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신학체계의 기둥 칼빈주의 5대교리 (상)

시작하는 말
칼빈주의 신학체계는 특히 다섯 가지의 명확한 교리를 강조하는데 이것을 ‘칼빈주의 5대교리’(五大敎理, The Five Points of Calvinism)라고 한다. 이 5대교리는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받쳐주고 있는 주요 지주(支柱)이다. 본편에서는 이 교리의 성경적 근거와 이성적 논의에 의해 고찰한 후 이 교리에 대한 반론까지 조사 연구하고자 한다.(칼빈주의 5대교리는 칼빈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후대에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성경에는 칼빈의 이 5대교리를 지지하는 근거들이 대단히 많다. 또 이 5대교리는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어 단일하고 균형 잡힌 일관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5대교리가 이렇게 서로 유기적으로 질서정연한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신학자들이 찬탄하고 있다. 즉 이 교리 중 하나가 참되다는 것이 증명되면 그 나머지 교리들도 그 체계를 이루기 위한 논리적 필연적 부분들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반면에 만일 5대교리 중 어느 하나가 오류라는 것이 입증된다면 그 전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칼빈의 5대교리의 상호 긴밀한 유기적 연관성 때문에 이 중 하나만 제외하면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이라는 복음 전체가 붕괴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5대교리의 유기적 융합이 우연적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동시에 칼빈의 5대교리가 성경적으로 참되지 않다면 이런 유기적 융합이 이루어 질 수가 없다고 믿는다.
본 글의 목적은 정통교회가 믿는 성경적 교리 전부를 논평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칼빈주의 체계의 특징적 교리들만을 해설 옹호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을 벗어나면 칼빈주의 체계의 참 능력과 참 가치를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칼빈주의 5대교리는 알미니안주의 전 체계 안에서 중요시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 5대교리’(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1610)와는 역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칼빈의 5대교리를 칼빈주의의 전(全) 체계라고 속단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 5대교리가 칼빈주의의 본질적 요소는 되지만 칼빈주의 체계의 전부는 아니다. 칼빈주의 체계는 훨씬 더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적 신앙 혹은 칼빈주의의 균형 잡힌 서술로서 이 칼빈의 5대교리 이외의 다른 교리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말하고 있다.
칼빈의 5대교리의 첫 글자만 모으면 TULIP인데 튜울립(Tulip) 꽃 이름을 연상하면 쉽게 기억할 수 있다.
- Total Inability(전적 무능력 또는 타락)
-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 Limited Atonement(제한적 속죄)
-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
Ⅰ.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
1. 본 교리의 서술(Statement of The Doctrine)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죄에 빠짐으로 구원을 얻을만한 선행을 행할 의지력을 아주 상실해 버렸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선(善)에서 멀어지고 죄로 죽었으니 자력(自力)으로는 회심(悔心)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회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은 전(全) 인류가 아담 안에서 범죄 하였다는 사실과 이것을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롬 2:1)을 그들의 구원론의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바울은 여러 번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빠졌던 자라고 말했다. 그는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을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엡 2:12)는 것을 상기시켰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다섯 구절을 중복하여 이 교리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원죄의 범위와 결과(The Extent and Effects of Original Sin)
‘인간은 죄로 죽은 자’라고 선언하는 이 교리는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악하든지 혹은 어떤 사람은 더 악하고 어떤 사람은 전적으로 덕이 부족하다든지 혹은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다든지 인간의 정신이 활기가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인간의 육체가 죽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본 교리가 의미는 아담의 타락 이래로 모든 인간은 죄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고, 그릇된 원리에 따라 활동하게 되었으며, 전혀 하나님을 경애(敬愛, 공경하고 사랑함)할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아무 일도 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타락 이래 모든 선에 대하여 부적당하고 무능력하며 반대하는 자가 되어 전적으로 악으로만 경주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고정된 편벽성을 가지고 있어서 본능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악으로만 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동시에 자원하여 죄를 범하는 자들이다. 인간의 무능력은 자진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수행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루터는 이런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리켜 “자유의지의 실질적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의 자유의지란 하나의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이런 자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의 구원 문제에 있어 어떤 선악(善惡)의 문제든 취사선택(取捨選擇)할 자유가 없고 다만 악의 대소(大小)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 가졌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완전한 자유의지라고 할 수 없다. 타락(墮落) 된 인간도 도덕적으로 선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생득적(生得的)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동기가 전적으로 그릇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유행동자이다. 그러나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의지(意志)는 자신 이외의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날개가 다친 새는 하늘을 날아다닐 자유가 있어도 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가 있지만 나아가지 못한다. 죄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회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증오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인간이 번뇌하는 의지의 무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정죄(定罪)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고 하셨다. 또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요 5:40)라고 하셨다. 이처럼 인간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자신의 사악(邪惡)한 이 같은 의지(意志)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 오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도움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하였다.
인간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도 사랑할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마치 물은 흐르는 능력이 있으므로 언덕 위로 흘러 산꼭대기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혹은 사람이 벼랑 꼭대기에서 골짜기로 투신할 수 있으므로 똑 같은 힘으로 골짜기 밑에서 벼랑 꼭대기로 날아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우신 하나님께 대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타락한 인간은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존경은 하지만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과는 관계가 없기를 바라며 전력을 다하여 성령의 외적 감화(感化)에 대항한다. 인간은 의(義) 대신 죄(罪)가 그의 천성적 성격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구원을 전혀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에 대해 가장 완고하고 맹목적이며 우둔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선(善)을 악(惡)으로 악을 선으로 판단하는 혼미한 오성(悟性, 깨닫는 성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다만 악한 것만을 추구하는 성향(性向)이 되었다. 그래서 자발성과 노예성이 실제로 동시에 그의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장님이 되어 있기 때문에 타락한 천사나 악한 귀신이 하는 것처럼 다만 선(善) 대신 악을 좋아하며 선택한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완전히 성화될 때 비로소 거룩한 천사와 같이 오직 선(善)을 좋아하며 선을 선택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두 상태는 도덕적 행동 자가 자신의 자유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책임도 져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한결같이 그 행동에 있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자유로 죄를 범하고 또한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 성향과 바라고 원하는 것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마침내 그 심정이 자진하여 의식적으로 또 의지적으로 그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악한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 본성의 특질이다. 그러므로 욥의 말처럼 인간은 ‘악을 짓기를 물을 마심 같이’하는 것이다.(욥 15:16)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이 말씀 앞에 어찌 감히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람은 그 본래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미적 감각이나 지식이 사람이 아름다운 예술품을 볼 때는 다만 하나의 사물로 보일 뿐 그 아름다움은 감지(感知)하지 못한다. 수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복잡한 수학방정식을 눈으로 볼 수는 있어도 그에게 있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소나 말 역시 석양의 낙조와 같은 자연의 아름다운 현상을 보지만 그냥 자연일 뿐 인간처럼 예술적 감상은 못한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복음에 대한 반응이 이와 같다.
성경의 진리와 교리를 머리로는 알 수 있을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기쁨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그리스도가 거듭난 사람에게는 생명의 왕이시며 세상의 구주시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지고(至高)의 사랑이시며 우리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될 분이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전적무능력은 단순히 부패한 도덕적 성질에서 뿐 아니라 무지(無知)에서도 생긴다. 바울은 이방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 4:17,18)고 했다. 그는 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라고 도 했다. 그리고 바울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늘나라의 영광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 다음 구절의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고전 2:10)라는 말씀과 같이 중생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실체에 대해 가르친 것이다.
예수께서도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생하지 못한 상태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알 자를 주권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타락한 인간은 영적 분별력이 없다. 그의 이성(理性)과 오성(悟性)은 맹목적이 되어 있고 좋아하고 즐기는 것의 감각은 왜곡되어 있다. 이런 심적 상태는 생래적이기 때문에 의지의 힘으로는 그것을 도저히 변경시킬 수 없다. 이성(理性)의 부패가 도리어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것을 변경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중생뿐이다. 중생의 결과는 바울이 회심할 때 받은 거룩한 임무에서 알 수 있다. 즉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 죄 사함을 얻게 되는 것이 중생의 결과이다.(행 26:18)
예수님도 이상과 같은 진리를 다른 식으로 가르치신 적이 있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3,44)고 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잘 알아듣지도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미련하고 미친 말과 같이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악귀가 들린 자라고 까지 비난했다.(요 8:48-52) 오직 그의 제자들만이 그 진리를 알았다.(요 8:31,32)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자유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악귀의 자식들이요 죄의 종이었던 것이다.(요 8:33)
또 예수께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이 비유의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는 곧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의미하며 이런 종류의 사람은 이런 기본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저런 종류의 사람은 저런 기본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이 두 나무의 과실은 행동, 언어, 사상인데 그 사람의 본성이 선하면 선행 행실을 그 사람의 본성이 악하면 악한 행실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결코 뿌리나 가지와 다른 성질의 나무열매가 열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미덕과 악덕이 한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함께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선한 도덕적 상태의 사람으로부터는 필연적으로 선행이 나오고 악한 도덕적 상태의 사람으로부터는 필연적으로 악행이 나올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중생시키기 전에는 각 개인의 영혼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다고 했다. ‘죽었다, 죄로 죽었다.’는 말씀은 어떤 영적 행위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적성이나 능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말이다. 육체적으로도 사람이 일단 죽으면 그 시체는 그 어떤 육체적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정신이 나간 사람일 것이다. 육체적 죽음과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면 그는 어떤 영적 행위도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 같은 도덕적 무능력의 교리는 성경의 증거로부터 나온 것이다. “더러운 것 가운데서는 깨끗한 것을 하나도 낼 수 없다.”(욥 14:4)는 원리에 따라 무릇 여인에게서 난 자마다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며 그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사악일 뿐이다.(욥 15:14-16)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 전에 벌써 범죄에 대한 유경험자가 된다.
저들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고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시 58:3) 저들은 죄악 중에 출생하였고 죄 중에 잉태되었다.(시 51:5) 저들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니(창 8:21), 인생의 모든 악한 결과는 마음으로부터 나왔다.(잠 4:23, 20:11) 그러므로 죄악 된 행위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렘 17:9) 에스겔은 이 진리를 피투성이로 내던져진 채 죽게 된 아기를 주께서 발견하시고 은혜로 양육하셨다는 비유로서 나타내주고 있다.(겔 16장)
원죄(原罪) 교리는 타락한 인간은 부패한 본성의 영향으로 악마나 악귀가 갖는 것과 같은 종류 같은 정도의 죄를 범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과 또한 영광중에 있는 성도와 천사들은 거룩한 성질의 영향으로 의롭게 행동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나 천사나 자기 성품대로 행동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성도들과 천사들은 의(義)를 추구하고 죄를 미워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타락한 인간과 악마의 성질은 단 한 가지 행동도 하나님께 대해 바른 동기를 가지고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성품을 주권적으로 중생하도록 변화시키시지 않으면 안 될 필연성이 여기에 있다. 구약에 있는 여아의 할례식과 산모의 결례식(潔禮式, Purification)은 인간이 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세상에 출생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타락한 인간의 성품은 그 근원부터 부패해졌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민 19:11-19, 레 12:1-8,13,14) 바울은 이 진리를 고린도후서 4:3,4에서 다른 방향으로 더 강하게 기술하고 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다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마귀의 뜻을 좇는 그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딤후 2:26) 이 ‘무장 한 용사’(세상 신)는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쫓겨나지 않는 동안은 자기의 왕국을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고 그의 포로들로 하여금 그의 명령에 잘 수종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자’는 그를 이기고 그의 무장을 빼앗고 포로의 일부를 자유롭게 해 준다.(눅 11:21,22) 하나님은 이제 그가 석방시키고자 하시는 자를 석방하시는 주권을 행사하신다. 이렇게 중생한 모든 성도들은 사단의 왕국에서 하나님에 의해 속량(贖良) 된 죄인들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은 하나의 포로요 스스로 팔려 죄의 종이 된 자로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능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노예성(奴隸性) 자유’라는 말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인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만 자유로운 상태로서 여기서 주인은 죄를 말한다. 예수께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부패(腐敗)는 이렇게도 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력으로는 도저히 인간이 자기를 정결케 할 수 없다. 인간이 갱생(更生)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그의 마음의 변화인데 그것은 오직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주권적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먼저 이 내적변화가 없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개혁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배의 침수(侵水)하는 곳은 수리하지 않고 들어온 물만 퍼내려는 것과 같다. 죄를 짓는데 습관이 된 자가 그 길을 고치기는 마치 에티오피아인이 자기의 검은 피부를 변하게 하고 표범이 그 반점을 없애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인간의 이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김을 가리켜 중생(重生, born again)이라고 한다. 성경은 이것은 ‘중생’ ‘거듭남’ ‘살리심’ ‘흑암에서 광명으로 불러냄’ ‘소생시킴’ ‘신생’(新生)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취하여 버리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줌’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 성령의 새 생명이 주어지는 이 변화의 결과로 인간은 진리를 알게 되고 또 그 진리를 기쁘게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능과 내적 충동이 율법을 향하게 되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그의 성격의 자연적 표현으로 되는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던 것과 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엡 1:18-20) 그 누구도 사람은 자력으로 중생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 내적 변화가 생기기 전에는 아무리 많은 외적 증거가 있어도 인간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눅 17:31)
3. 인간 덕행(德行)의 결점(The Defects in Man’s Common Virtues)
중생하지 못한 인간도 일반은총을 받아 가족을 사랑하거나 선량한 국민이 될 수 있다. 병원을 짓는데 백억 원을 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제자에게 냉수 한 컵을 주는 일은 할 수 없다. 애주(愛酒)가가 공리적(公利的) 목적을 위해서 금주(禁酒)는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불신자의 일반적인 모든 덕(德)이나 선행은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지 않다는 치명적 결점이 있다. 이 결점은 인간의 어떠한 선의 요소도 전부 가릴 만큼 치명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선(善)을 행하는 자가 먼저 하나님과 화목 되지 않는 한 그가 행하는 어떤 일도 하나님께 수납될만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선행은 견고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성질이 아직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깨끗하게 씻은 돼지가 다시 진흙탕에 들어가 뒹구는 것과 같이 조만간에 그도 다시 악한 생활도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행동보다 인간의 도덕성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는 것이 도덕의 원칙이다. 그가 비록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1-3) 이처럼 적대감을 갖고 또는 어떤 공리적(公利的) 동기에 자극되어 겉으로만 하는 가식적(假飾的)인 봉사행위를 달가운 마음으로 받을 사람은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이 말씀은 신앙이 모든 덕행의 기초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정당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열납(悅納)하시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의 규준(規準)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이 사랑은 모든 덕행의 핵심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절제, 정직, 관용 등과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미덕으로 되어 있는 자연적 덕(德)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 덕행들과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선과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는 특유의 기독교적 미덕인 신앙, 사랑, 감사 등과의 사이에 명백한 구분을 짓고 있다. 스미스(William Daniel Smith, 1861-1938)는 이 구분을 다음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해적 집단에서도 그 자체적으로는 선한 일이 많다. 그들은 국가 법률에 대해서는 사악한 반역을 감행하는 범법자들이면서도 그들 스스로의 법과 규약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법규에는 절대복종한다. 그들에게는 또한 용기, 충성, 단합 등 해적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국가의 법률이 요구하는 일도 많이 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규약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국가는 정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상호관계에 있어서나 탈취 물을 분배하는데 있어서는 정직을 엄수한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으로 또는 일반적 원리로 본다면 그들은 사악하고 부정직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반역생활을 계속하는 한 그들은 그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기를 추천할 만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반역을 끊어버리고 국가에 대한 그들의 귀순을 요청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그들이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여전히 반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고 또한 인간의 자격으로 요구하는 일을 많이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율법과는 관계없이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규칙과 여론에 대한 고려와 이기주의나 세평 기타 여러 가지 현세적인 사악한 동기에 지배되어 행동을 하며 그들의 생명과 마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잊어버린다. 혹시 하나님을 완전히 잊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악하게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며 하나님의 의사를 경멸하고 그 마음은 완강한 반역을 계속하여 복종할 것을 거절한다.
인간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를 계속하고 있는 한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은혜를 받을만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우선 그가 해야 할 일은 그의 반역을 끊어버리고 죄를 회개하며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 구주를 통한 사죄와 화평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까지 그는 이것을 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이 변화될 때까지 그는 계속 죄를 사랑할 것이다.”
스미스는 계속 말하기를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선행은 그 자체에 적극적인 죄가 아니라 어떤 결점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행동을 의롭게 보일 수 있는 유일의 원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적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행동 일체가 국가에 반역하는 죄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해적질을 계속하는 한 그들의 항해, 선박수리, 도구나 장비와 심지어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국가로 봐서는 모두 죄이다. 왜냐하면 그 일체는 그들이 해적생활을 더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수단들로써 그들의 반역적 삶의 일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도 중생하지 못한 생활을 계속하는 한 그의 일체의 행동은 심지어 그의 일상 직업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된다.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고 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하였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성경은 이 같은 단정으로 인간의 무능력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덕행들은 마치 뿌리가 뽑혀 시들어가는 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덕행은 그와 같은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만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덕행들을 소유한 자는 마치 돌짝 밭에 떨어진 씨와 같다. 이 씨는 결실을 약속하고 싹이 트기는 하지만 그 자체에 뿌리가 없으므로 곧 햇볕에 말라버리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 역시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전적 무능력 교리의 귀결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한 사람도 구원하시지 않거나 적은 수효만을 구원하시거나 혹은 전부를 구원하시거나 그의 자유로서 이 자유는 그의 절대 완정성과 어떠한 모순도 일으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므로 누가 영생을 얻고 누가 영생을 얻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고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교리도 전적 무능력의 교리에 수반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로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죄의 값을 받도록 유기(遺棄)하여 내버려두신다. 그러므로 이런 죄인의 절망상태는 죽은 자와 방불하며 마른 뼈같이 무능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그 중에 어떤 자를 택하여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묘지를 지나가시며 여기서 한 사람 저기서 한 사람 무덤에서 나올 것을 명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적이다. 이 사람은 소생시키시고 저 사람은 무덤에 방치해 버리시는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하심이었지 결코 우리가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엡 1:4,5) 핫지(Archibald Alexander Hodge, 1823-1886)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과를 속하는 유일 가능한 방법으로써 범죄자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신 일은 우주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위대한 은혜와 인격적 사랑의 현시(顯示, 나타내 보이심)이다.”
4. 인간의 타락(The Fall of Man)
죄의 비참으로 떨어진 인류의 타락은 성경에 나타난 구속 계획의 근거 동시에 칼빈주의 체계의 근거이다. 오직 칼빈주의 자들만이 인류의 타락교리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전적으로 파멸되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벌과 부패의 상태에 있게 되었고 하나님은 공의대로 그들을 그냥 멸망하도록 버려두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구약에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서술이 창세기 3장에 있고 신약에는 로마서 5:12-21, 고린도전서 15:22, 고린도후서 11:3, 디모데전서 2:13,14 등에 직접 언급되어 있다. 신약은 인류 타락의 역사적 사실보다 윤리적 사실을 더 강조한다. 신약의 저자들은 창세기 3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저들의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현실적인 것과 같이 아담이 현실적이었고 속죄가 현실적인 것 같이 인류의 타락도 현실적이었다. 사도들의 이 입장을 혹 오류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것이 사도들의 입장이 아니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핫지 박사의 논문 ‘인류타락론’으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새로 출생하는 자는 미(未) 발육의 영아(嬰兒)로 태어난다. 그런데 그런 영아에게 직접 공평한 시험을 하신다는 것은 일의 성질상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류의 수호자로서 또한 인류의 최선의 이익을 위하여 다 장성한 아담을 대리자로 하여 또한 그 목적 때문에 아담을 그 혈육의 자손 각 개인의 대표자로 하여 에덴동산이라는 최선의 환경 아래에서 전(全) 인류에게 시험을 부과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더불어 행위언약(行爲言約)을 맺으셨다. 즉 완전한 복종(행위)을 조건으로 한 영원한 생명계약(生命契約)을 아담 및 그가 대표하는 전(全) 인류와 맺으셨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복종은 잠정적(暫定的)인 기간의 특별 시험이었고 그것은 반드시 복종의 결과로서 영원한 생명(生命)의 보상을 받든지 아니면 불순종의 결과로서 사망(死亡)에 이르는 것이었다. 영원한 생명의 보상은 아담이 창조 시에 받았던 것보다 더 큰 것을 포함하는 은혜였고 그것이 허용되었더라면 아담을 대표로 하는 전(全) 인류는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거룩함과 행복의 상태로 올라갔을 것이다.
순종하지 않을 경우 벌로써 경고된 것은 사망이었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된 사망의 성질은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내리신 것에 포함된 모든 비참한 결과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이 사망에는 인간의 생명이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 교통의 즉각적인 철회가 포함되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유기(遺棄, 내어버림), 저주, 죄와 본성의 부패, 그 결과로 생기는 실제적 범죄, 인생의 비참함, 육체의 사멸, 지옥의 고통 등이 유래된 것이다.”
아담의 죄의 결과들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사망’(死亡)이라는 말에 다 포함이 되어있다. 바울은 이것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요약하여 말했다. 아담에게 내려진 사망의 모든 의의(意義)는 그 후부터 그것이 인간에게 가해 온 전반적인 악의 결과를 생각해 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영적 사망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分離)이며 육체적 사망은 그것이 최초의 결과 혹은 보다 덜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담은 타락 후에도 육체적으로 930년 동안 더 살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타락된 그 순간 즉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육체적 사망은 마치 물에서 잡힌 고기가 죽는 것이나 땅에서 뽑힌 식물이 죽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담이 어떻게 타락하였는가에 대하여 매우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 아담은 사단에게 직접 유혹은 받은 것이 아니다. 하와는 사단에게 직접 유혹되어 타락하였으나 아담은 사단의 유혹에 빠져 타락한 것이 아님을 성경이 증명한다.(딤전 2:14) 그는 사단의 궤계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하와의 말을 듣고 심사숙고해 본 후 스스로 결정하여 죄를 범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의식했을 뿐 아니라 그 행위에 따르는 엄숙한 결과까지도 알면서 아내의 불순종한 행위를 같이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인간의 죄의 흉악성은 이처럼 심사숙고한 후 스스로 죄를 짓기로 결정한다는 점에 있다. 만일 아담이 자의로 범죄 한 것이 아니라 악마의 공격을 받고 그 압도적인 세력에 못 견디어 범죄 한 것이라면 우리는 아담의 타락에 대해서 용서의 여지가 다소라도 있는지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담은 그 행동이 갖고 있는 전율할만한 성질을 명백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피조물인 자기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그의 타락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그 행동은 실제에 있어서 임의적이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도전적인 반역이므로 이로써 그는 공공연하게 하나님 대신 악마에게 충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무서운 인간 타락의 사실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오히려 이 세계에 나타난 그대로의 인간성을 보면 볼수록 인간의 원죄가 더 분명하게 믿어진다. 또한 인간의 행위를 보면 볼수록 원죄의 교리가 더 명백해 진다. 이 세계를 잘 살펴보면 살인, 강도, 술 취함, 전쟁 등 각양각색의 죄악들로 가득 차 있다. 죄를 밥 먹듯 저지르는 자들의 천태만상의 사악한 모습은 인간의 타락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현대의 인류 대부분이 과거의 모든 시대에서와 같이 절망적으로 하나님께 잘못하고 있으며 이교(異敎)의 암흑 속에서 살다가 그대로 죽도록 방치되어 있다. 또한 오늘날 현대주의와 여러 종교의 불신앙들이 교회 안에서까지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며 명색이 기독교 출판물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불신앙으로 물들어 있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천시하여 영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싫어하는 오늘의 현상을 보면 인간은 지금 그의 시조 아담과 같이 하나님과 교제를 원치 않으며 창조주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하나님을 앞을 떠나 도망하고 있다. 확실히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사곡(邪曲, 사악하고 바르지 못함)하다. 매일 보도되는 무수한 사거들은 그 어떠한 문명국에 있어서도 인간은 악하며 성결치 못하게 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유일하고 타당한 설명은 시조 아담이 받았던 죽음의 형벌이 전(全) 인류 위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밖에 없다.
우리는 이 같이 타락한 멸망할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다. 만일 이 같은 세상을 되어가는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영원토록 부패가 가속화 되어 불법과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악취가 나는 세계가 될 것이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의 의지는 오직 죄와 어리석은 행동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물론 하나님은 인류가 자연히 부패할 대로 부패하도록 방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를 억제하는 감화를 끼치어 사람을 감동시키심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고 정직하게 하며 자선(慈善)을 행하게 하고 타인의 행복을 고려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감화를 끼치시지 않는다면 악인들은 무법의 극에 달하여 이 세상은 여지없이 부패되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전혀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5. 대표의 원리(The Representative Principle)
인간이 어떻게 대표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은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국민은 그들의 대표자 안에서 혹은 대표자에 의해 의회에서 행동한다. 만일 한 국가가 어진 임금이나 대통령이 다스리면 그 국민 전체가 선한 결과를 받게 된다. 그러나 만일 악한 임금이나 대통령이며 국민 전체가 그 결과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는 그 자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표자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어질고 덕이 있으며 근면하면 자녀들은 복을 받는다. 그러나 부모가 게으르고 부덕하면 그 자녀들 역시 그 영향을 받는다. 개개인의 안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인의 행동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이처럼 대표의 원리는 인간생활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담이 전(全) 인류의 대표자라는 성경의 이 교리는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에서 목격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를 응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핫지 박사는 이 대표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적절히 논하고 있다.
“이 대표의 원리는 성경 전체에 가득 차 있다. 아담의 죄악이 그의 후손에게까지 전가(轉嫁) 된다는 교리는 고립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의 경륜을 특징짓는 전반적인 원리의 한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는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는 자라고 선언하셨다.(출 34:6,7) 예를 들면 가나안에게 선고된 저주가 그의 후손에게까지 미쳤다. 에서가 판 장자의 기업은 그의 후손을 하나님의 백성의 성약(聖約)에서 배제시켰다.
모압과 암몬 족속들은 저들의 선조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에게 대항하였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총회로부터 영원히 제외 되었다. 다단과 아비람의 경우도 아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처자와 후손들이 선친의 죄 때문에 멸망하였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그의 집의 죄는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을 향하여는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않으리니 이는 네가 나를 멸시하고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게하시의 불손종에 대하여는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여로보암의 죄와 그 세대 사람들의 죄는 영구적으로 열 지파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요구하면서 그들의 입으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자초한 저주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오늘날까지 괴롭히고 있다. 이처럼 대표의 원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의 후손들까지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언약의 모든 규례들에 의해 얽혀있다. 저들은 언약의 약속과 위험을 분담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형벌이 직접 개인적으로는 범죄에 참여하지 않은 자에게까지 계속 내렸다. 국민의 죄악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 즉 기근, 역병, 전쟁을 아이들도 어른들과 같이 받아 고생했다. 이리하여 오늘까지 유대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그리스도를 배척한 선조들의 죄 값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전(全) 계획도 같은 대표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그 백성의 대표자이시다. 이 기초 위에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轉嫁)되고 그의 의(義)는 저들에게 귀속된다. 성경을 믿는 자는 성경 어디서나 부모가 자손을 대표함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경륜이 태초부터 자손은 그 선조들의 죄책을 진다는 원리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 불신자들이 성경의 신적(神的) 기원을 거부하기 위해 문제 삼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대표의 원리이다. 그러나 불신앙에는 어떤 진리도 속수무책이다.
역사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 교리로 가득 차 있다. 중죄인의 형벌은 그의 가족까지 수치와 비참 속에 빠지게 한다. 방탕 자와 폭음 자는 그 가족들에게 빈곤과 불행을 초래한다. 지상에 현존한 민족은 모두 선조의 성격이나 행위에 의해 화(禍)나 복(福)을 받게 된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 불을 보는 것과 같이 확실함)한 사실이다.
죄 값의 전가(轉嫁)와 대신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이 구약의 모든 속죄제물과 신약의 대속의 근저(根柢)에 있다. 죄를 담당한다는 성경의 의미는 죄벌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희생은 제물을 드리는 자의 죄를 담당했다. 그러므로 제물이 될 동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하여 죄의 전가를 나타냈다. 그 동물의 피 흘림이 동물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드린 자의 죄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한층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동물은 필히 무흠(無欠)한 것이어야만 했다.
이것은 모두 상징(象徵)이요 예표(豫表)이다. 이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형벌을 받으셨다. 이것은 모두 어떤 사람의 죄가 충분하고 정당한 근거만 있다면 타인에게 옮겨질 수 있다는 근거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롬 5:18)” 만일 이 성구들이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성구들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아담은 단순히 전 인류의 시조(始祖)일 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대표자(代表者)였다. 아담과 전 인류와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 가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그의 죄가 전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義)가 그를 믿는 자에게 귀속됨과 같이 아담의 죄(罪)는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입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지 못한 것 같이 아담의 후예도 개인적으로 아담의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다.
수난과 사망은 죄의 결과로 선고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죽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까닭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영아들이 병으로 앓거나 죽는 일이 있는 것을 많이 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셔서 무죄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든지 아니면 이 영아들 역시 어떤 면으로든 유죄한 피조물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영아가 유죄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범죄 했을까? 이에 대한 설명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 했다는 대답 밖에 없다.(고전 15:22, 롬 5:12-18) 그리고 대표 원리에 의하지 않고는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담의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담의 죄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핫지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아담의 죄를 그 후손들에게 담당케 하셨으니 이는 아담 한 사람 안에서 만인이 범죄 하게 된 공동 담보(擔保)의 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들의 도덕적 영적 생명을 지지하고 지도할 성령의 감화를 모두 박탈당하여 선천적으로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성벽(性癖, 성질과 버릇)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이 범죄성(犯罪性) 자체가 벌을 받기에 마땅하다. 인간의 성질은 타락 후에도 이성, 양심, 자유행동력 등 고유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어 여전히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수 없으며 자기의 사악한 성질과 생래적(生來的) 경향을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의욕이나 가능성도 없고 또 이와 같은 변화를 위하여 성령과 협력할 수도 없다.”
같은 의미로 미국 남장로교회 대니(Robert Lewis Dabney, 1820-1898)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소시니안파(Socinians, 원죄 부인,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 부인, 교회의 권위와 지옥 부인, 예정론을 부인, 인간의 자유의지 강조, 행위 구원과 만민구원 주장)와 펠라기안파(Pelagians, 원죄부인, 자유의지 강조, 도덕적 구원 주장) 이외의 어느 파에나 죄가 전가된다는 교의는 필요하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자요 정죄 받은 자이다. 에베소서 2:1-5과 기타 여러 곳을 상고 해 보라. 인간은 분명히 생애의 시초부터 저주 아래 있다. 영아들의 생래적 패역성과 그들도 또한 성인들과 똑같이 저주의 재앙과 사망을 받음을 보라.
그러면 인간은 아담 안에서 시험을 받아 타락하였는가? 아니면 아무 시험도 받은 일이 없이 정죄 되었는가? 인간이 저주 아래 있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인가? 혹은 아무 죄도 없이 저주 아래 있는가? 그 어느 것이겠는가? 하나님을 성약(聖約)의 머리인 아담에게 가장 공평하고도 호의적인 시험을 부과하신 분으로 믿는 교리와 아무 시험도 없이 더구나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을 정죄하신 자로 믿는 교리 중 어느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는 교리인지 판단해 보라.”
6. 하나님의 인자와 준엄(The Goodness and Severity of God)
인간의 타락과 그 범위를 개관해 볼 때 우리는 치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감히 자기의 덕성을 주장할 수 없으며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있을 뿐이다. 알미니안(Arminian)이 말하는 ‘은혜로 회복된 능력’이라는 것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이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인간의 본성적 상태에 대하여 알미니안 사상체계가 가르치는 것처럼 인간에 대해 호의적이요 낙천적 견해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인간의 무서운 부패성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칼빈주의 체계는 인간의 보다 심화된 타락과 구속적 은혜의 보다 영광스런 현현을 가르친다. 이 심각한 부패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팔에 내어던지게 되며 오직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靈)과 육(肉)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비(사랑)와 함께 하나님의 준엄하심(공의)도 보아야만 한다. 인생은 아무리 불유쾌할지라도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직면해야만 하는 가혹한 사실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 전체를 통해 특히 그리스도의 말씀 중에 악한 자의 최후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만도 많이 있다.(마 5:29,30, 7:19, 10:28, 11:21-24, 13:30,41,42,49,50, 18:8,9,34, 21:41, 24:51, 25:12,30,41, 26: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처럼 강조하신 교리를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간과할 수는 없다. 오는 세상에서는 악한 자들이 무저갱(無低坑)에 빠져 이를 갈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할 것이니 영벌(永罰)은 끝없는 죄에 대한 형벌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벌하심은 의로운 자에게 상(賞)을 주심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기독교에 대한 현대의 편리주의는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반복 강조하신 이 교리를 목사들이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오는 전쟁, 기근, 홍수, 재해, 질병, 고난, 사망 등에서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본다. 이 모든 일이 지극히 완전하신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라.”
(롬 11:12) 그러나 자연주의는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성품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인자(사랑)는 과장하고 엄위(공의)는 무시한다. 칼빈주의만이 양자를 공정하게 다룬 체계이다.
칼빈주의만이 자기 백성을 구속할 값으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신 사랑을 바로 진술하며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과 유죄한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심연(深淵)에 관해 진술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말씀은 진리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히 12:29)도 진리이다. 어떤 사상 체계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이 두 가지 성품 중에 어느 하나를 제외하거나 무시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우리 귀에 참인 것 같이 들릴지라도 기형적인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전적무능력 교리는 가공할 만큼 엄숙하고 냉혹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 우리의 기호(嗜好)에 맞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마음대로 발전시킬 수는 없다. 우리는 성경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인류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대단히 불쾌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좀 더 자연인의 심리에 맞는 교리 체계를 작성해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에 대해 부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한 자로 설명하는 이론을 즐겨 청종한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고 자신의 영혼의 주재(主宰)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죄인의 파멸된 절망의 상태가 끊임없이 그의 앞에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기 전에는 마땅히 도움을 청해야 할 곳에서 도움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생은 가련한 인생이다. 참으로 육적(肉的)이고 죄 아래 팔린 자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설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추구할 의향마저도 없고 더욱 두렵기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대해 반역을 하며 그의 거룩하심을 모독하는 자이다.
이제가지 인간의 전적무능력 교리 혹은 원죄의 교리가 예정론의 근본적 교리임을 보여주기 위해 상당히 길게 논하였다. 이 교리만 보아서는 인간에게는 암흑 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하나님의 영광이 이것을 능가한다. 한 진리가 적나라하게 바로 보이지 않으면 다른 한 진리도 바로 보여 질 수 없다. 인간의 전적무능력(원죄)과 하나님의 절대 은총의 교리가 바로 이러한 관계를 갖고 있다.
7. 성경의 증거(Scripture Proof)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 하게 하심이라.(고후 1:9)
-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 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 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 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 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29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하였느니라.(행 13:41)
-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잠 30:12)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3)
-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
-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Ⅱ.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1. 본 교리의 서술(Statement of The Doctrine)
선택(選擇) 교리는 총괄적인 예정교리의 특수한 적용 즉 죄인 구원의 문제에 적용된 예정(豫定)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주요 관심은 죄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므로 선택교리는 자연히 성경의 교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본 교리는 예정교리 및 다른 교리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선택이란 절대자이시며 도덕적 제1위이신 하나님이 행위이므로 그것은 곧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영원불변(永遠不變)하고도 유효한 결정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선택권은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부단히 강조되어 온 것이다.
개혁신앙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영생할 자와 멸망할 자를 구별하여 택정하신 영원한 작정(作定)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작정은 아담 안에서 구원 얻을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나 그 기회를 상실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다. 타락의 결과 인간들은 유죄하고 부패 되었으며 저들의 동기는 사곡(邪曲)해져서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 자비를 요청할 권리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불순종의 죄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택함을 받은 자들은 이 죄벌에서 구원되어 행복과 성결(聖潔)의 자리로 이끌림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본래의 멸망 상태 그대로 유기(遺棄)되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부당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선택 교리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되고 어떤 자들은 영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 이렇게 예정된 천사들과 사람들은 정확 불변적으로 계획되고 그 수효는 너무나 확정적이고 결정적이어서 조금도 가감할 수 없다.
-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의 영원불변하신 목적과 오묘하신 계획과 기쁘신 뜻대로 영생하기로 예정된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으니 이 선택은 피조자 속에 예견되는 신앙 또는 선행 또는 믿음의 행위의 견인(堅忍) 기타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조건으로 하거나 이유로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일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찬송을 기리기 위함이다.
- 하나님께서 택함을 입은 자에게 영광을 주신 것 같이 그는 영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대로 그 영광을 받게 할 방법까지 예정하셨다. 이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다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나니 때가 이르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유효(有效)하게 부르심을 받아 칭의(稱義)를 얻고 양자(養子)가 되어 성화(聖化)되며 또한 그의 능력에 따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거나 부르심을 입거나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양자가 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을 얻을 자가 없다.
-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그의 뜻에 따라 자비를 베푸시기도 하고 혹은 베풀지 않기도 하심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그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 나머지 사들은 간과(看過)하시어 그들의 죄대로 치욕과 진노를 당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양케 하신다.
이 선택교리를 명백히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이 교리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우리의 신관, 인생관, 세계관, 구속관 등을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칼빈은 선택교리의 중요성을 이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아무 구별 없이 아무에게나 구원의 소망을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이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 구원을 저 사람에게는 주신다고 하는 대비(對比)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이 영원 선택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의 샘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 원리에 대한 무지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고 참된 경외를 감소시킨다.”
칼빈은 이 교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에 심히 복잡한 의구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들은 전(全) 인류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기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받기로 예정됐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 같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영적 현상의 실제적 경험에다 이 선택교리를 끊임없이 적용하였다.
2. 성경의 증거(Proof from Scripture)
하나님의 선택교리에 대해 우리가 자문해 봐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과연 성격이 가르치는 교리인가?”
에베소서 1:4,5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로마서 8:29,30에서는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구속의 고리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이 말씀에서 ‘미리 아신 자’, ‘미리 정하신 자’, ‘부르신 자’, ‘의롭다 하신 자’, ‘영화롭게 하신 자’는 모두 동일한 사람이다. 예지(豫知) 된 자(미리 아신 자)는 예정(豫定) 된 자(미리 정하신 자)며, 부르심을 받은 자며, 칭의 된 자며, 영화된 자이다. 이 구속 역사의 각 단계는 상호 수반(隨班)한다.
바울이 이 구절을 과거시상으로 표시한 까닭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목적이 수립될 때 원리상 그것은 벌써 실행된 것으로서 그 성취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87-1921) 박사는 이 구절에 대해 “‘예지 된 자’, ‘예정된 자’, ‘부름을 받은 자’, ‘칭의 된 자’, ‘영화된 자’ 이 다섯 개의 금 고리(These five golden link)는 상호 결합하여 한 개의 완전한 연쇄를 이룬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의 은혜로 한 단계씩 인도하시어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으로써 종말에는 반드시 영광을 받게 만드신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 모든 것을 기필코 이루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지하신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이 개인의 미덕과는 관계없이 이미 과거에 있는 일로서 전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선택교리가 참되지 않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이 성구는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확신 있게 도전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마엘을 물리치신 일 또한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물리치신 일이 그들의 출생 전으로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의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성구에서 명백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얻는 일이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시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토기장이가 자기 원대로 진흙을 빚어 소용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유사(類似)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 18:4) 예정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 된 계시(啓示)로서 선지자와 사도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쓴 것이므로 오류(誤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 따라서 부인할 수 없는 성경의 증거 위에서 선택 혹은 예정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전 계획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선택교리에 대해 여러 가지를 설명하지 않은 채 놔두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극히 명료하게 기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6)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선택이 제1차적이고 인간의 선택은 제2차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신 결과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구원이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를 선용 혹은 남용하는 인간의 선택 여하에 달려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순서를 바꾸어 인간의 선택을 제1차적인 것이요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동여부를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곳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의지의 결정은 하나님의 주권이지 결코 피조물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는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라고 한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미친 것이 아니고 사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시 65:4) 알미니안들은 하나님의 이 선택권을 하나님의 수중에서 빼앗아 인간의 수중으로 넘겨주었다. 이 같이 인간의 선택을 하나님의 선택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성경과 다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한 최고의 암흑시대에도 다른 모든 시대와 마찬가지로 ‘남은 백성’을 보존하신 것은 이 선택 원리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여기서 칠천인은 그들 스스로가 견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은 백성’으로 보존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선민(選民)들을 위해 이렇게 역사의 전 과정을 통치하신다.(막 13:20)
선민(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그러므로 세계 역사상 성도는 소수였지만 그들을 통해 대중이 복을 받았다.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으며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었다면 그 성을 구원받을 뻔하였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물론 그들이 복음을 듣고 은사를 받는 기회까지 포함된다. 왜냐하면 이런 방편들을 통하지 않고는 선택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은 영생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달성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선택 이외에 민족적 선택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시대마다 어떤 민족을 택하여 다른 민족보다 훨씬 큰 영적 은혜는 물론 세상의 복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의 이런 선택으로는 유대민족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이다.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유대인이 선민이라는 것을 거듭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 147:20)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선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들보다 유대민족을 택하게 한 어떤 공적이나 품격들이 유대인 자신에게는 전혀 없었다는 것도 명백히 선포하셨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니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5)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의 영예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의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자신에게는 이 선택을 받을만한 하등의 이유나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 지상의 다른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과 대조해 볼 때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할 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전 16:1-15)는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갔으니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복음을 받을 특권을 세계의 한 지역에는 주시고 다른 지역에는 주시지 않으셨다. 만일 바울이 아시아로 갔었다면 아시아에 있는 티베트가 구미제국보다 먼저 문명화 되었을 것이다. 복음이 구미에 먼저 확장되고 아시아는 흑암 가운데 방임되었던 사실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왜 아브라함의 자손은 선택되고 애굽과 앗시리아 민족은 선택되지 않았는가? 또한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전혀 무지(無知)한 상태에 있었던 구라파와 북아메리카가 어떻게 해서 가장 중요한 복음의 특권을 소유하여 타국인들에게 선교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아무 이유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단지 하나님의 크신 뜻에 의한 것일 뿐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택의 제3형은 은혜의 외부적 수단에 대한 선택이다. 즉 복음을 듣고 읽는 것과 또는 하나님의 백성과 사귀며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건설되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되는 선택이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자기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 것이며 또한 백인종으로 태어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족으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 선택할 권리가 없다. 한 아이는 건강하고 부귀와 명예의 혜택 받은 땅에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복음의 빛에 따라오는 모든 복 가운데 성장하고 다른 한 아이는 비천하고 방탕한 부모 밑에 태어나서 기독교의 형향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성장한다.
이 모든 일들은 주권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혜택을 받고 태어난 아이 아이라고 해서 그 아이가 자기의 개인적 공덕(功德) 때문이라고 아무도 주장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가축이나 다른 짐승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지 않은 것도 그의 주권적 행위이다.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들의 불완전하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또한 비성경적 견해인 보편적 은혜와 보편적 구속의 교리를 가지고 이상의 난제를 조정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대게 그들 자신들도 자기들의 설명 방식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침내 이 문제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경륜 속으로만 미루어져야 할 신비들이라고 인정하곤 하였다.
선택의 제4형은 천성(天性)에 관한 것입니다. 정치가, 의사, 변호사, 농부, 음악가 등 특별한 재능(才能)과 개인적인 아름다움(美), 지능(知能), 성향(性向)에 관한 것들이다. 이런 4가지 형태의 선택은 그 원리에 있어서 인간 자신의 의욕을 불문하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여하신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파는 제1형(개인)의 선택은 부인하고 제2형(국가), 제3형(환경), 제4형(천성)의 선택은 인정하는데 이는 논리상 모순이며 불가능하다. 이 네 가지 형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하나님의 주권이며 무조건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감사할 것이요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 해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을 환경에 처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대 신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의 활동들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의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조건들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적어도 복음을 들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의 운명은 십중팔구 멸망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커닝햄(William Cunningham, 1805-1861)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외부적 특권 즉 은혜의 방편을 받아 누리는 것과 신앙 및 구원 사이에는 하나님의 세계 통치 속에 세워져 있는 불변의 관계가 있다. 성경의 전체적 대의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행사의 결과로 구속적 은혜를 받을만한 방편을 얻지 못하면 동시에 믿어 구원을 얻게 되는 기회와 능력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무덤에서 나온 유령이나 되는 것처럼 그 말 자체부터 부인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만도 ‘선택된 자’ ‘선택’ ‘선택 한다’는 말씀이 47회나 발견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선택’이라는 말은 인정하나 하나님의 선택의 사실을 달리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신앙과 순종을 예지(豫知)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을 예정(豫定)하셨다는 ‘조건적 선택’을 믿는다고 한다. 이런 견해는 선택이란 말씀의 의미를 무효화시켜 버린다. 즉 선택을 아무개는 미래의 어느 때에 이러이러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단순한 미래의 인지(認知) 혹은 예언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신앙이나 순종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스운 말로 하나님이 인간 스스로 자신들을 선택한 자들만을 선택하기로 고심하신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알미니안주의 체계에서는 선택은 단순히 말 또는 명칭일 뿐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 문제를 한층 더 애매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들의 주장처럼 어떤 사실이 미래의 어느 때에 존재하리라는 것과 같은 미래에 대한 단순한 인지(認知)가 선택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알미니안 중에는 선택을 받을 수도 있고 선택을 받지 않을 수도 있으며 선택을 받았다가도 유기될 수 있다는 그들의 교리를 철저하게 발전시켜서 이 선택의 결정 시간과 성도의 죽음을 동일시함으로써 마치 신자의 구원이 죽을 때에야 비로소 확정되는 것처럼 논한다.
선택은 천사들과도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천사들은 거룩하고 행복하며 어떤 천사들은 악한 천사들로서 비참한 자리에 있다. 인간에 관한 예정을 믿어야 할 이유들이 역시 천사들에 관한 예정을 믿어야 할 이유들이 된다. 이 견해는 성경이 확증해 주는데 선택된 천사들(딤전 5:21) 및 거룩한 천사들(막 8:38)이 악한 천사들 및 악마들과 대조되어 있다.
“하나님이 범죄 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할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라는 말씀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마 25:41)이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6),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계 12:7)라는 말씀도 볼 수 있다.
댑니(Robert Lewis Dabney, 1820-1898)는 “천사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어 거룩한 천사와 악한 천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자들과 사단의 사자들로 나뉜다. 거룩한 천사들은 거룩하고 행복하게 창조되어 천계에 있게 되었으며 범죄 함으로 복리(福利)를 잃은 천사들은 천계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복리를 유지한 선한 천사들은 벌써 그렇게 예정된 것으로서 저들의 행복과 거룩함은 영원히 보장된다.”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 즉 누구는 긍휼히 여기시고 누구는 그냥 내버려두시는 이유에 대하여 구태여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겠느냐?”라는 반대론자의 질문에 대하여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19-21)라고 대답함으로써 만사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해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다른 진흙’이라고 말하지 않고 ‘같은 진흙’이라고 말한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도공(陶工)으로서 같은 진흙을 가지고 하나는 귀한 그릇으로 다른 하나는 천한 그릇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 보좌로부터 끌어내려 인간의 이성(理性) 앞에 세우고 심문하는 따위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천사들도 떨면서 알아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 것 이외에는 달리 우리가 설명할 수 없다.
(주) ‘성경적 증거’를 위한 더 많은 다음의 성경 구절들을 참고하라.(살후 2:13, 마 24:24, 마 24:31, 막 13:20, 살전 1:4, 롬 11:7, 딤저 5:21, 롬 8:33, 롬 11:5, 딤후 2:10, 딛 1:1, 벧전 1:2, 5:13, 2:9, 살전 5:9, 행 13:48,요 17:9, 요 6:37,65, 요 13:18, 15:16, 시 105:5,6, 롬 9:23)
3. 이성(理性)의 증거(Proof from Reason)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나 ‘원죄의 교리’가 성경의 진리라면 논리적으로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불가피하다. 그리고 만일 성경과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고하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유죄와 타락의 상태에 있어서 자력구원이 전혀 불가능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만한 권리조차 없는데 그래도 그중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분명하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수 없이 많은 자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신 것과 은혜 언약에 있어 인류의 머리요 대표자로서 활동하여 그들이 범한 죄를 도말하시고 그들의 죄벌을 담당하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해 주신 그리스도를 주신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 제정(制定)의 동기를 부단히 하나님의 사랑(은혜)에 돌림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교리 제정(制定)의 배후인 하나님의 사랑을 앙망(仰望)하게 한다. 인간은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유독 칼빈주의 교리에만 충분하고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은 개인의 선택을 통해 가장 명료하게 표현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고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성경기자들은 선택은 오직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은혜)에만 근거한 절대적으로 주권적인 선택으로써 인간과 천사들 앞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자비를 나타내시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하였다.
통치자요 심판주로서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대로 죄인들의 세상을 다루실 자유가 있다. 그가 어떤 자는 용서하시고 어떤 자는 정죄하신다 해도 그의 공의(公義)에 위배되지 않으며 혹자는 구원하시고 혹자는 유기하신다 해도 그의 공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원래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그가 긍휼히 여기실 자에게 긍휼을 베풀 자유가 있다.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구원 얻는가 하는 이유는 오직 만사를 자의(自意)대로 명하여 정하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기업을 받을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은 구원 받은 각 개인에게 그는 영원 전부터 특별히 선택되었으며 영원 전부터 그를 위하여 계획된 그 고상한 운명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보증을 주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영원 전부터의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심장’(心臟)이라고도 불린다. 이 교리는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기로 작정하는 사람의 스스로의 복종과 믿음의 행위를 강조한다. 칼빈주의 체계에 있어서는 천국의 기업을 얻을 자와 하나님의 부요(富饒)한 영광에 참여할 자를 선택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 체계에서는 그것을 결정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인간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무지가 원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질문할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속한 일이다. 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하나님이 우리로 이렇게 선택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히 찬양할만한 경이(驚異)로운 일일 뿐이다. 확실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호의적인 주의를 끌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만한 자질도 공로도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이다.(엡 2:1-3)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두려워하고 탄복하여 바울과 함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부르짖을 것 밖에 없다. 경이 중의 경이는 무한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유죄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기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속에 우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죄의 보응인 형벌과 함께 죄가 얼마나 극악한 가를 생각해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극렬한 증오와 함께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토록 거룩한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 한 명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 일이야말로 경이로운 일이다. 더구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영생 얻도록 선택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고자 하는 소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의 완전한 공의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하나님의 공의에 모순되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 견해는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무리하게 행동하시는 분으로 만든다고 하는 반대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한 반대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억지에서 나오는 반대이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간과하시는 가에 대한 이유는 계시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신다.”(단 4:35) 어떤 자들은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 자기의 아들들로 예정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은 이유 없이 이 사람은 택하시고 저 사람은 간과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비록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은 택하고 저 사람은 버리시는 일에 대해 그는 최선의 이유를 갖고 계심을 우리는 믿는다.
4. 신앙과 선행은 선택의 증거 Faith & Good Works are The Fruits & Proof, not The Basis of Election
신앙과 선행은 선택의 근거가 아니고 그 결과이며 증거이다. 총괄적인 예정이든 구원 받을 자의 예정이든 그것은 피조자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예견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개혁신앙의 이 같은 교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상정(想定)적 조건 아래서 발생할지도 모를 또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사건이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시기 때문에 혹은 그 사건이 어떤 환경 아래서 발생될 것임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제정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서 하는 선행은 참으로 산 신앙의 증거요 열매이다. 이 선행으로 신자들은 그들의 감사를 표명하며, 신앙을 견고하게 하며, 형제들의 지덕을 함양하며, 복음의 고백을 장식하며, 원수의 입을 막고 또한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될 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송케 하나니 이는 그들이 거룩한데 이르기까지 과실을 맺으며 영원한 생명을 이루게 하려함이다.
신자들의 선행 능력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신자들이 선행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 이외에 그들 중에서 역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의욕 하게 하시고 행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실제적 감화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성령의 특별한 활동이 있기까지는 어떠한 선행도 행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 태만해져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지런히 분발시켜야 한다.”(III:2, XVI:2,3)
이렇다면 예견된 신앙과 선행이 결코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도리어 선택의 결과 또는 증거임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그 사람이 택함을 받고 중생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선행을 선택의 근거로 간주하는 것은 우리를 다시 행위언약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영원’ 속에 보다 오히려 ‘시간’ 속에 속박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예정(豫定)이 아니고 후정(後定)이며 신앙과 성결은 선택의 전제가 아니고 그 열매라고 하는 성경의 교훈을 뒤집어버리는 것이다.(엡 1:4, 요 15:16, 딛 3:5) 우리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택함을 받을만한 미덕이 있었을 것이라는 어떠한 생각도 완전히 배격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창세 전’이라는 말은 어떤 일이 영원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부르신 이로 말미암는다.”고 한 바울의 말이 “선택은 미래의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라고 알미니안들은 주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바울의 증거와 분명히 모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정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예지(豫知)에 근거하고 있다는 설은 하나님의 택정의 목적이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는 바울의 증거에 의해 여지없이 깨진다.(엡 1:4) 바울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으며, 아무 육체라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라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이 행하는 어떠한 선한 일보다 앞서 행시는 것이며 결코 인간의 어떤 선행(先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본 교리의 진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있어 하나님이 그가 구원코자 하시는 긍휼의 대상이 갖고 있는 미덕이나 공로에 좌우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죄인이 구원 얻는 것은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확고부동한 증거이고 선택의 배후에는 예견된 성격이나 행위 또는 환경(이것들은 모두 선택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이 잠재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주장을 반복해서 여러 모양의 관계 속에서 배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총괄적인 예정(豫定)은 예지(豫知)를 근거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예지될 수 있는 것은 이미 확정된 것이요, 예정된 것만이 확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능하시고 절대주권자이신 우주의 대주재(大主宰) 하나님께서 우연히 발생할지도 모를 사건에 대한 예지를 근거로 해서 그 행동을 결정하시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지(豫知)는 항상 그의 목적에 종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은 오직 미리 결정하셨기 때문에 예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장래 일에 관한 그의 의지를 복사한데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 아래 운행되는 세계의 과정은 하나님의 전 포괄적 계획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는 그것이 전체적으로 세계에 관해서든 개인적 생활의 작은 일에 관해서든 그 일체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에 근거한 것이다.(렘 1:5, 시 139:14-16, 욥 23:13,14, 28:26,27, 암 3:7)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선택 심지어 총괄적 예정까지도 예지에 근거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구절로써 자주 지적되는 성경 구절이 있다. 로마서 8:29,30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豫知))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豫定)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안다’는 말은 원어적으로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인지’(認知)한다는 말 이상의 의미로 사용되는 때가 있다. 즉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대인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고 말씀하셨으며, 바울은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고 하였다. 예수님도 자기의 양들을 ‘안다’고 선언하셨고(요 10:14,27), 사악한 자들을 향해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마 7:23)고 선언하셨다. 시편 제1편에서는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아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하였다.
이 모든 성구에는 심리적 인지(認知)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단순한 심리적 인지라면 하나님은 악인도 의인과 같은 모양으로 아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앎’의 대상으로 택함 받은 자만을 포함하는 ‘앎’으로서 사랑, 총애, 허가와 관련된 의미뿐 아니라 로마서 8:29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될 것으로 ‘미리 정해졌다’(예정, 豫定)는 의미에서 예지(豫知)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의미는 로마서 11:2-5에서 한층 더 명료하게 표시되는데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고 한 엘리야 시대와 비교하면서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부언했다. 그러므로 2절의 ‘미리 아신 자’와 5절의 ‘은혜로 택하신 자’는 같은 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목적의 대상이 될 것으로 미리 지정되었다는 의미에서 예지(豫知))된 것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로마서 8:29에는 그들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예지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서 선택의 은혜를 베푸실 개인으로서 예지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만일 바울이 여기서 ‘미리 안다’는 말을 사용할 때 선택이 단순한 예지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선택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여러 곳에서 보여준 바울의 진술과 모순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알미니안들의 견해는 하나님의 선택을 하나님의 수중에서 탈취하여 인간의 수중에 쥐어준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타락한 인간의 불확실한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일시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영원한 활동의 원인으로 삼는 것이다. 또한 이 해석은 하나님께서 주권적 피조 자를 창조하시고는 하나님의 의지와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이 주권적 피조 자에게 의존한다는 모순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치 자손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고 애쓰지만 그 자손들이 항상 악한 성정으로 불복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마는 인품 좋은 노인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을 전시대를 통해 실패를 거듭함으로 수많은 사람을 천국보다는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계획을 전개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처럼 당치 않은 말로 인도하는 교리는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것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 이와 달리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절대 완전하시며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자비와 공의를 베푸시고 인간만사를 실제로 통치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경과 우리 신앙생활의 경험은 우리에게 구원의 방편인 신앙과 회개가 모두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여준다. 에베소서 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였고 아가야에게 있는 성도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었다.”(행 18:27)고 하였다. 이처럼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의 시작과 구원을 추구하는 의향까지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의 역사이다.
바울은 여러 번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즉 신앙이 방법적 이유가 됨)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지만 한번도 ‘믿음 때문에’(즉 신앙이 공로적 이유가 됨) 구원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구원 얻은 자들이 그들의 선행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선행 때문에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선택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셨지 그들이 믿을 것을 예지(豫知)하셨기 때문이 아니라.”라고 말하였다.
회개(悔改)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고”(행 11:18)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다.”(행 5:31)고 했다. 바울은 회개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는 자들을 책망하였고(롬 2:4), 예레미야는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렘 31:18,19)라고 부르짖었다. 세례 요한이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일이 무엇인가?(눅 1: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마 13:11)고 말씀하셨다.
이상의 성경 구절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미리 보시기 전에 그의 주권적 행위로써 회개할 마음도 주시고 성령도 주시며 비밀한 것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이 예견(豫見)된 믿음에 근거한다는 말은 우리가 믿기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반대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신 것”(딛 3:5)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가 원하고 행하는 것을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시기 때문이다.(빌 2:12,13) 이 같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발전시키고 성취하기 위하여 싸울 수 있고 또한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한다.”(시 110:3)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회심(回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적 은혜이다.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힘이 전혀 없고 그가 영적으로 어떠한 선행을 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9가지는 구원을 얻을만한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 받은 자의 열매(성령의)라고 가르치고 있다.(갈 5:22,23) 바울 자신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이라고 예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행케 하기 위해 택함을 받았다.(행 22:14,15)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는 택함 받을만한 자를 찾는데 있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택함 받을만한 자를 만드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성질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줄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두드리고 찾게 만든다.”고 하였다.
루터가 “홀로 하나님만이 그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공로와 보상을 지어주신다.”고 말한 것도 이 진리를 말한 것이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했다.(요일 4:19) 이 구절들은 모두가 믿음과 선행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열매들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선(善)하기 때문에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선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선행이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 또는 증거로서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포도나무에 포도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당연히 믿음에 의해 산출(産出)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이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이 없는 곳에는 선행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선한 일을 위한 것’이다.(엡 2:9,10) 그래서 정말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선행을 할 때 비로소 자신이 본래적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예수님의“그 열매를 보아 알지니 선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에 나타내신 원리도 바로 이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선행은 마치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이며 호흡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은 참으로 성도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언한 성경 말씀을 인정한다면 칼빈주의 견해만이 유일하게 논리적인 견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외의 여러 가지 견해는 성경과 모순되는 절망적 혼돈 가운데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물론 칼빈주의 견해에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견해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편견이거나 선입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예정교리를 내던져 버리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행위이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심문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지혜와 공의를 부인하고 나아가 그의 계시를 허망 또는 거만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인간들이 그들의 육적인 이성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들을 해명해보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주의시키며 이 깊은 오묘에 대해서 그 위대한 사도 자신도 이렇게 감탄을 했다. “깊도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만일 바울이 알미니안주의자였다면 그는 끝가지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된 자가 택함을 입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만일 구원이 인간의 선행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아무런 논쟁이나 어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자랑을 배제시키고 구원의 모든 역사가 인간의 선행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은 순수한 은혜의 소산이라고 보는 칼빈주의 체계가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다.
5. 하나님의 영원한 유기(遺棄, Reprobation)
절대적 예정교리는 어떤 사람이 영생하기로 예정 된 것이 사실인 것과 같이 어떤 사람은 멸망하기로 예정된 것이 사실임을 논리적으로 주장한다. ‘선택하다’나 ‘선택’이란 말 자체가 바로 ‘선택하지 않다’나 ‘유기’(遺棄, 내어버림)란 말을 시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선택 받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내어버린바(유기) 되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택함 받은 자들이 누리는 특권과 영광스러운 운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일도 역시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아담의 후손 중에 어떤 사람은 그들의 죄 가운데 내버려두기로 의도하셨다는 것과 인간 각 사람의 생활 속에 있는 결정적 요인은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을 믿는다. 모즐리(James Bowling Mozley, 1813–1878)는 “타락 후 전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동일한 운명의 한 무리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긍휼로 어떤 자들은 구원하시고 어떤 자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과 어떤 자들에게는 영광을 주시되 그 영광을 받을만한 자격도 주시고 어떤 자들에게는 이러한 은혜를 억제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영벌을 받도록 내버려두신 것을 기뻐하셨다.”고 하였다.
선택교리에 있어 우리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구원 받지 못하는 유기(遺棄) 된 자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왜 그런지 유기 된 자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유기교리(遺棄敎理)를 취급하는 모든 개혁주의 신조에서는 이것이 예정교리의 본질적인 한 부분으로 논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선택교리를 말한 후 덧붙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그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기쁘신 대로 긍휼을 베푸시기도 하고 억제하시기도 하는 측량할 수 없는 그의 의지의 목적에 따라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양케 하기 위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간과(看過)하시어 그들의 죄로 인하여 치욕과 진노를 받도록 정하신 것을 옳게 여기셨다.”고 하였다.
선택교리(選擇敎理)를 지지하면서 유기교리(遺棄敎理)를 부인하는 자는 그 이론이 모순됨을 면치 못한다. 전자를 긍정하면서 후자를 부인함은 하나님의 예정의 제정을 비논리적이며 불균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전자를 진술하면서 후자는 진술하지 않는 신경(信經)은 한 날개로 하늘을 날려는 새와 같은 것이다. 소위 ‘중용 칼빈주의’를 주장한다며 혹자는 유기교리(遺棄敎理)를 단념하려고 하는데 ‘중용 칼빈주의’라는 말 자체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며 순수한 칼빈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쏘는 독화살이다. ‘중용 칼빈주의’란 ‘병적 칼빈주의’와 같은 말로서 이 병을 고치지 않고 방임해 두면 죽음의 발단이 된다.
(1) 유기(遺棄)에 대한 칼빈, 루터, 워필드의 논평 Comments by Calvin, Luther, Warfield
- 칼빈
칼빈은 구원 받을 자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멸망당할 자의 유기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부터 기인된 것임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람은 동일한 운명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어떤 자들에게는 영생이 어떤 자들에게는 영벌이 미리 정해졌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목적 중 어느 하나를 달성하기 위해 창조된 모든 인간은 생명 아니면 죽음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우리는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칼빈은 “그 반대인 유기가 없는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고도 말했다. 물론 칼빈은 유기교리가 어려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유기교리만이 어떤 자들은 구원 받지 못한 사실에 대한 유일한 지성적이며 성경적인 설명이라고 주장했다.
- 루터
루터 역시 칼빈과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의 영원한 멸망과 의인들의 영원한 구원을 모두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은 그의 공평한 의지로써 어떤 자들은 내버려두어 강퍅하게 하시고 정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인 성질과 현저하게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참 사실인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 풍부하게 또한 계속적으로 예를 들어 보이고 계시다. 왜 어떤 자들은 구원을 얻게 하시고 어떤 자들을 멸망을 당하게 하는가에 대한 유일한 이유는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한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는 구원하시고 강퍅케 하신 자는 멸망당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하나님이 어떤 자를 강퍅케 하시고 그들을 죄악 가운데서 맹목(盲目)이 되도록 내버려두시고는 그 죄악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신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이며 영적인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떠한 모순도 발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비록 전 인류를 멸망시키신다 해도 그의 선하심에는 하등의 결함도 없으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강퍅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량하고, 지혜로우며, 순종을 잘 하는 인간을 찾아내서 그를 사악하고, 어리석으며 완고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부패하고 타락한 자 중생치 못한 자가 하나님의 계명과 감화 아래서 선량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반동적으로 점점 더 악해진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로마서 9,10,11장에 대해 루터는 “어떤 일이든지 모든 일은 하나님이 정한데서 나오고 하나님의 제정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누가 영생의 말씀을 받을 것인지, 누가 믿지 않을 것인지, 누가 죄에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 누가 강퍅해질 것인지, 누가 칭의 될 것인지, 누가 정죄될 것인지 이 모든 것은 그의 뜻에서 결정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 워필드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87-1921)는 “성경기자들은 선택교리에서 귀결되는 불쾌한 추론 때문에 선택교리를 불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그처럼 자주 지적된 추론들을 명료하게 그려내어 그들의 분명한 교훈의 일부로 삼았다. 예컨대 그들의 선택교리는 분명히 유기교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메이어(Joyce Meyer, 1943- )는 신약성경의 ‘에클레고마이’(하나님의 선택)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했다.(엡 1:4)
“선택된 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멸망할 유기 된 자들 속에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택하사’ 즉 ‘에클레고’(ἐχλέγω) 이 말은 ‘고르다’의 부정과거형 동사로 하나님의 선택이 과거의 단회적(單回的) 사건이었음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그의 주권에 의해 창세 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 필연성으로 볼 때 선택은 유기와 관계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말로서 택함 받은 자가 선택된다고 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간과(看過)되고 구원의 은혜에서 유기 (遺棄) 즉 제외된다고 하는 사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교리의 전체적 설명은 바로 그 출발에서 하나님은 그의 순수 은혜로써 택함 받은 자를 단순히 정죄된 상태에서 뿐 아니라 정죄된 자의 무리(하나님의 은혜가 이 무리에 대해서는 구원의 효력을 갖지 않으므로 이들은 이들의 죄 가운데 아무 소망 없이 방치된다)로부터 분리시키신다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또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유기된다는 것을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택함 받은 자가 구원 얻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시켜가면서 반복하여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는 또 이렇게 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1장 이하에 나오는 바울의 논증을 수긍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인간의 공과(功過)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독단적으로 각자의 운명을 정해주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물론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도 분명하게 단정한다.
바울은 이 이념을 사상적으로도 분리시켜 놓았다. 그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야곱을 사랑하신 것처럼 주권적으로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하면서 또한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선언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서 느끼게 되는 난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죄 된 죄인으로서의 전체적인 인간의 상태에 대한 사도 바울의 기초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관리를 받는다고 말한 세계는 타락한 죄인들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계로부터 은혜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신다. 가령 모든 사람이 죄인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주권적 선택은 있었을 것이다. 주권적 선택이 있는 이상 주권적 배제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의 배제는 파멸이나 죽음에 이르는 배제가 아니고 어떤 다른 형식의 운명에 이르게 되는 배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은 무상(無償)이다. 따라서 그것과 대척(對蹠)의 관계에 있는 유기 역시 무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유기를 당하여 멸망 받는 유일한 이유는 저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택함 받고 어떤 사람은 유기된다는 사실을 해설함에 있어 바울의 기본으로 삼은 사상은 모든 사람이 범죄 했음으로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멸망 보편주의였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구원 보편주의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멸망 받아 마땅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면 이는 경탄할만한 은혜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기적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 권리에 대해 누가 감히 허물할 수 있겠는가?”
(2) 성경의 증거(Proof from Scripture)
유기교리는 분명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교리이다. 그러나 유기교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가르쳐진 것이 아니고 오직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교훈이며 동시에 선택교리의 논리적 이면이기 때문에 가르쳐진 것이다. 성경은 명백하게 유기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이라면 다음 말씀들로 충분할 것이다.
-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8)
- 이는 가만히 들어 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4)
-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벧후 2:12)
-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계 17:17)
-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으니라.(빌 4:3)
바울이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망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롬 9:22,23) 이 가르침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라고 하였고 사악한 자에 대해서는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롬 2:5)라고 하였다.
멸망 받을 자들에 대해 바울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살후 2:11)고 말했다. 멸망할 자들은 이런 일들의 외적인 면만 보고 거기에 놀라 그들의 죄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되어 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 회당에서 말한 바울의 말은 “보라! 멸시하는 사람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하니라.”(행 13:41)고 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토록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고 기록한 후 덧붙여 말하기를 “저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였음 이러라.”(요 12:39,40)고 하였다. 마지막 심판 때 사악한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신 예수님의 명령은 유기(遺棄)의 제정이 있음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한 번은 예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고 또 한 번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말씀하셨다. 흠앙(欽仰, 공경하여 우러름)할만한 구속주이시오 천하 인간의 유일한 구주께서 어떤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탄생 이전에 있어서까지도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눅 2:34) 또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올리시면서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여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분명히 제외시키셨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중 하나는 진리를 받도록 허락되지 않은 자들로부터 진리가 은휘(隱諱, 숨기며 꺼리게 됨)되게 하려함이라고 설명하셨다. 즉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질문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0-15, 사 6:9,10)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적용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누구에게나 구원의 진리를 주시기로 계획하셨다고 주장하는 자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반대하는 자이다. 성경은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인봉된 책이고 참 신자에게만 진리를 보고 깨달아 알라고 부여된 책이다. 이 교리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신약성경에서 이 구절(사 6:9,10)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여 인용하였다.(마 13:14,15,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7, 롬 11:9,10)
바울은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구원을 얻고 그 나머지는 완악하여졌느니라.”고 말한 후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부언하였다. 그리고 같은 의미로 다윗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롬 11:8-10)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즉 복음 전도가 어떤 자들에게는 구원을 얻게 하는 방편(方便)이 아니라 완악하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진리가 성경의 다른 구절에도 많이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2:30)고 말했다. 여호수아를 대적한 가나안 족속에 대한 언급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즉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20)고 하였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들의 악함에 대해 책망 받았으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라.”(삼상 2:25)고 하였으며,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참으로 오만하고 패역하게 행하였으나 바울은 그 이유가 단지 바로는 그 악한 행위로 선(善)을 위해 사용된 하나의 유기 된 도구와 같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만을 이유로 들었다. 즉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롬 9:17, 출 9:16)라고 하였다.
유기된 자 모두에게는 공통적으로 무지(無知)와 완고(頑固)함이 있다. 또 바로와 같이 어떤 자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퍅(剛愎)하게 되었다고 할 때도 확실히 그들 자신 안에 이미 사탄에게 내어줌을 당할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악한 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강퍅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어떤 자가 그 마음에 기존해 있는 악한 충동을 따르도록 허락하실 뿐이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로 더 완고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했으며 또한 바로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강퍅하게 했다고도 했다.(출 8:15, 8:32, 9:34)
하나는 하나님의 견지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의 견지에서 기록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강경하게 되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궁극적 책임이 있다. 성경 기자는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그것의 직접적 원인이며 능동적 원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같이 유기교리는 매우 가혹하다. 그러나 성경적이다. 성경에 이처럼 분명히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에 대해 조금도 반대할 수 없다. 만일 반대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무지와 편견을 갖고 이 교리를 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라이스(John Richard Rice, 1895–1980)는 다음과 같이 적절한 말을 했다.
“만일 기독교의 교역자나 교인들이 제자(학습자)가 되는 일에 만족한다면 즉 그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능력과 거룩한 일들에 대해 무지와 부패와 편견 때문에 과오를 범하기 쉽다는 것을 인식하고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그에게 배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교회와 세계를 위하여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교회는 거의 모든 시대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성적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過信)하는 인간들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왔고 저주 받아 왔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이성 능력을 초월하는 즉 필연적으로 순수계시의 문제인 교리의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판정해 보려고 시도해 왔다. 저들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일들’을 모조리 알아보려고 성경을 해석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명백한 의미에 따라서가 아니라 유한한 이성의 결정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일찍이 자연이나 성경을 연구해 본 자로서 성경에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학자는 사실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학자도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써 족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3) 유기교리는 원죄교리를 근거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非) 택자에게 하등의 불공평을 행함이 아니다. (The Doctrine of Reprobation is Based on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No Injustice is Done to the Non-elect) 하나님이 주권적인 영원한 작정에 의해 인류의 일부는 구원으로 선택하시고 그 나머지는 멸망 가운데 버려두셨다고 단정하는 예정교리는 일견 공의(公義)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과 서로 충돌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교리에 관한 변증(辨證)이 필요하다.
유기교리에 대한 변증은 인간의 원죄와 전적 무능력이라는 교리가 전제(前提)되어야 한다. 전(全) 인류가 타락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청구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이 받아 마땅한 영벌 가운데 버려두시지 않고 은혜롭게도 일부의 사람들에게 과분한 복지(福祉, 하늘에서 내리는 행복)를 주시는데 그것은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순수한 자비와 은혜의 행위이다. 그 때에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간과되는 것이지 부당한 차별이나 해(害)를 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무도 이 결정에 대해 이의(異意)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작정(作定)이 무고(無故)한 인간에 대한 처사라면 하나님이 일부를 따로 갈라서 정죄 받게 한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일 것이다. 그러나 전(全) 인류가 유죄(有罪)의 상태에 있는 인류를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다. 전(全) 인류가 악마의 장중에 있으므로 벌서 정죄 받은 세상(요 3:18)이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세상 죄악으로부터 놓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머물러 있는 것이라도 하는 개념(요 3:36, 요일 3:14)이 바로 이 유기교리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며(요 3:17, 8:12, 9:5, 12:47, 4:42), 그가 하시는 모든 일들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6:33,51) 즉 이미 정죄된 세상은 다시 더 정죄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유죄한 인간은 권리를 상실했고 그의 생사(生死)는 하나님의 뜻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정의 작정은 인류를 영원히 멸망할 하나의 무리로 보고 그 중에서 일부만 멸망하도록 버려둔다는 것이다. 전(全) 인류가 사전에 처형을 받아 마땅했는데 그 중 일부 사람들이 사전에 처형된다는 것은 전혀 부당하지 않다. 만일 이것을 부당하다고 하면 정당한 형의 집행을 부당하다고 하는 모순이 된다.
만일 알미니안의 주장대로 인간의 믿음과 행위를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지된 불순종이나 불신앙을 유기의 근거라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다. 인간은 그의 공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나 그의 죄로 말미암아서는 정죄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격한 칼빈주의 자로서 모든 인간이 포함되어 있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부터 어떤 자는 구원을 받고 어떤 자는 유기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유기의 근거는 죄인의 사악함에 있는 것이다. 선택과 유기는 서로 다른 근거 즉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근거 유기는 인간의 죄라는 근거를 갖고 있다. 인간은 아무 죄가 없는 데 어떤 자는 하나님이 그 성격과 공과(功過)에 관계없이 구원으로 선택하시고 또 어떤 자는 그 성격과 공과에 관계없이 멸망으로 선택하신다는 말은 칼빈주의를 왜곡(歪曲)한 말이다. 인간의 멸망은 자신의 응당한 죄 값이다.
이 같이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의 유기 혹은 간과는 단지 그들이 계속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데 대한 예견만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모두 죄인으로 예견되었으므로 유기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도 유기를 당한 자가 영생을 얻은 자보다 더 사악한 죄인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성경은 항상 믿음과 회개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성령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로 돌린다.
인류는 무죄하고 당연히 구원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류 중 어떤 자들이 사전에 형벌로 선고 받았다고 하면 당연히 격분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그토록 명백하게 반복 계시되어 있는 원죄 교리를 올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예정에 대한 반대는 없어지고 사악한 자가 정죄된다는 것은 가장 공정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며 멸망은 전혀 우리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기 때문에 멸망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 오려고 하는 의지(意志)를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서 그 의지를 주장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이것이야말로 그러한 의지를 일으키며 또한 그것을 끝까지 견지(堅持)하는 것이다.
더구나 죄 많고 반역적인 피조자의 세계에서 아무도 구원 얻을만한 가치가 없는데도 하나님은 악한 천사들에게 벌을 내리신 것 같이(벧후 2:4, 유 6) 모든 사람들을 다 간과하실 수 있었지만 은혜를 베푸사 어떤 자들을 선택하시어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구속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노고를 모두 스스로 담당하셨다. 따라서 속죄는 하나님 자신의 권한에 속한다. 하나님은 그 권리를 가지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실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합의하신대로 어떤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어떤 자에게는 은혜 주시기를 거절하시는 것이다.
택함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거절은 그들의 멸망에 대한 소극적 원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의사의 부재가 병자의 죽음에 대한 이유가 되긴 하지만 그 근본원인은 아닌 것과 같다. “반역하는 인류 중 일부분이 인류 전체가 훼파한 율법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무한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누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그릇이 될지 또는 누가 그 죄의 당연한 보응을 받을 그릇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라고 찰스 핫지 박사는 말했다.
원래 인간이 스스로 죄의 상태로 빠져든 것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에 의해 정죄되는 것은 공정하며 모든 공의의 요구는 그가 형벌 받는 데서만 충족되는 것이다. 양심도 또한 인간이 하나님보다 사단을 좇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멸망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고백하며 예수님도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요 5:40)라고 말씀하셨다. 헤밀톤 교수(Prof. F. E. Hamilton)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한 말을 했다.
“하나님이 멸망할 자들에 대해 하시는 일은 다만 그를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게 하시는 것뿐이다. 악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본성이고 하나님은 단지 변화되지 않은 그들의 본성을 그대로 방치하시기로 미리 정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은 종종 칼빈주의의 하나님은 구원 받기를 열망하는 자들을 거절하시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비꼬아 말한다. 칼빈주의대로 보면 하나님은 구원 받기를 원하는 자 모두를 구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마음에 변화를 받지 못한 자는 누구나 구원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멸망 받는 자들이 멸망 받는 이유는 저들이 자의로 죄의 길로 행할 것을 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멸망시키는 자멸 자가 되었다는 이것이야말로 지옥 중의 지옥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구원이 타고난 권리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인간이 시조(始祖) 아담에게서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하나님이 범죄 한 모든 인간에게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그것이 불공평한 하나님이 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터는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달렸다는 견해에 대해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가령 하나님이 멸망으로 작정된 자들의 업적을 고려하셔야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 얻을 자들의 업적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이치적으로 볼 때, 무가치한 자들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가치 있는 자들이 멸망당한다는 것과 똑같이 불공평한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신관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전에 생각지 않았던 것을 돌발적으로 갑자기 행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적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가 그 시간에 하시는 일은 영원 전부터 그렇게 하시기로 목적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구원코자 하시는 자들은 영원 전부터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자들이요 멸망 가운데 내버려 두시고자 하시는 자들도 영원 전부터 내버려 두기로 작정하신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 시간에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어 정당하면 영원 전부터 그 일을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도 역시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행위의 원리는 영원 전이나 오늘날이나 똑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자비를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는 견해는 정당시하면서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처벌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견해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어떤 자들을 그들의 출생 후에 구원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일 수 있다면 그들의 출생 전 혹은 영원 전에 그러한 목적을 정하시는 것도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이 의지는 저지되거나 무효화 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인류가 모두 구원 받도록 뜻하시지도 않았고 현재 뜻하시지도 않는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인류가 모두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도 그의 뜻에 항거할 수 없으므로 한 사람도 멸망될 수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멸망당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구원의 필수인 유효적 수단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일은 그것을 일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처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보편적 구원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목적도 아니요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도 아니라는 것이 된다. 사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어떤 것이든 다 영원 전부터 뜻하신 것이라는 진리와 인류의 일부만 구원하신다는 진리 이 두 가지 진리는 하나님의 선택교리와 유기교리를 완성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4) 이방인의 상태(State of the Heathens)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있어서 어떤 자들은 복음이나 다른 은혜의 수단을 받지 못한 채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결국 칼빈주의 예정론에서 나타난 원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여러 시대를 통해 인류의 대부분이 은혜의 외적 수단조차 받지 못한 채 그저 내버려져왔음은 우리는 알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 그 수효가 아주 적었던 유대인이 하나님 자신의 특별계시를 받는 유일한 백성이었다. 예수님도 그 공적 생애의 활동을 거의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키셨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이방인에게 가는 것도 오순절 성령강림 전까지는 허락하지 않으셨다.(마 10:5,6, 28:19, 막 16:15, 행 1:4)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죄 가운데서 죽어갔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들의 구원을 뜻하셨다면 벌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편들을 저들에게 베푸셨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와 중국을 천 년 전에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의도하셨다면 틀림없이 이미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큰 암흑과 불신가운데 내어버림을 당했다. 과거와 현재 세계의 모든 죄와 비참함과 사망은 성경가운데 나타나 있는 설명밖에 달리 설명될 수가 없다. 성경의 설명은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는데 하나님이 스스로 세우신 구속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자비로써 주권적으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순종치 않는 자들을 회심시키려고 전력을 다해 투쟁하시지만 결국 그 목적을 이루실 수 없다고 추측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손하고 모욕적인 견해인 것이다.
만일 알미니안주의 이론 즉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그의 죽음의 은총은 한 사람도 제외됨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된다고 하는 이론이 옳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의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준비하셨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고이래(自古以來) 오늘까지 복음을 받지 못하고 살다가 죽은 자들이 무수히 많았다는 사실은 알미니안주의가 해결하지 못할 큰 문제이다. 구원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다. 성경이 아래와 같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3:8)
위험이 닥쳐 온 것을 알고도 경보를 울리지 않아서 백성들이 멸망을 당했다면 사실 그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그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틴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보다는 훨씬 더 고상한 종교적 특권을 누린 사마리아인들에게 대해서도 “저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단언하셨다. 특히 로마서 1,2장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은 멸망한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역시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 다음에 “하물며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좋은 성품으로 다른 종교의 법을 힘써 지키고 행할지라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사실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멸망한다는 사실은 해외선교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논란거리 중의 하나였다. 만일 그들의 종교가 그들을 구원할만한 빛과 진리를 충분히 갖고 있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은 상당히 경감될 것이다. 해외선교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내리는 대답에 의해 크게 좌우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들도 같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수단이 있든 없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와 방법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은총의 기적에 의한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도 그의 선민을 불러 모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보통 방법은 복음이 전해진 곳으로부터 그의 선민을 불러 모으시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자기 개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구원의 기회가 이방인에 관한 한 크게 간과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그들이 내세에서도 역시 간과되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런 조건 속에 두실 때는 그가 일 년 내내 얼어 있는 북부 시베리아의 토양으로부터 밀 소출을 내시기를 원치 않는 것과 같이 그들을 구원하실 의향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구원하실 의향이었다면 그는 계획된 목적으로 인도할 방편들을 제공해 주셨을 것이다. 명목상의 기독교 국가에 살면서도 적절한 방법으로 복음의 제시를 한 번도 받지 못한 사람도 또한 많이 있다. 그들은 구원의 외적 수단조차 받지 못하므로 의지할 데 없는 그들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지옥에 떨어진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위치로부터 모든 정도의 상벌이 있으며 또 사람이 받는 상벌은 어느 정도까지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기회에 근거하리라고 믿는다.
예수께서 친히 선언하시기를 심판의 날에 이방도시 소돔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배척한 팔레스타인의 도시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으며(눅 10:12-14), 충성된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니라.”(눅 12:47,48)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지옥으로 떨어지되 복음을 듣고도 물리친 자들보다는 비교적 고통을 더 당하게 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는 이교도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출발점부터 그들의 전 체계를 붕괴시키는 난제요 또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은 물론 그리스도만이 구주이심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하고 죽는 것을 보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모든 사람은 정죄되기 전에 충분한 은혜와 기회를 얻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세운 시련(회개할 기회가 내세
에도 있다고 보는)을 추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성경과 반대되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커닝햄(Cunningham)의은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인류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의 자비와 복음에 제시된 구원의 길에 대해 전혀 무지한 채 남겨져 왔었다. 아니 오히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 있는 길로 나아가려 해도 나아갈 수 없는 장애물과 같은 환경 속에 처해 왔었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알미니안주의의 보편은혜와 보편구속 교리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옹호해 주는 강력한 논증으로 간주해 왔다.”
타락으로 인한 모든 인류의 유죄 및 부패 교리와 어떤 자는 은혜로 말미암아 주권적으로 구원 받고 어떤 자는 간과된다는 은혜의 교리를 가진 칼빈주의만이 우리에게 이방 세계의 현상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해줄 수 있다.
(5)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意圖) (Purposes of the Decree of Reprobation)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정죄는 본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인간과 천사들 앞에서 영원히 나타내기 위해 기도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영원한 현현(顯現)이다. 즉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의인에게 상(賞)을 주어야함과 동시에 죄인에게 벌(罰)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고 하였다.
바울은 이 작정이 한편으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함’이 의도된 것이라고 하였다.(롬 9:22,23) 이 하나님의 유기의 작정은 택함 받은 자들에게도 부수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악인들의 유기와 궁극적인 상태를 봄으로써 택함을 받은 자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택함 받은 자들은 구원의 은혜가 자기들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자신들도 역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되고 또한 자기들보다 죄가 더 많은 것도 아니고 무가치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 가운데 버려두시면서 자기들은 죄에서 구출하여 영생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풍성함에 대해 한층 더 깊이 감사하게 된다.
- 택함 받은 자들이 그처럼 극진한 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감사의 동기를 제공해 준다.
- 현세와 내세에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해 더욱 신뢰심을 갖게 된다.
- 택함 받은 자들이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순결한 삶을 살려고 하는 거룩에 대한 강한 동기를 갖게 된다.
- 택함 받은 자들이 하여금 죄악을 더욱 증오하게 한다.
- 천국의 기업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은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사귀고 성도 간의 교제를 더욱 친밀하게 한다.
-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거절에 대해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롬 11:11)고 말함으로써 유대인이 아무 이유 없이 거절되었다고 하는 비난을 근본적으로 차단시킨다.
이처럼 하나님이 유대인을 거절하신 것은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즉 구원을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회는 거의 독점적으로 이방인의 교회였다.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는데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많은 유대인들이 ‘시기 나게 되어’ 하나님이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 로마서 11장 가운데 몇 구절은 유대인이 장래에 회심할 것과 의에 대해 열심을 낼 것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다.
(6) 알미니안의 유기교리 집중공격 (Arminians Center Attack on This Doctrine)
이 유기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교리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종종 이 교리가 마치 칼빈주의의 총화(總和)요 본질이나 되는 것처럼 이것 하나만을 끄집어내어 강조하면서 한편 칼빈주의의 중요한 다른 교리들 즉 하나님의 주권, 순수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논평도 하지 않고 간과해 버린다.
도르트총회(The Synod of Dort, 1618,1619)에서 알미니안파는 유기(遺棄) 문제를 제1의 토론 주제로 삼자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대회가 거절하자 그들은 그것을 부당하다면서 불평하였다. 오늘날까지 그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교리를 잘못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이것을 싫어하도록 만들기가 아주 용이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를 왜곡시켜 놓고 그들이 거기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모든 주장을 내세운 다음에 “하나님의 유기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택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논한다.
그들이 이처럼 유기교리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진리를 연구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진리 체계의 적극적인 방면으로 전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칼빈주의 체계에 유리하도록 수집되어 있는 많은 증거들에 대해 답변하고 이것들을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우선 ‘하나님의 선택교리’를 위한 증거를 제시하여 이 교리를 수립한 후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하나님의 유기교리’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이 유기교리의 증거가 오직 선택교리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만일 선택교리에 대한 주장이 옳다고 증명된다면 논리적으로 봐서 유기교리에 대한 주장도 옳다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유기에 관한 것보다 선택에 관한 것을 더 많이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理性)은 우리에게 먼저 선택교리에 관한 것을 연구한 다음에 유기교리에 대해 논할 것을 명한다.
그런데도 알미니안파가 유기교리를 우선적으로 논쟁의 주제로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교리는 사람이 보기에 가혹한 듯하다. 그럼에도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적인 이 교리를 논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도 이 유기교리의 오묘(奧妙)한 특성 때문에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일에 대해 지나친 사변에 빠질 위험이 있을 때는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더 알려고 시도하는 일이 없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7) 유기교리를 무한정 설명할 의무가 없다. (Under No Obligation to Explain All These Things)
우리가 유기교리에 관한 모든 신비의 의미를 전부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 다만 유기교리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설명하고 가능한 한 이 교리에 대한 반대론으로부터 이 교리를 옹호할 의무는 갖고 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나이다.”(마 11:26, 눅 10:21)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양하게 다루시는 데 직면했을 때 주님의 신정론(神正論)이다. 이 신비에 대해 보다 더 깊이 관여하려 하는 어리석은 이론가들에게 바울이 준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에 삼키운 바 되리라.”는 것이다.
톱레이디(Toplady)는 이렇게 말했다. “바울 시대에 이 교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 오직 하나님만 사람들을 회심시킬 수 있는데 그가 구태여 어떤 자들을 내버려 두셨기 때문에 저들이 회심하지 않은 것이니 회심하지 않고 멸망당하는 자들을 책망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전능자의 의지는 누구도 거절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질문하지 말라.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라는 바울의 대답으로 만족하라. 사도 바울은 이 교리에 관한 난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일임하여 해결하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도 이 난제를 하나님의 주권에 일임하도록 하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를 헤아릴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이성(理性)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공정하게하실 줄을 믿는 믿음과 겸손을 가져야 한다. 만일 유기교리는 하나님을 부당하신 분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원죄에 관한 성경의 교리가 무엇인지 또한 이 원죄가 자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실제적인 범죄가 있기 전에 자기는 벌을 받아 마땅한 자였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인간이 정죄 받는 것은 공정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첫 단계를 정복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정복하기가 쉽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친구들이나 친척들까지도 이 영벌(永罰)을 받도록 예정되었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동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에 비추어볼 때 이런 동정은 아무 가치도 없는 잘못된 동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에 그들은 하나님의 의(義)의 원수로 죄악을 사랑하고 구원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싫어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지옥에 갈만한 자들만 지옥으로 보내실 것이요 또한 우리가 저들의 참 성격을 보면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부언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알미니안파는 여기서도 진정한 난관을 조금도 타개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예지하시고 행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 어떤 자들이 필연코 죄인으로 살다가 족음을 배척하고 회개하지 않고 지옥에 갈 줄을 예지하시면서 왜 그들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여기서 알미니안파는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멸망당할 것을 아시면서 창조하신 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죄를 선택하는 비(非) 택자들이므로 그들이 받는 보복적 형벌에서 하나님은 그의 공의를 나타내신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의 열심히 그들을 천국에 보내려고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필경 멸망을 스스로 취하여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될 비참한 피조자가 되리라는 것을 예지하시면서도 일부러 그러한 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해야 하며 또 하나님은 그들을 하늘나라고 들여보내려고 애쓰지만 그렇게 안 되므로 영원히 슬퍼하신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적어도 멸망이 예견된 자의 창조를 그만두실 수도 있었는데 그들을 창조해 가지고 자기 신상에도 큰 불만과 슬픔을 초래하고 또한 피조 자에게도 큰 슬픔을 초래하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예정교리를 듣고 어떤 자들은 자기를 유기된 자 중의 하나로 인정하여 자기는 아무래도 정죄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점점 더 죄악 가운데 빠져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향내 나는 꽃에서 독을 빠는 것이며 만세반석 그리스도에다 자기를 부딪쳐서 깨뜨려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유기된 자로 판정하고 자포자기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심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설사 자신에게서는 회심의 변화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회심시키지 않고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고는 단언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기를 결정적으로 비(非) 택자 중의 하나로 간주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이 회심치 않은 자들 중에서 언제 누구를 중생시켜 구원하실 것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만일 자기 안에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이끄시기 위해 쓰시는 수단일 것이다.
6. 타락 후 선택설과 타락 전 선택설 (Infralapsarianism and Supralapsarianism)
칼빈주의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의 순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 선택과 유기가 결정되었을 때 인간은 타락될 자로 간주 되었는가 타락되지 않을 자로 간주 되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즉 이 결정의 대상을 “부패하고 유죄한 인간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의 인간으로 생각하느냐?”하는 것이다.
(1) 타락 후(後) 선택설(Infralapsarianism)
창조하시고 → 타락을 허락하시고 →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의 복락을 주시기로 택하시고 또 어떤 자들은 마귀와 악한 천사들처럼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 가운데 내버려두시고 → 피택자들의 구속을 위하여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된 구속을 피택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
(2) 타락 전(前) 선택설(Supralapsarianism)
창조될 자들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하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자들은 멸망하도록 정하신다. → 창조하신다. →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신다. → 피택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신다. → 이 구속을 피택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다.
이처럼 핵심 쟁점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타락 전에 이루어졌느냐? 인간의 타락 후에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타락 전 선택설의 유력한 근거 중 하나는 ‘차별’ 관념을 강조하여 이 관념을 하나님이 인간을 처리하시는 전반에 관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 전 선택설은 이 ‘차별’ 사상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 ‘차별’ 관념은 그 성질상 모순 없이 실행될 수 없는데 예를 들면 창조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타락에 있어서 그렇다.
창조하기로 결정된 대상은 일부분의 인간이 아니라 전 인류였다. 더구나 똑 같은 본성을 가진 전 인류였다. 또한 타락 될 것으로 허락된 것도 어느 한 부분의 인간이 아니고 전 인류였다. 타락 전 선택설은 보편구원론과는 정반대되는 경우이다. 따라서 오직 타락 후 선택설만이 앞뒤가 맞고 또 다른 사실들과도 모순 없이 일치한다. 이 차이점에 대해 워필드(B. B. Warfiel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문제의 제기가 그 해답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어 있는 인간의 실제적 처리는 택함 받은 자들이나 버림받은 자들을 막론하고 둘 다 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구원이나 유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죄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차별의 구체적 사실 즉 구원이나 형벌 그 어느 것이든지 다 포함한 운명에 관한 차별에 선행하는 것이지 차별의 추상적 관념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제정하는 근거에는 형벌을 제정하는 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죄가 예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인 순서로 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생각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과 형벌에 관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
핫지(Charles Hodge) 박사도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가 없었다면 정죄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명백히 계시된 원리이다. 모든 인간이 똑 같이 무가치하고 유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어떤 자는 불쌍히 여기시고 어떤 자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 것이다. 로마서 1:24,26,28에 있는 것처럼 성경은 도처에서 유기는 그 대상인 인간의 유죄를 근거로 한 형벌이라고 선언했다. 그렇지 않다면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의 현시(顯示)가 될 수 없다.”
타락 전(前) 무고한 인간 즉 죄인으로 생각되지 않는 인간이 사망과 영벌로 예정된다는 것은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인 성경적 신관(神觀)과 일치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에 관한 작정을 단순히 추상적인 주권에 근거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통치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 통치는 제멋대로 하는 통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다른 속성들 특히 공의, 거룩함, 지혜와 조화를 이루는 통치이다. 하나님은 죄를 범하실 수 없다. 비록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써 그에게는 죄를 범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할지라도 그 점에서 그는 제한을 받으신다. 물론 타락 전(前) 선택설이나 타락 후(後) 선택설이나 둘 다 애매한 점이 있다. 그러나 타락 전 선택설은 애매함을 뛰어넘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사실상 타락 후(後) 선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이다.(요 15:19)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있다.(롬 9:21) 또한 택함 받은 자들과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본래 동일한 비참 상태에 속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수고와 사망은 일률적으로 죄의 삯이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타락 후 선택설은 하나님이 어떤 자를 멸망으로 정하시기 위해 창조하시느냐는 알미니안파의 이의 제기를 피할 수 있다. 어거스틴 이래로 선택교리를 주장한 사람들 중 대다수는 타락 후 선택론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타락한 전 인류 중에서 어떤 자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을 받게 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고백 가운데에는 타락 전 선택설을 가르치는 신앙고백은 없고 타락 후 선택설의 견해를 가르치는 것만 있어 칼빈주의의 전형적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칼빈주의자로서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하는 자는 없다. 우리는 강력한 칼빈주의자들이지만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는 아니다.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란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하는 자들을 말한다.
물론 이상의 두 가지 설은 다 같이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은 그 전 과정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한다.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타락 전 선택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자연적 감성과 인상에 한층 더 상충되는 것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틀 속에 맞추어 놓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즉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우리 인간의 역사처럼 시간적으로 잇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만사를 결정하신 영원하신 한 행동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계획은 영원한 것으로써 서로 논리적 선후관계는 있으나 시간적 선후관계 즉 연대적(年代的) 관계는 없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명료하게 논구(論究)하기 위해서는 사상에 어떤 순서를 갖지 않을 수 없는데 성화와 영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사를 창조와 타락의 제정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핫지(Charles Hodge)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을 했다. “그 경애할만한 단체(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의장 튀스(Twiss) 씨는 대단한 타락 전 선택론 자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회원은 타락 후 선택론 자들이었다. 그 회의의 신조는 분명히 타락 후 선택설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가급적이면 타락 전 선택론을 취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영생으로 작정하시고 남은 자들은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신장(伸張) 혹은 억제하시는 오묘하신 뜻에 따라 간과하시며 그의 영화로운 공의를 찬송케 하기 위해 그들의 죄 값으로 치욕과 진노를 받도록 내버려 두기로 작정하셨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고 간과하신 무리를 ‘남은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 남은 자들이란 추상적인 인간 가운데서 남은 무리가 아니고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실제적인 인간 가운데서 남은 무리이다. 둘째 뒤에 인용된 구절은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간과되는 것이며 치욕과 진노를 받도록 정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영벌을 받기로 예정되기 전에 벌서 유죄자로 예상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 후 선택설은 소요리문답 제19조와 제20조에서 한층 더 분명하게 주장되고 있다. 거기에는 전 인류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 있게 되었는데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이들 중 어떤 자들 즉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 중 어떤 자들을 영생으로 택정하셨다고 되어 있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 이래 오늘까지 모든 어거스틴주의 자들이 지지해 온 것이다.
9. 구속함을 받은 허다한 무리 (The Vastness of The Redeemed Multitude)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시는 사랑의 작정은 차별적이고 특수적이지만 그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9,10) 아버지 하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허다한 사람들을 영원한 구원과 복락으로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약속된 미래의 번영의 날을 생각하면 인류의 대부분이 택함 받은 자의 수효에 들어갈 것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19장의 세계에 있는 선악(善惡) 두 세력 간의 투쟁을 비유적인 용어로 표시한 환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대해 워필드 박사는 “이 성구는 천만 대적 위에 군림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의 환상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이 만왕의 왕께서 하늘의 군대들을 이끄시고 전쟁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본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잔치에 참여하여 그들을 위해 마련된 모든 자의 고기를 먹도록 초청되고 다음에는 적의 대적 즉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이 다 모여 만왕의 왕과 싸우다가 완전히 멸망당하게 됨을 본다.(19:11-21) 이 묘사는 완전한 승리와 완전한 정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라고 했다.
영적 세계의 일을 전투적 표상으로 진술하여 그 묘사에 생기를 부여한 것이다. 물론 이 묘사는 상징적인 것이다. 이 상징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악 세력을 완전히 이기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 대한 암시가 말로써 서술된 것은 오직 한 번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5절과 21절 두 경우에서 우리는 승리를 거두게 한 검이 그 정복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읽을 때 여자적(如子的) 의미로서의 ‘전쟁’이라던가 현실의 ‘투쟁’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승리는 전파된 말씀 즉 복음전파를 통해 성취되어가는 승리를 말한다. 요컨대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승리 과정을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전율할만한 전투의 광경과 그 무서운 것을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영적 승리의 완전성에 대한 인상을 깊게 해 주려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땅을 정복할 것이며 그리스도는 필경 그의 모든 대적들을 다 쳐부술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복음의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정복이 계속될 것인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가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기독교 제1세기에 비교해 볼 때 비교적 황금기라 할 수 있으며 복음정복의 진행과정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비는 기도의 실제적 성취를 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죄 많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처리에 대하여 넓게 알면 알수록 하나님은 그 선택의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결코 인색하지 않으시다는 것 오히려 그의 목적은 전 세계를 구원하시는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즉 그의 후손의 수효가 무수히 많으리라는 약속을 보기 바란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22:17, 13:16) 신약성경을 볼 때 이 언약은 특별한 선민인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참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7,29)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의 뜻이 성취된다고 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의 수고한 결과를 보고 만족히 여기신다고 선포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적은 무리를 위해 수고하셨겠는가? 주님께서 갈보리 산에서 받으신 고통을 생각해 볼 때 그렇게 쉽게 만족해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구원 얻을 자들의 수효가 멸망 받을 자들의 수효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의 용어 대조에서도 잘 나타난다. 천국은 한결같이 오는 세상, 큰 왕국, 나라,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반면에 지옥은 한결같이 비교적 좁은 장소, 감옥, 불과 유황의 연못, 무저갱과 같은 말로 묘사되어 있다.(눅 20:35, 딤전 6:17, 계 21:1, 마 5:3, 히11:16, 벧전 3:19, 계 19:20, 20:10,14,15, 21:8-27)
천사와 성도에 대해서는 대군, 만군, 셀 수 없이 많은 군중, 천천만만, 수억 등의 말을 사용하는데 비해 멸망 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런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이런 대조를 생각해 보더라도 멸망할 자의 수는 비교적 소수일 것으로 보인다.(눅 2:13, 사 6:3, 계5:11) 세드(Dr. Shedd) 박사는 “하나님의 선택의 범위는 수레바퀴처럼 작은 것이 아니라 하늘을 관통한 큰 원이다. 사단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비하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광대한 경내에서는 선이 정법(正法)이고 악이 예외이다. 죄는 무한한 창공에 있는 하나의 반점과 같고 태양 위의 한 오점과도 같다. 지옥은 거대한 우주의 한 모퉁이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비교해서 말하면 구원 얻는 자의 수가 어떤 도시의 시민 정도라면 멸망하는 자의 수는 그 도시 중에 있는 옥중 죄수들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구원 얻는 자들을 자라서 번창하는 나무의 큰 줄기와 가지라고 한다면 멸망할 자들은 잘라져서 불속에 던져지는 몇 가지 안 되는 마른가지라고 할 수 있다. 비칼빈주의 자라 한들 어찌 이것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4)는 말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2:14)는 말은 “구원 얻을 자보다 멸망 받을 자가 더 많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성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당시에 복음을 받지 않던 유대인의 특수한 태도를 보고 하신 말씀이므로 잠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즉 이것은 최후의 심판에 입각하여 한 말이 아니고 사람들이 불의한 길을 걸으며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당시의 시대상에 입각하여 한 말씀이다. 이것은 그 당시 그들이 목격한 바와 같은 생활에 대해서는 항상 진리이므로 그 문제 관한한 오늘날에도 역시 진리이다. 워필드 박사는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는 동안에 ‘두 길’을 따르는 자의 비율이 역전되는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일까? 아니 때로 있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성구의 목적은 구원의 길이 고난과 희생의 길이라는 것과 근면과 인내로써 구원을 달성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가르쳐주려는데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구원이 당연히 이루어질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많은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는 것이다.(눅 13:24) 생명의 선택이 두 길 즉 한 길은 넓고 평탄하고 여행하기에 수월하지만 멸망으로 인도되고 다른 한 길은 협착하고 힘들지만 생명으로 인도되는 사이의 선택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비유는 마치 열 처녀의 비유(마 25:1-)에서 지혜 있는 처녀가 다섯이고 어리석은 처녀가 다섯이라고 해서 구원을 얻을 자와 멸망 받을 자의 수효가 똑같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추측이다.
또 이 비유를 구원 얻을 자가 멸망할 자에 비해 비교적 적을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곡식 가운데 있는 가라지의 비유(마 13:24~)가 구원 얻을 자의 수효에 비해 멸망할 자의 수효가 아주 적을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추측이다. ‘두 길’의 비유가 구원 얻을 자의 수효가 멸망 받을 자의 수효보다 적을 것을 가르친다고 추측하는 것은 잃은 양의 비유에서 100마리 중 한 마리만 길을 잃었는데 그것도 결국에 가서 돌아오게 되니까 그 비유는 완전무결한 만민구원설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만큼 근거가 없는 추측이라고 하겠다.
< 선택교리 결론과 요약 >
우리는 지금까지 선택교리가 모든 점에 있어서 성경적이라는 것과 상식에 부합된다는 것을 밝히 설명했다. 선택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존엄과 성결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그들 자신의 인간의 부패된 성질과 죄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주 앞에서 당연히 긍휼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오직 영벌을 받아야 마땅한 정죄된 죄인의 입장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들 스스로 구원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할 것을 심히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교리는 결코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 계획이나 행위와 은혜 양자를 통한 구원 계획과는 조화되지 않는 교리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계획의 산물이다.
-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로서 그가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을 자들은 결정하신 것을 뜻한다.
-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부터 제정된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의 제정은 타락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비애의 상태에서 축복과 행복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취급하여 어떤 사람이 구원 얻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은 방법과 목적을 다 같이 포함한다. 즉 영생으로의 선택은 현세에서의 의로운 삶에 대한 선택까지도 포함한다.
-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는 언제 어디서나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이 인간에게 배척되지만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선으로 기울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제정은 선택 받지 못한 자들 즉 죄 값으로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은 벌을 받도록 유기 된다는 것을 포함한다.
- 하나님이 어떤 자들은 자의로 악을 행하도록 저들에게 허락하신다.
- 우주만물의 통치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인류를 중생시키실 수 있다.
- 온 땅의 심판 주가 되시는 이는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어 저들을 구하시며 그 구원의 은혜를 확장하실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은 예지 된 신앙이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 이다.
- 인류의 대다수가 영생을 얻기로 선택되었다.
- 영아기에 죽는 자들은 모두 피택자들 속에 포함된다.
- 구원과 관계가 없는 외부적 현세적 특권과 복리를 얻게 하려고 하나님이 개인이나 국가를 선택하시는 일도 있다.
-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강조되어 있다.(*)
글쓴 이 /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1901-1990), ‘칼빈주의 예정론’(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로레인 뵈트너 지음, 김남식 번역, 베다니, 535p, 1996.5.15.
본 원고 출처 / http://cafe.daum.net/haengham/Kfpe/10 로레인 뵈트너 / 1901년 미국 미조리 주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미조리 주 타키오대학을 거쳐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핫지 박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1932년에는 그의 명저인 본서를 저술하였다. 뵈트너 박사는 켄터키 주 파이클빌 대학에서 성경과 신학을 교수하다가 고향 미조리 주로 돌아와 개혁주의 신학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기독교개혁파교회 목사로서 한 평생 개혁주의 신학을 전파하다가 1990년 11월 3일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