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칼빈 탄생 500주년기념 지상강좌(15) 칼빈의 계시론

1. ‘오직 성경’에 기초

칼빈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적인 계시 이해

칼빈 신학의 중심교리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은 칼빈의 신학이 사변적(思辨的)인 전제나 논리(論理)가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이 원리는 성령의 내적 조명과 감화로 말미암아 믿음의 백성이 성경말씀을 계시(啓示)로 받아들여 지식을 획득하는 길을 제시한다. 즉 칼빈은 말씀을 이성적 전제나 철학적 사변에 의해 획일적으로 파악 한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계시하는 다양한 관점으로만 파악했다.  

칼빈은 계시(啓示, revelation)를 1)‘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2)‘인간 자신을 아는 지식’이라는 두 관점으로부터 논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1)‘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2)‘구속 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두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1)‘타락 전 하나님 형상’과 2)‘타락 후 하나님 형상’ 그리고 3)‘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세부적으로 전개된다.

보통 타락 전 인류의 창조와 보존을 다룰 때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그리고 타락한 형상과 회복된 형상으로서 인류의 구원 역사를 다룰 때에는 구속 주 하나님이 주로 논의되나 천지와 인류를 지으신 분이 타락 후에도 인류를 여전히 사랑하셔서 인류를 보존하시고 주관하시며 마침내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셔서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셨다는 진리가 함께 고찰됨으로 두 가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세 가지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만세 전의 하나님의 구원언약(救援言約)에 따라 서로 교호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관점들은 성경 진리의 체계(體系)를 수립하는 기초가 되며 이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개별 주제들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계시 이해의 구조가 된다. 계시론(啓示論, Revelation Theory)이 신학의 서론(緖論)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이러한 계시 이해의 구조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계시(啓示)1) 하나님을 아는 지식1) 창조 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2) 구속 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2) 인간 자신을 아는 지식1) 타락 전 하나님 형상을 아는 지식
2) 타락 후 하나님 형상을 아는 지식
3) 회복 된 하나님 형상을 아는 지식

 칼빈의 성경적 계시 이해와 칼빈 신학의 기초, 이는 또한 성경적 세계관이다.

오늘날까지 칼빈의 계시 이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인식론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계시 자체는 객관적 지식 즉 진리로서 계시의 드러남은 주관적 지식 즉 인식된 진리로서 여겨졌는데 대체로 후자만이 편향되게 강조되었다. 우리는 칼빈의 계시론을 다룸에 있어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따른 다양한 관점의 접근이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특정하게 짝을 이룬 변증법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관점,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의 관점, 창조주와 구속 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관점에서의 접근하되 이러한 관점들은 동시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예컨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삼위일체와 기독론으로 파악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을 포함하여 논의되어야 한다. 그리고 구속 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논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칼빈의 계시론을 이해함에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계시함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계시의 양상과 수납을 다루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

칼빈은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천명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기 때문에(행 17:28) 우리의 사상(思想)을 버리고 즉시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기를 올바르게 관조(觀照)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명백한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모든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삼아야 할 유일한 규범이 주님이시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1)그의 존재 자체, 2)우리가 어떻게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인가, 3)그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포함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종교 혹은 경건함이 없는 곳에 신학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의 존재와 사역을 계시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여 이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形象)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감화(感化)하여 감동(感動)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절대인격(絕對人格)으로서 자의식적(自意識的, 매개 없이 모든 것을 아심)으로 스스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스스로를 드러내심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만 계시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하고 주요한 좌소(座所)는 인간의 영혼이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不滅)이나 창조된 존재이며, 신적인 것이 새겨진 곳이며, 양심과 지성이 작용하는 자리이다.

유한(有限)은 무한(無限)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런데 유한한 인간에 대해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靈)이시며, 절대적인 인격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 이성(理性)에 의함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믿음과 경건에 의한다. 즉 무한한 영(靈)으로서 절대인격이신 하나님은 자기의 존재와 경륜과 사역 그리고 자기의 인격과 사역을 스스로 계시하시는데 우리가 성령에 매이지 않고서는 계시를 수납(受納)할 수 없다. 그런데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는다.

3. 말씀과 성령

계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다. 계시는 계시자이신 하나님이 계시의 주체자이시고 계시하는 작용(作用)을 통하여 계시의 내용을 전달한다. 계시는 계시자의 자기계시이므로 계시자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계시자는 계시된 대로 존재하신다.

그런데 계시는 성자 곧 하나님의 로고스(Logos)를 통해 온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하고 실체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아들이 우리의 중보자(仲保者)가 되어 중보(仲保)함이 없으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세상의 빛’(요 8:12)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의 원천’(시 36:9)이신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눅 10:22)

그러므로 계시는 모두 로고스(Logos)를 통해서 계시되며 로고스는 또한 계시의 내용이 된다. 그리고 로고스는 삼위일체 가운데 내재적이며 경륜적으로 이해되며 삼위일체는 또한 우리에게 맞추어 주신 계시의 내용이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계시자이다. 그러므로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타락 후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계시의 저작자(著作者)라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칼빈은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함께 추구하였다. 나를 초월(超越)한 말씀이 내 속에서 말씀된다. 이러한 계시의 성도에 대한 초월성(outside us, extra nos)과 내재성(in us, in nobis)가 그리스도와 연합에 따른 그의 영(靈)의 내주로 설명된다. 성경의 권위(權威)는 그 저자(著者)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기초하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에 의해서 확정된다. 성경에서 자신의 거룩한 입술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표징(表徵)들은 오직 성령의 은밀하고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만 그 실체가 드러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자신의 말씀의 증인이 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증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친히 말씀하심은 그의 말씀이 믿음 가운데서 우리 속에 인(印) 쳐짐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의 학교에서 겸손하고 가르칠만한 독자가 된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경은 “신성한 어떤 것을 숨 쉰다.” 성찬도 이와 같이 설명되니, 성령의 역사로 말씀이 성도에게 새겨져서 그리스도의 영에 연합하고 그의 몸과 피의 실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감화에 기초할 때에만 구원 지식을 궁극적으로 충족시킬 것이다.

성령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이 그의 인격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은밀하게 증거 한다. 후자는 말씀의 확실성을 증거하며 이는 구원론의 입장에서 보면 성도의 마음에 인치는 신앙의 확신과 다르지 않다. 신앙의 확신은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말씀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 말씀의 확실성이다. 성령의 인침이 믿음이며 믿음은 우리의 지성을 조명하고 우리의 심장을 확정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칼빈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그의 띠로 묶인 자들이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고 갈파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사 59:21) 영원한 언약 가운데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로 묶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조명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 성령이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4.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계시된다. 율법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규범으로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의 뜻을 계시한다. 율법의 전체로서 십계명은 ‘경건과 의의 완전한 가르침’으로 공포되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규범으로서 선하게 역사했으나 타락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 죄를 정죄하는 사자가 되었다. 타락 후 비참해진 인류에게 율법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계시한다.

율법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다. 타락한 인류에게도 율법은 본질에 있어서 전혀 동일하게 역사한다. 다만 그 사역은 규범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죄를 정죄하는 신학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이 하나님의 의지(意志)의 표현인 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이자 진리인 한에서 그렇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이자 진리이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에는 약속이 따르며 율법은 그리스도를 표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재를 계시한다.

칼빈은 그의 저작들을 통해 종종 정죄하는 법과 삶의 법으로 표현되는 율법의 이중적인 사역에 대해서 언급한다. 율법에는 인간의 죄악성과 사악함을 폭로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율법은 율법의 본래의 본질을 회복하는 적극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 비록 죽음이 율법을 틈타서 죄에 의해서 들어오지만 율법은 죽음의 실체가 아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의 계시 기능은 중생한 사람들을 위한 용법으로 더욱 본질적으로 신학적 작용을 한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 율법은 가르치는 사역과 권고(勸告)하는 사역을 감당한다. 가르치는 사역으로서 율법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규율을 알려서 그들이 주님의 뜻을 좀 더 순수하게 알아 가는 날마다의 진보가 있도록 하는 역할을 계속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의지를 알아 가고 그 의지에 순응하고 적응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권고의 사역은 지식적 교훈을 주는 수준 그 이상이다. 그것의 작용은 오히려 의지적이다. 율법은 성도들이 그것을 수시로 묵상함으로써 순종에 이르게끔 경성하게 하고 그 안에 더욱 굳건하게 서게 하며 배도(背道)한 반역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한다.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말했듯이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삶의 길이 될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 된다. 결국 율법은 복음에 이르는 길이며 복음 가운데 역사한다. 이제 구원받은 성도에게 역사하는 율법도 역시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이 복음에 의해서 증거 된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에 나타난 구원의 총화로서 제시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의 엄숙한 선포로서 복음은 그리스도가 중보자의 직을 수행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뿐만 아니라 지금 역사하시는 중보자의 직분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며 성취이자 적용이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직분을 행하심의 소식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심, 죽음 그리고 부활은 그 자체로 우리 구원의 전체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구원사와 구원론으로 이해된다. 구원사로서의 복음은 율법의 약속의 성취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구원론으로서의 복음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서 제시된다. 결국 구원사와 구원론으로 파악된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양자의 실체가 그리스도며 그가 율법을 성취하시고 그 이루신 의를 전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로 확정된다. 이 사실 자체가 복음의 질료(質料)이다.

이 사실은 오직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만 인식된다. 복음은 복음의 계시와 인식을 포함한다. 율법의 의(義)는 복음의 인식 가운데 제시된다. 곧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은 믿음 외에 없다. 이 사실 또한 복음의 질료이다. 믿음의 지식은 율법과 복음 즉 뜻과 이루심을 포함한다. 믿음은 복음을 대상으로 하면서 동시에 복음의 감화에 속한다. 믿음은 지식에 대한 확신이다. 또한 믿음은 확실한 지식이다.

5. 일반계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를 두며 모든 지적인 피조물에 전달되는 것으로 모든 인간이 받을 수 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물 혹은 사건을 통한 계시를 말한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종교의 씨앗인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과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와 어떠하심 그리고 그의 뜻을 알도록 창조되었으나 타락 후 자연적 은사들은 부패되었으며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제거되었다.

자연적인 은사로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인간의 이성(理性)은 의지(意志)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고 무지로 질식당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섬광(閃光)은 빛나나 이러한 빛조차 도무지 효과적으로 알 수 있는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남아 있는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영(靈)이 조명(照明) 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성령의 일깨움이 없으면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선을 분별하고 택하고 따르는 열망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영(靈)은 자연인에게 주어지는 일반은총이 아니며 중생(重生)에 의해서 온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 자체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영(靈)으로 하늘과 땅을 무(無)로부터 창조하셨다. 피조물에 나타난 창조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神性)을 선포한다.(롬 1:20) 창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신다.(시 19: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신적인 지혜의 가장 고상한 증거이다.(창 1:27, 9:6) 

인간은 그 영혼이 불멸하나 창조된 실체로서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선함을 보여주는 가장 고상하고 놀라운 모범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듯이 우리 자신에 관한 온전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볼 수 없다는 면도 인간의 창조를 다룸에 있어서 특별히 고려되어야 한다. 최고의 창조계시물인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회복은 곧 중생의 목표가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 가운데 양심(良心)을 주사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을 깨닫게 하는 ‘내적인 법정’을 갖게 하신다. 양심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게 되는 ‘의(義)의 씨앗’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류는 일반계시의 빛에 의해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아름다움을 발현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계시를 통하여서 윤리와 법의식을 알게 된다. 즉 양심으로 말미암아 의(義)라는 관념을 가져서 하나님 앞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판단한다. 특히 자연법을 주셔서 무지를 핑계치 못하게 하셨다. 이러한 핑계치 못함으로 말미암아 선택받지 않은 백성은 마땅한 형벌을 받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 의해 타락하나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타락한다.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었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자신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신성, 지혜, 영광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롬 1:21-23, 시 19:)

 그러나 사람은 타락 후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 계시로는 창조주이며 언약 주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 비록 이 같이 우리가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이를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게 하는 일반계시를 명백하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딤으로 말미암아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론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한 계시

이상의 논고를 통해 우리는 칼빈의 계시론은 인식론적 전제에 따른 변증법적 구조 혹은 그 같은 체계 하에 추구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 자체가 제시하는 다양한 관점 가운데서 종합적으로 다루어졌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지는 오직 성경이 계시임을 전제하는데 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동적인 이해에 기초한다.

우리의 방법론은 칼빈의 계시론을 자연계시, 성경, 성령의 증거 순으로 다룬 워필드(B.B. Warfield, 1851-1921)와 매우 흡사하다. 계시는 말씀에 대한 믿음에 따름이 아니다. 말씀은 단순한 지각(知覺)이 아니라 감화(感化) 혹은 감화된 지식(知識)을 의미한다. 따라서 칼빈의 계시론은 성경의 영감(靈感)으로 귀결된다. 말씀은 객관적 요소로 작용하며 성령은 주관적 요소로서 작용한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계시됨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들’에 대한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는다.

이와 같은 칼빈의 입장은 커닝햄(William Cunningham, 1805-1861), 찰스 핫지(Chares Hodge, 1979-1878),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에 계승된다. 칼빈의 신학을 계승한 개혁주의 신학은 루터란(Lutheran)들과는 달리 성령의 영감을 강조한다. 워필드의 고찰은 합당하다. 다만 그는 칼빈에게 있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역사함이 강조됨과 그 가운데서 성경의 영감론이 전개됨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말씀과 성령의 연결은 칼빈의 계시론의 핵심이다.

그리스도는 성령과 함께 위격(位格)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 즉 말씀이며 성령의 역사로 아버지의 뜻을 계시한다. 그리스도는 중보자 혹은 사역자의 인격으로 오직 아버지께 받은 것을 말씀하신다. 말씀의 완전축자영감(完全逐字靈感, the verbal and plenary inspiration of the Word)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지체(肢體) 된 성도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에 기초하고 있다.

이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靈)을 받은 사람은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영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감화된 심령으로 믿음으로 온전하게 수납한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마다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로운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의 맞추심이 거듭난 이성 가운데 수납됨에 있어서 성경은 거듭난 자들에게 다양한 관점을 스스로 제시한다. 그리하여 구속사(救贖史)와 개인의 구원의 서정(序程)이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의 구조 속에서  역동적으로 이해된다.  

칼빈 신학에서 다양하게 표출되는 이 같은 관점적 접근들은 그의 입장이 비학문적이라거나 비논리적이라거나 비신학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 성경의 자기 계시성(영감성, 충족성, 완전성)에 얼마나 충실했으며 그가 계시와 은혜에 관해서 얼마나 고상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는가를 잘 대변하고 있다.

칼빈 신학이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됨은 그의 신학이 인문주의적 비평이나 심리학적 요소에 부합(附合) 되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칼빈의 텍스트(성경) 자체에 충실한 문자적, 역사적, 영적(삼위일체론과 기독론) 성경 해석이 오늘날 성경 신학자들이나 성경 해석학자들 그리고 설교학자들에게도 하나의 전형이 되고 있으며 이는 그의 신학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입각해서 텍스트(성경) 안에서 텍스트(성경) 읽기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칼빈 이전의 종교개혁자들이 지나치게 주제 중심적이었고 칼빈 이후의 종교개혁자들은 지나치게 콘텍스트 중심적이었다면 칼빈은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파악함으로써 진정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구현했던 종교개혁 자였다.(*) 글쓴 이 /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고려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Calvin Theological Seminary(Th.M.수학)  Western Theological Seminary(Th. M.) University of Edinburgh(Ph. D.) 알림 : 편집 편의상 원문의 각주와 평신도를 위해 내용 중 어려운 부분을 생략했습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