하는 어머니로 간주되었으며 자녀들은 가정의 자녀들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자녀들이었다. 그래서 가정은 작은 교회와 같으며 교회는 이상적 가정과 같았다.

칼빈에게 가정은 언약의 관계 집단이고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일원이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구원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배울 권리가 있고 부모는 그런 것들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했고 또 가르칠 기회를 제공할 책무(責務)가 있었다.

기독교가정 교육의 목적은 신앙적인 것이어서 자녀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거룩하고 경건하계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 있다. 가정교육의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교리와 성경과 경건하고 도덕적인 성품 형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가정교육의 방법은 부모의 권위가 인정되는 배경에서 부모가 친절과 온유함과 그리고 훈계와 교육을 통해 자녀의 성품과 행동이 경건하고 도덕적인 경향을 갖도록 하는 데 있었다. 칼빈은 교육 내용의 이해를 넘어 내면과 행동의 점검, 반복 교육, 교회와 학교와의 관계에서 보완하는 방법을 시도함으로써 교육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이러한 결론들을 간단히 평가해 본다면 칼빈의 가정 이해와 가정교육은 가족관계의 불충족성과 교육기능의 온전한 발휘가 어려운 현실적 한계성을 교회를 통해 보완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달리 말하면 교회가 가정을 바로 세우는 일과 가정교육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도록 지원해야할 과제를 각성시킨다는 점에서 산업화 된 도시사회 속에서 생활방식과 맞물려 가장 희생적인 교회 몰입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교회에 의미 있는 통찰을 준다.

또한 기독교 가정을 위해서도 부모의 권위와 그 권위의 의미에 대한 각성, 가정교육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녀용 교리 교육서와 성경교육 교재 개발의 필요성, 기독교적 성품 형성을 위한 방법 개발의 필요성과 과제를 각성하는 유익한 통찰을 준다.

그러나 칼빈의 단편적 가정생활 경험, 사역의 부담, 시대적인 교육사적 발전의 한계 등으로 칼빈은 교회와 구별되는 가정의 고유한  과제와 가정의 포괄적인 교육적 기능 그리고 어머니의 교육적 역할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풍부한 통찰들은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 글쓴 이 / 조성국 교수(고신대학교 부총장, 기독교교육, 고신대학교 신학대학 기독교교육 문학사,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신학(목회학)석사, 고신대학교 대학원 기독교교육학 문학석사, 남아공 Potchefstroom 대학교 대학원 교육철학 철학박사, 네덜란드 vrije universiteit amsterdam 객원교수, 제9대 한국복음주의 기독교교육학회 회장 역임, 2014.4-20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