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

칼빈의 성탄절 메시지: 창조보다 더 경이로운 사건

칼빈의 성탄절 메시지 창조보다 더 경이로운 사건

  그리스도는 우리처럼 육신(肉身)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성(本性)을 입으셨다는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간략히 다루기는 했지만 경탄(驚歎)을 금치 못할 정도로 명료하다.  

이 구절은 또한 하나님의 본질(本質) 안에 계신 하나의 참 본질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육신’(肉身, σὰρξ, flesh)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요한이 말하고자 아는 의미를 전달한다.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그 존귀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얼마나 낮고 비천한 상태로 내려오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우주만물 창조보다 더 경이(驚異)롭고 놀라운 사건이다.)

성경은 인간을 낮춰 말할 때 ‘육신’(肉身)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영적인 영광과 우리 육신의 지독하게 추함 사이의 간격은 대단히 깊고 멀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극히 낮추셔서 인간의 비참함을 표현하는 바로 그 육신을 친히 취하신 것이다.

여기서 ‘육신’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가리키기 위함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려고 사용되었다. 즉 인간의 연약하고 덧없는 본성을 경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사 40:6)라는 구절이나 이와 비슷한 구절들이 이러한 육신의 특성을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여기에서 동시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단어가 수사학적인 제유법(提喩法, 하나의 명칭으로 전체 또는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현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언급하는 ‘육신’이라는 말 속에 ‘전인’(全人)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분명하다. 모든 시대 이전에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시고 그 하나님과 함께 거하신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여기에 믿음의 중요한 두 요소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두 본성이(인성과 신성) 하나의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어 동일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두 본성이(인성과 신성) 그분의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다고 해서 그   각각의 본 성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신성(神性)은 신성에 적합한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인성(人性) 또 한 인성에 속하는 것을 모두 갖추고 그분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이단(異端)들을 동원하여 이런 저런 어리석은 방법으로 할 수만 있으면 이 건전한 신학을 전복시키려 할 때 항상 다음 두 가지 오류 중 어느 하나를 억지로 끌어들였다. 그중 하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인 존재 방식이 아주 혼란스러워 그 신성이 온전하지도 않고 그 본성 또한 순전한 인간 본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오류는 그리스도가 이중(二重) 인격을 가지고 두 개의 구별(區別) 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옷 입었다고 하는 설명이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주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統一性)을 분명하게 추론(推論)할 수 있다. 지금 인간이신 그분은 과거에 언제나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이 아닌 다른 어떤 분으로 이해될 수가 없다. 사람이 되셨다고 언급된 분은 바로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한이 ‘말씀’이라는 명칭을 인간 그리스도에게 명백하게 붙이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은 이전에 존재하시던 것을 멈추신 것이 아니며,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에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셨는데, 여전히 시간적인 시작이 없는 영원한 말씀(하나님)으로 그렇게 되신 것이다.(*) 출처 / 요한 칼빈의  ‘요한복음 주석’ pp 43-46

1550년 12월 25일(목) 칼빈의 설교(일부)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누가 이 날을 정했습니까? 불쌍한 교황주의자들이 정한 날입니다. 얼마나 배은망덕인지요. 여러분이 오늘 성탄절을 축하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날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을 드린다고 여기십니까? 여러분이 오늘을 성일(聖日)로 지키고 싶어 하는 사실을 심사숙고(深思熟考)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 년 중 한 날을 택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그 탄생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들어왔습니다. 이 주일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꼭 특별한 한 날을 성일(聖日)로 정해야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상(偶像)을 섬기고 있는 셈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은 그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단을 영예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해 어느 날에 말해도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수요일 화요일 아니 어느 날이든 그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너무 악하기에 여러분의 변덕스런 본성(本性)을 따라 하나님도 섬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冒瀆)하는 처사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쓸데없는 인간의 생각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쓸 때 그것은 큰 실수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불의의 극치에 도달하기까지 다른 모든 악을 불러오는 심각한 실수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서 악한 것들만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미신(迷信)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는 모든 기회까지도 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인식하게 될 때 여러분은 교황주의자들이 제정한 오늘 그리스도의 탄생 성일(聖日)을 우리가 폐지(閉止)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일에 우리는 성찬(聖餐)을 나누며 주님의 성육신(成肉身)을 또한 상기(想起)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과 신하가 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방해하는 모든 거침돌을 하나님이 제거(除去)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렀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악이 여러분을 어떻게 넘어지게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의 성탄을 축하는 악한 시도 속에 여러분이 넘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출처 / 1550년 12월 25일(목) 칼빈의 설교 중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