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칼빈의 생애를 통해 본 칼빈의 결혼과 가정에 대한 소고

들어가는 말    

칼빈(John Calvin, 1509-1564)만큼 찬사와 악평이 교차하는 인물도 드물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그를 ‘완벽한 헌신자’라고 했다. 월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 1805-1861)은 ‘사도 바울 이후 최고의 제자’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평가와는 달리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칼빈을 독재자라고 하며 ‘개신교 교황’이라고 비꼬았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 다니엘 롭스(H. Daniel Rops, 1901-1965)는 ‘원칙을 강조한 공포의 냉혈 인간’이었다고 조소했다.1) 

그러면 칼빈은 정말 따스함이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역 중독자였을까? 고집으로 일관한 냉혈한(冷血漢)이었을까? 인간 칼빈을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그의 사랑과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주제만큼 적절한 연구는 없을 것이다.

본고는 그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논의를 통해 한 남성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家長)으로서의 칼빈의 성품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자한다. 한 인간의 인생에서 결혼이나 배우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자명하나 교회의 역사 속에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들의 경우 배우자의 영향이 가려지거나 감추어지는 예가 대부분이다. 이는 정확하게 칼빈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칼빈의 삶을 회고한 전기 중 가장 고전적 교과서는 데오도르 베자(Theodre Beza, ?-1605)가 저술한 ‘칼빈의 생애’(The Life of Calvin)이다. 칼빈의 삶과 사역에 대해 수많은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는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9년이나 지속된 칼빈의 결혼 배경이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지극히 간략한 총평 몇 줄만 언급하고 있다. 분명 칼빈의 삶이나 사역에 있어 그의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은 베자가 언급한 불량 그 이상일 것이다. 이 논문은 바로 칼빈의 삶에 결혼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영향은 무엇이었는지에 관심을 둔 연구이다.

개신교가 시작되면서 일어난 가장 중대한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성직자들의 결혼이다.2) 중세에는 “결혼한 자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교황의 지침이 굳건한 규범이었다. 그러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비롯한 거의 모든 개혁자들은 결혼 행렬에 합류했고 칼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본 논문은 사상가 칼빈보다는 남편으로서의 칼빈과 그 아내 이델레뜨 드 뷔르(Idelette Stordeur de Bure Calvin, 1509-1549)의 역할에 대한 탐색을 하고자 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관심을 갖는다.

  • 칼빈의 결혼은 어떠한 과정 속에 이루어졌는가?
  • 칼빈이 이델레뜨 드 뷔르를 아내로 선택했던 배경은 무엇인가?
  • 칼빈의 생애와 사역에 그의 결혼과과 가정이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 칼빈의 결혼과 루터의 결혼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 결심과 실망

칼빈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 있는 사건인 그의 결혼은 바로 그가 제네바(Geneva)에서 추방당한 후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 체류할 때 일어났다. 1536년 7월 27세의 청년 칼빈은 개혁자 파렐(William Farel, 1489-1565)의 혼신의 설득으로 제네바를 위한 종교개혁의 과업에 동참했다. 그러나 2년이 채 안 되어 제네바 개혁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들이 많은 갈등과 반대 속에 좌초하게 되고 결국 1538년 칼빈과 파렐은 부활절 예배를 끝으로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 마르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의 동역 초청을 받아들였다. 칼빈은 이 도시에서 1514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의 재(再) 초청을 받아 돌아가기까지 프랑스 출신 난민들로 구성된 교회의 목사로 사역했다. 4-5백여 명 정도의 회중이 모이는 이 교회의 목사직을 권유받았을 때 처음 얼마 동안 칼빈은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이를 수락하였다.      

결과적으로 칼빈이 자신의 신도이던 이델레뜨와 결혼하여 인생의 동반자를 얻게 되는 것을 볼 때 스트라스부르그로 이주케 만든 제네바에서의 불미스런 사태조차 칼빈의 일상적 수사(修辭)를 빌려 표현하면 ‘하나님의 섭리’였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체류하는 동안 그를 후원하고 아끼던 인물들의 전혀 예기치 못한 일련의 죽음들이 발생했다. 파렐의 조카가 죽었고 제네바의 동료였으며 오르브(Orbe)에서 목회를 하던 맹인 목사 꾸로(Courauld)와 칼빈의 친척이자 프랑스 개혁자였던 피에르 로버트 올리베탄(Pierre Robert Olivetan)이 세상을 떠났다.4)

이렇게 우정을 나누던 많은 이들을 잃게 되는 정황 속에서 망명자의 처지에 있던 칼빈은 깊은 슬픔과 고독감을 절실히 느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으로 인한 칼빈의 상실감이 바로 결혼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사실 가정을 찾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결혼 자체가 자신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는 고독과 독신(獨身)이 자신의 학문과 사역을 위해 더 좋은 요소라고 생각했다.

로마 가톨릭 진영의 개혁세력에 대한 지속적인 비난 또한 칼빈이 결혼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였다. 교황주의자들의 대표적인 험구(險口) 중 하나는 바로 종교개혁이 “아내를 취하고자 하는 불순한 성적동기(性的動機, sexual motive)에서 발전되었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종교개혁이 전개되면서 확산된 성직자의 결혼을 결코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로마 가톨릭의 비난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적들(교황주의자들)은 마치 우리가 트로이를 공격한 그리스인들처럼 여자들을 얻기 위해 개혁의 투쟁을 하는 것으로 왜곡시키지만 나는 여자에 관심이 없으므로 이런 비난을 받을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6)

스트라스부르그의 체류기간 동안 칼빈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느 누구보다 개혁자 부써의 권유와 영향이 가장 지대하였다.7) 두 가지 권유 중 하나는 칼빈이 천 번을 죽어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제네바로부터 재(再) 초청을 받았을 때 그에 응하도록 권한 것이고, 두 번째는 결혼에 대한 권유이다. 부써는 1521년 토미니칸수도회(Dominican Order, 1216)에서 탈퇴한 후 다음 해 결혼하여 최초로 중세 성직자로서 독신을 거부한 개혁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의 성 도마교회(St. Thomas Church)에서 목회하는 동안 성격이 활달한 수녀 출신의 부써의 아내 엘리자베스(Elizabeth Bucer)는 많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등 그녀의 따뜻한 성품이 이 도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들 부부의 집은 ‘의로움의 여관’(e inn of hghteousness)이라고 불리며 사랑과 영성이 조화된 가정을 이루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오자마자 바로 이 ‘의로움의 여관’으로 이사했다. 13명의 아이를 낳으며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꾸려 가는 부써 부부를 보며 칼빈은 개혁자의 성공적인 사역이 가정생활과 얼마나 잘 조화를 이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부써는 이미 주위의 모든 독신 사역자들에게 결혼할 것을 권하였고 칼빈에게도 아내를 취해야 함을 강력히 조언하였다. 부써는 결혼이 주는 감성적 안정과 만족을 깊이 인식하였고 이것을 그의 사역에 잘 응용하였다.10) 제네바에서 같이 쫓겨나 바젤에 머물렀던 파렐도 마찬가지의 생각이었다. 칼빈과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던 필립 멜랑흐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 역시 이 시기 이미 19년에 이르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멜랑흐톤의 부인 카타리나 크랩(Kathahna Krapp)은 멜랑흐톤에 대한 헌신적인 내조와 재기 넘치는 유머로 그 도시에서 유명했다.11)

이 같이 칼빈의 행보와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인물들은 모두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가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칼빈이 결혼에 대해 더욱 실제적으로 고려하게 된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부써의 집에서 나와 칼빈은 곧 독립하게 되었다. 이 시절 칼빈은 남동생과 자매들 그리고 수 명의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이때 칼빈은 자신의 일들을 돕고 또한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봐 줄 수 있는 아내를 얻을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가정부를 고용했다. 그런데 아들까지 함께 데리고 들어온 이 가정부는 성격이 포악하여 종종 칼빈의 인내심을 시험할 정도였다.12) 이런 경험이 칼빈으로 하여금 가정 일에 충실한 여자를 좋은 아내의 조건으로 우선적으로 꼽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칼빈의 목회가 날을 더해 가면서 교회는 점점 안정되었으며 지속적인 성장을 보였다. 그만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의 일거리도 늘어났다. 때문에 칼빈은 가정적인 아내를 얻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교회와 사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늘리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칼빈은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만약 결혼한다면 그것은 사소한 근심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주님께 내 자신을 더 온전히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13)         

이런 면에서 칼빈의 결혼 동기는 다분히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목회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시기에 칼빈의 건강이 더욱 나빠지기 시작했다. 가중되는 일 속에 여러 차례 실수가 나타나게 되고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때로는 초조함과 과민함을 표출하기도 했다. 칼빈을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은 결혼이 칼빈의 이런 상태를 순화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14) 결국 주위의 권고와 현실적 필요와 목회적 동기 등에 의해 칼빈은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장래 자신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 가져야 할 덕성까지 언급했다.

1539년 5월 19일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아내가 될 사람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저는 첫눈에 반하는 예쁜 용모에만 이끌려 사랑에 빠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끌리는 유일한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은 바로 정숙하고, 수다스럽지 않고, 괴팍스럽지도 않고, 검소하고, 인내심이 있고 그리고 내 건강에 관심을 갖는 그런 여인입니다.”15)

칼빈 역시 자신이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결코 교만하지 않았으므로 아내 상에 대해서도 모든 면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빈이 필수적으로 고려하고자 했던 사항들은 결코 물질적인 요소들이 아니었고 반대로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품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파렐과 부써에게 신부(新婦) 감을  찾는 과제를 부탁했다. 파렐에게 편지하여 칼빈은 다른 사람이 손쓰기 전에 먼저 당신이 추진 해 달라는 부탁했다. 이 두 사람만이 아는 누군가 염두에 둔 듯한 편지였지만 칼빈과는 맞선조차 이뤄지지 않았다.16)

본격적인 결혼계획은 부써에 의해 주도되었다. 칼빈의 의사를 확인한 부써는 여러 곳에 연락을 하며 총각 개혁자의 배우자를 찾게 된다. 칼빈의 편지 중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시기는 스트라스부르그에 온지 5개월 쯤 되는 1539년의 2월 말이다.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칼빈은 부활절 직후까지는 신부(新婦)를 찾을 생각임을 밝혔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파렐이 와서 자신의 결혼을 집례하고 축복해 주기를 기대하며 만약 오는 것이 확실하면 그 때까지 결혼식을 늦추겠다.”고 덧붙였다.17)      

그러나 이때까지 결혼을 생각하던 그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개월 후 한 신부감이 칼빈에게 소개되었다. 독일 귀족 출신인 한 신사 부부가 칼빈의 열렬한 지지자였는데 그 남편은 자신의 여동생을 칼빈과 맺어 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독일계 그 여성은 칼빈에 대해 큰 호감을 갖지 못했다. 칼빈보다도 신분이 더 높았으며 또한 자신에 비해 그 개혁자의 삶이 더없이 궁핍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일부 부유한 여성들이 흔히 그러듯이 미남형의 용모를 선호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칼빈의 인성을 고려하기보다는 용모를 보고 실망했다.18) 

책의 인세나 목회자의 수입으로는 넉넉한 형편을 유지할 수 없었던 그 시기에 아마 이 여인과 결혼을 하면 칼빈에게는 경제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 역시 그 여인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언급하였다.19) 첫째는 그녀가 프랑스어를 모르고 또 별로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던 까닭이다. 둘째는 경제적으로 너무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인 그녀가 자신의 가문과 받은 교육을 늘 염두에 두며 적응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였다.

칼빈이 언어문제에 민감했던 이유는 그가 프랑스 난민들을 위한 목회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집을 수시로 개방해 성도들을 돌봐야 했던 형편을 고려해 볼 때 프랑스 말을 못하는 것은 단순한 불편함 이상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신부감이 파렐에 의해 추천되었다. 이번에는 칼빈이 원하는 조건에 맞는 여자였다. 프랑스어를 하고 부유하지 않았으며 개신교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특기할 점은 그녀는 칼빈보다 15살이나 연상이었다. 31살의 총각 개혁자는 결코 이 혼사를 원하지 않았다.      

세 번째 후보는 칼빈이 동생을 보내 초청하고자 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평판이 자자한 여인이었다. 칼빈은 적어도 1540년 3월 10일까지는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파렐에게 결혼식을 집례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 덧붙이기를 “만약 이번에도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난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라고 했다.21) 결국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말처럼 칼빈은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6월에 다시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총각은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아직 아내를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내를 구할 노력을 해야 하는지 종종 망설여집니다.”22) 더 이상 찾기를 포기하다시피 했을 때 칼빈의 장래 배우자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3. 교회 성도에서 칼빈의 아내로

먼 데서 신부를 찾으려 했던 칼빈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 내에서 일생의 배우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바로 그의 성도 중 한사람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교분을 나누다가 세상을 떠난 자신의 교인의 미망인(未亡人)과 결혼하였다. 칼빈의 아내가 된 이델레뜨 브 뷔르(Idelette de Bure)는 네덜란드의 리쥐 지방에서 1533년 이단으로 정죄 받고 추방된 램버트 드 뷔르(Lambert de Bure)의 딸이었을 것으로 일군의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23) 

그녀와 남편 장 스토르뒤르(Jean Stordeur)는 원래 재세래파(再洗禮派,  Anabaptist) 교도였다. 이 종파의 지도자였던 스토르뒤르와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첫 사역을 하고 있던 1537년 스토르뒤르는 제네바의 개혁자들과 토론하기 위해 이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24) 스트라스부르그로 피난 온 이 두 부부는 급진적인 면 때문에 배타시된 재세례파의 신앙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으나 곧 칼빈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매일 성경공부 지도와 한 주일에 4번의 설교를 한 칼빈은 목회적 관심 아래 이들 부부의 가정을 번번이 방문하여 신앙이 바로 서도록 신앙지도를 했다.25) 스토르뒤르와 이델레뜨는 이 젊은 개혁자의 깊이 있는 신학과 성경적 설교에 큰 감화를 받게 되었고 이내 그들은 재세례주의를 포기하고 개혁신앙을 받아들였다. 결국 이들은 유아세례를 철저히 배격하던 재세례파의 신앙을 포기하는 표시로 그들 자신들의 아들을 칼빈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했다.

그러나 1540년 봄 이 도시에 닥친 전염병으로 스토르뒤르는 쓰러지게 되었고 결국 아내와 두 자녀를 남겨 두고 며칠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델레뜨는 남편을 잃은 큰 슬픔에 빠졌고 칼빈 역시 자신이 성심을 다해 개혁신앙으로 되돌린 소중한 교우를 전염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 사태의 전후를 지켜보며 칼빈은 슬픔을 꿋꿋이 이겨 가는 이델례뜨의 용기와 정숙함 그리고 그녀의 깊은 신앙에 큰 감화를 받았다. 전술했듯이 이즈음 칼빈은 결혼 시도와 관련된 몇 번의 시행착오로 인해 거의 포기하는 마음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 같은 부써의 한 마디가 떨어졌다. “이델레뜨를 어떻게 생각하는가?”26) 정숙한 인품을 가진 여인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던 칼빈의 마음은 쉽게 애정으로 바뀌었고 총각 개혁자를 존경하던 이델레뜨 역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즉시 파렐을 초청하였고 그의 주례 하에 결혼식은 1540년 8월 초에 열렸다.27)

이델레뜨는 베자의 표현에 의하면 ‘훌륭한 덕과 정숙함’을 가진 여인이었다.27) 또한 69세의 나이에 아주 젊은 미망인과 결혼한 파렐의 평에 의하면 이델레뜨는 ‘올곧고 정직할’뿐 아니라 칼빈이 배우자 자질로서 열거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용모’까지 가진 여인이었다.29) 

사실 칼빈과 이델레뜨는 서로 친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몇 가지 환경적 요소들이 더 있었다. 우선 둘은 모두 서로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프랑스인이었으며, 고국을 떠나온 난민이었고, 과거의 옛 신앙으로부터의 단절을 경험하였으며 또한 빈곤한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칼빈이 이델레뜨와 이전부터 알고 지냈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뷔르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30)  

그래서 2명의 자녀가 그녀에게 있다는 사실도 칼빈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칼빈은 자신이 세례 준 아이들이 고아로 자라나는 것을 가슴아파했다. 그 역시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의붓어머니의 사랑 속에 자랐기 때문에 이런 과거는 아버지 없이 자랄 그 아이들에 대한 칼빈의 마음에 오히려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게 했음에 틀림없다. 이델레뜨 역시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생긴다는 큰 안도감이 결혼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요약하면 이델레뜨의 성품에 대한 주관적인 관찰과 객관적인 평과 남겨진 유족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그리고 삶의 상황적 동질성 등이 칼빈으로 하여금 이델레뜨와의 결혼을 주저하지 않도록 만든 요인이었다.

4. 부부의 사랑과 사별의 고통

그들의 결혼은 1549년 4월에 이델레뜨가 세상을 뜰 때까지 9년 간 지속되었다. 칼빈이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자세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지만 칼빈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단편들을 통해 행복과 시련이 함께 있었던 이들의 가정을 알 수 있다. 칼빈의 결혼생활은 결코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스트라스부르그 시절부터 칼빈이 겪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교회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는 이렇게 적고 있다. “스트라스부르그의 그 큰 교회와 시 정부가 칼빈과 같은 인물에게 매일 먹을 빵을 사기 어려울 정도의 사례를 지급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31)

목회 시작 첫 다섯 달 동안 칼빈은 전혀 사례를 받지 못했으며 단지 숙소만을 제공받았을 뿐이었다. 점차 호전되기는 했지만 데리고 있는 학생들의 식비를 위해 가지고 있던 책까지 팔아야 했을 정도로 궁핍한 처지에 놓인 적도 많았다. 그의 신혼생활 역시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시작되었지만 둘 사이의 사랑과 행복은 물질적인 문제가 파고들 틈새가 없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된 것은 이델레뜨의 허약한 건강이었다. 칼빈 자신도 만성 소화불량, 신장병, 궤양성 출혈, 빈번한 고열 등 지병이 많았으므로32) 이들 부부는 신혼 초부터 같이 앓아눕는 경우도 빈번했다. 사실 이들은 결혼식을 올린 1540년 8월부터 이어진 첫 45주 중 무려 32주를 떨어져 있었다.33) 

1541년 1월과 4월 찰스 대제가 소집한 제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칼빈은 3달이나 집을 비워야 했고 돌아온 후 한 달이 갓 지나자 다시 황제가 주관한 회의에 가야만 했다. 레겐스부르그회담(Colloquy of Regensburg)에 참석하던 그 해 봄 집을 떠난 칼빈은 전염병이 다시 스트라스부르그와 인근지역에 돌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내 칼빈의 마음은 아내와 아이들의 걱정으로 가득했다. “나의 집은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동생은 찰스와 함께 이웃 마을로 피신하였고 아내는 내 동생의 집으로 갔습니다. (중략) 밤낮으로 내 머릿속에는 아내 생각으로 차 있습니다.”34)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내 이델레뜨와 아이들이 무사한 것을 알고는 크게 안도하였다. 회의에서 돌아와 신혼의 단 꿈을 나누어야 할 이 두 부부에게는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제네바로부터 재(再) 초청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칼빈은 그 소명을 ‘즉각적이고 신실하게’(promte et sincere)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1541년 9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제네바로 떠나게 된 칼빈과 이델레뜨는 또 다시 헤어져 있게 되었다. 그 곳에서 칼빈은 다시 자신의 아내와 가족들을 초청하게 된다. 그러나 제네바로의 귀환이 칼빈에게 쉬운 결정이 아니었듯이 마찬가지로 그 곳으로의 이주가 이델레뜨에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오빠와 친척들이 살고 있는 스트라스부르그를 떠나 제네바로 이주하는 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희생이었다. 전 남편 스토르뒤르토 제네바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고 또한 칼빈이 제네바에서의 첫 사역과정에서 겪은 고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델레뜨는 분위기와 환경이 완전히 다른 그리고 실제로 많은 난관이 있게 될 그 곳에서의 생활을 각오하고 남편을 위한 내조를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1542년 제네바에서의 첫 여름 6월 28일에 이델레뜨는 칼빈의 아이를 낳았다. 그 이름을 아이의 삼촌의 이름을 따서 좌크(Jacques)라고 지었다. 그러나 이 미숙아는 곧 사망하였다. 이후로도 적어도 2명의 아이들이 더 태어났으나 조산하거나 산후에 바로 사망하였다.        

첫 아이가 태어나기 1년 전 전염병으로 자식을 잃은 한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그분의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겸손케 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연단케 하시기 위해 이러한 슬픔을 겪게 하신다.”고 적었다.36) 칼빈은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같은 심정을 품었다.37) 큰 슬픔을 억제하며 진술한 다음과 같은 짧은 한 마디에 그의 심정과 신앙이 담겨 있다.

“주님은 우리 아이의 죽음을 통해 참으로 고통스럽고 쓴 재난을 내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아버지이시며 또 그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38)  다행히 이 개혁자와 같이 살고 있는 동생에게는 8명의 아이들이 있었으므로 결코 그의 가정이 지속적으로 침울한 분위기 속에 있지는 않았다. 또한 자신은 “복음의 세계에서 수천의 영적인 자녀들이 있다.”고 위안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권위와 개혁사역들은 꾸준히 도전을 받았다. 한때는 방종파(放縱派, Libertines)들의 시위와 난동 한가운데서 그들을 향해 “만약 피를 흘려야 한다면 내 피부터 흘리게 하라!”고 외쳐야 할 만큼 칼빈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39) 그 아내 이델레뜨 역시 남편의 사역으로 인해 많은 고초와 중상에 시달려야 했다. 칼빈의 적대자들은 그녀가 창녀의 과거를 가졌다고 모략했다. 두 아이도 혼인하지 않은 상태서 낳았다고 주장했다.40) 심지어는 칼빈과 이델레뜨 사이에 하나님께서 아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그녀의 부도덕한 과거 때문이라고 험구를 했다. 조용한 성품의 이델레뜨는 이 모든 시련을 묵묵히 대면했다.

5. 칼빈의 충실동역자였이델레

결혼생활이 해를 더해 가면서 연약한 이델레뜨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결국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부터는 병상에 의지해야 했다. 해가 바뀌어 1549년 40세의 창창한 나이의 그녀는 병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의 관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칼빈에 대한 걱정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두 자녀에 대한 것이었다. 후에 칼빈은 이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자녀에 대한 그녀의 걱정이 상태를 악화시키지 많을까 두려워하여 그녀가 죽기 사흘 전 기회를 보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녀의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절대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녀는 즉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미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을 돌봐야 할 책임이 내게 여전히 있다고 말하자 내 아내는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신다면 당신에게 맡기실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41)

이어서 그녀의 마지막 기도가 시작되었다. “오! 영광의 부활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우리의 모든 조상들의 하나님, 수많은 시대가 지나가며 성도들이 당신을 믿었나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헛되이 되지 않았나이다.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옆에서 칼빈은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말해 주었다. 또한 그녀와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다시 만날 부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아내는 침상 옆으로 돌아 엎드려 기도를 계속하였다. 칼빈의 위로의 말과 기도를 들은 이델레뜨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42)

장례식을 치룬 후 칼빈은 바로 자신의 서재와 교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오히려 전보다 더 철저히 저술과 사역에만 매진했다. 이는 슬픔을 억누르고 잊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칼번이 이델레뜨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그 이듬해 그가 데살로니가 후서 주석을 베네딕트 택스터(Benedict Textor)에게 헌정한 데서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칼빈의 아내를 성심껏 돌본 의사였다. 칼빈은 이후 다시 재혼하지 않았으며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15년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43)

(1) 나의 동역자여!

칼빈의 결혼은 이 개혁자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델레뜨와의 결혼생활은 엄격하고 과묵한 칼빈의 성격에서 더욱 부드럽고 밝은 면을 드러내게 하였다.44) 그는 자신의 아내에 대해 특히 그녀의 용기와 좋은 성격과 따뜻하고 대화가 통하는 신앙심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칼빈과 이델레뜨는 서로에 대해 전혀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결코 어두운 사건들만의 연속이 아니었다. 그녀와의 9년 동안 이 제네바의 개혁자는 즐거움과 평화를 맛보았다.

한 예를 들면 그들의 집 안 뒤뜰에는 꽤 큰 밭이 없었는데 여기에 이델레뜨는 매년 야채와 꽃과 나무 등을 심었다.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 갈빈은 그들을 뒤뜰로 안내하여 그 아내가 가꾼 밭을 보여 주며 자랑했다.45) 풍성히 자란 야채를 보며 또 향긋한 꽃내음이 집 안에 가득할 때 칼빈은 소중한 가정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칼빈은 사역에 관련한 것이든지 개인적인 용무든지 결혼기간 동안 그가 본 많은 편지들의 말미에 이델레뜨의 인사를 같이 덧붙여 적어 보냈다. 목회적 내용을 담은 그의 많은 편지들은 대부분 자신의 끝인사와 더불어 아내가 전해 달라는 안부를 같이 적어 보냈다. 이델레뜨를 자랑스러운 동반자로 간주하는 칼빈의 태도를 그의 작은 글쓰기 습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델레뜨는 남편의 사역에 소중한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죽은 후 슬픔을 억누르며 친구 피에르 비레(Pierre Viret)에게 쓴 편지에서 칼빈은 그녀를 자신의 일생의 동역 자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만약 내 자신을 잘 참는 그런 기질이 내게 없었다면 나는 이 슬픔을 이렇게 참고 있지 못할 것이네! 참으로 내 슬픔은 보통 경험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네! 나의 가난한 삶까지도 기꺼이 나누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같이 할 수 있었던 내 인생 최고의 동반자를 떠나보냈다네! 그녀는 결혼생활 동안 내 사역의 신실한 조력자였다네!”46)

사실 배우자로서 이델레뜨의 큰 약점은 칼빈보다 건강이 더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이 칼빈의 사역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위 편지 속의 칼빈의 회고를 통해 이 사실은 분명히 확인된다. “그녀로부터 나는 조그마한 방해도 받아본 적이 없다네! 그녀는 병에 걸려 고생한 모든 날들 속에서도 나에게 결코 짐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네!”

칼빈은 부부간의 서로 사랑은 의무임을 강조한다. 이 개혁자는 결혼에 있어 사랑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을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바로 자신의 배우자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창조질서에 속한 하나님의 뜻이며 가장 거룩한 일임을 주장한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괴물과 같은 자들이다. (중략)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도록 결혼을 제정하셨으므로 어느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중략)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결합하게 된다고 모세가 창세기를 통해 말한 것은 바로 세상의 어떤 종류의 결합보다도 결혼을 가장 거룩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47) 칼빈의 결혼생활은 바로 자신이 강조한 사랑과 하나 됨의 가치를 잘 보여 준 모델이었다.              

(2) 카타리나이델레

이델레뜨의 조용한 내조는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의 적극적 내조와 많은 대비가 된다. 이 두 여인은 사실상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품을 가졌으며 이델레뜨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결혼의 과정에서도 이 차이는 잘 드러난다. 루터는 사실상 결혼에 대해 지속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으나 그의 결혼은 단순한 과정을 거쳐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도망친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52)는 함께 수녀원에서 탈출한 동료 수녀들이 차례로 결혼 하자 루터와의 결혼 의사를 내비쳤고 이에 대해 루터가 긍정적으로 화답해 성혼(成婚)이 되었다. 루터와의 실제적인 결혼 의사는 카타리나가 먼저 밝힌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결혼할 의사를 처음 밝힌 때로부터 실제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며 칼빈의 주도적인 의사가 성혼을 결정했다. 카타리나는 루터의 저술에서 번번이 주제로 등장하며 묘사되지만 이델레뜨는 칼빈의 글에 극히 드물게 등장한다. 루터 역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거침없이 털어 놓았으나 칼빈은 항상 신중한 태도로 그의 저술에서 사생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이델레뜨의 결혼은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가 없었던 9년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카타리나 루터의 결혼은 6명의 아이를 남아 4명의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한 22년간의 긴 결혼이었다. 이델레뜨는 칼빈을 두고 먼저 1549년 세상을 떠났지만 카타리나의 경우는 1546년 남편 루터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루터와 칼빈은 결흔 동기에 있어서도 대비되는 점이 드러난다. 루터에게 있어서 결혼 자체는 신학적 신념이 강하게 내재된 행위였다. 루터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교황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순교하기 전에 결혼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결혼을 한다.”고 언급했다.48) 이 시기는 교황주의자들이 개혁 사제들의 결혼을 격렬히 비난하던 종교개혁의 초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보다 15년이나 더 지난 칼빈의 상황은 성직자들의 결혼이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었으므로 칼빈에게 있어서는 신학적인 동기가 결혼 결심에 있어 주도적이지 않았다. 더 나아가 루터는 신학적 동기에서 출발한 결혼 이후 결혼의 목회적 실제적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지만 칼빈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실제적 이고 목회적인 이유로 결혼을 하였지만 이후 결혼에 대한 신학적의 의를 결혼생활을 통해 점점 더 강조하게 된다.

나가는 말

칼빈의 결혼은 부써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이 스트라스부르그 개혁자의 사역은 이 제네바 개혁자의 사역에 모델이 되었으며 그의 가정 또한 그러하였다. 목회 사역에 충실하기 위한 현실적 동기와 주위의 권고로 결혼을 결심한 칼빈은 1년이 넘는 시도 끝에 결국 재세례파 미망인 이델레뜨와 결혼했다. 이델레뜨와의 결혼은 좁게는 칼빈의 성품에 밝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넓게는 칼빈이 피난이나 죽음까지도 같이 가 줄 수 있는 동역자와의 만남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칼빈의 결혼 이야기는 비(非) 인간적이고 무감각한 개혁자로 오해된 칼빈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섣부른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아내의 죽음 앞에 슬퍼하고 아파하는 그의 모습은 보동 사람에 다름 아니다. 세상을 떠난 아내의 빈 자리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성품과 사역을 아쉬워한 칼빈의 회고는 그가 얼마나 감성적인 사람인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이 개혁자의 신앙의 위대함은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을 헌신을 위한 정서로 승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공적인 사역에서의 좌절과 시련뿐 아니라 사적인 삶에 있어서도 보동 사람들이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아픔과 고통을 겪었다. 신학에의 연구를 통해 칼빈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권위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되었다면 이델레뜨와의 결혼생활과 그녀의 죽음을 통해 칼빈은 삶의 현장에서 위로하시고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사랑에 대해 더욱 인식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칼빈의 사역에서 고통과 업적을 거론하자면 숨어서 드러나지 않게 내조한 그 아내 이델레뜨의 시련과 헌신도 있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결코 남성들 그들만의 리그(their own league)가 아니었다. 루터에게는 활달한 카타리나가, 멜랑흐톤에게는 유머스런 카타리나 크랩이, 부써에계는 다정한 엘리자베스가 그리고 칼빈에게는 정속한 이델레뜨의 헌신이 있었기에 남성 개혁자들이 후대를 위한 지대한 유산을 낳을 수 있었다. 개혁 사제들의 아내라는 타이틀 자체가 낯선 시대 상황에서 사역한 최초의 사모들 그들의 헌신이 오늘날에도 재현되듯이 개신교회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글쓴 이 / 김동주 교수(호서대 기독교학부 역사신학, 서울신학대학교 BA, 연세대학교 Th.M., 보스턴대학교 STM, 미국 보스턴대학교(Boston University, Graduate School 철학박사 Ph.D,) 저서 / 기독교로 보는 세계역사, 위대한 12인의 성탄설교 외 다수

    < 미주 >

1) John Calvin, Christian History Vol. V, No. 4. 2-3 참조.

2) Steven Ozment, ‘The Age of Reform: 1250-1550’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0), 381.

3) 한 예를 들면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 1264-1314)의 교서. 그는 ‘성직자의 생활과 명예에 관하여’(de vita et honestate clericorum)라는 교서를 통해 성직과 결혼은 병행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Clementis Papae Constitutiones, lib. iii, tit. I, De vita et honestate clericorum. Corpus luris Canonici, ed. by E. Friedberg(Graz,1955), 1199.

4) David C. Steinmentz, ‘Calvin in Contex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12.

5) 이런 식의 왜곡과 비난은 심지어 근세까지도 이어져 왔다. 한 예로써 도미니칸 수사 드니플 (Heinrich Denifle)은 “종교 개혁은 색욕에서 시작되었다.”고 그의 책 ‘Luther und Lutherdom from Original Sources’ (trans. by Raymond Volz, Somerset: TorchPress, 1917)에서 원색적으로  주장하였다.                            

6) Merle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the time of Calvin’ Vol. 6. trans. W.L.B. Gates (New York: 1879; Albany, OR: Ages Software, 1998), 404.

7) 칼빈보다 18살이나 연상인 Martin Bucer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영향을 받아 1521년 이후부터 개혁운동을 시작했으며,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후 1523년부터 스트라스부르그로  이주해 와 이 곳에서 주도적인 지도력을 확보하였다.

8) Wil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nth Century Portrai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22.

9) William J. Petersen, ‘Idelette: John Calvin’s Search for the Right Wife’, in Christian History Vo\A, No. 4 (1986), 12.

10) Bouwsma, ‘John Calvin’. 22.

11) Petersen, ‘Idelette’, 12. 이들은 1520년에 결혼한 이래 네 자녀를 두며 카타리나가 1557년 죽기까지 37년의 결혼생활을 했다. 카타리나 크랩과 여타 독일 출신 개혁자들의 아내들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다음을 보라, Roland H. Bainton, ‘Women of the Reformation in Germany and Italy’, (Minnealpolis: Augsburg PublishingHouse, 1971).

12) 칼빈의 가정부는 자신의 그러한 기질 때문에 집안의 여러 사람과도 큰 마찰을 빚었다. 특히 칼빈의 동생과 빈번한 갈등을 빚었는데 결국 칼빈의 결혼 직후 사건이 발생한다. 가정부는  칼빈의 동생에게 무례한 언사를 퍼부었고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동생은 “이가정부가 있는 한  이 집에서 절대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집을 떠났다. 칼빈이 가정부로 인해 발생한 일들로 고민하는 동안 그녀 역시 자신의 아들을 칼빈의 집에 버려두고 도망치고 말았다. ‘Letter to Farel’, No. 52, October. 1540 in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eds. by Henry Bevehdge & Jutes Bonnet (Albany, OR: Ages Software. 1998), [Vo1.]4: (p.]198-199.

13)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Hereafter CO.) eds., C. Baum, E. Cunitz, and E. Reiss, Berlin: Schwetschke, 1863-1900), Vol. 10. 228. Cited in Bouwsma, ‘John Calvin’, fn 76.

14) T.H.L. Parker, ‘John Calvin’, (Herts, England: Lion Publishing plc, 1975) 86.

15) ‘Letter to Farel’, No. 36. May 19, 1539. in Selected Works of Calvin 4:137.

16) 파렐에 대한 칼빈의 결혼 추진 부탁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두 사람이 어떤 특정한 여인을 염두에 두고 한 의사 소통으로 보는 견해와 결혼 과정 자체를 부써보다는 파렐이 주도해 줄 것을 바라는 칼빈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보는 견해로 나뉘고 있다. 전자의 예는 Bawsma 갈은 학자들에게서, 후자의 해석은 Pakrer와 같은 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17) ‘Letter to Farel’, No. 30, Februa 28, 1539, in Select Works of Calvin.4:108.

18) D’ 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Vol. 6, 405.

19) ‘Letter to Farel’, No. 44, February 6,1540 in Selected Works, 4: 166.

20) Petersen, ‘Idelette’, 13.

21) ‘Letter to Farel’, No. 44, February 6, 1540 in Selected Works 4:166.

22) ‘Letter to Parel’, No. 48, June 21, 1540 in Selected Works, 4:185.

23) 고전적인 역사가인 SchaffS와 D’Aubigne모두 이델레뜨가 렘버트 가문 사람일 것으로 보고       있다. Schaff, ‘The Reformation’, 353 그리고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Vol. 6, 406.

24) Petersen, ‘Idelette’, 13.

25)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Vol. 6, 406.

26) Petersen, ‘Idelette’, 13.

27) 칼빈의 정확한 결혼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 간에는 8월 초(Phillip Schaff), 8월 말 (Merle d’ Abigne) 또는 9월(Bonnet) 등으로 결혼 날짜들이 제시되고 있으나,1540년 8월 17일 이미 결혼한 상태로 언급된 Libertet에게 보내는 칼빈의 편지 등을 예로 들며 Schaff는 ‘8 월초 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Philip Schaff, ‘The History of the Reformation’, Vol. 8 (Albany, OR: Ages Software, 1997), Chap. 92:p. 351 & fn. 584.

28) Theodore Beza, ‘The Life of Calvin’, (Albany, OR: Ages Software, 1998) 14.

29) CO 11: 78. Cited in Steinmetz, ‘Calvin in Context’, 15.

30) 일군의 학자들은 노용에 뷔르(Bure) 가문이 있는 것을 예로 들며 이델레뜨와 칼빈이 오래 전부터 이미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여타 지역에서도 이 가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추정을 확증할 결정적 증거는 물론 없다. Parker, ‘John Calvin’, 87.                                    

31) Philip Schaff, ‘The History of the Reformation’, Vol.8(Albany, OR: Ages Software, 1997), Chap. 85의 p. 313.

32) Steinmetz, ‘Calvin in Context’. 19.

33) Petersen, ‘Idelette’, 14.

34) ‘Letter to Farel’, No. 63, March 28, 1541 in Selected Works. 4: 232.

35) 칼빈과 이델레뜨 사이에 몇 명의 아이가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한 명의 아들을 언급한 Beza의 고전적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Parker, Steinmetz)과 3명 또는  그 이상의 가능성을 지지하는 학자(Bawsma)들로 나뉜다. 후자의 학자들은 그 근거로 파릴에게 보낸 1544년 5월 30일의 편지와 1547년 8월 21일의 편지에 언급된 랄과 아들을 예로  드는 데 반해 전자의 학자들은 이들 편지에 언급된 아이들은 칼빈의 동생의 아이들이거나 이델레뜨의 전남편의 소생을 언급한 것으로 간주한다. ‘Letter to Farel’, No. 17, May 30, 1544 in Selected Works, 4: 408: ‘My little daughter labors under a continual fever’, ‘Letter to Farel’, No. 204, August 21, 1547 in Selected Works, 5: 147: ‘at the baptism of our child James’

36) ‘Letter to M. de Richebourg’, No. 64, April 1541 in Selected Works, 4: 242.

37) 종교개혁자들 다수가 자녀의 죽음을 경험했다. 루터는 두 딸  Elizabeth(1528)와 Magda1ene

    (1542)를 잃었다. 1541년 10월 경 스위스 지역에 다시 번진 전염병으로 쯔빙글리(Zwingli)는 아들 월리암(William)을 그리고 외코람파디우스(Oeolampadius) 역시 아들 유졔브(Euzebe)를 잃었다.

38) ‘Letter to Viret’, No. 90, 19 August, 1542 in Selected Works, 4: 332.

39) Carter Lmdberg, ‘The European Reformations’, (Cambridge, MA: Blackwell Pulbishers Inc., 1996), 265.

40) 이는 재세례파의 결혼관과 연관된 비난이었다. 재래세례파들에게 있어 결혼은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성례도 아니고 또 주류 개혁자들의 주장처럼 세속 정부의 관장 아래 있는 예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결혼을 세속 정부와 관계없는 당사자들의 계약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시정부에 의해 공식화된 적도 없고 서약과 선포도 없었던 재세례파 교도들의 결혼은 반대자들에 의해 합법성 없는 결혼으로 인식됐다. 이fjs 일방적 비판이 칼빈의 아내에게 가해졌다. ‘Letter to Farel’, No. 204. August 21, 1547 in Selected Works, 5: 147-8 & footnotes 123a,

41) ‘Letter to Farel’, No. 239, April 11, 1549 in Selected Works, 5: 230.

42) Ibid., 231.

43) 그는 자신이 재혼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갈이 언급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의 나를 누구든지 결혼한 사람보다 더 덕이 있는 사람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만약 결혼해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 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나는 내 약함을 잘 압니다. 아마도 여자는 나와 행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C0 53, 234. Cited in Parker, ‘John Calvin’, 121.

44) Steinmetz, ‘Calvin in Context’, 15.

45) Petersen, ‘Idelette’, 14.

46) ‘Letter to Viret’, No. 238, April 7, 1549 in Selected Works, 5: 228.

47) 칼빈의 에베소서 주석 (Commentary on the Epistle of Ephesianas) 5:28-33을 보라.

48) LW 29: 18-21. See also Roland H. Bainton, ‘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 (Nashville. TN: Abingdon Press),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