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칼빈 탄생 500주년기념 지상강좌(23) 설교자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견해

설교자의 말씀선포와 성령

시작하는 말

한국의 교회성장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하나의 모델로 자신의 나라로 가져가려는 외국 교회 지도자들을 우리가 종종 본다. 그러나 설교사역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러워하거나 모방을 시도하는 외국 지도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이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한국교회의 설교현장은 그 어느 나라보다 뜨겁고 아멘의 함성이 예배당을 메아리친다. 그리고 성령님을 제일 많이 언급하는 설교의 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말씀의 사역의 질과 내용이 자랑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한국교회 강단은 설교사역과 성령님의 역사를 바르게 연관을 짓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목회적인 수단으로 성령님의 이름은 남발되고 있으나 설교의 준비의 주변에는 성령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설교의 순간에는 성령님을 부르짖는 소리가 요란한데 그 손에는 남의 설교집을 들고 있는 비양심적인 설교자가 있다.  

그리고 말씀의 현장에서는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은 그 설교의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 때로는 과연 설교가 무엇인지를 저 목사는 이해를 하고 저렇게 외치고 있는지 질문을 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신학적으로 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칼빈과 같은 분들은 어떤 설교 신학을 소유했는지를 알아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다행스럽게 나의 은사이신 로널드 월리스(Ronald Wallace, 1945- ) 박사께서 펴내신 ‘칼빈의 말씀과 성례전 신학’(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1997)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거기서 칼빈의 주석과 기독교강요를 비롯하여 그의 수많은 설교들을 모두 읽어야 하는 수고를 절약하면서도 그 주옥같은 글에서 나타난 칼빈의 일차적인 자료수집이 가능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사역

  • 칼빈은 설교자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 한국 장로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칼빈의 설교사역의 신학적 견해는 어떤 것인가?
  • 칼빈은 설교자의 말이 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하는가?

(1) 설교자의 정체성

“설교자는 누구인가? 그 정체(正體)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설교사역에서 깊이 생각해야 될 질문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오늘의 설교사역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기도 하지만 설교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확고한 신학적 바탕을제시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칼빈은 설교자란 ‘하나님의 장중에만 존재하고 그 분의 주관 하에 있는 실존’으로 규정하고 있다. 칼빈은 설교자의 뿌리를 구약의 예언자에게 두면서 그 예언자들은 성령의 발성기관(發聲器官)으로서 오직 위탁된 말씀만을 외치는 도구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말하고 싶을 때에 말하지 않았으며 (중략) 오직 하늘로부터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것만을 전한 성령의 발성기관(Vocal organ)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황홀경에 빠져서 제 정신을 잃고 신들린 몸으로 예언을 하는 이방종교의 예언자들과는 철저히 구분 짓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비록 성령을 그들의 인도자로 알고 순종하여 따랐고 성령이 주신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성(理性)을 잃지 않았고 충분히 맑고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발성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강조한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 속에 자신의 전(全) 생애(生涯)을 맡기고 살았던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서 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깨닫게 하셨고 성령이 주시는 통찰력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을 파헤치도록 역사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훈련을 받은 가운데 설교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면 이들 역시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씀 사역에 임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복음의 선포를 위한 도구(道具)로 고용된 말씀의 대언자임을 스스로 확인할 때 그 사용권이 고용주에게 예속된다는 사실 또한 확인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의 밭을 경작하기 위한 도구로 고용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분만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에 (중략) 복음은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선포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가르침에 의해서 선포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자.”

이처럼 칼빈은 현대의 설교자의 뿌리를 하나님에 의해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장중(掌中)에서 활동했던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예언자들이 자의적(恣意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어진 메시지에 국한된 사역을 감당하였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령의 수행자들로서 그분의 밭을 경작하는 도구로서의 소명된 존재들임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이런 칼빈의 주장은 어느 특정 교단에서만 수용할 수 있는 교리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상과 같은 설교자의 정체성은 설교사역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있는 현대의 설교자들이면 누구나 수용해야 할 중요한 주장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먼저 설교자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럴 때에야 자신의 사역은 강하고 담대할 뿐만 아니라 존엄성을 가지고 수행하게 된다.

(2)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컫게 되는 설교자의 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설교는 언제나 인간의 말을 통해 행해졌다. 그리고 설교를 하나님 말씀의 대언(代言)이라는 거대한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해 오고 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자신들을 말씀의 사자(使者, messenger)라는 실로 거창한 신분으로 회중들 앞에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회중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설교자가 구별 된 거룩한  삶의 길을 걸으며 순전히 하나님 말씀만을 전할 때는 비록 성정(性情)이 같은 인간이지만 그의 특별한 소명과 거기에 따른 말씀의 사역에 경의(敬意)를 표한다. 그러나 현대의 회중의 수준도 미치지 못한 낮은 지성과 저질적인 인간 언어와 불쾌한 인격을 소유한 설교자에게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비록 자신이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 또는 말씀의 사자(使者)라고 자칭하면서 존경을 강요할지라도 회중들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설교자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어야 하는 사역자가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로 인해 성스러운 도구로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하고 당혹스러운 문제이다. 우선적으로 이 문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설교자의 설교 행위가 정당화되고 도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칼빈은 말씀의 사역자들이 보여주는 교만과 패역과 무례함을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 밖에는 없다고 한다. 거기서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킬 것을 요구한다.

설교자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고 자신을 모두 굴복 시켰을 때에 하나님은 그 설교자의 말을 매체로 하여 말이라는 행위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말씀을 설교자의 말과 밀접하게 동일시함으로써 설교자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되도록 하신다는 주장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펼치고 있다.    

“인간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은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씀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중략)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역자들이 그들 자신의 음성을 통해 그분의 말씀이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이상과 같이 설교자의 설교 행위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설교자와 하나님과의 성례전적인 특별한 관계가 엄숙히 이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의 말속에 함께 하시어 그분의 존재하심과 권능을 나타내시게 되며 그 순간 신적인 행위와 인간적인 행위 사이에 간격이 없는 일체감이 형성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도구와 완전히 접목되는 관계형성은 설교자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강조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말과 구별될 수 없으며 (중략) 하나님께서는 또 사역자와 분리되시지 않는다. (중략)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도구와 결합하시며 성령님의 감화력은 인간의 애씀과 결합된다. (중략) 이러한 일체감이 아주 밀접해서 그 결과 설교자들은 진정으로 주님의 목자라 불릴 수 있게 되고 그의 일들은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해진다.”

도구가 주인의 손에 있게 될 때 주인이 그 도구를 통해 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상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택된 설교자를 자신의 도구로 삼으시고 성령님으로 그와 결합되어 필요하신 말씀을 외치게 함이 바로 설교사역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설교자의 말은 단순한 그 자신의 말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2. 설교자의 성경해석과 성령님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해석은 설교자의 지성(知性)의 기능으로 모두 이룩될 수 있는 문제인가?
  • 설교자는 운반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앞에 놓고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1) 말씀의 이해를 돕는 성령님의 역사

설교자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시원스럽게 이해하는 문제이다. 설교자가 본문을 먼저 이해하는 과정은 하나님이 무엇을 이 말씀에서 의도하고 계시는지를 파악하는 가장 기본적인 출발이다.

그러므로 만일 설교자의 태만과 무지로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의미를 자신의 생각으로 설정하여 회중들에게 나아간다면 이것은 설교자의 큰 실수에 속한 중대한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설교자는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행보를 걷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르지도 명하지도 않은 메시지를 자의적으로 만들어 전하는 실수를 범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말씀의 사역자로 전락하게 된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칼빈은 성령님의 도우심과 그 역사하심을 강조하면서 “성령님께서 설교자의 앞에 놓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 가르침의 멍에가 될 때에만 하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유용한 능력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칼빈에 따르면 설교자들은 철저하게 성령님의 가르침이 동반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란 지극히 제한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님이 함께하실 때에만 가능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령과 설교 : 모든 설교자는 일시에 삼천 명이나 회개시킨 사도 베드로의 첫 설교가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 2:3,4)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적인 능력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이 계속해서 우리의 감각 기능과 교제하지 않는 한 눈과 귀는 본연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행 2:3,4 참고)

그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그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모든 능력은 결코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이어야 함을 말한다. 거기에 더하여 성령님의 역사에 의하여 우리의 귀가 뚫어지고 눈이 열려져야 우리들이 주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이해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오성(悟性)이 지극히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의 감각적이고 지성적인 기능이 최상의 것처럼 여기고 만족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이지만 사실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칼빈의 다음의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적인 능력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이 계속해서 우리의 감각 기능과 교제하지 않는 한 눈과 귀는 본연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그의 도움이 없이는 주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주장들을 종합하면서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전해야 할 본문을 앞에 놓고 그 말씀의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얼마나 절박하게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하는지에 대한 자성적인 관찰을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자신의 말을 도구로 삼아 운반해야 할 본문 말씀을 앞에 두고 취한 단계는 다음의 세 부류로 분류된다.

  • 첫째 부류

본문을 읽고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본문의 뜻으로 정해 버리는 지극히 경망스러운 설교자들이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하여 거기에 맞는 본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류의 설교자들에게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한다.

  • 둘째 부류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주석을 겸한 성경 한 권으로 말씀의 뜻을 채우려는 단순한 노력형의 설교자들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본문에 대한 석의(釋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체 대충 넘기는 경우이다.

  • 셋째 부류

설교의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형태이다. 먼저 칼빈의 말대로 성령님의 동행을 간구하고 자신의 오감을 깨우쳐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신이 찾아 볼 수 있는 각각 달리 번역된 성경과 원어사전과 성경사전을 비롯한 각종 사전류를 펴고 오늘의 말씀의 뜻을 찾기에 골몰한다. 그리고 다수의 성경 주석을 가지고 남은 어떻게 이 말씀을 해석했는지를 찾아 땀을 흘린다. 여기에서 미래의 설교자들이 가야할 바른 길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점검하게 된다.  

(2) 말씀 앞에 선 설교자의 겸손

여기서 우리의 깊은 관심은 설교자의 지적인 기능은 무가치한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칼빈의 주장은 결코 그러한 차원의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교자가 자신의 지식과 분석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실수를 막기 위하여 성령님의 동행과 그의 도움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따른 분석을 앞세우는 것을 경계하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에게 그 주권을 의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칼빈은 또 하나의 의미 깊은 충고를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의 문제이다. 칼빈은 성경을 앞에 놓고 있는 설교자는 누구보다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펼 것을 강조한다. 그 주된 이유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성경을 통해서만이 가장 정확하고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관문이기에 이 성경을 접하기 전에 설교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뵙게 되는 준비된 마음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하는 것은 눈을 감은 채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하거나 시력이 무척 나쁜 사람이 안경을 벗은 채로 주님을 보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이론을 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듯 성경을 똑같이 존중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고 성경을 두루는 사람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성경을 보려고 할 때에 듣고 읽은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교만을 부려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는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야 한다.”

칼빈은 이상과 같은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한 설교자는 자연적으로 성령님의 계시에 자기를 맡기고 그분이 말씀의 해석자가 되어 주기를 간구하는 겸손한 자세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코 자신의 지식과 관찰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참 해석자는 말씀 앞에 겸손한 자들에게 보내진 성령님이라고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것은 바로 저 위에 있는 지혜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성경을 진심으로 존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라고 여전히 우리는 성경을 멀리하지 않고 열심히 읽으면서 성령님의 계시에 나를 맡기고 우리에게 해석자가 주어지기를 소망한다. 이 성경의 해석자는 바로 말씀 앞에서 겸손한 자들에게 보내진 성령님이다. (중략) (성경의) 예언들은 먼저 인간정신의 통찰력으로 구성할 수 없듯이 지금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해할 수도 없다. (중략) 우리는 예언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의미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활짝 열려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인간적인 야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주어질 수 없다. 교만한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오늘의 설교자들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접하는 자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지적인 바탕을 의지하는 것보다 그것을 단순한 도구로 여기는 겸손한 자세의 필요도 중요한 교훈으로 우리 앞에 주어지고 있다. 특별히 설교자가 운반해야 할 말씀을 앞에 놓고 그것을 단순한 학문적인 차원으로 다루지 않고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하여 스스로 메시지를 듣는 겸허한 자세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언(聖言)으로 운반하는 필수 조건이라고 하겠다.

3. 성령님이 동반(同伴)한 성언(聖言) 운반

  • 설교는 인간 단독의 행위인가? 왜 성령님의 동반이 필수적인가?
  • 설교는 설교자의 노력으로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가?
  • 진정한 말씀의 확신은 어디서부터 발생되는가?

(1) 설교자에게 성령님의 동반(同伴)이 필요한 이유

설교가 성언(聖言)의 운반이라는 개념을 쉽게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설교사역에 설교자가 홀로 서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신앙적인 경험이나 지식을 펼치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훌륭한 신앙수필을 낭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강의로 행하여 질 수 있는 행위들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강의와 신앙간증을 성언운반의 설교사역과 혼돈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설교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운반하는 사역이다. 그리고 이 성언(聖言) 운반의 사역은 어떤 경우도 설교자라는 한 인간의 단독으로 이룩될 수 없다는 것이 설교학의 이론이며 설교역사의 기록이다. 설교는 듣는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받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님에 의하여 감동이 생기고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러한 감동과 변화는 설교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

칼빈은 성령님께서 설교자와 동행해 주시고 회중들의 마음속에서 역사 해 주시지 않는다면 이상과 같은 감동과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설교사역에 있어 성령님의 가르침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설교자의 입 밖으로 울려 퍼지는 설교는 공허하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께서 말씀을 받아 드리도록 회중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 전달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칼빈은 “놀랍고 특별한 힘을 소유한 성령님께서 들을 수 있는 귀와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성령님의 동반(同伴)이 설교사역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다. 즉 한계성을 가진 인간 설교자가 자신의 말을 어떤 말이든 외칠 수 있으나 듣는 사람의 듣는 귀와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조정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깊은 주의를 요한다. 이것은 설교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령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분의 동반이 없이는 조금의 효력도 발생시킬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성령님의 동반에 대한 증거 문제다. 대부분의 설교자와 회중이 설교의 현장에서 찾는 성령님의 역사는 즉각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령님의 동반이라는 개념을 동시적인 사건으로 믿고 그러하지 못할 때 성령님의 역사 없었다고 믿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시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 사고의 결과이지 결코 그것이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의 가르침을 보여 주시는데 먼저 주님은 사랑의 입술로 우리의 귀에 들려주신다. 그리고 다음으로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이것을 주님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에 동시에 하거나 아니면 따로 따로 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동반의 결과는 가시적으로 인간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결과는 결코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자의적인 계획과 판단에 따라 이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2) 설교에 대한 최종적인 성령님의 결실

한 인간이 설교의 현장에서 설교를 경청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 발생되고 삶의 변화를 이룩하는 사건들이 인간의 오성(悟性)으로 이룩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류를 범한 이론이다. 만일 인간의 지성적인 기능만으로 설교사역이 이룩되고 회중들이 설득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증가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인간중심의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위험한 발상이다.

설교의 사역이 가져온 결과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는 결과들이 있게 되는데 칼빈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회중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행동’이라고 일컫고 있다. 실질적으로 설교란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발생된 결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칼빈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결과임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모두 완전하게 들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가운데 하나인 무감각한 성질을 제거하기 전에는 나뭇가지에 대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이런 역사가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데 그것은 주의 말씀이 우리가 자긴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이 성령님의 역사와 위력은 “인간정신의 능력 위에 있다는 것이며, 우리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을 확신시키는 것은 성령님의 역할이다.” 이런 성령님의 초자연적 역할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며 그 교회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새로운 활기를 갖게 된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이룩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의 법아래서 통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에서 이룩된 교회라고 하더라도 교회는 말씀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칼빈은 역설하고 있다. 즉 성령님의 역사만을 노래하고 표적만을 구하는 교회란 너무나 불안정하기 때문에 말씀이 있어야 만이 교회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외쳐진 말씀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운반되어져야 하기에 설교자들은 정직한 말씀의 사역을 위하여 성령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직접 교회를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감독하기 위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을 전했다. (중략) 사도 바울과 말씀의 사역자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말은 조금이라도 감히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의 인도자로서 성전에서처럼 그들의 입술을 주관하시는 성령님에 순종하며 따랐다.”

말씀의 사역에 동반한 성령의 역사의 최종적 결실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는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존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택함 받은 설교자가 그 시대의 언어감각과 환경을 익히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고 정확하게 선포하고 회중들의 삶에 적용하도록 독려하시고 함께 역사하심이 오늘 우리 앞에 보이는 성령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서 말씀 위에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도록 함께 말씀의 사역에 동참하심이 성령님의 가장 으뜸가는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21세기의  구원의 완성을 지상목표로 삼으신 성령님의 최종적인 결실을 익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믿게 된다.    

치는 말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1907년의 대각성 부흥운동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체험했다. 당시 선교사들에 비해 한국인 사역자들이 아직 미숙한 설교 사역이었지만 그 서투른 사역을 통해 역사하셨던 성령님의 역사를 한국교회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 소중한 경험은 퇴색되어가고 있다. 순수하게 회개의 함성이 교회의  안과 밖을 울리고 울부짖는 눈물이 성도들의 서로의 옷깃을 적시던 아름다운 경험이 우리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오늘날은 성령님의 역사를 가시적인 기사와 이적의 세계에서만  찾으려는 탈선된 신앙의 모습이 난무하다. 단상에서 넘어지고 병을 고치는 역사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말씀 앞에서는 형식적인 ‘아멘’을 메아리처럼 외치다가 교회의 문전을 나서기 전에 모두를 잊어버리는 부끄러운 현실로 지금 한국교회는 달리고 있다.

이런 정황에서 본 글은 말씀의 사역과 성령님의 연계성을 새롭게 찾아보았다. 특별히 본 연구에서는 우리의 설교 실정과 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연관 지어 새롭게 성령님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오늘의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를 통하여 운반되어지는 성언의 사역에 가장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제 이런 관찰이 하나의 학문으로 끝나지 않고 설교자들의 설교사역에 바로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동안의 미숙했던 설교사역에 새로운 성령님의 관여와 동적인 역사와 아름다운 결실들이 이제부터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야 21세기에도 이 땅에 교회에 촛대가 꺼지지 않게 될 것이다.(*) 글쓴 이 / 정장복 교수(한남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Th.M.),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S.T.D.), Edinburgh 대학교 연구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 예배학, 설교학, 한일장신대학교 총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