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칼빈주의 5대교리 그 역사적 배경과 이해

Calvinism and Arminianism

프랑스의 위대한 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교회역사에 전무후무한 정통기독교  교리를 체계화시킨 신학자이다. 교리뿐만 아니라,  교회의 행정, 성도의 신앙생활, 인간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위대한 개혁이었다.

칼빈의 성경중심의 영역주권(領域主權, Sphere Sovereignty)의 개혁의 물결은 전 유럽에 파급되어 로마가톨릭은 힘을 잃고 개혁주의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대의민주제도(代議民主制度) 아래 교회와 사회는 다방면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개혁주의의 위대한 유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상교회는 항상 마귀와의 전투에 직면해야 했다. 그것은 제네바를 기점으로 절대주권 사상과 성경정치(Bibiocracy)를 정착시켜 놓고 개혁주의 교회를 이끌어가던 칼빈이 55세에 죽은 후 약 40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1603년경 장소는 네덜란드(Netherlands)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가장 정통신앙을 고수하는 개혁주의의 본산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의 한 관리 출신인 코른헤르트(Coornhert)라는 자가 나타나서 칼빈주의의 하나님의 ‘주권’, ‘예정’ 등을 반박하는 글을 정부에 올림으로 사건이 시작됐다. 정부와 국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킨 격이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칼빈의 수제자 베자(Deodre Beza)는 분개했다.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자기와 개혁주의를 같이 해온 화란신학교 교수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를 불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코른헤르트를 찾아가 진상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반박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알미니우스는 즉시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리하여 코른헤르트의 글을 읽었다. 그런데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코른헤르트의 글을 읽고 알미니우스가 그만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알미니우스는 공격의 화살을 도리어 칼빈주의 쪽을 향했다. 알미니우스는 주장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의 예정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아주 타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보고 선택한다.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이다.” 그리고 알미니우스는 이것을 외치다  1609년 죽었다.

그가 죽은 지 일 년 후인 1610년 알미니우스를 추종하던 무리들(Arminianists)은 알미니우스의 주장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5개의 항의의 글을 발표했다. 이들은 당시 교회가 신조로 받아들여 사용한 ‘벨직 신앙고백서’나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의 수정을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알미니안주의 5대항론’(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1610)이다.    

  • 인간은 완전타락하지 않았고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자율구원) 
  •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보고 선택하였다.(예지예정 및 조건선택) 
  •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만인구원) 
  • 성령의 은혜는 충분히 거부 할 수 있다.(인간의 자유의지) 
  • 구원 얻은 사람도 잘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궁극적 구원 실패가능)

칼빈주의 정통신앙을 굳게 지켜온 네덜란드 정부와 교회는 이런 반대에 부딪혀 그냥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의회는 ‘세계 종교회의’를 돌트(Dort)라는 도시에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스위스, 영국, 신성로마제국, 독일 등 각지에서 온 27명의 사절과 84명의 교회지도자 그리고 18명의 정부 고위층이 이 회의에 참가했다. 이것이 ‘돌트총회’(Synod of Dort, 1618-1619)이다.

이 총회는 성경의 신본주의(神本主義)에 기초를 두고 구원을 가르치는 칼빈주의(Calvinism) 신학과 인본주의(人本主義)에 기초를 두고 구원을 가르치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신학과의 대논쟁이 이었다. 이 같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신학 대논쟁은 5세기경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과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의 논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17세기 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개신교 역사상 가장 중대한 신학논쟁의 하나였다.

이 회의에서 칼빈주의는 알미니안주의 5대항론을 성경에 비추어 면밀히 분석한 후에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다. 7개월간에 걸쳐 총 154회의 회의를 거듭한 결과는 당연히 칼빈주의의 승리였다. 대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가장 흉악한 비 성경적인 이설(異說)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알미니안의 5대항론을 기각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에 대한 적극적 대응책을 세위기로 했다. 그것은 차제에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확고히 하는 어떤 강령(綱領)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알미니안주의 5대항론에 대치되는 ‘칼빈주의 5대교리’(The Five Points of Camvinism)를 작성한 후 채택하였고 1619년 5월 9일 이를 발표하였다. 이렇게 해서 결국 이 회의를 통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에 반대하는 칼빈주의적 입장이 정리되어 5개항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것을 ‘칼빈주의 5대교리’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