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14) 중세 교회사 서론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14)
중세 교회사 서론

지난 호까지 초대 교회사를 개괄적으로 소개했는데 이번 호부터는 중세 교회사를 소개 하고자 한다.
중세의 역사를 움직인 두개의 대표적인 기구는 교회와 국가였다. 이두 개의 힘의 축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서로 응전과 도전 속에서 공존하였고,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또한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사는 현대적 의미의 정교 분리나 구분의 개념으로 그것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룰 수가 없다.
이때는 정치, 종교, 사회, 문화가 기독교사회(Christendom)라는 우산 아래 새끼줄처럼 역이어 천년의 마당을 이룬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속역사와 깊이 연관된 중세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보다 광범위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연성을 통해 교회는 다양한 경험과 풍요한 신앙적 유산 그리고 교훈을 후대에 전승시켰고 서양 근대 기독교 문화와 종교개혁을 잉태시킨 요람지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천년 동안 세속역사의 동반자 혹은 통치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교회는 극도로 부패했고, 이 때문에 개혁이라는 해산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러한 중세 교회 모습은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돌변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로마제국의 정치적 변동이 접목되어 파생되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정치와 종교가 접목되어 형성된 교권은 민중들을 중세 신앙의 족쇄에 채워 제도화된 교회의 존속을 강화시켰다.
이에 반해 제도화된 교회의 형태와는 달리 영적 저수지 역할을 담당한 수도원 운동이 또한 만개하였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 자체도 제도화된 교회의 부패를 끝내 방지하지 못하였고, 자체의 모순 극복에도 실패하였다. 오히려 중세사회의 근간을 이룬 기본구조인 봉건제도를 수용하면서 물량적 성장을 초래하였고, 이를 통해 세속적 직위를 확보해 갔다. 이렇게 교회든 수도원이든 영적권세와 세속권력을 동시에 확보 내지 형성하면서 많은 모순과 더불어 크게 확대 팽창하여 중세 기독교사회를 잉태시켰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의 모순과 부패만을 끄집어내어 비판의 시각에서만 중세 기독교를 연구할 수 없고, 실패와 더불어 남겨진 교회의 영적 싸움의 흔적들을 동시에 추적함으로써 중세 기독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신과 인간의 전통 그리고 교권의 남용 등 비 신앙적인 요소 때문에 진통을 겪었지만, 교회는 여전히 신앙인들의 삶의 자리이기에 시비를 가려 올바른 역사적 조명을 받을 가치가있기 때문이다.
시비가 엇갈린 중세교회는 고대교회와 근대교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고, 사실 어느 시대보다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대조를 이루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조를 통해 도리어 거짓을 쉽게 노출시키고, 참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중세교회의 양면성은 고대와 근대교회사에서도 존재해 온 현상들이며,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고대교회의 모순이 중세교회에 중복되며, 또한 중세교회의 모순이 근대교회에도 반복되기 때문에 중세교회사는 고대나 근대교회사와의 동일한 역사지평선상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중세교회를 근본적으로 부정해온 16세기 급진주의적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는 칼빈이 했던 것처럼 지양해야 할 것이며, 상대적으로 타락의 심도가 깊었다 할지라도 기독교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창달케 한중세교회의 업적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탄생되고 성경중심의 개신교신앙이 잉태된 역사성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또한 16세기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엄청난 물량주의와 교권주의의 시녀가 된 중세교회는 천 년간 역사의 주역을 맡아 중세 민중의 삶을 장악했으며, 이것은 일찍이 교회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세 교회 사상 가장 큰 손실 중의 하나는 이슬람교의 등장으로 기독교 발생지인 팔레스틴과 초대 기독교의 요람지인 소아시아와 북 아프리카를 상실한 것이다. 이로 인해 초대 기독교의 유산과 전통이 많이 상실 되었으며, 십자군 전쟁이라는 엄청난 정신적 물질적 소모전을 야기 시켰다. 그러나 이슬람지역의 접촉을 통해 학문과 문화가 유입되어 중세교회의 스콜라주의와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견고한 봉건제도가 서서히 와해되면서 중세사회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또한 중세교회의 또 다른 뼈아픈 경험은 동서 교회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근본적인 교리나 신앙의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든 전통과 교권주의로 말미암아 동서 교회가 갈라서게 된 순간 로마 가톨릭교회의 에큐메니즘이 교회사상 최초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교권과 왕권의 긴장, 교권의 남용, 수도원의 발달과 부패 그리고 개혁, 교황권의 성장, 대륙의 선교, 이슬람과 야만족들의 위협, 동서교회의 분리, 십자군 운동 등 복잡한 정황을 겪어오면서 중세교회는 13세기에 중세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되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은 13세기 말에 일어난 대학교육에 진리 탐구의 새로운 방법을 제공하여 신학, 형이상학, 자연과학 등의 발전을 가져왔다. 스콜라 철학 혹은 신학은 이러한 학문의 발달이 가져온 결과이다. 긴 지적 동면에서 깨어난 13세기에는 사색과 신비 그리고 다양한 신학적 해석들이 만개했고 동시에 이단사상이 교회에 기생하기 시작했다.
13세기의 이러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종교적인 열정은 지속적으로 13세기 수도원의 르네상스로 이어지면서 수도원의 민주적 혁신이(상대적이지만) 이루어졌다. 프란시스코 종단과 도미니칸 종단이 이에 속하며 둘 다 수도원의 대중 종교화와 사회여건 그리고 대학의 발전과 학문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때는 또한 교황권의 세력이 강화되어 교황의 영적권세와 세속권력의 통치력이 중세 역사상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고 그레고리 7세를 거쳐 이노센트 3세, 보니페이스 8세로 이어지면서 교황이 왕이나 황제보다 세속정치에 더 큰 영향을 행사하면서 교황제도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권 내의 전 유럽이 교황의 시녀가 되었으며 이단과 성도의 구별 없이 무차별 처형되었다. 그러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교황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바벨론 유수를 통해 교황의 국제적 성격이 상실되었고, 오히려 교황권이 왕권의 지배를 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같이 12,13,14세기는 교황제도의 전성기와 더불어 중세 서양 기독교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교황권이 도전을 받고 대학의 지성인들이 자각하여 개혁의 여명을 초래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부패와 더불어 함몰하는 중세교회를 개혁하고 재건하려는 평신도들의 종교회의와 선구자들의 몸부림이 있었지만, 노후화된 중세교회의 무딘 양심은 이를 용납하지 못하였다. 중병에 걸린 중세교회는 결국 수술대에 오른 채 16세기 종교개혁을 맞이하게 된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