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탄생 500주년기념 지상강좌(22) 말씀선포에 대한 칼빈의 견해

참된 교회 표지로서의 말씀선포에 대한 칼빈의 견해1)
머리 말
오늘날 한국교회는 급속히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되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란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을 닮아가는 것이다.2)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가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세속화란 세상이 물질, 성공, 쾌락 등을 추구하는 것처럼 교회도 이러한 것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목회자 안수식이나 교회 직분자 임직식 때에 돈이 오가는 경우가 있으며, 총회장 선거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성도들은 물질적인 복을 많이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로 간주한다. 이러한 성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교회나 기도원에서 특별집회가 있을 때 현수막에는 ‘축복’이란 말이 빠지지 않는다. 목회의 성공을 꿈꾸는 개척교회 목회자는 하루빨리 교회를 성장시켜서 큰 교회를 세우려는 비전을 품는다. 부목사나 전도사 역시 대도시의 대형교회 목회자나 사역자로 청빙받기를 원한다.
이런 모든 현상은 교회의 세속화로 정의내릴 수 있다. 교회가 세상방식을 따라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돈을 사랑하고, 자기 성공을 위한 삶을 살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실정이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름으로써 교회의 세속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에 치명적인 독이 된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속화 될수록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필연적으로 ‘탈(脫) 교회화’ 현상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3)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 지 대부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은 위기를 위기로 정확하게 인식하는데 있다. 이는 마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병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병을 자각해야 비로소 병원에 가고 의사의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 그런데 질병이 중할수록 속히 병원에 가야하고 실제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회복될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물론 교회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외적인 요인도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교회가 공신력을 상실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상황이 된 것은 문제의 심각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매사에는 소위 골든타임(golden time)이 있다. 한국교회는 이미 골든타임에 접어든 것과 같다. 더 이상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겨 기념하면서 과감한 자기 개혁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심각한 질병인 세속화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세속화를 극복하는 길은 교회의 정체성 회복에 달려있다. 회복해야할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 된 다양한 신학적 정의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교회는 바로 삼위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성령의 전’ 등으로 표현된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중심으로 설명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어 말씀으로 통치하는 공동체이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님’(Lord)이 되시고, ‘말씀’(Word)에 의해 통치 받는 공동체이다. 이렇게 교회는 ‘주님과의 관계에 있는 공동체’와 ‘말씀에 의해 통치를 받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가 생명력 있는 교회이며 성장하는 교회가 된다.
외형적으로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성도들이 예배드리고 기도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臨在)와 통치(統治)가 없다면 그런 교회는 단순한 인간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는 말씀 선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말씀이 홍수처럼 선포되고 있지만 올바른 말씀 선포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하심은 나나나지 않는다. 올바른 말씀 선포의 부재(不在)와 관련하여 ‘설교의 위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설교의 위기에 대하여 데이비드 웰스(David F. Wells)는 “명백히 성경적인 설교는 절반이 못되며 상당수의 설교가 전혀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4) 정장복 교수도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를 언급했다. 그는 과거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철저한 소명의식과 순종의 삶을 기반으로 “오직 말씀을 전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했지만 오늘날 그 고결한 땀과 눈물이 서서히 식어져 가고 있다.”고 말한다.5)
이미 종교개혁시대에 개혁자들이 중세 교회에 올바른 말씀선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저히 경험하였고 이를 극복하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칼빈(John Calvin)은 당시 중세시대 교황 중심의 구조적 병폐를 해결하고자 말씀 중심의 교회로 개혁을 주도하였다. 칼빈은 올바른 말씀선포가 교회를 변화시키는 시금석임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인 말씀선포가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 런 확신에 따라 말씀선포에 대한 신학적인 내용을 정립함으로써 당대 교회 개혁을 주도하여 실제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으며, 이러한 그의 신학적 영향력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도전을 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칼빈이 주장한 것처럼 교회에서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려면 실제로 주님이 임재하시고 통치함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새롭게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Ⅰ. 올바른 말씀선포의 성경적 정의
말씀 선포는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는 주체로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말씀선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말씀선포의 실질적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주장한 칼빈의 견해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또한 말씀선포 시 청중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 아울러 말씀 선포는 어떠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말씀선포의 실질적 주체
(1)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서 설교자를 통해서 선포된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설교자가 말씀선포의 주체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설교자가 설교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말씀이 선포될 때 설교자가 실질적인 주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단지 말씀의 전달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말씀 선포의 실질적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명확히 주장한다.6)
그런데 왜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시지 않고 굳이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인가? 칼빈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너무나 미숙하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8) 그래서 칼빈은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을 ‘하나님의 보좌’로 부른다.9)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종을 통해 말씀하실 때마다 가까이 계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10) 칼빈에게 설교는 단순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바로 실제적인 주체이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말씀하심을 의미한다.
월레스(Donald S. Wallace)는 칼빈에게 “설교는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은총의 형태이다.”라고 말한다.11) 즉 설교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a sign of the presence of God)인 것이다.12) 게리쉬(Brian A. Gerrish)는 칼빈이 말씀을 ‘성례적 말씀’(verbum sacramentale)으로 표사함으로써 말씀과 성례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두지 않았다고 말한다.13)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도 이러한 게리쉬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칼빈에게 있어서 말씀은 성례적 성격이 있음을 주장한다.14)
이는 파아커(T.H.L. Parker)도 주장하는 바이다. 파아커에 의하면 칼빈은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로 오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고 말한다.15) 또한 리드(John H. Leith)에 의하면 칼빈에게 있어 설교란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화 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16) 스타페르(Richard Stauffer)도 칼빈에게 설교란 그리스도의 현현이며 하나님이 실재로 임재하시는 사건으로 설명한다.17)
이렇게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친히 임재 하시어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당시 로마가톨릭의 스콜라주의(Scholasticis)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빈이 볼 때에 당시 스콜라주의는 그리스도를 숨김으로써 끈임 없이 방황하게 만들었다. 스콜라주의의 문제점을 간파한 칼빈은 말씀선포에 성례적 특성을 도입한다.18) 칼빈은 스콜라주의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이 올바른 것이며 말씀선포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야 하고 그 분을 바라보아야 함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이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모든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19)
칼빈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결국 칼빈은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실재적인 임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20)
(2) 성령 하나님
말씀선포는 성령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왜냐하면 성령은 선포되는 말씀이 실제로 청중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청중들로 하여금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을 잘 듣고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구원의 사역을 적용한다.21) 하지만 성령만을 주장하는 재세례파(Anabaptis)와 같은 열광주의자들은 말씀 선포에 있어서 ‘성경과 설교’를 무시하는 잘못을 범한다.
칼빈은 당시 재세례파들이 ‘성경과 설교’를 무시하고 오직 ‘계시와 영감’으로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사역을 경멸하고 심지어는 성경까지도 무시하기 때문이다.22) 칼빈은 이러한 재세례파의 극단적인 주장을 비판하면서 성령은 말씀선포 시 자의로 인도하시지 않고 기록된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신다고 말한다.23) 즉 성령은 새로운 계시를 전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조명하시는 분이시다.24)
칼빈은 재세례파가 이같이 오직 성령을 주장하면서 성경을 무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성령과 성경의 상호 밀접한 관계를 주장한다.25) 말씀선포 시 성령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성령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고 청중의 영혼을 변화시킨다.26) 성령이 이렇게 역사하시면 성경은 단순히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활동이며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27) 이렇게 칼빈에게 설교의 능력이란 소리나 의미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28)
특히 교회사적으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심으로 중요한 시대마다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다. 성령이 청중으로 하여금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가져옴으로써 획기적인 심령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성령의 강한 역사는 특히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나타나야 한다.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 Jones)는 존 웨슬리(John Wesley)또는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비롯한 많은 부흥의 사역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공통적으로 체험하였음을 말한다.29)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도 부흥을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확신한다.30)
이렇게 말씀선포 과정에서 중요한 실질적 주체는 성령이시며,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동시에 설교자에게 임하시어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도록 인도하신다.
요약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말씀선포는 실질적 주체이신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은 청중들로 하여금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심령으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측면에서 칼빈이 말씀선포의 실질적인 주체를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설명한 것은 타당한 것이다.
2. 말씀선포의 형식적 주체
말씀선포에 있어서 하나님은 택하신 사역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시지 않고 인간을 ‘자신의 도구’(his instruments)로 사용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31)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소리’(the voice of God)를 전달하신다.32) 칼빈은 사역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소리이며 그 말씀은 확실한 효력을 가진 말씀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방식은 인간의 입에서 나가는 방식과 같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며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이 하나님의 거룩한 입에서 나온다는 말을 들을 경우 그 약속의 권위를 더욱 더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지상에 있는 것을 증인으로 사용하지만 그들이 약속받은 모든 것이 비준될 것이며 확실하리라는 점을 선언한다.”3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에게는 특별한 자격이 요구된다. 칼빈은 “진정한 사역자로 인정받으려면 먼저 합당한 방법으로 소명을 받고(히 5:4), 다음에 그 소명에 부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34) 칼빈에 의하면 사역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내적 소명’을 받고 ‘외적 소명’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받는다.35) 또한 칼빈은 이런 검증의 과정만으로 훌륭한 목회자가 선별되지는 않기 때문에 이 과정에 부가하여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두려움과 교회를 세우려는 ‘양심의 검증’을 덧붙인다.36) 이 외에도 칼빈은 몇 가지 자격으로써 겸손, 실천, 용기, 권위의 주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 등을 제시한다.37)
또한 설교자는 배우는 학생과 같은 태도를 가져한다. 설교자 자신도 학생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칼빈은 설교자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기 전에 먼저 철저히 배울 것을 강조한다.38) 설교자는 성경을 읽고 그것을 충분히 잘 이해하여야 하며 그 모든 가르침을 율법과 선지서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의 우물에서 길어 내어야 한다. 그가 이 모든 과정을 수료하였을 때 다른 사람에게 설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39)
또한 설교자는 먼저 선포되는 말씀에 스스로 순종해야 한다. 칼빈은 이것을 간절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려는 수고가 없다면 강단에 오르다가 목이 부러지는 편이 낫습니다.(C02Q, 304) (중략) 내가 강단에 오를 때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나는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먼저 내가 제자가 되어야 하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러분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화가 있을 지로다!”(Sermon XCV, 욥기 26:4 C034, 424)40) 이렇게 칼빈은 무엇보다 설교자가 말씀을 먼저 자신에게 적용하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주장은 오늘날 설교자에게 큰 도전을 준다. 왜냐하면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을 자신은 배제하고 주로 청중에게만 적용하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어떻게 어떠한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칼빈에 의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간결’하고 그리고 ‘용감’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41) 그런데 칼빈은 설교자가 겸손과 순종의 태도를 갖지 않고 단순히 설교 자체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경고한다.42) 왜냐하면 말씀선포에 있어 설교자는 다만 ‘대사’(大使, envoy)의 역할을 할 뿐이며 설교자 자신이 그 권위를 소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설교자의 권위는 설교자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직 즉 그들에게 맡겨진 ‘말씀’(Word)과 ‘직무’(ministry)에 주어진 것이다.43)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말씀선포의 유익은 결코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항상 자신을 높이고자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말씀선포에 ‘봉사’(ministry)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44)
3. 말씀선포의 객쳬
말씀선포의 객체인 청중은 선포되는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청중의 신앙과 순종이 곧 말씀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45) 따라서 칼빈은 청중이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46) 그래서 칼빈은 비록 인간을 통해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지만 청중들이 그 선포되는 ‘말씀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Word)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자들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칼빈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설교자의 말씀 선포를 통해서 청중들의 복종을 ‘시험’하신다고까지 말한다.47)
그러므로 청중은 선포되는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설교를 들을 때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48) 그러나 현실적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청중 중 일부는 말씀에 대해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입을 대적하였다는 말씀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다거나 그들이 하늘로부터 어떤 음성을 들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였던 자는 모세였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입을 대적하였다고 말한 사람도 모세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그의 명하는 것들을 선포하게 하실 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처럼 겸손하게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가를 알게 됩니다.”49)
이렇게 칼빈은 청중이 선포되는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심각한 죄악으로 간주한다. 청중들이 설교자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갖게 되면 말씀을 올바르게 경청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목사에 대한 평가절하로부터 말씀에 대한 경멸이 배태된다.”고 경고했다.50) 말씀을 듣는 청중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그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에도 말씀을 듣는 청중의 태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 고백서에 의하면 “소명 받은 설교자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설교자를 고려해서는 안 되며 오직 설교된 말씀 자체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51) 청중들은 말씀이 선포될 때 그 설교자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사역자임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 존중의 마음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고 경청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52) 그러나 칼빈은 말씀 선포에 있어서 선포하는 자와 듣는 자가 상호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설교자는 오직 청중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려는 유혹을 벗어나야 하며, 청중은 자신들에게 기분 좋은 말만 듣고자 해서는 안 된다.53)
또한 칼빈은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적극적인 감시를 주장한다. 즉 청중은 설교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지를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54) 왜냐하면 청중이 이러한 감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설교자가 성경과 무관하게 설교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악순환이 거듭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55) 즉 청중은 말씀선포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지만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되며 진리를 숙고하고 탐구함을 통해 감시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56)
다만 이러한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즉 먼저 하나님께 자신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가 감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자와 청중은 서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주장한다.
4. 말씀선포의 효과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57) 물론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곧 바로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칼빈은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그 효력(effectiveness)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58) 왜냐하면 올바르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공허한 말씀이 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 다.59) 칼빈은 이런 사실에 근거 하여 설교를 평가절하 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한다.
“비천한 사람들이 교사로 부르심을 받음으로 해서 말씀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신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하나님의 권능은 외적인 수단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평범한 교수방법(this ordinary manner of teaching)에 메이게 하셨다. 광신자들은 이 방법에 메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치명적인 올무(many deadly snares)에 걸린다. 자만심이나 거부감, 경쟁심으로 인하여 혼자 개인적으로 독서하고 명상하더라도 충분히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공중집회를 멸시하며 설교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60) 칼빈은 선포되는 말씀에 중요한 몇 가지 효과가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첫째, 말씀선포의 효과는 그리스도의 임재(the presence of Christ)이다.
칼빈에게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61)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임재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 안에 임재 하신다.”고 말한다.62)
둘째, 말씀선포의 효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the union with Christ)이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을 통해 능력으로 임하심으로써 청중들과 연합하게 된다.(롬 10; 14; 요일 3:23)63) 탐부렐로(Dennis E. Tamburello)에 의하면 칼빈은 신비한 연합의 의미를 설명할 때 종종 그리스도의 실재와 함께하는 것으로 말한다.64) 이러한 신비한 연합은 단순히 영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인격에 관련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성도는 영적으로 또한 육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결합한 것이 오직 영적인 문제에 한한 것이 아니라 또한 육신적으로 관계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인 것이다.(엡 5:30) 만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결합이 완전하고 전적으로 그와 같지 않다면 우리의 부활의 소망은 희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65)
이렇게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육신적 차원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그 본질이나 정체성에서 동일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real)인 것이다.66)
셋째, 말씀선포의 효과는 그리스도의 통치(the rule of Christ)이다.
개리 크램튼(Gary Crampton)은 칼빈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설교는 곧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치하는 수단이다.”라고 말한다.67) 이는 이미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통치하고 계심을 명확하게 말씀한 내용에서 쉽게 확인된다.(엡 1:21-23) 선포되는 말씀이 믿는 자에게 구원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처럼 사악한 자들에게는 정죄의 효과를 발생시킨다.68)
넷째, 말씀선포의 효과는 교회의 하나 됨(the unity of the Church)이다.
칼빈에 의하면 나무의 가지는 많지만 ‘단 하나의 뿌리’(a root)만 있고, 많은 시내가 흐르지만 ‘단 하나의 근원’(one spring)만 있듯이 수많은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69) 물론 칼빈은 이러한 수많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마땅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칼빈은 그 원인을 어거스틴을 따라서 2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단자들’(heretics)은 거짓된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분리시키는 반면 ‘분파주의자들’(schismatics)은 종종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깨뜨린다.70) 하지만 비록 이러한 이단과 분파가 교회 안에 나타날 지라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순수하게 고백하고 진리의 근원이시며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71) 칼빈은 이런 분파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말씀 안에’ 또는 ‘그리스도 안에’(빌 2:1,5)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72)
이렇게 칼빈에게 있어서 말씀선포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통치 그리고 연합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말씀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다.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이 계속 거부되는 상황이 지속되면 마침내 하나님은 그 말씀을 아예 거두신다고 경고한다.(암 8:11)73)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육체적 기근이나 궁핍보다 더 심각한 영혼의 기근이나 궁핍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칼빈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더 이상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고 영적 양식의 기근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을 경고한다. 물론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신다.74)
결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를 더 이상 참된 교회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중세교회가 말씀중심이 아닌 교황중심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한 중세교회를 개혁하고 참된 교회를 세우는 결정적인 요소로써 올바른 말씀선포와 바른 성례집행을 제시하였다.
특히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를 정립함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신학적 완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 속에서 발견되는 교회 표지로써의 말씀선포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의 몇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교회 표지로써의 말씀선포는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가리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공동체로써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로도 그것을 유지할 수 없고 오직 말씀으로 세워지고 세워져간다. 칼빈은 참된 교회란 외적인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의 파수꾼이 되 어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없어 지지 않도록 지키는 곳으로 규정 한다.
둘째, 말씀 선포의 실질적인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해서 친히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교회의 표지인 말씀선포는 그리스도가 실질적인 주체로서 말씀을 통해 임재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 성도들과 연합하시고, 통치하심을 의미한다. 칼빈에 의하면 청중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의 임재와 통치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
셋째,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설교자는 내적 소명 및 외적 소명뿐만 아니라 양심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가지되 특히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실천하려는 결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칼빈은 만약 설교자가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와 실천하려는 결단이 없다면 결코 강단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넷째, 청중은 선포 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청중은 설교자의 연약함을 보아서는 안 되며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결코 설교자를 경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 말씀이 전포되게 하심으로써 청중을 시험하신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청중이 맹목적으로 설교자를 따라서는 안 되며 때로는 감시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하지만 청중은 감시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자세로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다섯째, 올바른 말씀선포는 교회의 일치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올바른 말씀선포가 있는 모든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면 교회의 일치는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교회의 일치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말씀선포를 중시하였다. 칼빈은 교회의 일치의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말씀선포 및 성례’라는 교회의 표지를 거부하거나 폐기하려는 음모는 ‘사탄의 계략’으로 간주하면서 교회의 표지를 사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를 역 설하였다.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연구자는 그 해결 방안 중의 하나로써 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특히 교회사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칼빈의 올바른 교회 표지를 살펴보았다.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의 말씀선포와 관련된 칼빈의 견해를 연구하면서 얻은 전체적인 결론은 무엇보다 다시 한 번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말씀을 통해 이 땅에 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선포’와 ‘성례’를 참된 교회의 표지로 제시함으로써 교회 개혁에 큰 공헌을 하였다. 칼빈이 교회개혁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말씀선포의 실질적인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에 있었다. 즉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의 말씀선포는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런 교회의 표지로서의 말씀선포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임재(the presence of Christ), 연합(the union of Chhst)및 통치(the rule of Christ)를 의미하며 이로 인하여 실제적으로 교회가 세워져 간다는 것을 규명한 것이다. 이런 칼빈의 견해를 따라서 위기에 직면한 한국교회는 올바른 말씀선포에 집중해야 한다. 동시에 그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포되는 말씀 앞에 모두가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가진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한국교회를 새롭게 세워 가실 것을 확신한다.(*) 글쓴 이 / 안인규 교수(백석대학교, 조직신학) 출처 / 종교개혁500주년기념공동학술대회(2017 Academic Conference on the 500th Anniversary of the Reformation) 제Ⅳ권 : 세션Ⅲ 분과별 논문발표, 페이지 146-154, 참고문헌 생략
< 미 주 >
1) 위 발제문은 2016년 하반기에 통과된 안인규 박사 논문 ‘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한 칼빈과 바르트의 견해 비교: 말씀 선포를 중심으로’(백석대학교 기독교 전문대학원. 2015)의 일부를 요약 및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2) 이정석, ‘현대사회의 도전과 교회의 대응’(서울: 새물결플러스. 2008), 259.
3) 이정석, ‘현대사회의 도전과 교회의 대응’ 247.
4) 데이비드 F. 웰스. ‘신학실종’, 김계영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06), 368. 웰스는 많은 설교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인 것을 지적한다. 웰스에 의하면 분석된 설교의 압도적인 비율(80%)이 인간 중심적이다.(369.) 웰스에 의하면 올바른 설교는 ‘설교자의 신학적 품격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러한 설교자의 품격이 결국 청중의 마음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 하나님의 존전과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서 있다.”는(370) 깊은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5) 정장복. ‘’한국교회의 설교학 개론’(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1). 21.
6) 칼빈, ‘칼빈의 사무엘하 설교 2’, 김동현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4), 155: “우리가 설교 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복음의 설교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지상에 내려오신 것과 같습니다.”
7) 칼빈, ‘칼빈의 사무엘하 설교 2’, 155-156.
8) 칼빈, ‘칼빈의 사무엘하 설교 2’, 155-156.
9) 딤전 5:20, Sermon XLⅢ, Co 53, T.H.L. 파이커, ‘칼빈과 설교’ 김남준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7), 69에서 재인용
10) John Calvin, Comm. on Haggai. 1:12. tr. by William Pringle.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53. 참고: 이하에서는 칼빈의 주석을 CM으로 표기함.
11) 로럴드 S. 월레스, ‘칼빈의 말씀과 성례전 신학’, 정장복 역(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139-40.
12) Ronald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Tyler, TX: Geneva Divinity SchooI Press, 1982), 84.
13) Brain A. Gerrish. ‘Grace and Gratitutude: ’The Bucharstic Theology of John Calvi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85: “칼빈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교리적이 아니라 효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성령은 그 말씀을 통해 조명, 믿음, 깨어남, 중생, 성화 등을 부여한다. 칼빈은 말씀을 성례적 말씀(verbum sacramentale)라고 부른다.”
14)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이용중 역(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2), 757.
15) 파이커, ‘칼빈과 설교’, 68-9.
16) John H. Leith, ‘Calvin’s Doctrine of the Proclamation of the Word and Its Significance Today’, in John Calvin and the Church: A Prism of Reform, ed. Timothy George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0). 206: “Calvin thought of preaching as the primary means by which God’s presence becomes actual to us and by which God’s work is accomplished in individual life and in the community.
17) 리차드 스토페르, ‘칼빈의 설교학’, 박건택 편역(서울: 성서연구사, 1994), 64-5.
18) 참고: 아셀트와 데커는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에서, 스콜라주의는 특별히 이탈리아에서 발 전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스콜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과 철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스콜라주의는 중세시대 기독교에 영향을 끼치면서 기독고의 고유한 개념을 인간 중심의 개념으로 변형시키게 된다. 예를 들면 ‘믿음’을 한 개인에게 형성된 ‘하나의 습관’ 혹은 ‘성향’(habitus)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칼빈은 스콜라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아셀트와 데커에 의하면 과연 칼빈이 스콜라주의를 전적으로 배척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본 논문의 주제에 직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상술은 생략하고자 한다. 빌렘 판 아펠트 에프 데.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 한병수 역(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2), 22-32.
19) John Calvin, ‘The 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존 칼빈, ‘영한 기독교강요’, 성문출판사 편집부 역(서울: 성문출판사, 1996), IV.8.7 (295-97). 창고: 이하에서는 Inst.로 표기함.
20) CM학 1:12.
21) CM요 16:12. B.C. Milner, Calvin’s Doctrine of the Church(Leiden: E.J. Bhll, 1970), 103 에서 재인용.
22) Inst., 1.9.1.
23) CO 55, 50. 파아커, ‘’칼빈과 설교’, 54에서 재인용.
24) Milner, ‘Calvin s Doctrine of the Church, 103. 참고: CM 16:12
25) Insf., IV. 9.2.
26) 파아커, ‘칼빈과 설교’, 22.
27) 파아커, ‘’칼빈과 설교’, 55.
28) Inst.. 1.7.8; 4.24.12. 참고: Leith, ‘Calvin’s Doctrine of the Proclamation of the Word and Its Significance for Today’, 211.
29) D. 마틴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의 부흥’, 서문강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4), 171. 참고: 로이드 존스는 신약에 나타난 초대교회와 개혁파 부흥이 일어난 위대한 시기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음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부흥의 시대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위대한 영적 표증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있었다.”(225). 즉 로이드 존스는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임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것이 교회의 기준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226).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과 그 존재와 그 뜻에 대해 매우 피상적이고 예비적인 지식만 갖고 있으면서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133). 그리고 성경은 실제 역사이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고 강조한다(142).
30) 조나단 에드워즈, ‘균형 잡힌 부흥론’, 양낙흥 역(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5), 109. 참고: 에드워즈는 ‘부흥론: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 7권’에서, 부흥의 역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될 때는 사람들이 복음을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234). 그래서 에드워즈에 의하면 선포되는 말씀이 단순한 지식 혹은 관념적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능력으로 다가오게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책이 되고 설교가 새롭게 들린다.(237) 그러나 에드워즈는 부흥을 중시하지만 그 위험성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부퐁과 관련된 사람들은 극히 조심스럽고 경성하여 자만이나 방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고 경고한다.(545) 왜냐하면 부흥에 도취되어 있는 자는 성령 충만하다는 이유로 틀림없이 자신은 옳은 편에 있다고 확신하는 ‘영적 교만’에 쉽게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545-8)
31) CM 사 55:11: “The word goeth out of the mouth of God in such a mariner that it likewise goeth out of the mouth’ of men; for God does not speak openly from heaven, but employs men as his instruments, that by their agency he may make known his will.”
32) CM 사 50:10. 참고: Joshua Ralston, “Preaching Makes the Church: Recovering A Missing Ecclesial Mark,” in John Calvin’s Ecclesiology: Ecumenical Perspectives, ed. by Gerard Mannion and Eduardus Van der Borght(New York: T & T Clark, 2011), 132.
33) CM 사 50:11. 참고: 안인섭. ‘’칼빈과 어거스틴’,(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2009). 235-6. 안인섭에 의하면, 칼빈은 말씀 선포의 임무는 주로 목회자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통해 영적 통치를 담당한다. 둘째, 목사는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다.(Inst, IV.3.8). 셋째, 목사는 성도들을 교육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신앙의 일치와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Inst., IV.1.1). 이렇게 안인섭은 칼빈의 목사관에는 설교자의 임무가 포함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에 근거한 안인섭의 주장을 따라서 연구자는 목사가 교회에서 설교의 임무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설교자’란 용어를 ‘목사’ 또는 ‘목회자’라는 용어와 병행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34) Inst,Ⅳ.3.10: ‘Therefore, if a man to be considered a true minister of the church, he must first have been duly ca11ed.(Heb. 5:4) then he must respond to his calling, that is, he must undertake and carry out the tasks enjoined.”
35) Inst, IV.3.11,13.
36) Inst. IV.3.11.
37) 파아커, ‘칼빈과 설교’, 64-71.
38) 칼빈은 디모데전서 4:6,7에 근거하여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CM 딤전 4:6-7).
39) 파아커, ‘칼빈과 설교’, 48.
40) 파아커, ‘칼빈과 설교’, 65.
41) 디모데후서 12번째 설교, C0 LIV, 151-2; CO XⅡ, 374; 사도행전 주석 II, 186. 리차드 스토페르, ‘칼빈의 설교학’, 박건택(서울: 성서연구사, 1994), 68-9에서 재인용. 참고: 월리엄 J. 부스마, ‘칼빈’, 이양호, 박종숙 공역(서울: 나단, 1991), 515.
42) 참고: “절대적인 권위를 설교에다 부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임이 분명하다. 악의적이고 오만한 악용의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견제장치(counter weights)가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개혁교회의 목사직(New presbyter)은 과거의 사제보다 백배나 더 악용될 것이다. 주요한 견제 장치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하였다. 그 하나는 설교자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선포하신 것만을 전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가 파견된 대사(envoy)이지 주권자(the sovereign)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권위는 항상 메시지에 주어져야한다.”(파아커, ‘칼빈과 설교’, 66, 70).
43) Inst, IV.8.2.
44) Inst., IV. 11.1: “We conclude that in those passages the power of the keys is simply the preaching of the gospel, and that with regard to men it is not so much power as ministry. For Christ has no tgiven this power actually to men, but to his Word, of which he has made men ministers.“
45) Inst., I .6.2: “하나님께 대한 이해의 시작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하여 증거 하기를 기뻐하셨던 바로 그것을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러나 완벽하고 모든 면에서 완전한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올바른 이해'(all right knowledge of God)는 바로 이 순종에 의해 탄생된다.“
46) Inst., IV.1.5. 참고: 칼빈은 학개서 1:12 주석에서 선지자의 메시지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증거로 강조하면서 결코 인간의 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47) Inst.. IV. 1.5: “He proves our obedience by a very good test, when we hear his ministers speaking just as if he himself spoke.“
48) 참고: 데살로니가전서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49) CO 25, 713-714. 파아커, ‘칼빈과 설교’, 67-8에서 재인용. 참고: “이 사역을 배척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은 그 사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거역하는 것이다.”(CM 엡 4:11; Inst., IV.3.2)
50) CM 고전 4:1. 참고: 칼빈은 이러한 목회자에 대한 경멸은 만인 제사장직을 내세워 목회사역을 경솔히 여긴 결과로도 절명한다.(신명기 194번째 설교, CO XXIX, 147. 스토페르 ‘칼빈의 설교학’, 74에서 재인용).
51) 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수원: 도서출판 영음사, 2011), 512.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은 다른 신조들과 달리 한 사람 하인리히 불링거에 의해 작성되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이 트렌트회의를 통해서 교리서를 작성하는 상황일 때에 불링거는 제1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경험을 살려서 보다 나은 형태의 고백서를 작성하게 된다. 박일민에 의하면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의 특이한 정은 “성경을 다룬 제1장에서 설교에 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고백서는 “설교자가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전하는 말씀은 그와 상관없이 참되고 선하므로 청중은 설교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박일민, ‘개혁교회의 신조’(서울’. 성광문화사, 1998), 178-9).
52) 박태현, ‘청중의 설교학: 효과적 설교 청취의 기술-청교도를 중심으로’,(한국개혁신학 51 (2016), 82.
53) 딤전 4:6,7; Sermon XXXI, CO 53, 371-372. 파아커, ‘칼빈과 설교’, 81에서 재인용. 참고: “회중은 설교자 못지않게 가르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이 말은 그 가르침에 대한 반응 이상을 말한다. 설교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성령의 메시지만이 그들의 강단에서 들려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일 의무가 있다. ‥‥ 설교자와 회중이 공유하는 분명한 일반적인 목적은 교육 곧 하나님의 사랑과 지식 가운데서 믿는 자를 세우고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가는 것이다.”(Ibid., 80-1).
54) CM 고전 3:22, 4:3
55) 파아커, ‘칼빈과 설교’, 78.
56) 부스마, ‘칼빈’, 525-8.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긴장관계가 제대로 이루지지 못했다고 한다.(Ibid.. 525) 그 이유 중 하나는 신앙의 경험이 성도 각자의 개별적 차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Ibid., 528) 즉 동일한 말씀이 선포되어도 은혜를 받는 것은 성도마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칼빈이 주장하는 이러한 설교자와 청중의 올바른 긴장 관계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면 서로에게 유익한 면이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목회의 현장에서는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대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57) CM 고후 13:5. 칼빈은 고린도후서 13:5 주석에서 말씀 선포를 통한 영혼구원의 열매를 명확히 언급한다. 칼빈에 의하면 말씀 선포는 잉태하고 낳는 ‘어머니’(mother)가 되며 믿음은 바로 이 선포되는 말씀의 ‘딸’(daughter)이다.
58) Inst., IV. 1.10.
59) CM 렘 23:29.
60) Inst, 4.1.5.
61) C.R. 46, 110; 53, 327. u.a. 빌헬름 니젤, ‘칼빈의 신학’, 이종성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113에서 재인용.
62) CM 요일 4:12.
63) CM 요일 4:14: “From this it follows that we receive Him by faith. For the apostle’s aim is to show that God is so united to us by faith and love that He truly abides in us and in a way makes Himself visible by the effect of His power, when otherwise He could not be seen.“
64) Dennis E.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1994), 87.
65) CM 고전 6:15.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88에서 재인용.
66)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89. 참고: 리틸보스(Ridderbos)도 칼빈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은 보이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가 연합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헤르만 리델보스, ‘바울신학’, 박영희 역(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85), 438.
67)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84-87. W. Gary Crampton, ‘What Calvin Says 90’에서 재인용: “Preaching is the instrument of Christ’s rule over the church; it is a sign of God’s presence.” 참고: Crampton, ‘What Calvin Says,27′. “When the Word is biblically preached, it is a sign of the presence of God and the instrument of Christ’s rule … The Lord approaches his people through the preaching of Scripture(CM 사 50:2).“
68) CM고후 2:14-17. Crampton, ‘What Calvin Says, 27’에서 재인용.
69) Inst., IV.2.6. 참고: 빌름 네이언하위스(Willem Nijenhuis)는 칼빈이 에큐메니칼 신학자로서 개혁자들 가운데 교회일치에 대하여 탁월하게 공헌한 점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Willem Nijenhuis, ‘Ecclesia Reformata, Studies on the Reformation, vol. Ⅱ(E.J. Bhll, 1994), 50. 이상규, ’칼빈과 교회연합운동’, 45에서 재인용
70) Inst., IV.2.5.
71) Inst., IV.2.6.
72) Inst., IV.2.5
73) CM 암 8:12.
74) CM 암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