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탄생 500주년기념 지상강좌(2)
칼빈 탄생 500주년기념 지상강좌(2)
개혁주의에 대한 이해
개혁(改革, Reformation)이라는 말은 본래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류와 폐단에 대항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그러므로 개혁이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모든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교회생활과 개인생활에서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적 견지에서의 이 말은 매우 제한된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루터의 사상에서 그 자체를 구별 짓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또한 칼빈주의라는 말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1. 개혁주의의 사상적 특징
개혁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이다. 칼빈이 창시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 사상체계의 중요한 해설가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개혁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함께 어거스틴 사상의 부흥이요, 어거스틴의 사상은 그보다 몇 세기 전의 바울 사상의 부흥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사상들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특수하게 적용하 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 이다. 이때부터 이 사상체계를 칼빈주의 혹 은 개혁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는 신학과 함께 정치, 사회, 과학, 예 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 상체계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한 다.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
(1) 개혁주의 성경관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의 가장 기본적 특징은 성경관이다. 미국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개혁주의의 독특성을 성경관에서 찾았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새롭게 강조하고 부패한 교권제도의 횡포를 버리고 그 기초를 하나님 말씀 위에 두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교회 전통의 권위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새로 발견한 진리에서 활기를 찾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 그는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 그 말씀이 죄인을 부르시는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순종케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에 관한 문제로 광범위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을 주셨는지는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되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주셨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쓰시는 방법으로 주셨는가하면, 복음서들은 목격자들을 사용하여 영감으로 회상케 하여 쓰도록 하였다. 누가는 역사를 조사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 성경 저자의 인간성과 개성이 영감의 과정에서 성령(聖靈)에 의하여 충분히 인정되고 고려되었다는 것도 완전히 명백하다.
그러나 이사야와 아모스는 전혀 다른 문체(文體)와 다른 배경에서 각각 다른 책들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과 요한은 비슷하게 그들 자신의 마음의 특성들을 보여 주었으며 진리를 각각 다른 견지에서 표현하였다. 그들은 놀랍도록 서로 다른 문체로 쓰고 예리하고 고상하게 나타내면서도 다 같이 그들 자신의 독특한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개혁파 전통에서는 영감의 방법이나 성경의 여러 가지 특성의 의미에 관한 기술적인 정의(定義)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權威)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면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형용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권위가 있으되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책이다. 성경은 잘못이 있을 수도 없고, 잘못을 범할 수도 없으며,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지는 더욱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바로 이 성경에서 찾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신앙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필요한 중요성에 따라 그것들을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이나 그 어떤 경우를 불문하고 성경에는 어떤 것이라도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할 때 우리는 이에 순종하고, 성경이 진리를 증언할 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에 굴복한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령(聖靈)의 신학자라 불리는 칼빈은 이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다. 칼빈의 열차(列車)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특수한 책이라고 믿으며 여기서 감동을 받는다. 여러 세기를 걸쳐서 기록되었으나 그 비상한 통일성, 위엄 있는 문체, 영광스러운 내용, 놀랄만한 일관성, 예언의 놀라운 기록과 그 성취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속에서 경건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확신시키고 설득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은 그중의 하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그 전체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 권위의 확고한 근거는 칼빈이 지칠 줄 모르게 주장했던 성령의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 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즉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증거를 분리시킬 때 우리는 즉시 영적으로 싸늘해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는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되는 빈약한 논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이다.
칼빈은 또한 “하나님이 교리의 저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66권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 무오(無誤)한 객관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된다.(딤후 3:16,17)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처음에는 불성문계시(不成文啓示)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성경이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문제이다.(엡 2:20)
개혁주의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으로 삼기 위해 주신 영감(靈感)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개혁주의는 또한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자들처럼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계시는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고 성경은 계시의 증거요 표(標, sign)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자체가 아니며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계시를 객관화하는 것이요 형체 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개혁주의는 신복음주의자(新福音主義者)들처럼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를 분리하지 않는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영감은 믿으면서도 무오(無誤)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무오(無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가지며, 그 독자적 신빙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교회나 신부(神父)에 의존할 필요 없이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서 신앙과 행위의 문제까지도 교회가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나 우리는 성경의 명백성(明白性)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혹은 완전성(完全性)을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위해서 충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유전(遺傳)을 성경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월한 권위를 갖게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우리는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2) 하나님의 주권 사상
또 개혁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主權) 사상(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을 중심 사상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가 죄인의 구원, 침례교가 중생의 신비, 루터교가 이신득구(以信得救), 모라비안이 그리스도의 상처, 희랍정교가 성령의 신비, 로마 가톨릭이 교회의 보편성을 각각 강조한다면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한다.
이것은 개혁주의가 인간의 회심(回心)이나 칭의(稱義)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한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는 말씀을 생활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의 중심 사상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 체계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즉 하나님의 절대적(絶對的) 주권(主權)이라는 술어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며 지적해 주는 술어(述語)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자연계와 도덕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絶對的 大權)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물질적 정신적인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개혁주의자는 믿고 있다. 이것을 워필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현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본다. 그리고 기도하는 태도로 전 생애를 살아가며, 구원 문제 있어서는 자아 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개혁주의 첫째가는 대(大) 교리(敎理)로서 다른 모든 교리들의 중심 태양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주의 최고 절대적인 통치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創造), 섭리(攝理),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3) 불가항력적 은혜
개혁주의의 셋째 특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믿는 것이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하나님이 죄인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신앙이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구원의 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해결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즉 인간의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이다. 이 교리들은 구원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창 6:5; 렘 17:9; 시 51:5; 롬 3: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말한 영적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어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엡 1:4)
이 선택은 선행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선택이다. 그리고 성자(聖者)는 성부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신다. 이것은 피택자(被擇者)에 국한된 구속이다.(마 1:21; 요 10:14; 행 20:28) 즉 제한속죄(制限贖罪)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칼빈은 이 선택의 교리에 대하여 다른 개혁주의자들보다 더 신중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자에게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거스틴이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즐겨 사용했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데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데 다 같이 참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하셔서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속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위에서 말한 대로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데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은혜인가!
(4)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에 대한 견해
개혁주의의 넷째 특징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가 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또 개혁파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꼭 같은 문화명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최선을 다해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대한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일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신학 사상이 칼빈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제네바 시(市)에 대한 칼빈의 관심은 복음 선포에만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 확실히 복음의 선포는 가장 중요하고 우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와 국가의 생활 전반에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사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화적 명령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 명령에 대하여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28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생활의 모든 방면과 경험의 모든 국면을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것을 요구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는 관심을 가진다.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가 시원함을 얻으며, 핍박받는 자가 보호를 받고, 궁핍한 자가 만족함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는 다음 말씀과 같이 매우 강한 신앙을 고백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그리고 하나님은 한 순간이라도 세계를 자신 밖의 어떤 세력에도 내어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개혁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일반사회에서 사회악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범(違犯)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낙태의 그 무서운 악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부패, 권력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 변혁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복음의 선포와 개인의 중생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든가, 복음을 증거 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거나, 비전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부흥과 개혁이 늦어지는 데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수행하도록 부름 받지 않은 자처럼 생각한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또 만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해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의무를 혼자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자기 혼자만 살아가는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의 삶에서 타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그 특성이 악하고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으나(요일 5:19) 우리는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는데 조금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혁신앙 성도들은 폭군에게 도전했고 또한 그들을 넘어뜨렸다. 낫소의 윌리엄, 오랜지 공, 존 낙스, 존 파임, 올리버 크롬월, 리쳐드 카메론, 스코틀랜드의 언약론 자들 그리고 존 위더스푼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유산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폭군의 광포도 우리에게 공포를 주지 못한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니 어째서 무서워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계 11:15)하게 될 그날을 향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와 개혁주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은 정확히 말해서 유럽의 칼빈주의(개혁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이 신학은 칼빈주의적 영국과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래되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Westminster standards)을 교의(敎義)와 규례(規例)의 표준으로 채택함으로써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출발점으로 하고, 칼빈주의 5대 교리, 문화적 명령, 그리스도인의 삶 등으로 전개된 개혁주의 여기에 독특한 신학적 특징들이 가미되어 이루어진 청교도주의 등이 한국장로교 신학의 전통이 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가 한국에 온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 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에 신사참배 결의라는 일대(一大)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대열을 재정비하고 개혁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하였으나 김재준의 문서설, 6.25 동란, WCC 운동, 교단 분열 등의 원치 않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칼빈연구 100년’(이상규,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5)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한국에서는 1924년 칼빈이 처음 소개된 이래 1984년까지 60년 동안 칼빈의 저서 번역, 칼빈에 관한 저술, 논문 등을 모두 합쳐 240편 밖에는 나오지 않은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한국교회 스스로의 노력도 부족했거니와 외적 여건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후 칼빈 주석 전질과 기독교강요가 번역되고 칼빈에 관한 저서와 논문들이 상당한 양으로 출판 또는 각 신학지에 게재된 것을 보면 아직도 한국교회가 개혁주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는 말
복음주의는 17세기 이후 독일에서 루터 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하여 생긴 경건주의 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고,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학운동이라고 한다면 개혁주의는 사도인 바울과 어거스틴을 거쳐 16세기 칼빈에 의하여 체계화된 신학과 사상운동이다.
복음주의가 경건을 강조하고 근본주의가 근본 교리들(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의 탄생, 대속교리,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 강조한다면,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이 근본 원리에 따라 모든 문제들(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신학)을 풀어 나가려고 노력한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운동이 다 귀한 신앙 운동이나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교리적 균형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커다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교훈의 건전성과 관련 있는 균형을 중대시하고 있는 것이다.(딤전 1:9; 6:3; 딤후 1:13) 개혁주의는 바로 이러한 입장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앞으로 개혁신앙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문화적 명령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힘쓰는 운동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글쓴 이 / 신복윤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신복윤(申福潤, 1926년 10월 27일 ~ 2016년 1월 14일, 평안남도 순천군 사인면에서 출생)은 대한민국의 신학자이자 개신교 목사로 호는 남송(南鬆)이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장 칼뱅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이종성, 한철하와 함께 한국의 칼빈신학을 주도해 왔다. 1990년 한국 칼빈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총신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총장과 명예총장을 역임했다. 전공은 조직신학이며 2009년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칼빈공로자로 선정되었다. 칼빈탄생 500주년 기념 예배에서 설교하였다. 칼빈은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강조하였으며, 따라서 성도들은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회개를 통하여 진정한 개혁을 이루며, 칼빈신학으로 새롭게 출발할 것을 설교하였다.
경력 : 국제대학 영문과(B.A.), 연세대학교 대학원(Th.M.), 장로회신학교(M.Div. 현 총신대),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 (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Ph.D.), 예일 대학교 (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 Research Fellow),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University, Visiting Scholar), 트리니티 신학대학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visiting Scholar), 1962년 2월 : 칼빈대학교 교장 서리, 1985년 4월 30일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제2대 학장, 1997년 3월 2일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제5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