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칼빈주의 신학체계의 기둥 칼빈주의 5대교리 (하)

. (Limited Atonement) 

1. 본 교리의 서술(statement of the doctrine) 

우리가 ‘제한속죄’(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라는 제목 아래 논하려는 골자는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즉 어떤 차별이나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택하신 피택자(彼擇者, the elect)만을 위해 자신을 바치셨는가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전 인류를 다 구원하시기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주신 사람들만 구원하시기 위함인가 하는 것이다.

알미니안은 그리스도는 전(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칼빈주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목적과 계획아래 하나님이 택하신 피택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는데 피택자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이 일반은총에 참여하는 자(者)라는 범위 안에서 부수적인 관계를 가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제한속죄’(制限贖罪)라는 용어보다 ‘제한구속’(制限救贖, limited redemption)이라고 하면 그 뜻이 훨씬 더 명료해진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한(無限) 한 가치(價値)와 능력(能力)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功勞)의 적용(適用)을 통해 실제로 구원을 받는 자는 유한(有限)하다는 것이 칼빈주의의 주장이다. 그러나 ‘재한속죄’라는 말이 그동안 신학적 용어로 인정되어 왔고 그 뜻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계속 ‘제한속죄’라는 용어로 쓰고자 한다. 이 ‘제한속죄’ 교리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택자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졌더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었다. 또한 합당한 때에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하심(稱義)을 얻으며 양자(養子)가 되고 성결함을 입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택함 받은 백성 외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으며 효력 있는 부르심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양자가 되어 성결함을 받아 구원될 자가 한 사람도 없다.”(Ch. III, Sec. 4.)

‘제한속죄’ 교리는 ‘선택’ 교리의 결과로부터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류의 일부는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구원하시지 않기로 예정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전(全) 인류에게 똑같은 효력을 미친다거나 또는 그리스도가 피택자를 위함과 같이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도 죽으라고 보내심을 입었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선택’ 교리와 ‘제한속죄’ 교리는 상호(相互) 수반(隨班) 된 것으로 하나가 서면 다른 하나도 설 것이요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하나도 넘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볼 때 이 중 어느 한 교리는 용납하면서 다른 한 교리를 부인할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자들을 영생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선택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주요목적 역시 분명 선택된 자들을 구속하기 위함인 것이다.

제한속죄를 주장한 칼빈(좌)과 보편속죄를 주장한 알미니우스(우)

2. 그리스도의 속죄의 무한한 가치 (the infinite value of Christ’s atonement)

‘제한속죄’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의 가치(價値)와 능력(能力)에 어떤 제한이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속죄의 가치는 그것을 행한 인격의 존엄성에 기인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으로 측정되는 것이다. 신인(神人)으로서 겪으신 그리스도의 수고의 가치는 무한(無限)하다. 성경은 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전 2:8) “악인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5) “하나님이 ‘그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전(全)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는 전(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무한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해 의도되고 적용된다는 의미 즉 실제로 구원을 얻을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제한적(制限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설사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 할지라도 칼빈주의는 그들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하며 이와 반대로 수많은 사람들 아니 전(全) 인류가 구원 얻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들의 구원의 근거로써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믿는다. 가령 땅에 한 포기의 식물만 자라는 경우라도 온 땅에 식물이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양은 풍부한 열을 비춰야 한다. 이처럼 오직 한 사람의 영혼만 구원하신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많은 영혼 아니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과 똑같은 수고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본래 죄인은 무한히 존엄하신 하나님께 범죄하고 영원히 고통 받도록 선고(宣告) 된 자들이기에 그게 단 한 사람일지라도 무한한 가치를 지닌 희생만이 그를 대속할 수 있다. 인류 정죄(定罪)의 근거인 아담의 죄는 제한적이니까 죄인의 수가 좀 더 많았다면 아담도 좀 더 많은 죄를 범했어야 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어떤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는 이런 추측 즉 그리스도의 ‘정량(定量) 수난설(受難說)’(the suffering of Christ)을 주장하는가?

3. 목적과 적용에 있어 제한적인 속죄 (the atonement is limited in purpose and application)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는 전(全) 인류를 구원하시기에 족하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 유효(有效)적으로 구원하신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고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거나 수용(受容) 할 수 없는 죄인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되고 성화 된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왜 이 은혜를 전 인류에게 적용하시지 않는 이유가 성경에 충분히 계시되어 있지는 않다.

누구나 다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구속의 보편성(普遍性)을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의 주장대로 만일에 전 인류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목적이었다면 구원 받지 못한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야 되는 데 실제로는 인류 중에 구원 받지 못하고 멸망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편속죄’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속죄가 전(全) 인류의 구원은 고사하고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되고 만다.

알미니안의 ‘보편속죄’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전(全) 인류로 하여금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면 현실을 볼 때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도 불신앙으로 멸망되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마치 암을 깨끗이 고침 받고도 암으로 죽었다는 말처럼 말 자체가 모순이다. 만일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보편적(또는 일반적) 구원’이 구원의 가능성만을 의미한다면 전 인류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으나 이와는 달리 그것이 만일 ‘유효한 부르심’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이에 대해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87-1921)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선결(選決)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높은 가치를 지닌 속죄인가 아니면 넓은 범위를 지닌 속죄인가 하는 점이다. 이 양자는 결코 병립될 수 없다.” 그들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보편화하게 되면 결국 그 구속의 의미와 목적이 무의미해 지고 만다.

알미니안도 칼빈주의와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분명히 제한한다. 그런데 그 제한의 내용이 전혀 다르다. 칼빈주의는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상술한 바와 같이 비록 인류의 대부분이 이 구속에 참여할 것을 믿는다 할지라도) 반면에 알미니안은 ‘속죄의 능력’을 제한하여 인간의 협력이 없이 그리스도의 속죄 그것만으로는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양적(量的)으로는 제한하고 질적(質的)으로는 제한하지 않는 반면에 알미니안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질적으로 제한하고 양적으로는 제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비유한다면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좁기는 하지만 강 이 끝에서 저 끝가지 건널 수 있는 완전한 다리와 같고 알미니안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넓기는 하나 강의 중간까지 밖에 건널 수 없는 다리와 같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실제로는 알미니안의 ‘보편속죄’가 칼빈주의의 ‘제한속죄’ 보다도 훨씬 더 가혹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4. 그리스도의 사역은 율법의 완성 (Christ’s work as a perfect fulfillment of the Law)

만일 알미니안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속죄의 혜택이 보편적이며 무제한적이라면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받게 된 저주를 도말(塗抹)하는 희생이 될 뿐 더 나아가 영생을 주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 된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처음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완전한 순종을 그리스도께 요구하시지 않고 처음과 달리 보다 가벼운 조건 아래 구원을 주시기로 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의 요구를 가볍게 해 주셨으니 은혜로 회복된 신자가 신자 자신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정도의 순종을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말이 된다. 비유로 말하면 병약한 죄인들이 율법을 완수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어느 정도 할인하여 1달러 받을 것을 50센트만 받기로 하시고 인간에게 자력으로 구원 얻을 수 있는 보다 쉬운 길을 열어주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최초의 아담에게 요구하신 완전한 순종의 율법은 영원불변한 것으로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가 너무 엄격하다거나 혹은 그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거나 혹은 율법을 폐하거나 경감시킬 필요가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결코 허락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죄인들 자신 또는 그들을 대신하는 어떤 자가 충분한 벌을 받을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그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아담으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와 그들의 현재의 모든 죄를 도말하셨으며 죄 없으신 그의 생애로서 아담이 불순종으로 파괴한 율법을 그의 백성들을 위해 다 행하심으로 그들을 위한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셨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간 구원의 필요조건은 완전 순종인데 오직 이를 만족시킨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의 옷을 입음으로써만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만한 공로는 티끌만한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율법 순종의 조건을 경감시켜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 앞에 서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행하여 구원 얻게 해 주신 것이다. 칼빈주의의 이 원리는 최초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율법의 절대성과 불변적 절대순종의 의무에 대해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 이 율법은 지금까지 조금도 경감되거나 폐지되지 않았고 그냥 그대로 존중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 탁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을 자에게나 영벌을 받을 자에게나 율법은 지금도 주장되고 순종해야 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만일 구원에 있어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알미니안의 주장이 옳다면 그럼에도 실제로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많은 사람들이 멸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구원 해 주신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관한 지식이 없이 죽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그들에게 효과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결국 하늘의 천사는 그의 뜻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인간들에 의해서는 그의 계획이 방해를 받고 좌절됨으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땅 위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행하실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 즉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의도하신 자는 반드시 구원 된다고 믿는다. 만일 만인구원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태반이 필경에는 헛일이 되고 만다면 그리스도께서 누리신 만족은 얼마나 비참한 만족이겠는가! 찰스 핫지는 말하기를 “아담의 죄는 단순히 모든 인간에 대한 유죄선고를 가능케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실제적 유죄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義)는 단순히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케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의 실제적 구원을 확실하게 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성질에 대한 알미니안의 만인구원의 견해는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선택된 자들이 모두 다 그들의 권리를 행사한다면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겪으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모든 고난은 단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들이 영원히 멸망당할 수도 있으며, 그들을 위해 준비된 천국의 유업을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은 그의 구속 사역에 있어 완전히 실패하실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침례교 설교가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도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면 당신은 결코 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의 일에 대하여 두 번 벌하시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벌하신 것이라면 다시 당신을 벌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는 대가를 두 번,  처음은 구세주의 손의 피 흘리심으로 다음은 또 당신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벌하시고 다시 인간들을 벌하신다면 어찌 그 같은 하나님이 공의로울 수 있는가?”

5. (贖錢, a ransom)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위해 속전(贖錢)이 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많은 사람을 위해’라고 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라고 하지 않은 것에 유의하라. 속전(贖錢)은 노예(奴隸)를 위해 그것이 지불될 때 그를 위해 지불된 노예는 필연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성한 속전(贖錢)이 아니다. 공의(公義)상 이 속전이 누구를 위해 지불되었든지 그에 대한 일체의 부담을 말소(抹消) 시켜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이 단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전(全)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그 공로는 전(全) 인류에게 적용되어 아무도 하나님의 영벌(永罰)을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었지만 하나님이 아직도 벌할 것이 그들에게 남아있다고 여기신다면 이는 대속자와 피대속자에게 이중 형벌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그것은 불공평한 처사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 받은 피대속자에게 더 이상의 죄 값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전(全)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보증이 된 자들 곧 참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6.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the divine purpose in Christ’s sacrifice)

만일 그리스도의 죽임이 전(全) 인류를 구원할 의도이셨다면 그럼에도 사람들 중에 멸망하는 자들이 많음은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실 능력이 모자라시든지 혹은 그 계획대로 실행하실 것을 원하시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항상 끝까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든지 그들은 결국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알미니안은 하나님의 계획은 가변적이며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처음에는 전(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으나 후에 그 계획이 성취되지 못할 것을 미리 아시고 믿고 회개할 것이라고 예견된 자만을 선택(예지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계획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는 존재인 피조물 인간 자유의지의 행동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계획을 수행할 지혜와 능력을 가진 이성적 존재인 인간도 결코 달성하지 못할 일을 의도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목적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하물며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 같은 일을 하실 리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멸망 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저들의 구원을 목적하시지도 않으셨으며 성취하려고 수단을 강구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내가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 자신이 그의 죽음의 목적을 ‘내 양’으로 제한하심으로써 그의 속죄사역의 성질이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어떤 때는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처럼 분명히 그들을 제외시킨 사실을 보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도 또한 목숨을 버리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장차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아기는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죄악 중에서 구원할 의무를 수행하실 분이라고 하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한 것은 그의 속죄 사역이 그의 택한 백성만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실제로 그의 백성을 완전히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가 행하기 위해 오신 이 구속사역을 반드시 다 성취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결코 헛수고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택하신 자들이 성자(聖子)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되고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聖化)되니 선택, 구속, 성화는 언제나 동일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신다. 즉 선택에 들지 않은 사람이 구속에 새로 뛰어들거나 선택 된 사람이 구속에서 빠지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칼빈주의 ‘제한속죄’ 교리와 달리 알미니안의 ‘보편속죄’ 교리는 선택, 구속, 성화 세 과정을 동일인(同一人)에게 적용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내에 있는 완전한 조화를 파괴해 버린다. ‘보편적 구속’은 ‘보편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전(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면 전(全) 인류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그의 주요 기도에서 선택된 자들과 구속된 자들은 동일인임을 선언하셨다. 즉 “너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 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6,9,10)라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고 하셨는데 이 같은 교의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5) 등의 구절과 그리스도께서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고 한 요한복음 15:13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이나 요한과 같은 그의 양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는 바로나 유다와 같은 염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된 교회를 위해 또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면 유기(遺棄) 된 자들을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누어지며 그 중 어느 한쪽에 분명히 긍정되는 것이 다른 쪽에 대해서는 부정된다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다. 이쪽에 속한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저쪽에 속한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자녀들을 위해 수고하며 자기의 몸과 물질을 희생한다고 하면 그의 수고의 동기가 누구나 사랑해야 한다는 박애정신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부정하게 한다.

7. 비(非) 택자의 제외 (the exclusion of the non-elect)

하나님이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사 고난당하게 하시고 죽게 하신 그 사랑은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그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의 택하신 자들만을 위한 특별하고 신비한 절대적인 사랑이다. 이처럼 위대하고 귀중한 진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그 중에 수많은 자가 멸망하는데)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인 자비나 박애(博愛)로 설명하는 것은 모두 비성경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질서하게 모든 대중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그의 신부와 그의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농부는 누구나 자기 밭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밭에서 알곡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까지 귀중히 여겨 돌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밭인데(마 13:38),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은 좋은 씨앗인 하나님이 구원하신 천국의 자녀들을 위하심이지 결코 악마의 자식을 위하심이 아니다. 하나님께 똑같이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에게 차별 없이 구속되는 자는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주시되 태양이 그 빛과 열을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비추듯이 또는 나무가 누구에게나 그늘을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연에 의해 빛을 비추는 태양처럼 전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적(知的)으로 행동하시는 자이시며 하나님에게는 그가 사랑할 대상들을 택하실 수 있는 전적인 권리가 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벌써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를 서로 원수가 되게 하셨다. 그러면 이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 언뜻 보면 여인의 후손은 하와에게서 나서 퍼진 전 인류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내 자손이라고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고 분명하게 해석함으로써 이 후손을 곧 그리스도 한 분만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마귀의 자손이란 말도 역시 여자적(如字的,  글자 그대로)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그의 원수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마술사 엘루마에게 마귀의 자식이요 공의의 원수라고 말하였으며 가룟 유다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칭호를 받았다.(요 6:70) 

성경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하나’로 표현하였으니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것처럼 서로 연합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란 인류의 두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인의 후손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택함 받아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키고 뱀의 후손은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두 부류로 나누시고 서로 원수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똑같이 사랑하시거나 똑같이 구원하실 의도가 없으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보편적 구속’과 뱀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는 서로 양립(兩立)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模型) 인데 여기에 신령한 뜻이 담겨 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위해 희생의 제물을 드렸다. 그는 12지파만을 위해 여호와께 기도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고 오직 그의 택함 받은 백성만을 위해 하신 것이다. 대제사장의 이런 기도는 이스라엘민족에 대한 축복을 확증해 준 것으로 다른 모든 민족은 그 축복에서 제외 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이방인 중에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함하지만 구약의 시점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아들의 기도를 들으시므로 그리스도의 태도는 확실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백성에 한해서만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한(無限)하다고 하여 이를 근거로 세상 모든 사람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의 목적 밖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사랑)는 무수한 택자들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죄와 비참으로부터 영복(永福)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무한(無限)인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인간 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이 은혜에 대한 협력을 거절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회개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신앙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고 주장한다. 또 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을 거절하는 자는 그 거절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되 그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을 경우보다 더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성인(成人)은 이 은혜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을 경우에 받게 될 형벌보다 더 가혹한 벌을 자초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실패로 돌리고 그리스도의 속죄와 영광을 부정하려는 알미니안의 견해가 진리일 수가 없다. 우리는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조건 선택’이나 ‘무제한 속죄’ 교리에서 보다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무조건 선택’과 ‘제한속죄’(制限贖罪) 교리에서 오히려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된다.  

8. 하나님의 예지(豫知)에 대한 논증 (the argument from the foreknowledge of God)

우리가 ‘제한속죄’ 교리를 증명하는 데는 ‘하나님의 예지’(豫知, the foreknowledge of God)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한하시며 그의 지혜는 완전하시다. 사람은 공중에 나는 새 하나하나를 알지 못하고 그저 사격을 가하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하나에 대해 완전히 아신다. 하나님은 인류 중 얼마의 구원 얻을 자를 예지하셨기 때문에(이 사실은 복음적 알미니안도 시인한다.) 또한 멸망할 자들도 예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멸망이 예지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이 분명히 하나님께로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을 초대하신다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옆방에 10개의 오렌지가 있는데 그 중 7개는 품질이 좋고 3개는 썩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는 결코 10개의 품질 좋은 오렌지를 얻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방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50명에게 생일파티 초대장을 보내려고 할 때 그 중 10명의 불참이 확실히 예지되었다면 그 10명에게도 나머지 40명처럼 초대에 응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초대장을 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지는 인정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은 하나님을 어리석은 자로 만들 뿐 아니라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

9. 인류 전체에 미치는 은총 (certain benefits which extend to mankind in general)

결론적으로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중요한 혜택을 인류 전체가 받은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전(全) 인류가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형벌이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저지(沮止)되었다는 사실을 칼빈주의도 인정한다. 즉 그것이 복음 선포를 위한 근거를 형성해 주며 이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의 도덕이 많이 증진되고 악의 영향력이 저지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한다.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그러나 자기를 증거 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17)고 말했다. 하나님은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아무 차별 없이 온 세상에 비쳐주시고 비를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내려주신다. 비록 이 같은 일반은총의 물질적 은혜가 그들의 확실한 구원을 보증하기에는 미흡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 은혜는 차별 없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주신다. 그래서 컨닝햄(William Cunningham, 1805-1861)은 이에 대한 칼빈주의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아주 명확하게 말했다.

“제한속죄를 주장하는 칼빈주의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어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칼빈주의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중요한 은택이 전 인류에 심지어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도 미친다고 믿는다. 칼빈주의가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를 전 인류에게 미치게 하셨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속죄와 화해를 전 인류에게 미치게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많은 복이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은총으로 부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벌서 그에게 예견된 것이었고 전 인류가 그 복을 받아 누리는 것도 그의 계획 중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성품을 나타내며 실제적으로 그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으로 간주하고 받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이 복은 그리스도의 중보 즉 그의 수난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내려진 복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Historical Theology, II, p. 333.)   

이 같이 그리스도가 전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는 데는 일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알미니안의 견해를 이 일반은총까지 부인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속죄에 있어 전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반속죄’의 견해는 단연 배격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에 효력이 미치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유기 된 자들에게 미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는 그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죄인 구속(救贖)의 문제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 유효적 (Efficacious Grace)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의 (teaching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유효적 은혜’(또는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豫定) 된 자는 하나님이 기뻐 용납하시기로 작정(作定)하시는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저희를 확실히 부르시어 저희의 본질상 속해 있는 죄와 죽음에서부터 나오게 하시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또한 저희의 마음을 밝히어 하나님의 도(道)를 깨달아 저희의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유순한 마음을 얻게 하시며 저희의 심지(心志)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저희를 세워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에게 유효하게 나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유효적 은혜’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 유효(有效)한 부르심(召命)은 인간 안에 예지된 어떠한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으신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반드시 성령을 힘입어 새롭게 된 후에라야 이 부르심에 응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주시겠다고 하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Chapter X, Section 1 and 2.)

 또 소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유효적 부르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유효적 부르심’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서 그 일로 인하여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밝히어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권하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능히 받게 하시는 것이다.”(Question 31.)   

2. 중생(변화)의 필연성 (necessity for the change)

그리스도의 순종과 수난의 공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시는데 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하는가? 무슨 이유로 외부적으로는 똑같은 특권을 갖고 있으면서 어떤 사람은 복음을 거절하고 계속 불신앙을 고집하는데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믿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이런 구별을 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가 유효적으로 어떤 자들을 부르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이러한 차이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고 본다.

칼빈주의는 만일 하나님이 타락(墮落)한 인간을 그대로 방임(放任)해 두셨다면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을 계속하여 구원의 모든 길을 거절하고 필경 모두 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도 헛수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사 53:11)는 약속대로 그의 희생의 효과는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유효한 역사’(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해 피택자들에게 유효하게 되어 그들로 회개하게 하시어 영생의 기업을 얻도록 하셨다.

성경에 인간은 그 본래의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부패하여 자력(自力)으로는 거룩해질 수도 행복해질 수도 없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이 그토록 타락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의욕이 생기기 전에 먼저 그 적의(敵意)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되려면 먼저 새롭게 지음을 받아야만 한다. 즉 거듭나야만(重生, born again) 한다.(요 3:3) 

죄와 허물로 인해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이 같이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인 선(善)을 행하게 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옛 성품 그대로 천국에 간다면 그에게는 그곳 역시 지옥과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옛 성품으로는 천국의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천국의 분위기가 아주 싫을 것이며 하나님 존전(尊前)에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큰 고통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을 위한 성령의 내적 사역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마치 죽은 몸이 스스로 생명을 얻고자 활동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구원을 향한 최초의 움직임이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생(重生, born again)은 피택자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다. 이 위대한 재창조(再創造) 사역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중생의 은혜는 선행(善行)이 예견된 어떤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중생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절망상태를 전혀 깨달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흔히 자기가 하려고만 하면 스스로의 의지(意志)로 자신을 개혁할 수 있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자기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예지에서 나온 계획도 거부(拒否)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전능의 행동도 좌절시킬 수 있다고까지 상상한다. 그러나 워필드 박사는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력(自力) 구원을 위한 하나님과의 어떤 조력(助力)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력(他力)에 의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도록 충고하시거나 권면 또는 간청하고 도와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3. 초자연적 능력에 의한 내적 변화 (an inward change wrought by supernatural power)  

성경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한 내적 변화를 재출생(再出生, regeneration)이라 한다.(딛 3:5) 이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것과 동일한 큰 능력으로 행해진 영적 부활이며(엡 1:19,20),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며(벧전 2:9),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며(요 5:24), 거듭난 것이며(重生, born again, 요 3:3), 살리신 것이며(골 2:13),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 것으로서(겔 11:19) 성경은 이처럼 변화된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被造物, new creature)이라(고후 5:17)고 한다.

이상의 성경의 기술(記述)들은 알미니안이 주장 하는 바 “중생은 성령에 의한 도덕적 심화(深化) 또는 단순한 진리의 감화(感化)로부터 생겨나는데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자의적(自意的) 행동이다.”라는 견해를 완전히 배격한다. 이 변화는 새롭게 창조된 생명의 원천인 천래(天來)의 능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이며 영구적이다.  

이러한 인간 영혼의 중생은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어떤 일이다. 결코 우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가 아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는 순간을 우리가 의식(意識) 조차 못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우리의 의식작용이 미치지 않는 보다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에 틀림없다. 나사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피동적으로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중생한 영혼도 단순히 피동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응했을 뿐이다. 중생한 영혼에 대해 찰스 핫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혼은 중생의 변화를 받는 수동체(受動體)요 그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 자가 아니다. 영혼은 그 변화를 선행(先行) 하거나 뒤따르는 데서 협동적이기도 하고 능동적이기도 하나 변화 그 자체는 경험되는 것이지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앞에 나온 장님과 절름발이는 그 앞에 나오기까지 대단한 노력을 했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능력을 기쁘게 활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침 받는 순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 치료를 받는 일에 있어서만은 어떠한 협력도 하지 못했다. 중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Systematic Theology, II, p. 688.)

그는 또 “중생은 전적인 성령사역의 선물로 인간의 영혼은 단지 수동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라는 교의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 ‘신생’(新生, new born)이라는 말이다. 아이는 출생됨으로써 새로운 존재양태로 세상에 들어오는데 이는 결코 아이의 자의적 행동이 아니다. 아이는 그냥 출생될 뿐이다. 암흑 상태에서 나온 아이는 암흑 상태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세상에 나오면 신체의 전(全) 기능이 깨어나 보고 느끼고 들으며 점점 이성적이고 도덕적 존재로서의 전체 기능을 나타내게 된다. 성경은 중생도 이와 같다고 가르친다. 영혼은 중생에 의해 새로운 상태가 된다. 영혼은 새로운 세계로 안내되어 중생하기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상상도 못했던 사물의 전모를 분명히 계시 받게 되고 그것들의 특유한 감화를 받게 된다.”(Systematic Theology, II, p. 35.)

중생은 신분(身分)과 성품(性稟)의 본질적(本質的) 변화다.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좋은 나무여야 한다. 이 변화의 결과로 인간은 연구나 논증에 의하지 않고 내적 경험에 의해 불신앙 상태에서 구원의 신앙상태로 옮겨지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적 출생에 대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출생도 인간은 전혀 관여할 수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영육의 탄생은 우리의 힘을 행사함이 없이 아니 우리의 동의조차 구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출생을 항거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출생도 항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출생한 후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살아가야 하듯이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구원을 성취해 가야 한다.  

성경은 죄인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한 중생이라고 말씀한다.(요 3:5) 이 중생 사역은 전혀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중생시킬 자는 중생시키시고 내버려 두실 자는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그것이 누구에게 주어졌든 하나님의 은혜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줄을 알게 될 것이며(히 11:2),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이웃에게는 주시지 않는 것을 자기에게는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라는 물에 사도 바울은 인간들 사이에 특히 구속될 자들과 멸망될 자들 사이에 차별을 두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예수를 믿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킨 까닭이요 만일 누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반드시 은혜를 주셔야 할 의무가 전혀 없다. 엄밀히 말해 스스로 의인(義人)이 된 자는 없기 때문에 가장 고상한 대답은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는 대답이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셨을 때 그 명령과 함께 강한 능력이 나가 놀랄만한 효력을 냈다. 그때 나사로는 자기 능력이 아닌 어떤 다른 능력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가 모든 사정을 알았을 때는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먼저 역사한 다음에 나사로는 그 능력을 힘입어 활동하였으니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응답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 받은 모든 영혼들도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죽은 나사로가 우선 생명을 회복한 후에 숨을 쉬고 식물을 먹은 것처럼 죄로 죽어있던 영혼도 우선 영적 생명을 회복한 후에 믿고 회개하여 선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중생에 관한한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는 아무 효력도 낼 수 없다. 곡식을 수확함에 있어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외부작업 뿐이다. 주권적인 능력으로 곡식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고 익어 거두어들이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영혼의 수확인 회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전도자의 설교가 아무리 설득력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죄인의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회심은 일어날 수 없다. 영혼이 회개하고 장성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단지 외적이요 기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고 내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타락교리는 도덕적으로 파괴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의 중생을 위해서는 어떠한 선행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무능력을 알며 자기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마치 나뭇가지가 스스로 발아(發芽) 하거나 잎이 피는 것이 아니라 뿌리로부터 생명의 영양을 받아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는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없고 다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칼빈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피택자들은 복음을 듣고 믿으나 복음을 들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비로소 듣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때에 같은 사람에게 복음을 들으나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복음의 증거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저들의 내적 성품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반역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고 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에도 있다. 즉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겔 36:26)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마음(heart)은 바로 우리의 ‘속사람’을 가리킨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언약에 의해 성자 그리스도는 확장되어 가는 천국을 지도하시기 위해 온 땅 위에 중보적인 통치자로 높임을 받으셨는데 이는 그의 복종과 수난에 대한 상급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성령을 통해 실시되는데 언약 안에서 미리 정해진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환경아래 구원을 얻도록 의도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 구속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사람을 신앙으로 인도하시는 능력은 보통 능력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은 예외적 능력이라고 성경은 말한다.(엡 1:19,20) 이 능력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힘 있게 나타난 것처럼 우리 육체의 부활에서도 힘 있게 나타날 것이다.

물질세계와 영의 세계는 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물질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물이 포도즙으로 변했으며 문둥이가 깨끗이 치료되었다. 알미니안은 물질세계의 하나님의 이적의 능력은 믿으면서 어째서 사람의 영혼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이적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만족 된다면 하나님이 악인도 선인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같은 능력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다스리는데 있어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시는 수단 중 하나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개인의 복지나 천국의 건설을 위해 이 능력을 사용하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는 이 능력을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사용해야 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이 이 능력을 사용하시려고 하신다면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시매 곧 빛이 있었던 것과 같다. 모즐리(Mozley)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불가항력적 은혜로 인하는 것이니 이 은혜를 받기로 예정된 자면 누구나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의 멍에를 벗어나서 회심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최후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없다.”고 했다.(The Augustinian Doctrine of Predestination, p. 8.) 

한 번 실명된 인간의 눈은 아무리 강렬한 빛을 오래 비춘다 해도 그 시력을 회복할 수 없듯이 한 번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은 복음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영적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 의사의 수술이나 기적으로 시력을 회복하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중생하기 전에는 결코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이 죄인을 중생시키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새 생명을 부어주신다.(참고 창 2:7) 그러면 즉시 죄인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게 된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하나님이 먼저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된 것이다.(행 16:14) 이 진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요 17:2),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는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신 언약을 보면 인간의 운명은 거의 자신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담이 시험 받은 결과를 잘 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의로운 자이면서도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지 못했다면 타락 후의 인간이 어떻게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 문제를 인간에게 맡겨두시지 않고 자기 수중으로 회수하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시 자유의지를 부여하시고 인간 스스로 구원 얻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이미 한 번 시험하여 실패한 것을 다시 시험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 거의 죽게 된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건짐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원기를 회복하자 다시 시험해보기 위해 그를 다시 급류에 빠뜨렸다 구출 한다면 그처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실패한 인간 구원의 똑같은 방법을 결코 다시 사용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구원의 성취자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제1차 구원계획을 세우실 때 아담의 도덕상태(타락 이전의 의로운 상태)를 고려하셨던 것처럼 제2차 구원계획을 세우실 때도 인간의 도덕상태(타락되어 무능력한 상태)를 고려하여 그에 적합하게 하셨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에나 인간에게는 자기 의지를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권 밖에 둘 능력이 없다. 사울은 그가 최고로 열심히 박해하던 시점에서 부름을 받아 사도 바울이 되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그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누구든지 예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했다.(행 13:48)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셨다면 그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신다. 즉 하나님은 전(全) 인류를 구원하려 하시지 않는다. 비록 그 이유가 성경에 부분적으로 밖에는 계시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의 전 사역을 통해 이성적 책임이 있는 존재인 인간의 성질과 모순되는 일을 결코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알미니안의 큰 실수 중 하나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중생이란 각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변화로 도덕적 신념이나 진리의 일반적 힘에 이끌려서 죄인의 마음의 의도가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의 반대 선택의 능력’(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 등을 주장함으로 결국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좀 더 철저히 주장하게 되면 인간과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등(對等)한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구원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간 의지(意志)에 돌림으로써 인간이 그리스와 함께 구원의 공로(功勞)를 나눠 갖는 셈이 된다.  

만일 알미니안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진정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의향이시었다면 하나님은 현재 그의 사역에 큰 실패를 당하시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비율적으로 성인(成人) 한 사람이 구원 받으면 25명이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하나님의 존엄을 크게 손상시키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에 따라 수납(受納)할 수도 있고 거부(拒否)할 수도 있다는 알미니안의 교리에 대해 톱레이디(Toplady)는 이렇게 말했다.

“알미니안의 구원관은 전능자를 무모한 의욕과 시험과 헛수고 만하는 자로 만드는 교리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이 모든 죄인을 다 구원하시려다가 죄인들에게 방해를 받고 거듭 실패하시는 분이 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붙잡기 위해 끈질기게 포위 공격을 하시지만 그 영혼은 난공불락의 자유의지라는 아성에서 하나님을 향해 완강한 저항과 과감한 돌격을 감행함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포위망을 해제시킬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한 마디로 성령은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자유의지를 뒤쫓다가 패장(敗將)이나 실각한 정치인처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면목 없는 패주를 하던가 아니면 굴욕적인 파면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죄인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거부하거나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권세는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 권세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창 18:14)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할 자가 없도다.”(단 4:35)고 한 구절들과 성경의 다른 여러 구절을 볼 때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권면하고 간청하시다가 피조물이 응하지 않으면 결국 그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신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召命, calling)이 유효적(有效的)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나는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뜻대로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니엘을 구하려고 애썼으나(단 6:14) 끝내 구하지 못했던 다리오 왕과 같은 궁지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처럼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에게 패배하실 것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피조자(被造者)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고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그들의 행동에 대해 보상을 받거나 처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에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회심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에게 간청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4. 영혼의 내적 변화의 결과 (the effect produced in the soul)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죄로부터 깨끗이 씻어주시는 이 내적 변화가 즉시 나타내는 중대한 효력은 의(義)를 사랑하게 되고 구원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의 성품이 죄에 속해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죄를 미워하고 성결하게 되며 선(善)을 사랑하게 된다. 이 ‘유효적’이며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어떤 협력이 없이 독자적으로 역사해서 인간의 의지 그 자체를 변화시켜 그 속에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 놓는 것이다. 즉 이 은혜는 인간으로부터 죄(罪) 된 것을 좋아하는 욕망을 제거시켜 놓는다.

그런데 거듭난 자의 이런 변화가 위장병 환자가 병세가 더해질까 염려되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먹지 않는 것처럼 억지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 전에는 두려워하고 저항했던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이제는 거룩하고 철저히 복종하기를 사랑하고 기뻐한다. 내적 변화를 겪은 그에게 있어서 이제 순종은 의무가 아닌 즐겨 원하는 선(善)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악(惡)의 유혹을 피할 수 없으며 자기 안에는 옛 본성의 잔재들이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 자주 미혹을 당하며 죄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죄는 이미 치명적 타격을 받아 오래지 않아 죽게 될 옛 성품의 최후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중생한 자들도 역시 고통, 질병, 낙심, 심지어 죽음까지 맛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성결을 향해 달려가는데 그것이 곧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은 성도의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그런데 이 같은 중생과 성화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죄인의 중생(重生)은 전혀 하나님이 독자적인 일로서 영적 생명의 새 원리를 인간 영혼 속에 값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완성되며 단회적(單回的)이다.

그러나 성화(聖化)는 성도가 외부생활에 나타나는 죄의 잔재를 점진적으로 제거시켜 소요리문답에서 말하는 것처럼 죄에 대해서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해서는 점점 더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가 함께하는 일이다. 성화는 우리의 마음이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악에 대해 중생으로 심겨진 새 성품이 점점 승리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완전한 성화는 중생한 자의 생명이 하나님께 돌아갈 때라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완전한 의(義)가 우리 앞에 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의 영혼을 어떠한 죄의 흔적도 없이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죄를 범할 가능성마저 없애주는 성화는 죽음의 시간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구원은 구원 얻은 자가 부활의 몸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속(救贖)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실 때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택함 받은 자들에게 성령이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를 점진적으로 적용하신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장 유효적으로 적용하시기 때문에 패잔병을 진멸하듯 그들의 구원은 가장 확실하게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피조자에 의해 좌절되거나 헛수고로 돌아기지 않는다.

     5.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충족성 (the sufficiency of Christ’s work evangelicalism)

그리스도께서 그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대해 져야할 부채(負債)를 완전히 갚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解放)시켜 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일생동안 흠 없이 사시고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永生)이라는 상급을 받게 해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늘의 생명을 얻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사역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 부르는데 이 사역의 충족성(充足性)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자기희생으로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렸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화해뿐만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기업까지 획득하셨다.”(Chapter VIII, Sect. 5.)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생이라는 상급이 없이 단지 우리의 죄만 도말하시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셨다면 우리는 원점(原點,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수준)으로 돌아갈 뿐이므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영생을 위해 아담처럼 시험을 받아야 할 의무가 다시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골 3:11)고 한 바울의 말은 구원 사역에 대해 인간은 전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구원 받을만한 아무 공로도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1:15에 관한 워필드의 다음의 말은 특히 이 경우에 적절하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위대한 말 가운데 포함되는 모들 일을 다 행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스스로 구원할 것을 권하기 위해 혹은 그것을 돕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예수’(구원자)라고 칭하였다. 즉 그가 그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자라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은 추호도 우리가 하나님께 수용(受容) 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예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다. 그 전부를 행하신 것 때문에 예수는 가장 충실하고 광대하고 깊은 의미에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즉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는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특별히 복음이 ‘좋은 권면’이 아니라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어주신 자는 누구나 확실하게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의(義)가 필경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수행하신 그 사역의 충족성(充足性)을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신 구속사역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The Power of God Unto Salvation, p. 48-50.) 

그러나 알미니안은 인간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같은 구속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능력 즉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톱레이디(Toplady)는 이런 주장에 대해 이 말은 곧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구속사역을 다 이루지 못했다. 물론 그는 그 사역의 일부분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이 거기에 첨부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수고는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라는 말이라고 했다.(이 주장은 자신을 감람나무라고 자칭했던 박태선이 주장했던 말이기도 하다. 편집자)  

구원에 관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장은 구원에 관한 능력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적’이란 말은 ‘구원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일 구원이 인간의 선택에 의존하는 신앙과 순종이 반드시 첨부되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구원(救援)이 아니다. 제한 없는 속죄를 믿는 알미니안의 주장과 같은 이러한 복음주의는 결국 ‘보편적 구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알미니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는데 성령은 그 구속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시려고 애쓰시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구원 받은 자들보다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미니안의 ‘보편적 구원론’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있어 ‘제한 속죄’를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하신 바를 다 이루시고 모두 성취하셨다고 믿는 칼빈주의만이 성경의 가르침과 경험적 사실에 일치하는 것이다.  

6. 보편적 은혜에 대한 알미니안의 견해 (the Arminian view of universal grace)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에 있어 보편주의 색채가 아주 농후하다. 그 전형적인 예를 보스톤 대학의 교수로 오랫동안 봉직했던 헨리 쉘돈(Henry C. Sheldon)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논점은 영생을 위해 개개인을 제한적이며 무조건적으로 선택한다는 (칼빈주의) 주장에 대항하여 구원의 기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려는 것이다.”(System of Christian Doctrine, p. 417.)

이 주장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 첫째는 알미니안의 특징인 보편주의를 강조했다는 점과 둘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실제적으로는 아무도 구원하시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력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데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점인데 그것은 순전히 자연주의(naturalism)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알미니안주의의 체계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칼빈주의의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항의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복음동맹’(the creed of the Evangelical Union body) 소위 ‘모라소니안(Morisonians) 신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신조의 세 가지 보편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차별이나 예외 규정 또는 편애 없이 모든 곳의 모든 인간에게 예수의 희생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 성자 하나님의 사랑은 전(全) 인류의 죄를 위해 진정한 화해의 제물로 자신을 주신 일이다.
  • 성령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의 영혼에 적용하는 그의 인격적 계속적 사역이다.(The Religious Controversies of Scotland, p. 187.) 

만일 위에서 말한 것처럼 된다면 그 결론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무 소용이 없어서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지 못하고 인간들 스스로가 자기를 구원하도록 내버려두시든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주장하는 복음주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일 하나님의 그의 구원사역을 모두 마치신 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인간에게 일임하셨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거부권을 주는 것으로써 구원이 결국 인간의 수중(手中)에 달린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체계에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사역의 대부분을 하신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 최후 결정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원 받을 자는 어느 정도 자기의 개인적 공로를 갖게 되고 구원 받지 못한 자에게 자랑할 조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너는 나와 같은 기회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는 거절하고 나는 받아들였다. 고로 네가 고통당하는 것은 마땅하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9)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고 한 성경말씀과 얼마나 다른가?

구원에 있어 인간이 의기양양해서 자기 자신을 조정할 수 있는 지배권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선언하는 이런 보편주의 체계는 기독교를 ‘행위 종교’(religion of works)로 전락시키게 된다. 루터가 그 당시의 도덕주의자들에게 대해 풍자적으로 “그들은 가련한 우리의 주 하나님을 돕기 위해 그들 스스로 선을 행하려고 애쓴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장키우스(Zanchius)는 이렇게 말했다.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일을 행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속죄로 용납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행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날 때부터의 자연적 능력으로 인해 현세에서 자신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월필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실로 근본적인 것으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주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우리 인간 자신인가?’하는 것이다. 또 ‘주 하나님은 우리를 끝가지 구원해 주시는가? 아니면 단순히 구원의 길만 열어주고는 구원 얻고 못 얻는 것은 완전히 우리의 선택에 맡기시는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냐?’ 아니면 이방 종교와 같은 ‘자력구원이냐?’의 분기점이 되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의식(意識)을 가지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는 자들만이 복음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The Plan of Salvation, p. 108.)

7. (유효적 은혜는) 인간의 자유행동 침해가 아니다. (no violation of man’s free agency)

‘유효적 은혜’(efficacious grace or irresistible grace) 교리에 대해 반대자들은 인간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에게 강요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결국 인간을 기계(機械)로 전락시킨 교리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억지로 왜곡하여 꾸며낸 말이다. 이것은 칼빈주의와 모순되는 것으로 칼빈주의는 오히려 구원에 있어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켰다는 이런 견해를 배제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회심을 일으키는 ‘유효적 은혜’(또는 ‘불가항력적 은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로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고 기록한 후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이 그렇게 할 마음을 갖게 되어 임의적으로 회심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하나님의 죄인을 중생하게 하시는 능력은 외부의 강제적인 능력이 아니다. 중생하게 하는 능력이 영혼을 억압하는 것이 아님은 성경의 교훈이 이성을 억압하거니 성령 하나님의 설득이 마음을 억압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유효적 은혜’(또는 ‘불가항력적 은혜’)는 알미니안이 비판하는 것처럼 결코 인간을 기계나 노예처럼 취급해 그의 의지(意志)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구원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에 계시(啓示)를 받아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자신의 죄에 관한 모든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시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찬미하게끔 그들을 감화시키신다. 중생한 자는 자기가 새로운 동기와 욕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전에는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좋아하고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변화는 어떤 외부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혼 안에 창조된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법처럼 신앙세계의 영적인 법도 선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자에게 두려움이 된다. 우리는 인간사에서 이와 비슷한 예를 볼 수 있다. 법을 준수하는 시민과 법을 지키지 않는 범법자를 비교해 보면 법을 준수하는 시민은 자기나라 법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매일 자기 일을 해 나간다. 그는 또 정부 관리나 경찰을 친구처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존경하고 기뻐하는 당국이 임명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사에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생활한다. 그에게 있어 법은 그의 생명과 그의 가족과 그의 재산을 지켜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범법자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아마 법을 준수하는 사람보다 법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르며 법망을 피하기 위해 법에 대해 자세히 연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두려움 속에서 산다. 그는 경찰이 갑자기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방탄용 문이 달린 비밀 방을 만들어 놓고 총을 갖고 다닌다. 그는 항상 노예처럼 두려움에 속박되어 산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란 고작해야 경찰관을 제거하고 법관을 뇌물로 매수(買收)하여 자기의 희생물로 삼고 있는 그 사회의 법이나 관습들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요인이 예를 들어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면 전에는 하기 싫어하며 대적했던 일들을 이제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하게 된다는 것을 일상생활 속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원리에 의하면 알미니안의 비난처럼 ‘효율적 은혜’ 교리에 의해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강제적으로 회개하고 믿게 된다는 식의 말은 전혀 온당치 못한 말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만일 너희가 복종하지 않으면’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만일 너희가 악을 행하면’ 등과 같은 성구들은 적어도 인간이 자유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시키신다고 해서 인간에게 그것을 행할 능력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부모는 때때로 자녀로 하여금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해서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게 할 목적으로 자녀들에게 그들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무엇을 행하라고 명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명령을 들을 때 그것에 복종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마치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만했던 율법사처럼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이런 명령을 들을 때 도리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아버지! 이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맡아 주십시오.”하며 도움을 청한다. 그러므로 이런 명령들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치는 구절들이다.

이 진리를 볼 수 없을 만큼 눈이 어두워진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진리를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다 절망한 죄인들의 부르짖음에 답하여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값없으신 사랑과 자비로 된 즉 오직 하나님 은혜로만 가능한 구원을 계시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게 된 것을 아는 자는 다윗처럼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유효적(有效的)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irresistible grace)라고도 한다. 이 ‘불가항력적’이란 말은 어떤 강압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역사함으로써 인간의 의지(意志)나 욕구에 반(反)하여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좀 오해하기 쉬우나 이의 참 의미하는 바는 앞서 기술(記述)한 바와 같다.

8. 일반은총(一般恩寵, common grace)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특별은혜’(特別恩惠, special grace)와 달리 모든 인간에게 어느 정도 동일하게 주시는 ‘일반은총’(一般恩寵, common grace)이라는 성령의 일반적 감화가 있다. 하나님은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똑같이 햇빛을 비춰주시며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 하나님은 전(全) 인류의 일반적 복지를 위해 수확의 계절과 기타 여러 모양의 필요한 것들을 주신다.  

예를 들면 건강, 물질적 번영, 일반적 지능, 예술적 재능, 상업 및 발명의 재능 등이 가장 일반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며 복이다. 많은 경우에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보다 이런 방면의 복을 훨씬 더 풍부하게 받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악(靈惡)하기 때문이다.

일반은총은 모든 질서나 문화 및 일반적인 덕의 원천이므로 그로 말미암아 마음과 양심에 진리에 대한 도덕적 능력이 증대되고 악에 대한 열심이 억제(抑制) 된다. 그것은 구원을 얻게 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나 이 세상이 지옥이 되는 것을 막아 준다. 그것은 죄가 그 악독을 있는 그대로 다 발휘하지 못하도록 죄의 효력을 억제(抑制) 한다.

그러나 일반은총으로는 죄의 원천(源泉)을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회심(回心)을 일으키지 못한다. 또 일반은총은 자연의 빛인 양심을 통해 특히 복음의 외부적 제시를 통해 인간에게 그가 마땅히 행할 바를 알게는 해 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는 못한다. 더구나 일반은총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거부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성령의 특별한 조명(照明)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효력을 낼 수 있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복음이 오히려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고전 1:23) 따라서 중생하지 못한 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義)가 전혀 의(義)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을 능히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이러한 ‘유효적 은혜’와 ‘일반은총’을 구분하지 않고 ‘유효적 은혜’를 기껏해야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도움 정도로 생각한다. 반면에 칼빈주의는 ‘유효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확실하게 성취된다고 본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은총’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개선(改善)에 대해 찰스 핫지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부도덕한 생활을 하던 자가 그들의 전(全) 생활 과정을 개선(改善)하는 일이 간혹 있다. 그들은 외부적으로 품행이 바르고 절제하며 순결하고 정직하며 친절하게 된다. 이것은 상을 줄만한 일대 변화이다. 이것은 자타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다. 이런 변화는 서로 다른 여러 모양의 원인에 의해 혹은 양심의 힘으로, 혹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거나 그의 진노를 두려워함으로, 혹은 타인의 선한 의사에 따라, 혹은 자기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에 생길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그것은 성도의 성화(聖化)에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양자(兩者)는 청결한 마음과 청결한 의복 사이만큼이나 성질상 전혀 다르다. 비록 그가 외부적으로는 개선(改善)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그의 내부적인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아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웃에 대한 거룩한 애정이나 행동 등은 여전히 없다.”(Systematic Theology, III, p. 214.)

또 휼리트 박사(Dr. Hewlitt)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나 지축을 진동하는 뇌성으로 무덤에 있는 시체가 소생(蘇生)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이 복음의 운율이나 율법의 뇌성으로 그 마음이 움직이겠는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는가?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고 말한다.(Sound Doctrine, p. 21.) 

사물엘 크레이그(Samuel G. Craig) 박사는 일반은총의 한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려하지 않는 비기독교적인 교육이나 문화는 인간을 영리하게는 만들지만 인간의 성품(性稟)을 변화시킬 능력은 전혀 없다. 그것은 마치 대접의 밖은 깨끗하게 할 수 있으나 대접의 안은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교육과 문화의 힘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돌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로 만들려면 전지(剪枝) 해 주거나 소독약을 뿌리고 재배해 주는 등 외부적인 개조보다도 우선 참 감람나무 가지에 돌 감람나무를 접목(椄木) 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결코 교육과 문화의 가치를 경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방(堤防)의 경치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강물이 깨끗하게 될 수 없듯이 교육이나 문화를 가지고 인간의 마음을 개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옛 유대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쓴 열매를 맺는 나무를 캐다가 에덴동산에 옮겨 심고 에덴동산의 물을 주고 천사 가브리엘로 하여금 지키게 해보라. 그래도 그 나무는 여전히 쓴 열매를 맺을 것이다.’”(Jesus as He Was and Is, p. 191, 199.)

   .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1. 본 교리의 서술(Statement of The Doctrin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신 자들은 전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될 수 없다. 오히려 최후까지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을 얻게 된다.”(Chapter XVII, Section 1.)  다시 말하면 일단 참 그리스도인이 되면 두 번 다시 아주 타락하여 멸망의 자리로까지 떨어지는 일이 없고 비록 일시적으로 죄에 빠지는 일이 있다 해도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독자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신학체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유기적 부분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효적 은혜’ 교리는 논리적으로 견인 교리의 복을 받은 자들의 확실한 구원을 뜻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주권적으로 조건 없이 죄인을 영생하도록 선택하시고 그에게 성령이 구원의 은혜를 유효적으로 적용시키신다면 그가 구원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교리는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해 왔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사실상 이 교리를 부인해 왔다.

이 세상에서 안전과 보호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 도피한 자들은 그 위에 무너지지 않는 집을 건축할 견고한 기초 위에 서게 된다. 제아무리 불의한 것들이 땅을 뒤덮고 사탄이 온 세상의 권세와 힘을 다해 공격하고 또 그들 자신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악이 그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까지 견인(堅忍)되어 창세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 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보다 더 행복하기는 하겠지만 그 안전함에 있어서는 둘이 동일하다.  

본래 신앙(信仰)과 회개(悔改)는 인간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런 선물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이것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의 목적을 실행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선택된 자들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한 번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 안에는 영생의 원리에 의해 성령 하나님이 내주(內住)하신다. 이처럼 성령 하나님이 그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잠재적으로 거룩한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아직도 많은 시련에 연단되어야 하고 자신들의 미래의 실상을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선하신 일(구원)이 결국에는 완성될 것이라는 것과 현재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 바로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며 승리의 약속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알미니안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도 멸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그들이 아직 구원 상태에 있을 때 세상에서 불러 가시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없다든가 또는 하나님이 그들의 배교를 예견하시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 가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하나님은 왜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다시 죄에 빠져 멸망당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하늘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을 그 이상 더 잘 보호하실 수는 없다고 누가 믿겠는가?” 이 물에도 대답해야 할 것이다.  

알미니안의 주장은 인간이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가 내일은 악마의 아들이 될 수도 있으며 자기 마음이 변하는 대로 이렇게도 되었다가 갑자기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의롭게 되어 거룩하게 변하다가도 구원의 결정적 요인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 버림받은 자가 되어 영원히 멸망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절대주권으로 택함 받은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그의 구속 받은 자녀들이 다시 타락하여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방관하시거나 버려두시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 된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멸망당할 것을 아신다면 그가 배교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그토록 깊은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실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오늘은 친구인 어떤 사람이 내일은 대적이 되어 나를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우리는 절친한 친구사이의 당연한 친절과 신뢰로 그를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배신하리라는 그의 장래 행동을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친구로서의 우정과 친밀함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아래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그들의 자유행동 의지를 침해하시지 않고 그처럼 보호해 주시고 계시다면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은 그들의 자유행동 의지를 침해하시지 않고 보호해 주실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중생할 때 주어진 새 생명은 그 성질상 하나님이 보증하신 영원한 생명이다. 중생은 내적 성질의 근본적이며 초자연적 변화인데 그로 말미암아 영혼은 영적으로 살게 된다. 이 때 영혼에 부여된 새 생명은 불멸의 것이다. 이 변화는 내적 성질에서 이루어진 변화이므로 인간 의지(意志)의 지배 영역 밖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권능에 속한 것이므로 어떠한 피조 자에게도 그 성질의 근본 원리를 변화시킬 권리나 능력이나 자유가 없다.  

그러므로 성도의 이러한 새 생명을 잃게 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만 가능하다. 구원 받은 성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관계가 상실될 수 없는 것은 마치 육신의 자녀와 그 부모의 관계가 상실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타락하여 멸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중생할 때 영혼에게 부여되는 영적 생명의 원리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2.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는 성도의 견인 (our perseverance not dependent on our own good works but on God’s grace)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은 전적으로 인간의 선행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달려 있다. 성도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바울은 가르치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는 일에 대해 정죄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너희는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느니라.”(롬 6:14)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성도의 공과(功過)에 따라 처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죄가 더 이상 구원 받은 성도의 멸망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 7:8) 즉 법이 폐기된 곳에서는 죄가 더 이상 인간에게 형벌을 받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일 구원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도 자기 행위로 획득해 보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해야할 의무가 있는 자이다.”(갈 5:3) 즉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율법에 복종하여 구원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정반대인 두 개의 구원의 도가 있음을 보게 된다. 즉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요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이다. 그런데 성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사랑이 그들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실재만큼이나 불변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무조건(無條件)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것을 붙잡는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하며 확실하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 그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대상에게 있는 어떤 매력을 근거로 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릴 4: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여기서 강조된 점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입장이 ‘우리의 공로’를 근거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영적 생명에 들어간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였다. 이렇게 큰일을 하신 하나님이 보다 작은 일을 하시지 못하신다는 말인가? 히브리서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한 것도 택함 받은 자의 궁극적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 즉 우리의 구원의 전(全)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인도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그 시작이나 계속이 우리의 공로(功勞)로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 은혜를 철회하고 그 조치의 방법을 변경하시지 않는 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 아래에 다시 두시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멸망할 수 없다. 로버트 댑니(Robert L. Dabney)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유효적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이요 과분한 사랑이다.(렘 31:3, 롬 8:30) 하나님의 이 사랑이 영원불변인 것처럼 결과 또한 영원불변이다. 결과는 그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계속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함 받은 자에게 중생의 은혜를 주실 때 그 사람 속에 무슨 볼만한 것이 있거나 공로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후에 그의 속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 해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이 그 은혜를 철회하시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 은혜를 죄인에게 주실 때 그 죄인이 전적으로 부패(腐敗) 한 자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거스르는 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따라서 그가 회심한 후에 다시 망언의 죄와 불신실의 죄를 범한다고 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이 징계는 하실지언정 그의 마음을 바꾸시어 주신 구속의 은혜를 철회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 증거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이나 섭리적 연민(憐憫)을 잠시 철회하심으로써 그러한 망언을 징계는 하신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러한 망언을 참고 견디며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려고 뜻하지 않으셨다면 애초에 은혜로 죄인을 부르셨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요컨대 하나님이 그 선택의 사랑을 죄인에게 주시려고 작정하신 이유는 전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믿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믿는 자의 마음이나 행위에 있는 어떤 것도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궁극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다.(사 54:10, 롬 11:29) 또 로마서 5:8-10, 8:28-39절을 주의하여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유명한 구절이 우리의 주장을 잘 논증해 주고 있지 않은가!”(Theology, p. 690.)

또 찰스 핫지(Charles Hodge)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비교될 수 있다. 어머니는 그의 자녀가 항상 착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자녀를 사랑할만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성령의 은혜로써 그 대상을 꾸미시고 모든 성결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히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善行)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공로에 의존하는 것으로 추측하게 만드는 통탄할만한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Systematic Theology, III, p. 112.)

택함을 받은 자의 구원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의 예정은 견고하고 확실하므로 그 예정의 필연적 결과도 변동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너무 연약하여 만일 구원이 우리 손에 맡겨진다면 아무도 구원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에게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성도의 견인’ 교리를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성결(聖潔, 또는 성화)에 대한 견인과 구원의 보증이 우리 인간의 연약한 성질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지지력(支持力)에 달려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와 함께 “여호와께서 조금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될 뻔하였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럼에도 알미니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전히 은혜만을 믿는 체계가 아니고 ‘은혜’와 ‘행위’(行爲)를 동시에 믿는 체계이므로 이런 체계에서는 사람이 적어도 자기가 최소한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입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3. 성도의 타락과 범죄 가능성 (though truly saved the christian may temporarily backslide and commit sin)  

성도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하여 범죄 할 수 있다. ‘성도의 견인’ 교리가 성도는 절대 범죄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슬프게도 성도들도 자주 죄를 범한다.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성도도 일시적으로 타락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영구히 타락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극히 약한 성도조차도 그의 견인의 은혜를 그 마음에 역사하게 하심으로써 그를 궁극적 배교로부터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고후 4:7)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으로 성도도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善)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惡)은 행하는 도다.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범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9-25)   

성도는 누구나 사도 바울의 이 고백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읽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도가 죄를 범하는 것은 물론 슬픈 일이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큰 모순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이다.”(히 6:6)라고 까지 말했다. 다윗이 범죄하고 회개한 후 선지자 나단은 그의 죄가 사하심은 받았으나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거리를 얻게 하였다.”(삼하 12:14)고 했다. 다윗과 베드로는 일시적으로 타락했으나 중생한 그들 본성의 기본원리(the basic principles of their natures)가 그들을 다시 주께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유다는 그 본성의 기본원리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타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죄와 전투태세에 있다. 일시적으로 넘어져 한동안 신앙을 아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그가 참으로 구원을 얻었었다면 은혜에서 완전히 떠날 수가 없다. 만일 그가 일찍이 중생에 의한 내적 변화를 경험했었다면 조만간에 그는 교회로 다시 돌아와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본래 정신으로 돌아오면 자신의 구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죄를 고백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미 저지른 그의 죄의 행실은 자신을 심히 손상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했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개인적 구원에 관한한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의 일생의 공력이 나쁜 행실로 건축되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불타겠지만 그 자신은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3:12-15) 예수님도 이 진리를 목자가 찾아가지고 돌아온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밝히 가르쳐주셨다.

만일 성도가 아주 타락하게 된다면 ‘성령의 전’(殿)이라 칭함 받던 그의 몸은 ‘악마의 전’이 되고 악마는 이일로 기뻐 날뛰며 하나님을 모독하게 될 것이다.(고전 6:19) 그러나 스트롱(A. H. Strong)의 말과 같이 성도는 아주 망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도는 등산하는 사람이 비록 이따금씩 미끄러져 내려오지만 항상 정상을 향해 다시 올라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자는 아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미끄러져 아래로 내려가기만 한다.” 또 스펄전은 “그리스도인은 배 위에 있는 사람이 때때로 갑판 위에서 넘어지기는 하지만 바다에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택함을 받은 자는 탕자(눅 15:11 이하)처럼 잠시 이 세상에 미혹되고 자신의 욕심에 빠질 수 있다. 그는 쥐엄 열매로 살아보려 했지만 그것으로 허기를 채울 수 없어 조만간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변치 않는 사랑의 환대를 받게 된다. 그 영혼에 메아리치는 그를 환영하는 음성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아버지의 그 음성이 돌아 온 아들의 마음을 녹인다. 그 탕자가 ‘자식’이기 때문에 부자의 관계가 끝가지 끊어질 수 없었다는 이 비유는 철저히 칼빈주의적이다. 그러나 자식이 아닌 자는 절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인들처럼 우리의 판단이 때로는 잘못될 수도 있으며(갈 3:1), 에베소 교인들처럼 우리의 사랑이 식을 수도 있고(계 2:4), 교회가 잠들고(아 5:3), 때로는 은혜를 아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일식은 있어도 태양은 다시 옛 광채를 나타내고 겨울에 바싹 말랐던 나무도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듯 이스라엘이 적 앞에서 패하고 달아난 것이 비일비재 했으나 마침내 약속의 땅을 정복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역시 여러 번 넘어지나 마침내 구원에 이른다.

그러므로 한 번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가 중도에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 구원이 취소되고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택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피했으나 그 명령에 복종하기까지 물고기 뱃속에 있어야만 했던 요나처럼 성도들도 결국은 구주께로 다시 돌아와 죄를 고백하고 사함 받아 구원이 성취 되고야마는 것이다.”(F. E. Hamilton, Article, ‘The Reformed Faith and the Presbyterian Church’)

4. 참 된 그리스인 됨의 보증 (an outward profession of righteousness not always a christian proof that the person is a true christian)

참된 성도로 보이던 자가 마지막에 배교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잘못 판단하거나 참 성도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성경과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비록 참 성도를 첫 눈에 알아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가라지는 결코 곡식이 아니며 나쁜 고기는 결코 좋은 고기가 아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보일만큼 교묘히 자신을 위장할 수 있다.(고후 11:14) 따라서 사탄의 종이 가장 그럴듯하게 거룩하고 헌신적인 것 같으며 경건하고 열심히 의를 행하는 자처럼 자신을 위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단지 외적 고백이 반드시 그 영혼이 구원되었음을 보증해주는 증표(證票)는 아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예수님 당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처럼 육체에 모양만 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속일 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케 하리라.”(마 24:24)고 경고하시면서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막 7:6,7)라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셨다.

사도 바울도 이런 자들을 가리켜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 11:13)이라고 하며 주의할 것을 경고했다. 그는 또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롬 9:6,7)고 했다. 사도 요한은 “자칭 사도라 하되 사도가 아닌 자들이 있다.”(계 2:2)고 하면서 잠시 후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고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신앙에 대해 책망하셨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 비록 사람은 기만(欺瞞)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계 2:9)에 속한 자들을 아신다. 우리는 기독교적 지식과 경험 및 성격을 갖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자칭 신자라고 주장하는 시대이며 또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교회와 세상과의 구별이 소멸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여러 번 외모에 속아서 만일 그들이 하는 일의 배후에 숨어 있는 동기를 알았다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을 경우를 경험하는데 사무엘처럼 “참으로 주께서 기름 부은 자가 우리 앞에 있도다.”하고 사람의 외모만 보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아무리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주의해도 사람의 중심을 볼 수도 알 수 없기에 종종 사람을 잘못 판단하곤 한다. 이런 경우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사도 요한은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라고 했다. 영원히 타락하여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거하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면서 종교적인 고백은 곧잘 한다. 머리로만 믿는 이런 사람들은 신앙지식에 있어서는 많은 겸허한 신자들을 능가할 수도 있다. 또 얼마동안은 택함 받은 신자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전혀 중생의 내적 체험을 경험한 바가 없는 이단들이다.

이처럼 세상에 사는 동안 겉으로만 신앙을 가졌던 자들은 심판 날에 비록 그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지라도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고 하실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적이 없었던 자들이다. 모든 사람의 본성이 나타나고 마음의 모든 비밀이 드러나게 될 때 참 그리스도인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이 폭로될 것이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신앙고백에서 타락할 수는 있겠지만 구원의 은혜에서 아주 타락해 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 끝까지 타락하는 자는 처음부터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했던 자이다. 그들의 마음은 돌짝밭과 같아서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13:4,5,21)고 했다. 그들은 “신앙을 단념했다.”, “신앙의 파선을 당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외견상 그런 것이고 사실은 처음부터 신앙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 중에 어떤 자들은 복음을 전하거나 남에게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복음과 교리에 능통하나 자기 자신은 진정한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도 있다. 따라서 이런 자들의 타락을 예로 들어 참 성도도 궁극적 배교를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또 단순히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전투적인 교회’(유형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이라고 다 ‘승리의 교회’(무형 교회)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처럼 어떤 인간적인 목적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참 신앙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또 한동안은 그런 상태를 계속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들이 입고 있는 양의 가죽이 벗겨지던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 그것을 벗어버리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만일 우리가 이런 자들의 마음의 참 동기를 볼 수 있다면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께 대한 참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실 양이 아니라 염소요 양을 약탈하는 이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 대해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다.”(벧후 2:22)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그들은 일찍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가운데 속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진정 회심하지 않은 자일지라도 헤롯이 세례 요한의 말을 괴로워  하며 들은 것처럼 복음의 설교를 달게 듣기도 한다.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더라.”(막 6:20) 그러나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의 결정과 그의 전반적인 생애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헤롯을 가리켜 그가 성도였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을 비쳐주는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에 의해서도 선행과 외면상의 종교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의 일반적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종종 엄격하게 행동하며 즐겨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약속과 구원계획이 진실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에 알맞다고까지 생각되어 진리의 도덕적 힘에 근거한 신앙을 가지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신앙은 그런 믿음이 나온 그 마음의 상태가 계속될 때까지만 지속되다가 그 마음이 변하면 평상시의 무감각한 상태로 떨어져 신앙을 잃어버리고 만다.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말씀을 받은 자들이란 곧 이 같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시적 신앙의 예는 성경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험 즉 일시적 신앙이 진정한 회심에 선행하거나 진정한 회심을 성취하는 수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런 일시적인 신앙에는 진정한 회심이 뒤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생에 몇 번이고 되풀이될 수도 있으나 그들은 결국 이전의 무감각한 세속적 상태로 돌아가고 마는데 이런 외적인 신앙생활과 진정으로 중생한 자의 신앙생활을 식별한다는 것이 타인은 물론 본인으로서도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과 중심을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교혼을 따르는 것이 최선의 길일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별하는 시금석은 바로 이 말씀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5,16) 그럼에도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아시고 온전히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심판 주되시는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이다.

5. 불안정한 알미니안 구원관 (Arminian sense of insecurity)

인간의 ‘자유의지’ 교리를 고수하며 참 신자라 할지라도 구원의 은혜에서 아주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항상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은 ‘현재의 구원’에 대한 보증은 확신하나 언제 자기가 구원의 은혜에서 아주 타락할지 모르기 때문에 궁극적 구원에 대해서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들은 많은 신자가 처음 신앙의 출발은 좋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타락하여 멸망에 빠지는 경우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들도 그 같은 경로를 밟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 옛사람의 죄악성의 잔재를 갖고 있으며 지극히 유혹적이요 기만적인 세상의 쾌락과 악마의 교활한 유혹에 둘러싸여 있다. 교회 안에서까지 근대주의(近代主義, modernism)라 칭하는 이단(異端)이 여러 모양으로 신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만일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가 옳다면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연약한 인간의 의지(意志)에 따라 좌우됨으로 심히 불안하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알미니안주의의 논리대로라면 천국 가서까지도 성결을 이루는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자가 그곳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이 원하는 때는 어느 때든지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알미니안주의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 받은 사람과 같다. 많은 유산 상속자들이 판단 부족이나 사기, 재난 등으로 유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는 상속받은 재산을 현명하게 관리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며 그 재산을 계속 붙들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실패해도 자기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이런 확신은 그의 자긍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영적세계에 적용해 볼 때 얼마나 무서운 망상인가! 상속 받은 막대한 유산 즉 구원의 보증을 아직도 분명한 범죄 성향을 갖고 있는 자기라는 불완전한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맡기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 일인가!

이처럼 성도의 궁극적 구원의 보증을 전능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의 손에 두지 않고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의 수중에 두는 것이 바로 알미니안의 의(義)이다. 그렇다면 알미니안의 논리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세상을 떠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천국의 기업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취할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알미니안들은 많은 신자가 타락한 실례(實例)를 보면서 구태여 길지 않은 뜬 구름 같은 나그네 생활을 위해 이 세상에 더 머물며 그의 영원한 구원을 내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몇 푼 더 벌기 위해 불확실한 투기사업에 자기의 전 재산을 거는 사람은 가장 미련한 사람이다. 따라서 알미니안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구원의 확신이 느껴질 때 가능한 한 빨리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과 의혹의 상태로 계속 지낸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 받은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성경의 보증(롬 8:39) 이야말로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위안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지상에 있는 성도의 가장 큰 기쁨의 샘을 막는 일이다. 언제 어떻게 죄를 짓고 그 결과 영영 타락하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 신자가 어떻게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만일 성도가 받은 구원에 대한 안전이 단지 변하기 쉽고 동요하기 잘하는 인간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는 구원 받은 참 성도의 내적 평화와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맥훼트릿지(McFetridge)는 ‘역사적 칼빈주의’(Calvinism In History)라는 그의 소책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애쓰고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얼마든지 구원의 은혜에서 아주 떨어져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바로 알미니안이 가 가르치는 구원교리이다. 이 교리는 신자를 두렵게 만들고 말할 수 없는 곤혹 속으로 빠져 들게 한다. 만일 내가 이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에 내 생명의 최후의 안전을 맡긴 채 고해와 같은 인생을 항해해야 한다면 나는 항상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생명이 실린 구원이라는 배가 충분히 항해에 견딜만하여 일단 내가 그 배를 타기만 하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 본 후에 그 배를 타려고 한다.”(P. 112.)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연약하고 끊임없이 동요하는 인간의 사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신 사랑에 달려 있다. 이 놀라운 궁극적 구원의 은총 교리를 바로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얻어지는 평안과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므로 절대 안전하다는 것을 믿는 칼빈주의만이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기 위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으며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을 믿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6. 배교에 대한 성경의 경고 목적 (purpose of the scripture warnings against apostasy)

알미니안은 신자의 배교와 타락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증거로 삼아 구원 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궁극적 타락 가능성을 주장한다. 물론 성경에는 신자도 타락하여 세상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도 누구나 일시적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서 떠나 단지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역량만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성경 구절이 가르치는 참 목적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겸손하고 각성하며 근면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위험한 곳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할 때 자녀의 자발적인 협조를 구하기 위해 차도(車道)로 나가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타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라고 인간을 경고하신 것은 그의 타락을 허용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

  • 우리가 이 경고의 구절에 대해 고려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어떤 행동의 의무를 우리에게 명하실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그 의무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는 것이다. 

성경 한 구절에서 하나님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명하셨는데 다른 구절에서는 “내가 내 신을 너희 안에 두어 너희로 내 법을 행하게 하리라.”(겔 36:27)고 말씀하셨다. 성령이 자기모순을 행치 않는 한 이 둘은 양립되어야 한다.  

  • 이 경고는 성도에게 더 큰 믿음과 기도를 위한 자극제가 된다. 
  •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보다는 의무를 자신의 힘 보다는 약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결의 필요성과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확실히 알게 하려함이다. 
  • 그것은 불신자로 하여금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 

7. 성경의 증거(scripture proof)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성경에 대단히 많고 분명하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 8:35-39)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영생을 실제로 얻어서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 미래에 소유하게 될 조건적 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예수님은 이처럼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에 대해 이것을 한 번만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빌 1:6)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 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요일 5:13)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딤후 4: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저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예수님은 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선언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안전함이 하나님의 전능(손)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큼이나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온 세상보다 강하시니 그의 보화를 하나님에게서 빼앗을 자는 사람 중에도 없고 마귀 중에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 한 사람을 빼앗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늘에서 별을 하나 따오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처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들은 멸망의 위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음부의 권세가 그의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만일 한 성도라도 궁극적으로 타락을 할 수 있다면 원리적으로 볼 때 모든 성도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증은 공수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말씀하셨으니 이 구절을 읽는 자로서 편견을 갖지 않은 자라면 곧 택한 자들은 도저히 미혹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 맺어진 신비한 연합은 택한 자들이 누리게 될 궁극적 은총을 보장해 준다. 예수님이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확실한 부활에 택한 자들이 관련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삶이 그들의 삶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며(롬 8:10),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갈 2:20) 그리스도와 성도는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처럼 유기적 관계의 생명을 갖고 있다. 성령께서 구원 얻은 성도들 안에 계셔서 성도의 다함없는 능력의 저장고가 되어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안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40)고 경고했다. 그는 배교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노라.”(렘 31: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제일 좋은 증거는 그의 사랑은 시작이 없고 오히려 영원하다는 점이다. 두 집의 비유(마 7:24)에서 나타내시고자 한 강조점은 반석(그리스도) 위에 세운 집은 인생의 폭풍우에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편 23편에서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말씀을 읽는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집을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자가 아니고 영원히 거하는 자이다. 성도의 궁극적 구원 은총을 믿지 않는 자는 시편 23편에 나타난 이 심오하고도 풍요로운 의미를 망각해 버린 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시며 (롬 8:34, 히 7:25), 성부는 항상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요 11:42) 따라서 성도가 아주 영원히 타락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은 이 두 구절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또 다시 성도들이 얼마나 안전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며,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롬 8: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완전 타락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에스겔 11:19,20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 같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게 하여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고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베드로는 성도의 완전 타락을 부인했다. 왜냐하면 성도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기 때문이다.”(벧전 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고 말했다. 그는 또 주의 종은 “그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고 선언했다.

성도는 더 확실한 약속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는 약속이다. 그의 백성이 견뎌낼 수 없는 시련에 봉착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은 섭리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물이다.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13)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 도다.”(시 34:7) 

사도 바울은 그의 극한 시련과 곤란 속에서도 결코 타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여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니 (중략)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8,9,14)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 있을 때에도 시들지 않는 나무(시 1:3), 레바논의 무성한 백향목(시 92:5), 요동치 않고 영원히 있는 시온산(시 125:1), 반석 위에 세운 집에 비교된다. 주는 그들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함께 계시고(사 46:4) 죽을 때까지 인도하신다.(시 48:14) 그리하여 한 번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최후까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성도의 궁극적 구원의 은혜를 지지(支持) 하는 또 하나의 강한 논증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관한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이 그들에게 복종함을 인하여 기뻐하지 말고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생명책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제정된 선민들의 명부이니 그 이름의 수효는 증가될 수도 감소될 수도 없다. 이 책에는 의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나 멸망할 자의 이름은 창세 때부터 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말소해 버릴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는 실수를 범하시지 않는다.

이처럼 주님의 백성은 단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저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눅 10:20) 만일 생명책에 이름이 쓰여졌다가 말소될 수 있다면 왜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만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겠는가!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했으며 디모데에게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고 했다. 그리고 생명책에 관한 성경의 교훈은 수없이

많이 있다.(눅 10:20, 빌 4:30, 계 3:5, 13:8, 17:8, 20:12-15, 21:27)

이상의 증거들을 볼 때 성도는 계속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께서 그들을 은혜 가운데 있도록 보존해 주시기 때문이다. 위에 계시된 성경의 증거들은 선민들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 즉 하나님이 저들을 떠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저들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이 저들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심어주신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성경의 교훈에 대해 전혀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심히 연약하고 무력한 인간으로서는 내부로부터의 모든 죄악성과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영원한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이 교리를 환영함이 마땅하나 오히려 이를 거부하고 이에 대해 반론을 펴기까지 한다.

반대하는 이유는 저들이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여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 보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이 진리가 그 성격상 자연계의 보통 원리나 법칙과 다르기 때문이며, 만일 이 교리를 시인하게 되면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관한 칼빈주의의 다른 교리들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미니안은 이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은 왜곡되게 설명하고 자신들의 편견과 부합되는 듯이 보이는 몇몇 구절에만 집착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교리는 선행과 공로에 따라 모든 사물과 사람들을 대우하는 저들의 일상생활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로 믿어지지 않는 것이요, 따라서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 보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글쓴 이 /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1901-1990), ‘칼빈주의 예정론’(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로레인 뵈트너 지음, 김남식 번역, 베다니, 535p, 1996.5.15.

본 원고 출처 / http://cafe.daum.net/haengham/Kfpe/10 

로레인 뵈트 / 1901년 미국 미조리 주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미조리 주 타키오대학을 거쳐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핫지 박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1932년에는 그의 명저인 본서를 저술하였다. 뵈트너 박사는 켄터키 주 파이클빌 대학에서 성경과 신학을 교수하다가 고향 미조리 주로 돌아와 개혁주의 신학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기독교개혁파교회 목사로서 한 평생 개혁주의 신학을 전파하다가 1990년 11월 3일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었다.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There are two mains camps of theology within Christianity in America today: Arminianism and Calvinism. Calvinism is a system of biblical interpretation taught by John Calvin. Calvin lived in France in the 1500’s at the time of Martin Luther who sparked the Reformation.

The system of Calvinism adheres to a very high view of scripture and seeks to derive its theological formulations based solely on God’s word. It focuses on God’s sovereignty, stating that God is able and willing by virtue of his omniscience, omnipresence, and omnipotence, to do whatever He desires with His creation. It also maintains that within the Bible are the following teachings: That God, by His sovereign grace predestines people into salvation; that Jesus died only for those predestined; that God regenerates the individual where he is then able and wants to choose God; and that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are redeemed to lose their salvation.

Arminianism, on the other hand, maintains that God predestined, but not in an absolute sense. Rather, He looked into the future to see who would pick him and then He chose them. Jesus died for all peoples’ sins who have ever lived and ever will live, not just the Christians. Each person is the one who decides if he wants to be saved or not. And finally, it is possible to lose your salvation (some arminians believe you cannot lose your salvation).

Basically, Calvinism is known by an acronym: T.U.L.I.P.

  • Total Depravity(also known as Total Inability and Original Sin)
  • Unconditional Election
  • Limited Atonement(also known as Particular Atonement)
  • Irresistible Grace
  • Perseverance of the Saints(also known as Once Saved Always Saved)

These five categories do not comprise Calvinism in totality. They simply represent some of its main points.

1. Total Depravity

Sin has affected all parts of man. The heart, emotions, will, mind, and body are all affected by sin. We are completely sinful. We are not as sinful as we could be, but we are completely affected by sin.

The doctrine of Total Depravity is derived from scriptures that reveal

human character: Man’s heart is evil(Mark 7:21-23) and sick.(Jer. 17:9) Man is a slave of sin.(Rom. 6:20) He does not seek for God.(Rom. 3:10-12) He cannot understand spiritual things.(1 Cor. 2:14) He is at enmity with God.(Eph. 2:15) And, is by nature a child of wrath.(Eph. 2:3) The Calvinist asks the question, “In light of the scriptures that declare man’s true nature as being utterly lost and incapable, how is it possible for anyone to choose or desire God?” The answer is, “He cannot. Therefore God must predestine.”  

Calvinism also maintains that because of our fallen nature we are born again not by our own will but God’s will(John 1:12,13); God grants that we believe(Phil. 1:29); faith is the work of God(John 6:28,29); God appoints people to believe(Acts 13:48); and God predestines.(Eph. 1:1-11; Rom. 8:29; 9:9-23)

2. Unconditional Election

God does not base His election on anything He sees in the individual. He chooses the elect according to the kind intention of His will(Eph. 1:4-8; Rom. 9:11) without any consideration of merit within the individual. Nor does God look into the future to see who would pick Him. Also, as some are elected into salvation, others are not.(Rom. 9:15, 21)

3. Limited Atonement

Jesus died only for the elect. Though Jesus’ sacrifice was sufficient for all, it was not efficacious for all. Jesus only bore the sins of the elect. Support for this position is drawn from such scriptures as Matt. 26:28 where Jesus died for ‘many’; John 10:11, 15 which say that Jesus died for the sheep(not the goats, per Matt. 25:32-33); John 17:9 where Jesus in prayer interceded for the ones given Him, not those of the entire world; Acts 20:28 and Eph. 5:25-27 which state that the Church was purchased by Christ, not all people; and Isaiah 53:12 which is a prophecy of Jesus’ crucifixion where he would bore the sins of many (not all).

4. Irresistible Grace:

When God calls his elect into salvation, they cannot resist. God offers to all people the gospel message. This is called the external call. But to the elect, God extends an internal call and it cannot be resisted. This call is by the Holy Spirit who works in the hearts and minds of the elect to bring them to repentance and regeneration whereby they willingly and freely come to God. Some of the verses used in support of this teaching are Romans 9:16 where it says that “it is not of him who wills nor of him who runs, but of God who has mercy”; Philippians 2:12,13 where God is said to be the one working salvation in the individual; John 6:28,29 where faith is declared to be the work of God; Acts 13:48 where God appoints people to believe; and John 1:12,13 where being born again is not by man’s will, but by God’s. “All that the Father gives Me shall come to Me, and the one who comes to Me I will certainly not cast out,”(John 6:37)

5. Perseverance of the Saints  

You cannot lose your salvation. Because the Father has elected, the Son has redeemed, and the Holy Spirit has applied salvation, those thus saved are eternally secure. They are eternally secure in Christ. Some of the verses for this position are John 10:27,28 where Jesus said His sheep will never perish; John 6:47 where salvation is described as everlasting life; Romans 8:1 where it is said we have passed out of judgment; 1 Corinthians 10:13 where God promises to never let us be tempted beyond what we can handle; and Phil. 1:6 where God is the one being faithful to perfect us until the day of Jesus’ return.(*) Copyright by Matthew J. Slick, B.A., M. Div., 2012  https://www.calvinistcorner.com/tulip.htm

The Five Points of Arminianism

1. Human Free Will(or Human Ability)

Although human nature was seriously affected by the fall, man has not been left in a state of total spiritual helplessness. God graciously enables every sinner to repent and believe, but He does not interfere with man’s freedom. Each sinner possesses a free will, and his eternal destiny depends on how he uses it. Man’s freedom consists of his ability to choose good over evil in spiritual matters; his will is not enslaved to his sinful nature. The sinner has the power to either cooperate with God’s Spirit and be regenerated or resist God’s grace and perish. The lost sinner needs the Spirit’s assistance, but he does not have to be regenerated by the Spirit before he can believe, for faith is man’s act and precedes the new birth. Faith is the sinner’s gift to God; it is man’s contribution to salvation.

2. Conditional Election  

God’s choice of certain individuals unto salvation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was based upon His foreseeing that they would respond to His call. He selected only those whom He knew would of themselves freely believe the gospel. Election therefore was determined by or conditioned upon what man would do. The faith which God foresaw and upon which He based His choice was not given to the sinner by God (it was not created by the regenerating power of the Holy Spirit) but resulted solely from man’s will. It was left entirely up to man as to who would believe and therefore as to who would be elected unto salvation. God chose those whom He knew would, of their own free will, choose Christ. Thus the sinner’s choice of Christ, not God’s choice of the sinner, is the ultimate cause of salvation.    66

3. Universal Atonement(or General Atonement)

Christ’s redeeming work made it possible for everyone to be saved but did not actually secure the salvation of anyone. Although Christ died for all men and for every man, only those who believe on Him are saved. His death enabled God to pardon sinners on the condition that they believe, but it did not actually put away anyone’s sins. Christ’s redemption becomes effective only if man chooses to accept it.

4. Resistable Grace(The Holy Spirit Can Be Effectually Resisted)

The Spirit calls inwardly all those who are called outwardly by the gospel invitation; He does all that He can to bring every sinner to salvation. But inasmuch as man is free, he can successfully resist the Spirit’s call. The Spirit cannot regenerate the sinner until he believes; faith(which is man’s contribution) proceeds and makes possible the new birth. Thus, man’s free will limits the Spirit in the application of Christ’s saving work. The Holy Spirit can only draw to Christ those who allow Him to have His way with them. Until the sinner responds, the Spirit cannot give life. God’s grace, therefore, is not invincible; it can be, and often is, resisted and thwarted by man.

5. Falling from GraceThose who believe and are truly saved can lose their salvation by failing to keep up their faith, etc. All Arminians have not been agreed on this point; some have held that believers are eternally secure in Christ – that once a sinner is regenerated, he can never be l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