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18) 중세의 여명(AD400-590)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18)
중세의 여명(AD400-590)

기독론에 대한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A.D. 318-325)
기독론에 대한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A.D. 318-325)

1. 교회로 밀려들기 시작한 세속의 물결
2. 야만족들의 침입
3. 수도원 운동과 초기선교
4. 아일랜드를 복음화 한 패트릭
5. 유럽 선교의 전진기지가 된 아일랜드
6. 이태리반도의 수도원운동 태동

7. 교리논쟁의 점화

중세 여명기에 동방교회에 나타난 특별한 사건 중의 하나는 교리논쟁을 들 수 있다. 이것이 중세 여명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다른 점이었다. 서방기독교 세계의 후예들인 오늘날 서구인들은 동방교회의 교리논쟁을 동방 기독교 내의 불행한 교권 싸움이며, 아무 가치 없는 말장난이라 비방하지만, 이것은 물질적 번영을 중시 여기는 현대 서구인들의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동방교회는 영적 이상(理想)의 실현이 교회의 주된 목적이었고, 실제적인 수단들은 영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런 원리 위에 서 있는 동방교회는 신앙의 잣대 역할을 하는 이상적인 교리의 정립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동방교회는 역사적으로 복음의 발생지이며, 그것의 전통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요람지로 자부하여 왔고, 그렇기 때문에 정통교리 보존의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순수 신앙과 교리 보존에 열정적이었던 무리들은 동방제국 전반에 산재해 있던 수도원의 수도승들이었다. 또한 수도승뿐만 아니라, 제국의 황제들까지도 이 문제에 개입되어 동방교회 전체가 몸살을 앓았고, 서방교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통을 통해 교회는 도리어 극단론자들을 배제하고 균형 있는 정통교리를 정립하게 되었다. 즉 교회는 항상 극단론자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의 완전성과 인성의 완전성을 보존해야만 했다. 신성의 완전성을 거부한 아리우스주의(Arianism)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파문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대한 도전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요소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은 신성과 인성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요소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서 마리아의 몸에서 사람으로 만들어진 예수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양성이 어떻게 하나로 연합되느냐가 논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니케아 종교회의(325) 이후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논쟁을 야기 시켰던 대표적인 인물은 몹수에수티아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의 완전성을 강조하기위하여 양성을 지나치게 구분함으로 양성의 연합성(unity)을 약화시켜버렸다.

이에 대항하여 시리아에 있는 라오디기아의 감독인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s, 430-489)는 그리스도의 연합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예수 안에 양성이 지나치게 분리되어 각자가 독립된 존재로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우스는 두 개의 요소가 어떻게 완전하게 하나로 연합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야기 시켰다.
즉 반쪽으로 쪼개진 한 과일의 두 쪽은 다시 연합하여 하나의 과일로 만들 수 있지만, 독립된 이미 완전한 두 개의 과일이 연합하여 하나의 과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면 인성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체와 동물적인 감각만을 사람으로부터 취하였고, 영적인 혼은 그의 신성에 의해 대치되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고 그의 반은 말씀의 신성으로 용접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이론을 반증하기 위하여 아폴리나리우스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인성적인 요소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여파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지에서 아폴리나리우스를 거부하는 회의들이 열렸고, 381년 콘스탄티누스의 종교회의에서는 결정적으로 그의 주장들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동방에 계속 잔존하여 이들은 단성론자(Monophysite , 單性論者)들의 효시가 되었다.

* 단성론(Miaphysitism) :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겸재(兼在)할 수 없으며 신성 아니면 인성 둘 중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폴리나리우스가 정죄된 후 40여년 만에 이번에는 정반대로 이 이론과 상반되는 인성(人性)만을 강조하는 또 다른 극단론자가 등장한다. 한때 안디옥 부근의 한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1)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등단하면서 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안디옥 출신의 다른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을 신봉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완전한 품성(nature)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가 된 것은 여전히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적인 요소들이 신성(神性)에 부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고통도 죽음도 모르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죽으심은 오직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로만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때 신성은 오직 도덕적 연합을 취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신성이 인성과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 결과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하는 편협주의를 초래하였다.

특히 그의 제자 중의 하나인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는 이 이론에 심취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나머지 동정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 부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kos)라 불렀다. 이에 분개한 수도승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교황 켈레스틴(Celestine)에게까지 호소하여 교황도 아나스 타시우스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Nestorius(386-451)
Nestorius(386-451)

이 같은 네스토리우스의 극단론에 반대하고 나선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시릴(Cyril)이 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에게는 이러한 공격이 신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은 콘스탄티로플과 안디옥에 대해 우월감 내지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릴에게 예기치 않는 사건이 발생하여 그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와 아나스타시우스에 반대하는 환상적인 수도승 집단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몰려와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게 되자 그 책임이 시릴에게 전가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릴파와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파 사이의 긴장과 투쟁은 미궁에 빠져 결국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를 개최하게 만들었다. 데오토코스(Theotokos, 동방정교회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일컫는 말)를 지지하는 폭도들이 시릴과 교황사절 그리고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대표자들을 데리고 승리의 횃불 행진을 하는 등 과격한 행동들이 취해졌고, 3개월간의 논쟁에도 끝나지 않자 황제는 시릴과 네스토리우스를 동시에 감금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단들의 주장을 정죄하였다. 그 후 네스토리우스의 친구인 안티옥의 요한과 시릴 두 사람은 양편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문안을 작성하여 화해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444년 시릴의 사후 새로운 분쟁의 조짐이 일기 시작하였다. 시릴을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에 오른 디오스코러스((Dioscorus)는 안디옥과 콘스탄틴에 대항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지역적인 자만심이 대단한 자였으며, 시릴이 네스토리우스와 너무 타협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리고 에베소 종교회의는 네스토리우스를 충분히 파멸시키지 못했다고 공격하면서, 네스토리우스의 친구들인 시르의 데오도렛과 에뎃사의 이바스 등도 비난하였다.

그러나 디오스코러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양성의 인격적 결합(Personal union)을 너무 주장하다 보니 양성의 구분을 혼돈하여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결과 이전의 아폴 리니리우스의 주장을 재천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단성론주의(monophystism)라는 또 다른 극단주의가 파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성을 강조하는 대신 신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의해 잠식되는 결과를 나타냈다.

29253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은 열성파 * Eutyches’ Monophysite view of Christ’s nature 기독교인들의 전통이기도 하였다. 이 열성파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인성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존재로만 보기보다는 보다 더 경이롭고 놀라운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기를 항상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도원에 있는 수도승이나 금욕주의자들에게 현저하였다. 그러나 신성만의 단성론을 반대하는 극단주의자가 발생하여 신성이 인성을 제거했다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런 정황 속에 단성론파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급진적 단성론주의(strict monophystism)와 온건적 단성론주의라는 이름 아래 각자 기생하였다.

급진적 단성론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마치 꿀 한 방울이 바닷물에 흡수되는 것처럼 신성에 의해 흡수되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또 어떤 이는 역으로 말씀이 육체 속으로 사라지거나 흡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온건적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정의할 수 없는 다른 성(nature)으로 변해 버렸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 446년 단성론주의의 지도자 유티케(Eutyches, 380-456)가 나타나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유티케는 데오도시우스 2세의 아내인 유도키아(Eudocia)의 정치적 후원을 받으면서 디오스코러스의 주장을 수용하고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공격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은 처음부터 정치적 결론을 갖고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용감한 도릴레아의유세비우스(Eusstaus cf Dcrytsa) 감독이 이를 반격하며 나섰고, 446년 한 지방 종교회의에서 유티케의 주장을 부인하고, 유티케의 주장은 아다나시우스차 시릴을 배신적 행위라고 질타하였다. (*)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