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탄생 500주년기념 지상강좌(7) 말씀 선포를 통한 개혁운동
1. 서 론
종교개혁의 원동력과 그 지속적 능력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權能)이었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재발견과 선포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해 종교개혁은 일어났고 말씀의 선포에 의해 종교개혁은 성취되어갔다. 개혁자들은 이 말씀에 사로잡혀 그들의 소명을 이루어 갔던 것이다.
진실로 말씀의 선포가 없는 종교개혁, 열정과 확신 가운데 행한 설교가 없는 종교개혁은 상상할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었고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의 도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했던 그 중심 이유는 그들이 인식한 설교에 대한 신학이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 특히 ‘말씀의 사역자’로 불리길 원했던 칼빈의 설교관을 살펴보면서 우리시대에도 개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 말씀이 선포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말씀 선포에 의한 개혁의 운동이 지속되기를 또한 소망한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입과 입술을 친히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2. 본 론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설교할 때 자신을 하나님의 대사(大使, God’s messenger)로 여겼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단순히 예배의 요소 가운데 하나라든가 목사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요 현현(顯現)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또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말은 내가 하지만 역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처럼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할 지라도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선택교의’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파되어질 때마다 이것은 마치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열리어 하나님이 자기 손을 내미시면서 ‘생명이 가까웠으니 너희가 이 하늘나라 상속에 참여케 하마!’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거나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우리 앞에 생명과 불멸을 펼쳐 보이는 것을 보는 우리로서 고의적으로 못 본체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임을 확신했으며 또한 인간을 통해 전달되어지고 말씀되어졌음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천둥소리로 그의 말씀을 전하시지 않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하나님이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임을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말씀을 드러내셨고, 이로써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것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전파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사야 55:11 주석에서 “어느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은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그 도구로써 사용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말씀 안에서 빛나고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과 가까이 마주 대한 것처럼 말씀으로 무한한 감화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의 거룩성과 권위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자는 중보자 되신 예수께서 복음이 전파된 곳에 오시리라는 대망을 들려주어야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목회자의 목소리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또한 역설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1549년 8월 16일에 행한 예레미야 강해 설교 제 25번째에서 자신을 가혹하다고 비난 하는 자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던져지는 훈계의 말씀을 거역하여 일어나는 모든 자들 그들은 하나님께 맞서 그에게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내 혀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해서 내 혀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날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시고자 할 때 사람들이 내 인격에 맞서서는 안 됩니다. 만일 내게 맞선다면 악인들은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보증이 되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다니엘서 21번째 설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니라고 그들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가 선포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전달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내게 주신 분량에 따라 그를 신실하게 섬겼음을 그 분 앞에서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헐뜯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경한 짓을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할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 후 에스겔서 5번째 설교에서도 “오늘날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저 칼빈을 보라! 그는 스스로 그것을 원한다. 그러면 그가 선지자 인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나는 이런 어투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에스겔에게서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나는 이 선지자가 말한 것을 변형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포되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칼빈은 설교자로서 자신의 사명의 중대성을 확신하고 또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었다. 이러한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케 했던 제일의 주된 확신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율법을 모세가 쓴 것으로 시편을 다윗과 다른 선지자들의 것으로 여기며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에 담겨진 것을 파악한다면 이 사역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말씀의 사역이 유지되어야 한다.’ 또는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토론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나는 죽을 운명의 사역자들에 대해 반박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과 그리고 성경에 들어있는 모든 교리에 권위를 부여하신다면 이러한 핑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는 말이 교회에서 흔히 쓰여지는 용어라 하여 결코 공연한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또 “내가 지금 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청할 것을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오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새로운 법률이나 신조 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라고 하여 성경의 권위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며 그의 설교가 그것을 바탕으로 선포되기 때문에 동등한 권위가 있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 해석과 강해에 주력했고 성경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진실 되고 순수한 주해’와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생활에 적용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의 할 일 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의 행태와 얼마나 상치(相馳)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개혁자의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임무에 대한 깨우침에 귀 기울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시편 119편 설교를 시작하며 오직 성경 본문을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에 맞춰 본문의 진정한 흐름을 그대로 따르려 할 것입니다. 나는 권면을 지루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만 다윗의 시를 흔히 말하는 대로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으로 만족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각 8절을 한편의 설교로 완성시킬 생각을 했었고 또 가장 배우지 못한 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만 본문의 단순한 핵심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려 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구약 성경은 주님이 자신의 뜻을 표명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설교를 이용해 자기 고유의 사상을 표현할 권리가 그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을 믿었다. 칼빈은 그의 설교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말했다.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하도록 하자. 즉 경솔하게 설교자 자신을 신뢰하거나 설교자 자신의 업적을 미봉책으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리도록 하라. 설교자는 마땅히 성경의 교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하라. 그리하여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라.”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 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어리석은 사색을 구한다든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자신을 개조해 보려고 교회에 나온다면 그들은 복음을 더럽히는 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칼빈은 확신과 겸손을 진실히 갖고 성경 본문에 접근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칼 바르트처럼 성경이 우리 마음속에 말해질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귀담아 들으려했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 본문 해석에는 언제나 인간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성경관이 그의 설교에 반영되어 그의 설교는 언제나 무겁고 심각하고 열정적이었다.
(2)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서의 설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칼빈의 설교관은 설교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임을 보여준다. 칼빈의 설교에서 특기할 만한 것 세 가지 정도를 지적 할 수 있는데:
첫째,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의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와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칼빈은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 도구를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의도는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의 것을 인식한 것이다.
셋째, 설교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청중을 계속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했다. 설교에 대한 칼빈의 이러한 이해는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한 행위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설교자의 입을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입’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자’(使者, messenger)라는 칭호보다 더 우월할 것이다. 이는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 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듣는 회중은 곧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곳에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에 대한 인식에서 설교란 신적행위인 것이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대화하신다. 이렇게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강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로마서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함과 같이 만약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장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만남은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는 그 곳이다. 이렇게 설교자들에 의한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베일에 싸인 채 인간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형태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의 입과 같이 설교자들의 입이 사용되기를 원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 계시와 은혜의 징표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통(交通)의 수단으로서 말씀 선포를 사용하신다. 이 때문에 칼빈은 설교를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혹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언급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선포로 우리에게 오시며 때로는 다양하게 베푸시는 갖가지 은사로서도 오신다. 또한 설교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주님의 선물이며 그 자체는 죽어야 할 인간의 목소리가 영생을 얻도록 교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성경 말씀이 설교자에 의해 설교되어질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의 눈에 비친 설교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顯現) 혹은 하나님의 현현(顯現)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목사가 복음을 전파할 때도 하나님은 실재로 임하시고 임재 하시되 성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재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먼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주고 그 후에 그 교훈이 사람의 심령에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또 설교자는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고 칼빈은 명백히 가르쳤던 것이다.
(3)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으로서의 설교
설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인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수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비록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보이거나 그와는 반대로 대단한 존경 받는 인간으로 보이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설교 중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 말씀이 선포 되는 그곳에 두시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니 타락과 비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 새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 복된 왕국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왕국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 복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반역자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으셨다. 말하자면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즉 복음이 우리에게 설교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지배의 세력 아래에 두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라 불려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서 복음이 설교 되든지 그것은 그 땅위에 그가 주(主) 되심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통치하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우리를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말하기를 “그의 왕실은 바로 복음이요. 복음의 교리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그의 통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인 성경에 주어진 내용들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단순하게’라는 부사를 통해 설교란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고,
둘째, ‘간결하게’라는 부사를 통해 설교란 평이(平易) 한 간결성과 결코 애매모호함이 없도록 하여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고 했고,
셋째, 용기 있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혹은 꾸밈없이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자세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확실히 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당시 이 같은 설교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감동을 주고 삶을 변화시켰다.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설교자들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설교가 교회에서 뿐 아니라 세속적인 사회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처럼 설교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왕권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치하고 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해 교회의 장중에 있는 검인 것이다. 교회의 말씀의 검은 적들을 쳐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 것이냐, 혹은 회개하지 않는 무리들을 또 다시 영원히 파멸시켜 버릴 것이냐 하는 택일성의 문제를 지닌 채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엡 6:7)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았던 여러 사람의 반역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사역을 옹호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당신들은 우리에게 명령할 수 없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쪽으로 가야한다.’는 식으로 명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념해 가르치기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한 분 주님이 있고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나를 통해 전진시키기 원치 않으며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올 생각도 없으며 오직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반박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하며 모든 거만한 것들이 꺾여야만 하고 또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이에게 대항하여 주둥이를 내밀거나 눈을 치켜뜨는 피조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를 통해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항해서는 안 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어느 누구든지 복종해야 할 것을 말한 칼빈의 성경관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이렇게 설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곳 어디에나 크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인 것이다.(*) 출처 / 칼빈의 설교론, http://www.happychapel.or.kr/divinity/divinity0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