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16) 중세의 여명(AD400-590)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16)
중세의 여명(AD400-590)

1. 교회로 밀려들기 시작한 세속의 물결
2. 야만족들의 침입
3. 수도원 운동과 초기선교
3세기 – 로마제국에 침입한 야만족들의 개종과 더불어 중세 기독교사회 형성에 공헌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중세 여명기에 형성된 수도원 운동의 부흥과 초기선교였다. 수도원 운동의 효시는 3세기 이집트의 사막지역에서 기도, 명상, 금욕의 삶을 통해 하늘의 즐거움을 맛보고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혼자서 영적생활을 영위하였던 은둔자(hermit, anchrobite or cenobite)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집트 사막에서 은둔(隱遁) 생활을 했다는 사도 바울을 모델로 삼아 세상과의 엄격한 격리 속에서 영혼을 위한 고행의 삶을 자처하였다.

이것이 대중운동화 된 것은 4세기 전반 안토니(St. Anthony)의 영향 때문이었으며, 비록 원시적 형태지만 집단적 수도 원으로 형성 된 것은 파코미우스(Pachomius) 때였다. 그리고 공동생활을 위한 수도원 법칙들이 제정된 것은 가이사랴의 바질(Basil) 때였다. 사막의 교부들 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수도(修道) 정신은 팔레스틴과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그들의 영향은 동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일찍이 서방에도 전달되어 고울 지방과 이태리와 브리튼과 아일랜드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발달하였다.
4세기 – 4세기경에 고울 지역에 투르의 마틴(Maitin)에 의해 파코미우스의 모범을 따라 리구게와 마르무티에르 수도원이 세워졌으며, 후자는 급진적으로 발달하여 은둔자(隱遁者)들의 집단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5세기 – 5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수도원들이 세워졌고, 이중 마르셀레스에 카시아누스(Casaanus)에 의해 세워진 성 빅토수도원, 성 로마누스(Rcmanus)와 성 루피티누스(Luptinus)에 의해 세인트 클라우데에 세워진 콘다트수도원, 그리고 성 호노라투스(Horonatus)에 의해 세워진 레린스(Lerins) 수도원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레린스 공동체는 급성장하여 수백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을 현혹시켜 주위의 무인도 섬들까지도 은자들의 은신처로 메워졌다. 5세기에 아일랜드를 수도원으로 성역화 시킨 성 패드릭(St. Patrick)이 이곳에서 수도사로 입단하여 훈련을 받아 파송되기도 하였다.
브리튼(Britain, 현 영국)과 아일랜드(Ireland, 현 영국)의 기독교는 수도원운동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지역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은 교회 역사상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3세기에 적어도 브리튼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314년 알레스(Aries) 종교회의에 3명의 브리튼 감독들이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3세기 때 로마제국 내의 기독교 확장은 군인들이나 상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브리튼에도 복음이 일찍이 이 군인들이나 상인들에 의해 전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5세기 초중반에 브리튼에 기독교가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로마제국의 주둔군이 브리튼을 철수할 때 이곳의 겔틱(Celtic) 교회들에게 앵글로 색슨족의 침입을 대처하도록 맡길 정도였다. 이들 기독교 공동체는 사나운 이교도들의 핍박 때문에 산이나 그들의 수도원 공동체에 집단적으로 은거하였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펠라기우주의와 같은 이단에 대항하여 싸웠을 때처럼, 신앙은 생동적이고 열정적이었다.
4. 아일랜드를 복음화 한 패트릭
그러나 이 때(AD 430) 아일랜드(Ireland, 현 영국)는 여전히 야만적인 섬나라로 알려져 있었고 선교 대상지였다. 교황 켈레스틴(Celestine)이 선교사 감독으로 팔라디우스(Palladius)를 파송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아일랜드(Ireland, 현 영국)를 개종시킨 전설적인 인물은 성 패트릭(St. Patrick)이었다. 브리튼의 남서해안 지역에서 태어난(AD 385) 그는 16살 때 아일랜드 해적에 의해 납치되어 6년간 노예로 종살이 하였고, 그곳에서 탈출하여 2개월간 대륙에서 헤매다가 결국 브리튼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 레린 수도원에 입단하여, 14년간의 훈련을 받은 끝에 선교사 및 감독으로 아일랜드에 파송되었다. AD 461년에 죽기까지 그는 30년간의 아일랜드 선교를 통해 성자들의 섬으로 만들었다. 아일랜드 섬은 수도원으로 가득 찼으며, 수도원 공동체 자체가 이곳의 기독교 자체가 되었다. 때로는 300명 정도의 수도사가 운집하여 신앙 집단을 이루었고, 이들의 신앙적인 선교에 대한 열정과 이상은 제국 내의 어느 지역보다도 뜨거웠다.
특히 아일랜드 수도원들은 대륙의 수도원들과 판이하였다. 월리암 캐논(William Cannon)이 지적한 것처럼, 종교적인 양식의 차이점(부활절 절기의 날짜, 수도사의 머리모양, 세례식의 양식, 성직 임명의 양식 등) 정도가 아니라 구조의 근본적인 상이점이 존재하였다. 이들 수도원은 강력한 족벌 체제로 형성되어 있었고, 교구의 예속물로나 교구와의 연관 속에서 존속된 것이 아니라 수도원 자체가 교구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기독 공동체의 구심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개종 전에 족장들이 그들의 종족들에게 가졌던 사회적인 직위와 책임이 수도원 공동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수도원 원장의 승계도 족장들의 경우와 같았고, 성속(聖俗)의 특권을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주교나 사제나 수도사들이 원장의 절대적인 감독 하아 있었고, 이러한 원장의 통솔 아래 수도원은 사회적 기능과 교회적 기능을 이행하는 신앙 공동체로 존재하였다.
5. 유럽 선교의 전진기지가 된 아일랜드
이러한 켈틱(Celtic) 수도원의 특징은 복음전파의 열정에 가득 찬 수많은 수도사들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다. 이 중 에서 AD 563년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스코틀드에 도착하여 픽트 족(the Picts)을 개종 시키고, 다음 해에 작은 섬에 이오나 (Iona) 수도원을 세운 콜롬바(St, Columba)는 특히 괄목할 만 Celtic Cross 하다. 150여 명의 수도사들이 정절과 겸손을 이상으로 삼고 운집하여 살면서 스코틀랜드의 대교구 감독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이 수도원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오르크니족(the Qrkneys), 쉐틀랜드족(the Shetlands), 파로에족(the Faroes)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아이슬랜드 지역과 아모리카(Armorica) 지역까지도 전파되었다. 콜롬바 외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브리티시 아일스(British Isles)와 유럽 대륙까지도 복음을 전파하였고(Vosges, Alsaoe, Franche-Comte and even SwitzerIand), 이 중 콜롬반(Columban or Columbanus, 559-615)을 대표적인 인물로 들 수 있다.

콜롬반은 580년경에 아일랜드의 뱅고 수도원을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떠나 아모리카(Armorica)에 정착하는 대신에 동부 대륙 깊숙이 파고들어 615년 이태리 북쪽의 보비오에 위치한 어느 수도원에서 죽기까지 25년간의 전도를 통해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교회 개혁의 원리까지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은 수백 년 간 지속적으로 유럽 대륙에 수도원을 세우는 등 대륙의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유럽이 기독교화 되는 전초전을 이들이 치른 셈이다. 아일랜드의 기독교야말로 유럽기독교의 제 2의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콜롬바와 콜롬반에 대한 월리암 캐논의 견해는 과소평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중세 여명기에 서구 유럽의 암흑기에 아일랜드는 제 2의 팔레스틴으로 신앙의 요람지 역할을 했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