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칼빈주의와 종교(기독교)

요약, 갈빈주의 강연(2)

칼빈주의와 종교(기독교)

– Summary, Abraham Kuyper’s Lectures on Calvinism – 

1. 종교자체에 대한 교의적인 대답

첫 번째 강연에서 칼빈주의가 기독교의 완성된 모습으로서 그리고 삶의 체계로서 높고 풍성한 인류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두 번째 강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종교 영역에서 칼빈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한다. 매우 빠르게 지어진 미숙련자의 솜씨처럼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칼빈주의의 놀라운 힘의 비밀은 무엇인가? 카이퍼는 이 질문에 대해 종교(기독교) 자체, 교회생활, 실제생활의 세 측면으로 나누어 차례로 답한다. 종교는 다음 네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      

  • 종교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가?
  • 종교는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媒介的)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 종교는 개인 존재와 실존 일부분에 작용하고 마는가 아니면 인류 전체에 작용할 수 있는가?
  • 종교는 정상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즉 구원론적인 특성을 가져야 하는가?

(1) 하나님의 절대 주권

종교에 대한 첫 번째 질문에 현대 종교철학은 종교의 기원을 하나의 잠재력에 돌리는데 그것은 사람 안에 존재하는 영혼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움직이는 영적 능력을 추론하게 되고 더 나아가 포괄적 개념의 인격적인 신(神) 존재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차이를 알게 됨과 동시에 자신의 영혼의 고상함에 매료되어 -자기 숭배의 행위로- 비인격적 이상(ideal) 앞에 절을 하고 만다. 이런 종교는 어떤 다양한 발전에도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된다.

이 같은 인간을 위한 종교는 비록 그것이 신(神)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발전한다 해도 역시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종교가 숭배하는 신(神)은 언제나 사람을 돕는 자가 되거나, 국가를 위한 질서와 안정을 보장하거나, 궁핍할 때 도움과 구원을 주거나, 죄의 타락에 맞서 이기고자 하는 충동을 강화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위한 이런 종교는 환란 때는 번성하며 평안할 때는 버림받는다. 특히 계몽된 사람들은 학문의 진보로 인해 우주의 미궁에서 벗어났다고 느끼자마자 종교를 버린다. 이런 현상은 고상하고 잘 사는 지식층에 속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반복되고 있다.  

이에 반해 칼빈주의의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에 종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피조(被造) 세계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식(意識)이 없는 피조 된 자연만물에 종교적 표현을 새겨 두셨다. 그러나 창조의 절정이 사람인 것처럼 종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 칼빈이 말한 ‘종교의 씨’(Sense of Divinity or ‘Seed of Religion)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신(神)에 대한 감각을 통해 인간을 종교적으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종교는 오직 창조주에 대한 찬양과 경배의 감정이지 불화하고 필요를 외치는 의기소침 하게 만드는 의존의 느낌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의 모든 동기(動機, motivation)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즉 다른 존재를 탐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위하는 것, 다른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것, 주의 이름의 영광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것들이 참된 종교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간구해야 하며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후에 인간 자신의 필요를 생각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절대주권(絶對主權,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을 믿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롬 11:36) 이것이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종교의 근본 개념이다.        

(2) 하나님의 개인적 선택

그렇다면 종교는 직접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이어야 하는가?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인간 대언자가 필요하고 기독교에도 성모(聖母) 마리아, 천사, 성인(聖人), 순교자, 성직자 등의 대언자(代言者)가 등장했다. 루터 역시 이런 사제(司祭)의 매개에 대항했지만 ‘가르치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중보자 직분과 신비의 청지기를 다시 도입하고 말았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종교는 피조물의 중재가 전혀 없이 하나님과 인간 마음의 직접적 교통을 실현해야 한다. 그는 사제, 순교자, 천사 등을 평가 절하하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해야 했기에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든 모든 것에 맞서서 거룩한 분노로 전쟁을 벌였다. 물론 타락한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중보자는 오직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을 위한 종교’와 ‘하나님을 위한 종교’를 다시 한 번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을 돕는 일이 종교의 주된 목적으로 남는 한, 사람이 자신의 열심과 신앙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신앙심이 열등한 사람이 더 거룩한 사람의 중보 활동을 구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되고 그러한 종교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 노릇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의 요구와 목적이 모든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면 인간이 인간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두 번째 요점은 개별적인 하나님의 선택의 고백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모든 성직자의 중보의 결과가 한결같이 오히려 종교를 외형적으로 만들고 사제적인 형식으로 종교를 숨 막히게 하는 모든 인간적인 간섭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의 선택(예정)이 인간 내면의 영혼을 하나님께 직접 연결되게 하는 데서 종교가 이상적으로 실현된다. 이 같은 예정(豫定)이라는 관점에서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과  칼빈(Jean Calvin, 1509-1564)을 나란히 놓을 수 있겠지만 어거스틴은 여전히 감독으로서 자신과 교회 간의 중보(中保, mediator) 위치를 유지했다.

(3) 만물을 붙드시는 일반은총

종교의 목적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은 종교적 필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에 종교를 국한시키게 된다. 그리고 종교의 실현이 성직자의 중보에 달려 있다면 그들 자신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사건에 종교를 국한시키게 된다. 따라서 이런 종교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데 종교적 기관(器官, organ), 영역, 개인의 집단에서 그런 특징이 발견된다.          

이런 종교에서는 인간의 종교적 기능으로서 정당하게 작용되어야 할 감정(感情), 의지(意志), 지성(知性) 가운데 지성이 억제 당하게 된다. 종교가 인간 지성 밖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종교가 과학에서 배제되고 종교의 권위가 일반적인 생활의 영역에서 배제되게 된다. 종교의 영역이 단지 윤리적 생활로 국한되고 개인적인 은신처로만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종교는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일부 특정한 사람들과 관계있는 종교가 된다.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은 종교를 자신들의 교회 안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고 종교의 영향력을 자신들이 봉헌한 삶의 부분에만 국한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 봉헌된 종교적인 부분과 비종교적인 세속적 부분으로 경계선을 긋는 이원론적 체계는 종교를 일상생활에서 절기로, 번영에서 위험과 병든 때로, 삶의 충만한 데서 다가오는 죽음의 때로만 국한시키게 된다.

칼빈주의는 이 세 번째 질문에도 단호하다. 칼빈주의는 종교를 인간의 삶 전체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특성과 적용을 전적으로 옹호한다.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면 모든 피조물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의 제사장으로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로 올려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에 국한된 종교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의 이성적 의식(意識, 사람 안에 있는 로고스)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비추는 사유(思惟)의 빛을 배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 때에 변할 수 없는 존재법칙(자연법칙)을 모든 피조물에게 주셨다. 칼빈주의는 이에 철저히 순종하여 모든 삶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봉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모든 생활에 임재 하신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면전(面前)에 있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해야 한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종교를 어느 한 단체나 사람들 가운데 몇몇 집단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종교는 인류 전체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은혜는 선민에게만 끼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전(全) 인류에게 끼치기 때문이다. 그 중에 종교적 빛과 생명의 빛이 교회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 교회 벽에는 활짝 열린 창들이 있어 생명의 빛이 온 세상에 비친다. 또 교회에는 모든 부패를 억제하는 거룩한 소금이 있어 세상 모든 방면으로 스며든다.

(4) 중생(구원)과 성경계시의 필요성

종교 자체에 대한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종교는 인간을 정상적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으로 봐야하는가? 만약 인간을 비정상적으로 본다면 그 종교는 필연적으로 구원의 필요라는 특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을 정상적인 존재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런 종교관은 진화론적 사고에 근거해 가장 낮은 상태에서 가장 높은 이상으로 나아가는 종교의 발전을 말한다. 종교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진보하여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불완전한 종교형식을 창조의 결과로 보지 않고 인간 타락의 결과로 본다. 최초의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에서 순수하고 참된 종교에 의해 고취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이것을 깨닫고 죄 의식을 느끼며 한탄스러운 타락을 이해한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 회복은 오직 구원으로만 가능한데 이 결론에 따라 칼빈주의는 구원을 위한 분명한 중생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과 계시에 대한 근거를 발견했다.

하나님이 삶의 굽은 바퀴를 바로잡아 주시는 직접적 행위인 중생에 대해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계시와 성경의 권위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성경을 오직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형식적 원리로 이해했지만 칼빈은 이와는 달리 ‘성경적 계시의 필요’(necessitas S. Scripturae)라고 성경의 절대적 필요를 말했다. 칼빈주의의 이 교의(敎義)의 의미 성경의 권위가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칼빈주의의 이 교의는 성경에 대한 자유주의의 비평적 분석과 적용을 기독교 자체를 버리는 것과 동일하게 본다.

인간의 타락(墮落) 전에는 낙원에 성경이 없었다. 그리고 장차 임할 영광의 낙원에도 성경은 없을 것이다. 자연의 빛이 우리에게 직접 말하며 하나님의 내면적 말씀이 우리 마음에 명료하게 울릴 때에는 성경이 불필요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은 자연과 마음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성경계시’가 전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인간 중보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 빛을 거룩한 계시(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비춰주신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을 죄가 없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는 종교의 입장에서는 종교가 구원론적일 필요가 없다는 그릇된 가정 하에 성경의 권위와 맞서게 되고 결국 성경은 필요 없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놓인 방해물이 되고 만다.

이 같은 네 가지 종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칼빈주의는 적절한 교의(敎義, doctrines)로 대답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칼빈주의는 종교를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인 행복주의(幸福主義)의 의미로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하나님의 절대주권)
  • 칼빈주의는 종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 어떤 피조물의 중보가 있으면 안 된다. 참 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 내면의 마음에 이루시는 직접적인 역사이어야 한다.(하나님의 개별적인 선택 또는 예정)
  • 칼빈주의의 참 종교는 부분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다.(일반은총)
  • 칼빈주의의 구원론은 인간의 타락 상태에서는 종교가 정상적일 수없고 구원을 위한 중생과 성경이 필수적이다.(중생과 성경계시의 필요성)

2. 교회의 본질과 목적

이제 칼빈주의는 교회의 본질(本質), 현현(顯顯), 목적(目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교회의 본질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영적 유기체(有機體)이다. 하지만 현재 그 중심과 행동의 출발점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영적 중심을 지구에 두셨고 이곳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지으셔서 우주를 자신의 영광에 바치도록 하셨다. 이렇게 사람은 우주 한 가운데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서 있다. 비록 죄가 그 계획을 방해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멈추지 않으시고 아들의 위격으로 자신을 이 세상에 주시어 인류와 우주가 영원한 생명과 새롭게 접촉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중생(重生)은 몇몇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나무에서 많은 가지와 잎이 떨어졌지만 교회라는 유기체를 구원한다. 그리하여 이 중생한 인간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몸을 형성하는데 그리스도가 그 몸의 머리가 되시며 그 몸의 지체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으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유기체(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야 우주의 중심에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장차 이 ‘새 예루살렘’은 하늘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올 것이나 현재의 이 유기체는 이 땅에서 흐릿하게 분간할 수 있는 실루엣과 같을 뿐이다. 따라서 참된 성소는 하늘에 있으며 그곳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유일한 제사장 그리스도가 계신다.

교회의 이런 천상적(天上的) 특성은 중세교회에서 점점 사라졌다. 중세교회는 성소(聖所)를 다시 땅으로 내렸고 땅에 제단(祭壇)을 쌓았고 이 제단 사역을 위해 사제(司祭)라는 교직제(敎職制)를 만들었다. 또 땅에 보이는 제물(祭物)을 찾게 되었고 결국 미사(Mass)라는 피 없는 제물을 만들었다.

이 같이 중세교회는 본질적으로 세상적인 것이 되었다.

칼빈주의는 원칙적으로 성경의 제사장직, 제단, 성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도리어 가리고 참된 제단과 참된 성소를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제주의(司祭主義, sacerdotalism)에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하여 지상적 제사장을 교직제(敎職制) 형식을 보존하고 있는 감독교회(정교회, 천주교, 성공회 등) 그리고 군주(君主)를 최고 감독으로 교회 위에 세웠던 루터파(Lutheran)와 달리 칼빈주의는 교회 봉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를 동등(同等)하다고 선언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표현된 불가시적(不可視的, 보편적) 교회라는 교의(敎義)는 종교적으로 성별되며 우주론적이고 영구적인 의의에서 파악된다. 땅에서는 기껏해야 한 시대의 성전의 입구에서 한 세대의 신자가 발견될 뿐이고 이전의 모든 세대는 이 땅을 떠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순례자였으며 비유컨대 성전 입구에서 성소로 바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죽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누구도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교회의 본질과 이 땅에 있는 교회의 불완전한 형식 사이의 이 같은 절대적 대조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양으로 우리의 육신 가운데서 불가시적 교회로 들어오셨으며 우리의 머리되신 그분과 더불어 그의 주위에 그 안에 참된 교회 참되고 본질적인 성소가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2) 교회의 현현(顯現)

이 땅에 나타나 보이는 교회의 현현(顯現) 형식에 관해 말하자면 칼빈은 신앙고백을 하는 개인 가운데서 교회를 발견했다. 이 개인들이 성경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함께 섬기는 일에 노력하는데 이것이 바로 땅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성도들에게 마술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물이나 기관이나 영적 단체는 없다.

하늘에 있는 불가시적 참된 교회는 지상의 교회 안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본질적인 참된 교회는 중생한 사람들이 지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이 땅의 참된 교회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땅의 교회는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권징’을 행하여 모든 일에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성령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통치하신다. 성령이 각 지체 가운데 역사하시므로 성도 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섬기고 이끌고 규제하는 사역자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원리에 따르는 장로교의 정치형식은 이중적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절대 군주이지만 실제 교회정치는 민주적이다. 교회의 권력은 그리스도로부터 회중에게 직접 주어지며 이 권력은 사역자 안에 집중되고 이 사역자에 의해 형제들에게 시행된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서로에게 아무런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고 교회를 통해서만 교회정치가 이루어진다.

교회가 회중(會衆)으로 즉 신앙을 고백하는 개개인들의 연합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의 권력이 회중에게 직접 내려온다면 역사와 지역 등의 차이로 인해 교회는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불가시적 교회)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모습(교파)으로 현현되어 가시적 교회(지상 교회)를 비추게 된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신자와 독립된 은혜의 기관 혹은 교직을 맡은 기관이라면 이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모든 나라에 퍼져 모든 형식에 있어서 동일한 특징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교회(교파)의 다양함을 이끌어낸 ‘신자의 회중’이라는 교회 개념은 자칫 아직 제대로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신자의 자녀는 교회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신자의 후손과 연결되어 있는 자연적 유대를 끊어버리지 않고 이 유대를 성별(聖別)하여 유아 세례로써 교회의 교제에 연합시킨다. 그리고 이 자녀들은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거나 혹 성장 후 불신에 의해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는  교회의 교제 안에 유지된다. 이것이 언약교의(言約敎義)이다.

그러므로 언약과 교회는 분리 될 수 없다. 언약은 교회를 인류에 매어두고 하나님은 은혜의 생활과 자연의 생활 간의 연결을 교회 안에서 증명하셨다. 교회생활은 세대마다 이어지는 인류의 자연적인 유기적 번식과 나란히 전진한다. 이러한 전진은 교회가 단순히 전 국민을 포함하는 국가교회라는 개념 안에 머물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는 국가에 속하지 않고 세계적이다. 즉 교회의 영역은 한 국가가 아니라 전(全) 세계다.            

(3) 교회의 목적

이제 교회가 땅에 세워진 목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땅에서도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선택받은 자의 중생(重生)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 다음에는 회심(回心, conversion)이 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말씀을 선포한다. 그리하여 중생한 자에게서도 불꽃이 빛나지만 회심한 자에게서 비로소 타오르는 신앙의 불이 된다. 회심자의 선한 행위로 타오르게 된 이 불은 교회로부터 세상에 비친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원의 보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으로 회심과 성화(聖化)를 드러낸다.

또 다른 교회의 목적은 성도의 교제(交際)와 성례(聖禮)를 통해 이 작은 불꽃들을 하나로 모아 더욱 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순전한 경배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예배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신성함을 보존하고 이를 외부 세계에 지속적으로 새겨두기 위한 교회 권징(勸懲)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집사(執事)를 통해 박애(博愛, philanthropy)의 봉사를 해야 한다. 교회 집사는 구제(救濟)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마음을 관대하게 하시는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 집사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그분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단순히 그리스도께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소유가 그분의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집사는 인간의 종(從)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분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다. 고로 구제하는 자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은 위로 자이신 그리스도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다.

이상의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주의 교회 개념은 앞서 살펴본 종교라는 근본 개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 하나의 종교 하나의 교회를 갖는다. 교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따라서 그 현현(顯現)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이며 그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3. 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적인 열매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칼빈주의 신앙고백(특히 성도의 견인과 예정교리)은 흔히 신자들을 쉽게 싸구려 신앙양심과 도덕적 방종으로 이끈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의 열매로서 칼빈주의를 생각할 때 줄곧 지적되는 것이다. 칼빈주의 교리가 부주의하고 불경건한 생활을 낳고 있다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칼빈주의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하고 간단하게 반박한다.         49

반(反) 율법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불경건한 탐욕으로 칼빈주의 신앙고백이 남용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칼빈주의적 진지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영혼으로부터 전능자의 위엄에 놀라고 영원한 사랑의 강력한 능력에 복종하여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할 것을 확신하는 칼빈주의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의 원리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 앞에 떨지 않을 수 없다.

(2)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규례

또 성경을 삶의 원리로 강조하는 순간 율법주의라는 누명을 쓰지만 율법주의는 율법의 성취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비해 칼빈주의는 모든 구원의 공로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속(代贖)의 열매로 돌린다. 물론 칼빈주의의 모든 윤리적 요구는 시내 산의 율법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의 심비(心碑)에 거룩한 뜻을 심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참된 요약으로서 시내 산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주의자가 하나님의 규례를 믿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삶이 창조에서 실현되기 전에 하나님 안에 먼저 있었다는 확신에 의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 된 세계는 필연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법칙(自然法則)을 갖고 있다. 궁창(穹蒼)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땅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우리 몸에 흐르는 피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심장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미학의 영역에서 우리의 상상력에 대한 규례가 있으며, 도덕 영역에서 인간 전체생활에 대한 엄격한 규례가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것을 “너는 ~~해야 한다.”는 입법자의 개념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 규례들은 마치 벗어버려야 하는 멍에처럼 강제력에 의해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 잃은 광야에서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발자취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숨이 가쁠 때 우리는 사람의 호흡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자연법칙)에 따라 숨을 고르면서 정상 상태로 회복한다.

(3) 하나님 나라의 확장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는 자연법칙이나 일반도덕 규례 그리고 좀 더 특별한 기독교적 계명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불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한 분 하나님에 의한 하나의 동일한 도덕적 질서 외에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양심 안에 종교와 윤리의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모든 것을 두는 것이다.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는 하나의 현실로서 모든 생활에 즉 가정, 사회, 학문, 예술, 개인생활, 정치활동 등에 덧붙여진다.

세상에 대한 기피(忌避)는 재세례파(Anabaptist)의 표어였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 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기피를 논박하고 반대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나쁜 세계와 좋은 세계 즉 두 세계가 있는 게 아니다. 타락하여 죄인 되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영생에 들어가게 된 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의 동일한 자인 것처럼 저주로 고통 받고 타락 이후로 일반 은총에 의하여 보전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어 심판의 공포를 지나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동일한 세계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교회 울타리 안에 갇혀 세상을 그 운명에 내버려 둘 수 없다. 칼빈주의자는 이 세상의 발전을 훨씬 높은 단계로 밀고 올라가되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올라가며 ‘좋은 소식’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불굴의 힘으로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상업과 무역, 수공예와 산업, 농업과 원예, 기술과 학문에까지 새로운 추진력을 갖게 한다.

(4) 카드놀이, 극장, 춤

하지만 한 가지 예외를 들고자 한다. 이것은 이 세상의 너무도 신성모독적인 오락으로서 칼빈주의가 금하는 것인데 카드놀이, 극장, 춤 이 세 가지이다. 물론 그 자체로 이것들이 악한 것은 아니다. 예리한  눈과 재빠른 행동과 폭넓은 경험으로 결정되는 놀이는 그 성격이 고상하고, 소설, 연극(역자 주 – 당시 시대상으로는 주로 연극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영화도 포함할 수 있겠다.) 등에 필요한 상상력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며 춤 역시 그 자체로 반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다만 칼빈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에 의지하기보다 도박처럼 기회나 운(運)에 의지하여 불신에 빠지고 우연을 갈망하게 만드는 카드놀이며, 관객을 즐겁게 하려고 배우들에게 도덕적 희생을 요구하며 번창하는 극장(연극, 영화)이며, 쉽게 음란함에 빠지게 만드는 춤을 말한다. 즉 칼빈주의는 위험한 환희에 빠져서 신앙의 진지함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희생시키는 모든 것을 반대한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도덕영역의 곧은길을 발견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도덕이라는 건물의 기초는 점점 흔들리고 있다. 정치가와 법률가는 강자의 권리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정직은 조롱당하며, 범신론자는 예수님과 네로(Nero, 37-68 로마황제 기독교 박해자)를 같은 자리에 놓으려 하고 있으며,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그리스도의 복을 인류의 저주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칼빈주의는 세상이 윤리적 철학 이론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 의한 양심의 회복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세상 철학처럼 추론에 몰두하지 않고 우리 영혼을 곧장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면시킨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적 반성과 함께 낮아지며 경건하고 고상한 도덕적 절제의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요약 / 편집 : 나쥬니, 출처 http://www.nazuni.pe.kr/faith/books/calvinism/lifesystem.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